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상기도는 비성경적이다
그게 아닙니다. 홍정환 님의 글, 김삼 님이 반박
뉴스앤조이 홍정환 님의 김삼 비평을 진작 탐색기에서 발견했으나 여태 반응을 미뤄온 것은 마침 동일주제의 딴 칼럼을 갓 실린 데다 상대방의 애매한 입장 탓이었다. 그는 관상에 대해 반대 쪽은 물론 아니고, 딱히 찬성 쪽이라 하기도 좀 그런, 어정쩡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홍정환 님의 글 사이트는 다음이다.
http://www.newsnjoy.co.kr/news/articleView.html?idxno=20643
그런 헷갈림성 태도는 그 글에 시종일관돼 있다. 님에게서 너무도 많은 의문점을 갖게 되는 이유도 그것이다. 그가 빌린 필자의 글, '관상기도를 즐기는 님들에게'는 아멘넷이 아닌 다른 사이트에 전재된 것이어서 필자의 다른 관상 비판론은 참조되지 않은 점이 다소 유감스럽다. 따라서 그가 세 가지로 요약한 것은 그 글 한 편에 대한 그분 나름의 김삼 요약일 뿐이다.
필자의 비평에 대한 반론을 다시 반박하려니 퍽 길어진 글인데 다음 순서로 전개한다.
'중언부언'의 텍스트적 의미 / 중언부언은 구약에서 입증된다
텍스트 보다 컨텍스트에 치우침 / 마 6:7 후반절의 문제 / 중언부언은 욕구 충족을 위한 반복? / 자가모순의 부단한 번복 / 성경은 묵상과 기도를 구분한다 / "방언기도는 다른 종교에도 존재한다" / '구도적 영성'의 허/실 / '중언부언'의 텍스트적 의미.
"그러나 그대들이 기도할 때는 이교도들처럼 하릴없는 반복 어구를 쓰지 마오.."(마6:7 전반. 필자 사역)
홍정환님은 서두를 다음과 같이 연다.
"우리말 중언부언(重言復言)은 '이미 한 말을 자꾸 되풀이함'을 의미한다. 중언부언의 사전적 정의에 따르자면 관상기도는 중언부언하는 기도가 맞다. 그러나 우리말성경에 번역된 단어의 의미를 살필 때는 국어사전만을 참고해서는 안된다. 원어의 의미를 일차적으로 주지해야 하고, 단어가 어떤 맥락에서 사용되었는지를 파악해야 한다."
김삼이 마치 당초에 '국어사전 참조' 차원에 머무르고 원어적 어의를 전혀 참조하지 않았다는 뉘앙스를 고의적으로 뿌리려는 의도 같은 인상이다. 그도 그럴 것이 글 '1'항의 말미에서도 "중언부언(重言復言)의 사전적 의미를 기계적으로 대입해서 관상기도를 비판하는 것보다(하략).." 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김삼의 전반적인 관상기도 비판도, 마6:7 번역/해석도 그 수준에서 시도했다는 얘기가 돼 버린다.
그는 또 "성경에서 말하는 중언부언이란 어떤 상태를 의미하는 것일까?" 란 물음을 던진 뒤 호크마 주석을 인용함으로써 그것이 전부인 양 답변을 대신하다시피 했다. 그러나 정작 핵심적 어의(語義)를 빠뜨린 호크마 주석이 님의 입장에 가장 유리한 탓에 그것만 인용한 것 같다.
이에 따라 본 필자도 관련 원문 주해 자료를 참조해 본다. 해당 성구인 마태복음 6:7의 '중언부언'(그리스어 동사 원형: '바탈로게오')에 관한 (스트롱 자전 945번에 대한) 조셉 헨리 테이어 렉시콘(Thayer's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Coded with Strong's Concordance Numbers)의 같은 항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1) to stammer. 말을 더듬다
2) to repeat the same things over and over, to use many idle words, to babble, prate. 똑같은 말을 자꾸 되뇌다. 하릴 없는(실없는) 낱말들을 사용하다, 중얼거리다, 수다를 떨다. Some suppose the word derived from Battus, a king of Cyrene, who is said to have stuttered; others from Battus, an author of tedious and wordy poems.
위에서 (홍정환님이 굳이 지적한) 어원의 내력이야 어떻든 간에 '바탈라게오'의 가장 중요한 이차적인 뜻은 단순히 똑같은 말을 거듭거듭 되뇐다는 뜻이다. '말을 더듬다'가 일차적 어의라고 해서 이차적 어의가 중요하지 않은 듯한 논리는 단편적이다. 그런데 위의 이차적 어의는 분명히(!) 현재 관상권 일각에서 하는 문구 반복 또는 힌두교나 티벹 불교의 만트라와 거의 다름없는 행태를 가리킨다.
홍정환님의 일가견이야 어떻든 간에 주님은 분명히 당대 이교도들의 중언부언 관습을 지적하셨음이 틀림없다는 것이 필자의 확신이다.
후반절에서도 주님이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라고 하신 것은 구구절절 미사여구를 읊어가며 하는 긴 기도를 뜻하는 게 아니다. 이교도들은 기도를 하다 보니 말은 많이 해야 할 것 같고 말 못 하는 우상 앞에서 할 말은 별로 없다보니 대신 똑 같은 말을 자꾸 되뇌서라도 말을 늘리고 시간을 끌 수 밖에 없음을 암시하신 것이다. 만트라의 성격이 그와 대동소이하다.
홍정환 님이 아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오리지널에 가까운 관상가들 다수는 이 만트라 기법을 관상에 적극 활용해 왔다. 미국 관상가 다수가 '만트라' 용어를 쓰고 있음만 봐도 알 수 있다.
중언부언은 구약에서 입증된다.
이같은 이교적 중언부언의 구체적인 예를 들어 보자. 왕들a(열왕상) 18장에 기록된 엘리야의 카르멜 산에서의 바알/대치사건을 보면 이교도들의 전형적인 중언부언이 나타난다. 즉 바알/아쉐라 우상숭배자들은 엘리야의 조롱까지 들어가며, 또 몸을 자해하며 아침부터 저녁까지 "바알, 우리에게 응답하소서!" 만 외쳤다.
반면 엘리야는 이렇게 기도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신 것과 내가 주의 종인 것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 알게 하옵소서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에게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그들의 마음을 되돌이키심을 알게 하옵소서."
이교도들의 중언부언형 기도, 하나님의 사람의 기도의 극적인 차이다! 그런데 관상자들의 기도는 뒤엣것보다는 앞엣것을 더 닮아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이제..필자의 견해를 뒷받침하는 영문 버전들을 여기 나열해 본다. 후반절은 [지면상] 생략한다.
When you pray, don’t babble on and on as people of other religions do.. NLB(New Living Bible).
When you pray, don't babble like the idolaters,..
HCSB(Holman Christian Standard Bible)
And in your prayer do not make use of the same words again and again, as the Gentiles do:.. BBE(Bible in Basic English)
In praying, do not babble like the pagans,..
NAB(New American Bible)
And when you pray, do not keep on babbling like pagans,..
NIV(New Internatinal Version)
And when you pray, do not heap up phrases (multiply words, repeating the same ones over and over) as the Gentiles do,..[I Kings 18:25-29.] 확대역(Amplified).
