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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상기도 뉴에이지 명상

관상기도 뉴에이지 명상
자료출처 http://www.newsnjoy.co.kr/news/articleView.html?idxno=29363
이차식 / 김천 덕일교회 목사

한국교회 최초로 관상 기도 찬반 포럼이 2009년 12월 14일에 대한예수교장로회(합신) 경북노회 주최로 대구 동흥교회에서 열린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다. 필자는 두 분의 전문 강사인 최승기 목사(호남신학대학교)와 림헌원 목사(예장합동 한돌교회)의 강의를 긴 시간 동안 처음부터 끝까지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그분들의 노고와 열띤 강의에 감사를 표하면서, 다만 깊은 우려가 되었던 부분들에 대해서만 참관 후기를 기술해 보고자 한다.

1. 기도의 양식이나 방식에 대한 갱신이 필요한가?

발제에서 최승기 교수는 '한국교회는 기도의 정의를 새롭게 할 필요가 있음을 전제'하고, 전형적인 관상 기도의 이론만을 주로 소개하였다. 그는 한국교회 기도의 갱신을 위하여 관상 중에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 진위 여부 분별을 위한 영성 지도자 활성화와 지도자 배출이 한국교회 기도 갱신에 공헌할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그러나 기도가 이미 하나님의 계시된 뜻을 순종하지 않으려 하거나,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또 다른 내 안에서의 어떤 음성을 듣고자 하는 도구로 사용된다면 하나님께 열납하는 기도가 될 수 있겠는가 생각한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 했을 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뜻을 묻기 위해 관상을 하지 않았다. 아브라함은 이미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즉각 순종했다.

주님의 교회에 어떠한 새로운 기도 양식이나 방식에 대하여 갱신이 필요하다면 적어도 우리 구주 예수그리스도께서 제자들과 오는 교회에게 표본으로 제시하신 기도의 양식이 있다. 주님의 이 지침은 우리가 무시해 버려도 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 지침이 없이는 하나님께 바르게 기도할 수가 없을 만큼 심히 타락하였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교회의 역사와 교회의 법으로 검증을 받아 온 개혁주의 신조들이 있다. 그 신조들을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며, 우리는 어떤 존재이며,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 위해서는 어떤 지식이 필요한지를 알아야 한다. 그러한 성경과 신조에 대한 바른 지식이 없다면 잘못된 기도를 할 수밖에 없으며, 한낱 위선적이고 기계적인 단어의 나열에 불과한 기도가 될 소지가 다분하다.

그런데 최 교수의 경우 개혁주의 전통에 서 있는 교회들이 가르치고 전수해 온 기도의 내용이나 양식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이 없었으며, 성경적인 근거 구절을 명확하게 제시하지도 않았다. 때문에 그의 주장은 혼합 종교로의 전락을 가져올 수 있다는 우려를 금할 길이 없었다.

우리 개혁주의 전통에 서 있는 교회들이 로마 가톨릭에서의 관상 기도를 배워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인가. 로마 가톨릭교회는 하나님과 마찬가지로 성모마리아와 성인들 및 천사들에게도 기도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그리스도 외에 마리아, 성인, 천사들이 중보자인 것이다. 이는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한 중보자의 필요성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반기독교적이며, 우상이라고 생각한다.

2. 지금도 직통 계시가 지속되고 있는가?

관상 기도는 로마 가톨릭, 중세 신비주의, 힌두교, 불교의 가르침과 관련이 있는 혼합 종교의 새로운 양태로 신비주의, 인본주의, 개인 및 집단 최면술이 포함된 자기 확신이라고 할 수 있다. '들음의 신비 체험' 즉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미 확정된 계시관에 있어서 심각한 혼란이 야기된다.

지금도 성경의 계시가 계속된다면 이미 확정되었다고 선언한 성경의 표준과 그 권위는 어떻게 되며, 사고와 생활은 과연 무엇을 기준으로 해야 한단 말인가. 관상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사람이 법이 되지 않겠는가. 우리는 성경의 말씀을 제켜 두고 계속 새롭게 들려오는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한단 말인가.

이러한 논리를 주장하는 집단은 이단이다. 하나님의 계시가 종결된 이후 오늘날도 침묵 속에서 들려오는 음성이 과연 하나님의 음성인지, 자아의 소리인지, 귀신의 소리인지 누가 판단할 것인가. 그것을 분별할 잣대와 능력과 권한이 누구에게 있는가.

