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상기도를 점검한다!!!
관상기도를 점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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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한 유명 목회자의 주도로 관상기도 세미나가 개최되면서 선풍적인 바람을 타고 있다. 관상 기도야말로 “이 세대의 영성의 새로운 모태”요, 가장 탁월한 영성 훈련 방식이라는 것이다. 원래 ‘관상’(contemplation)이란 말의 어원적인 의미는 ‘함께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서 머문다’는 의미이다. 그런 관상(觀想: 바라보고 생각함)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서 자기를 성찰하는 것은 극히 성경적이다.
하지만 사막의 교부 시대부터 시작된 관상 기도는 캐톨릭의 영성 훈련 방식으로 등장하면서 신비적이고 인본주의적인 방식으로 전락되었다. 관상 기도를 주창하는 사람들은 관상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깊은 침묵에 이르다보면 하나님과 하나됨을 경험할 수 있다고 한다. 침묵이야말로 하나님의 임재로 들어가는 키워드이며, 통성 기도보다는 침묵을 통한 관상 기도로 영성을 훈련하자고 주장하기도 한다.
언뜻 보기에는 관상 기도가 영적이고 실천적인 영성 훈련 방식으로 보인다. 그러나 성경 어느 곳에도 인간은 자기 노력에 의해서 하나님과 하나될 수 있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칼빈이 하나님과의 일체를 이루기까지 애쓰라고 주장한 바 있지만, 그 일체의 동력은 성령의 은혜임을 강조한 것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성화의 원동력은 성령님이시다! 성령의 도움이 아니고는 누구도 성화에 이를 수 없다. 하나님의 임재를 맛볼 수도 없다. 오직 성령의 은혜로만 하나님과 일체를 이룰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침묵을 통해서 하나님의 임재의 절정에 이를 수 있다는 주장 역시 관상 기도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한 구실에 불과하다. 하나님의 임재는 말씀 가운데, 어떤 형태의 모습이든지 기도나 성례 중에 그 절정을 이룬다. 그런 이유 때문에 종교 개혁자들은 은혜의 수단으로써 말씀과 기도와 성례전을 제시하기도 했다. 게다가 하나님의 임재는 삶 전체에서 경험할 수 있는 축복이다. 그리스도인은 침묵의 순간만이 아니라 삶의 현장 곳곳에서 하나님의 임재의 절정을 맛보며 사는 사람들이다.
관상 기도를 주장하면서 통성 기도보다는 침묵 기도를 강조하는 것 역시 편협한 사고임을 배제할 수 없다. 주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을 피방울처럼 흘리면서 힘쓰고 애쓰시며 기도하신 적이 있지 않는가! 시편 기자들 역시 종종 부르짖으면서 간구함으로 하나님을 만났다. 그런 기도들은 한국 교회의 전통으로 자리잡은 통성 기도의 모델들이다. 기도는 어떤 형태로든지 하나님께 나아가는 방편이다. 침묵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고, 통성으로도 그분께 부르짖을 수 있다.
관상 기도의 권위자인 토마스 키딩의 표현을 보면, 그 기도가 이교의 무아지경 상태와 흡사한 상태임이 쉽게 드러난다: 관상 기도는 어떤 바람이나 느낌을 말로 표현하기보다는 생각 자체를 벗어나는 것이다. 우리의 의식을 벗어나서 텅 빈 채로 하나님께 자신을 열어드리는 것이다. 그렇다고 의식을 거부하거나 억압하지 않고 내버려 두어, 그 너머에 있는 상태로 나아가고자 한다.
기도 방법에도 세속적인 명상법과 흡사한 면이 스며있다. 관상 기도법 중에서 ‘예수의 기도’를 살펴보자: 훈련자에게 기도가 시작되면 호흡을 맞춰서 단전호흡을 하듯이 숨을 들여 마시면서 ‘그리스도시여’라고 생각을 한다. 그리고나서 숨을 내쉬면서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끊임없이 반복한다. 이런 식의 기도는 뉴에이지 운동에서 행하는 명상법과 유사하다.
이는 마치 신비주의에서 도를 닦듯이 정신 집중을 통해 무아지경의 상태에 이르려는 인본주의적이고, 심리적인 훈련 방식과 같다. 개혁주의 영성은 어떤 형태이든 신비주의적이고 이교적인 훈련 방식을 경계한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자기를 성찰하는 관상(觀想)을 권장하되, 개혁주의 신학에 근거한 성경적인 관상 기도를 계발하는 것이 우리의 과제이다.
