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상추종자들이 관상기도의 근거로 제시하는 성구는 부정확한 인용이다
관상추종자들이 관상기도의 근거로 제시하는 성구는 부정확한 인용이다
자료출처 http://blog.daum.net/kkho1105/6440
- 문맥해석이 아니므로 성령하나님의 독자적인 능력 훼손초래!
인도의 명상과 만트라(주문)식으로 짧은 내용을 반복하여 중언부언하는 것은
분명 이교도의 명상에 말씀 몇 구절을 얹혀 놓은 것으로
초월적 명상행위와 그 차이가 없는 인본주의, 신비주의, 신영지주의, 뉴에이지로서
미래로는 종교다원주의와 맥을 같이 하게 되는 비성경적 흐름을 막을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림헌원(한돌교회 담임목사, 예장합동)
한국 개신교계에 불고 있는 관상기도는 다양한 이름으로 위장하여 표현되어 각 교계에 침투 되고 있다. 관상기도는 경청기도, 침묵기도, 숨(호흡)기도, 마음기도, 향심(向心)기도 등의 이름으로 교회 안에 들어와 개신교의 신앙과 성경적 가르침의 뿌리를 은근히 뒤흔들며 미혹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데 관상기도 추종자들은‘관상기도의 성경적 근거 구절들이 많이 있다.’라고 주장하며 관상이 매우 성경적인 것인 양 위장을 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이 주장하는 그 많은 성경적 근거 중에 야심차게 내어 놓은 가장 대표적인 성경구절 몇 개를 반박한 아래 글을 보면, 그들의 성경 인용과 해석이 얼마나 황당한 인용과 해석임을 일거에 알 수 있게 되며, 관상기도의 실체가 비 성경적이며 허구라는 사실이 명백히 드러날 것이다.
사실, 이미 인터넷에 올라온 관상추종자들의 글들을 보면 관상기도의 실체는 숨겨 버린 채 온갖 미사여구로 교묘히 치장하여 덮어씌우고 뜬구름 잡는 듯한 관상의 이야기만을 늘어놓을 때 마다 그에 관련한 토론은 쉽지 않았다.
관상기도 추종자들은 자신들이 지금 행하고 있는 관상기도의 충격적인 실체의 속내를 솔직하게 공개적으로 드러내어 하지 못하고 은밀히 실행하고 있다. 그것은 뭔가 성경적이지 않음을 스스로 알고 있고 드러내 놓기에는 매우 떳떳하지 못하다는 것을 너무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젠가 때가 무르익으면 스스로 자신들의 모습을 공개하기 시작할 것이다.
다행히 관상 지지자 중에 한 명인 권명수 교수(한신대학교)가 ‘관상기도의 성경적 근거’라고 하여 용감(?)하게 인터넷에 공개 제시하므로 인터넷과 각종 지면상에서 토론을 시작할 수 있는 단초가 되어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분별력의 시야를 넓혀 줄 기회가 왔고, 따라서 관상기도의 문제점을 밝히 제시함으로 공교회가 혼란을 잠재우고 올바른 성경적 기도를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 그 유익을 얻게 되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이제 전 세계적으로 관상기도를 하는 대부분의 관상추종자들이 내세운 대표적 성경구절들의 인용이 관상기도를 억지로 정당화하려는 황당무계한 것이라는 점을 밝히며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부터 뉴스엔조이 사이트에 권명수 교수(한신대학교)가 제시한 ‘관상기도의 성경적 근거’구절의 해석에 대해서만 순서대로 비교적 짧게 반박하는 비판을 전개 하고자 한다.
1.1. 이사야 30장 15절에서 관상기도 근거 제시
“관상기도를 해야 한다는 성경적 근거는 무수히 많다. 지면 관계상 구약과 신약의 대표적 본문을 몇 개 언급하도록 한다.
영성의 분야에서 미국과 한국에서 많은 독자를 지니고 있는 유진 피터슨이 <관상적 목회자>란 책에서 목회자는 밖으로 분주하기보다는 주님 안에서 잠잠하여야 한다고 이사야서 30장 15절 ‘주 여호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돌이켜 조용히 있어야 구원을 얻을 것이요, 잠잠하고 신뢰하여야 힘을 얻을 것이거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고’란 말씀의 예를 들어 책망했다.”
1.2. 이사야 30장 15절의 해석에 대한 반박
상기와 같이 관상가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이사야30:15 에서 조용히 관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책망 받았다는 내용을 본문의 전후 문맥에서 찾아 볼 수 없다.
