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상기도란 무엇인가?
관상기도란 무엇인가?/원문호 목사
자료출처: http://www.zezadle.or.kr/jboard/?code=gesy001&id=729&p=detail
1. 관상기도의 유래는
신풀라톤의 신비주의 영향에 산물로서 신비사상은 수도원 운동의 창시자 버나드에게 계승, 신풀라톤의 사상인 플로티누스 사상은 중세 신비신학에 영양을 주고, 그는 "인간의 최고의 목적과 행복은 영혼이 그 발생 근거인 신의 경지와 합일되는 것이다." 이들은 진리, 종교의 실재인 그 이름이 불교, 알라, 하나님이든, 존재자체 그 무엇이든 마음 밖이 아닌 영혼 안에 진리의 빛을 찾는 것이다. 이 빛을 보지 못하는 것은 욕심과 어리석음 때문으로 신앙한다.
이는 이방 종교에도(불교, 힌두교, 도교, 통일교, 가톨릭, 등...) 존재한다(명상, 참선, 관조, 요가 등). 이러한 이교도 요소에 가톨릭의 관상기도 혼합을 기독교에 접목, 기도의 문화를 형성시키는 것은 우상숭배 세속기도의 문화를 따르는 것이다. 이것이 일시적인 해방이나 평안을 맛보게 할지는 몰라도, 이들에 영향으로 유래한 관상기도는 성경의 가르침과 주기도문에 반할 뿐 아니라, 이 기도의 변형인 레노바레가 교회의 변혁이나 균형을 이룬다는 것은 성경의 기도 이론에 반하는 것으로 성경이 가르치거나 유래가 아니다.
2. 관상기도(觀想祈禱) 목적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초월적인 사랑/ 황홀경)이다. 그 목표는 신비주의 신인합일(神人合一)의 신의 임재로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는 혼합영성의 이론과 실제는 어두움의 영이 위장한 역사로 진리의 분계선을 자유롭게 왕래케 함이 위험천만한 것으로 기독교에 깊숙이 숨어들고 있다.
이를 성취하는 단계는 감각과 영의 정화 단계, 조명의 단계, 일치 기도를 위한 만트라의 실행, 이는 모든 지성의 상상력과 이미지, 느낌이나 생각을 멈춘 수동 상태에서 내면에 세계로 들어가는 능동적인 체험과 치료를 위하여 부르짖는 외적 정화, 침묵상태로 들어가는 내적인 정화의 단계에 머물 때, 비로소 조명의 단계로 하나님께서 은총으로 다가오셔서 하나가 되는 일치를 경험한다.
이를 영적인 약혼·결혼이라 한다. 이것이 신인합일(神人合一)이다. 그러나 이것을 성경은 용납하지 않을 뿐 아니라, 관상기도의 방법론에 의한 성화는 회칠한 무덤에 불과한 것으로 여호와는 가증이 여기신다. 성도의 성화는 자기 죄를 자백, 모든 행실에서 점진적으로 맏아들의 형상을 본받기 위하여(롬8:29) 새사람을 입는 것이지(엡4:22-24), 관상기도 방법론으로 성화가 되거나 영화를 완성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 관상기도 도입에 대한 비판이 관상기도의 이론과 실제를 오해하고 있어서라지만 적반하장이다. 이들은 실용적인 가시현상에 관상기도의 합리화가 영·육간에 부패케 하는 길에 입문함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관상기도 신인합일(神人合一)에 연합은 신비주의요, 범신론적인 이단의 사상이요, 인간이 신을 움직이는 접신 행위로서, 하나님은 가증이 여기시고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G 교회는 촛불을 켜고 종소리를 울리면서 하나님의 임재를 기다린다. 이는 신비 경험 중독의 행위로서 참 믿음에 결과가 아니다. 이런 관상기도나 레노바레는 구원을 받은 성도에게 모범이 아닐 뿐 아니라, 종교인들이 신의 존재와 접신에서 무엇을 느껴서 안위를 얻으려는 인위적인 의도에 결과이다.
이를 실행함은 마약에 중독된 환상의 결과나 다를 바가 없어 신체 기능에 장애를 일으키듯이, 정통 신앙에 혼란은 물론 영적인 순기능에 마비를 초래한다.