특히 위의 끝 버전 확대역은 구체적인 중언부언의 예로서 필자처럼 왕들a 18:25~29을 들고 있음을 눈여겨 보라!
텍스트 보다 컨텍스트에 치우침.
그 다음..홍정환님은 일대 모험을 전개하고 있다. 중언부언이란 낱말 하나를 번역하기 위해서는 산상보훈 전체의 컨텍스트를 참조해야 한다는 것. 필자가 보기엔 억지주장이다. 지름길로 곧장 가기보다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에둘러 가는 쪽이다. 산상보훈 전체가 중언부언의 설명을 위해 존재하기라도 한다는 말인가?
성경본문 번역을 위해서는 텍스트와 컨텍스트 양면을 다 보되 먼저 텍스트 안에서 일차 해결을 봐야 한다. 중언부언 자체가 어떤 어의를 가졌는지 텍스트 안에서 먼저 확인해본 뒤 경우에 따라 컨텍스트를 따질 수도 있다. 이 경우, 앞뒷 장 컨텍스트를 따질 필요도 없이 주위의 몇 절만 참조해도 충분히 뜻이 파악된다. 그런 주장은 번역적이기보다 주해적이며, 핵심을 향해가는 방법으로서는 좀 억지스럽다.
님은 이처럼 주변 컨텍스트를 모조리 끌어들이는 본의 아닌(?) '핵심안개화' 작업 내지 연막전술 같은 과정을 거친 뒤에도 여전히 아쉬운 양, 계속 (자신이 생각하는) 중언부언의 컨텍스트적 의미에 더 집착하고 있다. 그런데도 그 글을 계속 읽어 내려가다 보면, 중언부언의 개념에 관한 그의 생각도 김삼이 지적한 개념과 별반 다르지 않음을 슬슬 표출하기 시작한다. 본의든 실수이든 간에.. 미처 감지하지 못한 탓인지 아니면 전략상 자신의 입장을 중화시키기 위함인지는 알 수 없다.
마 6:7 후반절의 문제.
홍정환 님은 "..이방인들이 자신들의 기준으로 생각해 무조건 열심히 공을 들이면 신이 들어주실 것이라"라고 나름의 중언부언 개념을 계속 몰고 간다.
여기서 잠시..한 가지 꼭 짚고 넘어가야 할 한 가지 중대한 문제가 발견된다. 그것은 마태복음 6:7 후반부의 한글 번역들이 대부분 오역으로 비친다는 것이다. 우선 이 부분의 한글 번역들을 열거한다.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개역개정)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만 하느님께서 들어주시는 줄 안다(공동번역).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만 들어주시는 줄로 생각한다(표준새번역).
..그들은 많이 말해야 하나님께서 들어 주실 것으로 생각한다(쉬운성경).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 아버지께서 기도를 들어주실 거라고 생각한다(우리말성경).
한글 번역들은 한결같이, 후반절을 존대어미로 표기함으로써 이방인들(Gentiles)/이교도들(Pagans)의 중언부언형 기도의 대상을 유대인(잠정적으로 기독교인들 포함)들의 대상과 동일한 하나님으로 보고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리스어 원문이나 영문에는 그런 낌새가 전혀 없다.
주님이 언급하신 바 이교도들의 기도 대상은 당연히 우상이다! 따라서 이 구절의 후반절은 다음과 같은 식으로 번역돼야 마땅하다고 필자는 본다.
"..그들(이교도들)은 말을 많이 해야만 (그들의 신에게) 들릴 줄로 생각한다네."
[참조/그리스어 원문: .. 가르 호티 엔 테 폴륄로기아 아우톤 에이사쿠스테손타이. 본 절의 그리스어 원문은 웨스트코트-홀트 역, UBS역, 에라스무스-스테파노스의 '수용원문' 등이 거의 똑 같다.]
그런데 홍정환 님 역시도 이같은 한글 오역들의 영역과 차원을 넘지 못했다. 그 역시도 이방인들의 기도 대상을 유대인의 하나님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
중언부언은 욕구 충족을 위한 반복?.
홍정환 님은 중언부언의 개념을 공들이기/치성들이기 차원에서의 욕구 충족을 위한 반복 행위로 컨텍스트적인 해석을 지속한다.
"예수님의 말씀은 이방인들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잘 모르기 때문에 자신들의 기준으로 생각해 무조건 열심히 공을 들이면 하나님이 들어주실 것이라 생각한다는 점을 지적하신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러한 ‘하나님에 대한 오해’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가 아닌 자신의 욕구를 토설하는 기도를 낳게 된다.
즉 하나님에게 졸라서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려는 반복적인 행위를 기도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방인의 기도에 대비되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고자 하는 하나님 아버지의 신실하심을 신뢰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8절로 넘어가면서 결국 중언부언이 단순히 한 문구의 되풀이에 '국한'되지 않는다고 함으로써 본의 아니게(?) 전면에서 일보 후퇴하는 듯이 보인다. 앞에서는 김삼 패기 차원에서 중언부언의 사전적 어의(또는 필자가 말한 테이어 렉시콘의 이차적 어의)가 마치 문맥상 아무 쓸짝 없는 것처럼 묘사하더니 '국한'되지 않는다로 물러선 것이다. "국한되지 않는다"면 중언부언의 사전적 어의가 맞을 수도 있다는 얘기가 되지 않는가?
이상을 간추려보면, 홍정환 님은 두 가지 논리적 범과를 하고 있다. 첫째로, "국한되지 않는다"고 해 놓아 여전히 중언부언의 사전적/이차적 어의도 적용될 가능성을 오픈해두는 동시에 단지 (같은 말의 반복이 아닌) 내용상 말 많음을 주님이 지적하신 것으로 단언한 것. 둘째로, 이교도들의 기도대상은 우상인데도 불구하고 유대인과 같은 하나님으로 혼동한 것, 두 가지다.
그래서 님은 글 '1.' 부분의 결론을 다음과 같이 맺는다.
"중언부언(重言復言)의 사전적 의미를 기계적으로 대입해서 관상기도를 비판하는 것보다 ‘주님의 뜻과 상관없이 계속해서 자신의 욕심을 반복해서 아뢰는 기도’를 비판해야 마땅할 것이다."
그는 관상기도가 만트라와 같은 유형의 녹음기적 반복을 의미함일 수 있는 가능성을 (완전 배제가 아니라) 거의(!) 배제하여 관상기도를 비판할 필요성을 무장해제시키면서, 욕심을 반복하여 아뢰는, 한국교회에 만연하다는 (막달라 마리아를 빗댄) '막 달란 말이야!' 식 기도를 비판해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죄 없는 신앙선진 막달라 마리아의 이름이 악용된 점은 회개해야 한다고 필자는 믿는다.]
그럼으로써 당초 겨냥했던 '김삼 타도' 효과 내지 '홍정환 우세 입증' 효과도 얻는지는 모르나 전체적인 관상비평의 약화 효과도 함께 배태시키고 있다. 그러면서도 마지막 결론에서는 관상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으니 단지 혼동인지 이중효과를 노리는지 자못 혼란스럽다.
자가모순의 부단한 번복.
홍정환 님은 주님이 말씀하신 이교도/이방인들의 기도는 곧 성령의 도움이 아닌 인간의 공로를 의지하며 교회보다 개인을 강조하는 이기적인 기도라고 또 다른 자가해석을 붙인다.
