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홍 목사의 성경적 상담 연구소 RBD COUNSELING INSTITU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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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그나티우스 로욜라(Ignatius Loyola)와 예수회(Jesuits)2

루터와 로욜라
「로마」교황 「율리우스」2세에 의해 「로마」의 「베드로」성당 건축 자금조달을 위해 면죄부 판매책 「테첼」을 독일에 파송, 앞으로 지을 죄까지도 사할 수 있는 면죄부 판매가 시작되었다. 성물(聖物)들이라는 거짓된 것들을 진열해 두고 죄사함을 선포하고 돈을 거두었던 시대가 「루터」(Martin Luther, 1483-1546)가 태어나고 자란 환경이었다. 「루터」의 은인으로 알려진 「삭소니」의 「프레데릭」제후는 선조대대로 물려받은 많은 성물-동정녀 「마리아」의 머리카락 4개 등, 연옥에서 2백만년에 해당되는 햇수를 거뜬히 면제해줄 수 있을 만큼 많은 잡다한 성물-등을 수집해 놓은지라 그는 「비텐베르크」를 「로마」에 버금가는 '독일의 「로마」'로 만들어 로마교황청과 견주어 독일의 돈과 순례자들이 「로마」로 빠져들어가는 것을 막고자 하였다. 이 제후가 「루터」를 보살핀 목적은 다른 데에 있었고, 그는 독일의 「로마」를 만들지 못하였으나, 하나님의 섭리는 다른데 있어 「비텐베르크」는 「루터」의 도시가 되어 개혁(Reformation, 1517-1521)의 시발점이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루터」의 소책자에 개혁의 불을 붙여 흩으심으로 온 유럽의 잠자는 영혼들을 깨우기 시작하였고, 숨겨진 하나님의 교회로 돌아오는 무리가 떼를 이루었다.
 
개혁의 바람이 로마교황청을 흔들어 「로마」종교가 그 권위를 위협당한다고 느끼고 있었을 때, 사탄은 인류가 낸 가장 악명높은 인물 중 하나인 「로욜라」를 택한다.
 
"오직 성경으로!(scriptura sola)"의, 성경의 권위와 믿음 위에 기초한 「루터」가 걸어간 길과, 로마카톨릭교회가 쌓아온 인간 교부들의 사상과 전통을 들고 나선 '늑대'가문(家門)의 「로욜라」(Ignatius Loyola, 1491/1495-1556)의 길은 기독교와 로마카톨릭종교와의 차이였다.
 
「제수이트」들은 일반적으로 「루터」의 개혁 이후의 개혁자들의 세력에 대항하기 위하여 조직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상은 그 당시 「스페인」의 적이었던 동방의 세력, 「모슬렘」세력을 몰아내고자 하는 것이 「로욜라」의 첫번째 목적이었으며, 곧 「루터」의 개혁에 대항하는 반개혁(Counter-Reformation, 1527-1700)세력의 선두에 나선다.
 
우리가 루터의 '종교'개혁이라고 잘못 부르고 있으나(Reformation이란 단어에 '종교'라는 의미는 없으며, 종교는 개혁되어도 종교지, 「그리스도」의 복음이 될 수 없다), 실제로 종교는 조금도 개혁되어진 것이 없었다. 개혁되어진 것은 바로 개혁자들 자신이었고,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재발견한 개혁자들에 의하여 사회는 급속도로 개혁되어져 갔으며, 로마카톨릭교회는 더 조직적으로 종교화(사탄화)되어갔다. 「
 
로욜라」가 조직한 「제수이트」(일명「예수회」)란 의용군 조직은 완전한 군대조직으로서, 이들은 조용한 수도원 생활에 만족하지 않았고, 십자군들의 만행을 그대로 답습, 선교사 명분을 가지고 국가와 은행합자로 로마카톨릭국 식민지시대를 연다.
 
우리의 기독교회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영적 통찰력을 가지고 본 교회사라기 보다는 땅에 속한 세상권세 중심의 로마카톨릭교회사다. 천국복음의 본질에 기준을 두고 다루어진 것이 아니라 인본주의의 산물이다.
 
엄격한 의미에서 기독교회사가 아니라 혼합된 '에큐메니즘'종교사다.
'기독교인'이란 용어 또한 "위로부터" 거듭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영적개념이 결여되어 있고, 땅에 속한 형식적인 종교의식을 통해 생겨난 제도적 용어로 전락해 버렸다. 기독교회사에서 이 말보다 오해를 받아온 단어는 없으리라 생각한다.
 