<글/ 송삼용목사>
기독신문 시론 2007년 7월 20일
최근에 한 유명 목회자의 주도로 관상기도 세미나가 개최되면서 선풍적인 바람을 타고 있다. 관상 기도야말로 “이 세대의 영성의 새로운 모태”요, 가장 탁월한 영성 훈련 방식이라는 것이다. 원래 ‘관상’(contemplation)이란 말의 어원적인 의미는 ‘함께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서 머문다’는 의미이다. 그런 관상(觀想: 바라보고 생각함)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서 자기를 성찰하는 것은 극히 성경적이다.
하지만 사막의 교부 시대부터 시작된 관상 기도는 캐톨릭의 영성 훈련 방식으로 등장하면서 신비적이고 인본주의적인 방식으로 전락되었다. 관상 기도를 주창하는 사람들은 관상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깊은 침묵에 이르다보면 하나님과 하나됨을 경험할 수 있다고 한다. 침묵이야말로 하나님의 임재로 들어가는 키워드이며, 통성 기도보다는 침묵을 통한 관상 기도로 영성을 훈련하자고 주장하기도 한다.
언뜻 보기에는 관상 기도가 영적이고 실천적인 영성 훈련 방식으로 보인다. 그러나 성경 어느 곳에도 인간은 자기 노력에 의해서 하나님과 하나될 수 있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칼빈이 하나님과의 일체를 이루기까지 애쓰라고 주장한 바 있지만, 그 일체의 동력은 성령의 은혜임을 강조한 것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성화의 원동력은 성령님이시다! 성령의 도움이 아니고는 누구도 성화에 이를 수 없다. 하나님의 임재를 맛볼 수도 없다. 오직 성령의 은혜로만 하나님과 일체를 이룰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침묵을 통해서 하나님의 임재의 절정에 이를 수 있다는 주장 역시 관상 기도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한 구실에 불과하다. 하나님의 임재는 말씀 가운데, 어떤 형태의 모습이든지 기도나 성례 중에 그 절정을 이룬다. 그런 이유 때문에 종교 개혁자들은 은혜의 수단으로써 말씀과 기도와 성례전을 제시하기도 했다. 게다가 하나님의 임재는 삶 전체에서 경험할 수 있는 축복이다. 그리스도인은 침묵의 순간만이 아니라 삶의 현장 곳곳에서 하나님의 임재의 절정을 맛보며 사는 사람들이다.
관상 기도를 주장하면서 통성 기도보다는 침묵 기도를 강조하는 것 역시 편협한 사고임을 배제할 수 없다. 주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을 피방울처럼 흘리면서 힘쓰고 애쓰시며 기도하신 적이 있지 않는가! 시편 기자들 역시 종종 부르짖으면서 간구함으로 하나님을 만났다. 그런 기도들은 한국 교회의 전통으로 자리잡은 통성 기도의 모델들이다. 기도는 어떤 형태로든지 하나님께 나아가는 방편이다. 침묵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고, 통성으로도 그분께 부르짖을 수 있다.
관상 기도의 권위자인 토마스 키딩의 표현을 보면, 그 기도가 이교의 무아지경 상태와 흡사한 상태임이 쉽게 드러난다: 관상 기도는 어떤 바람이나 느낌을 말로 표현하기보다는 생각 자체를 벗어나는 것이다. 우리의 의식을 벗어나서 텅 빈 채로 하나님께 자신을 열어드리는 것이다. 그렇다고 의식을 거부하거나 억압하지 않고 내버려 두어, 그 너머에 있는 상태로 나아가고자 한다.
기도 방법에도 세속적인 명상법과 흡사한 면이 스며있다. 관상 기도법 중에서 ‘예수의 기도’를 살펴보자: 훈련자에게 기도가 시작되면 호흡을 맞춰서 단전호흡을 하듯이 숨을 들여 마시면서 ‘그리스도시여’라고 생각을 한다. 그리고나서 숨을 내쉬면서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끊임없이 반복한다. 이런 식의 기도는 뉴에이지 운동에서 행하는 명상법과 유사하다.
이는 마치 신비주의에서 도를 닦듯이 정신 집중을 통해 무아지경의 상태에 이르려는 인본주의적이고, 심리적인 훈련 방식과 같다. 개혁주의 영성은 어떤 형태이든 신비주의적이고 이교적인 훈련 방식을 경계한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자기를 성찰하는 관상(觀想)을 권장하되, 개혁주의 신학에 근거한 성경적인 관상 기도를 계발하는 것이 우리의 과제이다.
<글/ 송삼용목사>
기독신문 시론 2007년 7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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