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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종교개혁은 어떤 운동인가요?

반종교개혁은 어떤 운동인가요?
자료출처 http://ask.nate.com/qna/view.html?n=3386788
 
*forjesuschrist 님의 답변
반 종교개혁은 앞에서 설명한 님의 설명대로 가톨릭교회내 자정활동이기도 하지만,
개신교를 견제하기 위한 운동이기도 합니다.
또한, 가톨릭에서는 종교개혁을 종교분열로 보고 있기 때문에,
반 종교개혁은 개신교와의 재 결합을 뜻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반 종교개혁의 핵심세력들은 가톨릭의 내부개혁을 원하는 진보적인 지식인
들이었습니다.
자세히 설명하면,

1. 개신교와의 재 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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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1년 개신교와 로마 가톨릭은 독일 라티스본 - 라겐스부르크에서 재 결합을 모색하는 회의를
가졌습니다. 여기서 개신교와 가톨릭은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과, 참된 믿음은
실천하는 믿음이라는데 동의를 보았지만, 교황의 권위와 화체설(성만찬시 사용되는
빵과 포도주는 곧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설. 개신교의 성만찬관은 빵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몸을 상징한다는 상징설과 그리스도가 성만찬을 통해 임재한다는
임재설임)동의문제로 재결합은 실패했습니다.
 
2. 예수회 활동을 통한 내부개혁 및 교세확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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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회는 에스파냐의 이그나티우스 로욜라가 1521년 토마스 아 캠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를 읽고 감동받으면서, 1540년 결성한 종교단체입니다.
시토회, 프란시스회, 도미니크 회와 더불어 가톨릭의 중요한 교단들입니다.
이들 예수회는 가톨릭의 수준을 높이고, 개신교를 견제하기 위해 교육에 적극적이었습니다.
실제로 예수회 구성원들중에는 뛰어난 사상가들이 많았고, 1640년까지 500개의 학교, 신학교,
대학을 세웠습니다. 실제로 서강대학교는 예수회 한국 지부입니다.
이러한 예수회의 노력은 가톨릭의 수준을 높였으며, 귀족출신의 학생들을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
시켜 개신교의 교세확장을 견제했습니다.
그외 예수회는 가톨릭의 해외선교에 적극적이어서, 프란시스 사비에르의 경우 일본에서 선교활동
을 했으며, 예수회소속의 유식한 선교사들은 일본인들이 서양의 고급학문(라틴어 등의)들을 익히는
경로가 된 것은 물론, 일본에 가톨릭계 신학교가 세우기도 했습니다.
그외 일본 선교사인 세스페데스 가톨릭 신부가 임진왜란직후 한국에 와 있던 한국인들을
상대로 전도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해외선교는 개신교의 등장으로 교세가 축소되기 시작했을 가톨릭이 해외선교를 통해
교세를 확장하는 수단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외 예수회는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이 중, 남미 원주민들을 노예로 파는
노예무역을 하자, 소수지만 이에 반대하는 사회참여를 하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어서 콜롬비아에서 활동한 페드로 클라버 신부의 경우 아프리카 흑인들을 노예들을
교회내에서 일하게 하여 해방시켰습니다.
죽을 때 동료 신부들과 백인들의 무관심속에 외롭게 죽었지만 1854년 성인으로 추대됩니다.
페드로외에도 예수회소속 선교사들은 파라과이에서 노예제도에 맞서 투쟁하여, 1640년에는
무력으로 투쟁하기도 했습니다. 1731년에는 15만명을 해방시켰지만, 이마저도 1767년 에스파냐
에 의해 강제추방되어 1800년까지 파라과이에 가지 못했습니다.
제가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예수회가 개신교를 견제하는 반 종교개혁단체이기도 했지만,
노예들의 인권을 위해 투쟁하는 진보적인 단체이기도 했다는 걸 말하려는 것입니다.

3. 내부 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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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은 개신교의 등장으로 입지가 좁아지기 시작하자, 오스트리아 트렌트에서 모였습니다.
이를 트렌트 회의라고 하며, 1545-1563년까지 있었습니다.
회의에서는 개신교의 등장배경인 가톨릭의 세속화를 개혁했습니다.
즉, 가톨릭의 결혼금지를 강조하였고, 면죄부 판매를 금했습니다.
그외 교회의 직책을 축소하는 구조조정을 했지만, 개신교의 등장으로 가톨릭의 정체성에 혼란
이 생겼다는 판단 하에,
"성서와 교회의 전통은 동등한 권위가 있다. 미사는 라틴어로 진행되어야 한다. 신앙과 행함
모두 구원에 필요하다."는 결정을 내리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비성서적인 결정은 1960년대 이후, 폐지되었습니다.
라틴어 사용고집은 1965년 폐지되어, 가톨릭이 개신교와 더불어 성서번역선교를 하게 했으며,
신앙과 선행 모두 구원받는데 필요하다는 주장은 1999년 합동선언으로 폐지되었습니다.
가톨릭은 개신교와의
합동선언에서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으며, 선행은 믿음의 실천"이라고 선언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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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cabeo 님의 답변
예전에는 반종교개혁이라 불렀으나, 지금은 가톨릭 자정 운동이라고 부릅니다.
중세 후반기 부터 나오기 시작한 개혁안들이 다 실패하고 결국 교회 분열을 야기한 종교 개혁이 등장하자 이에 맞서 교회를 수호하고 교회를 정화하기 위해 한 일련의 행동들을 말합니다.

1. 예수회
에스파냐의 군인이었던 이냐시오 로욜라는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치료를 받던 중 회개하고, 예수회라는 수도회를 건립합니다.
군인이었던 건설자 탓에 수도회 조직인 군대를 닮아 있으며,
개신교의 학문으로 대항하자는 것이 목표입니다.
고로 이 수도회는 대학 교육에 상당한 신경을 씁니다. -서강대가 예수회 대학입니다.
이냐시오 로욜라, 프란치스코 샤베리오 등이 주 회원이며
이들은 학문 및 해외 선교에 나서 천주교의 교세를 넓힙니다.

하지만 지나치게 빠른 성장, 정치와의 유탹 등은 비판을 받았고, 해체되었다가 다시 재결합합니다.

2. 트리엔트 종교회의
교황청에서도 마침내 교회 개혁 의지를 선포하고 공의회를 소집합니다.
트리엔트 공의회
반대파들의 방해 공작을 뚫고 모인 이 자리는 십년이 넘게 열렸습니다.
그리하여 당시 까지 만연하던 천주교의 부패는 일소되었습니다.
허나, 교리적으로는 신교의 주장을 무조건 거부하여 교회 분열이 확정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우리가 아는 깨끗하고 엄격한 이미지의 천주교는 이 때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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