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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의 공공성 회복을 위한 모색

한국 교회의 공공성 회복을 위한 모색


한국 교회의 공공성 회복을 위한 모색  **교회/신앙   
2008. 8. 25.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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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의 공공성 회복을 위한 모색

정 재 영 교수

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 종교사회학

1. 들어가는 말

 

최근 우리 사회에서 개신교가 주목의 대상이 되고 있다. 작년 아프가니스탄 피랍 사태 이후 1년 가까운 시간 동안 그 어떤 때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의 이목이 개신교에 집중되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일들이 개신교의 긍정적인 면보다는 부정적인 면이 부각되어 관심의 초점이 된 것은 매우 불행한 일이다. 이렇게 개신교가 부정적으로 비쳐진 까닭은 최근에 논란이 되었던 일련의 일들에서 볼 때 개신교의 모습이 우리 사회의 책임 있는 일원이라기보다는 오로지 자신들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하나의 이익집단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물론 이와 관련해서는 일부 오해도 있고, 개신교 쪽에서 보다 적극적으로 해명하지 못한 데서 오는 이해의 부족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든 우리 사회에서 개신교의 이미지가 부정적으로 각인되고 있다면, 개신교에 대한 공신력은 약화될 수밖에 없다. 2005년 인구주택 총조사 결과 개신교 인구가 감소한 것에 대해 많은 우려가 있었지만, 보다 큰 문제는 수의 감소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구성원으로서의 개신교가 다른 구성원으로부터 신뢰를 잃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개신교의 공신력 약화는 교회의 활동이 공공성을 상실한 데에 기인한다. 한국 교회가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공공의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고 책임 있는 역할을 감당하기보다는 교세 확장과 교회 건물 건축, 교권 유지 등 세상과는 벽을 쌓고 자기들만의 왕국을 건설하는 데에만 급급하고 있다는 것이다. 전래 초기 한국 개신교는 사회 부조리를 혁파하고 새로운 가치 질서를 제시하는 선구자의 역할을 감당했지만, 오늘날의 개신교는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일 뿐, 공공의 선이나 선한 사회를 이루고자 하는 노력은 거의 찾아보기 힘든 실정이다.

이 글은 이러한 문제의식에 터하여 교회 공공성 회복을 모색하기 위한 시도를 한다. 이를 위해, 교회 공동체에서 공공성의 의미에 대하여 살펴보고, 종교사회학의 중심 주제인 세속화와 관련하여 교회 공공성의 위상 변화에 대하여 논의한 후에 요즘 사회과학계에서 논의되고 있는 시민사회와 관련하여 한국교회의 공공성 회복을 위한 구체적인 방안에 대하여 논의하고자 한다.

 

2. 교회 공동체의 공공성

 

흔히 교회에 대하여 ‘공동체’라는 말을 사용한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의 공동체를 뜻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대개 공동체라는 말 그대로 ‘공통의 몸’을 가진 ‘하나의 지체’라는 뜻으로 말한다. 교회 구성원들을 한 가족으로 표현하듯이 가족과 같은 존재로 여기는 것이다. 실제로 한국 사람들은 가장 이상적인 공동체 모형을 가족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래서 친근하고 화목한 분위기를 “가족적인 분위기”라고 표현한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는 공동체 개념의 아주 작은 면밖에 보여주지 못한다. 또한 우리 사회의 가족이 그리 바람직한 모델이 된다고 보기도 어렵다. 교회를 신앙공동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큰 범주에서 같은 기독교 신앙일 뿐 교단과 교파 또는 진보, 보수 노선을 따라 첨예한 갈등을 드러내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사회의 흐름 속에 묻힌 오늘날 교회들의 모습은 성서에 나타난 초대 교회 시대에 기독교인들이 경험하였던 교회의 공동체 요소를 상실하고 있다는 지적이 보편화되고 있다. 오늘날의 한국 교회는 근대화의 물결을 타고서 폭발력을 가진 성장을 이룬 반면에 교회의 대형화 추세에 따른 내부 빈곤감이 이전에 비해 증폭되고 있다. 교회의 생활이 질보다는 수와 양에 치중하여 교인 수 확장, 건물 확대, 재정 확대에 치중을 하면서, 한국 교회들은 공동체로서의 교회관과 자기 정체성을 유지하지 못함으로써 교회의 공동체성이 점점 희박해지는 실정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것은 목적과 수단이 전도되어 교회가 본연의 역할을 하지 못함으로써, 자체 집단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조차 스스로의 권위를 인정받지 못하고 또한 영향력을 행사하지도 못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교회는 어떠한 공동체가 되어야 하는가? 현대의 공동체 이론가들은 공동체를 물리 차원의 조건과 관계없이 사회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인간관계의 망으로 인식한다. 이러한 관점에 따라서 공동체 개념은 상호 신뢰를 바탕으로 공동의 의식과 공동의 생활양식을 통해 결속감이 증대된 사회 집단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러한 공동체는 특히 서로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도덕 집단을 뜻한다. 일찍이 뒤르케임(Emile Durkheim)은, 교회라고 부르는 것은 공통된 이념들을 가지고 공동의 의식들을 수행하는 하나의 종교 공동체를 뜻한다고 말하였다. 교회는 성직자들의 집단이 아니라 단일한 믿음을 가지고 모든 믿는 이들에 의하여 구성되는 ‘도덕 공동체’인 것이다.