3. 관상기도는
통상 신과의 내면에 접촉이 비워버린 해탈의 경지에 오른 불승처럼 속이 비어 버린 무아의 경지에서 초자연적인 사랑의 고백을 토하는 것이다. 이것이 한국교회의 세계화에 균형이 잡힌 영성인 냥, 교회의 변역을 추구, 묵상을 강조, 성결한 삶과 행복을 강조, 성령을 강조, 사회의 참여를 강조, 말씀을 강조하는 영성 등을 열거하나, 이는 미혹을 위한 떡밥의 선전문에 불과하다. 이것이 관상기도·레노바레의 운동이다.
“관상기도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다. 무엇을 요구하거나 이루어지기를 기대하는 차원의 기도보다 하나님 자체를 구하는 것을 두고 관상기도라고 말한다.”이는 내가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려고 임재를 시도, 나의 거짓 자아가 아닌 참 자아 안에 하나님의 현존을 구하는 것이니, 이런 기도로 하나님의 임재를 시도하나, 성경의 인식밖에 것으로 성경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는 경계할 누룩이다.
하나님의 사람이 기도하는 것은 상향으로 하나님께 요청하는 간구이다. 이는 쌍방의 대화이거나 음성을 듣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무엇을 그의 뜻대로 구하면 하나님이 들어주시는 약속에 따른 것이다.
사실 성도들이 간구를 많이 하나 기도에 응답을 받으셨습니까? 라는 질문에 자신이 없이 스스로 믿음이 연약한 자로 자책함이 현실이다. 이는 곧 응답을 못 받았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 상태이니 얼마나 답답하겠는가?
이는 오직 믿음으로서 기도가 아닌 직관에 의한 느낌과 환상이나 음성을 듣지 못했다는 거짓 믿음에 사로잡힌 결과이다. 이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을 전제한 약속의 조건을 믿는 기도의 삶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믿음 이전에 신비한 경험우선주의에 빠진 결과로 밖에 볼 수 없다. 이런 사람은 이방인과 같이 지극 정성은 물론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것이라 여겨서 중언부언의 기도로 하나님을 설득하려는 것이 일반이다.
이는 곧 많은 시간과 정성으로 승부를 거는 이방인의 기도나 다를 바가 없으니 응답은 불가능이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관상기도 레노바레에 매료될 수밖에 없음이 당연한 지경인지라, 한국교회가 신비주의 기도의 이론과 실제인 방법론에 송두리째 사로잡히고 있음은 기복 신앙에 길들어짐이 크게 일조하는 것임을 부인할 수 없다.
4. 관상기도 도입은
영성신학자이다. 이 신학은‘수덕신학(修德神學 : theologia ascetica)으로 가톨릭 실천신학의 한 부분인 영성(靈性)신학, 이 목표는 자유의사에 의한 신과의 일치를 도모’하는 수단으로 한국교회 중심부에 포진 도입상태가 심각하다.
이는 성경의 가르침 그 이상의 것을 추구하는 이탈성향으로 가톨릭의 관상기도 영성의 늪에 빠진 이들은 요란을 떨지 않고, 기도의 응답에 목말라하는 대상을 중심으로 적용함은 정통교회의 저항을 고려한 어두움의 영에 속한 추종자들의 교묘한 속임수 침투전략으로 관상기도의 용어 사용을 금해야 한다.
이들은 관상기도·레노바레를 기독교에 접목을 위하여 이제는 운동이나 물결의 차원에서‘각 교단과 총회, 신학교와 교회들에 도입을 위한 영성지도자 배출과 성령의 역사를 촉진하기 위한 조건으로 인위적인 침묵과 고독이 보장되는 기도의 친화적인 환경을 제공할 것을 강력히 제언을 한다.’
사실 이런 환경을 꾸미려는 것은 교회당을 관상기도의 도구로, 이 시대와 사회 환경의 변화에 따른 새로운 필요 충족을 위한 분위기 리모데링(remodeling), 하나님의 임재를 위한 신인합일이 일어나도록 사막과 같은 침묵과 고독의 장소로 만들려고 소리를 높이는 것이다.
이토록 관상기도 레노바레를 원한다면 예배당을 떠나서 관상기도의 오리지널(original) 체험을 위하여 수도사들이 들어간 사막이나 이방 종교의 성지로 입도함이 현명할 것이라 여기지만, 이 경험이 5%도 미치지 못함은 물론 30-40년 관상기도의 실패한 사례는 대중성이 없음을 입증하는 현실이다.
