킹 제임스 성경이 최상의 성경번역이라는 생각의 오류
킹 제임스 성경이 최상의 성경번역이라는 생각의 오류
- 말씀보존학회(성경침례교회, 미국 펜사콜라) 활동의 문제점-
자료출처 http://cafe.daum.net/yangmooryvillage/RkzJ/14715
<소개하며>
최근, 어떤 분으로 부터 지하철 1호선에 킹제임스 성경만이 참 성경이라는(결국, 자신들이 참교회라는) 주장이 광고되고 있다는 사실을 듣고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참, 웃긴 것으로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구나 하고 생각이 들었으나. 좀더 생각해보니, 웃어 넘길 수만 없는 것이었다. 이러한 운동이 버젓이 횡행한다는 것은 철저히 한국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정보부족과 영성부족을 파고드는 것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말씀보존학회는 킹제임스 성경만이 유일한 정경의 역본이라는 독단론을 통해 많은 사람들을 혼란케 하고 있다. 그 역사를 보면 1960년대 한 때 미국에서 일과성의 논쟁이 있었으나 ,그 이후 이들의 이론이 타당성이 없다는 연구결과들로 인해 일종의 해프닝으로 종식되었다. 미국의 경우 마이애미주의 펜사콜라시에 국한되어 아직도 이를 추종하는 단체가 있으나 전혀 호응받지 못하고 있다.
국내에는 이들과 연결되어 새로운 학설인양 세력확장을 추구하는 교회와 사람들이 별 정보가 없는 그리스도인들을 파고 들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마치 그들이 쓰는 성경만이 참성경이고 다른 성경들은 잘못되었다고 주장한다. 이는 비합리적 극단주의적 경향이 드러난 것이다. 그런데, 이들의 문제는 성경사본의 우열의 문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를 통해 기존교회에는 구원이 없으며, 잘못된 교리로 속이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마치 여러 이단들이 자신의 교회에만 구원이 있으며, 자신의 교주만이 참 메시야라는 주장과 다를 바 없다.
또한 그러한 극단적인 사고와 감정은 마치 "여호와의 증인"들과 같은 종교적 열심을 갖게 만들어, 한국교회의 미지근한 약점을 파고든 결과 이를 전파하는 사람들의 인간적인 정성과 강한 주장에 넘어가는 사람이 많게 된다.
현대는 옳고 그름을 떠나 자기정체성이 약한 사람을 확 잡아끄는 정열에 반응하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이는 미국과 일본 같은 선진국에도 인민사원이나 옴진리교가 '순교자(?)' 정신으로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것을 봐도 그렇다. 과연 하나님이 기뻐하실까?
사실상 킹제임스 성경을 그들이 독점할 아무런 이유도 없으며,이미 킹제임스 성경은 그 자체가 영국의 제임스 왕 시절에 번역되어 문학적으로 훌륭한 역본으로 널리 인정되고 있다.즉, 킹제임스 성경은 다양한 영어 역본중에서 나름대로 장단점을 가진 책이라는 것이 객관적인 평가라 할 수 있을 뿐, 특별히 우상화되거나 별도의 교파를 만들어 숭앙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이러한 차원에서 이들의 오류를 입증하는 많은 논문중 세계 최고수준의 신학교의 하나인 미국 달라스 신학교(DTS) Wallace 교수의 논문을 번역하였다. 그 내용의 핵심은, 킹제임스성경이 우월하다는 근거가 없고, 오히려 다른 버젼들에 비해 열등한 면도 많다는 것이다.
- 아래는 미국 달라스 신학교교수(신약론) Daniel B. Wallace의 글을 번역한 것이다-
나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고, 완전무오하며, 하나님의 영감을 통해 지어졌고, 우리의 신앙과 삶에 대한 최종적 권위가 된다는 사실을 모든 복음주의적인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확신하기를 원한다.
어느 성경이 가장 좋은 번역본인가 하는 것은 신학적인 문제는 아니다. 그것은 원문(text)과 관련된 문제이고 언어학적인 문제이다.
나는 성경의 어디에서도 오직 한 성경변역본만이 정확하다고 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그리고 성경 어디에서도 킹제임스 성경만이 최상의, 그리고 유일하게 '성스러운' 성경이라고 하는 것을 본 적은 더더욱 없다. 하나님이 그의 말씀을 어떻게 보존하시는지에 관해 말하는 성경구절은 없다. 따라서 킹제임스 성경만이 독보적인 권위를 지닌다는 주장에 대한 성서적인 근거는 없는 것이다.
이에 대한 논쟁은 다른 기준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KJV가 오늘날 우리가 접할 수 있는 성경 중에서 최상의 번역본이 아니라는 나의 믿음은 두가지 일반적인 주장을 토대로 한다. 그것은 첫째 KJV(신약)이 바탕으로 삼고 있는 희랍 원문이 열등하다는 점과,
둘째는 그것의 번역 자체가 (역사적, 언어적인 문제로 인해서)그리 훌륭치 못하다는 점이다.
1.원문의 열등성(The Text is Inferior)
1. KJV(신약)가 토대로 삼고 있는 희랍어 원문은 특정 부분에서 다른 원문들에 비해 열등한 것이 분명하다. 그 원문의 편집자는 에라스무스라는 인문주의자였다. 그는 가능한한 빨리 인쇄해야 한다는 압박감 속에 있었다.
그 첫째 이유는 그 당시까지도 아직 희랍어 신약성서본이 발간되지 않고 있었다는 것이었지만, 또 다른 이유는 몇몇 수도승들이 그들 나름대로의 희랍어 성서를 발간하려 하고 있다는 소식을 에라스무스가 듣고 그들을 앞서기 위한 경쟁을 벌인데 있었다. 결과적으로 그의 성서본은 모든 문학 작품들 중에서 가장 조악하게 편집된 책으로 불리게 되었다. 또한, 그 책은 에라스무스도 수긍하는 인쇄상의 오류들로 가득차 있다.