이러한 뜻에서 공동체는 단순히 특정 공간에 개인들이 모여 있다는 뜻이 아니라 구성원들이 사회성으로 서로 의존하고 토론과 의사 결정에 함께 참여하는 집단이다. 또한 집단의 목적을 위해 개인이 희생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이 주체가 되어, 선한 것으로 공유되는 ‘실천’을 함께 하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집단을 가리킨다. 이러한 공동체는 공동체 밖에 있는 사람들에 대하여 문을 닫고 자신들의 이익만을 챙기는 이기주의 공동체가 아니라 서로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공동체 밖으로 표출할 수 있는 실천도덕의 공동체인 것이다.

공동체가 외부와는 단절된 채, 안으로의 결속에만 집중한다면, 일종의 동류 집단이라고 할 수 있는 공동체는 ‘끼리끼리’의 집단으로 전락하고 변질될 것이다. 곧 공공성과는 아무 관계가 없이 공동체는 게토화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많은 연구자들은 영성이 봉사 및 지원 활동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면 영성이 우리 사회의 도전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고 한다. 영성이 개인 의 사사로운 공간 속으로 깊이 은거할 것을 우려하는 것이다. 종교사회학자인 로버트 우스노우는 이러한 영성은 진정한 영성이 아니라고 말한다. 확실히 한 사람의 신앙은 개인의 것이고, 신념의 문제이고, 그 사람의 기본 인생관의 일부이지만, 신앙이 개인의 것이고 사사로운 것이라고 말할 때 우리는 믿음이 지닌 공공의 차원을 무시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 공동체 안에서 훈련된 기독교인이라면 교회 밖에서도 일반인들과는 다른 도덕성 곧 더 엄격한 도덕 기준에 따라 일반인들의 삶의 양식과는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한다. 뿐만 아니라 사회를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야 할 삶의 무대로 여기며 자신의 신앙을 공공 영역에서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 자기 자신의 이익을 구하거나 자기 가족의 이익을 구하는 것이 아니고 자신과 가족의 울타리를 넘어서 공공의 문제에 관심을 갖고 토론하며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참다운 그리스도인은 참 이웃, 참 시민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교회가 이러한 기독 시민을 길러낼 수 있을 때에라야 교회는 현대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조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3. 세속화 시대와 교회 공공성

 

(1) 세속화와 교회 공공성의 쇠퇴

교회의 공공성은 자신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사회 수준에서 표출되기 어려운 구조적 상황에 처해 있다. 이러한 교회 공공성의 약화는 종교의 세속화와 맞물려 일어난 현상으로 이해된다. 사회학자들은 종교와 관련하여 근대 이후에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거대하고 근본적인 변화를 세속화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세속화에 대한 이해는 여전히 모호하게 남아 있으며 세속화에 대한 논쟁 또한 매우 다양하다. 특히 기독교계에서는 좁은 의미로 ‘교회의 세속화’ 곧 교회가 세속의 가치에 매몰되어 교회 자체가 병들고 심지어는 부패했다고까지 표현되는 하나의 병리 현상으로 이해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것은 세속화 개념의 한쪽 면만 보는 데서 오는 오해라고 할 수 있다.

종교사회학의 관점에서 세속화는 “종교가 신앙과 의식 그리고 인간의 일상생활에 대한 영향이라는 측면에서 쇠퇴하고 있는가”의 문제와 관련된다. 현대 종교사회학에서 처음으로 세속화를 중심 논제로 제시한 윌슨은 세속화를 “종교적 사고, 의식 및 기구들이 사회적 의미와 중요성을 잃게 되는 과정”으로 정의하면서 종교의 쇠퇴를 주장했다. 이러한 세속화 과정의 마지막은 무종교 사회가 될 것을 암시한다. 베버의 영향을 받아 세속화에 대하여 체계적으로 폭넓게 사회학적인 분석을 시도한 피터 버거는 베버의 ‘세계의 탈주술화’ 개념을 적용하여 프로테스탄티즘과 세속화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버거는 세속화를 “사회 및 문화의 어떤 영역이 종교의 제도와 상징체계의 지배로부터 벗어나는 과정”이라고 정의한다. 버거는 그의 긴 논의를 통하여 세속화가 세계사 속에서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임을 주장했다.

