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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들은 왜 큐티(Quiet Time)를 하는가?

기독교인들은 왜 큐티(Quiet Time)를 하는가?

오늘날 교회 안에는 "큐티"라는 것이 유행병처럼 번져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큐티"를 왜 하는 것일까요?
무엇 때문에 "큐티"를 하는 것일까요?
'큐티하는 것이 무엇이 잘못되었습니까?'하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오늘날 행하고 있는 큐티라는 것이 과연 성경적일까요?
많은 성도들이 주일날 예배 가운데 들은 설교를 만족해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큐티를 통해서 자기 만족을 구하고 살아가는 경우가 너무 허다합니다.
한국교회에는 주일오전예배, 주일오후예배, 수요일, 금요구역예배(심야기도회)가 기본으로 있습니다.
그 예배 가운데 들은 말씀으로는 부족하고, 왜 굳이 자신들이 큐티를 해야만 할까요?
 
먼저 아래의 글을 읽어 보시면,
지금 진행되고 있는 큐티가 어떤 방향으로 나가는지 알 수가 있습니다.

----------- 인용 자료 시작 -------------
평범한 큐티를 넘어서
Posted 2011/02/01 00:00, Filed under: I'm journaling/숨어있는책, 눈에띄는 책
QTzine 3월호에 실릴 글이다. 설 연휴가 길어 모든 필자들이 며칠씩 당겨
쓰고 있는데, 나도 이 흐름에 동참했다.^^ 작년 8월 선교한국 북테이블에서 사서
사무실 책꽂이에 꽂아두고 있다가 읽기 시작했는데, 큐티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렉시오 디비나(Lectio Divina)로 넘어가야 한다는 신선한 주장으로 눈길을
끈다. 저자는 엠비와 고소영에 목회자간 폭력 등으로 시끄러운 소망교회
부목사다. 그래도 이런 이들 때문에 그 교회도 소망이 있는지 모르겠다.
 
지난호에 이어 이번 달에도 만만치 않은 내공을 간직하고 있는 신흥 고수를
선보일까 한다. 이번에는 외국 저자가 아닌 국내 저자인데, 다른 분야가 아닌
신앙생활의 기초 중의 기초를 이루는 말씀생활과 기도생활을 함께 다루고, 나온 지
이제 막 1년이 되어 가지만 아직 존재감이 별로 부각되지 않고 숨어 있는 책이다.

그도 그럴 것이 『말씀묵상기도』(스텝스톤, 2010)란 제목은 다소 밋밋하고
크게 새로울 게 없어 보이며, 이경용이란 저자도 이름이 생소하고, 스텝스톤이란
영어로 붙인 출판사 이름도 처음 들어봤다. 여러 모로 눈에 안 띌 만했는데,
숨은 보석이었다.

스텝 스톤은 도서출판 예수전도단의 영성․지성․인성 계발 전문 브랜드인데,
그러고 보니 지난호에 소개한 토니 존스가 렉시오 디비나에 대해 쓴 『하나님을
읽는 연습』도 예수전도단에서 나왔다.

저자는 요즘 안 좋은 일로 다시 구설수에 오른 소망교회 부목사로,
토론토대학과 풀러신학교에서 영성신학을 공부했다. 『칼빈과 이냐시오의 영성』
(대한기독교서회, 2010) 등 세 권의 책을 냈다지만, 널리 알려진 목회자, 영성가,․
저술가는 아닌 듯하다.

단도직입적으로 이 책이 깊은 인상을 준 것은 결론부의 마지막 문장 때문이다.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기도하는 그리스도인이 많음에도 세상이 변하지
않는 것은 왜일까? 아니, 묵상하는 우리 자신이 변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말씀을 묵상하고 쪼개지만, 말씀이 나를 쪼개지 못했기 때문은 아닐까?
그러려면 큐티를 넘어서 관상적 큐티로 나가야 한다. (206면)

시나브로 큐티를 생활화 하고 있는 개인과 한국교회를 향한 점잖지만
통렬한 비판이었다. 큐티 전문지를 만들고, 큐티 사역을 하면서 신앙생활에서
큐티가 가장 기본이 되고 중요하다고 입버릇처럼 강조하는 나 자신을 돌아보게
만드는 한 마디였다. 그렇다면 저자가 강조하는 관상적 큐티는 뭘까?
우리가 지금까지 해 온 큐티와 뭐가 다른 걸까?

저자는 큐티는 말씀묵상으로, 관상적 큐티는 여기에 하나를 덧붙인
말씀묵상기도라고 부른다. 물론 큐티할 때도 기도로 시작하고 기도로 마치지만,
저자가 말하는 기도는 렉시오 디비나(Lectio Divina)에서 말하는 관상적 기도다.

