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그나티우스 로욜라(Ignatius Loyola)와 예수회(Jesuits)1
이그나티우스 로욜라(Ignatius Loyola)와 예수회(Jesuits)
자료출처http://separati.cafe24.com/sb2heresy29.html
제슈잇 수도회(The Society of Jesus)
카톨릭에서는 개신교의 종교개혁으로 전유럽에 퍼져 나가는 개혁의 불길을 막으려는 여러 운동들이 있었다. 그 중에서 가장 큰 돌격대로 제일 앞장 선 것은 제슈잇 수도회라 할 수 있다.
(1) 창설기
창설자 이그나티우스 로욜라(Ignatius Loyola : 1491-1556).
이 사람은 그의 부친이 바스크(Basque)의 귀족이었다. 그가 태어난 바스크 지방은 요즘 프랑스와 스페인의 국경 사이에 위치한 비스케 만(the Bay of Biscay)에서 약간 남쪽에 위치해 있다.
그의 부친은 페르디난드 왕의 궁정에서 시종(Page)노릇을 한 적이 있다. 로욜라 가문은 전통적으로 충실한 카톨릭교도였다. 로욜라는 어렸을 때 궁전 예절을 익히고 전략을 공부한 후에 다른 두 형제와 함께 자기들 상전이라 할 수 있는 나제라 공작(duke of Najera)의 군대에 소속되어 전투에 참여한다.
1521년 5월 21일 프랑스 왕 프란시스 1세가 팜플로나(Pamplona)에 진격해 왔다. 저들 프랑스 군대는 팜플로나 성벽을 향해 대포를 쏘아댔다. 로욜라는 이들을 막고자 분전하던 중 때마침 날아온 대포 알에 오른쪽 다리는 으스러지고 왼쪽 다리는 부상을 당하는 비운을 겪게 된다.
프랑스 의사는 이 젊은이를 치료하고자 하였으나 미숙한 솜씨로 두번씩이나 부러지고 이어지는 우여곡절 끝에 평생 절름발이가 되었다. 고향으로 돌아와 휴양하던 중 여러 성자들의 전기를 탐독하게 된다. 특히 루돌프(Ludolph the Carthusian)가 쓴 「그리스도의 생애」에서 많은 감동을 받는다. 이때에 로욜라는 자기가 꿈꾸던 기사도적 이상을 종교의 영역으로 전환하고자 결단한다.
즉 그리스도인이란 빛나는 영적 갑옷을 입은 군대로서 의로우신 왕 그리스도를 위해서 그의 지휘하에 사생 결단의 전쟁을 벌이는 군사라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일과 그의 명상들은 그로 하여금 자기 자신을 완전하게 성자의 길로 헌신하도록 결단하게 했다. 로욜라는 바르셀로나(Barcelona) 근처 만레사(Manresa)에 은거하여 1년간 지내며 그의 과거 생활에 관한 철저한 정리를 한다.
그리고 인간들이 자신들의 자유의지를 제어함으로써 구원을 가능하게 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로 씨름을 한다. 그는 이때 「영적 훈련」(Spiritual Exercise)이라는 대표적 저서의 뼈대를 만든다. 이 저서는 후에 1541년에 완성 출판된다. 만레사에서 약 1년간을 지낸 후 예루살렘을 순례한다. 그는 그때 모슬렘교도들을 개종시켜야 되겠다는 계획을 세운다.
다시 스페인으로 돌아온 로욜라는 키메네츠 추기경이 설립한 알칼라대학에서 공부를 시작한다. 그때 그의 나이가 약 30가량 이었다. 여기서 어린 소년들과 함께 라틴어를 배웠다. 로욜라는 가정과 병원에서 비공식적으로 설교를 했다. 그리고 그가 집필하고 있던 「영적 훈련」을 소개했다. 그러나 그는 종교재판소에 의심을 받고 얼마간 투옥됐다. 그러나 앞으로 3년 동안 가르치거나 모임을 주재할 수 없다는 명령을 받고 풀려 나온다.
출옥 후 그와 그의 동료들은 살라만카(Slalamanca) 대학교로 갔으나 거기서 2개월도 못되어 다시 투옥되었다. 로욜라의 열정이 이단의 혐의를 받게 되었던 것이다. 로욜라는 1528년부터 1535년까지 7년 동안 파리에 있으면서 공부를 하였다. 그는 몽테뉴 대학(College de Montaigu)과 생트 바르브 대학(College de Sainte Barbe)에서 수학하였다. 1534년에 신학사 학위를 취득하고 1535년에 문학석사(M.A)를 받았다.
로욜라가 파리에서 공부하는 동안은 칼빈이 공부를 하고 떠나온 때였다. 이렇게 두 사람이 같은 학교에서 공부를 하였으나 한 사람은 개혁자의 길을 걸어갔고 다른 한 사람은 카톨릭을 위해 헌신하는 길을 걸어갔다.
그리고 로욜라가 파리에서 공부하는 기간에 자기 동지들을 규합하는 큰 일을 하였다. 로욜라는 최초의 6명에게 「영적 훈련」을 소개하며 동지로 규합하는 데 성공한다. 이때의 6명은 곧 로욜라의 후계자로 계승한 차기 사령관이 된 디에고 라이네즈(Diego Lainej), 알폰소 살메론(Alfonso Salmeron)과 후에 극동 지역 선교사로 큰 업적을 남긴 프란시스 사비에르(Francis Xavier)등이다.
이렇게 해서 1534년 8월 15일에 여섯 동지들은 수도원의 세 가지 맹세를 한다. 즉, 가난, 그리고 정절, 복종의 맹세(The customary three fold monastic vows of poverty, chastity, and obedience)를 하였다. 이것이 '제쥬회'(The Society of Jesus)의 시작이다. 원래는 The Company of Jesus라고 했었다.
(2) 발전기
제쥬회는 교황의 사절에게 자기들의 교리적 정통성을 납득시키고 이 모임이 교황의 권위 수호와 신앙을 전파하는 데 막대한 공헌을 할 수 있다는 납득을 시킨다.
드디어 1540년 9월 27일 교화으이 공식 허가를 받아낸다. 제쥬회는 하나님의 군사(Soldiers of God)인 군대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그들은 교황의 지시하에 전투하며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개인의 의사를 철저히 부정하였다.
그들의 「영적 훈련」이라는 책에는 너무나 과장이라고 생각되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모든 사건 모든 사물에 관하여 안전하게 생각하고 이해하고 싶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원칙들을 고수해야 한다. 나에게는 아무리 흰색으로 보이는 것이라 하더라도 만약 교회의 계급 체제가 이를 검은 색이라고 정의한다면 나는 이를 검은색으로 믿을 것이다'(규칙 제 13조).
그리고 제 1법칙에는 "인간은 우리 주 하나님을 찬양, 경외하고 섬기기 위하여 창조되었으니 이러한 방법들을 통해 자기들의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이 사물들이 자기의 진정한 존재 목적을 성취하도록 돕는 한에서만 이들을 이용해야 할 것이며 만약 이들이 자기의 궁극적 존재 목적을 이루는 데 방해가 된다면 이들을 제거해 버려야만 할 것이다. 우리들의 유일한 욕망과 선택은 왜 우리가 창조되었는가 하는 그 목적을 이루는 데 이바지할 수 있는가 하는 기준 속에서만 행해져야 할 것이다'라고 그들의 목적을 설명하고 있다.
이들의 조직은 우두머리로 총장(General)을 둔다. 그리고 모든 회원은 그리스도께 하듯 총장을 대우하며 존경할 것을 맹세한다. 회원 자격은 최고의 엘리트들을 대상으로 한다. 이들은 좋은 성품을 소유한 인물들 가운데서 지적으로 뛰어나고 육체적으로 강건하고 매력적이며 헌신적인 인물들만으로 회원을 가입시켰다.
회원이 되는 과정은 매우 복잡하고 철저했다. 처음 2년간은 견습기간이었다. 그후 신입회원이 돼서는 가난, 정절, 복종이라는 일반 수도회의 서원을 하게 된다.
그후 1년간은 교양 학문을 공부하고 3년간은 철학을 공부한다. 이 공부를 마치면 어린 회원들에게 철학, 문법을 가르친다. 그후 다시 4년간 신학 공부를 하고서야 정식으로 사제가 된다. 사제가 된 후에도 다시 1년간은 실천 신학으로 설교학, 영적 훈련을 한다. 그 후 다시 2년간의 실제 시험 기간을 거쳐 자격이 인정되면 교황에게 절대 순종한다는 특별 서원으로 비로소 제쥬회 정식회원이 된다.
로욜라 자신은 5 피이트 2인치도 안되는 왜소한 체구였다. 게다가 오래동안 소화불량 증세 때문에 고생하였다. 그리고 다리 수술을 할 때 남자의 자존심으로 남아 있는 돌기(突起)를 없애는 수술을 하였다. 그는 평생을 절면서 살았다.
그런데도 그는 모든 면에서 지도자의 역할을 했다. 항상 원기가 넘쳤고 평온했으며 자신감이 넘쳤다. 모든 회원들에게 어떤 불순종도 허용하지 않았다. 로욜라는 살아 생전에 교황의 교서를 받은 지 16년 만에 예수회 회원은 1,000명의 회원을 확보했다. 그리고 그의 생전에 100개에 달하는 대학과 신학원을 설립하였다.
(3) 수확기
제쥬잇 수도회는 로마 카톨릭이 만든 수도원 운동 중에서 최후로 화려하게 꽃을 피운 것이라 할 수 있다. 제쥬잇 수도회는 왜 그토록 뛰어난 효과를 달성할 수 있었는가?
그 첫째 요인으로는 탁월한 조직력을 들 수 있다. 제쥬잇은 가장 하층 계급으로부터 사령관에 이르기까지 순식간에 소통되는 연락망을 갖고 있었다. 이 탁월한 조직력은 뛰어난 의사 소통을 가능하게 하였다.
다음으로 엄격한 징계조치를 통해 영적 생명력을 계속 강건하게 유지하고자 하였다.
제쥬잇은 성찬식을 자주 거행하였고 개인적 고해 성사를 강조하고 영적으로 회원들의 문제를 항상 상담함으로 회원들의 양심 상태를 늘 점검해 주었다.
그리고 한 가지 큰 요인은 올바른 종교적 지식의 함양을 위해 보다 고상한 차원의 고등 교육을 실시하였다.
이렇게 해서 제쥬잇 수도회를 통해 많은 결실을 얻게 된다. 그 중에서 가장 큰 결실은 교육과 선교 부분이다. 로욜라가 죽은 지 1세기 반이 채 지나기 전에 예수회는 700개의 학교를 설립하였다. 오늘날 그 학교들의 숫자는 수천에 이르고 있다. 저들은 개신교 국가들에 들어가 도서관, 수도회, 자선기관, 병원, 학교 등 어디든지 침투하였다.