버거에 의하면 세속화는 종교 다원주의적 상황을 낳는데, 종교 다원주의란 다양한 세계관이 공존하는 문화 상황을 뜻한다. 현대 사회에서의 개인들은 다원적인 세계, 서로 경쟁하고 가끔은 서로 모순되는 설득력의 구조들 사이를 오가며 살고 있으며, 이들 각각의 설득력 구조는 그의 다른 설득력 구조들과 어쩔 수 없이 공존해 있다는 사실 때문에 그 영향력이 약화된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다원주의 상황에서는 그 어떤 견해도 사람들에게 절대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경쟁적인 세계관들이 상대화되고 독점적이던 종교적 전통이 탈독점화되는 상황이라고 말할 수 있다. 특히 종교 다원주의 상황에서 서로 다른 종교 집단들은 모두 국가에 의해서 공인됨과 아울러 서로 배타적인 종교 집단들이 공존하는 가운데 자유로운 경쟁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맞는다.

다원주의 상황이 만들어낸 결과 중의 하나는 종교의 사사화(私事化, privatization) 곧 과거에 공공 영역에서 중요성을 가졌던 종교가 이제는 개인의 사적인 영역으로 물러나는 상황이다. 버거는 현대 사회에서 종교는 일상적인 사회생활의 사적인 영역에 위치해 있으며, 현대 종교의 본질적인 특징의 하나는 개인주의화라고 말한다. 이것은 사적인 영역으로 물러난 종교가 개인이나 핵가족의 “선택”이나 “선호”의 문제가 되었으며 결과적으로 공통적이고 구속력 있는 성격을 사실상 박탈당해 버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사적인 종교성은, 종교를 받아들이는 개개인들에게 아무리 실재적이라 할지라도, 종교의 전통적인 과업 곧 모든 사람들에게 구속력을 행사하여 모든 사회생활에 궁극적 의미를 부여하고 그럼으로써 공통된 세계를 구성해야 한다는 과업을 더 이상 수행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버거의 입장과 유사하지만 그보다 훨씬 광범위하게 종교 문제를 다룬 루크만 역시 사사화에 대하여 깊이 있는 분석을 내놓았다. 루크만은 종교 제도의 전문화가 다른 제도 영역들의 전문화와 더불어 종교를 점차 객관성이 없는 사사로운 실체로 변형시키는 발전이 시작되었다고 본다. 그리하여 공공의 영역에서 종교는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우스노우는, 이러한 상황은 종교 단체들이 개인 신앙의 순전히 사적인 측면에 대한 강조를 강화한 것과 많은 관계가 있다고 말한다. 이미 1960년대부터 드러나기 시작한 미국 교회의 문제는 교회 지도자들이 신앙을 시민의 참여에 연결시키기보다는 사람들이 행복하게 느끼고 현대의 생활에 정서적으로 적응하는 데 관심을 가지면서 신앙을 일종의 치료 요법으로 여기는 경향이었다는 것이다.

 

 

(2) 탈세속화와 공공 교회의 등장

근대 이후 국교 폐지로 교회의 영향력이 감소하고 교회 출석 빈도, 성직자 수가 감소하여 세속화는 일면 사실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세속화의 관점에서 보는 종교에 대한 부정적 견해와 달리, 서구 사회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것은 세속적 이념들이 종교적 이념들을 대치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급속한 사회 변동의 시대 속에서 종교의 성격이 변형되고 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피터 버거조차 최근에 세속화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재고하는 글을 발표한 바 있다. 또한 현대 사회에서 종교의 사회적 중요성이 약화되고 신앙의 개인주의화가 중요한 특징으로 자리 잡았지만, 모든 사회 종교 현상이 사사화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다.

이른바 ‘탈세속화’를 주장하는 일련의 학자들은 세속화론의 단선적 명제가 가지는 한계와 문제를 제기한다. 탈세속화 테제는 근대화와 세속화를 동류 현상이라고 여겼던 모던적 개념에 대항해 세속화 현상과 더불어 반세속화 현상 또는 재신성화 현상이 일어나는 것에 주목한다. 새로운 세속화론자에 속하는 카사노바는 세속화에 대한 현대 이론에서 공격할 수 없는 핵심은 “분화 논제와 종교적 제도와 규범으로부터 세속적인 영역의 해방”이라고 주장하고, 종교는 근대화 과정에서 사라질 운명에 있다는 생각을 거부한다.

