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상에 물들어가는 현대 치유단체들
갈수록 가관이라더니
갈수록 정말 대단하게 변하고 있다.
오늘 한 경남의 기독교신문에서 이런 글을 읽는다.
"초보자가 춤을 배울 때 처음에는 기본동작 하나 하나를 따로 읽히게 된다.
그에게는 그 하나하나가 독자적인 의미로 다가올 것이다.
그러나 그가 열과 성을 다하여 모든 기본동작을 다 익히게 되면,
그 후에는 그 모든 것을 통합하여 하나의 패턴으로 동작들을 엮어가게 된다.
그리고 얼마 후에는 이 모든 것이 물이 흐르듯 자연스럽게 하나의 연결된 동작으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
글을 쓴 기고자는 이런 것을 관상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계속해서 음악으로 비유한다.
"음악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기타를 배우는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처음에는 기타의 각 코드를 잡는 방법을 배우게 될 것이다. 이 단계의 학습자에게 있어서 기타의 각 코드는 독립된 것이다.
그는 이것이 어떻게 통합될지 쉽게 예측할 수 없다.
그저 각각의 코드를 열심히 반복해 익힐 뿐이다.
그러나 일정한 훈련을 거쳐 각각의 코드를 전부 익히게 되는 단계가 된다.
그러고 나면 자연스럽게 각 코드가 통합되어 아름다운 화성을 나타내기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반복되고 반복되다 보면, 그 전에는 음악을 틀리지 않게 연주하는 것에 모든 신경을 집중하던 것이
언제부터인가 음악 자체가 주는 아름다움에 심취해 자연스럽게 그 즐거움에 몰입해 가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
즉 기타연주의 아름다움에 취해 연주자는 자신을 잊고 그 음악에 끌려가는 것이다"
그러면서, 영성훈련의 방법으로, "초보단계에서는 독서, 묵상, 기도, 관상이 독립된 영성훈련 방법으로 다가올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충분히 익히고 나면, 그 다음 단계에서는 이 네가지가 통합되어 하나의 자연스런 흐름을 이루게 될 것이다.
그 때가 되면 렉티오 디비나는 천상의 달콤함을 가지고 관상가의 마음 속에 오랜 여운을 남기며 메아리 치게 된다"고 한다.
이런 내용이 신문에 버젓이 나오게 되는 것은 이미 현대의 영성단체들이 관상에 물들어 있다는 것을 말한다.
앞의 두 가지 비유에서 보듯이, 과연 기독교가 그런 관상을 해야하는가를 생각해 보게 하는 것들이다.
춤을 배우고 음악을 배우는 것과 말씀과 하나님을 관상하는 것이 연결이 될까?
춤에 빠져들고 음악에 빠져드는 것과 말씀에 빠져드는 것이 일치할까?
그렇게 한다고 말씀의 뜻을 온전히 알 수 있을까?
대학시절에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나는 이제부터 주석을 안보기로 했다. 후배들에게 다 나눠주었다.
나는이제부터는 오직 말씀으로만 말씀을 해석하고 설교할 것이다"
말은 참 멋지다. 그러나 과연 그렇게 하는 것이 설교자의 바른 자세인가?
성경은 특별히 한글로 된 성경은 원어의 그 의미를 충분히 드러내기에는 한계가 있다.
그리고 성경 본문이 가지고 있는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배경을 현대를 사는 우리가 제대로 이해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대개 이단의 특징은 직통계시를 주장하는데 있다.
"성경을 성경만으로 해석한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 말은 나홀로 해석한다는 말이 아니다.
우리는 칼빈보다 똑똑하지 못하고 조나단 에드워즈 보다 더 총명하지도 못하다.
우리가 그들의 신학을 논할 때도 그들이 있었기 때문에 논할 수 있는 것이다.
기고자는 계속해서 말하기를,
"독서 안에서 구하십시오. 그러면 묵상 안에서 발견할 것입니다. 기도 안에서 두드리십시오. 그러면 관상 안에서 문이 열릴 것입니다" 라고 한다.
이 말은 신문의 기고자의 말대로 마 7:7-8절을 설명한 것이라고 하니 참 가관이다.
성경을 자기 마음대로 뜯어 고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데 부족함이 있으나,
이렇게 의도적으로 성경을 뜯어고쳐서 전해서는 안될 일이다.
이어서 하는 말이, 한 침례교 목사의 에를 들어서,
"나는 내 자신을 충분히 읽고 분명히 생각합니다.
열심히 기도합니다. 그 다음에는 나 자신을 버립니다."
이건 누가 하는 말인가 하면, 선원(Zen)에서 하는 말이다.
뭘 말할까?
그들이 관상이라고 하는 말은 사실은 다 선불교와 연결된다는 말이다.
실제로 토마스머튼은 Zen과 연결된다.
나 자신을 충분히 읽는다는 말을 보면 뭔가 떠오른게 없는가?
이미 주체가 자아 중심이 되었다는 말이고,
앞에서 춤과 음악의 비유에서 하는 말의 목표가 그렇듯이 몰아지경이 되는 것을 말한다.
이런 것은 결코 기독교경건이 아니다.
스테판 차녹(Stephen Charnock)은 하나님을 관상하는 것은 천국에서 해야할 일이라고 말한다.
한국의 기독교가 이제는 갈때까지 가는 증거를 보고 있다.