제쥬잇 수도회의 놀랄 만한 성과는 역시 선교이다. 제쥬잇회는 프란시스 수도회 종단 후예들과 경합하여 많은 선교사를 배출하였다. 이들 제쥬잇 종단이 유럽 쪽에서는 개신교로 넘어간 지역들을 다시금 로마 카톨릭의 울타리 안으로 끌어 들였다. 이런 지역은 보헤미아, 모라비아 그리고 폴란드 등이 있다. 헝가리 역시도 개신교 국가가 될 수 있도록 다 기울어진 것을 다시금 카톨릭 강국으로 되돌려 놓았다.
남미에 있어서도 그 공헌이 대단하다. 멕시코, 페루를 카톨릭 국가로 만드는 데는 프란시스칸, 도미니칸, 어거스티니안들이 가장 활동적이었다. 그렇지만 브라질과 파라과이에서는 제쥬잇들이 가장 큰 공헌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아세아에서의 선교활동은 어려운 점이 많았다. 남미의 인디언들은 집단적으로 개종이 가능했다. 그렇지만 아시아에서는 오랜 역사 속에서 함께 자라온 고대 문화와 기존 고등 종교들 때문에 개종이 힘들었다.
이 중에서 가장 유명한 제쥬잇 선교사는 프란시스 사비에르이다. 그는 로욜라와 같은 지방 사람이었다. 그가 18살 때 파리의 생트 바르브 대학에 철학을 공부하러 갔다가 로욜라를 만나게 되었다. 사비에르는 폴투칼 왕이 동인도 제도에 보낼 선교사 요청에 의해 남부 인디아에 가서 3년 동안 폴투칼 식민지들을 대상으로 해안 지방에서 선교활동을 한다.
그후 동인도 여러 제도(말락카, 말라야, 몰로카이)에서 선교를 2년반동안 한다. 그리고 1549년부터 1551년까지 일본 선교를 한다. 이때 가고시마, 야마구찌 등 각지에서 선교 활동으로 열매를 맺는다. 이무렵 전도를 받은 풍신수길(豊臣秀吉)이 임진왜란 때 한국을 쳐들어 오면서 종군 사제를 데리고 들어온다.
그는 46세 때 중국 선교를 계획하던 중 열병에 걸려 사망하였다. 카톨릭에서는 사비에르를 성자로 추대했다. 사비에르 유지를 받들어 중국 선교사로 제쥬잇 선교사 마태오 리치(Matthew Rici : 1551-1610)가 활약한다.
마태오는 중국의 상층부터 전도하여 차츰 하류 계급으로 내려가는 선교방법을 썼다. 그는 천문학과 수학에 깊은 조예가 있어서 페이킹에서 환영을 받으며 선교했다. 이 마태오 신부는 현지의 풍습과 전통에 너무 타협을 많이 한다는 다른 종단 선교사들의 비난을 받기도 했다.
이렇게 유럽, 아메리카, 아프리카, 아시아 등 세계 어느 곳이든 제쥬잇 선교사들의 영향은 확대되었다. 이것이 다른 종단들의 시기가 돼서 약 한 세대 가량은 교황으로부터 탄압을 받게 된다.
그러나 이들 제쥬잇 선교단은 그 어느 종단과 비교할 수 없으리만큼 세계적으로 활동하였다. 이들 제쥬잇 교단이야말로 교황청의 손에 들려진 강력한 검과 같았다. 군대 조직과 같은 이들은 각종 도전과 기회를 날카롭게 포착하였다. 그래서 개신교에 대해서 유감없이 대항하였다. 그리고 유럽에서 잃어버린 개신교도들보다 훨씬 많고 방대한 남미의 여러 나라들을 카톨릭화 하는데 성공하였다.
카톨릭이 이렇게 왕성한 선교를 하고 있을 때 개신교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저들은 예정론 신학을 가지고 서로 정죄하고 시비하면서 탁상공론만 펼치고 있었다. 잘못된 신학은 그 시대의 교회들을 퇴보시키고 잠재워 준다는 교훈을 역사는 증명해 주고 있다.
이 시대의 신학은 교회를 살리고 사회를 윤택하게 하고 국가와 전세계 앞에 이바지 할 수 있는 신학을 갖고 있는가? 우리는 엄숙한 현실 앞에 자기 모습에 대한 냉철한 발견이 있어야 할 것이다.
<(신약교회사관에 의한) 새교회사Ⅱ>(규장) - 정수영 목사 지음 -
--------------------------------------------------------------------------------
종교개혁(A.D. 1500 - 1550)
루터는 오랫동안 아무도 건드리지 못한 가톨릭의 특권과 권한의 남용에 도전하였고 이로써 종교개혁의 길을 트게 되었다. 그는 수많은 죄인들에게 그리스도를 소개하였다. 그렇지만 그가 말씀의 정도(正道)에 철두철미한 것은 아니었다. 어떤 점들은 개혁되기도 하였으나 아직도 과거의 가톨릭교회와 유사한 측면도 많이 남아 있었다.
형제단의 교육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계곡 지방에 있던 왈도파와 독일 지방의 여러 형제단 그리고 보헤미아의 연합 형제단은 똑같은 어린이용 교리교재를 사용했다는 사실을 보아,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교리교재는 아주 작은 책으로서 이탈리아어와 프랑스어, 독일어와 보헤미아어로 발간되었는데 현재는 1498년부터 1530년 사이에 인쇄된 여러 종류의 판이 알려져 있다.
또 이들 형제단은 15세기와 16세기 초에 네덜란드와 북서부 독일 지방에 여러 학교를 설립했던 "공동생활 형제단"과도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공동생활 형제단"을 처음으로 조직한 사람은 사람은 네덜란드인 그루트(Gerhard Groote)였는데 그는 뤼스브뢰크(Jan van Rysbroeck)와 함께 형제단을 설립하고 데벤터(Deventer) 지역에 처음으로 학교를 세운 바 있었다. 그루트는 다음과 같은 말로써 자신의 교육방침을 제시하였다. "학습의 근본과 삶의 모범은 우선 그리스도의 복음이어야 한다." 그는 경건한 생활을 결여한 지식은 복을 주기보다는 저주스런 것이 되기 쉽다고 생각하였다.
데벤터에 있는 학교는 헤기우스(Alexander Hegius)라는 유명한 교장아래 이천여명의 학생을 가진 훌륭한 학교로 발전하였다. 나중에 "그리스도를 본받아"를 저술한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a Kempis)와 에라스무스도 이 학교에서 공부한 바 있었다. 교육을 위한 재정은 처음에는 신약성경을 필사(筆寫) 보급함으로써 충당되다가 인쇄술이 보급되고 난 뒤부터는 인쇄를 통하여 조달되었다. 또한 형제단과 '하나님의 친구들'은 소책자를 많이 발간하기도 하였다. 이런 방식으로 성경에 기초를 둔 건전한 교육이 실시될 수 있었다.
1538년에 울름(Ulm)에서 발간된 찬송집을 보면, 형제단의 집회에서는 찬양과 예배를 위한 규범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찬송집의 긴 제목중 마지막 부분에는 "그리스도인 형제단 곧 피카르드파(Picards)가 비기독교요 이단이라고 간주되기까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매일 사용하고 불렀던 노래"라고 씌어져 있다.
루터와 95개조 반박문
루터가 복음을 깨닫고 자기 생각을 발전시켜 나갈 수 있었던 데는 성경의 가르침과 스타우피쯔(Staupitz)의 도움 때문이기도 하였지만, 타울러(Tauler)나 형제단의 저작물로부터 받은 자극도 큰 역할을 하였다. 루터는 당시의 대학교육이 올바르지 못하고 성경에 부합하지도 않는다고 생각하였다. 1517년부터 1520년 사이에 루터는 많은 소책자를 발간하였는데 이것들도 형제단으로부터 받은 바 영향이 적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구원이란 교회의 중재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각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얻어진다고 주장하였다. 루터는 성경의 가르침을 통하여 구원은 우리 자신의 선행으로 획득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가 이런 진리를 열정적이고 능력있게 전하였을 때 이미 이 진리를 알고 있었던 사람들은 소망과 기대를 새롭게 할 수 있었고 지금까지 그것을 알지 못했던 사람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1517년 당시, 교황청에서 발간한 면죄부를 판매하던 테쩰(Tetzel)이라는 수도사는 파렴치하며 익살스런 상술로써 사람들 마음 속에 아주 효과적으로 거짓 가르침을 전해주고 있었다. 루터는 삭소니의 선제후(選帝侯)가 이에 반대하도록 설득하였으나 실패하자, 스타우피쯔의 격려를 받아 비텐베르그 성당에다가 "95개조 반박문"을 게시하였다. 이것은 즉시 전유럽으로 전파되어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소에 자신들이 느끼던 생각, 즉 면죄부에 대한 가르침은 전부 사기이며 복음에 근거하고 있지 않다는 내용에 공감을 느끼게 되었다. 가난한 수도사에 불과했던 루터는 이제 거대한 교황세력과 마주서서 싸우게 되었던 것이다. 뒤이어 그가 쓴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관하여 독일 귀족에게 보내는 서한"(Address to the Nobility of the German Nation on the Liberty of the Christian Man)과 "교회의 바빌론유폐"(Babylonian Captivity of the Church)는 전유럽에 큰 감명을 주었다. 그러자 교황은 그를 파문에 처한다는 교서를 내리게 되었지만, 루터는 이에 굴복하지 않고 그것을 비텐베르그에서 공개리에 불살라 버렸다(1520).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보름스(Worms)에 소환되었을 때에도 아무도 그를 해칠 수 없었다. 그런데 그가 보름스를 떠날 즈음 그의 신변상의 위험을 눈치챈 친구들이 그를 바르트부르그 성으로 몰래 데리고 가서 그가 죽었다는 거짓 소문을 퍼뜨렸다. 거기에서 루터는 신약과 구약을 차례로 독일어로 번역하였다. 그 결과 성경이 많이 읽혀짐으로써 종교적인 문제들이 사람들의 관심을 크게 끌게 되었고 유럽사회의 전체적인 모습이 점차로 변화되었다. 점점 심해지는 교회의 부패와 탐욕을 절망적으로 바라보던 사람들이 이제 사도시대의 초대교회로 돌아갈 때가 왔다는 강렬한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경에 나타난대로 구속자로서, 죄인들의 구세주로서, 그리고 고통당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 이르는 길로서 새롭게 인식되었다.
그러나 루터의 견해와 관심사는 교황측과 아주 판이하게 달랐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양측의 충돌이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루터를 따르고 그의 주장에 동조하는 사람들은 엄청나게 증가되었으나 로마 가톨릭의 낡은 체제는 투쟁없이 순순히 변화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에라스무스처럼 양쪽이 타협하고 평화롭게 문제가 해결되기를 바라던 사람들도 있었으나, 자기들의 지위와 특권이 박탈당한다고 생각하던 수도사들은 격렬하게 루터를 반대하였고 교황청 당국은 새로운 운동을 탄압할 때 으례이 쓰던 방식대로 파문과 처형이라는 무기를 휘두르려고 하였다. 이에 루터는 처음에 가졌던 겸손한 태도를 버리고 교황만큼이나 독단적으로 변모해갔다.