카사노바의 공헌은 현대 사회에서 종교의 사사화에 대한 그의 주장이다. 카사노바의 핵심 요지는 “근대성의 구조를 규정하는 구조적 흐름인 제도적 분화와 달리, 종교의 사사화는 역사적인 선택 문제, 확실히 ‘선호된 선택’이자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지 선택일 뿐”이라는 주장이다. 그는 최근 몇 년 동안 많은 국가들에서 사사화라는 역사적 선택을 거부하는 “공공 종교”의 등장을 목격했으며, “우리는 현대 세계에서 종교의 ‘탈사사화’를 목격하고 있다.”고 말한다. 또한 현대 사회의 두 주요 체계인 국가와 시장의 전통적인 생활 세계로의 침투의 증가와 함께 종교의 탈사사화는 식민화로부터 생활 세계를 방어하고 외재적인 전통 도덕규범과 관계없이 자체의 내재적인 기능주의적인 규범에 따라서 기능 하려는 국가와 시장의 주장에 문제를 제기하고 경쟁하기 위해 필수적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바로 종교의 공공성과 관련되는 것으로 뒤르케임으로부터 파아슨스와 벨라를 거쳐 내려오는 종교 사회학의 주요 주제이다. 일찍이 뒤르케임이 종교의 근원을 사회라고 본 것과 같이, 한 사람의 종교 신념은 전부 개인의 것이고 사사로운 것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영성은 개인 수준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와 사회 수준에서 발현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벨라는 이러한 개인주의 종교의 출현과 확산에 대해 우려하면서 시민 종교를 강조한다. 시민 종교는 시민 개인이 사사롭게 가지고 있는 종교 신앙과는 다르며 시민들의 심성 속에 존재하는 궁극의 의미와 자체 인식의 내용에 관련되어 있다. 그러면서도 시민 종교는 정치 종교와 같이 국가가 행사하는 종교 차원의 역할을 넘어설 수 있는 초월 가능성을 자체 속에 담고 있다.

우스노우는 ‘공공’이라는 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공공이라는 말은 첫째로, 개방 또는 접근 가능성을 의미한다. 종교의 맥락에서 어떤 것이 공공성을 갖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그것이 개인의 주관 의식 속에 묻혀 있기보다는 열려진 공간에 나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공공이라는 말의 두 번째 의미는 공존하는 것이다. 만일 어떤 것이 사람들이나 집합성과 관련이 된다면, 그것은 또한 개방되어 있고 접근 가능한 것이다. 공공이라는 말은 셋째로, 우리가 어린이에게는 기대하지 않는 성인의 책임감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공공 종교를 말하는 것은 개인들이 사사로운 영성으로 빠져나가지 않고, 사회의 선을 위해 책임감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과, 그들의 집합 가치에 대한 성스럽고 초월의 모든 것에 대해 공공 영역 자체가 개인들 사이에 책임감이라는 의미를 강화해야만 한다는 것을 제안하는 것이다.

‘공공 교회'라는 말을 처음으로 사용한 마틴 마티는, 교회가 기독교 전통으로부터 공공의 이익을 명료화하고 이 공익에 대한 관심을 지향하는 공익 우선의 신앙에 공헌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그의 논의는 한편으로 개인과 정부 사이, 다른 한편으로는 개인과 대중 사이를 중재하는 제도 없이는 민주주의가 제 역할을 할 수 없다고 염려했던 토크빌의 정신 안에서 교회의 역할을 분석하고 있다. 교회가 세속화된 사회에서 종교 권위를 회복하려면 공동체를 통해 교회 구성원들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공공의 참여에 대한 의식을 형성해야 할 것이다. 종교의 공공성은 종교가 시민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일종의 사회 자본이 되기도 한다. 종교 모임은 다른 시민 조직에 참여하는데 필요한 대인 기술을 얻고, 직업, 후원 집단, 공공 행사에 절대 필요한 정보가 의존하는 연결망을 발전시키면서 사람들이 서로 교섭하고 신뢰하는 것을 배우는 장소가 되기 때문이다.

 