어느 신학자가 '프로테스탄트 교회는 로마카톨릭교회와 희랍정교회와 더불어 그리스도교의 3대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그 가운데서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역사가 가장 짧다'라고 썼다. 기독교의 본질을 오해한 세상 지성인들은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교권중심의 교회사를 보고 '기독교는 크게 나누어 로마카톨릭교, 동방정교, 프로테스탄트 등으로 나눈다'는 식으로 썼다. 이는 기독교의 본질을 오해한 무지한 「넌센스」가 아닐 수가 없다. 우리가 어떠한 교단에 속하였든지 간에 기독교 안에는 기독교인 만이 있을 뿐이다. 「프로테스탄트」이기 전에 우리는 기독교인이며, 기독교의 시작은 예수의 복음에서 시작된다. 기독교의 최초의 교회사라고 할 수 있는 사도행전으로 돌아가 보자 :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서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행11:26). 카톨릭교인이니 정통파로 부름을 받지 않았음에 유의하라. 「바울」의 전도를 받은 아그립바는 "네가 적은 일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행26:28)라고 하였다.
<「에큐메니즘」의 이상과 우상>(舊 <그리스도의 교회와 대 바벨론의 비밀>)(도서출판 안티오크) - 구영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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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개혁
배경
봉건 사회의 동요에 따라 영국이나 보히미아에서는 종교 개혁의 선구적인 움직임이 나타나고, 교회 자체 내에도 교황의 '아비뇽 유수'(주 - 1309-1377), '교회의 대분열'(주 - 1378-1417) 등이 발생하여 교황권이 크게 쇠퇴하였다. 한편, 중앙 집권적인 통일 국가를 지향하며 날로 강대해지는 왕권은 초국가적인 교황권에 도전하고, 많은 돈이 교황청으로 유출되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였다. 신앙면에서도 성경에 입각한 경건한 신앙을 중시하고, 신과의 직접적인 연결을 원하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었다. 그러나, 교황은 르네상스의 물결에 젖어 세속화하고, 교회와 성직자는 타락하여, 인문주의자의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루터의 종교 개혁
독일은 정치적으로 분열되어 있었고, 종교 제후의 세력이 강하여 교황의 좋은 착취의 대상이 되었다. 르네상스의 보호자였던 교황 레오 10세(주 - Leo X, 재위 1513-1521)는 성 베드로 대성당의 수축비를 마련하기 위하여 독일에서 면죄부를 판매하였다. 1517년 비텐베르크 대학의 신학 교수였던 루터(주 - Luther, 1483-1546)가 면죄부 판매의 부당함을 지적한 '95개조 반박문'(주 - (발췌) 21. 면죄부의 설교사가 교황의 면죄부를 모든 벌로부터 해방되고 구제된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 27. 그들은 돈궤 속에 던져진 돈이 소리내는 순간, 영혼은 연옥으로부터 튀어 나온다고 설교한다. 82. 만일 교황이 성당의 건축이라는 사소한 이유로 모금하기 위하여 무수한 영혼을 구제한다면, 왜 교황은 가장 성스러운 자비와 영혼의 최고의 필요를 위하여 연옥을 비우지 않는가?)을 발표함으로써 종교 개혁이 시작되었다.
루터는 처음 교황이나 카톨릭 교회와 정면으로 대립할 생각은 없었으나, 교황으로부터 공격을 받게 되자, 교황에 맞서게 되었다. 인간은 오직 신앙과 신의 은총에 의해서 구제되는 것이며, 신앙의 근거는 성경이라고 주장하였다.
교황을 옹호하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카알 5세(주 - 재위 1519-1556)는 1521년 보름스에 국회를 소집하여 루터에게 그의 주장을 철회할 것을 강요하였으나, 루터는 끝내 이를 거부하였기 때문에 법의 보호를 박탈당하였으며, 피신 중에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였다. 루터의 성경 번역은 성경의 보급에 큰 힘이 되었을 뿐 아니라, 근대 독일어의 발전에도 공헌하였다.
이 무렵 루터의 종교 개혁은 전국에 파급되고, 독립 군주나 다름없는 제후와 자유 도시, 그리고 교회와 봉건적 압박에 시달리던 농민들까지 루터를 지지하였다. 그 결과 1524년 중부 및 서남부의 농민들은 농노제와 교회세의 폐지 등을 내걸고 농민 전쟁으로 알려진 대규모의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은 다음해 제후들에 의하여 진압되었으나, 루터는 농민 반란에 적극 반대하여 그의 종교 개혁은 제후와 자유 도시에 의하여 추진되게 되었다.
그 후 루터 파는 슈말칼덴 동맹을 맺고(1531), 카알 5세와 싸움을 계속한 끝에, 155년 아우크스부르크의 화의가 성립하였다. 지배자가 종교를 결정한다는 원칙에 따라, 제후나 자유 도시는 루터파 교회를 선택할 권리가 주어진 것이다. 이로써 중세 카톨릭 교회의 통일은 깨어지고, 교황의 지배를 받지 않는 새로운 교회가 정식으로 성립하게 되었다(주 -황제는 1526년 루터 파를 한 때 인정하였다가 1529년 다시 이를 금지하였기 때문에 루터 파는 이에 항의하였다. 그리하여 '항의하는 사람'이라는 뜻인 프로테스탄트라는 명칭이 생기고, 이 명칭은 그 후 신교 전체를 가리키게 되었다.). 루터 파 교회는 북부 독일을 중심으로 덴마아크, 스웨덴, 노르웨이 등지에 퍼졌다.
캘빈의 종교 개혁
루터와 거의 같은 시기에 스위스에서는 쯔빙글리(주 - Zwingli, 1484-1531)가 종교 개혁을 일으켰으나, 카톨릭 파와의 싸움에서 전사하엿다. 프랑스 태생의 캘빈(주 - Calvin, 1509-64)이 그 뒤를 이어 제네바에서 종교 개혁에 성공하였다. 그는 성경에 명기되지 않은 의식을 폐지하고, 장로제를 택하여 교회 생활에 자치적 요소를 도입하는 동시에 시민들에게 엄격한 금욕 생활을 요구하여 제네바를 종교적으로 지배하였다.
그는 또한 인간의 구제는 신에 의하여 미리 정해져 있다는 예정설을 주장하고, 신자는 자기의 구제를 확신하고, 신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하여 근면하게 세속적인 직업에 종사할 것을 권고하였다. 이러한 캘빈의 교리는 당시 상공업에 종사하던 시민 계층에게 환영을 받게 되고, 프랑스, 네덜란드, 영국, 스코틀랜드 등에 퍼졌다.
 