에라스무스의 조언
그런데 정치적인 분쟁 때문에 사태는 더욱 급박해지게 되었다. 농민에 대한 압박으로 1524년에서 그 이듬해까지 독일 농민전쟁이 발생되었던 것이다. 그러자 즉각 교황측은 루터와 그의 추종자들이 농민전쟁에 책임이 있다는 비난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당시에 도처에서 발생된 혼란 때문에 독일사회 전체가 위협을 당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이보다 앞선 1520년에 에라스무스는 다음과 같은 글을 쓴 일이 있다. "나는 루터가 당분간 잠잠히 있기를 바란다. 그가 말하는 바는 옳을지는 모르나 모든 일에는 때와 기한이 있는 것이다."
이어서 1524년에는 삭소니의 조오지 공(Duke George)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루터가 처음 입을 열었을 때 모든 사람들이 찬사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위업도 모든 사람 위에 뛰어났습니다. 지금은 그를 매우 비난하던 사람들도 그때는 그의 편이었습니다. 추기경이나 심지어 수도사들도 그를 격려해 주었습니다. 그는 놀라울 정도의 결과를 얻었습니다. 그는 모든 정직한 사람들이 비난하였던 관행을 공격했고 남을 희생시키는 욕심장이들에 대항하여 싸움을 하였습니다. 사실 그때는 그들의 강압 아래에서 기독교 세계 전체가 신음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루터가 주도한 그러한 운동이 어디까지 갈지 누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루터 자신도 그런 엄청난 결과가 나타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반박문을 게시했을 때 나는 그에게 더이상 급진적인 행동을 하지 말라고 권유했습니다. … 나는 폭동이 일어날까 두려웠습니다. … 나는 그에게 자제하라고 경고했습니다. … 교황은 교서를 반포했고 황제는 칙령을 발하였습니다. 감옥으로 끌려가거나 장작불 위에서 화형을 당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강경조치는 그다지 효과가 없었고 불안한 분위기만 퍼져 갔습니다. 그런데도 온 세상은 의식적인 행사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추문을 일으키는 수도사들은 양심이 마비되어 있었습니다. 신학은 궤변에 치우쳐 있었습니다. 독단적인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한없이 경직되어 있었고 교구사제나 주교들 그리고 교황청 관리들의 부패상은 말로 다할 수 없었습니다. … 나는 서로 간에 일치점을 찾아 타협할 것을 권유했었습니다. … 그러나 루터를 후원하던 사람들은 고집스럽게도 한치도 양보하려고 들지 않았습니다. 가톨릭 성직자들은 울화통만 터뜨렸습니다. … 나는 루터가 어느정도 양보를 하고 교황과 제후들도 서로 화합하리라고 믿고 희망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비둘기나 미네르바의 올빼미(지혜를 상징 - 역주)가 우리 가운데 있기를! 루터는 병든 몸에다가 아주 독한 약을 투약한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그것이 효험을 보도록 허락해 주시기를 바랄 따름입니다."
다음 해에 그는 "나는 루터가 이 시대의 잘못을 고치라는 사명을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오늘날 당한 모든 문제가 어디에서 파생되었는가? 사제들의 공개적이고 뻔뻔스런 부도덕성과 신학자들의 오만함, 그리고 수도사들의 포악한 태도에서가 아닌가?"라고 썼다. 그런데 에라스무스는 분명하게 잘못으로 드러난 것은 없애라고 권유했지만, 반면에 해가 되지 않고 남겨질 수 있는 것은 유지시키고 동시에 신앙의 자유도 인정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권유했다. "수도사들과 신학자들이 그토록 오랫동안 세상을 속여오던 면죄부가 거짓임이 폭로되었다. 이제 성인들의 공덕을 믿지 않는 사람들로 하여금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기도하게 하라! 그리고 생활중에 그리스도를 본받고 성인들을 숭배하는 자들로부터 떠나게 하라. … 사람들로 하여금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들과 다투지 않고 연옥에 관해서는 자기 좋을대로 생각하게 하라.… 선행으로 의롭다함을 받는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지는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행함이 없는 믿음으로는 결코 구원받을 수 없다는 점은 모두가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형제단과 루터
사태는 아주 심각하게 전개되어 에라스무스의 이러한 온건한 조언으로 해결될 수는 없었다. 당시에 관용을 베풀 수 있다고 생각하던 사람은 거의 없었다. 또한 상황이 극단적으로 전개된 데 자극을 받은 루터가 이번에는 사건의 전개에 영향을 미쳤다. 초기에 로마 가톨릭의 경건한 수도사로 출발한 루터는 스타우피쯔와 만난 뒤, 성경을 자세히 읽음으로써 형제단 및 신비주의자들의 생각에 동조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제 로마 가톨릭과 충돌하게 되었을 때 여러 명의 독일 제후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옛날에 받은 교육을 회상하고 점차로 루터교회를 창설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변화는 그가 형제단으로부터 점차로 멀어지고 성경의 진리를 부활시킴과 동시에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물려받은 요소를 새로 생긴 루터교회에 도입함으로써 분명하게 드러났다.
형제단이 복음서를 강조한데 비해 루터는 사도 바울의 가르침에 중점을 두었다. 또한 형제단은 그리스도를 따르는데 있어서 균형잡힌 진리를 선포하였지만 그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교리를 매우 강조하였다. 사람에게 자유로운 의지가 없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그의 가르침은,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로운 행동이 복음의 일부라는 사실마저 무시할 정도로 중요하게 취급되었다. 세례로써 새로운 생명을 얻는다는 것과 유아에게 세례를 베푸는 관습은 로마교회로부터 물려받은 가르침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완전한 사역에 대한 믿음으로 개인적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성경의 가르침을 부활시키면서도 그는 신약성경의 가르침대로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구분되어 있어야 한다고는 가르치지 않았다. 대신 교회는 세상 속에 있으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는 사명을 부여받았다고 하였다. 그래서 그는 로마 가톨릭의 교구체제를 받아들여 각 교구로 하여금 관할지역을 맡도록 하였다. 그리고 루터 교회 안에는 많은 통치자들이 있었다. 이로 말미암아 교회와 국가가 연합해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됨으로써 이 새로운 복음적인 권위로부터 떨어져 나간 사람들을 벌주거나 회심시키는데 국가의 권력이 합법적인 수단으로 인정받았다. 드디어 1529년에 스페이어(Speyer)에서 개최된 의회에서 개혁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로마 가톨릭 측을 향하여 항의를 하게 되었는데 이 때문에 개혁주의자들에게 "프로테스탄트"라는 이름이 붙여지게 되었다. 1531년에는 스말칼드(Smalcald)에서 9명의 제후와 11개의 자유도시가 동맹을 결성하여 "프로테스탄트 동맹"이 생겨나게 되었다.
이러한 루터의 변모를 가까이에서 지켜보던 스타우피쯔는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지금 우리들 귀에는 많은 사람들이 입술로만 이야기하는 복음이 들리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복음을 따라 살도록 우리를 돕고 계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육신에 자유를 주기 위하여 복음을 오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도 한때는 거룩한 복음을 가르치는 선구자였기에 나의 청을 듣기를 바랍니다"
결국 그는 루터가 취한 노선과의 결별을 선언하면서 명목상의 그리스도인과 진실한 그리스도인을 다음과 같이 구분하였다.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가지면서도 생활에서는 그를 닮지 않는 것이 가능한 일이기는 하겠으나, 요즈음에는 이것이 유행이 되어왔다. 아, 원수들은 얼마나 간교한가! 아, 사람들은 얼마나 잘못된 길로 들어가고 있는가!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선행을 할 필요가 없다고 얘기하는 바보들을 보아라. 주님께서는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악한 영은, 육에 속한 그리스도인에게 선행이 없이도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으며, 바울도 그렇게 가르쳤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 말은 거짓이다. 바울이 실로 율법적인 행동과 의식적인 관습을 비난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때까지 사람들은 구원을 이루기 위해 두려움을 가지고 애써 왔다. 그리고 그는 악한 일을 생각하지 않았고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복종과 사랑과 믿음의 결과인 선행에 대해서는 칭찬만을 하였다. 그가 쓴 모든 서신서에는 선행의 필요성이 선언되고 설교되었다."
루터는 "복음은 그리스도에 대해 가르치고 있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지켜야 할 새로운 법을 주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위한 대속물로 자신을 드리기 위해 오셨다는 것을 바울로부터 배우라"고 말했다. 반면에 가톨릭 교회는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삶을 받아들이면서 그분의 내주하시는 도움으로 그분의 말씀과 모범을 따라 걷도록 계속 바라고 노력하는 사람만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고 거듭 가르쳐왔다.
루터는 오랫동안 아무도 건드리지 못한 가톨릭의 특권과 권한 남용에 도전하였고 이로써 종교개혁의 길을 트게 되었다. 그는 수많은 죄인들에게 그리스도를 소개하였다. 모든 사람은 자신 안에 어떠한 선한 것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반드시 사제나 성인, 교회, 성례의 도움이 없이 그리스도께 곧장 나아가도록 가르침을 받았다. 즉, 그분을 믿음으로써 그분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의 완전하신 사역에 기초를 둔 완전한 구원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루터가 루터교회를 세우게 되었을 때 말씀의 정도(正道)에 철두철미한 것은 아니었다. 어떤 점들은 개혁되기도 하였으나 아직도 과거의 가톨릭 교회와 유사한 측면도 많이 남아 있었다. 그의 인도를 따랐던 사람들은 루터가 성경에 충실하지 않은 것을 보고 과거대로 로마 가톨릭에 그대로 남아있기도 하였다. 누구든 두 체제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강요당했을 때 형제단에 속한 사람들은 몹시 실망하게 되었다. 이제 어느 측이든지 신앙문제를 무력을 사용하여 해결할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루터가 처음에 종교개혁을 일으켰을 때 그는 성경적인 교회형태가 어떠한지를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외부적인 상황변화로 인하여 교회는 믿는 자들의 독립적인 모임이라는 성경의 가르침을 저버리고 민족교회 내지 국가교회 체제를 선택하게 되었다. 이 두 가지의 교회형태 사이에는 서로 화합할 수 없는 차이점이 있었고 그로써 양자간의 갈등은 필연적이었다. 성경적인 교회에서는 침례와 성만찬이 교회를 세상으로부터 분리시켜주는 강(江)이었던데 비해 국가교회에서는 그것을 양자를 연결시켜주는 다리로 인식했다는 점에서 이에 대한 양측의 입장은 큰 차이가 났다. 국가교회에서는 유아세례와 성만찬을 베풀 때 당사자들이 개인적으로 신앙을 가지고 있는지의 여부를 따지지 않았다. 게다가 이러한 성사(聖事)를 주관하는 성직자가 권한을 남용함으로써 신앙과 양심의 문제에 있어 국가를 지배하게도 되었다. 그러할 때 교회의 자유는 억압되고 종교는 국가의 문제로 변형되어 버리게 된다. 한편 국가교회는 매우 관용적이어서 다양한 견해를 용납할 수도, 불신자들이 교회에 들어올 수도, 악한 행실을 용납하며 심지어 성직자들마저 불신앙을 표방할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국가교회는 힘이 있는 한, 신자들에게 직접 침례를 베풀거나 성만찬을 시행하려는 사람들은 용납하려고 하지 않았다. 근본적인 차이점은 의식적인 문제에 있었던게 아니라, 국가교회 밖에서 침례와 성만찬을 다루는 것은 국가교회의 기반을 허무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불완전한 개혁
루터는 남다른 추진력과 용기를 가지고 믿음으로 죄인이 개인적인 구원을 얻게 된다는 성경의 가르침을 밝히 드러내 주었었다. 그렇지만 교회에 관한 가르침을 비롯하여 모든 문제에 있어서 성경으로 돌아가도록 이끌지는 못하였다. 그는 "하나님께서는 억지로 하는 봉사를 원하지 않으신다"든지 "아무도 믿음을 강요할 수는 없다"고 말한 바도 있었다. 그리고 1526년에는 다음과 같은 글을 쓰기도 하였다.