(3) 시민사회에서 교회 공공성의 회복

우스노우는 종교가 완전히 사사화되어서 사람들이 더 이상 누구를 신뢰할 수 있는지 확신하지 못할 때, 교회 공동체 안에서의 사회 교섭을 통해 돌파구를 마련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곧 공동체주의 운동의 지지자들과 자원 결사체의 지도자들이 했던 것처럼 사회 교섭을 더 많이 증진시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사람들이 이 공동체 환경에서 서로 교섭할 때 대인 신뢰를 발전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신뢰감은 사람들에게 그들의 관점에서 절대로 혼자가 아니라는 확신을 심어주며, 시민 사회에 참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공동체의 일원인 기독교인들은 다른 기독교인들이 신뢰받을 수 있다고 확신 있게 대답할 수 있는 것이며 교회는 이런 식으로 기독교인들이 시민으로서 종사하게 되도록 북돋는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우스노우는 공동체보다는 시민사회가 더 바람직한 개념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공동체는 법률을 포함하여 정부의 역할에 아무런 관심도 기울이지 않는데 비하여, 시민 사회는 오직 정부와의 관계에서만이 의미를 갖는 그런 관계적 구성물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공동체는 또한 그것이 대변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특징들―책임, 상호 교섭, 상호성, 공동 정신 등―을 자주 결여하고 있기 때문에 문제가 되기도 한다. 보기를 들어, 공동체의 이상이 실제로 서로를 알고 규칙적으로 상호 교섭을 하는 거주자들 사이의 감정적 유대를 포함하는 것이라면, 이웃이란 공동체의 이상과는 거리가 멀다. 이와는 반대로 보통 시민 사회는 이웃, 자발 결사체 등등을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러한 시민사회에 대하여 더 살펴보도록 하자. 시민사회에 대한 다양한 개념이 있지만, 우리가 시민 사회에 주목하는 것은 시민 사회가 규범적으로 선하며, 사회적 삶 가운데 보존할 가치가 있는 바람직한 차원으로 널리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도덕 가치, 개인의 통합성, 그리고 시민의 책임 등은 보통 선한 사회를 위한 조건의 일부로 받아들여지는 반면, 법률이란 사람들의 행동을 끌어내기 위한 무딘 수단에 불과하다. 또 다른 이유로서, 시민 사회는 항상 정부와 개인 사이에 위치해 있으면서, 정부의 강압으로부터 개인 자유의 존엄성을 보호해줄 뿐만 아니라, 개인들을 서로 서로 묶어주어 국가와 효과적으로 협력할 수 있도록 한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와 같이 시민 사회는 국가와 시장으로부터 억압이나 통제받지 않고 개인의 권리를 보호해 준다. 시민사회는 법과 정치의 강제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결사의 자유가 적용되는 자원의 영역이고, 이윤과 이기심보다는 헌신에 의해 동기 부여되는 삶의 영역들과 관련된다. 이러한 시민 사회 영역을 공공의 영역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 공공 영역은 사회 구성원들이 기존하는 삶의 망을 조정하고 재조정하는 참여의 마당을 가리킨다. 이 마당은 그 나름의 가치와 규범을 가지고 있으며 그 나름의 정당성에 터하고 있다. 시민사회는 그 사회에 어울리는 상징과 가치를 제도화하고 있는 참여의 마당을 확보하고 있음을 말하며, 시민은 곧 이 마당에 참여하는 주체를 뜻하는 것이다.

이러한 시민사회는 가치와 규범이 근간을 이루고 있으므로 시민사회에서 교회는 중대한 과제를 안게 된다. 토크빌이 이미 한 세기 전에 미국 사회에 대하여 지적한 바와 같이, 자발 결사체가 시민 사회의 중요한 일부이며, 따라서 다른 종교 조직들과 함께, 교회 역시 시민 사회의 특징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최근 사회과학계에서 새로운 관점에서 교회를 주목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이다. 이른바 ‘제3섹터’로 불리는 비영리·비정부 영역이 국가와 시장에 대한 대안의 패러다임으로 주목을 받고 있는데, 국가의 통제로부터 자유롭고 시장 경제 체제로부터 벗어나 있는 교회는 당연히 제3섹터이자 시민 사회 영역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교회는 시민 조직에 참여하는 데 필요한 인간관계를 형성하고 공공 활동에 필요한 정보를 교환하는 연결망을 발전시키기에 매우 적합한 장소이다. 교회 안에 형성되어 있는 다양한 소집단 활동을 통해서 사회 교섭을 증진시키고 절대로 혼자가 아니라는 신뢰를 발전시킴으로써 시민 사회에 기여하게 될 것이다. 교회는 교인들이 그리스도의 충실한 제자가 될 뿐만 아니라 이 사회의 건실한 시민이 될 수 있도록 가르치고 격려해야 한다. 이것이 현대 시민사회에서 교회의 역할이다.

 

 

 

 

4. 한국 교회의 공공성 회복을 위한 실천

 

(1) 공공성을 향한 인식의 전환

여기에서는 한국 교회가 공공성을 회복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모색해 보고자 한다. 한국 교회가 공공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이상에서 살펴본 공공 교회로서의 역할을 담당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기독교인 한 사람, 한 사람이 기독교 시민으로서의 삶을 실천하며 살아야 하고, 또한 하나의 조직으로서의 교회 역시 공공의 공간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여야 한다.

한국에서 선교 초기에는, 개종하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기독교인들이 함께 모여 기도하고 찬송을 부르고 성경을 공부하며 설교를 들었던 동네 가옥의 사랑방이 교회의 역할을 하였다. 초기에 여자 선교사들은 안방에서, 남자 선교사는 사랑방에 들러 각각의 공간에서 대화의 문을 열기 시작하였으나 이후에 안방이라는 사사로운 공간에 갇혀 공공의 자리로부터 고립되어 있던 여성들도 교회의 공공 공간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교회에서는 남녀와 신분의 차별이 없이 공동으로 참여하는 토론회가 활성화되었으며 자원 조직으로서의 교회가 전국 곳곳에 세워지면서 공공의 공간으로서 수평의 의사소통을 수행하는 시민들의 공간이 되었다. 그리하여 교회에 속한 교인은 공공의 공간에 참여하는 자를 뜻하였고, 초월의 가치에 자신을 이어 기존하는 관행을 허물어뜨릴 수 있는 새로운 삶에 헌신하겠다며 공중 앞에서 선서하고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 당시의 기독교인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이와 같은 기독교 시민으로서의 직분을 실천하지 못하고 있다. 신앙과 삶은 철저하게 분리되어 자신의 신앙이 삶의 영역에서 기독교 정신에 따라 실천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사회생활을 하는 공간은 그 자체의 논리와 기제에 따라 작동하고 있으며, 여기에 기독교 신앙은 비집고 들어갈 여지가 없다. 기독교 신앙은 식사 전에 기도를 한다든지, 술 담배를 금한다든지 하는 개인의 사사로운 경건 생활의 영역에서만 영향력을 발휘할 뿐이다. 그리하여 기독교 정치인은 조찬기도회는 열심히 하지만 정치판은 정치 논리대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할 뿐 기독교 정신을 어떻게 실현해야 할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못한다. 기독교 경제인은 아침 경건의 시간은 갖지만, 자본의 논리에 짓눌려 여느 기업인과 마찬가지로 노동자를 착취하고 세금을 탈루하기도 한다.