님은 주님이 문제의 본문 뒤에 이어지는 12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기도, 에페소 6:18, 테살로니카a 5:17 등을 인용, 그런 기도를 위해 "관상기도라는 틀이 대단히 유익하다"고 일대 호평을 한다. 그리고 놀랄 만한 모순을 저지른다. 즉 "짤막한 문장(성경구절이나 신앙고백, 기도문 등)을 마음 깊이 묵상하고 되뇌는 과정은.." 함으로써 또다시 앞에서 [단지 김삼이 규명했기에] 그가 부정하는 듯 했던 중언부언의 사전적 어의를 스스로 번복해 지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선 지적만 하고 그냥 넘어가련다.
그는 관상기도가 "성령이 나와 함께 하심을 언제나 인정하며 하나님의 의지에 자신을 순복시키도록 이끌어 준다"고 주장한다. 관상기도에 대한 이 정도의 파악과 확신(?)을 가질 수 있는 정도라면, 홍정환 님은 이미 수준급 관상가이다. 아니면 다른 관상가들의 체험을 베낀 것인가..
그런데 그런 확신 또는 체험이 과연 옳은 것일까? 만약 옳다면, 늘 해온 얘기지만, 왜 파울 등 사도들은 성령께서 절대로(?) 함께 하시는(?) 그 좋은(?) 관상기도(contemplation, contemplative prayer)를 처음부터 방언기도와 맞먹는 기도로 언급하거나 나열하지 않았는가? 일례로, 거의 모든 종류의 기도를 나열한 파울의 계시(예: 엪6:18,19)에서 유독 관상기도는 언급되지 않았는가? 파울의 성령과 관상가들의 '성령'은 다르다는 얘기가 아닌가? 물론 분명히 다르다고 필자는 생각하지만.
성경은 묵상과 기도를 구분한다.
여기서..외람되나마 필자가 익히 아는 성경말씀에 대하여, 관상가들 또는 홍정환 님 같은 친관상주의자들에게 한 수 가르쳐 주고자 한다.
성경은 반드시/분명히(!) 기도와 묵상을 구분한다. 전자는 하나님과의 대화 즉 상호작용, 후자는 자신 속에서 이뤄지는 작용이다[여럿이 같이 하는 묵상도 마찬가지]. 필자 나름으로는, 전자를 인터랙션(interaction) 후자를 이너랙션(inner action)으로 구분하고 싶다. 바꿔 말하면 기도는 대상지향적, 묵상은 자체지향적이다. 이를테면 나의 속 생각 자체가 컴퓨터에서 상대방과 나누는 인터랙션이 동일한 것일 수 없듯, 기도와 묵상은 서로 다르다.
아내감인 레베카를 기다리던 때, 이짜크는 들에서 기도가 아닌 묵상을 했다(창 24:63). 기도는 이미 전부터 해왔고 엘리멜렠을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아내감 고르기/데려오기가 응답됐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관상가들은 이 둘을 혼동한다. 그래서 [묵상+기도] 형 관상기도를 한다.
아마도 관상가들은 다음 구절을 좋아할 것이다.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시19:14, 개역 개정)
그러나 여기서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께 열납되길 바란다는 것은 (관상가들이 바라는 그런) 기도의 응답을 뜻함이 아니다. 주님 보시기에 그분 마음에 흐뭇하길 바란다는 뜻이다.
관상은 잘못될 리가 없다?.
각설하고..다음으로 홍정환 님은 "일상의 삶에서 짧은 성경구절을 통해 하나님의 동행하심과 돌보심을 고백하는 행위가 어떻게 성령님의 도움을 배제한 채 ‘신과 합일을 꾀하는 뉴에이지적 시도’가 될 수 있는가?"라고 묻는다.
그렇게 말함으로써 관상 행각에 전적으로 A-OK 점수를 주고 관상기도가 잘못될 가능성을 전적으로 배제한 셈이다. [그는 그러나 글 총결론에서 이를 또 뒤집는다!] 여기서 그는 신교계 관상계가 마냥 부풀려 놓은 관상개념만 읊고 있는데, 관상기도의 원조인 카톨릭의 향심기도의 특성을 잘 몰라서 라고 할 밖에 없다. [지면상, 상세한 관상이론은 필자의 다른 차기 칼럼에서 다루련다.]
그렇다면 지금 현재 구체적으로 카톨릭/신교(일각)에서 진행되고 있는 뉴에이지적 종교다원주의 대화를 모른다는 것인가, 모른 체 하겠다는 것인가, 알아도 무시하겠다는 것인가? 홍정환님에겐 지금 이런 관상의 현실과 진상, 위험이나 향뉴에이지성을 파악하려는 노력과 제스처마저 조금도 없고 그럴 퍼텐셜이나 가능성조차 전혀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인가?
그건, 때가 악하므로 어떻게 행할 것인지 삼가서 어리석은 사람들처럼 말고 되레 슬기있는 사람처럼 세월을 아끼라(엪5:16)는 사도의 말에 전혀 합당치 않은 태도다.
절감되는 상호차: 늘 바뀌는(?) 하나님과 성품.
이제 세 번째로..홍정환 님은 기독교 영성 이해에 있어 김삼과 자신 사이의 깊은 골을 통감했다고 개탄(?)한다. 실은 필자도 상대적으로 절감하는 것이 상호간 의식차 이다. 상대방은 관상기도를, 별 유감이나 불만, 위험 부담 없이 적극 지지하고 있는 입장이다.
아무튼 그는 골을 '통감'하는 원인을 설명하면서..하나님이 날로 새로우신 분이시라고 주장한다. [틀렸다! 하나님은 새로운 일을 하시는 분이시지, 날로 새롭게/수시로 바뀌는 분이 아니시다. 어제나 오늘, 영원히 한결 같은 분이시다!] 또 묵상하면 할수록 날마다 '새로운 하나님'을 뵙게 된다고, 익숙한 듯 하면서도 전혀 새로운 하나님이 성품을 경험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그는 심각한 신학적 오류를 범하고 있다. 날마다 새로운(=새롭게 바뀌는) 하나님을 뵙게 되고, '전혀 새로운' 하나님의 성품을 경험한다는 것은 성경적인 신관 컨셉트의 여지없는 오착이다. 전혀 새롭다니 하나님의 성품이 어제와는 100% 달라진다는 말이 된다. 하나님의 성품이 변덕스런 인간과 다름 없이 맨날 바뀌신다는 뜻이 아니련가.
그럴 리가..그런 일이 있을 수가?! 아무리 언어수사의 남발이라지만 무리수도 이런 무리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관상기도가 그처럼 "날마다 전혀 새롭게 바뀌는" '하나님의 성품'을 경험할 수 있는, 재주 넘는 여우처럼 요상하고 신기한 기도라고 봐도 좋겠는가?
필자가 아는 하나님은 전혀 그런 하나님이 아니시다! 하나님의 신적 속성 중 중요한 두 가지가 영원성과 불변성이다. 날마다 성품이 새로 바뀌시는 변화성/요동성은 하나님의 속성이 아니다. 그분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한결같은 분이시다! 자신의 옛 약속에 늘 충실한, 신실한 분이시다. 인간의 성품의 일부는 수시로 바뀔 수도 있지만, 하나님의 성품은 영원히 바뀌지 않는다. 그러기에 절대 믿을 수 있고 신뢰할 대상인 것이다. 변덕스럽게 늘 새로 바뀌시는 분이라면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구도적 영성'의 허/실.