"올바른 형태의 복음적인 의식은 오직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작정하고 손과 입으로 복음을 고백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드러날 수 있다. 그런 사람들은 한 집에 따로이 모여서 기도하고 성경을 읽고 침례를 주고 성례를 지키는 일은 물론이고 다른 모든 일에 있어서도 성경에 입각한 행동을 해야 한다. 만약 어떤 사람이 죄를 범한 사실이 알려지면, 그리스도의 말씀대로(마 18:15) 권고함으로써 행동을 고치게 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교회 밖으로 쫓아낼 수 있다. 또 바울서신에 보면(고후 9:1-12) 교회에서는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줄 연보를 거둘 수도 있었다. 꼭 훌륭한 성가대를 갖추고 성대한 찬양시간을 가질 필요는 없다.
그리고 간단하고 단순한 방법으로 침례나 성례를 시행하되 모든 것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사랑 안에서 행할 수 있다. 그러나 아직 나는 거기에 합당한 사람들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그러한 모임을 이룰 수는 없다. 하지만 내가 그것을 할 능력을 갖추고 그렇게 행동하는 것 외에 다른 대안이 없다면, 기꺼이 나에게 주어진 역할을 담당할 것이다. 그 때까지 나는 그리스도인들이 말씀을 열심히 취하여 말씀대로 살아가는 방법을 알 수 있기까지 사람들을 불러서 분발시키고 도우을 줄 것이다."
그런데 루터는 '올바른 사람들' 즉 '진실되고 경건하며 거룩한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이 자기 주위에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교회를 세우기로 하였으나 자기가 그렇게도 훌륭하게 그린 이상과는 배치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말았다. 그를 따르던 많은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그도 루터교회가 초선의 형태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는 그것을 '임시적'인 '바깥 뜰'이지 '성소'는 아니라고 하면서 계속해서 사람들을 훈계하고 경고하였다.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어떤 일을 하는지 정확하게 보고,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떠한 얘기를 하는지를 안다면 매우 실망할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을 속이고 있다. 처음에는 우리와 함께 일을 시작하고 기쁨으로 가르치던 사람들의 수가 지금보다 열배나 많았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굳게 서 있는 사람은 그 중의 십분의 일도 되지 않는다. 그들은 앵무새가 사람들의 얘기를 따라하듯이 말하는 것을 배우기는 하였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 속으로는 자기들이 얘기하는 바를 경험하지 못하였다. 그들은 예전의 모습대로 남아있으며 하나님께서 얼마나 진실하시고 진실하신지를 맛보지 못하고 느끼지를 못한다. 그들은 복음에 대해서 많은 것을 자랑하면서 열심히 추구하다가는 나중에는 시들해져 버린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기들의 욕심을 따라 좋은대로 행동함으로써 이전보다 형편이 나빠지고 다른 사람들보다 거칠고 뻔뻔스럽게 되었기 때문이다. 농부나 시민이나 귀족이나 모두가 가톨릭 교회 아래에 있을 때보다 더 거칠고 욕심이 많다."
그리고 루터는 다음과 같이 기도했다. "오! 하나님이시여, 우리가 이 가르침을 올바로 시행하기만 한다면, 지금 가톨릭의 성사를 받기 위해 가는 수천 명의 사람들이 불과 수백 명으로 줄어들 것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그렇게 되면 저주스런 법으로 세상을 압제하던 교황의 가증스런 죄악이 감하여지리이다. 또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모임을 이루어 우리가 처한 곳에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이교도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으리이다. 그때 우리는 불가능한 일을 행함으로써 믿지 않고 생명을 소유하지 않는 자들과 구별될 수 있으리이다."
그렇지만 교회가 일단 국가의 통제 아래 들어가게 되자 상황이 변경될 수 없었다. 루터는 자기가 세운 교회들이 성경의 가르침에 충실하도록 과감히 인도하지 못했다. 이후에 그는 종종 자기가 생각하던 바와는 달리 그리스도인의 자유가 억압되고 그리스도인의 모임이 독립성을 상실한데 대해 후회하곤 하였다.
<순례하는 교회 - 신약교회 원리에 충실한 교회들의 역사>(전도출판사) - E. H. 브로우드벤트 지음 -
--------------------------------------------------------------------------------
이그나티우스 로욜라와 예수회
루터가 교황의 교서를 불태우고 종교개혁을 시작하고 있을 때 프로테스탄티즘의 진로를 가로막고 반종교개혁의 기치를 들어 개혁의 분위기가 만연하던 넓은 지역을 가톨릭 교회로 되돌리려는 작업을 준비하고 있던 사람이 있었다. 이그나티우스 로욜라(Ignatius Loyola)가 바로 그 사람이다. 그는 1491년 스페인의 귀족가문에서 태어나서 페르디난드와 이사벨라의 궁정기사를 거친 후 군인이 되었다. 그러나 놀라운 용맹을 떨치던 그가 30세의 나이에 부상을 당하여 다리를 절게 되었다. 이로써 그의 삶은 일대 방향전환을 겪게 되었다. 오랜 투병생활을 하는 동안 그는 신비주의자들의 글을 읽고, 욕망에 따라 살던 이전 생활로부터 돌이켜 위대한 일을 하고 싶은 간절한 소망을 가지게 되었다. 이제는 이땅의 왕을 위한 봉사에서 군사적인 명예를 찾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군사로서 하나님을 위해 일하리라는 마음이 그의 속에서 일어났다. 그는 "오, 주님이시여, 저에게 당신을 찾는 길을 보여주십시오. 제가 구원의 길을 알 수만 있다면 충성스런 개처럼 따르겠나이다"라고 기도하였다.
오랜 갈등 끝에 그는 드디어 죄가 사해졌다는 확신을 가지고 마음의 평화를 찾고 육신의 세력으로부터 해방되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그 일을 불꽃처럼 생긴 바위로 가득찬 산봉우리에 위치한 그 유명한 몽트세라트(Montserratt)수도원에서 일어났다. 거기서 그는 밤새도록 참회를 하고는 오랜 동정녀 상 앞에서 그리스도와 동정녀를 위하여 헌신을 하겠다는 다짐을 한 것이다. 그리고는 자기가 입고 있던 옷을 벗어버리고 남루한 순교자의 옷을 걸친 후, 가까이 있던 도미니크단 수도원으로 달려갔다. 거기서 그는 신비주의자들이 행하던 대로 자신 안에 모든 것, 즉 생각이나 환상 그리고 외면적인 자세나 위치 등을 세밀하게 기록하고 염적인 황홀경을 발전시키는데 가장 유리한 방법을 찾아내었다. 나중에 큰 영향을 끼친 "영적 훈련"(Spiritual Exercises)이라는 책자도 여기에서 저술되었다.
알려진 바 대로 신비주의자들은 성직자의 간섭없이도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다고 가르침으로써 성직자들과 갈등을 빚어왔다. 로욜라도 이러한 의심을 받아 종교재판소나 도미니크단 수도원측에 의하여 여러번 감옥에 갇힌 적이 있었으나 그때마다 자신이 그런 사람이 아님을 증명하고 풀려났다. 이처럼 그도 처음에는 신비주의자들의 글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으나 점점 그 가르침과는 반대되는 체제를 발전시켰다. 그는 예수회의 구성원들에게 그리스도와 직접적인 교통을 하도록 가르치지 않고 자기 위의 한 사람에게 소속되게 해서 그에게 생활상의 모든 비밀을 털어놓게 하고 절대적인 충성을 바치도록 하였다. 그것은 각자 바로 위에 있는 상급자의 뜻에 복종하도록 만든 군대체제와 같았다. 심지어 아주 높은 직위에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다른 사람으로부터 행동이 감찰당하고 통제를 받았다. 이렇게 해서 같이 연구하고 여행하고 가르치며 자선행위를 하면서 그리고 비록 실패를 하기는 했지만 예루살렘으로 가려고 시도하고 교황을 알현하려는 노력을 하면서 로욜라 주위에는 일단의 사람들이 모이게 되었는데 그는 이 사람들로 1534년에 파리에서 "예수단"(Company of Jesus)이라는 단체를 조직하였다. 로욜라와 함께 여기에 소속된 또다른 여섯 명의 사람들은 청빈과 청결 그리고 선교활동을 실행할 것을 선언하였는데 그중에는 사비에르(Francis Xavier)도 있었다.
이 모임을 교황은 1540년에 "예수회"(Society of Jesus)라는 이름으로 인정하였다.
칼빈을 비롯한 다른 반대자들은 그 단체를 "제수이트"(Jesuit)라고 불렀다.
예수회는 가입자를 세심하게 선발하여 상급자에게 완전히 복종을 하도록 오랫동안 특수한 훈련을 시켜서 종교개혁 흐름을 저지시키고 많은 지역을 로마 가톨릭 측으로 되돌리는 '반종교개혁'을 가능하게 하였다. 그렇지만 그 세력이 급속도로 증대되었을 때 무리한 방법까지 사용함으로써 종교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내정까지 간섭을 당했던 여러 국가 사이에는 물론, 가톨릭 교회내에서조차 반대자가 생기게 되었다. 그래서 예수회의 역사는 매우 파란만장했다. 때로는 한 국가의 정책을 결정하는 데까지 나아갔다가 축출당하기도 하고, 활동이 금지되었다가 상황이 호전되어 다시 일어나기도 하였다. 쾰른의 선제후였던 비드(Hermann von Wied)가 가톨릭 종교개혁을 주창하고 종교개혁자들과 화합하려 하였을 때 그 시도는 독일의 예수회에서 배출된 유능한 인물인 카니시우스(Canisius)에 위해 좌절되었다. 또한 수많은 경우에 예수회의 활동으로 개혁운동이 억압되고 무력화되었으며 로마측의 지배권은 공고해졌다. 그리고 부지런하고 헌신된 예수회원들은 선교사로서 인도나 중국 그리고 아메리카 등지의 이교도 지역으로 파송되어 로마 가톨릭을 전파하기도 하였다.
