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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교가 한바퀴 돌아 기독교에 침투했다

도교가 한바퀴 돌아 기독교에 침투했다
자료출처: http://cafe.daum.net/paaranhome
 
도교, 라마교, 힌두교, 불교 들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명상이란, 깊은 산중이나 고적한 강변에 가부좌 틀고 앉아 - 요가 기본 자세다. - 마음의 온갖 잡념을 끊고 절대 해탈의 경지에 들어가려 채비하는 전통이다. 일명 명상이라 수련이라 부른다.
동양종교들 거의 이것을 갖고 있다. 이슬람교에도 있다.
유태교에도 명상이 있으나 그것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유태교의 명상은 말씀에 관해 생각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응답을 받자고 머리 싸매는 것 아니다.
 
동양종교들의 명상은 귀신, 신령으로 둔갑한, 또는 조상 영혼으로 가장한 잡귀들의 응답을 받자고, 그 기운을 얻자고 숨 죽이고 가만히 기다리는 종교행위다.  그것이 기독교로 들어왔다.
 
지리산에서 갠지스강에서 히말라야 산중에서 한국기독교인들이 직접 직통로로 얻어와 뿌린 것이라면 저항이 처음부터 거셌을 것을, 교묘하게도, 사단은 그것이 영국 런던에서 출발, 지구를 한바퀴 돌아, 미국을 통해 한국으로 들어오게 만들었다.
 
그리한 지 어언 25년 이상 흘렀고 지금은 전국 한국교회란 교회에서마다, '신령'해 보이기 위해, 주의 능력을 더 얻어보겠다고 QT에 전 교회적 운명을 걸고 치중하는 중이다.  심각하다.
 
내가 주님께로부터 받은 은사가 진정 주님께로부터 받아진 은사임이 분명하다면, 내가 아는 주님이 진정한 주 예수님이시다면, 내가 깨달은 한,  QT에 대해 주님께서 가증스러워 하심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다. 
 
그것은 죽은 귀신과 접신하는 그 딱 관속에다가, 죽은 귀신이 누웠던 그 통로에다 주의 성령을 초빙하는 작태와 같다.
 
주님을 매우 모독하는 일이며,  주의 성령을 꺼뜨리는 일이며, 무엇보다 경배받으셔야 할 여호와 하나님을 능멸하는 짓이다.
 
한국인들이라면, 거의 나이든 분들은 안다. 오래 전부터 이 땅의 어지간한 남성들은 도를 닦겠다는 미명으로 산중이나 절간에 들어가 가부좌 틀고 참선하는 형식을 취하는 습관이 시.절 마다 있었다는 것을. 부모묘지에서 시묘한다는 핑계로 삼년 수발하는 습관 역시 일종의 도와 명상, 귀신 접신을 위한 미팅행위이다. (** 이 글을 읽는 유교 교인들은 난리 날 것 같다. )
 
QT에 대해 비난하니, 이제는 QT는 그저 성경읽고 기도하는 것이라고 변호하는 분까지 나타났다. 유명한 교회에서 수십년 해온 것이 무어 그릇되냐 는 분들도 계시다.
 
그분들의 그런 QT 변호론에는 누락된 것이 있다. 그것은 작금의 QT가 명상이란 한 부분 - 그 시간이 극히 짧든 길든 - 을 담고 있다는 치명적 점에 대해서다.
 
하나님은 우리 머리로 생각해서 들어와지는, 깨달아지는 그런 분이 아니시고 우리가 꼭 조용해야만 나타나시는 분이 아니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그렇다 라고 가르치는 QT 과정 자체가 하나님을 한계 짓고 제한한다. 하나님을 제한하는 동시에 인간의 영혼을 확장시킨다.
 
그대 영혼을 확장시키려는 온갖 작태에 저주하기를. 하나님께서는 우리 영혼을 내막 속속들이 다 뚫으시고 아시는 분이신데 그 앞에서 자기 영혼들을 확장하고 맑게 한다니, 가증스럽기 까지 하다.
 
나의 영혼을 깨끗이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나를 거부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다. 
 
영혼을 맑히운다는 개념 자체 역시, 기독교에 없는, 동양종교 본래의 것이다.
 
QT속에는 . 그 명칭 속에는, 그 과정  - 성경읽고 묵상아닌 명상 후, 기도한다는 - 속에는 동양종교 핵심들이 들었다.  조용, 침잠, 단순, 명상, 거기에는 하나님은 안 계신다.
 