이들은 부르짖는 기도는 보통기도요, 관상기도는 깊이 있는 성숙한 엘리트 차별화로 인식을 시키는 것은 가톨릭 수도사의 기도나 이방 종교의 만트라 문화를 생활화시키는 것으로 주님의 교회들과 자신의 영혼이 병드는 첩경이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쉬지 말고 (아디알레입토스 : 끊임없이, 계속적으로 연속적으로, 생략 없이/부사) 기도하라 (프로스코마이 : 기도하다, 간청하다, 예배하다 / 동-현재중간태명령법2인칭복수/ 살전5:17)와 주기도문을 명령한 것은 만트라(진언) 접신케 하는 관상기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5. 관상기도의 적용은
일부 대형교회에서 도입, 중형 소형의 교회들에게 해악을 끼치고 있다. 사실 관상기도 사상의 배후는 영성신학자요, 이들은 혼합영성의 개념과 이론에 사로잡힌 성향으로 모든 국가 단체나 종교 신학이나 인물 등이 경험한 진리의(알맹이<생명>) 존재를 인정, 이방 종교에도 보편적인 구원의 사상인 교회밖에 메시아를 인정하는 종교다원화의 경향을 띈다.
그러니까 이들은 성경 66권 계시성에 차별이 없는 흐릿한 진리의식에 지배를 받는 이론과 실제인 복음의 능력을 상실한 것을 적용한다. 성경은 예수님 외에 구원이 존재하지 않는다(행4:12). 모든 종교의 다원화 인식이나, 진리의 체계를 이탈한 프로그램을 적용하는 실천신학은 성경의 계시의존사상이 깨진 것이다(딛3:10,11). 이런 유형(類)에 종교인은 시대를 초월한 계시의 영원성과 적용을 이탈, 시대적인 필요의 충족을 위한 세속적인 방법론을 만드는 것에 연연 계시의 발전을 운운하나, 성경의 계시는 발전하지 않을 뿐 아니라, 성경의 인식을 떠난 개발에 대상이 아니다. 따라서 성경은 그 어떠한 형태로 수정하거나 변경한 임의 해석한 인식에서 가감하여 적용을 해서는 안 된다.
6. 관상기도 레노바레 추종, 비호하는 자들은
신플라톤주의 영향인 이교적 신비주의 전통 기도에 견해와 관상기도의 이론적인 개념과 방법론의 집합체에 지배를 받는 것이다. 이 패러다임(paradigm)에 속하는 처신이나 발언으로 유명인사가 함께 조화되게 상관하는 것은 스스로 한 통속이라는 불명예와 오해를 자초한 자업자득인즉(고후6:14-16), 바른 처신과 복이 있는 자리에 서야 할 것이다(시1:1-6,갈1:6-10).
특히 보수신학을 주장하면서 관상기도를 지지하는 양 날개로 비상하는 이들은 두 얼굴로 신분고하 유명 인사를 불문, 그가 주장하는 보수 개혁신학의 성향은 신뢰를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이교의 기도 문화를 이롭게 하는 자로서 우군적인 적군 행위이다.
이교도의 사상과 프로그램을 도입하는 과정에서 이들은 문제의 소지에 대응책으로 출판물 홍보, 유명인사 추천과 지지, 유명한 교회 장소 선정 기자간담회, 세미나, 포럼 등을 개최 발아를 위한‘못자리판’으로 이용한다. 성도가 타락한 기도의 이론과 방법론 문화를 타협하여 도입함은 그 패러다임에 속하는 것이다.
7. 이런 기도는
자연종교(自然宗敎 : natural religion)에 속한 것으로 인간의 자연적인 이성이나 통찰에만 바탕을 둔 숭배, 계시종교에 대립되는 것으로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향한 기도의 문이 닫히고, 이방 종교의 신에게 접신하는 신비주의에 빠지게 하는 것이다.
이들이 주장하는 관상의 침묵인 명상은 신이 되어가는 신인합일(神人合一)에 경험을 위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상실한 무의식 상태를 추구, 초자연적인 사랑을 맛보는 황홀경에 체험을 한다고 해도, 이는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의 결과로서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이 아니다.