렉시오 디비나와 관련해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11-12세기에 활동한
카르투지오회의 수도사 귀고 2세(Guigo 2, ?-1118)이다. 그는 <수도승의 사다리>란
별칭으로 알려져 있는 <관상생활에 관한 편지>(이 책의 부록 2에 전문 수록)로
영성가들 사이에 알려져 있는데, 이 편지는 중세 말기에 많은 수도사들에게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이 서신에서 그는 하나님과의 일치를 위해 수도사들이 추구해야 할 영적 과정을
야곱의 사다리처럼 하늘에 맞닿은 네 칸 짜리 사다리를 한 칸씩 오르는 것에
비유했다. 독서(Lectio), 묵상(Meditatio), 기도(Oratio), 관상(Contemplatio)의
네 단계는 렉시오 디비나, 즉 말씀묵상기도의 틀이 되었다(72-74면).

저자는 서문과 1장에서 한국 교회의 기도 트렌드가 집단과 군중에서 개인으로,
부르짖는 통성기도에서 잠잠한 침묵기도로, 현안 중심의 간청하고 청원하는 기도에서
하나님의 임재에 머무는 관상기도로 변화하려는 조짐이 보인다고 지적하는데,
동의하든 안 하든 경청할 만한 지적이다.

또한 힘쓰고 애써서 기도하는 능동적인 기도가 기도의 전부가 아니라, 좀 더
깊은 기도를 하려면 수동적인 기도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29면). 무엇이든 열심을
강조하는 우리네 풍토에서 수동적인 기도는 어색해 보이고 생소하게 들리는데, 이 책
전반에 걸쳐 사용되는 중요한 개념이다. 요란하기만 하고 뭔가에 들떠 있는 작금의
한국 교회의 부족한 2%를 채우는 대안으로 색다른 매력과 호소력을 느끼게 한다.

1부는 말씀묵상기도가 무엇인지, 2부는 하늘에 맞닿은 사다리를 한 계단씩
오르면서 관상적 큐티를 하는 법을, 3부는 이러한 큐티를 위한 내적․외적 준비를
다루고 있다. 부록 1은 1박2일 또는 2박3일간 리트릿을 가서 말씀묵상기도를 하는
시간표와 가이드를 제공하며, 부록 2는 귀고 2세의 편지 전문을 수록했다.

전체적으로 신자들의 삶과 관련된 예를 많이 들고 있고, 설명하고 주장하기보다는
설득하고 권하기 때문에 그리 어렵지 않게 따라하게 만든다.

묵상 없는 독서는 메마르며, 독서 없는 묵상은 오류에 빠지기 쉽습니다.
묵상 없는 기도는 냉담하고, 기도 없는 묵상은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귀고 2세)
(자료출처 http://jayson.tistory.com/entry/%ED%8F%89%EB%B2%94%ED%95%9C-%ED%81%90%ED%8B%B0%EB%A5%BC-%EB%84%98%EC%96%B4%EC%84%9C)
------------ 인용 자료 끝 --------------
 
이 글은 큐티를 관상큐티를 해야 한다고 장려하고 있습니다.
이런 일을 앞장 서는 것은 두란노의 "천만큐티운동본부"입니다.
"관상큐티" 프로그램을 운영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그릇된 길로 인도하고 있습니다.

아래 글을 읽어 보시면 아시겠지만,
두란노의 "천만큐티운동본부"는
신비주의 영성이요 퀘이커교도의 이단 영성을 실현하는 레노바레와 연결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은 분명히 기독교 교리와 맞지 않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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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 영적 일치를 경험하는 관상적 삶
 
영성에 대해 관심이 많은데, 영성과 ‘관상’(觀想) 기도의 상호 관계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요즘 영성이라는 말이 너무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영성에는 몇 가지 흐름이 있습니다. 기독교의 영성에 대해 게리 토머스(Gary Thomas)는 아홉 가지로 분류하고, 리처드 포스트(Richard J. Foster)는 여섯 가지 생수의 강에 비유합니다.
이를 좀더 단순화시켜 네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곧 하나님의 진리를 추구하는 복음주의(Evangelicalism) 전통, 하나님의 은사를 추구하는 오순절주의(Pentecostalism) 전통, 하나님의 정의를 추구하는 사회복음주의(Socio-evangelicalism) 전통, 하나님의 사랑을 추구하는 수도원주의(Monasticism) 전통입니다. 네 가지 전통은 각각 독특한 영성적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네 가지 색깔이 함께 어우러져 기독교 전체의 영성을 만드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느 한 가지만 고집할 수는 없습니다. 관상 기도는 수도원주의 전통에서 나온 기도에 대한 표현으로서 과거 수도사들의 기도에 관한 노력에서 자연스럽게 등장한 것입니다.

