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머징 교회(Emerging Church)_"무너진 믿음" _ 10. 믿음을 파산시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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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믿음을 파산시키기
<나의 목표는 세계 종교로서의 기독교를 파괴하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운동을 위한 재촉매자가 되는 것이다. … 어떤 사람들을 내가 반-기독교인처럼 들리기 때문에 내게 화를 낸다. 나는 그들이 맞다고 생각한다.[i] - 어르윈 맥크마너스(Erwin McManus)>
이 책을 쓸 준비를 하고 있을 때 변증론자인 친구 하나가 내게 이머징 교회의 좋은 면을 다룰 수는 없느냐고 물었다. 분명히 이 운동을 통하여 나타나는 좋은 열매들도 있을 것이다. 적어도 이 운동권 안에는 신실하며 진리를 구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이 운동권 내에 신실한 사람들이 있을 것을 동의하지만 나는 이 운동이 끼칠 나쁜 점이 좋은 점보다 훨씬 크다고 본다.
이렇게 비유해 보고 싶다. 몰몬교의 가르침에는 좋은 충고들이 있지만 (가정에 헌신하는 것, 십계명을 지키는 것등), 나는 이들의 가르침이 성경적인 기독교에 상충하기 때문에 이 그룹을 추천하는 일이 없다. 당신의 주일학교 교사가 “오늘, 우리는 몰몬경을 공부할 예정입니다”라고 말한다면 어떻겠는가? 그후 그 선생이 “우리가 전부 서로 의견이 같은 것은 아니더라도 좋은 것까기 다 버리면 되겠습니까? 좋은 것은 배우도록 합시다” 라고 말한다고 하자.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무엇보다도, 왜 그렇게 해야 하는가? 우리는 언제든지 독이 없는 정결한 물(하나님의 말씀)을 마실 수 있는데 뭐하러 독이 있는 물을 마시겠는가?
나는 이머징 교회에 대하여도 같은 시나리오라고 믿는다. 이머징 교회의 열매는 성경을 믿는 교회를 향하여 적개심을 만들어 내고 있으며, 그 열매들은 더 이상 기독교라고 볼 수 없는 열매들이다. 그들이 재편성하고 있는 사명과 전도는 숫자만을 늘리려는 것이지 진정한 그리스도인을 만들려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그들의 열매에는 다른 세속 종교들의 자신들의 종교로 그대로 유지하는 회원들이 많다. 만일 이머징 교회가 이러한 일들을 완수하게 된다면 그들에게는 참으로 기독교 믿음이란 아무 것도 남지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인가 아니면 그리스도-추종자인가
이머징 교회 지도자 어윈 맥크마너스는 “나의 목표는 세계 종교로서의 기독교를 파괴하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운동을 위한 재촉매자가 되는 것이다” 라고 말한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 운동의 가장 큰 원수는 기독교(즉, 그리스도인들)”이라고 말한다.[ii] 맥크마너스가 이 말을 하면서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는 우리는 기독교라는 종교에 일치될 필요가 없이 예수님과 여전이 일치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의 책 미개한 방법 (The Barbarian Way) 에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추종자들 안에는 해방되길 원하는 원시적 갈망”[iii]을 각성시키는 것에 대하여 말한다.
예수의 추종자 (또는 그리스도 추종자) 라는 용어는 이머징 영성을 추종하는 자들 가운데서 자주 통용되는 용어이다. 릭 워렌은 그의 웹 사이트 pastors.com 에서 이 용어를 사용한다. 리 스트로벨(Lee Strobel)은 그의 책 그리스도를 위한 진상 (Case for Christ)에서 이 용어는 언급하고 있고, 웨슬리 목사 데이빗 드러리(David Drury)는 당신이 정말로 “그리스도 추종자”인지 점검할 수 있는 그리스도-추종자 팝 퀴즈(Christ-Follower Pop Quiz)를 그의 웹 사이트에 올려 놓았다.[iv]
그리스도-추종자가 되면서 “기독교를 파괴하려는” 자세가 여러 기관들을 통하여 스며들고 있다. 예를 들어, 책 제목들을 보면 반-기독교 정서가 점점 더 커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플로이드 헨더슨(Floyd Henderson)이 쓴 그리스도인인가 아니면 그리스도 추종자인가 (그러나 둘이 될 수는 없다) (Why One Can Be a Christian or a Christ-Follower (But Not Both)는 이 점을 지적한다.
그리스도인에게 대항하는 그리스도-추종자가 된다는 생각은 영성 형성 운동에서 볼 수 있다 (즉, 관상 기도 운동). 말하자면, 만일 당신이 그리스도를 닮기를 원한다면 어떤 훈련들을 수행하면 되는데, 그 훈련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닮을 수 있다는 것이다. 척 스윈돌은 영적 훈련이 당신이 “그리스도처럼 될 수 있도록” 돕는다고 말한다.[v] 관상을 지원하는 영화 잠잠하라 (Be Still)에서 베쓰 무어(Beth Moore)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잠잠하지 않으면 우리는 절대로 참으로 우리의 뼈 속 깊은 곳까지 그분이 하나님이심을 알지 못할 것이다. 반드시 침묵이 있어야 한다.[vi]>
영적 형성 교훈들을 엮는 공통 끈은 침묵으로서 (주문식 명상을 통하여 만들어지는) 이 용어는 그리스도-추종자가 되는 것과 실질상 동의어이다. 이 둘은 반드시 함께 있다. 그리스도-추종자가 되는데 있어서 거듭남이나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와 주와 스승으로 영접하는 것이 꼭 필요한 조건은 아니다. 리차드 포스터는 신자들뿐만 아니라 비신자라 하더라고 이러한 영적 훈련들을 수행할 수 있으며 그리스도처럼 될 수 있다고 가르친다.[vii]
여기에 그리스도인과 이머징 교회 추종자 사이의 차이가 있다. 진정으로 거듭난 사람은 자신 안에 내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있다. 즉, 예수께서 그 사람 안에 사신다. 그 사람이 주님처럼 될 수 있도록 하는 능력을 주시는 분은 그 사람 안의 주의 생명이다 (성화). 바울은 이 점을 고린도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설명하였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고후 3:18).