그중에서 특히 언급할 만한 것이 두 가지 있다. 에라스무스는 계시록의 마지막 여섯 구절의 희랍어 필사본(MS)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는 전체 신약성서를 편집하는데 단지 6개의 필사본들(MSS)만을 사용하였다.) 그래서 그는 라틴어를 희랍어로 '역번역'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하여 그는 계시록을 기록하고 있는 다른 열 여섯개의 희랍어필사본에서는 결코 찾아볼 수 없는 이형(異形)들을 '창조'해내었다. 결국 그는 희랍어 필사본이 이랬을 것이다 라는 식의 짐작만 했었을 뿐이다.
두 번째는 요한일서 5:7-8에 관한 것이다. 이 구절에서 에라스무스는 '하늘에 증인이 셋이 있는데, 성령과 물과 피니라'라는 대다수 필사본들의 해석을 따랐다. 그러나 몇몇 로마카톨릭 집단들이 이에 격분하였다. 에라스무스의 원문이 이 구절을 '세 증인 있으니 아버지와 말씀과 성령이시니라'라고 해석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에라스무스는 그런 해석을 그의 원문에 넣지 않은 이유가 그 구절을 그런 식으로 해석하는 희랍어 필사본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라고 해명하였다. 그리고 나서 그는 어느 희랍어 필사본에서라도 그와 같은 해석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면 곧 그것을 그이 원문에 적어넣겠다고 함으로써 그 비판을 무마시켰다. 결국의 세 번째 판본은 두 번째의 해석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아마도 첫 번째 해석에 대한 비판을 만족시키기 위한 희랍어 필사본이 '만들어졌던 것' 같다. 그러나 오늘날까지도 요한일서 5:7-8의 구절 속에 삼위일체교리가 담겨져 있는 희랍어 필사본은 단지 세 개만이 발견되고 있을 뿐이다.
이점은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왜냐하면 킹제임스성경이 토대로 삼고 있는 원문에 관한 매우 중요한 문제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원문비평가들은 삼위일체 교리를 전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물론 복음주의적 원문비평가들은 무두가 그렇다.) 따라서 그들 대부분은 삼위일체 교리를 요한일서 5:7-8가 분명하게 제시해 주기를 원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한 본문해석이 과도한 열정을 지닌 몇몇 필사가들에 의해서 꾸며진 얘기에 불과한 것으로 보기 때문에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킹제임스 성경이 지나친 열정을 지닌 필사가들에 의해 '꾸며진' 해석들로 가득차 있다는 데 있다. 킹제임스 성경의 독특한 해석들의 거의 대부분이 정말 고대로부터 전해져 온 것들인지가 불분명하다. 대부분의 원문 비평가들은 가장 오래된 필사본일수록 친필본이 만들어진 시기에 가깝기 때문에 더 믿을만할 것이라는 합리적인 주장을 받아들인다. 사실 나 자신은 킹제임스 성경의 많은 해석들이 그대로 남아 있길 원한다.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의 이야기(요한복음 8:1-11)는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이야기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었다. 디모데전서 3:16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으로 불리고 있는 것은 그분에 관한 나의 이제까지의 견해를 확증한다.(참조: 요한복음 3:13, 요한일서 5:7-8, 요한복음 5:4등도 역시 그렇다).
그러나 그 필사가들이 내용을 빼기보다는 첨가해넣는 경향이 더 많았다는 것과 그러한 첨가작업의 대부분이 친필본에 가까운 필사본에서 보다는 최근의 필사본에서 더 많이 나타나고 있다는 원문상의 증거를 보게 되었을 때, 나는 내가 늘 감성적으로 받아들였던 구절들이 더 이상 이성적으로 수용하기에는 매우 어려운 것들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따라서 학자들이 무슨 악의가 있어 우리가 좋아하는 구절들을 신약성서에서 빼내고 있는 것은 아닌 것이다. 단지 그들이 보다 오래되고, 보다 나은 필사본에서는 그 구절들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KJV는 친절하게 첨가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성경을 보다 완벽하게 보이려고 분식을 하고 있는데 이는 원본과는 거리가 멀어진다-편집자 주)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구절들 속에 포함되어 있던 교리 자체에 무슨 문제가 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나의 믿음이 디모데전서 3:16과 함께 운명을 같이하는 것은 아니다(그 신발은 다른 발에도 신겨질 수 있다. 초기의 필사본(그리고 더 최근의 번역들)은 요한복음 1:18안에서 그리스도의 신성을 확증하고 있다. 그러나 KJV에서는 이를 찾아볼 수 없다). 사실상 성경의 그 어떠한 교리도 원문들의 차이로 인한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사실이 계속적으로 증명되어 왔다. 정말 그렇다면 '오직 킹제임스만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야말로 황야에서 울부짓고 있는 늑대들일 뿐이지, 복음을 진보시키는 중요한 일에 전념하는 사람들은 아닌 것이다. 반면, 삭제된 구절들은 대개 우리에게 난처한 문제를 안겨주었던 것들이다. 예를 들어서 로마서 8:1을 보자. 비교적 최근의 필사본들은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라는 구절 뒤에 "그는 육신을 따라서 살지 않고, 성령을 따라서 산다"라는 구절을 첨가한다. KSJ는 이와 같이 긴 해석을 받아들이고 있다. -아마도 이와 같은 구절을 첨가한 것은 값없이 주어지는 은혜(fee grace)에 관한 바울의 교리를 '누그려뜨리려(tone down)'라는 의도에 의해서 이루어졌던 것 같다.(마가복음 16:9-20 참조)
2. 최근의 번역본들이 특정의 단어나 구절들을 '빠뜨리고(omit)' 있음이 사실이기는 하지만(당신이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KJV은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에 다른 것들을 첨가하고 있다)이것이 흑백논리의 잣대로 잴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가장 오래된 필사본들은 제쳐두고, 필사본 대다수의 내용을 기준으로 해서 만들어진 가장 최근의 한 희랍 신약성서본은(그럼으로써 KJV을 강력하게 지지하는) 대개의 현대 번역본들이 원본으로 사용하고 있는 표준적인 희랍신약성서본과 비교해 볼 때, 대략 605개가 넘는 단어와 구절들을 빠뜨리고 있다! 그러므로 단지 현대 번역본들만이 글자를 빼먹었다 하는 것은 공평하지 못하다. KJV이 기반으로 하고 있는 희랍 원문 역시 단어들을 빠뜨리고 있다. 게다가 KJV가 다른 근대번역본들 모두는 사도행전의 약 10%(거의 세장분의 자료이다)를 - 그 구절들이 몇몇의 고대 필사본들에서는 발견됨에도 불구하고- 빠뜨리고 있다.