이사야 30:15에서 말하고자 하는 본뜻은 사람이 노력으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구원 받는 것에 대한 전초적인 뜻을 밝히 전하고 있는 것이다. 본문에서는 전적으로 하나님 앞으로 돌아와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전적인 능력에 의하여 구원을 받는다는 뜻을 전한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인위적인 해석이다. 관상가들의 이러한 해석은 성경의 영감성과 계시를 모르고 구속적인 의미를 모르기 때문에 이러한 황당무계한 해석을 하게 되었다고 본다.
관상가들의 그릇된 인용은, 여호와의 증인들처럼 “조용히 있어” “잠잠하고”등의 단어만을 몇 개 찍어내어 인용한 것으로 성경 앞뒤의 문맥을 살핀 뒤 그 문맥 속에서 그 단어의 참된 의미를 해석한 후 인용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성경해석원리 중의 하나가 문맥상의 해석임을 소홀히 하지 말 것을 정중히 주문하는 바이다.
2.1. 시편 46편 10절에서 관상기도 근거 제시
“시편은 관상기도의 성경적 근거 구절들이 많이 있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시 46:10) 여기서 ‘가만히 있어’의 영어 표현은 ‘be silent’로서, 침묵 가운데 있어서 내가 하나님 됨을 알라는 중요한 말씀이다.”
2.2. 시편 46편 10절의 해석에 대한 반박
하나님께 의지하고 안식하라는 것이지 ‘기도로 조용히 관상하라.’는 내용을 찾아 볼 수 없다. 설령 기도하라는 말이 나오면서 소리를 내지 말고 조용히 관상하라고 한다 해도 역시 성경의 전후문맥에서 그 의미를 살펴보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본문은 구원과 관계된 것이지 관상기도와 연결된 흔적이 없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라’ 하는 말은 ‘너희가 하나님의 행적의 증거를 찾아 조용히 보고 믿으라’하는 뜻이다. 곧 조용히 하라는 것은 과거 하나님이 행하신 행적들을 가만히 보고 되새김질(음미, 또는 묵상)하여 보고 하나님 됨을 믿으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행적이라하면 구약의 역사 가운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약하지만 이기게 하셔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셨던 다양한 하나님의 행적들이다.
3.1. 열왕기상 19장 1-18절에서 관상기도 근거 제시
“또한 엘리아 선지가가 하나님의 호렙 산의 동굴에서 ‘세미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열왕기상 19:1~18)고 성경은 기록했다.”
3.2. 열왕기상 19장 1-18절의 해석에 대한 반박
본문을 문맥 속에서 살펴본 뜻은 하나님은 물리적으로 나타나지 않으시고 영적으로 나타나신다는 것이다. 요란하게 외부적으로 물리현상 가운데 나타나시지 않고 영적으로 임하신다는 것이다.
‘세미하다’는 것은 내적으로 은밀하게 나타나시는 하나님, 내적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인데 ‘세미한’ 이란 것은 ‘물리적인 외부의 것들이 조용하다’는 것이지 ‘엘리야가 조용하여 관상기도를 했다’는 근거가 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구약시대 하나님의 임재 방식은 선지자가 원하여서 음성을 듣는 것이 아니고 갑자기 하나님 편에서,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로 임하신 것이다. 즉 하나님 편향적인 말씀이 임하신 것이지 우리의 기구적인 말씀이 아니었다. 우리가 분위기 만들어 놓고 기다려서 듣는 것이 아니었다. ‘네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일정한 시간과 장소를 만들고 기다려라’ 라는 것이 없었다.
4.1. 마태복음 5장 3절에서 관상기도 근거 제시
“신약에서는 예수님께서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마 5:3)라고 산상수훈의 첫 구절을 말씀하셨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마음을 비운 자가 가난한 자이고, 빈 마음에 성령께서 임하신다는 것이다. 요한복음에는 관상사상을 의미하는 구절이 많다.”
4.2. 마태복음 5장 3절의 해석에 대한 반박
빈 마음이라는 것은 탐욕, 정욕, 물욕, 등의 생각을 갖지 않고 정결한 심령으로 사는 이미 구원 받은 사람들의 모습(상태)이 어떠한가를 보여 주는 말씀이다. 자신의 부족함과 죄인임을 겸손히 선언하고 하나님의 도우시는 은혜만을 구하는 구원 받은 자로서의 겸비한 모습으로 성령을 받은 상태를 말한다(행2:28).