신자는 자신 안에 내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힘과 능력을 끌어온다. 그는 성경이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 2:9) 말한대로 자신의 구원과 선함이 그리스도로부터 온 것임을 깨닫는다.
그러나 오늘날의 진보적인 이머징 교회 안에서는 예수는 단지 우리가 따르거나 흉내를 내야 할 모델이나 본이다. 관상을 동감하는 켄 블랜챠드(Ken Blanchard)는 예수는 따라야 할 완전한 모델이라고 말한다. 플랜챠드의 웹 사이트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켄은 예수를 가장 위대한 지도자상의 롤 모델로 보았다. 그는 “예수님 처럼 이끌 수 있는 사람들로 격려하고 준비시키는” 사명을 가지고 1999년에 예수처럼 이끌기(Lead Like Jesus) 단체를 공동 창설하였다.[viii]>
예수님은 본이었으며 본이시지만 그것이 주님의 주요 사명이 아니다. 사람들이 주님을 본으로서 간주할 때는 보통 주님을 우리의 구세주가 되시기 위하여 우리를 위하여 죽기 위해 오신 유일하신 하나님의 아들, 임마누엘(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로 보기 보다는 높은 인식을 가지셨던 분으로 본다. 불교와 같은 동양 종교에서 부처는 그의 추종자들이 모방을 해야 할 본이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그리스도의 영이 믿음을 통하여 우리 안에 내재하신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모델 이상이 되신다. 그는 우리 안에 살아서 존재하시는 분이시다.
이머징 교회에서 관상이 그토록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이유는 참된 복음이 선포되지 않기 때문이다 (믿음은 말씀을 들음으로 온다). 따라서 그 운동권 내의 많은 사람들은 내재하시는 그리스도가 없다. 그러나 그들은 진지하게 예수처럼 되고자 하며 그분의 임재를 느끼기를 원한다. 따라서 그러한 것들을 느끼게 할 수 있는 에너지가 필요하며 그러한 에너지가 어디서부터인가 와야 한다. 이때 명상이 그 해답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주문식 명상(Mantra meditation)으로는 실제적인 하나님의 임재를 불러낼 수 없다. 오히려 당장 사람들을 현혹시키기 위해 그리스도처럼 행세하는 마귀적 존재들을 활동할 뿐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이머징 그리스도-추종자들은 그리스도처럼 되기를 배우지만 주님을 주와 구세주로 영접한 적이 없을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그들 안에 살아계신 주님이 없다.
따라서 누구든지, 어떤 인생의 길을 걷던지, 어떤 종교에서든지 그리스도-추종자가 될 수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그리스도-의식을 가지고 그리스도처럼 되고 있다고 믿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성령의 내재하시는 임재로부터만 올 수 있는, 내면 안에서의 그리스도의 실제 능력은 없다. 성경은 하나님의 참된 능력이 어디에서 오는지 분명히 알려준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 1:12).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롬 1:16).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고전 1:18).
그들은 교회가 아니라 예수를 좋아한다.
2007년 봄, 단 킴발은 새 책 그들은 교회가 아니라 예수를 좋아한다(They Like Jesus But Not the Church)를 내었다. 그 책은 킴발이 예수를 좋아하고 존경하지만 교회와는 전혀 상관이 없고 또한 성경을 문자적으로 취하는 그리스도인들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여러 젊은 청년들과 (한 사람은 레즈비언) 인터뷰한 내용들을 편집한 것이다. 킴발은 독자들에게 한 친구의 농담을 올려 놓았다. “(오직 성경, 오직 예수, 오직 믿음을 외치는 교회 및 성도들)그들을 모두 끄집어 내어 총살을 시켜야 한다.”[ix] 킴발은 비 기도교인들이 그리스도인들을 좋아하지 않는 지적하지만 그는 “지금 우리는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들이 점점 더 예수님을 존경하는 신나는 문화 가운데 살아가고 있다”[x]고 말한다. 그는 우리는 “밖으로 나가 비기독교인들이, 특히 10대 후반에서 30대까지의 사람들이 교회와 기독교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말하는지 들어야 한다”[xi]고 말한다.
킴발은 그리스도인이 비기독교인들에게 인정 받을 필요가 있다고 믿고 있다. 우리는 비기독교인들을 설득하여 우리는 비정상이거나 이상한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킴발은 이렇게 되기 위해 우리의 삶의 방법과 행동 양식을 바꾸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차에 기독교 냄새가 나는 스티커를 붙이고 다니거나[xii] “교제, 형제, 예배” 등의 기독교 용어들을 사용함으로 자신들을 기독교인으로서 드러내는 것은 ‘촌스러운 짓’[xiii]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행동 양식이 구도자와 비신자들을 불쾌하게 한다는 것이다. 킴발은 “”예수님을 믿기를 거부하는 자들이”[xiv] 그렇게 하는 이유는 그리스도인들과 교회에 대한 그들의 인상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는 그의 책을 통하여 이러한 왜곡된 인상은 비신자의 잘못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의 잘못임을 분명하게 한다. 물론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아니라 성경을 문자 그대로 취하는 자들이다. 그는 “안믿는 자들에게, 기독교는 비정상처럼 보인다”라고 말한다. 또한 “이 점을 깨닫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xv]고 덧붙이고 있다.