많은 신약성서학자들은 그 구절들이 원래의 친필본에는 없었으나 매우 초기에 추가된 것들이라는 사실을 확인하였다(그 구절들은 가장 오래된 필사본과 가장 믿을만한 필사본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대 번역본들이 하나님 말씀의 일부분을 빠뜨렸다라고 비난하는 것은 (계시록 22장으로부터)우선 하나의 위협전술이라고 할 수 있다. 원문에 대한 본래의 해석이 무엇이지를 결정하는 우리의 유일한 기준이 이러한 경계의 말씀(계시록 22장)에 주의하는 것이었다면 아마도 우리의 신약성서들의 내용은 -킹제임스 신약성서를 포함해서 - 지금보다 적어도 25%는 더 불어났을 것이다.
Ⅱ. 해석상의 열등성(The Translation is Inferior)
1. KJV의 번역자들은 그리스어보다는 라틴어를 더 잘 아는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그들의 번역에는 몇몇 오류가 있었다. 특히 세밀한 차이점들이 라틴어로 재현될 수 없는 부분에서 그랬다. 단지 두가지 예만 들어보자. 하나는 문법상의 문제이고 또 하나는 어휘상의 문제이다. KJV의 번역자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에 동의하는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은 그리스어에 있는 이와같은 미세한 차이점을 알아채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이러한 점이 라틴어로는 재현불가능했기 때문이다(라틴어는 그리스어와 달리 정관사가 없기 때문이었다. KJV는 특히 희랍어 관사의 뉘앙스에 민감하지 못하였다. 참조:누가복음 18:13; 요한복음 3:10; 베드로 후서 1:1 등등)
두 번째로 디모데전서 2:12을 보면 KJV는 여자가 '남에 대한 권위를 빼앗는 것'을 금하고 있다. 희랍어는 원래 '......에 대해 권위를 행사하다'라는 말이었다. 그것이 '......에 대한 권위를 빼앗다"라는 의미를 갖기 시작한 것은 신약성서가 쓰여진지 4세기가 지난 후 부터였다. 더군다나 그런 의미가 보편화되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도 상당한 시간이 지난 후 부터였다. 제롬에 의해서 만들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도 상당한 시간이 지난 후 부터였다. 제롬에 의해서 만들어진 라틴어 번역(4세기)은 이 용어를 정확히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에라스무스(KJV가 토대로 하고 있는 희랍어원문의 편집자)는 자신의 라틴어 번역을 제시하였을 뿐만 아니라 희랍어에 대한 그 나름의 이해를 바탕으로 하여 제롬의 라틴어 번역을 수정하였다. 물론 9세기까지는 그 말이 보통은 '......에 대한 권위를 빼앗다'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디모데전서 2:12의 말이 의미하는 바를 잘못 이해하였던 것이다. 킹제임스성서의 번역자들은 이러한 에라스무스의 잘못된 번역을 그대로 채택하고 있다.
2. 킹제임스번역본은 최근의 몇몇 발견들로 인해 이제는 진부한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신약성서에 등장하는 단어들 중의 약 500개의 단어들(거의 10%)이 1895년까지는 성경이외의 다른 고대기록에서는 전혀 발견되지 않고 있었다. 바로 그해에 Adolf Deissmann이라는 한 독일 목사가 '성경공부(Bible
Studies:Bibelstudien)'라는 제목의 책을 출판하였는데 그 제목에 아주 걸맞는 책이었다.
이 책에서 그는 비문학적인 파피루스들(사업문서, 영수증, 유서, 세탁물 목록, 사적인 편지 등)에서 발견된 그 500개 단어들의 예들을 하나하나 제시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 중 약 50개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단어들의 의미가 그 고대의 파피루스들 속에서 입증되었다. 이 파피루스들의 발견은 신약성서에서 사용된 막대한 양의 단어들 - 흔히 사용되는 단어들까지 포함해서-에 관한 우리의 이해를 엄청난 정도로 촉진시켰다. Deissmann의(그리고 후속 학자들의) 연구는 본질적으로 두가지 점을 논증하고 있다.
(1) 1895년까지, 신약성서 어휘에 대한 성서번역자들의 이해의 상당한 부분이 단지 어림짐작에 지나지 않았다. 많은 경우, 그들의 추측은 옳지 않았다. 이러한 사실 하나만으로도 1985년 이전에 이루어진 번역들은 진부한 것들로 치부되기에 족하다.
(2) 신약성서의 언어는 아테네, 카르타고, 알렉산드리아, 에베소 등지의 거리에서 흔히 쓰던 보통의 말이었다. 그것은 소수의 전수자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신성한 말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본질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번역은 신약성서 저자들의 의도를 벗어나는 것이다.(이 점에 대해서는 다음에 더 논할 예정이다.)