▲ 하나님은, 자연종교 행태인 사람에 의한 노력의 산물인 인본주의 기도 이론과 실제인 방법론 적용의 기법으로 만나지는 분이 아니다.
바른 기도는 성경의 인식에 초점을 맞추어 순복하는 것이다. 성경에 합당한 기도는 무아 해탈의 경지로 사랑과 깨달음을 추구하여 자신의 영혼에 신의 임재를 위한 신인합일(神人合一)에 이르는 접신행위가 아니다.
성령님은 비성경적인 관상기도나 레노바레의 사상이나 방법론으로 인도하지 않을 뿐 아니라, 이곳에 역사하는 영은 성경에 성령님이 아니다. 사실 관상기도 레노바레는 일부 특정 사제나 수도사의 기법으로 접신의 경지에 이르는 내적인 수련을 위한 상상과 암시에 따른 심리적인 자기 최면으로 말미암아 경험케 하는 것이다.
성도는 기독교의 바른 신앙과 생활을 위하여 세속적 기도 이론과 실제인 프로그램 방법인 만트라 행위는 신을 만나거나, 내 속에 신이 임재하여 내적인 정화나 수련으로 안식하는 교제의 길이 아니므로 멀리해야 한다(골2:8).
8. 이 행위의 결국은
기록된 성경 밖을 넘어간 것으로, 세계종교연합의 WCC 가톨릭 중심의 단일을 위한 기독교와 모슬렘의 회합이나, 불교와 기독교의 합치나, 미국교회협의회(NCC)/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 뉴 에이지, 접촉에 촉매로서 역할이 되는 것은, 관상기도 중심에서 친화적으로 모이는 세계교회의 다원주의 동향과 영성혼합을 지향하는 사제와 추종 목사는 진리의 분계선과 벽이 무너진 진보 성향으로 모든 종교를 사상과 행동으로 넘나드는 사람들이다. 이 패러다임에 흐름의 발전은 결국 사단의 음모와 계략에 이용되기에 최적한 분위기 이상 기류로서 음녀 바벨론으로 이끄는데 이상적인 환경 조성에 일조하는 공신이 될 것이다. 성경은 이들을 경계한다.
▲ 고린도후서 6:14-16
14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15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16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하셨느니라.
자료출처: http://www.zezadle.or.kr/jboard/?code=gesy001&id=729&p=detail
1. 관상기도의 유래는
신풀라톤의 신비주의 영향에 산물로서 신비사상은 수도원 운동의 창시자 버나드에게 계승, 신풀라톤의 사상인 플로티누스 사상은 중세 신비신학에 영양을 주고, 그는 "인간의 최고의 목적과 행복은 영혼이 그 발생 근거인 신의 경지와 합일되는 것이다." 이들은 진리, 종교의 실재인 그 이름이 불교, 알라, 하나님이든, 존재자체 그 무엇이든 마음 밖이 아닌 영혼 안에 진리의 빛을 찾는 것이다. 이 빛을 보지 못하는 것은 욕심과 어리석음 때문으로 신앙한다.
이는 이방 종교에도(불교, 힌두교, 도교, 통일교, 가톨릭, 등...) 존재한다(명상, 참선, 관조, 요가 등). 이러한 이교도 요소에 가톨릭의 관상기도 혼합을 기독교에 접목, 기도의 문화를 형성시키는 것은 우상숭배 세속기도의 문화를 따르는 것이다. 이것이 일시적인 해방이나 평안을 맛보게 할지는 몰라도, 이들에 영향으로 유래한 관상기도는 성경의 가르침과 주기도문에 반할 뿐 아니라, 이 기도의 변형인 레노바레가 교회의 변혁이나 균형을 이룬다는 것은 성경의 기도 이론에 반하는 것으로 성경이 가르치거나 유래가 아니다.
2. 관상기도(觀想祈禱) 목적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초월적인 사랑/ 황홀경)이다. 그 목표는 신비주의 신인합일(神人合一)의 신의 임재로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는 혼합영성의 이론과 실제는 어두움의 영이 위장한 역사로 진리의 분계선을 자유롭게 왕래케 함이 위험천만한 것으로 기독교에 깊숙이 숨어들고 있다.