킴발의 신학에는 문제가 있다. 성경은 주 예수께 속한 자들은 이 세상에서 정상으로 여겨지지 않을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사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상황을 기대하라고 말하셨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요 15:18, 19).
예수님은 세상이 정말로 그리스도인들을 부정적인 시선으로 보게 될 것을 말씀하셨는데, 킴발은 이러한 자세는 바뀔 수 있으며 바뀌어야 한다고 믿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포스트-기독교(post-Christian) 문화 속에서 이방인이다. 이러한 현실을 인식하지 못하였다면 지금이라고 이러한 사실을 알고 깨어나야 한다. … 과거와는 달리 현재 우리는 교회 밖에서 자라난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지 못하고 있다. 조언을 위해 찾아오는 일도 없다. 우리의 공동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자리에 있지도 못하다. … 우리는 외부의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우리 자신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xvi]>
많은 이머징 교회 지도자들은 킴발의 느낌에 동감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생각은 틀리다.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이 세상에서 이방인이였다. 그들은 종종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고통을 당하였다. 기독교 역사를 통하여 셀 수 없이 많은 살인과 만행이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 저질러졌다. 예수님 자신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길,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요 8:23) 라고 하셨고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요 18:36)고 하셨다. 예수께서 하늘 아버지께 드린 기도를 들어보자.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으로 인함이니이다” (요 17:14).
이머징 교회 운동을 지지하는 많은 사람들처럼 킴발은 오늘날의 젊은이들은 과거의 그 어떤 세대의 젊은이들과는 너무나 다르기 떄문에 이들에게 진리를 접하게 하려면 특별한 수단이 필요하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이 바른 것인가? 영혼을 꿰뚫고 진리를 드러내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던가? 1960년과 70년대에도 혼동하는 젊은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삶의 의미를 찾아 헤메었다. 이들 히피족들은 오늘날의 젊은 세대와 모든 면에서 다르다. 그러나 그때와 지금의 분위기는 다를 지라도 여전히 죄와 의혹와 문제들은 같다. 수천면의 히피족들이 구원을 받기 시작했을 때 무엇이 그러한 역사를 일으켰던가? 그 당시의 목사들이 그들에게 인정 받기 위해 맨발이 되고 장발을 하였던가? 그렇지 않다. 그 당시 목사들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주었다. 조금도 타협되지 않은 하나님의 말씀을 직선적으로 그러나 사랑하는 마음으로 나누어 주었다. 그 당시 목사들이 히피들을 더 이해하고자 마약을 하였던가? 그렇지 않다. 그들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주었다. 그 당시 목사들이 히피들에게 “당신들은 죄인이요”라고 말하면서 미안해 하였는가? (킴발은 오늘날 교회는 이렇게 할 필요가 있다고 한다.) 그렇지 않다. 그들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주었다. 그렇게 많은 히피들을 빛의 하나님의 왕국으로 인도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그들은 말씀을 제시하였으며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주었다.
킴발의 책에는 근본주의 그리스도인들에 관한 서술이 있다.
<그들은 동성애자들을 항상 반대하며 또한 세상에 대하여 언제나 부정적인 것들만 말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모든 성경을 문자적으로 취하고 있고, 그들 중에는 카드를 들고 다니는 공화당원들, 이스라엘 지지자들이 있다. 그들의 대화는 (사탄) 뱀을 다루는 방법, 불과 유황의 지옥에 대하여 말한다. 그들은 킹 제임스를 생각하고 서로 잘못을 비난하고 절대 금주를 장려한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인간들의 죄를 심판하기 위해 자연 재난을 사용하여 벌주신다고 믿는 복수심으로 가득찬 사람들이다. 기독교 속어들을 사용하면서 교만하고 자신들 외에는 전혀 사랑을 모르는 자들이다.[xvii]>
이러한 관점이 비기독교인들이 ‘보수적인’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인상이라는 것을 독자들에게 말하면서 킴발은 그들에게 “이러한 풍자가 모든 근본주의자들에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위로한다. 킴발은 기술적으로 이스라엘을 지지하며 성경을 문자적으로 취하고, 마지막 때에 관한 성경 예언을 연구하고 지옥에 대하여 말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정죄하고 있다. 그는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을 부정적이고 교만하고 사랑이 없고 복수심으로 가득찬 사람들로 연상시키고 있다.
킴발이 비신자들이 (그리스도인들은 싫어하지만) 예수를 좋아한다고 말할 때, 그들이 좋아한다는 그 예수는 누구인가? 그 예수는 성경의 예수인가? 아니면 세상이 원하는 모델에 의하여 만들어진 예수인가? 성경의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말씀하시길 만을 그들이 예수께서 육체로 오신 하나님이요 그리스도인 것을 믿지 않는다면 그들은 그들의 죄 가운데 죽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이 바로 조금도 양보될 수 없는 교리이다. 예수님은 그들과 “나는 너희들이 왜 나를 메시야라로 생각하지 않는지 이해할 수 있다. 나는 너희들의 생각을 존중한다”라고 대화하거나 그러한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그는 진리에 관한 한 독선적이셨다! 바울이 성경에서 말한 바와 같이 그들이 가르치는 예수는 다른 예수이다. 만일 진짜 예수라면 그들이 자신들의 모든 다른 신들과 그들의 거짓된 믿음의 시스팀을 부인하며 주 앞에 꿇어 엎드려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경배하고 그들의 삶의 100%를 완전하게 주께 드리는 그 날이 올 때까지는 절대로 그들이 예수님을 좋아하거나 존경할리 없다.
