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롭 벨 이머징 교회

11. 도살장 종교?
 자료출처 http://blog.naver.com/thebloodofx/memo/20077075839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엡 1:7)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고후 5:21)
 
기독교 믿음의 핵심과 중심은 인류의 죄를 유일하게 대속할 수 있는 갈보리의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에 서 있다. 복음의 메시지는 예수님의 보혈을 토대로 한다. 성경은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말한다. 모든 사람은 날 때부터 죄성을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에 죄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따라서 영적 죽음의 형벌을 받아야 한다. 사탄은 복음의 메시지를 미워한다. 그는 복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다. 그의 계획은 인류가 복음을 이해하거나 믿지 못하도록 하여 영원히 자신과 함께 고통을 받게 하려는 것이다. 성경은 우리가 구원 받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죽음의 필요에 대하여 매우 분명하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가르침은 하나님을 피에 굶주린 미개인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믿는다. 이러한 믿음이 이머징 교회의 구조 속에 들어 있다.
 
비문명화된 야만성
 
만일 어떤 사람이 이머징 교회 지도자들이 십자가를 싫어한다고 말하면 이머징 교회 운동을 하는 많은 사람들은 맹렬하게 반대한다. 그들은 벌쩍 뛰며 “그들은 십자가를 좋아한다. 나는 그들이 예수님 및 주의 십자가에 대하여 말하는 것을 들었다. 그들은 십자가를 사랑한다고 말한다” 라고 대답한다.
 
몇몇 이머징 교회 지도자들은 그들이 십자가를 사랑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의 활동의 저변에는 다른 주제가 그들 사이에서 힘을 얻고 있다. 즉,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은 우리가 본받아야 할 희생과 섬김의 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인류의 죄를 위해 하나님의 아들을 흉악하게 죽게 한 사건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일 수 없다는 것이다. 사랑의 하나님은 결코 그럴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한 난폭한 행위가 기독교를 “도살장 종교”로 만든다는 것이다.
 
뉴욕시의 리버사이드(Riverside) 교회의 목사이며 자유주의 신학자인 해리 이머손 포스디크(Harry Emerson Fosdick: 1878-1969)는 “예수께서 우리의 죄악 때문에 대속적인 고난을 당하셨다”는 속죄의 교리를 “비문명화된 야만성”이라고 믿었다.
 
포스디크는 그의 책 성경의 현대적 사용 (The Modern Use of the Bible) 에서 말하길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섬김과 희생의 삶의 본으로 보아야 한다고 하였다. 십자가의 죽음을 “구약의 동물 제사”와 비교하거나 혹은 하나님께서 “사탄을 속이기 위한 하나님의 ‘경건한 속임수’로 만들면” 안된다는 것이다. 포스디크는 그의 책 친애하는 브라운 씨 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너무 많은 속죄의 이론들이 그리스도의 단 한번의 대제사장적 자기 희생에 의하여 온 세상을 구원하였다고 확신한다.

포스디크는 “아니다” 라는 대답으로 위의 언급을 끝 맺는다. 그는 “내 판단으로는 속죄에 대한 이러한 율법주의적 이론은 신학적인 불명예라고 본다”  라고 말하였다.
 
포스디크는 하나님께서 우리 대신에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죽게 하시기 위하여 그분을 보내셨다는 생각이 폭력적이고 피비린내나는 종교의 기반을 마련하였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속죄와 대속의 희생의 성경적 메시지를 거절하였다.
 
포스디크는 1925년부터 1946년까지 뉴욕시의 리버사이드 교회의 목사였다. 그가 이 세상을 떠난지 오래 되었지만 그의 사상은 여전히 그대로 남아서 이머징 교회에 스며들었다. 2006년 10월, 리버사이드 교회는 그들의 전임 목사를 기념하기 위해 제 5회 포스디크 집회를 열었다. 이 집회에 이머징 교회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두 명의 대표가 포스디크를 기념하는 메시지를 전했다. 바로 브라이언 맥클라렌과 토니 캠폴로였다. 앞으로 살펴 보겠지만 맥클라렌은 십자가에 관한 포스디크의 관점에 동조한다.
 