이를 성취하는 단계는 감각과 영의 정화 단계, 조명의 단계, 일치 기도를 위한 만트라의 실행, 이는 모든 지성의 상상력과 이미지, 느낌이나 생각을 멈춘 수동 상태에서 내면에 세계로 들어가는 능동적인 체험과 치료를 위하여 부르짖는 외적 정화, 침묵상태로 들어가는 내적인 정화의 단계에 머물 때, 비로소 조명의 단계로 하나님께서 은총으로 다가오셔서 하나가 되는 일치를 경험한다.
이를 영적인 약혼·결혼이라 한다. 이것이 신인합일(神人合一)이다. 그러나 이것을 성경은 용납하지 않을 뿐 아니라, 관상기도의 방법론에 의한 성화는 회칠한 무덤에 불과한 것으로 여호와는 가증이 여기신다. 성도의 성화는 자기 죄를 자백, 모든 행실에서 점진적으로 맏아들의 형상을 본받기 위하여(롬8:29) 새사람을 입는 것이지(엡4:22-24), 관상기도 방법론으로 성화가 되거나 영화를 완성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 관상기도 도입에 대한 비판이 관상기도의 이론과 실제를 오해하고 있어서라지만 적반하장이다. 이들은 실용적인 가시현상에 관상기도의 합리화가 영·육간에 부패케 하는 길에 입문함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관상기도 신인합일(神人合一)에 연합은 신비주의요, 범신론적인 이단의 사상이요, 인간이 신을 움직이는 접신 행위로서, 하나님은 가증이 여기시고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G 교회는 촛불을 켜고 종소리를 울리면서 하나님의 임재를 기다린다. 이는 신비 경험 중독의 행위로서 참 믿음에 결과가 아니다. 이런 관상기도나 레노바레는 구원을 받은 성도에게 모범이 아닐 뿐 아니라, 종교인들이 신의 존재와 접신에서 무엇을 느껴서 안위를 얻으려는 인위적인 의도에 결과이다.
이를 실행함은 마약에 중독된 환상의 결과나 다를 바가 없어 신체 기능에 장애를 일으키듯이, 정통 신앙에 혼란은 물론 영적인 순기능에 마비를 초래한다.
3. 관상기도는
통상 신과의 내면에 접촉이 비워버린 해탈의 경지에 오른 불승처럼 속이 비어 버린 무아의 경지에서 초자연적인 사랑의 고백을 토하는 것이다. 이것이 한국교회의 세계화에 균형이 잡힌 영성인 냥, 교회의 변역을 추구, 묵상을 강조, 성결한 삶과 행복을 강조, 성령을 강조, 사회의 참여를 강조, 말씀을 강조하는 영성 등을 열거하나, 이는 미혹을 위한 떡밥의 선전문에 불과하다. 이것이 관상기도·레노바레의 운동이다.
“관상기도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다. 무엇을 요구하거나 이루어지기를 기대하는 차원의 기도보다 하나님 자체를 구하는 것을 두고 관상기도라고 말한다.”이는 내가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려고 임재를 시도, 나의 거짓 자아가 아닌 참 자아 안에 하나님의 현존을 구하는 것이니, 이런 기도로 하나님의 임재를 시도하나, 성경의 인식밖에 것으로 성경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는 경계할 누룩이다.
하나님의 사람이 기도하는 것은 상향으로 하나님께 요청하는 간구이다. 이는 쌍방의 대화이거나 음성을 듣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무엇을 그의 뜻대로 구하면 하나님이 들어주시는 약속에 따른 것이다.
사실 성도들이 간구를 많이 하나 기도에 응답을 받으셨습니까? 라는 질문에 자신이 없이 스스로 믿음이 연약한 자로 자책함이 현실이다. 이는 곧 응답을 못 받았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 상태이니 얼마나 답답하겠는가?
이는 오직 믿음으로서 기도가 아닌 직관에 의한 느낌과 환상이나 음성을 듣지 못했다는 거짓 믿음에 사로잡힌 결과이다. 이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을 전제한 약속의 조건을 믿는 기도의 삶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믿음 이전에 신비한 경험우선주의에 빠진 결과로 밖에 볼 수 없다. 이런 사람은 이방인과 같이 지극 정성은 물론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것이라 여겨서 중언부언의 기도로 하나님을 설득하려는 것이 일반이다.