<순례하는 교회 - 신약교회 원리에 충실한 교회들의 역사>(전도출판사) - E. H. 브로우드벤트 지음 -
--------------------------------------------------------------------------------
자료출처http://separati.cafe24.com/sb2heresy29.html
제슈잇 수도회(The Society of Jesus)
카톨릭에서는 개신교의 종교개혁으로 전유럽에 퍼져 나가는 개혁의 불길을 막으려는 여러 운동들이 있었다. 그 중에서 가장 큰 돌격대로 제일 앞장 선 것은 제슈잇 수도회라 할 수 있다.
(1) 창설기
창설자 이그나티우스 로욜라(Ignatius Loyola : 1491-1556).
이 사람은 그의 부친이 바스크(Basque)의 귀족이었다. 그가 태어난 바스크 지방은 요즘 프랑스와 스페인의 국경 사이에 위치한 비스케 만(the Bay of Biscay)에서 약간 남쪽에 위치해 있다.
그의 부친은 페르디난드 왕의 궁정에서 시종(Page)노릇을 한 적이 있다. 로욜라 가문은 전통적으로 충실한 카톨릭교도였다. 로욜라는 어렸을 때 궁전 예절을 익히고 전략을 공부한 후에 다른 두 형제와 함께 자기들 상전이라 할 수 있는 나제라 공작(duke of Najera)의 군대에 소속되어 전투에 참여한다.
1521년 5월 21일 프랑스 왕 프란시스 1세가 팜플로나(Pamplona)에 진격해 왔다. 저들 프랑스 군대는 팜플로나 성벽을 향해 대포를 쏘아댔다. 로욜라는 이들을 막고자 분전하던 중 때마침 날아온 대포 알에 오른쪽 다리는 으스러지고 왼쪽 다리는 부상을 당하는 비운을 겪게 된다.
프랑스 의사는 이 젊은이를 치료하고자 하였으나 미숙한 솜씨로 두번씩이나 부러지고 이어지는 우여곡절 끝에 평생 절름발이가 되었다. 고향으로 돌아와 휴양하던 중 여러 성자들의 전기를 탐독하게 된다. 특히 루돌프(Ludolph the Carthusian)가 쓴 「그리스도의 생애」에서 많은 감동을 받는다. 이때에 로욜라는 자기가 꿈꾸던 기사도적 이상을 종교의 영역으로 전환하고자 결단한다.
즉 그리스도인이란 빛나는 영적 갑옷을 입은 군대로서 의로우신 왕 그리스도를 위해서 그의 지휘하에 사생 결단의 전쟁을 벌이는 군사라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일과 그의 명상들은 그로 하여금 자기 자신을 완전하게 성자의 길로 헌신하도록 결단하게 했다. 로욜라는 바르셀로나(Barcelona) 근처 만레사(Manresa)에 은거하여 1년간 지내며 그의 과거 생활에 관한 철저한 정리를 한다.
그리고 인간들이 자신들의 자유의지를 제어함으로써 구원을 가능하게 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로 씨름을 한다. 그는 이때 「영적 훈련」(Spiritual Exercise)이라는 대표적 저서의 뼈대를 만든다. 이 저서는 후에 1541년에 완성 출판된다. 만레사에서 약 1년간을 지낸 후 예루살렘을 순례한다. 그는 그때 모슬렘교도들을 개종시켜야 되겠다는 계획을 세운다.
다시 스페인으로 돌아온 로욜라는 키메네츠 추기경이 설립한 알칼라대학에서 공부를 시작한다. 그때 그의 나이가 약 30가량 이었다. 여기서 어린 소년들과 함께 라틴어를 배웠다. 로욜라는 가정과 병원에서 비공식적으로 설교를 했다. 그리고 그가 집필하고 있던 「영적 훈련」을 소개했다. 그러나 그는 종교재판소에 의심을 받고 얼마간 투옥됐다. 그러나 앞으로 3년 동안 가르치거나 모임을 주재할 수 없다는 명령을 받고 풀려 나온다.
출옥 후 그와 그의 동료들은 살라만카(Slalamanca) 대학교로 갔으나 거기서 2개월도 못되어 다시 투옥되었다. 로욜라의 열정이 이단의 혐의를 받게 되었던 것이다. 로욜라는 1528년부터 1535년까지 7년 동안 파리에 있으면서 공부를 하였다. 그는 몽테뉴 대학(College de Montaigu)과 생트 바르브 대학(College de Sainte Barbe)에서 수학하였다. 1534년에 신학사 학위를 취득하고 1535년에 문학석사(M.A)를 받았다.
로욜라가 파리에서 공부하는 동안은 칼빈이 공부를 하고 떠나온 때였다. 이렇게 두 사람이 같은 학교에서 공부를 하였으나 한 사람은 개혁자의 길을 걸어갔고 다른 한 사람은 카톨릭을 위해 헌신하는 길을 걸어갔다.
그리고 로욜라가 파리에서 공부하는 기간에 자기 동지들을 규합하는 큰 일을 하였다. 로욜라는 최초의 6명에게 「영적 훈련」을 소개하며 동지로 규합하는 데 성공한다. 이때의 6명은 곧 로욜라의 후계자로 계승한 차기 사령관이 된 디에고 라이네즈(Diego Lainej), 알폰소 살메론(Alfonso Salmeron)과 후에 극동 지역 선교사로 큰 업적을 남긴 프란시스 사비에르(Francis Xavier)등이다.
이렇게 해서 1534년 8월 15일에 여섯 동지들은 수도원의 세 가지 맹세를 한다. 즉, 가난, 그리고 정절, 복종의 맹세(The customary three fold monastic vows of poverty, chastity, and obedience)를 하였다. 이것이 '제쥬회'(The Society of Jesus)의 시작이다. 원래는 The Company of Jesus라고 했었다.
(2) 발전기
제쥬회는 교황의 사절에게 자기들의 교리적 정통성을 납득시키고 이 모임이 교황의 권위 수호와 신앙을 전파하는 데 막대한 공헌을 할 수 있다는 납득을 시킨다.
드디어 1540년 9월 27일 교화으이 공식 허가를 받아낸다. 제쥬회는 하나님의 군사(Soldiers of God)인 군대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그들은 교황의 지시하에 전투하며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개인의 의사를 철저히 부정하였다.
그들의 「영적 훈련」이라는 책에는 너무나 과장이라고 생각되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모든 사건 모든 사물에 관하여 안전하게 생각하고 이해하고 싶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원칙들을 고수해야 한다. 나에게는 아무리 흰색으로 보이는 것이라 하더라도 만약 교회의 계급 체제가 이를 검은 색이라고 정의한다면 나는 이를 검은색으로 믿을 것이다'(규칙 제 13조).
그리고 제 1법칙에는 "인간은 우리 주 하나님을 찬양, 경외하고 섬기기 위하여 창조되었으니 이러한 방법들을 통해 자기들의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이 사물들이 자기의 진정한 존재 목적을 성취하도록 돕는 한에서만 이들을 이용해야 할 것이며 만약 이들이 자기의 궁극적 존재 목적을 이루는 데 방해가 된다면 이들을 제거해 버려야만 할 것이다. 우리들의 유일한 욕망과 선택은 왜 우리가 창조되었는가 하는 그 목적을 이루는 데 이바지할 수 있는가 하는 기준 속에서만 행해져야 할 것이다'라고 그들의 목적을 설명하고 있다.
이들의 조직은 우두머리로 총장(General)을 둔다. 그리고 모든 회원은 그리스도께 하듯 총장을 대우하며 존경할 것을 맹세한다. 회원 자격은 최고의 엘리트들을 대상으로 한다. 이들은 좋은 성품을 소유한 인물들 가운데서 지적으로 뛰어나고 육체적으로 강건하고 매력적이며 헌신적인 인물들만으로 회원을 가입시켰다.
회원이 되는 과정은 매우 복잡하고 철저했다. 처음 2년간은 견습기간이었다. 그후 신입회원이 돼서는 가난, 정절, 복종이라는 일반 수도회의 서원을 하게 된다.
그후 1년간은 교양 학문을 공부하고 3년간은 철학을 공부한다. 이 공부를 마치면 어린 회원들에게 철학, 문법을 가르친다. 그후 다시 4년간 신학 공부를 하고서야 정식으로 사제가 된다. 사제가 된 후에도 다시 1년간은 실천 신학으로 설교학, 영적 훈련을 한다. 그 후 다시 2년간의 실제 시험 기간을 거쳐 자격이 인정되면 교황에게 절대 순종한다는 특별 서원으로 비로소 제쥬회 정식회원이 된다.
로욜라 자신은 5 피이트 2인치도 안되는 왜소한 체구였다. 게다가 오래동안 소화불량 증세 때문에 고생하였다. 그리고 다리 수술을 할 때 남자의 자존심으로 남아 있는 돌기(突起)를 없애는 수술을 하였다. 그는 평생을 절면서 살았다.
그런데도 그는 모든 면에서 지도자의 역할을 했다. 항상 원기가 넘쳤고 평온했으며 자신감이 넘쳤다. 모든 회원들에게 어떤 불순종도 허용하지 않았다. 로욜라는 살아 생전에 교황의 교서를 받은 지 16년 만에 예수회 회원은 1,000명의 회원을 확보했다. 그리고 그의 생전에 100개에 달하는 대학과 신학원을 설립하였다.
(3) 수확기
제쥬잇 수도회는 로마 카톨릭이 만든 수도원 운동 중에서 최후로 화려하게 꽃을 피운 것이라 할 수 있다. 제쥬잇 수도회는 왜 그토록 뛰어난 효과를 달성할 수 있었는가?
그 첫째 요인으로는 탁월한 조직력을 들 수 있다. 제쥬잇은 가장 하층 계급으로부터 사령관에 이르기까지 순식간에 소통되는 연락망을 갖고 있었다. 이 탁월한 조직력은 뛰어난 의사 소통을 가능하게 하였다.
다음으로 엄격한 징계조치를 통해 영적 생명력을 계속 강건하게 유지하고자 하였다.
제쥬잇은 성찬식을 자주 거행하였고 개인적 고해 성사를 강조하고 영적으로 회원들의 문제를 항상 상담함으로 회원들의 양심 상태를 늘 점검해 주었다.
그리고 한 가지 큰 요인은 올바른 종교적 지식의 함양을 위해 보다 고상한 차원의 고등 교육을 실시하였다.
이렇게 해서 제쥬잇 수도회를 통해 많은 결실을 얻게 된다. 그 중에서 가장 큰 결실은 교육과 선교 부분이다. 로욜라가 죽은 지 1세기 반이 채 지나기 전에 예수회는 700개의 학교를 설립하였다. 오늘날 그 학교들의 숫자는 수천에 이르고 있다. 저들은 개신교 국가들에 들어가 도서관, 수도회, 자선기관, 병원, 학교 등 어디든지 침투하였다.