이어서 그는 하나님을 "계속해서 찾아가야 하는" 존재로 풀이하곤, 성경을 통해 계시해주신 그분의 모습을 인지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왜 지속적으로 알아가고 만나야만 하는가 라고 자문한다. 그리곤, 기본적으로 인간의 유한한 인식체계와 감각으로 하나님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자답한다. 그래서 하나님을 찾아가는 구도적 영성은 '필요불가결'이라고 말한다. 필요불가결?
여기서 그는 또다른 중대한 착각을 하고 있다. 이방인들이 찾아가는 대상인 그 신과 지금 거듭난 성도 속에 계신 성령을 혼동하고 있는 것. 그래서 관상기도의 소위 '영성' 수준을 스스로 폭로하고 만다. '구도적' 영성은 아직 길을 찾지 못한 사람들의 영성을 늘 가리킨다. 이를테면 미국의 윌크맄/새들백 교회 등 일부 현대교회의 모습을 구도자/탐구자 중심 심(seekers-minded)의 교회라고 할 때, 으레 비신자를 향해 오픈된 교회를 뜻한다.
거듭난 성도는 죄인이었다가 예수 크리스토를 통해 아버지 하나님을 찾아 만나 뵙고 그 영(성령)을 자기 속에 모신 사람들이기에 더 이상 하나님을 '찾을' 필요가 없고 그 분과 친교하기만 하면 된다. 문제는 친교를 잘 하지 않는 데 있지, 대상을 못 찾는 문제가 아닌 것이다. 관상기도 같은 구도적 영성은 비신자들에게만 '필요불가결'한 것이다.
고아가 자기 아버지를 찾았는데, 다시 아버지를 찾아 떠난다거나, 잃은 양을 목자가 찾아 서로 만났는데 양이 스스로 다시 딴 목자를 찾아 나서겠다면 뭔가 이상하다. 그런데도 관상가들은 그러고들 있다. 거듭났다(?)면서..버젓이 속에 모셔두고도 달리 '찾고있는' 그 신, 아버지와 목자는 필시 뭔가 잘못됐거나 잘못된 대상일 수도 있음을 암시해주는 대목이다.
'내재'한다는 신을 찾아간다는 영성은 동시에 이교도들, 뉴에이지적 영성에 공통된 것이다. 불교나 힌두교, 뉴에이지에서는 그 내재한 신이 사실상 자신(自神)이다. 신을 찾아 자신이 된 단계를 득도 또는 (자)신과의 합일, 성불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 단계를 향해가는 과정이 곧 '구도'이고. 홍정환 님은 또 구도와 성장을 혼동하고 있는데 긴 얘기는 않으련다.
홍정환 님이 거듭 강조하는 '새로운 경험'은 성경적으로는 거듭난 영(spirit)에 속한 혼(soul)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신선하게 됨을 의미하지, 하나님 그분의 새로워짐을 뜻하지 않는다. 성경은 한 번 거듭난 영이 다시 새로워진다는 개념을 말하지 않는다. 아울러 성경은 일단 찾은 하나님을 다시 찾아가야 한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우리는 예수 크리스토를 통해 단번에 하나님을 찾아 만나뵙고 아버지로 우리 속에 모셨다.
번복(!): 관상은 잘못될 수 있다.
홍정환님의 헷갈림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는 관상기도는 주술적/초월적 형태로 기독교 신앙을 왜곡시킬 수 있는 위험성을 분명히 내포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아까 위에서 자기 입으로 관상이 "어떻게 성령님의 도움을 배제한 채 ‘신과 합일을 꾀하는 뉴에이지적 시도’가 될 수 있는가?" 한 것은 어찌 되는가? 거긴 거기고 여긴 여긴가? 자신의 주장처럼 날마다 새로워지는(?)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 기분에 따라 그때그때 달라지는가?
"방언기도는 다른 종교에도 존재한다".
홍정환 님은 방언기도는 기독교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불교/원시종교를 비롯한 다른 종교에도 존재한다고 함으로써 방언기도를 평준화/일반화시키는 듯한 느낌을 주면서도, 일편 "성령의 역사"로서의 방언과 악령에 의해 이뤄지는 방언기도도 존재함을 간접 시인하고 있다. 이쯤 되면 과연 그의 분별이 있는 건지, 또는 의도가 뭔지 아연해진다.
혹 그는 김삼이 말하는 방언기도는 사탄의 것, 자신이 언급하는 방언기도는 성령의 것으로 주장하려는 의도는 아닌지도 모르겠다. 그는 이렇게 말할 게 아니라 솔직하게 타 종교의 '방언'은 가짜 방언이고, 오직 성경대로의 기독교의 방언기도만 진짜라고 말했어야 한다.
동시에 그는 관상기도와 방언기도를 비슷한 수준의 것인 양 "내면 상태에 따라 사항별로(case by case) 구분해서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진짜와 거짓 것의 개념을 구분하는 기본적인 분별력조차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도 구분이 잘 안 간다. [물론 필자는 그의 영적 수준에 대해 느끼는 바가 있지만 논리적으로 그렇다는 것이다.]
홍정환님은 또 잘못된 기도는 왜곡된 신비주의로 변질될 수도 있다고 하는데 사실 관상기도는 처음부터 신비주의적 기도로 낙인 찍혀있다. 중세 관상가들은 카톨릭 자체에서 모두 '신비가'로 불린다. 님 말대로는 이미 변질됐다는 얘기가 된다.
그는 필요에 따른 말바꾸기 행각을 여기서도 되풀이한다. "관상기도에 대한 신학적 사유는 포기되어서는 안된다. 끊임없이 비판 받고 성경적으로 재검토 되어야 한다." 라는 말은 자기는 비판할 수 있고 김삼은 비판할 수 없다는 얘기가 돼 버린다. 김삼 앞에서는 마치 관상기도가 절대 잘못될 수 없는 기도인 양 100% 적극 옹호해놓고선, 여기선 딴 소리를 하고 있기 떄문이다.
그리고 홍정환 님은 끝 부분에서 다시 한 번 김삼의 마태복음 6:7 사역을 '오역', '실수'라고 주장하면서 정작 무엇이 오역인지, 실수인지를 정확하게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필요에 따라 말바꾸기를 하는 그로선.. 속으로는 김삼이 옳을 수도 있음을 지금 굳이 인정할 필요가 없기 때문일까. 필자 역시도 그가 옳을 수 있는 부분들은 극히 희박하다고 느낀다.
바라기는 홍정환 님이 상황에 따라 말바꾸기를 할 게 아니라 현 상황 속에서도 인정할 것은 인정하는 진솔함에 안주하길.
결론적으로 관상은 옛 이교도들처럼 만트라식 중언부언을 하며..향 뉴에이지성 위험을 지닌다는 것이 필자의 견해다.
관상기도비판 -김삼(www.usaamen.net - 시사컬럼)
그게 아닙니다-뉴스앤조이 홍정환 님을 반박한다.
김삼 2007/04/24, 조회 : 146, 추천 : 0.