영국의 종교 개혁
루터나 캘빈의 경우와는 달리, 영국에서는 국왕 헨리 8세(주 - Henry Ⅷ, 재위 1509-1547)의 이혼 문제로 종교 개혁이 일어났다. 즉, 헨리 8세는 교황이 왕비와의 이혼을 승인하지 않자, 1534년 의회로 하여금 수장령을 통과시켜, 영국 교회를 교황으로부터 독립시키고, 국왕이 영국 교회의 수장이 되도록 하였다. 헨리 8세는 이어 수도원을 해산하여(1536, 1539) 그 토지를 몰수하였다.
이어서, 에드워드 6세(주 - 재위 1547-1553)때 「일반 기도서」를 제정하여 신교적인 내용을 더욱 가미하였으나, 메리 여왕(주 - 재위 1553-1558) 때에는 카톨릭으로 되돌아갔다. 그러나, 그 뒤를 이은 엘리자베드 1세(주 - 재위 1558-1603)는 통일령(1559)을 발하여 영국 국교회(주 - Anglican Church)를 확립시키고, 신앙면에서도 신교적인 내용을 갖추었다. 그러나, 종교 개혁의 발단이 국왕의 이혼 문제에 있었던 관계로 교회 조직이나 예배 형식 등에 있어 신교 중에서는 가장 카톨릭에 가까왔다. 영국의 종교 개혁에는 영국 국민의 교황에 대한 반감과 국민 의식이 크게 작용하였으나, 신앙면에서 철저하지 못하여 캘빈 계통의 신앙을 받아들인 청교도(주 - Puritans)들에게는 불만이 많았다.
 
카톨릭 교회의 개혁
종교 개혁이 확대되자 카톨릭 교회도 개혁에 나섰다. 장기간에 걸친 트리엔트 공의회(주 - 1545-1563)에서 비판의 대상이 된 폐단을 시정하고, 기본적인 교리를 재확인하는 한편, 이탈리아나 에스파니아 같은 카톨릭 국가에서는 종교 재판을 강화하여 신교의 확대를 저지하려고 하였다.
 
신교의 확대를 막고, 카톨릭 세력의 회복에 크게 공헌한 것은 예수회(주 - Jesuits)였다. 예수회는 1540년 에스파니아의 로욜라(주 - Loyola, 1491-1556)가 교황의 인가를 받아 설립한 교단으로서, 교황과 상위자에 절대 복종하며, 엄격한 규율하에 선교 활동과 교육에 주력하였다. 그들의 활동으로 남부 독일과 오스트리아, 그리고 폴란드가 카톨릭으로 돌아오고, 해외 전도에도 열심히 종사하여 아시아와 신대륙에 크리스트 교와 유럽 문화를 전달하였다.
 
그러나, 이미 중세의 종교적 통일은 깨어지고 프로테스탄트(주 - Protestant) 즉, 개신교라는 새로운 교회가 탄생하였으며(주 - 우리 나라에서는 현재 프로테스탄트 계통의 교회를 개신교라고 부르나, 일반 서술에서는 종래의 관례에 따라 '신교'라고 하였다.), 그 후 양 파 간에는 치열한 종교 전쟁(참고 - 네덜란드독립전쟁, 위그노전쟁, 1618-48년의 30년전쟁)이 전개되었다. 이러한 종교 전쟁의 진행 과정에서 종교적 관용이 싹트고, 교회는 점차 정치, 경제, 문화 등 각 분야에서 중세 때와 같은 세력을 발휘할 수 없게 되었다.

  ※ ((Sub Note 1.))
 
  § 종교 개혁
  [1] 종교 개혁의 원인 '16세기'
  (1) 선구 : 14C 위클리프(영) 휘스(보헤미아) - 실패
  (2) 원인 : · 교황권의 쇠퇴와 교회의 전반적 타락
             · 통일 국가의 성장, 왕권의 강화
             · 국왕, 영주의 경제적 불만 - 교회 재산을 탐냄
             · 신과 직접 접촉하려는 경향(르네상스 영향 - 인간 중심의 세속적, 자유정신 고취)
  [2] 루터의 종교 개혁
  (1) 배경 : 정치적 분열, 종교 제후의 강성 - 착취 대상
  (2) 발단 : 면죄부 판매, 루터의 95개조 반박(1517) - 성서 신앙 지상 주의
  (3) 확대 : · 보름스 국회 소집 - 루터 법률상 보호 박탈(1521)
             · 성서를 독일어로 번역
             · 농민전쟁(1524-25) 루터의 반대, 남부 농민의 지지 상실
  (4) 인정 : 아우구스부르크 종교회의(1555) 제후, 자유 도시의 종교 자유(루터파만)
             루터파→북부 독일,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카톨릭-남유럽
  [3] 캘빈의 종교 개혁
  (1) 쯔빙글리의 개혁 실패 - 스위스
  (2) 캘빈의 개혁 성공 - 제네바 정치 종교적 지배 (신정 정치)
  (3) 사상 : 성서에 없는 모든 의식 폐지, 민주적 교회 조직, 금욕 생활, 예정설
             세속적 직업에 충실 → 근대 자본 주의 발달에 영향
  (4) 전파 : 상공업에 종사하는 중산 계급의 환영
             프-위그노, 스코-장로파, 영-청교도, 네덜-고이센
  [4] 영국의 종교개혁
  (1) 특색 : 헨리 8세의 이혼 문제
  (2) 수장령(1534) : 헨리 8세 영국 교회를 교황으로부터 분리
                     국왕이 영국 교회 지배자, 수도원 해산, 토지와 재산의 몰수
  (3) 매리 여왕의 신교 탄압
  (4) 통일령(1559) : 에리자베드 여왕 국교회 확립, 신교 교리+구교 의식
  (5) 성격 : 교황에 대한 영국민의 반갑, 민족 의식이 각성, 카톨릭에 가장 가까움
  [5] 카톨릭 교회의 개혁
  (1) 트리엔트 종교회의(1545-63) : 폐단 시정, 종교 재판소 설치, 금서 목록 작성, 신교의 확대 방지
  (2) 예수회 : 에스파니아의 로욜라(1534) 교황에 대한 절대 복종, 군ㅋ대식 엄한 규율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에 전도, 서양문물 전래
  [6] 종교 전쟁 '16세기말'
  (1) 성격 : 종교적 대립 배후에 정치적 갈등, 경제적 대립
  (2) 네덜란드 독립 전쟁 : 에스파니아 필리페 2세 구교 강요 - 네덜란드 신교 독립 선언(1581)
  (3) 위그노 전쟁 : 정치적, 종교적 대립, 낭트 칙령(1598) 앙리 4세-신교도 신앙 자유
  (4) 30년 전쟁(1618-48)
      · 원인 : 보헤미아 신교도 반란
      · 경과 : 국제 전쟁의 양상 - 스웨덴, 덴마크, 프랑스 참가
      · 결과 : 베스트 팔렌 조약(1648)
               · 독일 - 경제적 쇠퇴, 정치적 분열(제후 자치권)
               · 개인의 신앙 자유(캘빈파도)
               · 스위스, 네덜란드 독립
               · 정치적 세력 균형