명상을 오래 하면,  인간의 영이 고도로 맑아지는 경우가 생긴다. 현대과학에서 규명한 인간의 두뇌 정수리 부분이 MT사진으로도 확인된 사실이다.  과학자들은 그 곳에서 신과의 교통이 이뤄진다 라고 추측한다.
 
본 필자 자신이 개신교에서 15년, 이후 기복신앙은 아니란 생각으로 카톨릭으로 전향 10여년, 친북신부에 지쳐서, 한 일년 중지했던 중, 예수 그리스도 외에도 구원있다는 천주교 1962년 강령은 길이 아니다는 확신을 비로소 품으며 2004년1월부터 개신교로 복귀했다. 완전히.
 
그 카톨릭 경험에서, 동일한 주문을 오래 기도하느라면 정수리 꼭대기가 엄청나게 붕 뜨고 맑아지는 기분을 본 필자도 극소수(한 두어차례) 에 걸쳐 느낀 적 있다. 당시에는 그것이 예수님의 덕분인 것으로 착각했다. 그리고 당시에는 그 체험이 신비로와 거듭 얻으려 시도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두 시간 이상 각고의 노력을 들이지 않으면 안되니 중단했다. 지금 와 판단하니, 전적 나의 교만이고 어리석음이며 독신이었다.  주님,회개하겠나이다. 용서하소서. 제발.
 
그러나, 진정으로 본 필자에게 하나님의 부르심이 들렸던 것, 그 깨달음을 주셨던 경우들은 전부 그 내 두뇌 정수리의 경험과는 전혀 다르게 왔다는 것을 이제는 판단할 수 있고 말씀드릴 수 있다. 정수리 끝부분에서의 맑아짐은 명상과 관련있는 것이다.
 
그 체험이 없었다면, QT에 관해 이렇게 선명하게 분석하기 힘들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이제사 든다.
 
즉, 인간이 노력해서 하나님을 만났다, 명상 중 성령과 교감했다는 내적 현상은 인간이 스스로를 단순화해서 생긴 결과이지 하나님으로부터 온 현상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다니엘서 어디에도 다니엘이 명상했다는 귀절은 안 나온다. 성경에서 그린 각종 예언자들, 선지자들 누구도 명상하다가 하나님을 만났다고 쓰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전격적으로 부르시고 오신다. 마치 말세처럼.
 
인간의 편에서 노력해서 하나님 체험이란 개념이 QT의 주요 개념이다.  그리고 그 주요 수단이 명상인 것이다.
 
기도와 명상은 왜 다른가. 어떻게 다른가에 대해 기독교는 보다 더 연구해야 할 것 같다. 무엇보다 가장 중대한 기준은 성경이란 점이다.
 
성경말씀에 나온 묵상은 명상과 판이하게 다르다는 사실부터 알려져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하는 일과 성령의 안내를 고요속에  받으라는 일과는 절대 다르다. 여호수아에게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생각해보라. 네가 우로 가든 좌로 가든 너와 함께 하겠다 고 말씀하셨다.  사전에 사사껀껀 하나님의 안내를 받아야만 모든 행위가 가능하다면, 우로 가든 좌로 가든 너와 함께 가겠다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사울과 다윗의 때에 하나님의 조언을 받는 행위가 선지자 또는 제사장들을 통해 이뤄졌으나 그들은 어떤 객체의 외부적 현상을 놓고 증거를 달라 하여 받은 안내들이지, 명상에 의한 내적 확신과는 거리 멀었다.  단적인 예는, 기드온이 행한, 하나님께 증거 요구, 즉 양털과 이슬을 놓고 벌였던 안내 지침에 대한 확증 일 것이다. 기드온은 표징을 요구했고 하나님께서는 표징을 통해 말씀하셨지, 내적 명상을 통해 응답하신 적 없다.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내가 주께 은혜를 얻었사오면 나와 말씀하신 이가 주 되시는 표징을 내게 보이소서" [사사기6:17]
 
그럼 생각해보자. 왜 하나님께서는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에게조차, -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영력이 월등했을 - 내적 명상으로 말씀하시지 않고 표징으로 안내하셨던가. 이유는, 인간의 영혼 자체가 타락하여 내적으로 오는 감흥이 하나님의 것인지, 인간 자체 발광인지, 또는 귀신 잡령의 혼잡현상인지 분간할 능력이 없다는 데 있다.
 
예수님께서는 재림주로 오실 때, 그것은 번개처럼 알려진다 라고 말씀하셨다. 번개는 아무도 거부하거나 부인하지 못하는 외적현상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심 또한 그렇다. 너무나 명석하여 이것이 인간 것인지 하나님 것인지 혼돈스럽지 않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분들은 제 말에 동의할 것이다.  주님의 말씀하심은 너무나 선명하여 일부러 인간이 조용한 무드를 조성할 필요조차 없다. 
 