주님이 연합하시기 위해 들어오시는데 마치 우리가 침묵하여 도와주는 알미니안적 인본주의를 엿 볼 수 있게 하는데 이것은 성령하나님의 전능성을 훼손하는 것이고 신인 합동사역인 것처럼 꾸미어서 하나님의 독자적인 능력을 평가절하 시키는 것이 된다. 결국 인간이 성령을 받을 수 있는 조건이나 이유 방법 등을 관상이라는 채널을 통하여서만 행하는 것처럼 미혹하려는 행위는 성령의 독자적인 능력을 훼손할 뿐이다.
결국 마태복음 5장3절 말씀에서는 무슨 기도를 하는 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조용하여 관상하는 것하고는 3절 말씀이 전혀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5.1. 요한복음 14장 10절, 14장 20절, 17장 21절에서 관상기도 근거 제시
“요한복음 14장 10절, 14장 20절, 17장 21절 등에 반복적으로 나오는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라는 말씀은 관상기도를 통해 기도자가 마음을 비워 그곳에 주님을 모시고 그분이 내주하여 나의 주인이 되는 상태를 지칭하는 것이다.”
5.2. 요한복음 14장 10절, 14장 20절, 17장 21절의 해석에 대한 반박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라는 말씀을 동거동행으로 해석할 수는 있으나 그것이 관상기도를 통해서 한다는 근거는 그 어디에도 없다. 오히려 요한복음14:10과 14:20은 14장 전체 문맥 가운데서 살펴볼 때,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지켜 행하는 자에게 당신을 나타내시고 함께 하시겠다는 뜻이다.“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 14:21).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요 14:23).
“동거동행은 하나님의 임재하심으로 하나 되는 연합사상을 말한다. 제 삼자가 아닌 일자가 되는 하나님의 역사인데 그것은 하나님의 무궁한 사랑을 뜻하는 것이다.”
귀하고 복되신 말씀 사이에 관상의 의미를 끼워 넣으려는 시도 자체가 함정이다. 관상가들이 말씀의 좋은 말 사이에 관상기도의 의미를 끼워 넣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들의 관상의 상품을 멋있게 포장하여 선전하니 많은 목사와 연약한 성도들이 미혹 되고 있는 안타까운 실정이다.
6.1. 로마서 8장 26절-28절에서 관상기도 근거 제시
“로마서 8:26~28은 관상기도 하는 신자의 내면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준다.‘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도 알지 못하지만, 성령께서는 친히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하여 주십니다’(롬 8:26)는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데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해주신다는 구절로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런 성령의 활동을 도와주는 일로서 조용히 침묵 가운데 마음을 비워드리는 일인 것이다. 이것이 곧 관상기도다.”
6.2. 로마서 8장 26-28절의 해석에 대한 반박
하나님께서 탄식함은 죄 때문에 죄로 얼룩이 지어진 인간들을 안타까워하시고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후에 인간이 타락하여 하나님의 지혜의 본질을 잃어버린 지구촌의 상태를 탄식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관상기도의 의미를 끼워 삽입을 하다니 있을 수 없는 해석으로 황당한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원초적 상태를 향하여 나가시는 것이며, 최종적인 목표를 향하여 가시는 것이다. 즉 이것은 성령의 독자적 영역이다. 하나님의 불가항력적 은총인 것이다. 여기에 우리 인간의 인위적인 관상행위가 들어가겠다는 것은 인본주의요 하나님의 말씀을 훼손하는 행위가 된다.
7.1. 요한계시록 3장 20절에서 관상기도 근거 제시
“마지막으로 관상기도수련회 때마다 인용하는 구절인 요한계시록 3장 20절. ‘내가 문을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말을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로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개역) 여기서 주님께서 문을 두드리실 때 ‘문을 연다’는 것은 우리가 침묵 가운데 머무르며 다른 생각을 멀리하고 주님께로 우리의 마음의 문을 열어놓고 주님을 초대하면 내 영혼 안에 들어오시겠다.”
7.2. 요한계시록 3장 20절의 해석에 대한 반박
이 말씀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 ‘침묵’이라는 언어는 필요 없는 말이다. 주님이 연합되어 들어오시기 때문에 그 방법이 ‘침묵’이라는 것은 절대적인 방법이 아니다. 주님과의 연합의 방법이 침묵이라는 것은 관상가들의 자의적 해석이다.