위 자료 <목회와 진리수호>에 림/헌/원 목사 제공
뉴스앤조이 홍정환 님의 김삼 비평을 진작 탐색기에서 발견했으나 여태 반응을 미뤄온 것은 마침 동일주제의 딴 칼럼을 갓 실린 데다 상대방의 애매한 입장 탓이었다. 그는 관상에 대해 반대 쪽은 물론 아니고, 딱히 찬성 쪽이라 하기도 좀 그런, 어정쩡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홍정환 님의 글 사이트는 다음이다.
http://www.newsnjoy.co.kr/news/articleView.html?idxno=20643
그런 헷갈림성 태도는 그 글에 시종일관돼 있다. 님에게서 너무도 많은 의문점을 갖게 되는 이유도 그것이다. 그가 빌린 필자의 글, '관상기도를 즐기는 님들에게'는 아멘넷이 아닌 다른 사이트에 전재된 것이어서 필자의 다른 관상 비판론은 참조되지 않은 점이 다소 유감스럽다. 따라서 그가 세 가지로 요약한 것은 그 글 한 편에 대한 그분 나름의 김삼 요약일 뿐이다.
필자의 비평에 대한 반론을 다시 반박하려니 퍽 길어진 글인데 다음 순서로 전개한다.
'중언부언'의 텍스트적 의미 / 중언부언은 구약에서 입증된다
텍스트 보다 컨텍스트에 치우침 / 마 6:7 후반절의 문제 / 중언부언은 욕구 충족을 위한 반복? / 자가모순의 부단한 번복 / 성경은 묵상과 기도를 구분한다 / "방언기도는 다른 종교에도 존재한다" / '구도적 영성'의 허/실 / '중언부언'의 텍스트적 의미.
"그러나 그대들이 기도할 때는 이교도들처럼 하릴없는 반복 어구를 쓰지 마오.."(마6:7 전반. 필자 사역)
홍정환님은 서두를 다음과 같이 연다.
"우리말 중언부언(重言復言)은 '이미 한 말을 자꾸 되풀이함'을 의미한다. 중언부언의 사전적 정의에 따르자면 관상기도는 중언부언하는 기도가 맞다. 그러나 우리말성경에 번역된 단어의 의미를 살필 때는 국어사전만을 참고해서는 안된다. 원어의 의미를 일차적으로 주지해야 하고, 단어가 어떤 맥락에서 사용되었는지를 파악해야 한다."
김삼이 마치 당초에 '국어사전 참조' 차원에 머무르고 원어적 어의를 전혀 참조하지 않았다는 뉘앙스를 고의적으로 뿌리려는 의도 같은 인상이다. 그도 그럴 것이 글 '1'항의 말미에서도 "중언부언(重言復言)의 사전적 의미를 기계적으로 대입해서 관상기도를 비판하는 것보다(하략).." 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김삼의 전반적인 관상기도 비판도, 마6:7 번역/해석도 그 수준에서 시도했다는 얘기가 돼 버린다.
그는 또 "성경에서 말하는 중언부언이란 어떤 상태를 의미하는 것일까?" 란 물음을 던진 뒤 호크마 주석을 인용함으로써 그것이 전부인 양 답변을 대신하다시피 했다. 그러나 정작 핵심적 어의(語義)를 빠뜨린 호크마 주석이 님의 입장에 가장 유리한 탓에 그것만 인용한 것 같다.
이에 따라 본 필자도 관련 원문 주해 자료를 참조해 본다. 해당 성구인 마태복음 6:7의 '중언부언'(그리스어 동사 원형: '바탈로게오')에 관한 (스트롱 자전 945번에 대한) 조셉 헨리 테이어 렉시콘(Thayer's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Coded with Strong's Concordance Numbers)의 같은 항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1) to stammer. 말을 더듬다
2) to repeat the same things over and over, to use many idle words, to babble, prate. 똑같은 말을 자꾸 되뇌다. 하릴 없는(실없는) 낱말들을 사용하다, 중얼거리다, 수다를 떨다. Some suppose the word derived from Battus, a king of Cyrene, who is said to have stuttered; others from Battus, an author of tedious and wordy poems.
위에서 (홍정환님이 굳이 지적한) 어원의 내력이야 어떻든 간에 '바탈라게오'의 가장 중요한 이차적인 뜻은 단순히 똑같은 말을 거듭거듭 되뇐다는 뜻이다. '말을 더듬다'가 일차적 어의라고 해서 이차적 어의가 중요하지 않은 듯한 논리는 단편적이다. 그런데 위의 이차적 어의는 분명히(!) 현재 관상권 일각에서 하는 문구 반복 또는 힌두교나 티벹 불교의 만트라와 거의 다름없는 행태를 가리킨다.
홍정환님의 일가견이야 어떻든 간에 주님은 분명히 당대 이교도들의 중언부언 관습을 지적하셨음이 틀림없다는 것이 필자의 확신이다.
후반절에서도 주님이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라고 하신 것은 구구절절 미사여구를 읊어가며 하는 긴 기도를 뜻하는 게 아니다. 이교도들은 기도를 하다 보니 말은 많이 해야 할 것 같고 말 못 하는 우상 앞에서 할 말은 별로 없다보니 대신 똑 같은 말을 자꾸 되뇌서라도 말을 늘리고 시간을 끌 수 밖에 없음을 암시하신 것이다. 만트라의 성격이 그와 대동소이하다.
홍정환 님이 아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오리지널에 가까운 관상가들 다수는 이 만트라 기법을 관상에 적극 활용해 왔다. 미국 관상가 다수가 '만트라' 용어를 쓰고 있음만 봐도 알 수 있다.
중언부언은 구약에서 입증된다.
이같은 이교적 중언부언의 구체적인 예를 들어 보자. 왕들a(열왕상) 18장에 기록된 엘리야의 카르멜 산에서의 바알/대치사건을 보면 이교도들의 전형적인 중언부언이 나타난다. 즉 바알/아쉐라 우상숭배자들은 엘리야의 조롱까지 들어가며, 또 몸을 자해하며 아침부터 저녁까지 "바알, 우리에게 응답하소서!" 만 외쳤다.
반면 엘리야는 이렇게 기도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신 것과 내가 주의 종인 것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 알게 하옵소서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에게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그들의 마음을 되돌이키심을 알게 하옵소서."
이교도들의 중언부언형 기도, 하나님의 사람의 기도의 극적인 차이다! 그런데 관상자들의 기도는 뒤엣것보다는 앞엣것을 더 닮아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이제..필자의 견해를 뒷받침하는 영문 버전들을 여기 나열해 본다. 후반절은 [지면상] 생략한다.
When you pray, don’t babble on and on as people of other religions do.. NLB(New Living Bible).
When you pray, don't babble like the idolaters,..
HCSB(Holman Christian Standard Bible)
And in your prayer do not make use of the same words again and again, as the Gentiles do:.. BBE(Bible in Basic English)
In praying, do not babble like the pagans,..
NAB(New American Bible)
And when you pray, do not keep on babbling like pagans,..
NIV(New Internatinal Version)
And when you pray, do not heap up phrases (multiply words, repeating the same ones over and over) as the Gentiles do,..[I Kings 18:25-29.] 확대역(Amplified).