관상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영적 지도자에게 검증받아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가르침은 로마 가톨릭에서나 주장하는 논리이며 우리 주님이나 사도들은 결코 가르친 적이 없는 교훈이다. 로마 가톨릭에서는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다는 것을 주장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하나님께서 그가 의미하는 것을 명백하게 밝혀 놓지 않으셨다고 가르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 위에 교회의 권위 있는 해석자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로마 가톨릭의 이러한 거짓된 교훈은 관상 기도를 통해서도 동일하게 강조된다. 누군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 그것이 사탄에게서 왔는지 하나님께로 왔는지,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해석하고 분간하기 위하여 영적 지도자가 필요하다고 한다. 이것은 사탄이 만들어 낸 오묘한 거짓말이다.

개혁주의의 모든 권위는 성경을 최종 권위로 간주하는 것이다. 성경이 모든 것을 판단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로마 가톨릭에서나 여호와증인은 성경이 하나님의 완전한 계시임을 부인한다. 그러므로 성경만으로 하나님의 계획을 알 수 없으니 내가 이교처럼 관조(관상)를 하여 계시를 획득하려는 것이다.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개혁주의 교회에서는 성경과 성경을 읽는 사람 사이엔 어떤 사람도 해설자로 끼어들 필요가 없는 것이다. 기도에도 영적 지도자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성경은 성경 자체로 해석된다. 성경이 하나님의 계시임을 부인할 때, 성경 위에 인간을 두게 되는 오류가 생기는 것이다.

관상 기도 옹호자들은 자기가 수십 년 동안 한 기도는 두 인격체 간의 대화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일방적인 넋두리며 자기도취적인 중얼거림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관상 기도를 함으로써 주님의 음성을 듣고 주님 안에 충만히 거한다고 한다. 그러한 자들이 최종적으로 이를 곳은 어디인가. 결국은 세계교회협의회(World Council of Churches)처럼 로마 교황청과 힌두교, 불교, 모슬렘, 유대교 등의 모든 종교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 다른 종교들도 결국은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라는 종교 다원주의로 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들은 거의가 성경의 영감 무오나 예수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부활, 승천, 재림 등을 믿지 않는다. 반면에 교황의 절대무오설이나 마리아 승천설 등은 모두 인정한다, 타 종교에도 구원이 있음을 인정하고 회교, 불교, 힌두교, 유대교와 연합을 추구한다. 세계교회협의회는 실제로 죽은 영혼들을 불러내는 초혼제를 열어 이를 성령의 강림으로 표현한 경험이 있지 않는가. 그들은 궁극적으로 로마 가톨릭과 이방 종교마저도 하나가 되는 것을 진정한 영성으로 생각한다.

이는 성경 계시의 완결성과 만족성(딤후 3:16, 17)을 부인한 까닭이며, 주께서 말씀을 가감하지 말라는 신구약 전체를 통하여 엄히 경고하는 사실을 경멸하는 데서 기인하는 것이다.

로마 가톨릭처럼 성경의 완결된 계시를 부인하면 엘리야의 세미한 음성과 바울의 다메섹 도상의 체험을 우리도 해야 한다고 주장하게 된다. 관상 기도 옹호론자들은 관상(관조)을 옹호함으로써 주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고 한다.

신사도 같은 집단도 마찬가지다. 요즘 교회들이 신사도 운동이 생겨나는 것도 그릇된 로마 가톨릭적 계시관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놀라운 것은 그러한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버젓이 신학교에서 가르치며 오히려 능력 있는 목회자로서 인정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적어도 개혁주의 신학을 지향하는 신학교에서는 신사도 운동하는 목사가 강의를 하도록 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3. 주문하듯 중언부언 반복하는 것이 기도인가?

관상은 로마 가톨릭과 이교의 혼합 종교에서 온 것이지 성경의 말씀을 기반으로 하는 성경적 가르침이 아니라는 것이다. 특히 관상 옹호론자들은 짧은 기도문을 끊임없이 반복함으로 신·인 연합의 경험으로 들어가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겠다고 한다.

성경에서의 연합은 관상 옹호론자들의 신·인 합일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요한복음 17장 11, 22, 23절에서 '하나 된다'고 할 때, 그런 연합이 되게 해 달라는 기도가 아니다. 이미 존재하는 연합이 계속 보존되도록 해 달라는 기도이다. 신인합일이 관상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생각해선 안 된다. 여기서 연합을 보전되게 하고 유지되게 하는 조건은 주님이 아버지께로 돌아가고 난 후에 온 세상에 전파될 말씀이다.