결국 지금까지 관상의 성경인용과 다른 곳에서의 실체적 행위를 지켜 보건데 나중에는 ‘주님이 들어오시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침묵이 주가 되는 것’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것은 매우 위험한 해석이요 황당한 발상이다. 이러한 해석은 성경의 본질을 떠난 것이다.
주님께서 연합하기 위하여 임재 하실 때, 우리는 주님의 능력과 은혜를 믿고 심령의 문을 엶으로써 하나님과의 연합은 성취되며, 이것은 하나님의 불가항력적인 은총과 능력에 의해서 성취될 뿐 침묵이라는 인간의 방법이 게재된다는 것을 본문은 언급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과의 연합 사이에 침묵을 삽입하는 것은 권교수의 임의적인 입장일 뿐 성경의 입장이 아님은 더욱 분명해 진다.
침묵하여 마음의 입술로 깊고 크게 부르짖는 기도를 한다면 좋겠지만 관상기도의 실체를 살펴보면 그렇지 않다. 관상기도는 침묵기도에서 파생된 새로운 양태의 이방 종교의 인본주의적 기도 형태이다. 침묵만 하려들고 거기에 인도의 명상과 만트라(주문)식으로 짧은 내용을 반복하여 중언부언하는 것은 분명 이교도의 명상에 말씀 몇 구절을 얹혀 놓은 것으로 초월적 명상행위와 그 차이가 없는 인본주의, 신비주의, 신영지주의, 뉴에이지로서 미래로는 종교다원주의(모든 종교에는 각기 특별한 구원의 법이 있으니 서로의 입장을 존중하여 세계 모든 종교를 평화적으로 통일 하자는 입장)와 맥을 같이 하게 되는 비성경적 흐름을 막을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관상추종자들은 성경적 해석과 기도의 방법론을 왜곡하지 말라!
지금까지의 내용을 살펴 볼 때 권명수 교수와 관상 추종자들의 성경 인용은 성경 말씀에 대하여 일종의 기만하는 행위가 될 수 있다.
보험에 보면 좋은 말들이 다 들어가고 그 중에 허를 찌르는 하나의 가시(관상, 경청, 침묵 등)를 슬며시 넣는 경우가 있어서 훗날 사고가 발생 시에 허를 찌르는 그 가시(관상, 경청, 침묵 등)에 의해 보험금 지불에 제동이 걸리는 경우가 그러한 것이므로 꼼꼼히 그 가시(관상, 경청, 침묵 등)를 발견하여 우리 신앙의 허를 찌르는 일을 사전에 차단하여야 할 것이다.
관상가들이 미사여구로 잘 포장하여 성경 말씀 속에 살며시 끼워 들여 놓은 가시(관상, 경청, 침묵 등)를 사람들이 모를 수 있다는 것이다. 허를 찌르는 가시(관상, 경청, 침묵 등)는 그냥 놔두면 피부를 자극하여 아프게 하고 곪아 퍼지면 급기야 치명적일 수 있으므로 발견하는 즉시 더 늦지 않도록 속히 뽑아 버려야 할 것이다.
더 이상 경건한 기독교의 성경적 해석과 기도의 방법론을 왜곡하지 말고 모든 종교를 통합할 수 있고 종교의 경계를 모호하게 하여 서로 넘나들게 할 수 있는 용어인 영성과 관상이라는 용어 사용과 그 구체적인 방법과 실제 행위들을 일거에 내어다 버리길 바란다.
그리고 매스컴에 자주 오르는 일부 대형교회 유명 목사들과 추종하는 젊은 목회자들이 관상기도 관련 영성기도 행위를 이 시대의 최고의 영성신학이라고 주장하며 교회성장의 한 방법으로 목회 현장에 도입하고 있는 실정은 한국교회의 미래를 어둡게 하는 일로서 매우 우려되는 바이다.
그러므로 이에 관하여 개신교 각 교단에서는 신학적으로 다시 증명하여 보고 공교회의 정체성에 배치되거나 혼란이 야기될 경우 등에 대한 대처 방안을 교단 차원에서 제시 하여야 마땅하다고 사료 된다.
Profile
연세대학교(Ed.M)
총신신대원(M.div. Equiv.)