특히 위의 끝 버전 확대역은 구체적인 중언부언의 예로서 필자처럼 왕들a 18:25~29을 들고 있음을 눈여겨 보라!
텍스트 보다 컨텍스트에 치우침.
그 다음..홍정환님은 일대 모험을 전개하고 있다. 중언부언이란 낱말 하나를 번역하기 위해서는 산상보훈 전체의 컨텍스트를 참조해야 한다는 것. 필자가 보기엔 억지주장이다. 지름길로 곧장 가기보다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에둘러 가는 쪽이다. 산상보훈 전체가 중언부언의 설명을 위해 존재하기라도 한다는 말인가?
성경본문 번역을 위해서는 텍스트와 컨텍스트 양면을 다 보되 먼저 텍스트 안에서 일차 해결을 봐야 한다. 중언부언 자체가 어떤 어의를 가졌는지 텍스트 안에서 먼저 확인해본 뒤 경우에 따라 컨텍스트를 따질 수도 있다. 이 경우, 앞뒷 장 컨텍스트를 따질 필요도 없이 주위의 몇 절만 참조해도 충분히 뜻이 파악된다. 그런 주장은 번역적이기보다 주해적이며, 핵심을 향해가는 방법으로서는 좀 억지스럽다.
님은 이처럼 주변 컨텍스트를 모조리 끌어들이는 본의 아닌(?) '핵심안개화' 작업 내지 연막전술 같은 과정을 거친 뒤에도 여전히 아쉬운 양, 계속 (자신이 생각하는) 중언부언의 컨텍스트적 의미에 더 집착하고 있다. 그런데도 그 글을 계속 읽어 내려가다 보면, 중언부언의 개념에 관한 그의 생각도 김삼이 지적한 개념과 별반 다르지 않음을 슬슬 표출하기 시작한다. 본의든 실수이든 간에.. 미처 감지하지 못한 탓인지 아니면 전략상 자신의 입장을 중화시키기 위함인지는 알 수 없다.
마 6:7 후반절의 문제.
홍정환 님은 "..이방인들이 자신들의 기준으로 생각해 무조건 열심히 공을 들이면 신이 들어주실 것이라"라고 나름의 중언부언 개념을 계속 몰고 간다.
여기서 잠시..한 가지 꼭 짚고 넘어가야 할 한 가지 중대한 문제가 발견된다. 그것은 마태복음 6:7 후반부의 한글 번역들이 대부분 오역으로 비친다는 것이다. 우선 이 부분의 한글 번역들을 열거한다.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개역개정)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만 하느님께서 들어주시는 줄 안다(공동번역).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만 들어주시는 줄로 생각한다(표준새번역).
..그들은 많이 말해야 하나님께서 들어 주실 것으로 생각한다(쉬운성경).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 아버지께서 기도를 들어주실 거라고 생각한다(우리말성경).
한글 번역들은 한결같이, 후반절을 존대어미로 표기함으로써 이방인들(Gentiles)/이교도들(Pagans)의 중언부언형 기도의 대상을 유대인(잠정적으로 기독교인들 포함)들의 대상과 동일한 하나님으로 보고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리스어 원문이나 영문에는 그런 낌새가 전혀 없다.
주님이 언급하신 바 이교도들의 기도 대상은 당연히 우상이다! 따라서 이 구절의 후반절은 다음과 같은 식으로 번역돼야 마땅하다고 필자는 본다.
"..그들(이교도들)은 말을 많이 해야만 (그들의 신에게) 들릴 줄로 생각한다네."
[참조/그리스어 원문: .. 가르 호티 엔 테 폴륄로기아 아우톤 에이사쿠스테손타이. 본 절의 그리스어 원문은 웨스트코트-홀트 역, UBS역, 에라스무스-스테파노스의 '수용원문' 등이 거의 똑 같다.]
그런데 홍정환 님 역시도 이같은 한글 오역들의 영역과 차원을 넘지 못했다. 그 역시도 이방인들의 기도 대상을 유대인의 하나님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
중언부언은 욕구 충족을 위한 반복?.
홍정환 님은 중언부언의 개념을 공들이기/치성들이기 차원에서의 욕구 충족을 위한 반복 행위로 컨텍스트적인 해석을 지속한다.
"예수님의 말씀은 이방인들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잘 모르기 때문에 자신들의 기준으로 생각해 무조건 열심히 공을 들이면 하나님이 들어주실 것이라 생각한다는 점을 지적하신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러한 ‘하나님에 대한 오해’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가 아닌 자신의 욕구를 토설하는 기도를 낳게 된다.
즉 하나님에게 졸라서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려는 반복적인 행위를 기도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방인의 기도에 대비되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고자 하는 하나님 아버지의 신실하심을 신뢰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8절로 넘어가면서 결국 중언부언이 단순히 한 문구의 되풀이에 '국한'되지 않는다고 함으로써 본의 아니게(?) 전면에서 일보 후퇴하는 듯이 보인다. 앞에서는 김삼 패기 차원에서 중언부언의 사전적 어의(또는 필자가 말한 테이어 렉시콘의 이차적 어의)가 마치 문맥상 아무 쓸짝 없는 것처럼 묘사하더니 '국한'되지 않는다로 물러선 것이다. "국한되지 않는다"면 중언부언의 사전적 어의가 맞을 수도 있다는 얘기가 되지 않는가?
이상을 간추려보면, 홍정환 님은 두 가지 논리적 범과를 하고 있다. 첫째로, "국한되지 않는다"고 해 놓아 여전히 중언부언의 사전적/이차적 어의도 적용될 가능성을 오픈해두는 동시에 단지 (같은 말의 반복이 아닌) 내용상 말 많음을 주님이 지적하신 것으로 단언한 것. 둘째로, 이교도들의 기도대상은 우상인데도 불구하고 유대인과 같은 하나님으로 혼동한 것, 두 가지다.
그래서 님은 글 '1.' 부분의 결론을 다음과 같이 맺는다.
"중언부언(重言復言)의 사전적 의미를 기계적으로 대입해서 관상기도를 비판하는 것보다 ‘주님의 뜻과 상관없이 계속해서 자신의 욕심을 반복해서 아뢰는 기도’를 비판해야 마땅할 것이다."
그는 관상기도가 만트라와 같은 유형의 녹음기적 반복을 의미함일 수 있는 가능성을 (완전 배제가 아니라) 거의(!) 배제하여 관상기도를 비판할 필요성을 무장해제시키면서, 욕심을 반복하여 아뢰는, 한국교회에 만연하다는 (막달라 마리아를 빗댄) '막 달란 말이야!' 식 기도를 비판해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죄 없는 신앙선진 막달라 마리아의 이름이 악용된 점은 회개해야 한다고 필자는 믿는다.]
그럼으로써 당초 겨냥했던 '김삼 타도' 효과 내지 '홍정환 우세 입증' 효과도 얻는지는 모르나 전체적인 관상비평의 약화 효과도 함께 배태시키고 있다. 그러면서도 마지막 결론에서는 관상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으니 단지 혼동인지 이중효과를 노리는지 자못 혼란스럽다.
자가모순의 부단한 번복.
홍정환 님은 주님이 말씀하신 이교도/이방인들의 기도는 곧 성령의 도움이 아닌 인간의 공로를 의지하며 교회보다 개인을 강조하는 이기적인 기도라고 또 다른 자가해석을 붙인다.