하나님에 대한 거짓 선전
 
브라이언 맥클라렌이 어떤 인터뷰에서 하나님께서 아들을 잔혹하게 죽도록 하기 위하여 보내었다는 생각은 “하나님에 대한 거짓 선전”이라고 말하였다:

가장 큰 문제 중에 하나는 지옥에 관한 전통적인 이해이다. 만일 십자가가 예수의 가르침이라면 나는 분명히, 확실히, 자신있게,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 나라들처럼 사람들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강요함으로 임하지 않고 고통과 자발적인 희생을 통하여 올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지옥의 교리가 이러한 하나님의 왕국에 관한 바른 가르침을 근본적으로 반대한다. 결국 하나님은 이 세상의 모든 왕국들처럼 강요와 폭력과 위협과 독재로 왕국을 세운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럴리 없다. 따라서 지옥의 존재를 지지하는 십자가의 가르침은 없다.  십자가는 하나님에 대한 거짓 선전이요 거의 정신 착란이다.

이 얼마나 한참 벗어난 생각이요 또한 기독교 믿음을 얼마나 강하게 공격하는 예외적인 발언인가? 만일 맥클라렌이 맞다면 그리스도의 속죄를 믿으며 살았던 모든 사람들이 다 속은 것이요 틀린 것이 된다. 맥클라렌이 재정립하는 그의 믿음은 성경을 왜곡하고 있으며 더 열악한 것은 그의 믿음은 하나님의 영감된 말씀이 말하는 것과 정면 대결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참으로 참람한 것이다! 맥클라렌은 또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어떤 유명한 기독교 지도자의 설교를 들었다. 나는 그의 명예를 손상시키고 싶지 않아서 그의 이름을 말하지는 않겠다. 그의 이름을 말하면 어떤 사람들이 그에게 대항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전통적인 가르침은 하나님은 하나님 스스로 하실 수 없는 일을 우리에게 하라고 부탁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람들을 용서하라고 부탁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용서하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이 용서하시려는 사람 대신에 다른 사람을 벌하지 않으신다면 용서하실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에게 이렇게 말하지 않으신다 - 네 아내를 용서하라. 그후 네 분을 풀기 위하여 개를 발로 차라. 하나님은 당신이 실제로 용서하길 부탁하신다. 그러나 아쉽게도 속죄가 제시하는 하나님은 용서를 하실 수 없는 하나님이다. 우리를 용서하시기 위해 누군가를 발로 차야 하는 하나님이다.

주의 보혈을 통한 그리스도의 속죄의 메시지를 거절하는 맥클라렌을 지지하는 성공회 사제인 알랜 존스의 말을 들어보자. 존스는 그의 책 재발상의 기독교 (Reimagining Christianity)에서 말하길 하나님은 예수의 십자가 상의 희생을 우리의 죄악을 위한 구속으로 간주되도록 뜻하신 적이 없다고 한다:

예수님의 죽음을 전우주적 구원의 행위로 보는 교회의 관점은 이제 끝나야 한다. 기독교의 믿음에 있어서 십자가는 재발상되어야 한다. 왜? 십자가의 속죄의 개념은 고통스런 사교이며 그 뒤에는 보복하는 하나님이 있기 때문이다.
 
정당한 비평가들은 예수의 십자가에서의 희생이 분노하신 하나님을 달래기 위한 것이라는 가르침을 비판한다. 이러한 악한 교훈이 십자가의 대리 형벌을 만들어 놓았다는 것이다.

브라이언 맥클라렌은 재발상 기독교 를 추천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존스는 새롭게 등장한 공인된 영성을 지니신 분으로서 기독교의 믿음을 재발상하는데 있어서 선구자이다. 그의 글은 내게 깊은 위로와 자극을 주었다.