3. KJV가 처음 출판되었을 땐, 이해하기 너무 쉽다는 점에 대한 저항이 있었다. 그런데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이해하기 어렵다는 점 때문에 그것을 경외한다. 나는 그들의 그러한 반응이 자만심에서부터 나온 것이 아닐까 두렵다. 그들은 마치 다른 보통의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자신들이 이해하고 있는 듯이 생각한다. 종종 고린도전서 2:13-16이 KJV('당신이 영적이라면 그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라는 점을 암시하면서)와 관련해서 인용되곤 한다.
그러나 그런 식의 본문 인용은 성경에 대한 커다란 곡해이다. 신약성서의 단어들, 문법, 문체, 등등- 한마디로, 언어(language)- 은 1세기의 보통 언어였다. 만약에 우리가 하나님께서 처음 시도하셨던 것보다 복음을 더 이해하기 어렵게 만들고 있다면 우리는 사실상 하나님께 잘못을 하고 있는 것이다. 영적이지 못한 사람들이 성경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그들의 의지의 문제이지 지성의 문제는 아니기 때문이다. (참조:고린도전서 2:14. 여기서 '영접하다', '환영하다'라는 말들은 복음에 대한 이해를 막는 것이 인간의 악한 의지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준다.)
4. 영어는 계속적으로 변해왔다: Deissmann이 희랍신약성서의 언어에 관해 중요한 발견을 하기 전에 이미 KJV의 진부성이 들어나고 있었다. 1611년에는 정확했던 KJV의 단어들이 이제는 매우 다른 것을 의미하는 말들이 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 정확히 말하면 KJV의 단어들 중 약 300개가 이제는 더 이상 처음과 같은 뜻을 지니고 있지 있다. 한 예가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내버려두어라(suffer)'와 같은 구절에서 사용된 suffer라는 단어이다. 어떤 성경이 명확히 이해되지 않는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왜곡, 곡해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최상의 번역이라고 해야할까?
5. KJV은 명백한 번역상의 오류를 갖고 있다. 이것은 KJV의 지지자들까지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인쇄상의 오류이지, 번역자들이 희랍 텍스트를 오해해서 생긴 오류는 아니다.) 마태복음 23:24에 '하루살이에는 저항하고(straubat), 약대는 삼키는도다'라는 구절이 있다. 그러나 희랍어 성경에는 이것이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는 삼키는도다'라고 되어 있다. 이것은 최소한 어떤 번역본도 흠이 없을 수는 없다는 것, 그리고 어떤 번역본도 필사과정에서 오류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것, 또 실제로 오류가 발생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KJV은 매우 커다란 위원회의 산물이었다)
Ⅲ. 기타
1. '오직 킹제임스만이'를 주장하는 몇몇 사람들은 단지 KJV만이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성경이라 확신한다. 그러나 이 번역본은 1611년 처음 만들어진 이래로 3번이나 개정을 거쳤다. 그 과정 속에서 10만개 이상의 수정이 있었다(이것은 뉴킹제임스판을 만들 때의 급격한 변화는 포함하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이중 어떤 킹제임스성경이 영감을 받은 것인가?
2. KJV만이 '성경(Holy Bible)'이라고 불릴 수 있는 배타적인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신기하게도 모두 영어를 사용하는 사람들(고립되어 있는 미국인들)이었다. 그러나 독일어로 아주 정교하게 번역된 마르틴 루터의 성경은 KJV보다 거의 100여년을 앞서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오직 영어로만 말씀하신다고 말할 정도로 오만하지는 않는가? 루터의 성서와 KJV 간의 본질적 차이가 있을 경우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느 하나에만 영감을 불어 넣으셨다고 해야 할까?
우리의 신앙은 어떤 하나의 단일한 전통에 의존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지역적인 것도 아니다. 성서적 기독교는 결코 지역주의(provincialism)에 빠져서는 안된다. 다른 무엇보다도 선교를 위한 노력이 기독교를 생동감있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3. 대부분의 복음주의적인 사람들- 그들은 신앙의 기본적인 교리를 모두 받아들인다-은 KJV가 토대로 삼고 있는 것과는 다른 원문(text)과 해석을 좋아한다. KJV을 기반으로 하여 만들어진 New Scofield Reference Bible 조차도 KJV와는 다른 원문과 번역을 선호하고 있다.
Ⅳ. 결론
아직도 킹제임스 성경은 영어로 된 문학작품 중 최고의 기념비로 우뚝 서있다. 그 성경은 세익스피어가 한창 전성기에 있던 시기, 말하자면 영국 언어의 황금기에 쓰여졌기 때문이다. 번역위원회는 성서원본 뿐만 아니라 훌륭하고 문학적인 영어 문체에도 신경을 썼다. 표현미에 있어서 오늘날의 어떤 성경도 KJV와 겨룰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것 나름대로의 생명력을 갖게는 되었지만 원래의 신약성서와는 크게 멀어지게 되었다. 피리소리로 순진한 아이들을 꾀어내던 전설상의 피리부는 남자처럼, KJV은 그것의 아름다움에 반해 미와 진리를 혼동하는 추종자들을 얻어내었다. 이것은 마치 굉장한 미술작품이면서도 역사적인 사실에서는 부정확한 것으로 판명되는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과도 같다. 킹제임스성경은 정말로 대단한 걸작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의 결함은 미적인 데에 있지 않고 그의 정확성에 있다.
킹제임스 성경이 가장 훌륭한 번역본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이유에 대한 나의 간략한 검토는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고 믿는다. 우리 모두는 어떤 일들을 과장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그렇게 과장된 것 위에다 큰 성채를 세우곤 한다. 우리는 종종 진정한 경외심에서가 아니라 감정에 의해서 어떤 것에 매달린다. 만약 정말로 그렇다면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죽어가는 세상에 대해 잘못을 범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주는 '명확하고도' 강력한 음성을 거의 필사적으로 필요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이.