하나님의 교회 안으로 돌아와서 하나 되게 하는 본질은 하나님의 메시지, 곧 말씀이다. (요 17:16, 17) 어느 시대든 주님의 교회로 연합하게 하는 것은 주님을 통한 구원을 믿음으로 받고 신앙을 고백한 것으로 된다. 이 방법 외에 다른 연합은 거짓된 연합이다. 말씀과 성령으로의 연합만이 참된 연합이다.

성경에서 주님께서 가르치신 기도문의 첫 기원이 무엇인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다.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을 옳게 공경할 수 없는 전적 무능과 부적절함이 있음을 인정하고,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말씀과 역사와 은혜들을 높이 존경하며, 말과 행실에의 무지함, 우상숭배, 신성모독을 제거해 주실 것을 비는 것이다.

타락한 본성으로 인하여 불완전할 수밖에 없으나 구속받은 우리는 그의 이름을 거룩히 여겨야 할 의무가 있다. 관상(묵상)기도 행태는 이방 혼합 종교에서 온 심성 종교지,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의 양식은 아니다.

4. 무아지경의 묵상이 성경적 기도인가?

관상 기도 옹호자들 중에는 침묵의 기도를 최상의 기도로 언급한다. 침묵의 기도 중에 그들은 무엇을 보았는가. 다음은 리차드 포스터의 고백 중 일부다.

"하나님은 마음을 활짝 열고 여러분을 초청하신다. 그분의 집에 슬리퍼를 신고 들어간다. 식탁으로 초청하신다. 그분이 베푼 잔칫상으로 부르시고 거룩한 도서실로 인도하신다. 그리고 침실로 초대하신다."

성경이 이러한 것을 가르친 적이 있는가. 성경의 사람들은 기도할 때 말씀과 동떨어진 것을 추구한 적이 없다. 모세도 그렇고 엘리야도 마찬가지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로 언약을 파기했을 때, 여호와께서 진노하셨다. 그리고 모세에게 "그들을 진멸하고 너로 큰 나라가 되게 하겠다"(출 32:10)고 하셨다.

이 말씀을 들은 모세가 여호와께 무엇이라 간구하는가. "주의 종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주를 가리켜 그들에게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희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고 나의 허락한 이 온 땅을 너희의 자손에게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리라 하셨다"(출 32:13)는 것이다. 모세는 철저히 하나님의 언약을 붙들고 조목조목 논리적으로 간구한다. 불교처럼 자신을 비우고 무아가 되어 간구한 게 아니다. 모세의 간구를 들으신 여호와께서는 뜻을 돌이키셨다.

엘리야의 기도도 마찬가지다. 열왕기상에서 엘리야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 하나님 되심과 … 오늘날 알게 하옵소서. … 이 백성으로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저희 마음으로 돌이키게 하시는 것을 알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한다.

여기서도 엘리야의 간구는 분명한 정당성을 가지고 나아가는 것을 보게 된다. 그것은 이스라엘에 대한 여호와의 언약에 기초한 거룩한 뜻이었다. 그럴 때 하늘에서 불이 내렸고, 이를 본 모든 백성들은 엎드려 경배하며,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고 고백했다. 힌두교에서 하는 것같이 머리를 비우면서 관상적 명상의 행위는 성경의 가르침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다.

관상적 묵상(명상) 영성 운동은 성경에 근거가 없는 것이다. 그들은 마태복음 5장 3절의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는 말씀과, 시편 46장 10절에서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고 할 때 '가만히 있어'라는 말씀을 근거로 제시한다. 그러나 누가 보아도 그런 의미가 아니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무엇이든 사람이 고안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므로 배척해야 한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가르치지 않는 인간의 고안물은 자칫 우상숭배 및 신성모독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기도할 때 말씀에 집중하지 않으면 관상적 묵상이란 이스라엘 백성들이 경고를 받은 신접자들의 명상이나 또 주술 같은 중얼거림이 될 소지가 많다. 이교인 통일교에서도 자기들 나름대로 관상을 하는데, 그 방식에 있어서는 오늘날 교회들이 하는 관상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리차드 포스터 목사 자신도 이런 명상의 위험성을 경고하였다. "나는 경고하고자 한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무언으로 하나님을 묵상할 때 우리는 영적 세계에 들어가는데 가끔 초자연적인 인도를 받을 때가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아니다. 영계에는 여러 가지 다른 현상이 있는데 어떤 영적인 현상은 분명히 하나님과 협력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위험성이 있음에도, 최근 관상(관조)은 소위 영성 신학이라는 기치 아래 상당히 퍼지고 있다. "음성 듣기를 원하는 분, 자신의 사업과 가정의 문제로 고민하는 분, 자녀의 문제로 고민하는 분, 암으로 고민하는 분, 하나님의 인도를 받고 싶은 분을 초청한다"고 한다. 심지어 하나님의 음성 듣기 훈련에 참석했던 모 목사는 그 세미나에 참석한 후에 "예전에는 흑백 환상을 보았는데, 이제는 컬러 환상까지 보게 되었다고 한다."