관상 기도라 하면 가톨릭적 느낌이 강한데, 복음주의적 관점에서 관상 기도란 무엇입니까?
사실 종교개혁 이전에는 개신교와 가톨릭을 구분할 수 없습니다. 또한 종교개혁 이후 가톨릭 안에서도 관상 기도의 전통이 실종되었습니다. 그러다 20세기에 들어와서 관상 기도가 가톨릭 안에서 새롭게 조명받기 시작한 것이죠. 하지만 개신교 안에서도 관상 기도의 명맥을 유지해 왔다고 봅니다. 즉 퀘이커교나 재세례파의 전통에서 꾸준히 이어져 왔습니다. 그리고 20년 전부터 개신교 안에서 복음주의 학생 운동을 통해 큐티(개인 경건의 시간)의 활성화로 인해 확산되기 시작했습니다.
큐티와 관상 기도에는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습니다. 관상 기도가 구체적이고 정형화된 형태로 자리 잡게 된 때는 12세기입니다. 당시 카르투지오회 수도사인 귀고(Guigo) 2세가 ‘기도의 사다리’라고 해서 관상 기도를 4단계로 체계화했습니다. 그 첫 번째가 ‘렉티오 디비나’(Lectio Divina)로서 거룩한 독서인 성경 읽기, 두 번째가 ‘메디타티오’(Medidtatio)로서 묵상하기, 세 번째가 ‘오라티오’(Oratio)로서 기도하기, 네 번째가 ‘콘템프라티오’(Contemplatio)로서 관상하기입니다. 여기서 앞의 세 단계인 말씀을 읽고 묵상을 하며 기도를 하는 것은 오늘날의 큐티와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그런데 전통적인 관상 기도에서 큐티가 생략하는 부분이 있다면 바로 관상하기입니다. 이는 침묵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단계입니다.
지금 제가 하고 있는 관상 기도 세미나는 오랜 관상 기도의 전통에서 생략되었던 네 번째 단계의 관상하기를 다시 회복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관상 기도는 개신교에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며, 그동안 소홀히 다뤘던 부분을 보완하는 것이기 때문에 민감하게 반응하거나 어색해 하거나 부담스러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특별히 목사님께서 관상 기도에 관심을 갖게 된 동기가 한국 교회의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한국 교회의 대표적인 기도는 통성 기도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한국 교회의 통성 기도를 평양대부흥 운동을 통해 자생한 한국 고유의 기도 형태라고 말합니다. 저의 개인적 신앙 생활과 목회 경험을 돌아볼 때, 통성 기도를 통해 많은 유익을 얻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지금도 교회를 꾸려가면서 통성 기도는 중요한 기도의 방법이 됩니다. 하지만 저는 통성 기도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기도의 영역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두 가지의 기도 운동이 필요합니다. 하나는 중보 기도 운동이며, 다른 하나는 관상 기도 운동입니다. 중보 기도를 영적 전쟁이라고 한다면, 관상 기도는 영적 안식입니다. 우리가 전쟁만 할 수 없듯이 안식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최근에 한국 교회는 중보 기도라는 영적 전쟁에 많은 강조점을 둬 왔습니다. 그러나 주님 안에 머무는 안식을 통해 진정한 쉼을 얻고 하나님과의 사랑을 더 깊이 경험해야 합니다. 마귀를 향한 대적도 필요하지만, 하나님의 사랑과 영적 일치를 경험하는 것이 더욱 필요합니다. 지금까지 한국 교회가 이런 부분을 등한시한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사실 이것은 제 자신과 저희 교회에 대한 반성과 필요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를 위해 몇 년 전에 안식년을 가지면서 제 자신부터 관상 기도에 대해 구체적으로 경험하며, 이를 저희 교회의 상황에 맞도록 해야겠다는 노력으로 이어졌습니다.
가톨릭에서 하는 관상 기도는 개신교의 상황과 맞지 않는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따라서 잘못하면 가톨릭의 것을 그대로 옮겨올 수도 있는데, 이를 개신교의 상황에 맞게 다듬었습니다. 지금 세계적으로 일고 있는 관상 기도 운동에 우리가 경계하고 조심해야 할 부분이 많은 것은 사실입니다. 따라서 관상 기도를 무턱대고 포기한다는 것은 너무 안타까운 일이고 복음주의적으로 승화시키는 일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다면 관상 기도에 대해 정의해 주십시오.
어떤 사람들은 관상 기도를 관성의 기도, 관조의 기도, 마음의 기도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관상이 아닌 것이 무엇이냐고 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관상을 동양적 명상과 같이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이죠. 그 둘의 출발과 목표는 다릅니다. 동양적 명상은 자신의 마음을 다스림에서 출발하지만, 관상 기도는 거룩한 독서라는 성경 읽기에서 출발합니다. 그리고 관상 기도의 목표는 하나님과의 영적이고 인격적인 일치와 연합입니다. 즉 요한복음 15장에서 말씀하시는 ‘내가 주님 안에, 주님이 내 안에 거하시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관상 기도란 하나님의 임재를 의미하며, 하나님과 사랑의 일치를 목표로 깊은 묵상과 관조를 통해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 안에 머무는 기도입니다.