“지나쳐 그리스도의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는 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하되” (요이 9).
이머전트 선교학
<추가로 말하고 싶은 것은 나는 기독교 신자를 만드는 것과 그리스도의 제자를 만드는 것이 반드시 같은 것이라고 믿지 않는다. (전부는 아니겠지만) 상황에 따라 예수의 추종자들이 불교에, 힌두교에, 유대교에 그대로 남아있도록 돕는 것도 장려할 만하다.[xviii] - 브라이언 맥클라렌>
이머징 영성은 선교 방법도 바꾸고 있다. 이들의 선교 개념은 당신은 예수를 위해 밖으로 나아갈 수 있으나 당신 자신을 그리스도인으로 또는 기독교 교회의 일부로 일치시킬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개념이 선교지에도 흘러들어가고 있다. 따라서 선교사들은 사람들에게 그들의 종교를 유지하면서 예수를 따를 수 있다고 가르친다. 단지 그들의 종교 및 사상에 예수를 추가만 하면 된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용어를 알 필요도 없다. 2005년, 연합 국제 교류 신앙 기도 조찬회(United Nations Interfaith Prayer Breakfast)에 서로 다른 다양한 종교를 대표하는 100명의 대표자들 앞에서 릭 워렌은 다음과 같은 연설을 하였다.
<나는 이 아침에 종교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은 카톨릭, 개신교, 불교, 침례교, 이슬람, 몰몬, 유대교 신자이던지 아니면 심지어 전혀 종교가 없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나는 여러분들의 종교적 배경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이 우주를 창조하실 때 우리에게 종교를 가지라고 창조하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xix]>
물론 그 이후 워렌은 자신은 예수가 하나님이라고 믿고 있다고 말하였지만 그가 던진 함축적인 의미는 그들의 종교가 불교던, 몰몬이던, 다른 무엇이던 하나님께 중요하지 않으며 또한 그들의 종교가 예수를 그들의 삶에 받아들이는데 방해가 되지 않다는 것이다. 인기가 좋은 책 재즈처럼 푸른(Blue Like Jazz) 을 지은 도날드 밀러(Donald Miller)는 위의 견해를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내게 있어서는 기독교를 버리고 설명은 할 수 없지만 체험될 수 있는 비정치적 신비적 시스팀인 기독교 영성을 취하게 되면서 다른 사람들과 나의 믿음을 나누기 시작하였다.[xx]>
어르윈 맥크나너스는 그의 책 미개한 방법 (The Barbarian Way)에서 “미개인들(Barbarians)”을 긍적적인 관점에서 언급하며 이것이 그리스도-추종자들의 모습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들은(미개인들은) 기독교를 세계 종교 중에 하나로 보며 여러 면에서 다른 종교 시스팀과 다른 것이 없다고 본다. 불교던, 힌두교던, 이스람이던, 기독교던 그들은 종교에 관심이 없다. 그들이 가졌던 관심은 2000년 전에 예수께서 시작하셨던 혁명을 발전시키는 것이다.[xxi]>
파수군의 나팔소리 (Watchman’s Trumpet) 잡지에서 발행한 2000년 5월/6월호는 이 새로운 선교 개념이 실제로 무엇인지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사명을 가진 청년(Youth With a Mission) 기관을 포함한 여러 국제 선교 기관들은 기독교를 환영하지 않는 여러 선교지에 이 새로운 접근 방식을 실험해 보고 있다. 2000년 3월 24일, 캐리스마 뉴스 서비스(Charisma News Service)는 몇몇 선교사들이 지금 개종자들을 만들고 있으나 그 개종자들에게 “그들의 전통적인 종교적 믿음과 관습들을 얼마든지 붙들어도 된다”고 허락하고 있다고 보고하였다. 따라서 그들의 문화 속에서 다른 사람들을 불쾌하게 하는 일이 없다고 보고하였다.[xxii]>
파수군의 나팔소리 의 캐리스마 라는 기사는 다음과 같이 상세하게 보고한다.
<“메시아닉 무슬림들(Messianic Muslims)”은 그리스도를 그들의 구세주로 영접한 후에도 계속 코란을 읽고 이슬람교 성원(모스크)을 방문하며 그들의 매일의 기도를 드린다. 사명을 가진 청년 선교 기관(YWAM)에 의하면 이는 여러 국가에서 실험해 본 선교 전략의 열매라고 한다.[xxiii]>
캐리스마 기사는 새로운 개종자의 삶의 스타일이 어떻게 변화하였는지 사명을 가진 청년 선교 기관(YWAM)의 선교사 편지를 보고하고 있다.
<그들은 (새로운 개종자들) 이슬람의 필요들을 계속 따르는 삶을 살고 있다. 모스크를 방문하고 금식을 하며 코란을 읽는다. 또한 그들을 위한 하나님의 자비의 근원으로서 그리스도를 인정하는 모슬림 사람들과 함께 모여 친교를 나누기도 한다.[xxiv]>
가장 큰 선교 기관중에 하나인 “사명을 가진 청년 선교 기관(YWAM)”이 개종자들이 그들 자신의 종교적 전통에 그대로 있을 수 있다는 새로운 선교학을 지지한다는 것은 분변력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대참사가 일어날 것을 전조하는 것이다.