1991년 김용찬 번역/ 양세영 감수 및 편역
- 말씀보존학회(성경침례교회, 미국 펜사콜라) 활동의 문제점-
자료출처 http://cafe.daum.net/yangmooryvillage/RkzJ/14715
<소개하며>
최근, 어떤 분으로 부터 지하철 1호선에 킹제임스 성경만이 참 성경이라는(결국, 자신들이 참교회라는) 주장이 광고되고 있다는 사실을 듣고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참, 웃긴 것으로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구나 하고 생각이 들었으나. 좀더 생각해보니, 웃어 넘길 수만 없는 것이었다. 이러한 운동이 버젓이 횡행한다는 것은 철저히 한국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정보부족과 영성부족을 파고드는 것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말씀보존학회는 킹제임스 성경만이 유일한 정경의 역본이라는 독단론을 통해 많은 사람들을 혼란케 하고 있다. 그 역사를 보면 1960년대 한 때 미국에서 일과성의 논쟁이 있었으나 ,그 이후 이들의 이론이 타당성이 없다는 연구결과들로 인해 일종의 해프닝으로 종식되었다. 미국의 경우 마이애미주의 펜사콜라시에 국한되어 아직도 이를 추종하는 단체가 있으나 전혀 호응받지 못하고 있다.
국내에는 이들과 연결되어 새로운 학설인양 세력확장을 추구하는 교회와 사람들이 별 정보가 없는 그리스도인들을 파고 들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마치 그들이 쓰는 성경만이 참성경이고 다른 성경들은 잘못되었다고 주장한다. 이는 비합리적 극단주의적 경향이 드러난 것이다. 그런데, 이들의 문제는 성경사본의 우열의 문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를 통해 기존교회에는 구원이 없으며, 잘못된 교리로 속이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마치 여러 이단들이 자신의 교회에만 구원이 있으며, 자신의 교주만이 참 메시야라는 주장과 다를 바 없다.
또한 그러한 극단적인 사고와 감정은 마치 "여호와의 증인"들과 같은 종교적 열심을 갖게 만들어, 한국교회의 미지근한 약점을 파고든 결과 이를 전파하는 사람들의 인간적인 정성과 강한 주장에 넘어가는 사람이 많게 된다.
현대는 옳고 그름을 떠나 자기정체성이 약한 사람을 확 잡아끄는 정열에 반응하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이는 미국과 일본 같은 선진국에도 인민사원이나 옴진리교가 '순교자(?)' 정신으로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것을 봐도 그렇다. 과연 하나님이 기뻐하실까?
사실상 킹제임스 성경을 그들이 독점할 아무런 이유도 없으며,이미 킹제임스 성경은 그 자체가 영국의 제임스 왕 시절에 번역되어 문학적으로 훌륭한 역본으로 널리 인정되고 있다.즉, 킹제임스 성경은 다양한 영어 역본중에서 나름대로 장단점을 가진 책이라는 것이 객관적인 평가라 할 수 있을 뿐, 특별히 우상화되거나 별도의 교파를 만들어 숭앙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이러한 차원에서 이들의 오류를 입증하는 많은 논문중 세계 최고수준의 신학교의 하나인 미국 달라스 신학교(DTS) Wallace 교수의 논문을 번역하였다. 그 내용의 핵심은, 킹제임스성경이 우월하다는 근거가 없고, 오히려 다른 버젼들에 비해 열등한 면도 많다는 것이다.
- 아래는 미국 달라스 신학교교수(신약론) Daniel B. Wallace의 글을 번역한 것이다-
나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고, 완전무오하며, 하나님의 영감을 통해 지어졌고, 우리의 신앙과 삶에 대한 최종적 권위가 된다는 사실을 모든 복음주의적인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확신하기를 원한다.
어느 성경이 가장 좋은 번역본인가 하는 것은 신학적인 문제는 아니다. 그것은 원문(text)과 관련된 문제이고 언어학적인 문제이다.
나는 성경의 어디에서도 오직 한 성경변역본만이 정확하다고 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그리고 성경 어디에서도 킹제임스 성경만이 최상의, 그리고 유일하게 '성스러운' 성경이라고 하는 것을 본 적은 더더욱 없다. 하나님이 그의 말씀을 어떻게 보존하시는지에 관해 말하는 성경구절은 없다. 따라서 킹제임스 성경만이 독보적인 권위를 지닌다는 주장에 대한 성서적인 근거는 없는 것이다.
이에 대한 논쟁은 다른 기준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KJV가 오늘날 우리가 접할 수 있는 성경 중에서 최상의 번역본이 아니라는 나의 믿음은 두가지 일반적인 주장을 토대로 한다. 그것은 첫째 KJV(신약)이 바탕으로 삼고 있는 희랍 원문이 열등하다는 점과,
둘째는 그것의 번역 자체가 (역사적, 언어적인 문제로 인해서)그리 훌륭치 못하다는 점이다.
1.원문의 열등성(The Text is Inferior)
1. KJV(신약)가 토대로 삼고 있는 희랍어 원문은 특정 부분에서 다른 원문들에 비해 열등한 것이 분명하다. 그 원문의 편집자는 에라스무스라는 인문주의자였다. 그는 가능한한 빨리 인쇄해야 한다는 압박감 속에 있었다.
그 첫째 이유는 그 당시까지도 아직 희랍어 신약성서본이 발간되지 않고 있었다는 것이었지만, 또 다른 이유는 몇몇 수도승들이 그들 나름대로의 희랍어 성서를 발간하려 하고 있다는 소식을 에라스무스가 듣고 그들을 앞서기 위한 경쟁을 벌인데 있었다. 결과적으로 그의 성서본은 모든 문학 작품들 중에서 가장 조악하게 편집된 책으로 불리게 되었다. 또한, 그 책은 에라스무스도 수긍하는 인쇄상의 오류들로 가득차 있다.