제쥬잇 수도회의 놀랄 만한 성과는 역시 선교이다. 제쥬잇회는 프란시스 수도회 종단 후예들과 경합하여 많은 선교사를 배출하였다. 이들 제쥬잇 종단이 유럽 쪽에서는 개신교로 넘어간 지역들을 다시금 로마 카톨릭의 울타리 안으로 끌어 들였다. 이런 지역은 보헤미아, 모라비아 그리고 폴란드 등이 있다. 헝가리 역시도 개신교 국가가 될 수 있도록 다 기울어진 것을 다시금 카톨릭 강국으로 되돌려 놓았다.
남미에 있어서도 그 공헌이 대단하다. 멕시코, 페루를 카톨릭 국가로 만드는 데는 프란시스칸, 도미니칸, 어거스티니안들이 가장 활동적이었다. 그렇지만 브라질과 파라과이에서는 제쥬잇들이 가장 큰 공헌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아세아에서의 선교활동은 어려운 점이 많았다. 남미의 인디언들은 집단적으로 개종이 가능했다. 그렇지만 아시아에서는 오랜 역사 속에서 함께 자라온 고대 문화와 기존 고등 종교들 때문에 개종이 힘들었다.
이 중에서 가장 유명한 제쥬잇 선교사는 프란시스 사비에르이다. 그는 로욜라와 같은 지방 사람이었다. 그가 18살 때 파리의 생트 바르브 대학에 철학을 공부하러 갔다가 로욜라를 만나게 되었다. 사비에르는 폴투칼 왕이 동인도 제도에 보낼 선교사 요청에 의해 남부 인디아에 가서 3년 동안 폴투칼 식민지들을 대상으로 해안 지방에서 선교활동을 한다.
그후 동인도 여러 제도(말락카, 말라야, 몰로카이)에서 선교를 2년반동안 한다. 그리고 1549년부터 1551년까지 일본 선교를 한다. 이때 가고시마, 야마구찌 등 각지에서 선교 활동으로 열매를 맺는다. 이무렵 전도를 받은 풍신수길(豊臣秀吉)이 임진왜란 때 한국을 쳐들어 오면서 종군 사제를 데리고 들어온다.
그는 46세 때 중국 선교를 계획하던 중 열병에 걸려 사망하였다. 카톨릭에서는 사비에르를 성자로 추대했다. 사비에르 유지를 받들어 중국 선교사로 제쥬잇 선교사 마태오 리치(Matthew Rici : 1551-1610)가 활약한다.
마태오는 중국의 상층부터 전도하여 차츰 하류 계급으로 내려가는 선교방법을 썼다. 그는 천문학과 수학에 깊은 조예가 있어서 페이킹에서 환영을 받으며 선교했다. 이 마태오 신부는 현지의 풍습과 전통에 너무 타협을 많이 한다는 다른 종단 선교사들의 비난을 받기도 했다.
이렇게 유럽, 아메리카, 아프리카, 아시아 등 세계 어느 곳이든 제쥬잇 선교사들의 영향은 확대되었다. 이것이 다른 종단들의 시기가 돼서 약 한 세대 가량은 교황으로부터 탄압을 받게 된다.
그러나 이들 제쥬잇 선교단은 그 어느 종단과 비교할 수 없으리만큼 세계적으로 활동하였다. 이들 제쥬잇 교단이야말로 교황청의 손에 들려진 강력한 검과 같았다. 군대 조직과 같은 이들은 각종 도전과 기회를 날카롭게 포착하였다. 그래서 개신교에 대해서 유감없이 대항하였다. 그리고 유럽에서 잃어버린 개신교도들보다 훨씬 많고 방대한 남미의 여러 나라들을 카톨릭화 하는데 성공하였다.
카톨릭이 이렇게 왕성한 선교를 하고 있을 때 개신교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저들은 예정론 신학을 가지고 서로 정죄하고 시비하면서 탁상공론만 펼치고 있었다. 잘못된 신학은 그 시대의 교회들을 퇴보시키고 잠재워 준다는 교훈을 역사는 증명해 주고 있다.
이 시대의 신학은 교회를 살리고 사회를 윤택하게 하고 국가와 전세계 앞에 이바지 할 수 있는 신학을 갖고 있는가? 우리는 엄숙한 현실 앞에 자기 모습에 대한 냉철한 발견이 있어야 할 것이다.
<(신약교회사관에 의한) 새교회사Ⅱ>(규장) - 정수영 목사 지음 -
--------------------------------------------------------------------------------
종교개혁(A.D. 1500 - 1550)
루터는 오랫동안 아무도 건드리지 못한 가톨릭의 특권과 권한의 남용에 도전하였고 이로써 종교개혁의 길을 트게 되었다. 그는 수많은 죄인들에게 그리스도를 소개하였다. 그렇지만 그가 말씀의 정도(正道)에 철두철미한 것은 아니었다. 어떤 점들은 개혁되기도 하였으나 아직도 과거의 가톨릭교회와 유사한 측면도 많이 남아 있었다.
형제단의 교육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계곡 지방에 있던 왈도파와 독일 지방의 여러 형제단 그리고 보헤미아의 연합 형제단은 똑같은 어린이용 교리교재를 사용했다는 사실을 보아,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교리교재는 아주 작은 책으로서 이탈리아어와 프랑스어, 독일어와 보헤미아어로 발간되었는데 현재는 1498년부터 1530년 사이에 인쇄된 여러 종류의 판이 알려져 있다.
또 이들 형제단은 15세기와 16세기 초에 네덜란드와 북서부 독일 지방에 여러 학교를 설립했던 "공동생활 형제단"과도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공동생활 형제단"을 처음으로 조직한 사람은 사람은 네덜란드인 그루트(Gerhard Groote)였는데 그는 뤼스브뢰크(Jan van Rysbroeck)와 함께 형제단을 설립하고 데벤터(Deventer) 지역에 처음으로 학교를 세운 바 있었다. 그루트는 다음과 같은 말로써 자신의 교육방침을 제시하였다. "학습의 근본과 삶의 모범은 우선 그리스도의 복음이어야 한다." 그는 경건한 생활을 결여한 지식은 복을 주기보다는 저주스런 것이 되기 쉽다고 생각하였다.
데벤터에 있는 학교는 헤기우스(Alexander Hegius)라는 유명한 교장아래 이천여명의 학생을 가진 훌륭한 학교로 발전하였다. 나중에 "그리스도를 본받아"를 저술한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a Kempis)와 에라스무스도 이 학교에서 공부한 바 있었다. 교육을 위한 재정은 처음에는 신약성경을 필사(筆寫) 보급함으로써 충당되다가 인쇄술이 보급되고 난 뒤부터는 인쇄를 통하여 조달되었다. 또한 형제단과 '하나님의 친구들'은 소책자를 많이 발간하기도 하였다. 이런 방식으로 성경에 기초를 둔 건전한 교육이 실시될 수 있었다.
1538년에 울름(Ulm)에서 발간된 찬송집을 보면, 형제단의 집회에서는 찬양과 예배를 위한 규범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찬송집의 긴 제목중 마지막 부분에는 "그리스도인 형제단 곧 피카르드파(Picards)가 비기독교요 이단이라고 간주되기까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매일 사용하고 불렀던 노래"라고 씌어져 있다.
루터와 95개조 반박문
루터가 복음을 깨닫고 자기 생각을 발전시켜 나갈 수 있었던 데는 성경의 가르침과 스타우피쯔(Staupitz)의 도움 때문이기도 하였지만, 타울러(Tauler)나 형제단의 저작물로부터 받은 자극도 큰 역할을 하였다. 루터는 당시의 대학교육이 올바르지 못하고 성경에 부합하지도 않는다고 생각하였다. 1517년부터 1520년 사이에 루터는 많은 소책자를 발간하였는데 이것들도 형제단으로부터 받은 바 영향이 적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구원이란 교회의 중재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각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얻어진다고 주장하였다. 루터는 성경의 가르침을 통하여 구원은 우리 자신의 선행으로 획득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가 이런 진리를 열정적이고 능력있게 전하였을 때 이미 이 진리를 알고 있었던 사람들은 소망과 기대를 새롭게 할 수 있었고 지금까지 그것을 알지 못했던 사람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1517년 당시, 교황청에서 발간한 면죄부를 판매하던 테쩰(Tetzel)이라는 수도사는 파렴치하며 익살스런 상술로써 사람들 마음 속에 아주 효과적으로 거짓 가르침을 전해주고 있었다. 루터는 삭소니의 선제후(選帝侯)가 이에 반대하도록 설득하였으나 실패하자, 스타우피쯔의 격려를 받아 비텐베르그 성당에다가 "95개조 반박문"을 게시하였다. 이것은 즉시 전유럽으로 전파되어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소에 자신들이 느끼던 생각, 즉 면죄부에 대한 가르침은 전부 사기이며 복음에 근거하고 있지 않다는 내용에 공감을 느끼게 되었다. 가난한 수도사에 불과했던 루터는 이제 거대한 교황세력과 마주서서 싸우게 되었던 것이다. 뒤이어 그가 쓴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관하여 독일 귀족에게 보내는 서한"(Address to the Nobility of the German Nation on the Liberty of the Christian Man)과 "교회의 바빌론유폐"(Babylonian Captivity of the Church)는 전유럽에 큰 감명을 주었다. 그러자 교황은 그를 파문에 처한다는 교서를 내리게 되었지만, 루터는 이에 굴복하지 않고 그것을 비텐베르그에서 공개리에 불살라 버렸다(1520).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보름스(Worms)에 소환되었을 때에도 아무도 그를 해칠 수 없었다. 그런데 그가 보름스를 떠날 즈음 그의 신변상의 위험을 눈치챈 친구들이 그를 바르트부르그 성으로 몰래 데리고 가서 그가 죽었다는 거짓 소문을 퍼뜨렸다. 거기에서 루터는 신약과 구약을 차례로 독일어로 번역하였다. 그 결과 성경이 많이 읽혀짐으로써 종교적인 문제들이 사람들의 관심을 크게 끌게 되었고 유럽사회의 전체적인 모습이 점차로 변화되었다. 점점 심해지는 교회의 부패와 탐욕을 절망적으로 바라보던 사람들이 이제 사도시대의 초대교회로 돌아갈 때가 왔다는 강렬한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경에 나타난대로 구속자로서, 죄인들의 구세주로서, 그리고 고통당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 이르는 길로서 새롭게 인식되었다.
그러나 루터의 견해와 관심사는 교황측과 아주 판이하게 달랐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양측의 충돌이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루터를 따르고 그의 주장에 동조하는 사람들은 엄청나게 증가되었으나 로마 가톨릭의 낡은 체제는 투쟁없이 순순히 변화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에라스무스처럼 양쪽이 타협하고 평화롭게 문제가 해결되기를 바라던 사람들도 있었으나, 자기들의 지위와 특권이 박탈당한다고 생각하던 수도사들은 격렬하게 루터를 반대하였고 교황청 당국은 새로운 운동을 탄압할 때 으례이 쓰던 방식대로 파문과 처형이라는 무기를 휘두르려고 하였다. 이에 루터는 처음에 가졌던 겸손한 태도를 버리고 교황만큼이나 독단적으로 변모해갔다.