교회 없는 기독교
“교회 밖에서 흥황하는 인도의 그리스도 추종자들”이라는 제목의 글에 다음 내용이 들어 있는데 그 내용은 교회없는 기독교(Churchless Christianity) 라는 책의 저자인 헐버트 후퍼(Herbert Hoefer)의 연구에 관한 것이다.
<1980년 중반에 놀라운 연구가 시작되었고 1991년 그 연구의 출판되었는데, 이 연구를 했던 헐버트 후퍼는 마드라스 도시(Madras City)의 사람들이 서방 세계 기독교 나라 도시들의 그 어떤 대중들보다 더욱 역사적 기독교에 가깝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럼에도 이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아니며 오히려 힌두교인들, 모슬림들이다. 그들 중에는 상당한 많은 사람들이 근본적인 성경의 교리들을 공개적으로 믿는 참된 그리스도인들인데, 그럼에도 그들은 제도적인 교회의 밖에 머물고 있다.[xxv]>
이 기사는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될 필요가 없이 또는 자신의 종교적인 관습을 바꾸지 않고도 단지 그의 영적인 상태에 예수만을 추가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확장하고 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내가 제안하는 이시타-데바타(Ishta-devata:Sanskrit, 자신이 원하는 것을 신성화함) 전략은 오히려 힌두교를 숨막히게 만드는 위험이 있다고 논쟁한다. 이는 고유의 기독교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화된 힌두교를 만들 것이라는 것이다. 아마 더욱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그리스도화된 힌두교라고 하겠다. 이때 나는 그들에게 실제로 이 둘은 같은 것이며 따라서 이에 대하여 염려할 필요가 없다고 제시하였다. 우리는 인도의 문화 및 종교성을 바꾸기를 원치 않는다. 우리는 단지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힌두교의 중심으로 가져가길 원할 뿐이다.[xxvi]>
헐버트 후퍼의 연구는 매우 흥미롭다. 그의 생각은 힌두의 문화나 모슬림 문화를 “바꾸거나 거절하는” 대신에 선교사들은 그 문화를 “그리스도화(Christ-izing)”해야 한다는 것이다.[xxvii] 그는 인도에 소위 “세례를 받지 않은” 수천명의 신자들이 있다고 말한다. 신자들이 세례를 받지 않는 이유는 여러가지인데, 그 중 가장 주된 이유는 경제적으로 또는 사회적으로 손해를 입지 않기 위해서라고 한다. 후퍼는 세례를 받지 않은 이러한 신자들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인정한다. 또한 그들 자신들도 그리스도인으로 불려지기를 원치 않는다. 세례를 받지 않은 이러한 신자들은 여전히 그들의 종교적인 예식을 행함으로 가족이나 친구들로부터 의심이나 모독을 당하지 않게 된다. 후퍼는 예로 한 사건을 설명한다.
<낮은 계급(caste)의 어떤 젊은이는 힌두교 축제 및 활동시에 드럼을 침으로 먹고 산다. 그는 “이 모든 것이 내가 해야만 하는 것이지요”라고 말했다. “그러나 나의 믿음은 그리스도에게 있습니다. 내 밖은 힌두교인이지만 내 안은 그리스도인입니다.”[xxviii]>
나야르 계급(Nayar caste)에 속한 어떤 가족은 아내, 남편, 아들 하나가 있다. 후퍼는 그들의 상황을 설명한다.
<그녀의 남편과 아들은 8년 동안 그리스도를 믿어왔다. 그 둘은 기독교 학교에서 공부했으며 그리스도를 배웠다. 남편의 아버지는 그리스도의 비전을 보았고, 형제 중 하나는 세계를 받지 않은 신자이다. 남편은 아내가 교회를 갈 때 교회에 가지는 않는다. 그러나 가끔 큰 공식 모임이 있을 때는 참여한다. 그들은 가족 예배를 드리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의 가정에서 힌두 신들과 함께 예수를 섬긴다. 그들은 힌두 축제들을 지키고 있으며 축제 중에는 예수만 특별히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신에 대하여 생각한다.[xxix]>
나는 세례를 받지 않은 이러한 신자들이 진정으로 거듭났는지 아닌지 판단할 수 없다. 오직 주만이 아신다. 나의 염려는 선교의 방법이 바뀐 점과 복음이 제시되는 방법에 있다. 이방 종교를 버리지 않아도 된다는 가르침과 여전히 자신들을 힌두교 및 모슬림 사람이라고 부르도록 두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과 상반된다. 자신의 믿음 때문에 결국 죽게된 사도 바울은 신자들에게 그리스도를 위하여 모든 것을 포기하도록 부탁한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빌 3:8).