  ※ ((Sub Note 2.))
  종교개혁
 
  루터 1517 성서신앙지상주의, 농민전쟁(남부)
  루터파 - 북독일, 북유럽,
  카톨릭 - 남유럽(이탈,에스,프랑스)
  캘빈 - 신정정치, 예정설, 세속적 직업 충실, 청교도·위그노,
  영국 - 수장령, 국왕이 교회 지배,
  신교 공통점 - 성서권위
  종교전쟁 - 30년전쟁(1618-48) 베스트팔렌 조약 개인 신앙 자유, 정치적 세력 균형, 제후 자치권 인정
 
<고등학교 세계사 V. 서양 근대의 발전 1. 근대 의식의 성장 (3) 종교 개혁, 1984. 3. 1. 초판 발행 p.136-140>(교학사) - 민석홍, 나종일, 윤세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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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종교개혁
예수회
1534년 이그나티우스 로욜라(Ignatius Loyola)에 의해 설립된 예수회에 대하여 알지 못하고서는 근대 교회사를 이해할 수 없다. 1521년 이 용감하고 매우 영웅적인 스페인의 젊은 장교는 심한 부상을 당하여 병원에 있는 동안 커다란 영적 변화를 체험했으며 극단적 금욕주의 은둔자의 생활을 받아들여 그의 외모가 바뀌어질 만큼 매우 엄격한 생활을 하였다. 그는 마귀의 환상과 또한 어둠의 권세자들에 대항해서 싸우는 그리스도와 그의 성자들의 환상을 보았다. 곰곰이 생각하던 중에 그는 전체 로마 교회가 멸절되지 않으려면 "전혀 새로운 어떤 기틀"이 확립되어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는 개혁자들의 가르침에 대항하여 싸우기로 단호하게 결심하고 품위 있는 귀족 생활을 다시 시작하면서 여섯 명의 친구들과 함께 파리에서 예수회를 설립했다. 그들은 "진정한 영적 기사"가 되어 "신자들에게 진정한 진리"를 전하기로 엄숙하게 서로 맹세하였다. 교황은 이 단체야말로 종교개혁에서 교회가 잃어버린 것을 회복하도록 도와 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스페인이나 이탈리아와 같이 카톨릭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지역에서는 종교 재판을 통해 개신교도들을 근절시킬 수가 있었다. 그러나 개신교가 우세한 지역에서는 예수교 회원들을 침투시켜서 정중한 언행으로 영향력 있는 사람들의 비위를 맞춤으로써 그들을 로마 교회로 되돌아오게 하는 것이 더 나은 방법이었다. 니콜리니(Nicolini)에 의하면, 예수회는 "스페인에서는 전제적이었고, 영국에서는 입헌적이었으며 파라과이에서는 공화적이었고 로마에서는 완고했으며 인도에서는 우상 숭배적이었다."
 
이 교단의 기율은 매우 엄정하고 철저하였다. 모든 회원들을 하나로 결속시킨 책 영적 훈련(Spiritual Exercises)은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우리가 교회와 전적으로 같은 마음을 갖기 위해서는 우리 생각에 희게 보이는 것을 교회가 검은 것이라고 규정짓더라도 우리는 교회가 선언한 대로 믿어야만 할 것이다." 이러한 가르침을 받아들임으로써 사람들은 교회 고위층 사람들의 영적 노예가 되고 말았다.
로마 교회의 이익을 더 증진시키기 위하여 로욜라는 "좋은 결과가 주어진다면 악을 행하는 것도 허용한다"고 그 교단에 가르쳤는데, 이 원칙으로 인하여 말로 다 할 수 없는 사악한 일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윤리적 문제를 취급함에 있어서 예수화는 결의론과 궤변론의 체계를 발전시켰는데 이것은 사방에서 그들의 평판을 나쁘게 했다. 1762년 파리 의회는 그들의 교리가 "거짓과 위증, 가장 비난할 만한 불순, 한 마디로 말해서 인간의 약함에서 비롯되는 모든 욕망과 모든 범죄를 정당화시킴으로써 일반 사회의 모든 유대를 깨뜨릴 위험이 있다"고 선언하였다.
 
예수회는 반 종교개혁의 생명이자 영혼이었으며 그들의 영향력은 트렌트 회의 말기에는 매우 강해졌다. 그들은 교육을 특별히 강조하여 유럽 도처에서 큰 학교들을 세우고 젊은이들을 바티칸의 계획을 추진시키는 열렬한 도구로 만들었다. 예수회 회원들은 도시의 부랑자들 사이에서나 전도에서나 개인 활동 등 어디에서나 적극적이었다. 또한 그들이 일하는 곳은 어디든지 종교 재판소라고 하는 피의 기구가 가동되고 있었다. 이런 저런 방법으로 로마 교회는 독일 남부, 오스트리아 그리고 보헤미아 등지에서 잃었던 땅을 많이 회복하였다. 예수회의 음모와 계책은 여러 나라에서 수없이 자행되었다. 영국에서는 엘리자베드 여왕 시대에, 스코틀랜드에서는 메리 여왕과 제임스 6세 시대에 그런 일들이 행해졌다. 때때로 그들의 음모에는 나라의 통치자를 비롯한 반대파들을 암살하는 계획도 포함되어 있었다.
 