과연 이들이 원하였던 하나님의 음성은 어떤 종류의 것이었는지 자명하다. 모두가 자기중심적인 육신의 문제요, 자기 진로의 문제며 내일의 것을 먹고 입고 걱정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이들에게 아무리 그럴듯하게 성취되었다 할지라도, 진리의 말씀에 근거하지 않는 것은 준엄한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패역한 인생이 성령께서 기록한 말씀을 신뢰하지 못하고, 자기 앞날에 대해서 뭔가 직접 알아보려고 하는 자체가 하나님 앞에서 큰 교만이며, 곧 하나님을 무당화하는 죄악이다. 진정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연습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혹 들었다면 오히려 미혹하는 영의 역사일 가능성이 다분하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일부 관상(관조) 운동을 하는 교회들과 로마 가톨릭, 불교, 힌두교, 통일교의 영성 운동이 그 방식에 있어서 거의 대동소이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호흡 기도(숨 기도), 최면술, 짧은 기도의 반복, 침묵 기도 등이 대동소이하며 다르지 않다. 이러한 운동은 종교 다원주의로 가는 초석을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경악을 금치 못할 일이다. (통일교 예배에서도 관상 기도하는 순서를 포함하고 있다). 물론 기독교 내에서 관상 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이교에도 관상이 있다고 하면서도 기독교는 그 대상이 하나님이시니 다르다고 한다.

5. 예수님도 관상을 하셨는가?

2009년 9월 한국에서 열린 레노바레 컨퍼런스 중 J 목사의 '관상 기도 강론'에서 성경 이해에 대한 다수 문제점이 발견되지만, 그 가운데서도 "예수께서 묵상을 통해 그만큼 하나님 아버지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즐기셨기에 권위의 아버지가 아니라 아바 아버지라 했다. 이것은 묵상의 신비한 영성이다. 구약의 어떤 사람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말한 사람은 없다. 그 사실을 여러분은 아는가? 예수께서 묵상을 통해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누렸으며, 하나님의 임재와 연합을 즐기셨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권위 있는 아버지 정도가 아니라 아바 아버지라 한 것은 기독교의 신비한 연합이다"고 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영원부터 아버지와 하나이셨다. 예수그리스도는 성부 하나님과 사역에 있어서, 계시에 있어서, 예배의 대상에 있어서, 권세를 공유함에 있어서, 생명을 공유함에 있어서, 미래적 부활에 있어서, 심판주로서 동등하시다. 이를 구약이 증거하며, 성부 하나님께서 증언하셨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유일한 중보자가 되셔서 성부께로 인도하시는 분이시다. 이 사실을 바로 깨닫지 못하면 예수님도 관상을 하였다는 로마 가톨릭처럼 해괴망측한 논리를 펴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이 이미 영원부터 본질적으로 하나님이신데 굳이 묵상을 하여 '아바'라는 수준에 이를 필요가 없다. 이것은 계시관은 물론 기독론과 신론까지도 문제가 된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피조물화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인성과 신성을 모두 갖추신 예수님 자체가 성자 하나님이시다.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 된 우리도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여 구원받은 이후 즉시 '아바! 아버지'라고 불렀다. 아바 아버지라고 부른 사람은 구약에는 없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만이 유일한 것도 아니다. 요지는, 아바 아버지라는 호칭은 하나님께서 우리 영혼 깊숙이 아들의 영, 정신을 부어 주심으로 부르게 됐다는 의미이지, 우리의 훈련으로나 관상으로 되어졌다는 의미와는 전혀 무관하다.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신, 즉 성령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갈 4:6) 우리도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는다"(롬 8:15)고 한다.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는 신분이 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소관이며, 인간의 노력이나 관상적 묵상기도라는 새로운 영성의 경지를 통하여서 얻어지는 산물이 아니다. 구약에서도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부자의 관계를 가지셨다. 예레미야에서 "네가 이제부터 내게 부르짖기를 나의 아버지여, 아버지는 나의 소시의 애호자시오니"라고 하였다. 19절에도 "너희는 나를 나의 아버지라 하고 떠나지 말 것이니라"고 했다. 시편 103장 13절에서도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신다"고 하시지 않는가. 구약에서도 하나님은 당신의 언약 백성들과 친밀한 부자 관계를 허락하셨다.