그러한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
 
포스디크와 맥클라렌만이 하나님의 심판이 우리 대신에 예수 그리스도께 임하게 되었다는 진리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 이러한 거부는 다른 많은 사람들의 가르침 가운데 이미 퍼져있다. 1991년 윌리암 샤논(William Shannon: 카톨릭 수도사 및 신비주의 토마스 멀톤의 전기 작가)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족장들은 전형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이러한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노아의 하나님은 죄 가운에 깊이 빠진 인간들을 보며 그들을 창조하셨음을 후회하고 그들을 멸망시키기로 결정한 하나님이었다. 그는 자신을 향하여 불평하는 백성들에게 뱀을 보내어 물게 한 광야의 하나님이었다. 다윗의 하나님은 실제적으로 어마하게 많은 백성들을 죽여 그 수를 급격하게 줄인 하나님이요, … 그 하나님은 아들의 마지막 피까지 자아내는 하나님으로서 죄에 의하여 끓어오르는 자신의 의분을 잠재우는 하나님이다. 이 하나님은 은혜와 맹렬한 분노 가운데 그 기분이 수시로 우왕좌왕한다. … 이러한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른 말로 하면 포스디크, 맥클라렌, 샤논이 믿는 예수님은 우리의 삶의 본으로서 희생을 하신 분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죄에 대하여 심판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은 하나님으로서 적절하지 않다. 이렇게 속죄를 거부하는 자들에게 가장 큰 위협이 되는 존재는 성경을 심각하고 문자 그대로 취하는 자들이다. 포스디크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만일 당신이 근본주의 목사와 대화를 나누면 그는 의심할 여지없이 당신이 속죄의 ‘대속적’ 교리를 믿어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악 때문에 우리가 받아야 할 형벌을 대신 받으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신은 문명국에서 무고한 자가 다른 사람의 죄를 위해 의도적으로 벌을 받는 것을 상상할 수 있는가? … 대속의 속죄는 역사 속에서 여러 형벌 제도에 있어왔다. 그러나 이는 미문명화된 야만성이다. 이 세상의 그 어느 법정도 단 한 순간이라도 이러한 생각을 허용하지 않는다. 오직 미개한 신학만이 우리 주님의 죽음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삶과 죽음은 너무나 고결하기 때문에 결코 오해되어서는 안된다.

이러한 언급은 이머징 교회가 자신들도 이해하지 못하는 대속의 교리를 마꾸어 성경과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대항하는 조롱으로 어떻게 바꾸고 있는지에 대한 또 다른 완전한 예이다. 하나님의 방법은 살마의 방법이 아니다. 하나님의 방법을 인간의 이성으로 판단하는 것은 가소로운 것이다: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사 55:8-9).
 
이전에 카톨릭 사제였던 브렌난 맨닝(Brennan Manning)은 이머징 영성에 주요한 영향을 미쳐왔던 사람이다. 2003년에 그가 쓴 책 무엇보다도 (Above All) 을 보면, 그는 속죄에 관한 윌리암 샤논의 말을 거의 그대로 인용하고 있다:

은혜와 맹렬한 분노 사이에서 그 기분이 수시로 우왕좌왕하는 신… 아들이 마지막 피까지 자아내며 죄에 의하여 끓어오르는 자신의 의분을 잠재우는 신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계시된 하나님이 아니다. 만일 그가 예수의 하나님이 아니라면 그러한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

세상의 죄악을 위해 죽음
 
마르커스 보르그는 오레곤 주립 대학에서 종교 연구 분야의 100번째 석좌 교수이며 종교와 문화의 저명한 교수이다. 그는 예수와 부처, 우리가 알지 못했던 하나님, 처음으로 성경을 다시 읽기, 성경을 문자적으로 보지 말고 심각하게 보기 등의 여러 책들을 썼으며 강연을 하기도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를 이머징 교회 지도자로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사고는 이머징 교회 지도자들과 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왔다. 브라이언 맥클라렌은 그는 보르그를 “대단히 존경한다”고 말한다. 보르고와 맥클라렌은 함께 2006년 오레곤 포틀랜드의 영성 교류 센터에서 열린 여름 세미나 시리즈에서 참여하여 강연하였다. 롭 벨(Rob Bell)은 그의 유명한 책 벨벳 엘비스 에서 보르그를 언급하며 칭찬한다. 콜럼비아 신학교의 교수이며 리차드 포스터의 레노바레 영성 형성 스타디 바이블(Renovare Spiritual Formation Study Bible)에 기여한 사람들 중에 하나인 월터 브루그게만(Walter Brueggemann)은 보르그가 이머징 영성의 본질적인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마그커스 보르그는 기독교 믿음의 이머징 “새로운 패러다임”에 있어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보르그는 그의 책 우리가 알지 못했던 하나님(The God We Never Knew) 에서 고백하길 자신은 신학교에서 하나님과 성경과 기독교에 관한 관점이 바뀌게 되었다고 한다:

나는 성경이 신적인 산물이라는 인식을 버렸다. 나는 성경이 인간의 문화적 산물로서 두개의 고대 공동체, 즉 성경적 이스라엘과 초대 기독교의 산물임을 배웠다. 따라서 성경은 그들의 생각과 확신을 담아둔 것이지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온 것이거나 하나님의 직접적인 말씀도 아니다. … 나는 “신적인 계시” 및 “성경의 영감”이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던, 그 의미는 성경이 신적 권위의 신적 산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이러한 자세는 어떻게 보르그가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는지를 분명하게 설명한다:

예수는 거의 확실하게 동정녀로부터 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로 생각하지 않았으며 그의 목적이 세상의 죄악을 위하여 죽은 것으로 본 적이 없었다.

만일 보르그가 말한 것이 옳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그의 독생자를 보내셨다고 말하는 요한복음 3:16절을 버려야 한다. 또한 우리는 성경 전반에 걸쳐 뚜렷하게 드러나는 주제인 피의 제사를 걷어 치워야 한다. 그러나 구약 성경을 보면, 피의 제사는 너무나 분명하다: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제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레 17:11)
 
그러나 보르그는 이러한 내용을 거절한다:

부활의 중심적인 의미를 예수의 시체에 어떤 놀라운 일이 발생한 것으로 보는 것은 부활절 메시지의 핵심을 놓치는 것이며 그 사건을 사소하게 만드는 위험에 빠지는 것이다. 마치 우리의 죽음 후의 존재가 예수의 시체를 변화시켰던 하나님께 달린 것처럼 생각하며 부활절을 주로 사후 세계의 소망으로 연결시키는 것은 정치성이 짙은 바램으로서 부활의 사건을 죽음 후의 자신의 생존을 위한 사건으로 축소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 방식 배후에는 무엇이 있을까? 이러한 생각을 강조하는 뉴에이저의 주장을 들어보자:

예수는 역사적 인물로서 사람이 그리스도가 되신 분이다. 그리스도, 곧 그리스토스는 존재의 영원한 초월적 인격의 상태를 말한다. 예수는 자신 안에 실현된 이러한 높은 의식의 상태가 언제나 그의 것만이 될 것으로 말하지 않았다. 그는 우리에게 그를 예배하라고 부른 적도 없다. 오히려 그는 우리에게 그를 따르라고 불렀으며 그를 본으로 삼아 그에게 배우고 그의 발걸음을 따르라고 불렀다.

포스디크는 이 의견에 동조한다. 그가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삶과 죽음은 너무나 고결하기 때문에 결코 오해되어서는 안된다”라고 말할 때 그가 의미하는 바는 그리스도는 우리가 본 받아야 할 본일 뿐이지 우리의 죄악을 위한 흠없는 제물로서 우리의 찬양과 예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은 아니라는 것이다. 사탄은 처절할 정도로 하나님처럼 예배와 찬양을 받기를 원한다. 그는 예수의 죽음이 의도하는 모든 것을 미워한다. 육체로 오신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피로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들의 생명을 샀다.
 
성경은 말하길,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히 9:22)라고 하였고,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물로 드려 죄를 없이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히 9:26) 라고 한다. 당신은 속죄를 말하는 이러한 성경 구절들이 비논리적으로 들린다고 하여 거부하겠는가? 성경은 우리에게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성경이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자신을 드러내신 계시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성경은 우리의 최종 권위이다. 우리는 성경의 가르침의 진리를 고수해야 한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언하노니” (요일 4:10,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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