그중에서 특히 언급할 만한 것이 두 가지 있다. 에라스무스는 계시록의 마지막 여섯 구절의 희랍어 필사본(MS)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는 전체 신약성서를 편집하는데 단지 6개의 필사본들(MSS)만을 사용하였다.) 그래서 그는 라틴어를 희랍어로 '역번역'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하여 그는 계시록을 기록하고 있는 다른 열 여섯개의 희랍어필사본에서는 결코 찾아볼 수 없는 이형(異形)들을 '창조'해내었다. 결국 그는 희랍어 필사본이 이랬을 것이다 라는 식의 짐작만 했었을 뿐이다.
두 번째는 요한일서 5:7-8에 관한 것이다. 이 구절에서 에라스무스는 '하늘에 증인이 셋이 있는데, 성령과 물과 피니라'라는 대다수 필사본들의 해석을 따랐다. 그러나 몇몇 로마카톨릭 집단들이 이에 격분하였다. 에라스무스의 원문이 이 구절을 '세 증인 있으니 아버지와 말씀과 성령이시니라'라고 해석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에라스무스는 그런 해석을 그의 원문에 넣지 않은 이유가 그 구절을 그런 식으로 해석하는 희랍어 필사본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라고 해명하였다. 그리고 나서 그는 어느 희랍어 필사본에서라도 그와 같은 해석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면 곧 그것을 그이 원문에 적어넣겠다고 함으로써 그 비판을 무마시켰다. 결국의 세 번째 판본은 두 번째의 해석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아마도 첫 번째 해석에 대한 비판을 만족시키기 위한 희랍어 필사본이 '만들어졌던 것' 같다. 그러나 오늘날까지도 요한일서 5:7-8의 구절 속에 삼위일체교리가 담겨져 있는 희랍어 필사본은 단지 세 개만이 발견되고 있을 뿐이다.
이점은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왜냐하면 킹제임스성경이 토대로 삼고 있는 원문에 관한 매우 중요한 문제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원문비평가들은 삼위일체 교리를 전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물론 복음주의적 원문비평가들은 무두가 그렇다.) 따라서 그들 대부분은 삼위일체 교리를 요한일서 5:7-8가 분명하게 제시해 주기를 원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한 본문해석이 과도한 열정을 지닌 몇몇 필사가들에 의해서 꾸며진 얘기에 불과한 것으로 보기 때문에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킹제임스 성경이 지나친 열정을 지닌 필사가들에 의해 '꾸며진' 해석들로 가득차 있다는 데 있다. 킹제임스 성경의 독특한 해석들의 거의 대부분이 정말 고대로부터 전해져 온 것들인지가 불분명하다. 대부분의 원문 비평가들은 가장 오래된 필사본일수록 친필본이 만들어진 시기에 가깝기 때문에 더 믿을만할 것이라는 합리적인 주장을 받아들인다. 사실 나 자신은 킹제임스 성경의 많은 해석들이 그대로 남아 있길 원한다.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의 이야기(요한복음 8:1-11)는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이야기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었다. 디모데전서 3:16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으로 불리고 있는 것은 그분에 관한 나의 이제까지의 견해를 확증한다.(참조: 요한복음 3:13, 요한일서 5:7-8, 요한복음 5:4등도 역시 그렇다).
그러나 그 필사가들이 내용을 빼기보다는 첨가해넣는 경향이 더 많았다는 것과 그러한 첨가작업의 대부분이 친필본에 가까운 필사본에서 보다는 최근의 필사본에서 더 많이 나타나고 있다는 원문상의 증거를 보게 되었을 때, 나는 내가 늘 감성적으로 받아들였던 구절들이 더 이상 이성적으로 수용하기에는 매우 어려운 것들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따라서 학자들이 무슨 악의가 있어 우리가 좋아하는 구절들을 신약성서에서 빼내고 있는 것은 아닌 것이다. 단지 그들이 보다 오래되고, 보다 나은 필사본에서는 그 구절들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KJV는 친절하게 첨가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성경을 보다 완벽하게 보이려고 분식을 하고 있는데 이는 원본과는 거리가 멀어진다-편집자 주)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구절들 속에 포함되어 있던 교리 자체에 무슨 문제가 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나의 믿음이 디모데전서 3:16과 함께 운명을 같이하는 것은 아니다(그 신발은 다른 발에도 신겨질 수 있다. 초기의 필사본(그리고 더 최근의 번역들)은 요한복음 1:18안에서 그리스도의 신성을 확증하고 있다. 그러나 KJV에서는 이를 찾아볼 수 없다). 사실상 성경의 그 어떠한 교리도 원문들의 차이로 인한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사실이 계속적으로 증명되어 왔다. 정말 그렇다면 '오직 킹제임스만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야말로 황야에서 울부짓고 있는 늑대들일 뿐이지, 복음을 진보시키는 중요한 일에 전념하는 사람들은 아닌 것이다. 반면, 삭제된 구절들은 대개 우리에게 난처한 문제를 안겨주었던 것들이다. 예를 들어서 로마서 8:1을 보자. 비교적 최근의 필사본들은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라는 구절 뒤에 "그는 육신을 따라서 살지 않고, 성령을 따라서 산다"라는 구절을 첨가한다. KSJ는 이와 같이 긴 해석을 받아들이고 있다. -아마도 이와 같은 구절을 첨가한 것은 값없이 주어지는 은혜(fee grace)에 관한 바울의 교리를 '누그려뜨리려(tone down)'라는 의도에 의해서 이루어졌던 것 같다.(마가복음 16:9-20 참조)
2. 최근의 번역본들이 특정의 단어나 구절들을 '빠뜨리고(omit)' 있음이 사실이기는 하지만(당신이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KJV은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에 다른 것들을 첨가하고 있다)이것이 흑백논리의 잣대로 잴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가장 오래된 필사본들은 제쳐두고, 필사본 대다수의 내용을 기준으로 해서 만들어진 가장 최근의 한 희랍 신약성서본은(그럼으로써 KJV을 강력하게 지지하는) 대개의 현대 번역본들이 원본으로 사용하고 있는 표준적인 희랍신약성서본과 비교해 볼 때, 대략 605개가 넘는 단어와 구절들을 빠뜨리고 있다! 그러므로 단지 현대 번역본들만이 글자를 빼먹었다 하는 것은 공평하지 못하다. KJV이 기반으로 하고 있는 희랍 원문 역시 단어들을 빠뜨리고 있다. 게다가 KJV가 다른 근대번역본들 모두는 사도행전의 약 10%(거의 세장분의 자료이다)를 - 그 구절들이 몇몇의 고대 필사본들에서는 발견됨에도 불구하고- 빠뜨리고 있다.