교회는 교회대로 교인들이 예배에 잘 참석하고 헌금을 잘 하기만 하면 이른바 ‘독실한 기독교인’이라고 여긴다. 개개의 기독교인들이 자신의 삶의 영역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회의 공공성 회복을 위해서는 먼저 의식의 전환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제까지 한국의 개신교는 교회와 사회의 관계에 대해서 지나치게 이원론식 사고방식을 견지해 왔다. 곧 교회 안에서의 생활에 일차의 중요성을 부여하고 일상생활의 영역에 대해서는 중요성을 인정하지 않아, “죄악이 가득하고 썩어 없어질 세상”으로 치부해 온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이원론식 사고는 기독교인으로서의 사회생활에 올바른 의미를 부여하지 못하여 기독교인들을 분리주의자 또는 배타주의자로 만들어 버린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한 이 사회는 비록 죄악이 넘쳐난다고 해도 포기하고 방치되어야 할 곳이 아니라, 똑같이 하나님의 영광이 구현되어야 할 공간이다. 하나님은 교회뿐만 아니라 이 세상 만물의 주님이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회 안에서의 삶에만 높은 가치를 부여할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요구되는 엄격한 윤리 기준을 모든 기독교인들의 사회생활에도 확대하여 적용해야만 한다. 교회에서는 세속 사회의 모든 활동에 대하여 기독교의 가치를 부여하고 기독교인들이 따라야 하는 윤리적인 지침을 마련해 줄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 강단에서 전해지는 목회자의 설교도 공공성을 지닌 설교가 되어야 한다. 현대사회에서 종교의 사사화 경향은 설교의 주제를 개인의 안위와 행복, 마음의 평안에 대한 내용으로 축소시키고 있다. 이에 따라 우리 사회에서 종교 활동은 사회활동의 근거가 되기보다는 자신의 입신출세나 개인의 영달을 추구하는 수단이 되어버렸다. 교회의 공공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개인의 사사로운 영역에 속하는 주제들보다도 사회 공공의 영역에 속하는 주제들에 대한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그리고 교회 구성원들에게 정치나 경제 또는 사회 다른 분야에 대한 공공의 문제들에 대하여 기독교 관점에서 접근하는 설교가 제시되어야 한다.

그리고 교회 내부 활동만 아니라 교회 밖 활동도 교회에서 중요하게 여길 수 있어야 한다. 평신도는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기독교인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할 필요가 있다. ‘작은 목자’라는 개념은 평신도를 동역자로 인정한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만하나 자칫 평신도에게 교회 안에서의 활동이 중요하고 사회에서의 활동은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오해를 줄 수도 있다. 물론 교회 안에서의 활동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필요에 따라 그리고 은사에 따라 각각의 영역에서 소명의식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는 태도가 필요한 것이다. 이렇게 교회 안팎에서 맡은 바 역할과 책임을 다함으로써 균형 있고 온전한 기독교인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2) 공공성 회복을 위한 교회의 사회 참여

교회가 공공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바람직한 사회 참여가 이루어져야 한다. 교회는 사회에 터하여 존재하며 사회와 소통하고 사회에 기여해야 한다. 한국 교회는 오랫동안 정교 분리의 원칙을 내세우며 정치에 대한 입장 표명을 유보해 왔다. 그러나 참여정부 이후 교회는 그동안의 침묵을 깨고 정치성 높은 발언을 하기 시작했다. 이것을 바람직한 참여로 볼 수 있을까? 교회의 현실 참여는 공공성이 담보되어야 한다. 이것은 교회뿐만 아니라 모든 집단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사회 운동이나 사회에 대한 의사표현도 단순히 자기 집단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면 다른 사회 구성원들의 공감을 얻을 수 없다.