관상 기도 방법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 있습니까?
일반적으로 큐티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다만 여기에 관상하기를 포함하는 것입니다. 관상에 들어가기 위한 중요한 방법은 침묵입니다. 관상 수련가가 말하기를 “하나님의 임재 속으로 들어가는 패스워드는 침묵이다.” “침묵은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성소이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들 가운데 계시지만 우리의 마음과 입술이 침묵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그분의 음성을 들을 수 없다”라고 했습니다. 침묵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개신교인들에게 이런 침묵의 훈련이 부족했다고 생각합니다. 일상적 기도 생활과 함께 깊은 침묵의 시간과 공간이 필요합니다.

기도는 삶과 연결돼야 합니다. 관상 기도를 통해 추구해야 하는 삶의 자세와 태도는 무엇입니까?
관상 기도의 궁극적 목표는 관상적 삶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관상적 삶이란 한마디로 서두르지 않는 것입니다. 한 박자 느리게 사는 것이죠. 그 이유는 하나님 안에 머물면서 살기 위함입니다. 즉 기도가 삶이 되고 삶이 기도가 돼야 합니다. 하지만 현대인의 삶은 감정과 스트레스에 지배당합니다. 호흡하고 생각하면서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는 여유를 갖지 못합니다. 마르바 던이 「안식」이라는 책에서 “안식하지 못하는 최고의 원인은 우리가 하나님이 되려고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 되기를 그쳐야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모든 것들을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갖고 역기능적 인생을 살고 있는데, 하나님으로 하여금 하나님이 되게 하자는 것이죠. 이것이 진정한 관상적 삶입니다. 관상적 삶이라고 해서 일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일과 안식의 리듬을 회복해 주님 안에 머무는 삶을 살자는 것입니다.

관상 기도 세미나를 진행하시고 있는데 그 과정에 대해 소개해 주십시오.
일년에 한 번 3박 4일 일정으로 관상 기도 세미나를 진행합니다. 그리고 저희 교회 교인들을 대상으로 세미나와 훈련 과정을 꾸준히 진행하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하는 관상 기도 훈련에는 관상 치유라고 하는 10주 과정의 프로그램이 있고, 관상 큐티라고 하는 5주 과정의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관상 기도가 교회 안에서 자리 잡기 위한 가장 쉬운 방법으로 기존의 큐티를 보완해 관상 기도를 훈련할 수 있다. 개인적 기도 생활뿐 아니라, 교회의 전체 기도회를 진행하면서 통성 기도와 침묵 기도를 병행한다면 관상 기도를 충분히 훈련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관상 기도를 체험하고 적용하면서 기존의 큐티를 관상 큐티로 바꿨습니다. 그래서 매일 아침에 한 시간 정도 관상 큐티를 하고 있습니다. 또한 기독교의 전통적인 기도를 통해 볼 때 많은 영성가들이 시간을 정해 기도해왔듯이, 관상 큐티도 아침에 한 번만 하고 마는 게 아닙니다. 아침에는 좀 여유를 갖고 관상 큐티와 기도를 하고, 정해진 시간에 따라 오후와 저녁으로 관상 기도를 합니다. 이때 관상 기도의 네 단계를 모두 하는 게 아니라 성경 읽기와 묵상하기를 생략한 기도하기와 침묵하기만 합니다. 이를 통해 아침에 가졌던 영성적 분위기를 하루 종일 이어가는 것이죠. 사실 아침에 큐티를 하지만, 하루 종일 바쁘게 살다보면 묵상의 내용을 잊어버릴 때가 많지 않습니까? 그리고 관상 기도 안에도 여러 가지 방법이 있는데, 저는 시간이 날 때마다 깊은 호흡을 하면서 주님의 이름을 짧게 부르고 호흡 기도를 합니다. 그렇게 하면, 하루를 온전히 기도로 살 수 있습니다.