개혁주의경건훈련RPT ministries
http://www.esesang91.com
정태홍목사
갈수록 정말 대단하게 변하고 있다.
오늘 한 경남의 기독교신문에서 이런 글을 읽는다.
"초보자가 춤을 배울 때 처음에는 기본동작 하나 하나를 따로 읽히게 된다.
그에게는 그 하나하나가 독자적인 의미로 다가올 것이다.
그러나 그가 열과 성을 다하여 모든 기본동작을 다 익히게 되면,
그 후에는 그 모든 것을 통합하여 하나의 패턴으로 동작들을 엮어가게 된다.
그리고 얼마 후에는 이 모든 것이 물이 흐르듯 자연스럽게 하나의 연결된 동작으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
글을 쓴 기고자는 이런 것을 관상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계속해서 음악으로 비유한다.
"음악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기타를 배우는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처음에는 기타의 각 코드를 잡는 방법을 배우게 될 것이다. 이 단계의 학습자에게 있어서 기타의 각 코드는 독립된 것이다.
그는 이것이 어떻게 통합될지 쉽게 예측할 수 없다.
그저 각각의 코드를 열심히 반복해 익힐 뿐이다.
그러나 일정한 훈련을 거쳐 각각의 코드를 전부 익히게 되는 단계가 된다.
그러고 나면 자연스럽게 각 코드가 통합되어 아름다운 화성을 나타내기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반복되고 반복되다 보면, 그 전에는 음악을 틀리지 않게 연주하는 것에 모든 신경을 집중하던 것이
언제부터인가 음악 자체가 주는 아름다움에 심취해 자연스럽게 그 즐거움에 몰입해 가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
즉 기타연주의 아름다움에 취해 연주자는 자신을 잊고 그 음악에 끌려가는 것이다"
그러면서, 영성훈련의 방법으로, "초보단계에서는 독서, 묵상, 기도, 관상이 독립된 영성훈련 방법으로 다가올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충분히 익히고 나면, 그 다음 단계에서는 이 네가지가 통합되어 하나의 자연스런 흐름을 이루게 될 것이다.
그 때가 되면 렉티오 디비나는 천상의 달콤함을 가지고 관상가의 마음 속에 오랜 여운을 남기며 메아리 치게 된다"고 한다.
이런 내용이 신문에 버젓이 나오게 되는 것은 이미 현대의 영성단체들이 관상에 물들어 있다는 것을 말한다.
앞의 두 가지 비유에서 보듯이, 과연 기독교가 그런 관상을 해야하는가를 생각해 보게 하는 것들이다.
춤을 배우고 음악을 배우는 것과 말씀과 하나님을 관상하는 것이 연결이 될까?
춤에 빠져들고 음악에 빠져드는 것과 말씀에 빠져드는 것이 일치할까?
그렇게 한다고 말씀의 뜻을 온전히 알 수 있을까?
대학시절에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나는 이제부터 주석을 안보기로 했다. 후배들에게 다 나눠주었다.
나는이제부터는 오직 말씀으로만 말씀을 해석하고 설교할 것이다"
말은 참 멋지다. 그러나 과연 그렇게 하는 것이 설교자의 바른 자세인가?
성경은 특별히 한글로 된 성경은 원어의 그 의미를 충분히 드러내기에는 한계가 있다.
그리고 성경 본문이 가지고 있는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배경을 현대를 사는 우리가 제대로 이해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대개 이단의 특징은 직통계시를 주장하는데 있다.
"성경을 성경만으로 해석한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 말은 나홀로 해석한다는 말이 아니다.
우리는 칼빈보다 똑똑하지 못하고 조나단 에드워즈 보다 더 총명하지도 못하다.
우리가 그들의 신학을 논할 때도 그들이 있었기 때문에 논할 수 있는 것이다.
기고자는 계속해서 말하기를,
"독서 안에서 구하십시오. 그러면 묵상 안에서 발견할 것입니다. 기도 안에서 두드리십시오. 그러면 관상 안에서 문이 열릴 것입니다" 라고 한다.
이 말은 신문의 기고자의 말대로 마 7:7-8절을 설명한 것이라고 하니 참 가관이다.
성경을 자기 마음대로 뜯어 고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데 부족함이 있으나,
이렇게 의도적으로 성경을 뜯어고쳐서 전해서는 안될 일이다.
이어서 하는 말이, 한 침례교 목사의 에를 들어서,
"나는 내 자신을 충분히 읽고 분명히 생각합니다.
열심히 기도합니다. 그 다음에는 나 자신을 버립니다."
이건 누가 하는 말인가 하면, 선원(Zen)에서 하는 말이다.
뭘 말할까?
그들이 관상이라고 하는 말은 사실은 다 선불교와 연결된다는 말이다.
실제로 토마스머튼은 Zen과 연결된다.
나 자신을 충분히 읽는다는 말을 보면 뭔가 떠오른게 없는가?
이미 주체가 자아 중심이 되었다는 말이고,
앞에서 춤과 음악의 비유에서 하는 말의 목표가 그렇듯이 몰아지경이 되는 것을 말한다.
이런 것은 결코 기독교경건이 아니다.
스테판 차녹(Stephen Charnock)은 하나님을 관상하는 것은 천국에서 해야할 일이라고 말한다.
한국의 기독교가 이제는 갈때까지 가는 증거를 보고 있다.
개혁주의경건훈련RPT ministries
http://www.esesang91.com
정태홍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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