Fuller Theological Seminary(D.Min candidate)
전, 명지대학교 학부와 사회교육원 강사
현, 협성대학교 학부 강사
현, 성남시 건강가정지원센터 가족상담팀 면접상담원
자료출처 http://blog.daum.net/kkho1105/6440
- 문맥해석이 아니므로 성령하나님의 독자적인 능력 훼손초래!
인도의 명상과 만트라(주문)식으로 짧은 내용을 반복하여 중언부언하는 것은
분명 이교도의 명상에 말씀 몇 구절을 얹혀 놓은 것으로
초월적 명상행위와 그 차이가 없는 인본주의, 신비주의, 신영지주의, 뉴에이지로서
미래로는 종교다원주의와 맥을 같이 하게 되는 비성경적 흐름을 막을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림헌원(한돌교회 담임목사, 예장합동)
한국 개신교계에 불고 있는 관상기도는 다양한 이름으로 위장하여 표현되어 각 교계에 침투 되고 있다. 관상기도는 경청기도, 침묵기도, 숨(호흡)기도, 마음기도, 향심(向心)기도 등의 이름으로 교회 안에 들어와 개신교의 신앙과 성경적 가르침의 뿌리를 은근히 뒤흔들며 미혹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데 관상기도 추종자들은‘관상기도의 성경적 근거 구절들이 많이 있다.’라고 주장하며 관상이 매우 성경적인 것인 양 위장을 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이 주장하는 그 많은 성경적 근거 중에 야심차게 내어 놓은 가장 대표적인 성경구절 몇 개를 반박한 아래 글을 보면, 그들의 성경 인용과 해석이 얼마나 황당한 인용과 해석임을 일거에 알 수 있게 되며, 관상기도의 실체가 비 성경적이며 허구라는 사실이 명백히 드러날 것이다.
사실, 이미 인터넷에 올라온 관상추종자들의 글들을 보면 관상기도의 실체는 숨겨 버린 채 온갖 미사여구로 교묘히 치장하여 덮어씌우고 뜬구름 잡는 듯한 관상의 이야기만을 늘어놓을 때 마다 그에 관련한 토론은 쉽지 않았다.
관상기도 추종자들은 자신들이 지금 행하고 있는 관상기도의 충격적인 실체의 속내를 솔직하게 공개적으로 드러내어 하지 못하고 은밀히 실행하고 있다. 그것은 뭔가 성경적이지 않음을 스스로 알고 있고 드러내 놓기에는 매우 떳떳하지 못하다는 것을 너무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젠가 때가 무르익으면 스스로 자신들의 모습을 공개하기 시작할 것이다.
다행히 관상 지지자 중에 한 명인 권명수 교수(한신대학교)가 ‘관상기도의 성경적 근거’라고 하여 용감(?)하게 인터넷에 공개 제시하므로 인터넷과 각종 지면상에서 토론을 시작할 수 있는 단초가 되어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분별력의 시야를 넓혀 줄 기회가 왔고, 따라서 관상기도의 문제점을 밝히 제시함으로 공교회가 혼란을 잠재우고 올바른 성경적 기도를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 그 유익을 얻게 되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이제 전 세계적으로 관상기도를 하는 대부분의 관상추종자들이 내세운 대표적 성경구절들의 인용이 관상기도를 억지로 정당화하려는 황당무계한 것이라는 점을 밝히며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부터 뉴스엔조이 사이트에 권명수 교수(한신대학교)가 제시한 ‘관상기도의 성경적 근거’구절의 해석에 대해서만 순서대로 비교적 짧게 반박하는 비판을 전개 하고자 한다.
1.1. 이사야 30장 15절에서 관상기도 근거 제시
“관상기도를 해야 한다는 성경적 근거는 무수히 많다. 지면 관계상 구약과 신약의 대표적 본문을 몇 개 언급하도록 한다.
영성의 분야에서 미국과 한국에서 많은 독자를 지니고 있는 유진 피터슨이 <관상적 목회자>란 책에서 목회자는 밖으로 분주하기보다는 주님 안에서 잠잠하여야 한다고 이사야서 30장 15절 ‘주 여호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돌이켜 조용히 있어야 구원을 얻을 것이요, 잠잠하고 신뢰하여야 힘을 얻을 것이거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고’란 말씀의 예를 들어 책망했다.”
1.2. 이사야 30장 15절의 해석에 대한 반박
상기와 같이 관상가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이사야30:15 에서 조용히 관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책망 받았다는 내용을 본문의 전후 문맥에서 찾아 볼 수 없다.