새로운 선교학이 내포하는 바는 심각하다. 특히 매우 비성경적이란 점이 큰 문제이다. 렡아스리즌(Let Us Reason) 사역의 마이크 오펜하이머(Mike Oppenheimer)는 새로운 선교학에 관한 광범위한 연구와 분석을 하였다. 그의 글 “21세기의 새로운 선교 방법”에서 오펜하이머는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그리스도인이 이제 자신을 모슬림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무슬림이라는 단어는 두 단어로 되어 있다. 이슬람(Islam)과 무(Mu)이다. 무슬림은 단지 순복이란 뜻이 아니다. 이 뜻은 알라신께 순복한다는 뜻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나 야훼에게 하는 것이 아니다. 무슬림이 그리스도인으로 불리면서 알라와 동행할 수 있는가? 호칭을 바꾸던지 아니면 그 의미를 바꾸지 않고는 교리적으로 그리고 실제적으로 전혀 말이 되지 않는다. 오직 혼동만 있을 뿐이다. 호칭이나 속성이나 설명에 있어서 당신은 야훼를 참 하나님으로 소개할 수 있는데 왜 이렇게 하는가? 이러한 선교를 할 경우 전혀 다른 결과들이 나타날 것이다. 자신들의 목표와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한 실용주의가 수단을 정당화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xxx]>
오펜하이머와 샌디 심슨(Sandy Simpson)은 그들이 쓴 그들이 마음 속의 우상 (Idolatry in Their Hearts) 이라는 책에서 이 새로운 선교학이 얼마나 넓게 퍼졌는지 보여준다. 새로운 선교학을 지지하는 몇몇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새로운 빛(New Light)을 구축한다는 것은 다른 종교의 믿음들과 “연결되는 것”이며 “정보를 나누는 것”을 뜻한다. … 야웨를 따르던, 칼리(Kali: 힌두교의 창조와 파괴의 여신)를 따르던, 크리슈나(인도 신화의 비쉬누의 제 8번째 신)를 따르던 이러한 거룩한 자들의 마음 속에 나부끼는 불꽃을 부인하지 않으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충성스런 제자가 될 수 있다.[xxxi] - 레오나드 스위트
나는 다른 종교에서 그리스도의 추종자들을 만날 수 있었다.[xxxii] - 릭 워넨
내게는 불교와 기독교 사이에 아무런 모순이 보이지 않는다. … 나는 가능한 좋은 불교도가 되어 보려고 애썼다.[xxxiii] - 토마스 멀톤
알라는 또 다른 하나님이 아니다. … 우리는 같은 하나님을 예배한다. … 같은 하나님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과 무슬림이 예배하는 같은 하나님을 예배한다.[xxxiv] - 피터 크리프트>
오펜하이머와 심슨은 그 책의 각 페이지마다 기독교 선교의 패러다임 전환을 보여주고 있다. 그들은 이 질문을 한다. “힌두교도와 무슬림 교도와 예수를 따르는 자가 하나가 될 수 있을까?” 그들은 그 답변으로 “안된다”고 말하는 이유를 설명한다.
<거짓 종교의 테두리 내에서 예수님과 관계를 맺는 것은 불가능하다. 예수님을 따르려면 자신의 종교를 버려야 한다. 예수님을 추가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을 포용하려는 개념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좁은 길을 넓은 길로 만드는 것이다. 더욱 염려스러운 것은 이런 종류의 언급들이 우주적인 견해를 붙들고 있는 뉴에이저들에 의하여 표현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앨리스 배일리(Alice Bailey)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추종자들’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때 나는 이 표현을 신조나 종교에 상관없이 그들의 동료들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사용한다”[xxxv]고 말하였다.>
당신의 종교가 영적인 삶에 방해물이 되지 않도록 하라는 릭 워렌의 언급, 기독교를 파괴하고 싶다는 어르윈 맥크마너스, 새로운 개종자들은 기독교없이 (세례를 받을 필요없이) 예수를 믿을 수 있는 선교 정책들등으로 인한 결과는 파괴적일 수 있으며 전 세계에서 그 동안 헌신했던 많은 선교사들의 피땀어린 수고를 헛수고로 만들 가능성이 높다. 성경대로 믿으며 선교를 해온 선교사들은 안락하고 편안한 삶을 포기하고 심지어 자신들의 생명을 무릅쓰며 세계 곳곳에서 복음을 증거하였다. 그들은 외치길 그리스도인이 되어야만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과 삶에 모셔야만) 영생에 이를 수 있다고 외쳤다. 그러나 그들 뒤로 오고 있는 이머징 교회의 선교사들은 기독교는 끔찍한 종교라고 말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은 점심이나 먹으러 밖으로 나갔다고 한다. 그러니 단지 그리스도의 추종자가 되어 달라고 부탁한다. 또한 이머징 교회 선교사들은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추종자가 된 이후에도 그러한 사실을 혼자만 알고 아무에게도 말할 필요가 없으며 원래 살던 방식대로 그대로 살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지난 수세기에 걸쳐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하여 핍박과 순교를 당하며 자신들이 그리스도인임을 담대하게 선포했던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우리는 지금 그들의 헛되게 고생하며 죽었노라고 믿어야 하는 것이다. 결국 그들은 예수만이 유일한 길이라고 고백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이방 종교들을 부인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우리는 또한 예수님의 다음과 같은 말씀이 어머징 교회 패러다임에 전혀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 (마 10:32-33)
사도행전에는 강력한 사건들이 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한다는 이유로 체포가 되어 감옥에 갇힌다. 그는 아그립바 왕 앞에 서게 되고 그가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되었는지를 증거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 바울은 아그립바에게 주께서 자신에게 복음을 선포하라고 맡기셨다고 말한다.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행 26:18).
아그립바 왕은 계속 그의 말을 드더니 바울에게 말하였다.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 이때 바울이 그에게 대답하였다.
“바울이 이르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하니라” (행 26:29).
만일 바울이 이머징적인 사고 방식을 가졌다면 그는 아그립바 왕에게, “그리스도인이 될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 살아가시는대로 살아가셔도 됩니다. 당신이 해온 예식들과 관습들을 지키십시오. 그러나 단지 나는 예수님을 좋아한다고 말하십시오” 라고 말하였을 것이다. 사실, 만일 바울이 이머징 영성대로 행하였다면 무엇보다 그는 체포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는 왕 앞에 서지도 않았을 것이며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과감하게 복음을 외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는 절대로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지 않았을 것이고 결국 사형 선고도 받지 않았을 것이다.