님은 주님이 문제의 본문 뒤에 이어지는 12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기도, 에페소 6:18, 테살로니카a 5:17 등을 인용, 그런 기도를 위해 "관상기도라는 틀이 대단히 유익하다"고 일대 호평을 한다. 그리고 놀랄 만한 모순을 저지른다. 즉 "짤막한 문장(성경구절이나 신앙고백, 기도문 등)을 마음 깊이 묵상하고 되뇌는 과정은.." 함으로써 또다시 앞에서 [단지 김삼이 규명했기에] 그가 부정하는 듯 했던 중언부언의 사전적 어의를 스스로 번복해 지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선 지적만 하고 그냥 넘어가련다.
그는 관상기도가 "성령이 나와 함께 하심을 언제나 인정하며 하나님의 의지에 자신을 순복시키도록 이끌어 준다"고 주장한다. 관상기도에 대한 이 정도의 파악과 확신(?)을 가질 수 있는 정도라면, 홍정환 님은 이미 수준급 관상가이다. 아니면 다른 관상가들의 체험을 베낀 것인가..
그런데 그런 확신 또는 체험이 과연 옳은 것일까? 만약 옳다면, 늘 해온 얘기지만, 왜 파울 등 사도들은 성령께서 절대로(?) 함께 하시는(?) 그 좋은(?) 관상기도(contemplation, contemplative prayer)를 처음부터 방언기도와 맞먹는 기도로 언급하거나 나열하지 않았는가? 일례로, 거의 모든 종류의 기도를 나열한 파울의 계시(예: 엪6:18,19)에서 유독 관상기도는 언급되지 않았는가? 파울의 성령과 관상가들의 '성령'은 다르다는 얘기가 아닌가? 물론 분명히 다르다고 필자는 생각하지만.
성경은 묵상과 기도를 구분한다.
여기서..외람되나마 필자가 익히 아는 성경말씀에 대하여, 관상가들 또는 홍정환 님 같은 친관상주의자들에게 한 수 가르쳐 주고자 한다.
성경은 반드시/분명히(!) 기도와 묵상을 구분한다. 전자는 하나님과의 대화 즉 상호작용, 후자는 자신 속에서 이뤄지는 작용이다[여럿이 같이 하는 묵상도 마찬가지]. 필자 나름으로는, 전자를 인터랙션(interaction) 후자를 이너랙션(inner action)으로 구분하고 싶다. 바꿔 말하면 기도는 대상지향적, 묵상은 자체지향적이다. 이를테면 나의 속 생각 자체가 컴퓨터에서 상대방과 나누는 인터랙션이 동일한 것일 수 없듯, 기도와 묵상은 서로 다르다.
아내감인 레베카를 기다리던 때, 이짜크는 들에서 기도가 아닌 묵상을 했다(창 24:63). 기도는 이미 전부터 해왔고 엘리멜렠을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아내감 고르기/데려오기가 응답됐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관상가들은 이 둘을 혼동한다. 그래서 [묵상+기도] 형 관상기도를 한다.
아마도 관상가들은 다음 구절을 좋아할 것이다.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시19:14, 개역 개정)
그러나 여기서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께 열납되길 바란다는 것은 (관상가들이 바라는 그런) 기도의 응답을 뜻함이 아니다. 주님 보시기에 그분 마음에 흐뭇하길 바란다는 뜻이다.
관상은 잘못될 리가 없다?.
각설하고..다음으로 홍정환 님은 "일상의 삶에서 짧은 성경구절을 통해 하나님의 동행하심과 돌보심을 고백하는 행위가 어떻게 성령님의 도움을 배제한 채 ‘신과 합일을 꾀하는 뉴에이지적 시도’가 될 수 있는가?"라고 묻는다.
그렇게 말함으로써 관상 행각에 전적으로 A-OK 점수를 주고 관상기도가 잘못될 가능성을 전적으로 배제한 셈이다. [그는 그러나 글 총결론에서 이를 또 뒤집는다!] 여기서 그는 신교계 관상계가 마냥 부풀려 놓은 관상개념만 읊고 있는데, 관상기도의 원조인 카톨릭의 향심기도의 특성을 잘 몰라서 라고 할 밖에 없다. [지면상, 상세한 관상이론은 필자의 다른 차기 칼럼에서 다루련다.]
그렇다면 지금 현재 구체적으로 카톨릭/신교(일각)에서 진행되고 있는 뉴에이지적 종교다원주의 대화를 모른다는 것인가, 모른 체 하겠다는 것인가, 알아도 무시하겠다는 것인가? 홍정환님에겐 지금 이런 관상의 현실과 진상, 위험이나 향뉴에이지성을 파악하려는 노력과 제스처마저 조금도 없고 그럴 퍼텐셜이나 가능성조차 전혀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인가?
그건, 때가 악하므로 어떻게 행할 것인지 삼가서 어리석은 사람들처럼 말고 되레 슬기있는 사람처럼 세월을 아끼라(엪5:16)는 사도의 말에 전혀 합당치 않은 태도다.
절감되는 상호차: 늘 바뀌는(?) 하나님과 성품.
이제 세 번째로..홍정환 님은 기독교 영성 이해에 있어 김삼과 자신 사이의 깊은 골을 통감했다고 개탄(?)한다. 실은 필자도 상대적으로 절감하는 것이 상호간 의식차 이다. 상대방은 관상기도를, 별 유감이나 불만, 위험 부담 없이 적극 지지하고 있는 입장이다.
아무튼 그는 골을 '통감'하는 원인을 설명하면서..하나님이 날로 새로우신 분이시라고 주장한다. [틀렸다! 하나님은 새로운 일을 하시는 분이시지, 날로 새롭게/수시로 바뀌는 분이 아니시다. 어제나 오늘, 영원히 한결 같은 분이시다!] 또 묵상하면 할수록 날마다 '새로운 하나님'을 뵙게 된다고, 익숙한 듯 하면서도 전혀 새로운 하나님이 성품을 경험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그는 심각한 신학적 오류를 범하고 있다. 날마다 새로운(=새롭게 바뀌는) 하나님을 뵙게 되고, '전혀 새로운' 하나님의 성품을 경험한다는 것은 성경적인 신관 컨셉트의 여지없는 오착이다. 전혀 새롭다니 하나님의 성품이 어제와는 100% 달라진다는 말이 된다. 하나님의 성품이 변덕스런 인간과 다름 없이 맨날 바뀌신다는 뜻이 아니련가.
그럴 리가..그런 일이 있을 수가?! 아무리 언어수사의 남발이라지만 무리수도 이런 무리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관상기도가 그처럼 "날마다 전혀 새롭게 바뀌는" '하나님의 성품'을 경험할 수 있는, 재주 넘는 여우처럼 요상하고 신기한 기도라고 봐도 좋겠는가?
필자가 아는 하나님은 전혀 그런 하나님이 아니시다! 하나님의 신적 속성 중 중요한 두 가지가 영원성과 불변성이다. 날마다 성품이 새로 바뀌시는 변화성/요동성은 하나님의 속성이 아니다. 그분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한결같은 분이시다! 자신의 옛 약속에 늘 충실한, 신실한 분이시다. 인간의 성품의 일부는 수시로 바뀔 수도 있지만, 하나님의 성품은 영원히 바뀌지 않는다. 그러기에 절대 믿을 수 있고 신뢰할 대상인 것이다. 변덕스럽게 늘 새로 바뀌시는 분이라면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구도적 영성'의 허/실.