반 종교개혁과 관련해서, 프란시스 사비에르(Francis Xavier, 1506-1552)를 비롯한 기타 로마 카톨릭 선교사들의 열렬하고 희생적인 정신을 살펴봐야 할 것이다. 예수회의 회원이며 로욜라의 친구인 사비에르는 고아(Goa), 말라카(Malacca), 몰루카(Molucca), 동인도제도(East India islands) 및 일본 등지에서 10년 동안 활동하면서 70만명에 가까운 개종자에게 세례를 주었다고 주장했다. 그들의 사역은 다소 피상적이라는 측면도 있고 예수회는 이교의 관습과 행위를 지나치게 많이 따른다는 비난을 후에 로마 카톨릭의 다른 교단들로부터 받기도 했다. 이로 인하여 예수회의 선교는 붕괴되고 말았다.
 
나중에는 예수회의 음모와 계략이 너무 빤하게 드러나게 되어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비롯하여 아메리카, 프랑스, 나폴리 그리고 파르마 등지의 거의 모든 카톨릭 국가에서 그들은 추방되거나 탄압을 받았다. 마침내 1773년 교황 클레멘트 14세는 예수회를 폐지시켜 버렸다. 그는 선임 교황들이 이들에ㅣ게 당한 고통에 대해 언급하였으며 그들에 대한 "불평과 원망" 그들의 활동에 수반된 "위험스런 결과, 반역 및 추문"에 대하여 주의를 환기시켰으며 스페인, 프랑스, 포르투갈 및 시실리의 믿음 있는 왕들이 "신성한 모교회의 품에서 그리스도가 빼앗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이 교단을 부득불 추방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이유를 말했다. 40년 동안 예수회는 명맥을 유지해 오다가 1814년 교황 피우스 7세(Pius Ⅶ)RK "절대 오류가 없는 그의 선임자의 선언을 무효화시키고" 예수회를 그전 지위로 회복시켰다.
<간추린 교회사 -증보판- >(생명의 말씀사) - A.M.렌위크 A.M.하만 공저 오창윤 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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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회 - 죤 도넬리(John P. Donnelly)
"나는 내가 할 뜻이 있다면 어디에서든지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다." - 이그나티우스 로욜라
예수회는 이그나티우스 로욜라에 의해서 창설되었다. 1540년에 그들은 교황의 승인을 받았다. 그들은 자선(즉 구걸 생활)에만 의지하는 카톨릭 사제단이었다.
1535년 파리에서 로욜라와 6명의 뛰어난 제자들은 청빈과 순결의 서원을 하고 팔레스타인에 선교사로 가기로 약속하였다. 베니스와 터키 사이의 전쟁이 그들의 길을 막았을 때 그들은 북이탈리아의 도시들에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신입 회원을 모집하였고 교황 바울 3세로부터 지도지침과 승인을 얻고자 노력했다. 로욜라는 예수회의 지도자로 임명되었다. 로욜라는 그의 여생을 바쳐서 로마에서 예수회 회칙(Constitutions)을 집필하였고 급속히 퍼져 나가는 이 단체를 지도하였다.
예수회는 몇 가지 독특한 면을 지니고 있었다. 이 단체는 고도로 중앙집권적이었다. 일생 동안 일하기 위해 선출된 장상(general-예수회의 최고 지도자 - 역자 주)이 그 모든 지도자들을 임명하였다. 예수회의 회칙은 특별한 종교적 복장, 신체적 참회 행위나 금식 그리고 성무일과의 찬양 등을 부과하지 않았다. 그러나 로욜라는 신입 회원을 신중하게 선발해서 강도 있는 훈련을 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후에 15년간의 교육과 훈련은 아주 정상적인 것이 되었다. 그는 또한 복종과 교황직과의 밀접한 연결을 강조하였다. 무엇보다도 예수회는 명상과 로욜라의 영적 훈련에 기초한 내적인 생활을 계발해야만 했다. 기도를 통해서 그들은 다른 사람들을 향해 효과적인 사도로 형성되어야만 했다.
로욜라는 양적인 성장보다 질(質)을 원했으나 예수회는 급속히 성장하였다. 1556년경까지 1천 개 이상의 예수회가 생겨났다. 주로 스페인과 포르투갈 그리고 이탈리아에 있었으나 프랑스와 독일과 저지대 지방과 인도와 브라질 그리고 아프리카에도 예수회가 생겨났다. 1626년까지 15,544개의 예수회가 있었고 그 후 130년 동안 예수회는 천천히 그러나 지속적으로 성장하였다. 예수회는 지구의 거의 모든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1773년 프랑스와 스페인의 부르봉(Bourbon) 왕조 군주들은 교황에게 예수회를 억누르도록 강요했다. 소수의 예수회가 프러시아와 러시아에서 살아 남았다. 1814년 교황은 전세계에 걸쳐서 예수회를 회복시켰다. 1964년 예수회는 36,038개소의 회원을 가지는 절정에 이르렀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의 불안정 속에서 1975년에 회원은 28,856개소로 줄어들었다.