이는 곧 많은 시간과 정성으로 승부를 거는 이방인의 기도나 다를 바가 없으니 응답은 불가능이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관상기도 레노바레에 매료될 수밖에 없음이 당연한 지경인지라, 한국교회가 신비주의 기도의 이론과 실제인 방법론에 송두리째 사로잡히고 있음은 기복 신앙에 길들어짐이 크게 일조하는 것임을 부인할 수 없다.
4. 관상기도 도입은
영성신학자이다. 이 신학은‘수덕신학(修德神學 : theologia ascetica)으로 가톨릭 실천신학의 한 부분인 영성(靈性)신학, 이 목표는 자유의사에 의한 신과의 일치를 도모’하는 수단으로 한국교회 중심부에 포진 도입상태가 심각하다.
이는 성경의 가르침 그 이상의 것을 추구하는 이탈성향으로 가톨릭의 관상기도 영성의 늪에 빠진 이들은 요란을 떨지 않고, 기도의 응답에 목말라하는 대상을 중심으로 적용함은 정통교회의 저항을 고려한 어두움의 영에 속한 추종자들의 교묘한 속임수 침투전략으로 관상기도의 용어 사용을 금해야 한다.
이들은 관상기도·레노바레를 기독교에 접목을 위하여 이제는 운동이나 물결의 차원에서‘각 교단과 총회, 신학교와 교회들에 도입을 위한 영성지도자 배출과 성령의 역사를 촉진하기 위한 조건으로 인위적인 침묵과 고독이 보장되는 기도의 친화적인 환경을 제공할 것을 강력히 제언을 한다.’
사실 이런 환경을 꾸미려는 것은 교회당을 관상기도의 도구로, 이 시대와 사회 환경의 변화에 따른 새로운 필요 충족을 위한 분위기 리모데링(remodeling), 하나님의 임재를 위한 신인합일이 일어나도록 사막과 같은 침묵과 고독의 장소로 만들려고 소리를 높이는 것이다.
이토록 관상기도 레노바레를 원한다면 예배당을 떠나서 관상기도의 오리지널(original) 체험을 위하여 수도사들이 들어간 사막이나 이방 종교의 성지로 입도함이 현명할 것이라 여기지만, 이 경험이 5%도 미치지 못함은 물론 30-40년 관상기도의 실패한 사례는 대중성이 없음을 입증하는 현실이다.
이들은 부르짖는 기도는 보통기도요, 관상기도는 깊이 있는 성숙한 엘리트 차별화로 인식을 시키는 것은 가톨릭 수도사의 기도나 이방 종교의 만트라 문화를 생활화시키는 것으로 주님의 교회들과 자신의 영혼이 병드는 첩경이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쉬지 말고 (아디알레입토스 : 끊임없이, 계속적으로 연속적으로, 생략 없이/부사) 기도하라 (프로스코마이 : 기도하다, 간청하다, 예배하다 / 동-현재중간태명령법2인칭복수/ 살전5:17)와 주기도문을 명령한 것은 만트라(진언) 접신케 하는 관상기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5. 관상기도의 적용은
일부 대형교회에서 도입, 중형 소형의 교회들에게 해악을 끼치고 있다. 사실 관상기도 사상의 배후는 영성신학자요, 이들은 혼합영성의 개념과 이론에 사로잡힌 성향으로 모든 국가 단체나 종교 신학이나 인물 등이 경험한 진리의(알맹이<생명>) 존재를 인정, 이방 종교에도 보편적인 구원의 사상인 교회밖에 메시아를 인정하는 종교다원화의 경향을 띈다.
그러니까 이들은 성경 66권 계시성에 차별이 없는 흐릿한 진리의식에 지배를 받는 이론과 실제인 복음의 능력을 상실한 것을 적용한다. 성경은 예수님 외에 구원이 존재하지 않는다(행4:12). 모든 종교의 다원화 인식이나, 진리의 체계를 이탈한 프로그램을 적용하는 실천신학은 성경의 계시의존사상이 깨진 것이다(딛3:10,11). 이런 유형(類)에 종교인은 시대를 초월한 계시의 영원성과 적용을 이탈, 시대적인 필요의 충족을 위한 세속적인 방법론을 만드는 것에 연연 계시의 발전을 운운하나, 성경의 계시는 발전하지 않을 뿐 아니라, 성경의 인식을 떠난 개발에 대상이 아니다. 따라서 성경은 그 어떠한 형태로 수정하거나 변경한 임의 해석한 인식에서 가감하여 적용을 해서는 안 된다.
