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미쉬 Amish, 그들의 역사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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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튀는 특이한 외양을 갖추고 전통적 삶의 방식을 고집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들을 이해하기 위하여는 종교적 신념을 지켜내기 위하여 겪어야 했던 고난과 은둔의
역사가 그들에게 있었음을 알고, 이를 먼저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미쉬 Amish, 그들의 역사 (1)
- 종교개혁과 재세례파의 등장 -
시련과 고난으로 점철된 그들의 박해와 은둔의 역사는 16세기 초 종교개혁의 소용돌이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유럽은 관습적으로 가톨릭의 로마 교황청 교회로 단일화 되어 있었고, 종교(교회)와 정치(정부)는 하나가 되어 있었다.
‘영적 구원’이라는 종교적 영역을 넘어선 교회의 권세에 시민들의 불만은 커져만 갔고, 로마 교황청 교회는 정치적으로 그리고, 도덕적으로 점점 권위를 잃어가기 시작하였다.
1517년에 이르러 독일의 가톨릭 수사(修士) Martin Luther는 '구원은 개개인의 깊은 신앙심에 대한 은총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것이지, 결코 교회의 성례전(聖禮典)을 통하여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고 주장하며, 교황청 교회의 구조와 교리에 대한 일대변혁을 주창하고 나섰다. 이에 많은 종교지도자들이 동조하며 일게 된 종교개혁의 물결은 독일 제후들의 적극적인 지원과 때마침 창안된 인쇄술의 실용화에 힘입어 유럽 전 지역으로 급속히 확산되어 나가기 시작하였다.
종교개혁의 선봉에 섰던 Martin Luther, Ulrich Zwingli와 John Calvin의 초상
(Pennsylvania 주 Lancaster에 있는 Mennonite Information Center의 전시물 중에서)
이때 스위스 취리히에서는 신교의 목사인 Ulrich Zwingli가 지도자로 떠올라 개혁파 교회(the Reformed Church)를 설립하는 등 종교개혁의 선봉에 나섰다.
모든 면에서 Luther보다도 더 적극적인 개혁 성향을 보였던 것으로 알려진
Zwingli가 시간이 흐르면서 ‘이 땅 위에 신의 왕국은 오로지 정치적 힘에 의해서만 이룩될 수 있다’고 강조하고, 쟁점이 되었던 유아세례(infant baptism) 또한 지속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등, 시 의회와 긴밀한 유대를 유지하며 개혁의 순수성을 잃어가는 모습을 보였다.
이에 불만을 품은 일부 추종자들이 나서 종교개혁은 정부의 힘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며 개혁의 투명성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하지만 Zwingli와 시 의회에 의해 거부되자 그들은 ‘교회와 정부의 완전 분리’ ‘무저항 평화주의’와 ‘성인세례(adult baptism)’를 근본 교리로 내세우며 1525년에 ‘스위스 형제들(Swiss Brethren)'이라는 새로운 교파를 이루기에 이르렀다.
정부 관리들은 당시 세금 징수를 위한 신생아 출생의 유일한 근거로 삼던 유아 세례를 부정하고, 군 징집을 거부함으로써 지역 안보를 위협하는 그들을 범죄자로 몰아세우며 모임을 중지하고 ‘유아 세례’를 지속할 것을 명하였다.
하지만 그들은 ‘신생아의 경우 선과 악을 구별할 능력이 없고, 따라서 지은 죄악 또한 없기 때문에 태어나자마자 이루어지는 유아 세례는 의미가 없으며, 그 대신 성인이 된 후 이성적 판단 하에 이루어지는 신앙고백을 바탕으로 한 진정한 세례가 이루어져야한다’고 주장하며 당국의 감시를 피해 성인 교도들에 한하여 새로운 세례식을 강행하였다.
이러한 연유에서 그들은 ‘재세례(재침례)파 (anabaptists 또는 re-baptizers)’로 불리어지기 시작하였다.
재세례파 교도들을 화형에 처하는 장면
(자료: ‘The Martyrs Mirror’에 실린 사진 재편집)
재세례파 교도들은 그들이 보인 급진적인 개혁성향으로 말미암아 종교개혁의 큰 흐름 속에 ‘개혁자들 중의 개혁자’로 인식되어졌으며, 나아가 정부 관리와 가톨릭은 물론 여타 개신교파의 교도들로부터 까지 법질서와 종교적 일체감을 해치는 반사회적 위험 집단으로 지목되면서 마침내 그들로부터 혹독한 박해를 받기 시작하였다.
정부 관리들은 재세례파의 지도자는 물론 일반 교도들까지 색출하여 잡아들이기 시작하였고, 개종을 강요하며 갖은 고문과 함께 그들을 감옥에 가두었다. 뿐만 아니라, 뜻을 굽히지 않는 교도들은 추방하거나 노예로 팔아 넘겼으며, 화형(火刑)이나 수장(水葬) 심지어는 생매장과 전신을 토막 내는 등 온갖 잔인한 방법으로 그들을 처형하였다.
또한 몇몇 도시에서는 잡아들이는 재세례파 교도들의 인원에 비례하여 보수를 지급하는 ‘재세례파 사냥꾼(Anabaptist hunters)'를 고용하여 그들을 추적케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혹독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결코 그들의 신앙적 신념을 굽히지 않았으며, 감시의 눈을 피해 인근 Moravia, Alsace, Palatinate 지역이나 네덜란드 등으로 넘어가거나 깊은 산속 또는 외딴 지역으로 숨어들어가 은거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교도들의 집을 전전하거나 산 속 동굴에서, 또는 어두운 밤 배 위에서 몰래 예배 모임을 가지며 그들의 교리를 확산해 나갔다.
이 때 자행된 잔혹한 탄압과 박해로 인하여 희생된 재세례파 지도자와 교도들의 숫자는 정확하게 밝혀지고 있지 않고 있지만 그 수는 수천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들이 겪은 고난과 순교에 관한 구체적 사례는 1660년 네덜란드에서 발간된 책 - 'Martyrs Mirror' - 에 고스란히 담겨졌으며, 1,200 페이지에 이르는 거대한 분량의 이 책은 오늘 날까지 아미쉬는 물론 재세례파에 뿌리를 두고 있는 여러 교파의 교도들에게 전해지며 읽혀지고 있다.
아미쉬 마을 서점에서 볼 수 있는 ‘Martyrs Mirror’ 관련 책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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