교육은 급속히 예수회의 가장 중요한 강조점이 되었다. 예수회 창설 10년 내에 12개의 대학을 가지게 되었다. 1626년에는 4백 개의 대학, 1749년까지는 신학교까지 포함하여 약 8백개의 대학을 가지고 있었다. 이 학교들은 모든 계층의 사람들에게 개방되어 있었고 일반적으로 수업료를 받지 않았다. 17세기와 18세기초에 유럽 카톨릭의 교육을 받은 사람의 높은 비율은 예수회 학교들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예수회의 교육은 1599년의 연구 계획(Plan of Studies)에 근거하였다. 그것은 르네상스 인문주의를 정화하고 단순화하였다. 예수회는 생도가 학급에 출석할 것을 주장했다. 신중하게 계획된 커리큘럼은 학생들을 단계적으로 나아가게 했다. 예수회는 학생을 격려하기 위해 매를 사용하는 대신 우정 있는 경쟁자를 사용했다. 그들의 학교에서 철학은 일반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를 따랐다. 신학은 프란시스코 수아레즈(Francisco Suarez, 1548-1617)의 체계 안에 있는대로, 토마스 아퀴나스로부터 자유롭게 채택되었다. 예수회 학교들은 연극으로 유명하였다. 도덕적이며 종교적인 가치관은 초기의 오페라와 비슷한 회전 무대 종교극을 통하여 가르쳐졌다. 오늘날 예수회의 학교는 약 4천 개에 달한다(미국에 18개의 종합대학교가 있음).
예수회는 해외 선교활동을 언제나 가장 고귀한 사업으로 생각했다. 인도에서 활동한 프란시스 사비에르(Francis Xavier, 1506-52)(주 - 예수회의 창설회원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1542년 복음을 전하기 위해 고아(Goa)로 갔다. 진주조개를 캐는 많은 고아인들이 세례를 받았다. 사비에르는 후에 일본과 중국에 갔다.)는 최초의 가장 위대한 예수회 선교사였다.(그는 인도네시아와 일본에서도 일했다). 마테오 릿치(Matteo Ricci, 1552-1610)는 중국에서 근대적 선교사업을 시작하였고 복음을 중국의 전통과 사고방식에 적응시켰다(참고 - 1582년 중국에 도착한 맛테오 릿치는 서 광계에게 서양 과학을 가르치고 카톨릭교에 귀의시켰다.). 예수회는 북경에서 왕실의 고위층과 접촉하기 위해 서양의 과학적 지식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중국의 통치자를 개종시키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로베르 드 노빌리(Robert De Nobili, 1577-1656)는 마테오 릿치의 선교방법론을 인도의 지방문화에 적용하였다. 아이작 조크(Isaac Joques), 쟈크 마르케트(Jacques Marquette) 그리고 그 밖의 많은 프랑스 예수회원들은 캐나다의 인디언들 사이에서 성공적으로 활동했다. 유세비오 키노(Eusebio Kino, 1644-1711)는 북부 멕시코의 인디언들과 미국 남서부 지역에서 선교 거점을 건설하였고 진보된 농업을 소개하였다. 다른 예수회원들은 파라과이와 브라질의 인디언을 개종시키고 개화시키기 위해서 읍(축소된 거주 지역)들을 세웠다.
로욜라는 신교와 싸우기 위해 예수회를 세운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것은 16세기 중에 점차적으로 예수회의 목표가 되었다. 몇몇 예수회원들은 많은 나라들을 보다더 견고하게 로마에 연결시키려는 복잡한 중재 활동 가운데 교황 파견 사절로서 일했다(그 나라들 중에는 아일랜드, 스웨덴, 러시아가 있었다). 다른 회원들은 황제와 프랑스와 폴란드의 왕들 그리고 바바리아 공작의 궁정 설교자나 고해신부로 일했다. 피터 카니시우스(Peter Canisius)와 로베르 벨라민(Robert Bellarmine)은 교리문답서와 반(反)신교적인 신학 작품을 썼으며 이 저작들은 여러 세기동안 영향을 끼쳤다. 많은 예수회원들이 그들의 대의 명분을 위해 생명을 잃었다. 약 1천 명 이상의 순교자 가운데 대부분이 피선교지에서 순교하였다.
이그나티우스 로욜라 - 패커(J. I. Packer)
"좋으신 주님, 우리를 가르치셔서 주를 합당하게 섬기고, 드리되 비용을 계산하지 않으며, 싸우되 상처를 개의치 않으며, 주의 뜻 행하기를 아는 것 외에는 부지런히 일하되 휴식을 요구하지 않으며 애써 일하되 삯을 구하지 않게 하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이그나티우스 로욜라
이그나티우스 로욜라(Ignatius of Loyola)는 헌신적이고 능력 있는 예수회의 창설자이다. 스페인 귀족인 이그나티우스는 피레네 근처 로욜라 성에서 1491년 혹은 1495년에 태어났다. 직업 군인으로서의 그의 경력은 1521년의 다리 부상으로 끝이 났다. 휴양 중 그리스도와 성인들의 생애에 대한 독서를 통하여 로욜라는 그리스도의 군병이 되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그의 칼을 몽세라(Montserrat)에 있는 마리아의 제단에 매달았다. 이그나티우스는 만레사(Manresa) 수도원에서 기도와 명상 가운데 1년을 보내면서(1522-23), 그리스도께 대한 전적인 헌신을 추구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은총을 크게 입었다. 여기서 그는 그의 저서 영적 훈련(Spiritual Exercises)의 초고를 마련했다.
1524년부터 1534년까지 로욜라는 그의 사역을 준비하기 위해 바르셀로나(Barcelona), 알카라, 살라망카(Salamanca) 그리고 파리에서 공부했다. 그는 여섯 명의 친구와 함께 다음과 같은 것들을 맹세하였다. 청빈과 독신생활의 실천, 예루살렘 성지순례(실현되지 못했음), 남은 생애를 사도적 노동에 바친다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하여 예수회가 시작되었다. 예수회의 회원은 총사령관격인 교황에게 그리고 수도회의 원장에게 전적인 순종을 맹세하였다. 훌륭한 조직가인 이그나티우스는 1556년에 죽을 때까지 원장직을 맡았다.