6. 관상기도 레노바레 추종, 비호하는 자들은
신플라톤주의 영향인 이교적 신비주의 전통 기도에 견해와 관상기도의 이론적인 개념과 방법론의 집합체에 지배를 받는 것이다. 이 패러다임(paradigm)에 속하는 처신이나 발언으로 유명인사가 함께 조화되게 상관하는 것은 스스로 한 통속이라는 불명예와 오해를 자초한 자업자득인즉(고후6:14-16), 바른 처신과 복이 있는 자리에 서야 할 것이다(시1:1-6,갈1:6-10).
특히 보수신학을 주장하면서 관상기도를 지지하는 양 날개로 비상하는 이들은 두 얼굴로 신분고하 유명 인사를 불문, 그가 주장하는 보수 개혁신학의 성향은 신뢰를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이교의 기도 문화를 이롭게 하는 자로서 우군적인 적군 행위이다.
이교도의 사상과 프로그램을 도입하는 과정에서 이들은 문제의 소지에 대응책으로 출판물 홍보, 유명인사 추천과 지지, 유명한 교회 장소 선정 기자간담회, 세미나, 포럼 등을 개최 발아를 위한‘못자리판’으로 이용한다. 성도가 타락한 기도의 이론과 방법론 문화를 타협하여 도입함은 그 패러다임에 속하는 것이다.
7. 이런 기도는
자연종교(自然宗敎 : natural religion)에 속한 것으로 인간의 자연적인 이성이나 통찰에만 바탕을 둔 숭배, 계시종교에 대립되는 것으로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향한 기도의 문이 닫히고, 이방 종교의 신에게 접신하는 신비주의에 빠지게 하는 것이다.
이들이 주장하는 관상의 침묵인 명상은 신이 되어가는 신인합일(神人合一)에 경험을 위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상실한 무의식 상태를 추구, 초자연적인 사랑을 맛보는 황홀경에 체험을 한다고 해도, 이는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의 결과로서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이 아니다.
▲ 하나님은, 자연종교 행태인 사람에 의한 노력의 산물인 인본주의 기도 이론과 실제인 방법론 적용의 기법으로 만나지는 분이 아니다.
바른 기도는 성경의 인식에 초점을 맞추어 순복하는 것이다. 성경에 합당한 기도는 무아 해탈의 경지로 사랑과 깨달음을 추구하여 자신의 영혼에 신의 임재를 위한 신인합일(神人合一)에 이르는 접신행위가 아니다.
성령님은 비성경적인 관상기도나 레노바레의 사상이나 방법론으로 인도하지 않을 뿐 아니라, 이곳에 역사하는 영은 성경에 성령님이 아니다. 사실 관상기도 레노바레는 일부 특정 사제나 수도사의 기법으로 접신의 경지에 이르는 내적인 수련을 위한 상상과 암시에 따른 심리적인 자기 최면으로 말미암아 경험케 하는 것이다.
성도는 기독교의 바른 신앙과 생활을 위하여 세속적 기도 이론과 실제인 프로그램 방법인 만트라 행위는 신을 만나거나, 내 속에 신이 임재하여 내적인 정화나 수련으로 안식하는 교제의 길이 아니므로 멀리해야 한다(골2:8).
8. 이 행위의 결국은
기록된 성경 밖을 넘어간 것으로, 세계종교연합의 WCC 가톨릭 중심의 단일을 위한 기독교와 모슬렘의 회합이나, 불교와 기독교의 합치나, 미국교회협의회(NCC)/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 뉴 에이지, 접촉에 촉매로서 역할이 되는 것은, 관상기도 중심에서 친화적으로 모이는 세계교회의 다원주의 동향과 영성혼합을 지향하는 사제와 추종 목사는 진리의 분계선과 벽이 무너진 진보 성향으로 모든 종교를 사상과 행동으로 넘나드는 사람들이다. 이 패러다임에 흐름의 발전은 결국 사단의 음모와 계략에 이용되기에 최적한 분위기 이상 기류로서 음녀 바벨론으로 이끄는데 이상적인 환경 조성에 일조하는 공신이 될 것이다. 성경은 이들을 경계한다.
▲ 고린도후서 6:14-16
14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15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16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하셨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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