이사야 30:15에서 말하고자 하는 본뜻은 사람이 노력으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구원 받는 것에 대한 전초적인 뜻을 밝히 전하고 있는 것이다. 본문에서는 전적으로 하나님 앞으로 돌아와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전적인 능력에 의하여 구원을 받는다는 뜻을 전한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인위적인 해석이다. 관상가들의 이러한 해석은 성경의 영감성과 계시를 모르고 구속적인 의미를 모르기 때문에 이러한 황당무계한 해석을 하게 되었다고 본다.
관상가들의 그릇된 인용은, 여호와의 증인들처럼 “조용히 있어” “잠잠하고”등의 단어만을 몇 개 찍어내어 인용한 것으로 성경 앞뒤의 문맥을 살핀 뒤 그 문맥 속에서 그 단어의 참된 의미를 해석한 후 인용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성경해석원리 중의 하나가 문맥상의 해석임을 소홀히 하지 말 것을 정중히 주문하는 바이다.
2.1. 시편 46편 10절에서 관상기도 근거 제시
“시편은 관상기도의 성경적 근거 구절들이 많이 있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시 46:10) 여기서 ‘가만히 있어’의 영어 표현은 ‘be silent’로서, 침묵 가운데 있어서 내가 하나님 됨을 알라는 중요한 말씀이다.”
2.2. 시편 46편 10절의 해석에 대한 반박
하나님께 의지하고 안식하라는 것이지 ‘기도로 조용히 관상하라.’는 내용을 찾아 볼 수 없다. 설령 기도하라는 말이 나오면서 소리를 내지 말고 조용히 관상하라고 한다 해도 역시 성경의 전후문맥에서 그 의미를 살펴보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본문은 구원과 관계된 것이지 관상기도와 연결된 흔적이 없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라’ 하는 말은 ‘너희가 하나님의 행적의 증거를 찾아 조용히 보고 믿으라’하는 뜻이다. 곧 조용히 하라는 것은 과거 하나님이 행하신 행적들을 가만히 보고 되새김질(음미, 또는 묵상)하여 보고 하나님 됨을 믿으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행적이라하면 구약의 역사 가운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약하지만 이기게 하셔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셨던 다양한 하나님의 행적들이다.
3.1. 열왕기상 19장 1-18절에서 관상기도 근거 제시
“또한 엘리아 선지가가 하나님의 호렙 산의 동굴에서 ‘세미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열왕기상 19:1~18)고 성경은 기록했다.”
3.2. 열왕기상 19장 1-18절의 해석에 대한 반박
본문을 문맥 속에서 살펴본 뜻은 하나님은 물리적으로 나타나지 않으시고 영적으로 나타나신다는 것이다. 요란하게 외부적으로 물리현상 가운데 나타나시지 않고 영적으로 임하신다는 것이다.
‘세미하다’는 것은 내적으로 은밀하게 나타나시는 하나님, 내적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인데 ‘세미한’ 이란 것은 ‘물리적인 외부의 것들이 조용하다’는 것이지 ‘엘리야가 조용하여 관상기도를 했다’는 근거가 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구약시대 하나님의 임재 방식은 선지자가 원하여서 음성을 듣는 것이 아니고 갑자기 하나님 편에서,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로 임하신 것이다. 즉 하나님 편향적인 말씀이 임하신 것이지 우리의 기구적인 말씀이 아니었다. 우리가 분위기 만들어 놓고 기다려서 듣는 것이 아니었다. ‘네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일정한 시간과 장소를 만들고 기다려라’ 라는 것이 없었다.
4.1. 마태복음 5장 3절에서 관상기도 근거 제시
“신약에서는 예수님께서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마 5:3)라고 산상수훈의 첫 구절을 말씀하셨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마음을 비운 자가 가난한 자이고, 빈 마음에 성령께서 임하신다는 것이다. 요한복음에는 관상사상을 의미하는 구절이 많다.”
4.2. 마태복음 5장 3절의 해석에 대한 반박
빈 마음이라는 것은 탐욕, 정욕, 물욕, 등의 생각을 갖지 않고 정결한 심령으로 사는 이미 구원 받은 사람들의 모습(상태)이 어떠한가를 보여 주는 말씀이다. 자신의 부족함과 죄인임을 겸손히 선언하고 하나님의 도우시는 은혜만을 구하는 구원 받은 자로서의 겸비한 모습으로 성령을 받은 상태를 말한다(행2:28).