모든 로마 카톨릭의 성직 후보자는 지금도 이그나티우스의 영적 훈련을 최소한 한 번 통과한다. 이 훈련은 경건의 묵상과 가르침을 위해 4주간을 바친다. 첫째 주는 죄에 대하여, 둘째 주는 그리스도의 왕권에 대하여, 세째 주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하여, 네째 주는 그의 부활 생명에 대해 묵상한다. 그 목적은 완전하고 실제적인 헌신(성별)을 이루려는 데 있다. 영적 훈련은 이해력과 상상력 그리고 양심을 통하여 의지에 호소한단. 이 훈련은 자기 자신을 아는 일과 주 예수께 헌신하는 일에 힘있는 도움이 되고 있는데, 카톨릭주의 밖에 있는 자들(사실 그들도 카톨릭주의에 강하게 뿌리내리고 있다)을 위해서도 도움이 되고 있다.
예수회을 창설한 로욜라
트렌트 공의회에 온화하고 지적이며 상당히 영향력이 있는 두 명의 예수회 회원이 참석했다(예수회는 교황 바울 3세가 1540년에 승인한 새로운 수도 단체였다). 초창기의 예수회의 두 참석자는 디에고 레이네즈(Diego Laynez)와 알퐁소 살메론(Alfonso Salmeron)이었다. 예수회의 창설자 겸 지도자는 기독교 역사상 가장 극적이고 능력 있는 삶을 산 이그나티우스 로욜라(Ignatius of Loyola)였다. 로욜라는 카톨릭의 개혁을 구체화한 인물이었다.
그는 직업 군인이었으나 부상을 당해 제대하였다. 회복기 동안 그는 자신의 거칠었던 과거와 미래에 대해 생각할 시간을 가졌다. 이 진지한 반성의 시기 동안 그는 성인들에 관한 많은 책을 읽었다. 그는 그들의 경건성과 "그리스도의 군병"으로서의 그들의 업적에 의해 도전을 받았다. 마침내 그는 옛 기사들처럼 그의 무기와 갑옷을 하나님께 바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받들기로 결심했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할 것인가를 알고자 하여 하나님의 뜻을 기다렸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다린 기간은 대단히 중요했다. 그것은 루터의 수도원에서의 경험과 비교되는 것이다. 그러나 루터는 초기 기독교의 성경적 기초에 힘입어 중세 교회의 전통을 부정함으로써 마침내 평화를 얻었으나 로욜라는 그 자신이 중세 교회의 전통에 재헌신함으로써 평화를 발견했다. 로욜라는 부상당한 몸을 회복하는 가운데 군인과 신비와 그리고 수사의 묘한 혼합을 성취시켰다. 그는 그의 영적인 순례 과정을 썼으며 그것을 영적 훈련이라는 제목으로 발간하였다. 상상력에 강하게 호소하며 그리스도와 로마 교회에 대한 절대적 순종을 강조하고 있는 이 책은 로욜라가 창설한 새로운 금욕주의적 단체에 주춧돌을 제공하였다.
초창기에는 여러 가지 좌절과 낙담을 경험했으나 마침내 로욜라는 로마 교회를 통해 그리스도께 온전히 헌신한 젊은이들의 소수 집단을 결성하였다. 예수회가 형성되었을 때 그것은 창설자의 지울 수 없는 특징을 그대로 지녔다. 예수회는 새로운 영적 엘리트 집단이 되었다. 절대적이고 주저하지 않는 군대식 복종이 예수회의 보증 표시가 되었다. 유명한 예수회의 금언은 예수회의 모든 구성원이 "마치 죽은 자처럼" 확고하게 교황과 그 교단의 우두머리에게 순종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바울 3세는 약간 주저한 후 1540년에 예수회를 승인하였다. 예수회는 회칙을 통해 청빈, 순결, 순종 외에도 제4의 서원을 강조했는데 그것은 교황에게 절대적으로 순종하겠다는 특별한 맹세였다. 예수회의 목적은 모든 수단을 통해서 믿음을 전하는 것이었다. 그 접근 방법은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한다"였다. 예수회의 신입 회원들은 로욜라의 영성을 반영해야만 했기 때문에 군대식의 조직과 복종을 강조하였다. 또한 그들은 억셀 정도로 건강해야 했고 외모는 멋지고 지적이며 말은 고상하게 해야 했다. 성품이 나쁜 자나 비정통신안의 기미가 조금이라도 보이는 자는 가입이 허락되지 않았다.
예수회는 놀랄 만큼 급속도로 성장하였다. 1556년 로욜라가 죽었을 때 가까운 유럽의 모든 지역뿐만 아니라 일본, 브라질, 이디오피아, 중앙 아프리카의 해안지역까지도 예수회원이 있었다. 많은 회원들이 교회에서 고위직을 갖게 되었다. 예수회원 두 사람은 폴란드와 아일랜드에서 교황 파견 사절로 일했다. 수명의 회원들은 유럽의 가장 크고 유명한 대학교에서 교수로 일했다. 로욜라를 따르던 6명의 창설 회원들이 늘어나 1556년에는 천 오백 명 이상이 되었다.
예수회는 세 가지 사업에 중점을 두었다. 즉 교육과 선교에 대한 저항 활동과 새 지역으로의 선교 확장이었다.
예수회는 높은 수준의 교육을 시켰고 이러한 교육을 통해서 로마 교회를 지지하는 의견을 만드는 회원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카톨릭교도들을 훈련시키는 데 있어서 그 질을 향상시켰다. 예수회의 학교는 곧 수준과 학문성이 높은 학교로 유명해졌다. 이런 수단에 의해서 많은 엘리트들이 로마 카톨릭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예수회는 어린이들에게도 특별한 관심을 부여했다. 오래 전에 예수회는 다음과 같은 귀에 익은 표어를 가지고 있었다. "7세 때까지 어린이를 우리가 교육시키도록 맡겨라. 그러며 그 아이는 평생 동안 카톨릭교도로 살아갈 것이다."
16세기 후반과 17세기에 걸쳐서 예수회가 두번째로 열중했던 일은 개혁 운동이었다. 프랑스, 오늘날의 벨기에 지역, 남부 독일, 그리고 동유럽의 모든 지역에서 예수회는 개신교에 대한 반대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들은 가능한 수단은 거의 다 동원해서 많은 지역에 로마 교회를 전파하였다. 그들은 "두렵고도 만만찮은 반동 종교개혁 운동의 돌격대"라는 평판을 얻었다. 그들의 맹공격은 영국에서만 실패하였다.
