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홍 목사의 성경적 상담 연구소 RBD COUNSELING INSTITUTE
멘탈리티의 핵심 키워드 : 신성한 내면아이, 구상화, 의미와 통일성, 도약~
목록
주의해야할운동

잘못된 영성의 표현으로서의 관상 기도

잘못된 영성의 표현으로서의 관상 기도
"뉴에이지적 명상과 무슨 차이가 있는 것인지 물어야"
승인 2011.12.24  00:48:17 
자료출처http://www.crosslow.com/news/articleView.html?idxno=104

이 세상에는 진정한 성도의 부족함에서 오는 온전치 못한 영성의 표현 정도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원칙적으로 회복된 영성을 무색하게 하는 너무 심각하게 왜곡된 영성의 표현들이 나타나고 있다. 사실 그런 것들이 지나치게 많다. 비교적 온전한 영성의 표현을 생각하기 전에 기독교적 이름으로 나타나는 이와 같이 심각하게 왜곡된 영성의 표현들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 보기로 하자.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면서도 그 관계성을 잘못 표현해 내는 모습의 하나로 천주교적 영성을 생각할 수 있다. 천주교회에서 일반적으로 제시하는 영성과 영적 훈련의 방법뿐만 아니라, 대개 우리 스스로가 노력해서 하나님과 더 깊이 있는 관계성에로 나아가려고 하는 것이 모두 이에 해당된다. 이는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의 기본 이해와 부합하지 않는 것이다. 성경에 의하면 우리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시작하거나 지속해 나갈 때에 우리가 기여하는 것은 전혀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하나님께서 홀로 이루신 것을 믿고 온전히 의존해 가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의 전부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천주교회가 말하는 영성훈련(영신수련)은 (1) 정화의 길(via purificativa)을 거쳐서, (2) 조명의 길(via illuminativa)를 지나, 급기야 (3) 은혜의 주입에 의한 일치의 길(via unitiva)을 향해 나아간다고 생각한다. 그 배후에 있는 것이 천주교회의 반(半)-펠라기우스주의(semi-pelagianism)적 구원 이해이다. 그러므로 다시 한 번 더 강조하면서 말한다면 천주교회의 영성은 건전하고 바른 영성이기 보다는 왜곡된 영성이라고 해야 한다.
 
오늘날 어떤 천주교도들은 전통적 천주교회에서 사용한 영성 훈련과는 다른 영성 훈련 방식을 사용하여 자신들의 영성을 드러내고 개발하려고 한다. 미국 매사추세츠주 스펜서에 있는 성요셉 수도원(St. Joseph Abbey)의 트라피스트 수도자(Trappist monk)요 피정 지도자(retreat master)였던 윌리엄 메닝거(William Menninger)는 수도원 도서관에서 1974년에 󰡔무지의 구름󰡕(The Cloud of Unknowing)이라는 14세기 중세 영어로 쓰인 책을 읽고 그 책에 언급된 소위 관상(contemplation)을 자신의 수도원 피정에서 현대의 평범한 사람들이 하나님과 직접적으로 하나가 되는 영적 경험을 하도록 하는 일에 적용하는 일을 시작한다. 일 년 후 그 수도원 원장(Abbot)인 토머스 키팅(Thomas Keating)과 바실 페닝톤(M. Basil Pennington)도 젊은 천주교인들이 동방 정교회적 명상에로 나아가는 것을 막기 위해 적극 가담하여 이런 식으로 사람들을 훈련시키는 일에 헌신하게 된다.
 
후에 토머스 머톤 (Thomas Merton)이나 바질 페닝톤(M. Basil Pennington) 등이 향심 기도(Centering Prayer)라고 부른 이 관상기도는 그들에 의하면 자신을 하나님을 중심으로 집중시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어떤 사람들은 향심 기도와 관상을 동일시하기도 하고, 또 더 정확히 표현하고자 하는 어떤 분들은 향심 기도를 관상을 위한 준비라고 하기도 한다. 이들과 연관하여 영성을 강조하는 사람으로 오늘날 신구교를 막론하여 많은 사람의 이목이 집중되어 있는 사람으로 헨리 나우윈 신부를 생각할 수도 있다.
 
이런 현대적 운동에 대해서 그것은 전통적 천주교적 영성의 표현이 아니라고 비판적으로 반응하는 천주교 학자들도 있다. 이런 비판적인 논의는 토마스 머튼 등이 동양적 명상의 방법을 끌어 들여서 그들이 말하는 관상과 동양적 명상의 유사성을 보고 그것을 결합시키려고 하는 것에 대한 반감에서 나오는 경우가 많이 있다. 참으로 토마스 머튼은 관상적 의식(contemplative consciousness)은 “초문화적이고, 초종교적이며 형태도 초월하는 의식”이라고 하며, “그것은 종교나 무종교를 망라하여 이런 저런 종교 체계 모두를 관통하여 비쳐 나오는 것이다”고 말한다.
 
특히 뉴에이지 운동에 몸담았다가 천주교회로 개종한 사람들의 경우에는 머톤 등이 제시하는 이런 관상이 자신들이 천주교도가 되기 전에 뉴에이지적으로 명상하던 것과 무슨 차이가 있는 것이지를 강하게 질문한다. 그러나 상당수의 천주교도들은 이런 현대적 접근을 수용해 나가는 듯하다. 그러므로 관상 기도와 같은 이런 현대적 기법에 대한 천주교회의 입장은 아직 논의 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전통적인 천주교회의 영성 추구나 현대의 관상 기도적인 영성 추구나 모두가 왜곡된 영성 표현의 양태들이라는 것은 전혀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모두 은혜에 근거한다고 하면서도 인간의 노력으로 무엇인가를 이루려는 수단들이기 때문이다.

이승구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교수

RPTministries 정태홍 목사
http://www.esesang91.com
http://twtkr.com/rptministries
http://www.facebook.com/RPTministries

이 글 공유하기

독자 의견

댓글이 없습니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