나에게 들리신 하나님의 부르심, 말씀하심은, 본 필자가 금요일 철야기도 준비로 예배실이 소란하던 때, 장의자들을 교회분들이 정렬하는 소란스러움 속에서 한참 남은 집회시작을 기다리며 이리저리  왔다갔다하던 필자에게 갑자기 들려오신 말씀이셨다. 너무나 선명하게 내 이름을 부르셨으므로, 한번도 과거에 들어본 적 없음에도, 본 필자는 당장 거기 대꾸했고 눈물을 쏟으며 대답드리지 않을 수가 없는 그렇도록 명확하신 음성이셨다.
 
그리고 당시는 본 필자의 신앙이 그리 무르익었던 때도 아니며 그야말로 초짜이던 때였다. 그 의미를 진작 알았더라면, 오래 헤매지 않았을 텐데. 눈물을 쏟으며 회개하는 중이다. 단언컨대 명상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적, 또는 그런 명증한 깨달음을 받은 일은 내 신앙생애 단 한번도 없다.
 
물론 인간에게마다 특성이 다르므로, 다르게 하나님께서는 부르시고 오실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성경에는 명상에 관하여는 - 특히 동양적 명상에 관하여 - 한 군데도 나온 것 없다는 데 주목하자.
 
거듭 말한다. 귀신이 살던 귀신틀집 모양을 만들어놓고, 간판 까지도 그 비슷하게 걸어놓고 - 명상, QT, 얼마나 닮은 꼴인가. -  성경 퍼놓고 성령을 부르는 짓은 하나님을 우롱하는 짓이다. 예수님에의 회롱은 로마군인들에 의해 2천년전 이뤄졌으면 되었다. 오늘날 한국교회들까지 거기 보태야 하겠는가.
 
"그들이 만일 이같이 말하기를 우리에게로 올라오라 하면 우리가 올라갈 것은 여호와께서 그들을 우리 손에 붙이셨음이니 이것이 우리에게 표징이 되리라 하고 " [삼상14:10]
 
QT는 도교가 한바퀴 돌아 - 모양과 간판을 바꿔 단 채 - 기독교에 침투한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요구할 것은 '표징'이지, 초혼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은총의 표식은 징조와 표징이다. 각각 14번, 67번 등장한다. [킹제임스버젼, token & sign ] 명상도 아닌 묵상이란 단어로 단 6번 나온 정도와 비교해보시기 바란다.
 
"히스기야가 이사야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를 낫게 하시고 삼일만에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게 하실 무슨 징조가 있나이까"[열하20:8]
 
"은총의 표징을 내게 보이소서. 그러면 나를 미워하는 저희가 보고 부끄러워하오리니 여호와여 주는 나를 돕고 위로하심이니이다." [시편86:17]
 
"여호와께서 또 아하스에게 일러 가라사대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한 징조를 구하되 깊은데서든지 높은데서든지 구하라. 아하스가 가로되 나는 구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나는 여호와를 시험치 아니하겠나이다 한지라. 이사야가 가로되 다윗의 집이여 청컨대 들을찌어다. 너희가 사람을 괴롭게 하고 그것을 작은 일로 여겨서 또 나의 하나님을 괴로우시게 하려느냐.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사야7:14]
 
그러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명상의 결과로 오신 것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간을 불쌍히 여겨 친히 살아계신 '징조'로 주신 것이다. 
 
QT를 죽여라. 그래야 한국기독교가 살 것이다. 큐티, 명상, 수련 다 한줄기에서 나온 것이다.  한바퀴 돌아서 미국, 영국을 통해 건너온 것과 한국 지리산, 계롱산에서 자란 것 차이일 뿐이다. 큐티라는 이름부터 이미 느낌이 안 좋다. 동양종교를 연상케 하므로. 무어라, 그 변호자들이 우긴들, 그 뒤켠에는 동양종교 신비가 어른거린다.
 
성경을 읽고 기도하기, 특히 회개기도하기로 돌아가자. 명상은 하나님과 마주 앉겠다는 일대일 자세고, 기도는 하나님 앞에 납작 엎드리겠다는 자세 - 먼지같은 나 자신과 만물의 주인되신 주 하나님 - 다. 겸손하고 낮아지자.
 
2010.2.05. 파아란 한은경.
http://cafe.daum.net/paaranho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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