포용적인 복음
에디 깁스(Eddie Gibbs)와 라이언 볼거(Ryan K. Bolger)는 이머징 교회들: 포스트모던 문화 가운데 기독교 공동체를 창조하기 (Emerging Churches: Creating Christian Community in Postmodern Cultures) 책의 공동 저자이다. 그 책의 뒷면에 이러한 주장이 있다: “이머징 교회에 대한 최고의 책.” 브라이언 맥클라렌은 이러한 평가에 동의한다.
<만일 당신이 이머징 교회들과 진실한 대화를 원한다면 이 책을 읽어라. … 이 책은 이머징 교회들의 본질적인 신학적 강조점들을 인식하고 있다. 그리고 이 책은 50명 이상의 사람들과의 실제 대화에 기초하고 있다.[xxxvi]>
풀러 신학교의 교회 성장 교수인 깁스와 풀러 신학교의 범세계적 지도력 분야의 학술 이사(Academic Director)인 볼거는 함께 팀이 되어 이머징 교회에서 나타나는 9가지 패턴을 개략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들의 연구는 약 5년 이상 걸렸다.[xxxvii]
이들이 세밀하게 점검한 추세 중에 하나는 이머징 교회의 선교이다. 그들은 말하길 “이들의 선교는 다른 믿음을 가진 사람들과 삶의 깊은 체험들을 나누는 것을 포함한다”[xxxviii]고 한다. 그들은 이머징 교회 지도자들이 믿음을 의심하는 자들에게 분명한 답변을 제공함으로 믿음을 수호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못마땅해 하는 것을 발견하였다.[xxxix]
깁스와 볼거는 이 생각을 영국 버밍햄 출신인 이머징 교회 지도자 핖 파이퍼(Pip Piper)을 인용하여 구체화하였다.
<내게 있어서 선교와 사명은 아무리 내가 깨달은 것이 예리하고 독창적이라 하더라도 더 이상 사람들을 설득하여 내가 믿는 것을 믿도록 하는 것이 아니다. 이제는 선교란 내게 있어서 서로의 체험과 만남을 더욱 나누는 것이 되었다. 이는 삶과 믿음의 여정을 함께 걸어가는 것이다. 물론 각각의 전통과 문화가 다르지만 각각 나름대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안고 서로 진릴르 나누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xl]>
그러나 선교에 대한 파이퍼의 정의는 성경과 상충된다. 사도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벧전 3:15)
성경 어디에 이방인들과 손을 잡으라고 가르치는가? 또한 그들의 믿음을 선교의 수단으로 사용하라는 말이 성경 어디에 있는가? 깁스와 볼거는 이러한 선교 스타일의 긍정적인 면이 부정적인 면보다 크다고 믿는다.
<그리스도인들은 선교의 과정에서 먼저 자신들이 (선교의 대상에 의하여) 선교 되지 않으면 참된 선교를 할 수 없다. 복음을 나누면서 사람들은 다른 종교의 믿음에 의하여 표시되는 영적 통찰력과 정직한 질문과 헌신의 깊이로 풍성해 져야 한다. 다른 사람들을 포용한다는 것은 그들의 의견을 듣는 것과 그들에게 배우는 것을 뜻한다. 다른 믿음 안에 존재하는 많은 것들이 사실 하나님의 왕국에 반드시 적개적인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종류의 삶의 여정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xli]>
만일 성경에 근거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 그러한 믿음을 갖지 않은 사람에게 접근하려다가 그 사람의 믿음으로 이끌린다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선교가 반대로 되는 것이 아닌가? 성경 어디에도 이러한 선교를 찾아볼 수 없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방인들과 손을 잡지 않을 것을 경고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예레미야가 선포한 것처럼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였다.
“여호와께서 또 내게 이르시되 유다인과 예루살렘 주민 중에 반역이 있도다. 그들이 내 말 듣기를 거절한 자기들의 선조의 죄악으로 돌아가서 다른 신들을 따라 섬겼은즉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이 내가 그들의 조상들과 맺은 언약을 깨뜨렸도다.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이와 같이 말하노라 보라 내가 재앙을 그들에게 내리리니 그들이 피할 수 없을 것이라 그들이 내게 부르짖을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할 것인즉” (렘 11:9-11).
깊스와 볼거는 성경의 이러한 분명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주의 말씀을 거역하는 성공적인 이머징 교회의 예들을 제공한다. 한 예는 우즈 공동체의 스펜서 버르크(From the Ooze: 이머징 교회를 지원하는 문화 공동체)이다. 그의 공동체는 “매주 또는 격주로 다른 기독교 전통들을 방문한다.” 버르크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기독교 전통은 배타적인 모델이 아니라 포용적인 모델을 지킬 수 있었다. 우리는 해석하는 공동체이다. 우리는 다른 종교의 거룩한 글들을 읽는다. 그리고 성경을 읽으면서 다른 종교의 거룩한 문학의 관점에서 성경의 내용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는지를 결정한다.[xlii]>
그러나 버르크의 “포용적인 모델”은 “기독교 전통”의 경계를 벗어난다. 깁스와 볼거는 다른 종교의 거룩한 글들을 읽는 이머전트 공동체를 서술한다.