에라스무스의 조언
그런데 정치적인 분쟁 때문에 사태는 더욱 급박해지게 되었다. 농민에 대한 압박으로 1524년에서 그 이듬해까지 독일 농민전쟁이 발생되었던 것이다. 그러자 즉각 교황측은 루터와 그의 추종자들이 농민전쟁에 책임이 있다는 비난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당시에 도처에서 발생된 혼란 때문에 독일사회 전체가 위협을 당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이보다 앞선 1520년에 에라스무스는 다음과 같은 글을 쓴 일이 있다. "나는 루터가 당분간 잠잠히 있기를 바란다. 그가 말하는 바는 옳을지는 모르나 모든 일에는 때와 기한이 있는 것이다."
이어서 1524년에는 삭소니의 조오지 공(Duke George)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루터가 처음 입을 열었을 때 모든 사람들이 찬사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위업도 모든 사람 위에 뛰어났습니다. 지금은 그를 매우 비난하던 사람들도 그때는 그의 편이었습니다. 추기경이나 심지어 수도사들도 그를 격려해 주었습니다. 그는 놀라울 정도의 결과를 얻었습니다. 그는 모든 정직한 사람들이 비난하였던 관행을 공격했고 남을 희생시키는 욕심장이들에 대항하여 싸움을 하였습니다. 사실 그때는 그들의 강압 아래에서 기독교 세계 전체가 신음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루터가 주도한 그러한 운동이 어디까지 갈지 누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루터 자신도 그런 엄청난 결과가 나타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반박문을 게시했을 때 나는 그에게 더이상 급진적인 행동을 하지 말라고 권유했습니다. … 나는 폭동이 일어날까 두려웠습니다. … 나는 그에게 자제하라고 경고했습니다. … 교황은 교서를 반포했고 황제는 칙령을 발하였습니다. 감옥으로 끌려가거나 장작불 위에서 화형을 당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강경조치는 그다지 효과가 없었고 불안한 분위기만 퍼져 갔습니다. 그런데도 온 세상은 의식적인 행사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추문을 일으키는 수도사들은 양심이 마비되어 있었습니다. 신학은 궤변에 치우쳐 있었습니다. 독단적인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한없이 경직되어 있었고 교구사제나 주교들 그리고 교황청 관리들의 부패상은 말로 다할 수 없었습니다. … 나는 서로 간에 일치점을 찾아 타협할 것을 권유했었습니다. … 그러나 루터를 후원하던 사람들은 고집스럽게도 한치도 양보하려고 들지 않았습니다. 가톨릭 성직자들은 울화통만 터뜨렸습니다. … 나는 루터가 어느정도 양보를 하고 교황과 제후들도 서로 화합하리라고 믿고 희망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비둘기나 미네르바의 올빼미(지혜를 상징 - 역주)가 우리 가운데 있기를! 루터는 병든 몸에다가 아주 독한 약을 투약한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그것이 효험을 보도록 허락해 주시기를 바랄 따름입니다."
다음 해에 그는 "나는 루터가 이 시대의 잘못을 고치라는 사명을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오늘날 당한 모든 문제가 어디에서 파생되었는가? 사제들의 공개적이고 뻔뻔스런 부도덕성과 신학자들의 오만함, 그리고 수도사들의 포악한 태도에서가 아닌가?"라고 썼다. 그런데 에라스무스는 분명하게 잘못으로 드러난 것은 없애라고 권유했지만, 반면에 해가 되지 않고 남겨질 수 있는 것은 유지시키고 동시에 신앙의 자유도 인정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권유했다. "수도사들과 신학자들이 그토록 오랫동안 세상을 속여오던 면죄부가 거짓임이 폭로되었다. 이제 성인들의 공덕을 믿지 않는 사람들로 하여금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기도하게 하라! 그리고 생활중에 그리스도를 본받고 성인들을 숭배하는 자들로부터 떠나게 하라. … 사람들로 하여금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들과 다투지 않고 연옥에 관해서는 자기 좋을대로 생각하게 하라.… 선행으로 의롭다함을 받는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지는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행함이 없는 믿음으로는 결코 구원받을 수 없다는 점은 모두가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형제단과 루터
사태는 아주 심각하게 전개되어 에라스무스의 이러한 온건한 조언으로 해결될 수는 없었다. 당시에 관용을 베풀 수 있다고 생각하던 사람은 거의 없었다. 또한 상황이 극단적으로 전개된 데 자극을 받은 루터가 이번에는 사건의 전개에 영향을 미쳤다. 초기에 로마 가톨릭의 경건한 수도사로 출발한 루터는 스타우피쯔와 만난 뒤, 성경을 자세히 읽음으로써 형제단 및 신비주의자들의 생각에 동조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제 로마 가톨릭과 충돌하게 되었을 때 여러 명의 독일 제후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옛날에 받은 교육을 회상하고 점차로 루터교회를 창설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변화는 그가 형제단으로부터 점차로 멀어지고 성경의 진리를 부활시킴과 동시에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물려받은 요소를 새로 생긴 루터교회에 도입함으로써 분명하게 드러났다.
형제단이 복음서를 강조한데 비해 루터는 사도 바울의 가르침에 중점을 두었다. 또한 형제단은 그리스도를 따르는데 있어서 균형잡힌 진리를 선포하였지만 그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교리를 매우 강조하였다. 사람에게 자유로운 의지가 없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그의 가르침은,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로운 행동이 복음의 일부라는 사실마저 무시할 정도로 중요하게 취급되었다. 세례로써 새로운 생명을 얻는다는 것과 유아에게 세례를 베푸는 관습은 로마교회로부터 물려받은 가르침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완전한 사역에 대한 믿음으로 개인적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성경의 가르침을 부활시키면서도 그는 신약성경의 가르침대로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구분되어 있어야 한다고는 가르치지 않았다. 대신 교회는 세상 속에 있으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는 사명을 부여받았다고 하였다. 그래서 그는 로마 가톨릭의 교구체제를 받아들여 각 교구로 하여금 관할지역을 맡도록 하였다. 그리고 루터 교회 안에는 많은 통치자들이 있었다. 이로 말미암아 교회와 국가가 연합해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됨으로써 이 새로운 복음적인 권위로부터 떨어져 나간 사람들을 벌주거나 회심시키는데 국가의 권력이 합법적인 수단으로 인정받았다. 드디어 1529년에 스페이어(Speyer)에서 개최된 의회에서 개혁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로마 가톨릭 측을 향하여 항의를 하게 되었는데 이 때문에 개혁주의자들에게 "프로테스탄트"라는 이름이 붙여지게 되었다. 1531년에는 스말칼드(Smalcald)에서 9명의 제후와 11개의 자유도시가 동맹을 결성하여 "프로테스탄트 동맹"이 생겨나게 되었다.
이러한 루터의 변모를 가까이에서 지켜보던 스타우피쯔는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지금 우리들 귀에는 많은 사람들이 입술로만 이야기하는 복음이 들리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복음을 따라 살도록 우리를 돕고 계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육신에 자유를 주기 위하여 복음을 오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도 한때는 거룩한 복음을 가르치는 선구자였기에 나의 청을 듣기를 바랍니다"
결국 그는 루터가 취한 노선과의 결별을 선언하면서 명목상의 그리스도인과 진실한 그리스도인을 다음과 같이 구분하였다.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가지면서도 생활에서는 그를 닮지 않는 것이 가능한 일이기는 하겠으나, 요즈음에는 이것이 유행이 되어왔다. 아, 원수들은 얼마나 간교한가! 아, 사람들은 얼마나 잘못된 길로 들어가고 있는가!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선행을 할 필요가 없다고 얘기하는 바보들을 보아라. 주님께서는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악한 영은, 육에 속한 그리스도인에게 선행이 없이도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으며, 바울도 그렇게 가르쳤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 말은 거짓이다. 바울이 실로 율법적인 행동과 의식적인 관습을 비난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때까지 사람들은 구원을 이루기 위해 두려움을 가지고 애써 왔다. 그리고 그는 악한 일을 생각하지 않았고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복종과 사랑과 믿음의 결과인 선행에 대해서는 칭찬만을 하였다. 그가 쓴 모든 서신서에는 선행의 필요성이 선언되고 설교되었다."
루터는 "복음은 그리스도에 대해 가르치고 있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지켜야 할 새로운 법을 주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위한 대속물로 자신을 드리기 위해 오셨다는 것을 바울로부터 배우라"고 말했다. 반면에 가톨릭 교회는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삶을 받아들이면서 그분의 내주하시는 도움으로 그분의 말씀과 모범을 따라 걷도록 계속 바라고 노력하는 사람만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고 거듭 가르쳐왔다.
루터는 오랫동안 아무도 건드리지 못한 가톨릭의 특권과 권한 남용에 도전하였고 이로써 종교개혁의 길을 트게 되었다. 그는 수많은 죄인들에게 그리스도를 소개하였다. 모든 사람은 자신 안에 어떠한 선한 것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반드시 사제나 성인, 교회, 성례의 도움이 없이 그리스도께 곧장 나아가도록 가르침을 받았다. 즉, 그분을 믿음으로써 그분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의 완전하신 사역에 기초를 둔 완전한 구원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루터가 루터교회를 세우게 되었을 때 말씀의 정도(正道)에 철두철미한 것은 아니었다. 어떤 점들은 개혁되기도 하였으나 아직도 과거의 가톨릭 교회와 유사한 측면도 많이 남아 있었다. 그의 인도를 따랐던 사람들은 루터가 성경에 충실하지 않은 것을 보고 과거대로 로마 가톨릭에 그대로 남아있기도 하였다. 누구든 두 체제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강요당했을 때 형제단에 속한 사람들은 몹시 실망하게 되었다. 이제 어느 측이든지 신앙문제를 무력을 사용하여 해결할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루터가 처음에 종교개혁을 일으켰을 때 그는 성경적인 교회형태가 어떠한지를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외부적인 상황변화로 인하여 교회는 믿는 자들의 독립적인 모임이라는 성경의 가르침을 저버리고 민족교회 내지 국가교회 체제를 선택하게 되었다. 이 두 가지의 교회형태 사이에는 서로 화합할 수 없는 차이점이 있었고 그로써 양자간의 갈등은 필연적이었다. 성경적인 교회에서는 침례와 성만찬이 교회를 세상으로부터 분리시켜주는 강(江)이었던데 비해 국가교회에서는 그것을 양자를 연결시켜주는 다리로 인식했다는 점에서 이에 대한 양측의 입장은 큰 차이가 났다. 국가교회에서는 유아세례와 성만찬을 베풀 때 당사자들이 개인적으로 신앙을 가지고 있는지의 여부를 따지지 않았다. 게다가 이러한 성사(聖事)를 주관하는 성직자가 권한을 남용함으로써 신앙과 양심의 문제에 있어 국가를 지배하게도 되었다. 그러할 때 교회의 자유는 억압되고 종교는 국가의 문제로 변형되어 버리게 된다. 한편 국가교회는 매우 관용적이어서 다양한 견해를 용납할 수도, 불신자들이 교회에 들어올 수도, 악한 행실을 용납하며 심지어 성직자들마저 불신앙을 표방할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국가교회는 힘이 있는 한, 신자들에게 직접 침례를 베풀거나 성만찬을 시행하려는 사람들은 용납하려고 하지 않았다. 근본적인 차이점은 의식적인 문제에 있었던게 아니라, 국가교회 밖에서 침례와 성만찬을 다루는 것은 국가교회의 기반을 허무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불완전한 개혁
루터는 남다른 추진력과 용기를 가지고 믿음으로 죄인이 개인적인 구원을 얻게 된다는 성경의 가르침을 밝히 드러내 주었었다. 그렇지만 교회에 관한 가르침을 비롯하여 모든 문제에 있어서 성경으로 돌아가도록 이끌지는 못하였다. 그는 "하나님께서는 억지로 하는 봉사를 원하지 않으신다"든지 "아무도 믿음을 강요할 수는 없다"고 말한 바도 있었다. 그리고 1526년에는 다음과 같은 글을 쓰기도 하였다.