주님이 연합하시기 위해 들어오시는데 마치 우리가 침묵하여 도와주는 알미니안적 인본주의를 엿 볼 수 있게 하는데 이것은 성령하나님의 전능성을 훼손하는 것이고 신인 합동사역인 것처럼 꾸미어서 하나님의 독자적인 능력을 평가절하 시키는 것이 된다. 결국 인간이 성령을 받을 수 있는 조건이나 이유 방법 등을 관상이라는 채널을 통하여서만 행하는 것처럼 미혹하려는 행위는 성령의 독자적인 능력을 훼손할 뿐이다.
결국 마태복음 5장3절 말씀에서는 무슨 기도를 하는 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조용하여 관상하는 것하고는 3절 말씀이 전혀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5.1. 요한복음 14장 10절, 14장 20절, 17장 21절에서 관상기도 근거 제시
“요한복음 14장 10절, 14장 20절, 17장 21절 등에 반복적으로 나오는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라는 말씀은 관상기도를 통해 기도자가 마음을 비워 그곳에 주님을 모시고 그분이 내주하여 나의 주인이 되는 상태를 지칭하는 것이다.”
5.2. 요한복음 14장 10절, 14장 20절, 17장 21절의 해석에 대한 반박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라는 말씀을 동거동행으로 해석할 수는 있으나 그것이 관상기도를 통해서 한다는 근거는 그 어디에도 없다. 오히려 요한복음14:10과 14:20은 14장 전체 문맥 가운데서 살펴볼 때,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지켜 행하는 자에게 당신을 나타내시고 함께 하시겠다는 뜻이다.“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 14:21).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요 14:23).
“동거동행은 하나님의 임재하심으로 하나 되는 연합사상을 말한다. 제 삼자가 아닌 일자가 되는 하나님의 역사인데 그것은 하나님의 무궁한 사랑을 뜻하는 것이다.”
귀하고 복되신 말씀 사이에 관상의 의미를 끼워 넣으려는 시도 자체가 함정이다. 관상가들이 말씀의 좋은 말 사이에 관상기도의 의미를 끼워 넣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들의 관상의 상품을 멋있게 포장하여 선전하니 많은 목사와 연약한 성도들이 미혹 되고 있는 안타까운 실정이다.
6.1. 로마서 8장 26절-28절에서 관상기도 근거 제시
“로마서 8:26~28은 관상기도 하는 신자의 내면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준다.‘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도 알지 못하지만, 성령께서는 친히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하여 주십니다’(롬 8:26)는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데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해주신다는 구절로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런 성령의 활동을 도와주는 일로서 조용히 침묵 가운데 마음을 비워드리는 일인 것이다. 이것이 곧 관상기도다.”
6.2. 로마서 8장 26-28절의 해석에 대한 반박
하나님께서 탄식함은 죄 때문에 죄로 얼룩이 지어진 인간들을 안타까워하시고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후에 인간이 타락하여 하나님의 지혜의 본질을 잃어버린 지구촌의 상태를 탄식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관상기도의 의미를 끼워 삽입을 하다니 있을 수 없는 해석으로 황당한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원초적 상태를 향하여 나가시는 것이며, 최종적인 목표를 향하여 가시는 것이다. 즉 이것은 성령의 독자적 영역이다. 하나님의 불가항력적 은총인 것이다. 여기에 우리 인간의 인위적인 관상행위가 들어가겠다는 것은 인본주의요 하나님의 말씀을 훼손하는 행위가 된다.
7.1. 요한계시록 3장 20절에서 관상기도 근거 제시
“마지막으로 관상기도수련회 때마다 인용하는 구절인 요한계시록 3장 20절. ‘내가 문을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말을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로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개역) 여기서 주님께서 문을 두드리실 때 ‘문을 연다’는 것은 우리가 침묵 가운데 머무르며 다른 생각을 멀리하고 주님께로 우리의 마음의 문을 열어놓고 주님을 초대하면 내 영혼 안에 들어오시겠다.”
7.2. 요한계시록 3장 20절의 해석에 대한 반박
이 말씀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 ‘침묵’이라는 언어는 필요 없는 말이다. 주님이 연합되어 들어오시기 때문에 그 방법이 ‘침묵’이라는 것은 절대적인 방법이 아니다. 주님과의 연합의 방법이 침묵이라는 것은 관상가들의 자의적 해석이다.