한국 교회의 목회 환경에서 관상 기도와 삶이 갖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한국 교회가 지나치리만큼 경쟁적인 것 같아요. 좁은 땅덩이에서 서로의 사역과 교회를 비교하다 보면 쉽게 경쟁적이 되고 맙니다. 이로 인해 목회자들은 적지 않은 부담과 스트레스를 받는 것 같습니다. 물론 저도 예외가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관상 기도를 생활화하면서 이런 부분에서 많이 해방되었고 경쟁적 중압감에서 점점 자유하게 되었지요. 이런 개인적 경험을 통해 한국 목회자들에게도 관상 기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하게 되었습니다. 관상 기도와 삶은 목회자를 자유롭고 여유 있게 만들며, 조급함과 경쟁심에서 해방시켜 주며,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행복한 목회 활동을 하게 합니다. 따라서 지금 한국 교회의 상황에서 무엇보다 관상 기도와 관상적 리더십이 필요합니다.
관상적 리더십은 지배와 효율을 강조하는 현대 리더십 이론이 갖고 있는 병리적 요소로부터 목회자들을 자유롭게 합니다. 예수님의 리더십을 이야기할 때, 섬김의 리더십을 많이 강조하지만, 그것으로 예수님의 리더십을 모두 포괄할 수 없기 때문에 관상적 리더십이 더욱 큰 개념이라고 생각합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께서 전도하고 돌아와 자신들의 사역 결과를 보고하려는 제자들에게 한적한 곳으로 가서 쉴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예수님께는 ‘한적한 곳’이라는 관성적 공간을 갖고 계셨습니다.

관상 기도 세미나에 대한 앞으로 계획은 무엇입니까?
관상 기도를 적용하면서 자신과 목회에 많은 도움이 되었기 때문에 관심 있는 분들을 중심으로 해서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이를 통해 한국 교회가 더욱 건강해질 수 있다고 봅니다. 지금은 리처드 포스트가 중심이 된 레노바레(http:// www.renovare.org)와 연결해 몇 가지 활동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한국 교회에 관상적 영성이 자연스럽게 파급되고, 관상적 목회를 통해 내적 치유와 영적 자유를 경험하는 목회자들이 늘어나길 바랍니다.
(자료출처 http://qt1000.duranno.com/moksin/detail.asp?CTS_YER=2006&CTS_MON=5&CTS_ID=54269&CTS_CTG_COD=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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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는 개신교나 가톨릭이나 구분이 없었다고 말하면서,
관상큐티를 하는 것이 괜찮다고 말하는 것은 분명히 잘못된 것입니다.
이 글에서 보듯이 퀘이커교도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습니다.
퀘이커교도를 이단이라 하지 않습니다.
동양의 명상과 다른 것이라고 말합니다.
과연 그 말에 신뢰를 할 수 있을까요? 그러면 왜 이렇게 말할까요?
 
<관상에 들어가기 위한 중요한 방법은 침묵입니다.
관상 수련가가 말하기를 “하나님의 임재 속으로 들어가는 패스워드는 침묵이다.”>
 
이런 것들은 동양의 명상에서 하는 것과 똑같은 방법입니다.
말은 아니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동양의 명상과 똑같이 합니다.
이 글에서 말하듯이, "관상수련가"라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두란노의 "천만큐티운동본부"는 "관상수련가"의 말을 인용할까요?
"관상수련가"라 함은 동양의 명상가들이 하는 것을 그대로 하는 사람인데 말입니다.
이런 것을 두고 속임수라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런 침묵으로 들어가면 무슨 일이 생기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구상화(visualization)이라는 전체 과정으로 인도됩니다.
결국 뉴에이지 영성으로 물들게 되는 것입니다.
 
주일 설교만으로 만족하지 않는 현대교회 신자들,
주일 설교대로 살아가지 않으면서도 자기만의 묵상을 즐기는 현대교회 신자들,
그들은 과연 누구일까요? 그들은 무엇 때문에 큐티를 할까요?
과연 그들이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큐티를 버리고 주일날 들은 그 말씀대로 실제로 살아가는 신자가 되어야만 합니다.
설교는 현대인들이 즐기는 철학적 유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RPTministries 정태홍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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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 의견 1

  • 주께가까이 · 2013-03-20 16:21
    참으로 심각한 혼합주의와 배교행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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