예수회의 세번째 역점 사역은 새 지역으로의 복음전파였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새 식민지와 새 부를 찾아 일곱 바다로 나가게 될 때 예수회 사제들이 점차 더 많이 그 배에 승선했다. 예수회 선교사들은 개종자를 찾아 아메리카와 아프리카 그리고 아시아까지 갔다. 그들은 유럽 상인들과 군인들의 탐욕스런 제국주의에 균형을 유지시켜 주었다. 그들은 또한 그들이 방문한 새 지역의 역사와 지리에 대한 학문적인 기록을 남겨 놓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철저한 카톨릭 개종자들을 얻었고 그들와 똑같은 경건하고 강인한 카톨릭교도들을 만들어 냈다.
예수회는 브라질과 파라과이 선교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들은 원주민들이 그들의 노력에 저항했던 아프리카에서는 성공하지 못했다. 예수회의 영웅적인 이야기는 아시아에서 발생하였다. 그곳에서는 프란시스 사비에르(1506-52)가 "인도와 일본의 사도"로서 업적을 남겼다.
사비에르는 스페인 귀족으로 예수회의 최초의 회원이었다. 로욜라는 일찌기 이 미남이고 총명하고 명랑한 젊은이가 하나님의 능력 있는 종이 되리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모든 시대를 통해 가장 많은 갈채를 받은 예수회 선교사가 되었다. 그는 교회의 사절로 임명받았고 1542년 선교사의 사명을 띠고 동인도 지역으로 파견되었다. 그는 그곳에서 3년을 보낸 후 현재의 말레이지아와 베트남 그리고 일본에서 말씀을 전파하고 세례를 베풀었다. 그가 가장 두드러진 선교활동을 한 곳은 일본이었는데 거기서 그는 여러 차례의 심한 핍박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기독교 공동체를 설립하였다. 사비에르는 46세의 나이로 - 중국에서 말씀을 전하려고 시도하다가 - 열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도미닉, 프란시스, 어거스틴과 수도원과 함께 예수회는 1550년과 1650년 사이에 급속도로 진전된 해외 확장 시기 동안 로마 교회를 주도해 나갔다. 이를 통해 멕시코와 중앙아메리카, 남아메리카의 거의 모든 지역, 필리핀 민족의 대다수, 아프리카, 인도, 동인도, 극동의 소수가 로마 교회의 신도들이 되었다.
종교 재판의 부활
예수회는 유럽의 더 확장된 지역과 해외의 새 지역내에서 대단히 활동적으로 일했다. 이탈리아, 스페인, 프랑스와 같은 전통적인 카톨릭 국가에서는 종교 재판이 로마 카톨릭의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 종교 재판소는 16세기에 새로 생겨난 것이 아니었다. 1542년에 시작된 소위 로마 종교 재판소라고 불리는 것은 13세기와 15세기에 있었던 중세의 재판소와 스페인 재판소의 산물이었다.
카톨릭 개혁과 신교에 대한 반동개혁운동의 수단으로서 종교 재판소가 다시 그 구실을 되찾은 것은 주로 추기경 카라파(Caraffa)에 의해서였다. 본래 신학적으로 온건주의에 속했던 카라파는 신교 종교개혁이 계속되는 동안 점차 보수적이 되었다. 1542년에 그는 신교와 화해를 추진했던 사람에 대하여 솔직한 비평을 하였고 화해 대신 강제적인 대항책과 검열 그리고 선전을 통해 그들과 싸우자고 주장했다. 새로운 로마 종교 재판소가 설치된 것도 바로 그의 주장에 의해서였다. 그 재판소가 로마 교황에 의해 통제를 받았기 때문에 "로마"(Roman) 재판소라고 칭하였다.
카라파는 종교 재판소 판사로 임명된 여섯 추기경들 중 한 사람이었다. 여기서 그리고 후에 교황이 된 후에도 그는 종교 재판소를 이단을 다루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으로 지지하였다. 카라파와 그의 동료 재판관들은 이단자를 하나님에 대한 반란자로 보았으며 범법자로 간주했다.그들이 종교재판을 하는 것은 그들 자신의 유익과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였다. 만약 종교 재판소가 이런 어리석은 자들을 교회로 되돌려 보내지 못한다면 그들의 영적 질병이 영생을 얻을 다른 영혼들을 더럽히기 전에 근절시켜야만 한다. 그래서 그들은 의사가 인간의 생명을 구하기 위하여 육체로부터 암조직을 제거하는 것처럼 기독교 공동체로부터 제거되는 것이다.
종교 재판소는 고백을 받아 내기 위해 일반적으로 공포스러운 방법과 고문을 사용하였다. 만약 사형을 집행해야 할 경우는 유죄를 선고받은 이단자를 처형하기 위해 정부 당국에 그를 넘겨 주었다. 왜냐하면 교회법에 의하면 교인의 피를 흘리게 하는 일은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탈리아에서는 베니스를 제외하곤 종교 재판이 널리 그리고 효과적으로 시행되었다. 스페인에서는 이전의 스페인 종교 재판과 융합되어서 실제적인 결과를 보여 주었다. 프랑스에서는 그 제도가 수정되어 프랑스 군주들에 의해 엄격한 통제를 받았다. 독일에서는 이 제도가 널리 시행되지 않았는데 거기에는 심문하는 풍습이 없었다. 영국에서는 일반법으로 종교 재판을 금하였다. 전국민이 여전히 주로 로마 카톨릭적인 곳에서는 이 제도가 아주 효과적으로 시행되었다. 이 제도는 일반적인 지지를 받아 신교 신앙이 더 이상 번져 나가는 것을 방해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교회사 핸드북>(생명의 말씀사) - 라이온社 編 송광택 譯 -
(추후에 자료들을 계속 업데이트 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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