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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목사의 관상기도가 낳은 “비극적” 결말

이 목사의 관상기도가 낳은 “비극적” 결말
한승용 편집장    
자료출처http://www.cyworld.com/heavenlysong/379822
 
“이제 발버둥치지 않아요. 목회를 잘해야겠다는 생각도 사라졌습니다. 더 이상 원하는 것이 없어졌습니다. 관상기도를 하면서 목회에 여유가 생겼지요. 아내에게 고백합니다. 나는 지금 은퇴해도 행복하다고요. 관상기도하면서 살면 되지 뭐. 하나님 만나고 살면 되지 더 이상 무엇을 바라겠느냐고요. 제 유일한 욕심은 이런 기쁨을 후배들과 나누며 사는 것입니다.” 9월 5일자 <국민일보>에 실린 이 목사의 인터뷰 내용이다. 이 목사는 한국 교회에 관상기도라는 비성경적인 카톨릭 종교의식을 도입한 장본인이다. 카톨릭은 구원관이 정통 기독교와는 완전히 다른 무늬만 종교성을 띄고 있는 정치집단이다. 그것은 결코 ‘교회’가 아닌데도 이 목사는 그들의 신비주의적 기도의식을 가져와 교회를 오염시키고 있는 것이다.

지난 2006년 1월 24일 “한국 교회, 비성경적인 관상예배 ‘주의보’”라는 본보의 기사에서 증명했던 것처럼, 관상기도는 “타락한 영들의 세계로의 문을 여는 비성경적인 기도의식”이다. 이것을 하게 되면,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의지를 상실하게 되고, 영적인 마비증세를 겪게 되며, 하나님의 임재 안에 거한다는 거짓 속임수에 걸려 넘어져 이교도들의 명상에 빠지게 된다. 이것은 뉴에이지 명상훈련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로마카톨릭에 의해 그것과 타협한 기독교 내로 유입된 것이며, 이것을 실행하는 자들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신과 주파수를 맞추라’는 이교 경전들의 신비주의 의식을 실행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성령이 그 사람 안에 내주하시기 때문에 하나님과 주파수를 맞출 필요가 없다. 주님은 우리가 주파수를 맞춰서 찾아야 할 만큼 멀리 계신 분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리스도인이 마귀를 따르는 이교도들의 종교적 실행을 흉내낸다는 것은 참으로 비극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국민일보>에 따르면, 이 목사는 관상기도가 ‘가톨릭적인 전통에 따른 기도 형태지만 종교개혁 이전에는 가톨릭과 개신교의 구분이 무의미했기 때문에 관상기도를 굳이 가톨릭의 기도라고 할 필요는 없다’고 주장하지만, 이것은 ‘이교도’ 카톨릭의 속임수에서 깨어난 종교개혁의 의미도 모르는 ‘목사’의 무지를 드러내는 주장일 뿐이다.

위에서 인용한 인터뷰 내용을 유심히 관찰해 보라. 이 목사는 ‘목회를 잘해야겠다는 생각도 사라졌고, 더 이상 원하는 것도 없어졌고, 지금 은퇴해도 행복하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나를 비우라’는 불교도들의 주장과 매우 흡사하다 하겠다. 그는 ‘신과의 내면적 접촉’이 신앙의 모든 것인 양, 자신을 완전히 비워버린 해탈의 경지에 오른 불승처럼 ‘속이 비어버린’ 고백을 토해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의 명령을 보라. 『일에는 게으르지 말고 영 안에서 열심을 내며 주를 섬기라』(롬 12:11).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라, 흔들리지 말라, 항상 주의 일을 넘치게 하라. 이는 너희의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아니한 줄을 너희가 앎이니라』(고전 15:58). 성경이 무어라고 말씀하는가? 성경은 우리에게 가만히 있지 말고 일하라고 말씀한다. 그것도 “항상” “주의 일을” “넘치게” “하라(Do!)”고 말씀한다. 이것이 바로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그리스도인은 산 속 절간 마루에 앉아 토방의 개미나 물끄러미 바라보며 인생을 생각하는 불승처럼 살면 안 된다. 우리는 주님의 군사요, 일꾼으로서 땀 흘려 일해야 하는 것이다. 열심히 일하는 우리의 영적 안식은 관상기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과 멍에를 함께 메고 주님을 배우는 일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그러면 내가 너희에게 쉼을 주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서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가 너희 혼에 쉼을 얻으리라.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볍기 때문이라』(마 11:28).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배우며 알아갈 때, 그것이 바로 우리의 안식이요 영적 평안이 된다. 진리의 말씀을 통해 주님을 알아갈 때의 환희를 느껴본 적이 있는가? 우리의 혼이 쉬는 것은 바로 그 때인 것이다. 주님은 우리가 마음을 비우고 주님을 바라보면 쉬게 된다고 가르치시지 않는다. 그것은 마귀의 속임수이며, 기독교를 무력화시키려는 마귀의 계략에 불과한 것이다.

『속지 말라. 하나님은 우롱당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이는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둘 것이라』는 갈 6:7의 말씀처럼, 관상기도를 하면 이 목사처럼 비성경적인 열매를 거두게 되어 있다. 『너희는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게 되리니, 사람이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거둘 수 있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느니라.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으며,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마 7:16-18). 사역자가 성경적인 열매를 맺지 못하면, 그는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이미 찍혀서 불에 던져진 나무이거나, 길바닥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밟힌 소금에 불과하다. 그리스도인은 성경의 진리를 실행할 때에 존중받을 수 있는 것이다. 관상기도를 하는 사람들은 잘못된 카톨릭 의식을 버리고 성경적인 기도의 자세로 돌아와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얼굴을 돌리셨는데 혼자서 눈을 감고 앉아 있는 것처럼 우스운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배교의 늪에 빠져 카톨릭의 미혹을 그대로 실행하고 있다는 것은 진리가 없고 말씀이 없는 한국 교회가 중병을 앓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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