이어서 그는 하나님을 "계속해서 찾아가야 하는" 존재로 풀이하곤, 성경을 통해 계시해주신 그분의 모습을 인지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왜 지속적으로 알아가고 만나야만 하는가 라고 자문한다. 그리곤, 기본적으로 인간의 유한한 인식체계와 감각으로 하나님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자답한다. 그래서 하나님을 찾아가는 구도적 영성은 '필요불가결'이라고 말한다. 필요불가결?
여기서 그는 또다른 중대한 착각을 하고 있다. 이방인들이 찾아가는 대상인 그 신과 지금 거듭난 성도 속에 계신 성령을 혼동하고 있는 것. 그래서 관상기도의 소위 '영성' 수준을 스스로 폭로하고 만다. '구도적' 영성은 아직 길을 찾지 못한 사람들의 영성을 늘 가리킨다. 이를테면 미국의 윌크맄/새들백 교회 등 일부 현대교회의 모습을 구도자/탐구자 중심 심(seekers-minded)의 교회라고 할 때, 으레 비신자를 향해 오픈된 교회를 뜻한다.
거듭난 성도는 죄인이었다가 예수 크리스토를 통해 아버지 하나님을 찾아 만나 뵙고 그 영(성령)을 자기 속에 모신 사람들이기에 더 이상 하나님을 '찾을' 필요가 없고 그 분과 친교하기만 하면 된다. 문제는 친교를 잘 하지 않는 데 있지, 대상을 못 찾는 문제가 아닌 것이다. 관상기도 같은 구도적 영성은 비신자들에게만 '필요불가결'한 것이다.
고아가 자기 아버지를 찾았는데, 다시 아버지를 찾아 떠난다거나, 잃은 양을 목자가 찾아 서로 만났는데 양이 스스로 다시 딴 목자를 찾아 나서겠다면 뭔가 이상하다. 그런데도 관상가들은 그러고들 있다. 거듭났다(?)면서..버젓이 속에 모셔두고도 달리 '찾고있는' 그 신, 아버지와 목자는 필시 뭔가 잘못됐거나 잘못된 대상일 수도 있음을 암시해주는 대목이다.
'내재'한다는 신을 찾아간다는 영성은 동시에 이교도들, 뉴에이지적 영성에 공통된 것이다. 불교나 힌두교, 뉴에이지에서는 그 내재한 신이 사실상 자신(自神)이다. 신을 찾아 자신이 된 단계를 득도 또는 (자)신과의 합일, 성불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 단계를 향해가는 과정이 곧 '구도'이고. 홍정환 님은 또 구도와 성장을 혼동하고 있는데 긴 얘기는 않으련다.
홍정환 님이 거듭 강조하는 '새로운 경험'은 성경적으로는 거듭난 영(spirit)에 속한 혼(soul)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신선하게 됨을 의미하지, 하나님 그분의 새로워짐을 뜻하지 않는다. 성경은 한 번 거듭난 영이 다시 새로워진다는 개념을 말하지 않는다. 아울러 성경은 일단 찾은 하나님을 다시 찾아가야 한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우리는 예수 크리스토를 통해 단번에 하나님을 찾아 만나뵙고 아버지로 우리 속에 모셨다.
번복(!): 관상은 잘못될 수 있다.
홍정환님의 헷갈림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는 관상기도는 주술적/초월적 형태로 기독교 신앙을 왜곡시킬 수 있는 위험성을 분명히 내포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아까 위에서 자기 입으로 관상이 "어떻게 성령님의 도움을 배제한 채 ‘신과 합일을 꾀하는 뉴에이지적 시도’가 될 수 있는가?" 한 것은 어찌 되는가? 거긴 거기고 여긴 여긴가? 자신의 주장처럼 날마다 새로워지는(?)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 기분에 따라 그때그때 달라지는가?
"방언기도는 다른 종교에도 존재한다".
홍정환 님은 방언기도는 기독교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불교/원시종교를 비롯한 다른 종교에도 존재한다고 함으로써 방언기도를 평준화/일반화시키는 듯한 느낌을 주면서도, 일편 "성령의 역사"로서의 방언과 악령에 의해 이뤄지는 방언기도도 존재함을 간접 시인하고 있다. 이쯤 되면 과연 그의 분별이 있는 건지, 또는 의도가 뭔지 아연해진다.
혹 그는 김삼이 말하는 방언기도는 사탄의 것, 자신이 언급하는 방언기도는 성령의 것으로 주장하려는 의도는 아닌지도 모르겠다. 그는 이렇게 말할 게 아니라 솔직하게 타 종교의 '방언'은 가짜 방언이고, 오직 성경대로의 기독교의 방언기도만 진짜라고 말했어야 한다.
동시에 그는 관상기도와 방언기도를 비슷한 수준의 것인 양 "내면 상태에 따라 사항별로(case by case) 구분해서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진짜와 거짓 것의 개념을 구분하는 기본적인 분별력조차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도 구분이 잘 안 간다. [물론 필자는 그의 영적 수준에 대해 느끼는 바가 있지만 논리적으로 그렇다는 것이다.]
홍정환님은 또 잘못된 기도는 왜곡된 신비주의로 변질될 수도 있다고 하는데 사실 관상기도는 처음부터 신비주의적 기도로 낙인 찍혀있다. 중세 관상가들은 카톨릭 자체에서 모두 '신비가'로 불린다. 님 말대로는 이미 변질됐다는 얘기가 된다.
그는 필요에 따른 말바꾸기 행각을 여기서도 되풀이한다. "관상기도에 대한 신학적 사유는 포기되어서는 안된다. 끊임없이 비판 받고 성경적으로 재검토 되어야 한다." 라는 말은 자기는 비판할 수 있고 김삼은 비판할 수 없다는 얘기가 돼 버린다. 김삼 앞에서는 마치 관상기도가 절대 잘못될 수 없는 기도인 양 100% 적극 옹호해놓고선, 여기선 딴 소리를 하고 있기 떄문이다.
그리고 홍정환 님은 끝 부분에서 다시 한 번 김삼의 마태복음 6:7 사역을 '오역', '실수'라고 주장하면서 정작 무엇이 오역인지, 실수인지를 정확하게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필요에 따라 말바꾸기를 하는 그로선.. 속으로는 김삼이 옳을 수도 있음을 지금 굳이 인정할 필요가 없기 때문일까. 필자 역시도 그가 옳을 수 있는 부분들은 극히 희박하다고 느낀다.
바라기는 홍정환 님이 상황에 따라 말바꾸기를 할 게 아니라 현 상황 속에서도 인정할 것은 인정하는 진솔함에 안주하길.
결론적으로 관상은 옛 이교도들처럼 만트라식 중언부언을 하며..향 뉴에이지성 위험을 지닌다는 것이 필자의 견해다.
관상기도비판 -김삼(www.usaamen.net - 시사컬럼)
그게 아닙니다-뉴스앤조이 홍정환 님을 반박한다.
김삼 2007/04/24, 조회 : 146, 추천 : 0.
위 자료 <목회와 진리수호>에 림/헌/원 목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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