오히려 구약에서 경고하는 것은 "내가 아비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말 1:6)라고 하심으로 그들이 아버지라고 불러 놓고 계율주의 형식주의로 전락하는 것을 경고하신 것이다. 오늘날 '거룩한 아버지! 신실한 아버지!', 이렇게 짧은 기도를 통하여 관상을 함으로써 마치 우월한 신자가 되고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에 풍성히 들어가는 것처럼 주장한다면, 이것이야말로 말씀에서 벗어난 이상한 신비주의의 극치요, 심리주의적 내지는 체면적 자기도취인 것이다. 짧은 기도문을 여러 번 반복하면 공로가 많아지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우리는 로마 가톨릭에서 온 중세의 수사들의 관상에 참 영성이 있는 것처럼 미혹을 받아서는 안 된다. 감성을 터치하는 뜨레스 디아스(스페인어로 '3일'이라는 뜻으로 '3박 4일간의 기독교 행사'를 지칭한다. - 편집자 주), 안수하면 금이빨로 변하고 금가루가 내리고, 성령 안에서 안식하기 등의 알파 운동, 지금도 사도와 선지자를 주장하고 성경 외에 계시가 있다고 주장하며, 개인의 환상이나, 체험, 예언을 성경보다 중시하며 이단처럼 직통 계시를 보편화하여 교회 성장만을 추구하려는 신사도 운동, 이러한 것은 관상 기도 운동과 맥을 같이 한다. 그들은 개혁주의 전통에서 크게 벗어날 뿐만 아니라, 다른 거짓 교회, 거짓 이교일지라도 인정해 주면서 좋은 것을 공유하자는 혼합주의 형태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구하며 하나님의 영광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자기만족, 공리적 생각으로 교회를 다니게 된다. 이스라엘 민족이 그러한 생각으로 메시아를 기다렸다가 결국 자기들이 기대했던 이상과 달랐을 때, 저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소서라고 외친 것이나 다를 바가 없다.

마치는 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궁구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지, 그분의 언약이 무엇인지를 깨달아 가고, 기도하는 가운데서 주님이 과연 나에게 그렇게 사랑하시고 행하셨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다. 우리 기독교는 뉴에이지적 명상 같은 혼합 종교에서처럼 자기 공로로 무엇을 알아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성경 지식을 토대로 견고하게 서서 하나님과 인격적인 교통을 가지는 것이 기도이다.

지금까지 살펴보건대 관상 기도를 주창하는 자들은 성경 말씀이 아닌 지극히 자기중심적 일반 학문 이론들의 미사여구로 위장하며 그 정당성을 내세우면서 마치 기독교 전통인 것처럼 말은 하지만, 그 실체를 보면 전혀 성경적 근거가 없고 뉴에이지적인 명상을 종교 신학적 용어로 포장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판단이 된다.

고대 이교의 명상 종교가 현대적인 옷을 입고 신종 플루와 같이 변형적인 형태로 나타나 주님의 교회를 교란시키고 있는 것이 관상 기도다. 이제 우리는 주님의 교회에 침투한 관상적 묵상, 침묵, 경청 기도, 요가를 퇴치하기 위해 백신을 놓는 작업을 시작해야 할 때다.

영향력이 막강한 지도자들이 영적 분별을 상실할 때 교회가 얼마만큼 혼동과 피해를 입게 될지 심히 우려된다. 영성 신학의 대가이며 관상 기도를 통한 하나님과 연합을 강조한 토마스 머튼 신부는 결국 종교 다원주의로 빠지지 않았는가. 그의 가르침이 지극히 성경적이었다면, 그것이 성령의 역사였다면, 왜 그렇게 되었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로마 가톨릭이나 이교적인 배경이 아니라, 역사상 기독교의 법으로 통과가 되었고 오늘날에도 영적 지도자로서의 기능을 하는 성경과 개혁주의 신조들에 좀 더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고 가르쳐 지키도록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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