지난 총선 때 다시 등장한 기독교 정당은 설립 당시부터 이러한 한계를 안고 있었다. 정당은 사전적 의미로 일정한 정치 이상의 실현을 위해 정치권력의 참여를 목적으로 하는 정치 단체를 가리킨다. 그리고 정당은 이익단체나 당파와는 달리, 국민 전체의 이익을 도모해야 한다. 종교 정당이라고 하더라도 자신의 종교 인구 확대나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종교적인 가치를 실현하여 더 나은 사회를 이루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자신들의 이익을 확장하려고 하는 것은 정당이 아니라 이익단체의 목적이다. 우리 사회와 같은 다종교 사회에서 각각의 종교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정당을 설립하여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한다면, 정치판은 자신들의 종교를 위한 종교집단 이기주의의 대결장이 될 것이다. 정당은 소수 집단이 아니라 국민을 품을 수 있도록 훨씬 더 넓은 공익성을 추구해야 한다.

교회가 공익성을 견지하며 사회활동에 참여한다고 할 때, 최근 시민사회에서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는 마을 만들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전에는 주로 지역사회개발운동으로 지역사회 주민들의 자주적인 참여와 주도적 노력으로 지역사회의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조건의 향상을 추구해왔다. ‘참여’를 통해 진정한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방편으로 공동체주의 운동 활성화가 필요해지면서, 지역 사회 구성원들의 ‘참여’와 다양한 기관과의 ‘연대’를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단순히 경제 발전이나 개발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지역사회의 공동체 형성(community building)에 관심을 모으고 있다. 개인주의 사회가 경쟁을 앞세운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이 원리가 지배한다면, 공동체 운동은 배려와 관심으로 더불어 사는 공동체를 추구한다. 마을 만들기는 바로 이러한 취지에서 지역 사회를 재구조화하기 위한 시도로 이해된다.

마을 만들기 운동은 일종의 주민자치운동으로 여기서 ‘마을’이란 시민 전체가 공유하는 것임을 자각할 수 있고 공동으로 이용하며 활용할 수 있는 장을 총칭한다. 그리고 ‘마을 만들기’란 그 공동의 장을 시민이 공동으로 만들어내는 작업을 말한다. 이러한 마을 만들기는 ‘눈에 보이는 마을 만들기’와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을 만들기’의 두 가지 측면이 있는데, ‘눈에 보이는 마을’이란 말 그대로 물질로 구성되어 눈으로 관찰할 수 있는 마을을 뜻하는 것이며,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을’이란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활동으로 형성되는 마을을 뜻하는 것이다. 따라서 ‘마을 만들기’는 ‘사람 만들기’를 포함하는데, 곧 시민의식을 가지고 참여하는 사람이 되도록 의식을 개혁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러한 마을 만들기 운동에 교회가 참여하는 것은 매우 의미가 크다. 시민의식은 기독교 정신과도 통하는 것이며, 특히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의식을 형성하는데 기독교의 가치를 지향할 수 있도록 협력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교회는 지역사회를 재조직하는 일에 당위성을 지닐 뿐만 아니라 실제로 그 기능을 할 수 있는 잠재력도 지니고 있다. 뿐만 아니라 기존의 기독교 사회운동들이 대개 교계 지도자 중심의 운동이었던 데 반해, 지역사회 공동체 운동은 일반 기독교 대중이 참여할 수 있는 풀뿌리 운동이라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고 하겠다.

실제적으로 교회가 바람직한 사회 참여를 하기 위해서는 교회 조직과 구조가 재정비되어야 하며, 특히 교회의 재정 지출이 공공성을 띄어야 한다. 특정 집단의 재정 구조는 그 집단의 특성을 가장 분명하게 드러내는 지표 중에 하나이다. 재정은 집단의 설립 목적이나 추구하는 방향에 따라 지출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산서는 단순한 서류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그 집단의 정신이 배어 있는 도덕 문서가 되는 것이다. 최근에 논란이 되었던 종교 단체 과세 문제는 한국 교회의 가치지향성에 정면으로 문제를 제기한 쟁점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종교단체에 대해 자선단체와 같은 수준의 조세 감면이나 비과세 혜택을 주고 있다. 그것은 종교단체는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선단체와 같이 사회의 공익에 기여하고 있다고 전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에 목회자와 교회에 대해 비과세하는 것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은 교회가 사회의 공익을 위해서 일하기보다는 자기 자신들만을 위해서 일하기 때문에 영리 단체나 다를 바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따라서 세금을 내고 안 내는 것은 표피의 문제이다. 설령 특정 교회나 목회자가 세금을 낸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 사회에 대한 교회의 책임을 다했다고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문제의 핵심은 교회의 활동이 공공성을 띄고 있으며 사회에 대한 책임을 다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 교회의 예산 구조는 어떠한가? 노 치준 교수가 80~90년대에 조사 연구한 바에 따르면, 한국의 교회들은 예산의 대부분을 교회 내부 활동과 교회 관리 및 유지를 위해 사용하고 있다. 교회 본연의 활동이라고 할 수 있는 선교에 대한 예산마저도 전체 예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0%에도 미치지 못한다. 특히 사회를 위한 봉사활동비는 5%를 훨씬 밑돌아 교회의 활동이 공공성을 구현하고 있다고 주장하기는 매우 어려운 실정이다. 정확한 최근 통계가 없으나 몇몇 기관에서 조사한 내용에서는 현재도 크게 개선된 점을 발견할 수 없다. 이것은 목적과 수단이 전도되어 교회가 본연의 역할을 하지 못함으로써, 교회 안팎으로부터 권위를 인정받지 못하고 또한 영향력을 행사하지도 못하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교회는 일차적으로 예배공동체의 성격을 지니고 있지만, 그와 동시에 사회 속에 존재하는 시민공동체이기도 하다. 하나의 의례행위로서 예배에 참여하는 것으로 그칠 것이 아니라 실천 윤리의 행동 지향성이 삶의 무대인 사회생활에서 표출되어 나타나야 한다. 특히 한국 교회는 개교회 내부 결속력은 강하지만, 다른 교회와의 협력이나 지역사회에서의 연계 활동은 부족하므로 이에 대한 노력이 더욱 절실한 상황이다. 교회가 지니고 있는 물질과 제도 자원이 지역사회를 위해 효과 있게 활용될 뿐만 아니라 교회 구성원들이 지역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그리고 뜻을 같이 하는 다른 교회나 시민 단체들과 협력해야 한다. 그렇게 될 때, 시민공동체가 활성화되고 지역사회가 기독교의 가치를 지향하게 될 뿐만 아니라 교회의 공신력도 회복하게 될 것이다.