많은 신약성서학자들은 그 구절들이 원래의 친필본에는 없었으나 매우 초기에 추가된 것들이라는 사실을 확인하였다(그 구절들은 가장 오래된 필사본과 가장 믿을만한 필사본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대 번역본들이 하나님 말씀의 일부분을 빠뜨렸다라고 비난하는 것은 (계시록 22장으로부터)우선 하나의 위협전술이라고 할 수 있다. 원문에 대한 본래의 해석이 무엇이지를 결정하는 우리의 유일한 기준이 이러한 경계의 말씀(계시록 22장)에 주의하는 것이었다면 아마도 우리의 신약성서들의 내용은 -킹제임스 신약성서를 포함해서 - 지금보다 적어도 25%는 더 불어났을 것이다.
Ⅱ. 해석상의 열등성(The Translation is Inferior)
1. KJV의 번역자들은 그리스어보다는 라틴어를 더 잘 아는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그들의 번역에는 몇몇 오류가 있었다. 특히 세밀한 차이점들이 라틴어로 재현될 수 없는 부분에서 그랬다. 단지 두가지 예만 들어보자. 하나는 문법상의 문제이고 또 하나는 어휘상의 문제이다. KJV의 번역자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에 동의하는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은 그리스어에 있는 이와같은 미세한 차이점을 알아채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이러한 점이 라틴어로는 재현불가능했기 때문이다(라틴어는 그리스어와 달리 정관사가 없기 때문이었다. KJV는 특히 희랍어 관사의 뉘앙스에 민감하지 못하였다. 참조:누가복음 18:13; 요한복음 3:10; 베드로 후서 1:1 등등)
두 번째로 디모데전서 2:12을 보면 KJV는 여자가 '남에 대한 권위를 빼앗는 것'을 금하고 있다. 희랍어는 원래 '......에 대해 권위를 행사하다'라는 말이었다. 그것이 '......에 대한 권위를 빼앗다"라는 의미를 갖기 시작한 것은 신약성서가 쓰여진지 4세기가 지난 후 부터였다. 더군다나 그런 의미가 보편화되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도 상당한 시간이 지난 후 부터였다. 제롬에 의해서 만들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도 상당한 시간이 지난 후 부터였다. 제롬에 의해서 만들어진 라틴어 번역(4세기)은 이 용어를 정확히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에라스무스(KJV가 토대로 하고 있는 희랍어원문의 편집자)는 자신의 라틴어 번역을 제시하였을 뿐만 아니라 희랍어에 대한 그 나름의 이해를 바탕으로 하여 제롬의 라틴어 번역을 수정하였다. 물론 9세기까지는 그 말이 보통은 '......에 대한 권위를 빼앗다'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디모데전서 2:12의 말이 의미하는 바를 잘못 이해하였던 것이다. 킹제임스성서의 번역자들은 이러한 에라스무스의 잘못된 번역을 그대로 채택하고 있다.
2. 킹제임스번역본은 최근의 몇몇 발견들로 인해 이제는 진부한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신약성서에 등장하는 단어들 중의 약 500개의 단어들(거의 10%)이 1895년까지는 성경이외의 다른 고대기록에서는 전혀 발견되지 않고 있었다. 바로 그해에 Adolf Deissmann이라는 한 독일 목사가 '성경공부(Bible
Studies:Bibelstudien)'라는 제목의 책을 출판하였는데 그 제목에 아주 걸맞는 책이었다.
이 책에서 그는 비문학적인 파피루스들(사업문서, 영수증, 유서, 세탁물 목록, 사적인 편지 등)에서 발견된 그 500개 단어들의 예들을 하나하나 제시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 중 약 50개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단어들의 의미가 그 고대의 파피루스들 속에서 입증되었다. 이 파피루스들의 발견은 신약성서에서 사용된 막대한 양의 단어들 - 흔히 사용되는 단어들까지 포함해서-에 관한 우리의 이해를 엄청난 정도로 촉진시켰다. Deissmann의(그리고 후속 학자들의) 연구는 본질적으로 두가지 점을 논증하고 있다.
(1) 1895년까지, 신약성서 어휘에 대한 성서번역자들의 이해의 상당한 부분이 단지 어림짐작에 지나지 않았다. 많은 경우, 그들의 추측은 옳지 않았다. 이러한 사실 하나만으로도 1985년 이전에 이루어진 번역들은 진부한 것들로 치부되기에 족하다.
(2) 신약성서의 언어는 아테네, 카르타고, 알렉산드리아, 에베소 등지의 거리에서 흔히 쓰던 보통의 말이었다. 그것은 소수의 전수자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신성한 말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본질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번역은 신약성서 저자들의 의도를 벗어나는 것이다.(이 점에 대해서는 다음에 더 논할 예정이다.)