결국 지금까지 관상의 성경인용과 다른 곳에서의 실체적 행위를 지켜 보건데 나중에는 ‘주님이 들어오시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침묵이 주가 되는 것’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것은 매우 위험한 해석이요 황당한 발상이다. 이러한 해석은 성경의 본질을 떠난 것이다.
주님께서 연합하기 위하여 임재 하실 때, 우리는 주님의 능력과 은혜를 믿고 심령의 문을 엶으로써 하나님과의 연합은 성취되며, 이것은 하나님의 불가항력적인 은총과 능력에 의해서 성취될 뿐 침묵이라는 인간의 방법이 게재된다는 것을 본문은 언급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과의 연합 사이에 침묵을 삽입하는 것은 권교수의 임의적인 입장일 뿐 성경의 입장이 아님은 더욱 분명해 진다.
침묵하여 마음의 입술로 깊고 크게 부르짖는 기도를 한다면 좋겠지만 관상기도의 실체를 살펴보면 그렇지 않다. 관상기도는 침묵기도에서 파생된 새로운 양태의 이방 종교의 인본주의적 기도 형태이다. 침묵만 하려들고 거기에 인도의 명상과 만트라(주문)식으로 짧은 내용을 반복하여 중언부언하는 것은 분명 이교도의 명상에 말씀 몇 구절을 얹혀 놓은 것으로 초월적 명상행위와 그 차이가 없는 인본주의, 신비주의, 신영지주의, 뉴에이지로서 미래로는 종교다원주의(모든 종교에는 각기 특별한 구원의 법이 있으니 서로의 입장을 존중하여 세계 모든 종교를 평화적으로 통일 하자는 입장)와 맥을 같이 하게 되는 비성경적 흐름을 막을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관상추종자들은 성경적 해석과 기도의 방법론을 왜곡하지 말라!
지금까지의 내용을 살펴 볼 때 권명수 교수와 관상 추종자들의 성경 인용은 성경 말씀에 대하여 일종의 기만하는 행위가 될 수 있다.
보험에 보면 좋은 말들이 다 들어가고 그 중에 허를 찌르는 하나의 가시(관상, 경청, 침묵 등)를 슬며시 넣는 경우가 있어서 훗날 사고가 발생 시에 허를 찌르는 그 가시(관상, 경청, 침묵 등)에 의해 보험금 지불에 제동이 걸리는 경우가 그러한 것이므로 꼼꼼히 그 가시(관상, 경청, 침묵 등)를 발견하여 우리 신앙의 허를 찌르는 일을 사전에 차단하여야 할 것이다.
관상가들이 미사여구로 잘 포장하여 성경 말씀 속에 살며시 끼워 들여 놓은 가시(관상, 경청, 침묵 등)를 사람들이 모를 수 있다는 것이다. 허를 찌르는 가시(관상, 경청, 침묵 등)는 그냥 놔두면 피부를 자극하여 아프게 하고 곪아 퍼지면 급기야 치명적일 수 있으므로 발견하는 즉시 더 늦지 않도록 속히 뽑아 버려야 할 것이다.
더 이상 경건한 기독교의 성경적 해석과 기도의 방법론을 왜곡하지 말고 모든 종교를 통합할 수 있고 종교의 경계를 모호하게 하여 서로 넘나들게 할 수 있는 용어인 영성과 관상이라는 용어 사용과 그 구체적인 방법과 실제 행위들을 일거에 내어다 버리길 바란다.
그리고 매스컴에 자주 오르는 일부 대형교회 유명 목사들과 추종하는 젊은 목회자들이 관상기도 관련 영성기도 행위를 이 시대의 최고의 영성신학이라고 주장하며 교회성장의 한 방법으로 목회 현장에 도입하고 있는 실정은 한국교회의 미래를 어둡게 하는 일로서 매우 우려되는 바이다.
그러므로 이에 관하여 개신교 각 교단에서는 신학적으로 다시 증명하여 보고 공교회의 정체성에 배치되거나 혼란이 야기될 경우 등에 대한 대처 방안을 교단 차원에서 제시 하여야 마땅하다고 사료 된다.
Profile
연세대학교(Ed.M)
총신신대원(M.div. Equiv.)
Fuller Theological Seminary(D.Min candidate)
전, 명지대학교 학부와 사회교육원 강사
현, 협성대학교 학부 강사
현, 성남시 건강가정지원센터 가족상담팀 면접상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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