 

5. 한국 교회의 공공성 회복을 위하여

 

한국 교회는 시련의 시기를 겪고 있다. 사회로부터 받는 비난의 원인 중에 하나는 그동안 한국 교회가 사회와 소통하려 하기보다는 일방적으로 진리를 선포하고, 상대방을 단순히 전도 대상자로 여기는 태도에서 기인한다. 절대 진리를 수호하는 입장에서는 전도의 대상자와 타협하기 어려우며 도덕적 우월감으로 상대를 낮잡아보기 쉽다. 이렇게 자신의 집단 안에 매몰된 사람은 더 넓은 사회의 지평을 바라보지 못한다. 그리하여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교회 생활에 열심일수록 사회에 대한 의식수준은 더 떨어지는 기현상을 보이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다원화된 사회이다. 다원화된 사회에서 상대를 인정하지 않고 존중하지 않는 태도는 한 사회 안에서 공존하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피터 버거의 표현대로, 다원화된 현대 사회에서는 ‘설득력의 구조’가 다양하게 변하였다. 국가 종교가 유지되었던 전통 사회와 달리 대부분의 사회에서 국교가 폐지되고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면서 종교나 신념에 따라 ‘설득력의 구조’가 달라지게 된 것이다. 이렇게 서로 다른 ‘설득력의 구조’를 가진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해 자신의 논리를 보편적인 언어로 표현하여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치에 맞는 것’이 되도록 할 수 있어야 한다. 기독교인들은 비기독교인들과 자유롭게 대화하며 자신들의 논리를 펼치고 토론을 통하여 상대방을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다원화된 현대 사회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기독교의 진리를 전하는 바람직한 방법이다.

또한 교회가 우리 사회의 책임 있는 구성원이 되기 위해서는 사회 공공의 문제에 관심을 갖고 이의 해결을 위한 노력에 동참하여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교회 스스로 공공의 공간이 되어야 한다. 교회의 제도화 및 관료제화와 함께 효율을 강조하며 무시해왔던 의사소통의 구조를 회복시켜야 한다. 진정한 공동체는 모든 구성원들이 의사결정에 함께 참여할 수 있어야하고 속도는 더디더라도 공동의 의식을 바탕으로 공감대를 형성하여 주요한 사안들을 결정해 나갈 수 있어야 한다. 또한 특정 집단의 이익이 아니라 전체 사회의 이익과 공동의 선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의사 결정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러한 공동체 의식은 닫힌 공동체가 아니라 지역 사회를 향해 열린 공동체여야 한다. 그리고 지역 사회에서 공동체를 세우기 위하여 노력할 때에는 교회 중심의 사고를 지양하고 교회 역시 지역사회 구성원의 하나로서 동등하게 참여하여야 한다. 이를 위하여 지역에 있는 여러 교회가 연계하고 필요에 따라 지역 사회의 시민 단체와도 연계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지나치게 가시적인 성과를 기대하기보다 그것이 세상에 ‘보냄 받은 교회’로서의 본질적인 사명이라는 인식으로 묵묵히 노력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그럴 때에 한국 교회는 우리 사회의 어엿한 구성원으로서의 책무를 다하게 되고 사회로부터의 공신력도 회복하게 될 것이다.

 

 

* 출처 : 공공신학(Public Theology)세미나 5
사회학에서 본 공공성의 문제
-일시 _ 2008. 7. 5(토) 오전 10~12시
-장소 _ 여전도회관 8층 회의실
-주최 _ 기독교윤리실천운동, 교회와사회연구원, 새세대교회윤리연구소
[출처] 한국 교회의 공공성 회복을 위한 모색|작성자 e_libr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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