3. KJV가 처음 출판되었을 땐, 이해하기 너무 쉽다는 점에 대한 저항이 있었다. 그런데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이해하기 어렵다는 점 때문에 그것을 경외한다. 나는 그들의 그러한 반응이 자만심에서부터 나온 것이 아닐까 두렵다. 그들은 마치 다른 보통의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자신들이 이해하고 있는 듯이 생각한다. 종종 고린도전서 2:13-16이 KJV('당신이 영적이라면 그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라는 점을 암시하면서)와 관련해서 인용되곤 한다.
그러나 그런 식의 본문 인용은 성경에 대한 커다란 곡해이다. 신약성서의 단어들, 문법, 문체, 등등- 한마디로, 언어(language)- 은 1세기의 보통 언어였다. 만약에 우리가 하나님께서 처음 시도하셨던 것보다 복음을 더 이해하기 어렵게 만들고 있다면 우리는 사실상 하나님께 잘못을 하고 있는 것이다. 영적이지 못한 사람들이 성경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그들의 의지의 문제이지 지성의 문제는 아니기 때문이다. (참조:고린도전서 2:14. 여기서 '영접하다', '환영하다'라는 말들은 복음에 대한 이해를 막는 것이 인간의 악한 의지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준다.)
4. 영어는 계속적으로 변해왔다: Deissmann이 희랍신약성서의 언어에 관해 중요한 발견을 하기 전에 이미 KJV의 진부성이 들어나고 있었다. 1611년에는 정확했던 KJV의 단어들이 이제는 매우 다른 것을 의미하는 말들이 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 정확히 말하면 KJV의 단어들 중 약 300개가 이제는 더 이상 처음과 같은 뜻을 지니고 있지 있다. 한 예가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내버려두어라(suffer)'와 같은 구절에서 사용된 suffer라는 단어이다. 어떤 성경이 명확히 이해되지 않는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왜곡, 곡해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최상의 번역이라고 해야할까?
5. KJV은 명백한 번역상의 오류를 갖고 있다. 이것은 KJV의 지지자들까지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인쇄상의 오류이지, 번역자들이 희랍 텍스트를 오해해서 생긴 오류는 아니다.) 마태복음 23:24에 '하루살이에는 저항하고(straubat), 약대는 삼키는도다'라는 구절이 있다. 그러나 희랍어 성경에는 이것이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는 삼키는도다'라고 되어 있다. 이것은 최소한 어떤 번역본도 흠이 없을 수는 없다는 것, 그리고 어떤 번역본도 필사과정에서 오류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것, 또 실제로 오류가 발생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KJV은 매우 커다란 위원회의 산물이었다)
Ⅲ. 기타
1. '오직 킹제임스만이'를 주장하는 몇몇 사람들은 단지 KJV만이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성경이라 확신한다. 그러나 이 번역본은 1611년 처음 만들어진 이래로 3번이나 개정을 거쳤다. 그 과정 속에서 10만개 이상의 수정이 있었다(이것은 뉴킹제임스판을 만들 때의 급격한 변화는 포함하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이중 어떤 킹제임스성경이 영감을 받은 것인가?
2. KJV만이 '성경(Holy Bible)'이라고 불릴 수 있는 배타적인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신기하게도 모두 영어를 사용하는 사람들(고립되어 있는 미국인들)이었다. 그러나 독일어로 아주 정교하게 번역된 마르틴 루터의 성경은 KJV보다 거의 100여년을 앞서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오직 영어로만 말씀하신다고 말할 정도로 오만하지는 않는가? 루터의 성서와 KJV 간의 본질적 차이가 있을 경우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느 하나에만 영감을 불어 넣으셨다고 해야 할까?
우리의 신앙은 어떤 하나의 단일한 전통에 의존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지역적인 것도 아니다. 성서적 기독교는 결코 지역주의(provincialism)에 빠져서는 안된다. 다른 무엇보다도 선교를 위한 노력이 기독교를 생동감있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3. 대부분의 복음주의적인 사람들- 그들은 신앙의 기본적인 교리를 모두 받아들인다-은 KJV가 토대로 삼고 있는 것과는 다른 원문(text)과 해석을 좋아한다. KJV을 기반으로 하여 만들어진 New Scofield Reference Bible 조차도 KJV와는 다른 원문과 번역을 선호하고 있다.
Ⅳ. 결론
아직도 킹제임스 성경은 영어로 된 문학작품 중 최고의 기념비로 우뚝 서있다. 그 성경은 세익스피어가 한창 전성기에 있던 시기, 말하자면 영국 언어의 황금기에 쓰여졌기 때문이다. 번역위원회는 성서원본 뿐만 아니라 훌륭하고 문학적인 영어 문체에도 신경을 썼다. 표현미에 있어서 오늘날의 어떤 성경도 KJV와 겨룰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것 나름대로의 생명력을 갖게는 되었지만 원래의 신약성서와는 크게 멀어지게 되었다. 피리소리로 순진한 아이들을 꾀어내던 전설상의 피리부는 남자처럼, KJV은 그것의 아름다움에 반해 미와 진리를 혼동하는 추종자들을 얻어내었다. 이것은 마치 굉장한 미술작품이면서도 역사적인 사실에서는 부정확한 것으로 판명되는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과도 같다. 킹제임스성경은 정말로 대단한 걸작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의 결함은 미적인 데에 있지 않고 그의 정확성에 있다.
킹제임스 성경이 가장 훌륭한 번역본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이유에 대한 나의 간략한 검토는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고 믿는다. 우리 모두는 어떤 일들을 과장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그렇게 과장된 것 위에다 큰 성채를 세우곤 한다. 우리는 종종 진정한 경외심에서가 아니라 감정에 의해서 어떤 것에 매달린다. 만약 정말로 그렇다면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죽어가는 세상에 대해 잘못을 범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주는 '명확하고도' 강력한 음성을 거의 필사적으로 필요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이.
1991년 김용찬 번역/ 양세영 감수 및 편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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