"올바른 형태의 복음적인 의식은 오직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작정하고 손과 입으로 복음을 고백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드러날 수 있다. 그런 사람들은 한 집에 따로이 모여서 기도하고 성경을 읽고 침례를 주고 성례를 지키는 일은 물론이고 다른 모든 일에 있어서도 성경에 입각한 행동을 해야 한다. 만약 어떤 사람이 죄를 범한 사실이 알려지면, 그리스도의 말씀대로(마 18:15) 권고함으로써 행동을 고치게 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교회 밖으로 쫓아낼 수 있다. 또 바울서신에 보면(고후 9:1-12) 교회에서는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줄 연보를 거둘 수도 있었다. 꼭 훌륭한 성가대를 갖추고 성대한 찬양시간을 가질 필요는 없다.
그리고 간단하고 단순한 방법으로 침례나 성례를 시행하되 모든 것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사랑 안에서 행할 수 있다. 그러나 아직 나는 거기에 합당한 사람들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그러한 모임을 이룰 수는 없다. 하지만 내가 그것을 할 능력을 갖추고 그렇게 행동하는 것 외에 다른 대안이 없다면, 기꺼이 나에게 주어진 역할을 담당할 것이다. 그 때까지 나는 그리스도인들이 말씀을 열심히 취하여 말씀대로 살아가는 방법을 알 수 있기까지 사람들을 불러서 분발시키고 도우을 줄 것이다."
그런데 루터는 '올바른 사람들' 즉 '진실되고 경건하며 거룩한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이 자기 주위에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교회를 세우기로 하였으나 자기가 그렇게도 훌륭하게 그린 이상과는 배치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말았다. 그를 따르던 많은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그도 루터교회가 초선의 형태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는 그것을 '임시적'인 '바깥 뜰'이지 '성소'는 아니라고 하면서 계속해서 사람들을 훈계하고 경고하였다.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어떤 일을 하는지 정확하게 보고,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떠한 얘기를 하는지를 안다면 매우 실망할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을 속이고 있다. 처음에는 우리와 함께 일을 시작하고 기쁨으로 가르치던 사람들의 수가 지금보다 열배나 많았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굳게 서 있는 사람은 그 중의 십분의 일도 되지 않는다. 그들은 앵무새가 사람들의 얘기를 따라하듯이 말하는 것을 배우기는 하였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 속으로는 자기들이 얘기하는 바를 경험하지 못하였다. 그들은 예전의 모습대로 남아있으며 하나님께서 얼마나 진실하시고 진실하신지를 맛보지 못하고 느끼지를 못한다. 그들은 복음에 대해서 많은 것을 자랑하면서 열심히 추구하다가는 나중에는 시들해져 버린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기들의 욕심을 따라 좋은대로 행동함으로써 이전보다 형편이 나빠지고 다른 사람들보다 거칠고 뻔뻔스럽게 되었기 때문이다. 농부나 시민이나 귀족이나 모두가 가톨릭 교회 아래에 있을 때보다 더 거칠고 욕심이 많다."
그리고 루터는 다음과 같이 기도했다. "오! 하나님이시여, 우리가 이 가르침을 올바로 시행하기만 한다면, 지금 가톨릭의 성사를 받기 위해 가는 수천 명의 사람들이 불과 수백 명으로 줄어들 것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그렇게 되면 저주스런 법으로 세상을 압제하던 교황의 가증스런 죄악이 감하여지리이다. 또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모임을 이루어 우리가 처한 곳에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이교도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으리이다. 그때 우리는 불가능한 일을 행함으로써 믿지 않고 생명을 소유하지 않는 자들과 구별될 수 있으리이다."
그렇지만 교회가 일단 국가의 통제 아래 들어가게 되자 상황이 변경될 수 없었다. 루터는 자기가 세운 교회들이 성경의 가르침에 충실하도록 과감히 인도하지 못했다. 이후에 그는 종종 자기가 생각하던 바와는 달리 그리스도인의 자유가 억압되고 그리스도인의 모임이 독립성을 상실한데 대해 후회하곤 하였다.
<순례하는 교회 - 신약교회 원리에 충실한 교회들의 역사>(전도출판사) - E. H. 브로우드벤트 지음 -
--------------------------------------------------------------------------------
이그나티우스 로욜라와 예수회
루터가 교황의 교서를 불태우고 종교개혁을 시작하고 있을 때 프로테스탄티즘의 진로를 가로막고 반종교개혁의 기치를 들어 개혁의 분위기가 만연하던 넓은 지역을 가톨릭 교회로 되돌리려는 작업을 준비하고 있던 사람이 있었다. 이그나티우스 로욜라(Ignatius Loyola)가 바로 그 사람이다. 그는 1491년 스페인의 귀족가문에서 태어나서 페르디난드와 이사벨라의 궁정기사를 거친 후 군인이 되었다. 그러나 놀라운 용맹을 떨치던 그가 30세의 나이에 부상을 당하여 다리를 절게 되었다. 이로써 그의 삶은 일대 방향전환을 겪게 되었다. 오랜 투병생활을 하는 동안 그는 신비주의자들의 글을 읽고, 욕망에 따라 살던 이전 생활로부터 돌이켜 위대한 일을 하고 싶은 간절한 소망을 가지게 되었다. 이제는 이땅의 왕을 위한 봉사에서 군사적인 명예를 찾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군사로서 하나님을 위해 일하리라는 마음이 그의 속에서 일어났다. 그는 "오, 주님이시여, 저에게 당신을 찾는 길을 보여주십시오. 제가 구원의 길을 알 수만 있다면 충성스런 개처럼 따르겠나이다"라고 기도하였다.
오랜 갈등 끝에 그는 드디어 죄가 사해졌다는 확신을 가지고 마음의 평화를 찾고 육신의 세력으로부터 해방되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그 일을 불꽃처럼 생긴 바위로 가득찬 산봉우리에 위치한 그 유명한 몽트세라트(Montserratt)수도원에서 일어났다. 거기서 그는 밤새도록 참회를 하고는 오랜 동정녀 상 앞에서 그리스도와 동정녀를 위하여 헌신을 하겠다는 다짐을 한 것이다. 그리고는 자기가 입고 있던 옷을 벗어버리고 남루한 순교자의 옷을 걸친 후, 가까이 있던 도미니크단 수도원으로 달려갔다. 거기서 그는 신비주의자들이 행하던 대로 자신 안에 모든 것, 즉 생각이나 환상 그리고 외면적인 자세나 위치 등을 세밀하게 기록하고 염적인 황홀경을 발전시키는데 가장 유리한 방법을 찾아내었다. 나중에 큰 영향을 끼친 "영적 훈련"(Spiritual Exercises)이라는 책자도 여기에서 저술되었다.
알려진 바 대로 신비주의자들은 성직자의 간섭없이도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다고 가르침으로써 성직자들과 갈등을 빚어왔다. 로욜라도 이러한 의심을 받아 종교재판소나 도미니크단 수도원측에 의하여 여러번 감옥에 갇힌 적이 있었으나 그때마다 자신이 그런 사람이 아님을 증명하고 풀려났다. 이처럼 그도 처음에는 신비주의자들의 글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으나 점점 그 가르침과는 반대되는 체제를 발전시켰다. 그는 예수회의 구성원들에게 그리스도와 직접적인 교통을 하도록 가르치지 않고 자기 위의 한 사람에게 소속되게 해서 그에게 생활상의 모든 비밀을 털어놓게 하고 절대적인 충성을 바치도록 하였다. 그것은 각자 바로 위에 있는 상급자의 뜻에 복종하도록 만든 군대체제와 같았다. 심지어 아주 높은 직위에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다른 사람으로부터 행동이 감찰당하고 통제를 받았다. 이렇게 해서 같이 연구하고 여행하고 가르치며 자선행위를 하면서 그리고 비록 실패를 하기는 했지만 예루살렘으로 가려고 시도하고 교황을 알현하려는 노력을 하면서 로욜라 주위에는 일단의 사람들이 모이게 되었는데 그는 이 사람들로 1534년에 파리에서 "예수단"(Company of Jesus)이라는 단체를 조직하였다. 로욜라와 함께 여기에 소속된 또다른 여섯 명의 사람들은 청빈과 청결 그리고 선교활동을 실행할 것을 선언하였는데 그중에는 사비에르(Francis Xavier)도 있었다.
이 모임을 교황은 1540년에 "예수회"(Society of Jesus)라는 이름으로 인정하였다.
칼빈을 비롯한 다른 반대자들은 그 단체를 "제수이트"(Jesuit)라고 불렀다.
예수회는 가입자를 세심하게 선발하여 상급자에게 완전히 복종을 하도록 오랫동안 특수한 훈련을 시켜서 종교개혁 흐름을 저지시키고 많은 지역을 로마 가톨릭 측으로 되돌리는 '반종교개혁'을 가능하게 하였다. 그렇지만 그 세력이 급속도로 증대되었을 때 무리한 방법까지 사용함으로써 종교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내정까지 간섭을 당했던 여러 국가 사이에는 물론, 가톨릭 교회내에서조차 반대자가 생기게 되었다. 그래서 예수회의 역사는 매우 파란만장했다. 때로는 한 국가의 정책을 결정하는 데까지 나아갔다가 축출당하기도 하고, 활동이 금지되었다가 상황이 호전되어 다시 일어나기도 하였다. 쾰른의 선제후였던 비드(Hermann von Wied)가 가톨릭 종교개혁을 주창하고 종교개혁자들과 화합하려 하였을 때 그 시도는 독일의 예수회에서 배출된 유능한 인물인 카니시우스(Canisius)에 위해 좌절되었다. 또한 수많은 경우에 예수회의 활동으로 개혁운동이 억압되고 무력화되었으며 로마측의 지배권은 공고해졌다. 그리고 부지런하고 헌신된 예수회원들은 선교사로서 인도나 중국 그리고 아메리카 등지의 이교도 지역으로 파송되어 로마 가톨릭을 전파하기도 하였다.
<순례하는 교회 - 신약교회 원리에 충실한 교회들의 역사>(전도출판사) - E. H. 브로우드벤트 지음 -
--------------------------------------------------------------------------------
독자 의견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