<버르크의 공동체는 기독교 영역을 벗어나는 믿음의 전통들로부터 배울 준비가 되어 있다. 그들의 교회에는 불교 신도가 있다. 공동체로서 이 교회는 불교 사원을 방문하였다. 그 공동체는 불교 사원의 가족들과 함께 명상을 따라 했다. 버르크는 하나님을 나타내는 많은 방법들을 거행한다. 그는 성령이 이들과 항상 같이 있었다는 것을 인식한다. 공동체는 다른 전통들도 시행한다. 다른 전통들을 다 찾아 다니면서 그 전통에 속한 사람들도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인 것을 본다. 버르크 공동체는 교회보다는 왕국에 초점을 둔다. 그들은 다른 종교의 믿음을 가진 사람들과 친분을 나누며 그들과의 관계가 바뀌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xliii]>
이머전트 및 고대 영성(Vintage) 믿음의 이름 하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저질렀던 똑 같은 우상 숭배가 되풀이 되고 있다. 그러나 미혹으로 향하는 이 과정은 계속 되풀이 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박수를 받고 있다. 이머징 교회 선교가 드러나면서 한때 이방 종교의 믿음 시스팀으로부터 성경적 기독교를 구별하였던 장벽들이 철저하게 무너지고 있다. 죄인들을 지옥으로부터 구원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는 대신에 새로운 복음이 선포되고 있다. 새 복음을 전하는 선포자들은 모든 종교의 영성을 드나들면서 미혹의 예복을 입고 있다. 예수님은 천국으로 인도하는 길은 좁은 길이라고 선포하셨다. 또한 주님은 천국에 들어가는 유일한 문이시다. 그러나 이와는 정반대로 이머전트 메시지는 (그들이 꿈꾸는) 왕국을 설립하기 위하여 하나님께로 향하는 좁은 길을 버리고 있다.
더 열악한 것은, 우리가 주님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는 예수님의 명령이 주께서 말씀하신 것과는 정반대로 해석되고 있다는 점이다. 깁스와 볼거는 자신들의 요점을 더욱 분명히 하기 위해 다른 이머전트 지도자의 말을 인용한다. 워싱톤의 사도들 교회의 대수녀원장인 캐런 와드(Karen Ward)는 “더 이상 선교를 믿지 않는다”고 말한다. 와드는 깁스와 볼거, 그리고 버르크와 같은 소리를 낸다.
<우리는 선교나 사명이 없다. 성령이 선교사이다. 사명은 하나님께 속하였다. 우리가 할 일은 단지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시하신 대로 공동체로서의 삶을 공개적으로 사는 것이다. 사람들이 왜 우리가 이렇게 사는지 물으면 우리는 그들에게 우리 안에 있느 소망에 대하여 나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함으로 각자의 매력을 창조한다. 병든 자와 궁핍한 자들을 돌보라.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선교를 창조해 낼 것이다.[xliv]>
병든 자와 궁핍한 자를 돌볼 때 복음을 나눌 수 있는 기회가 만들어지는 것이지만, 이머징 영성 선교사들은 그리스도를 공개적으로 전파하는 자들을 너무 우격다짐으로 튄다고 말하면서 잠잠케 만든다. 이머징 교회의 새로운 선교는 비록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진행되더라도 사실은 그리스도를 대항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든 종교의 믿음들을 통합시킬 수 있는 교량이 설립되어 왔다. 그러나 그 다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우회하고 있다.
선과 악 사이에 간격에 다리 놓기
뱀이 에덴동산에서 이브를 유혹할 때 그 유혹은 우리가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 유혹은 지금 이 순간까지 인류에게 항상 있었다. 사탄의 계획은 자신과 하나님 사이의 간격을 제거하거나 줄이는 것이다. 다음 설명은 이를 잘 표현한다.
<선과 악의 충돌 가운데 사탄은 사람들을 어둠 쪽으로만 이끌려고 한다고 생각하지 말라. 사실 사탄은 자신과 하나님 또는 선과 악 사이의 간격을 철저하게 제거하려고 한다. 사탄의 이러한 접근을 이해할 때 우리는 왜 토마스 멀톤이 모든 사람은 이미 하나님과 연합되어 있다고 말하였는지, 왜 잭 캔필드가 그는 모든 사물을 통하여 흐르는 하나님을 느꼈다고 말하였는제 볼 수 있다. 모든 것이란 아무 것도 남아서는 안된다. 모든 것이어야 한다. 모든 것이 하나님이요 하나님이 모든 것이라는 논리는 하나님께서 그의 모든 영광을 모든 피조물에게 주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사탄은 피조물의 한 부분으로서 이러한 하나님의 영광을 누릴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지극히 높은 자와 맘먹을 수 있게”[xlv] 된다.>
이머징 교회에 속한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과 (또는 그들의 표현대로 그리스도의 추종자들) 비그리스도인들 사이의 간격에 다리를 놓을 필요가 있다고 사람들을 설득할 때 그들은 복음을 나누기 위하여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다가서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공통된 여론에 어떻게 이를 수 있는가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레오나드 스위트는 이렇게 설명한다.
<포스트모던의 고르지 못하고 날뛰는 풍랑을 항해할 수 있는 열쇠는 어떤 균형이나 “안전 중간 지점”을 찾는 것이 아니다. 파도를 타고 반대편과의 다리를 놓는 것이다. 특히 함께 깨달음을 나눌 수 있고 함께 화목할 수 지점에 다리를 놓는 것이다.[xlvi]>
스위트가 위의 언급을 통하여 무엇을 말하려는지를 알아내려면 좀더 생각을 해야 한다. 그가 두 반대편 간에 다리를 놓는다고 말할 때 그는 선과 악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를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이 둘 사이에 있는 긴장을 이원론이라고 부른다. 사교의 중심에는 이 이원을 제거하려는 노력이 있다. 만일 그 차이가 참으로 사라진다면 사탄과 하나님은 같아질 것이다. 성경은 절대로 이런 일이 발생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이는 사탄의 욕망일 뿐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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