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가브란의 교회성장학에 대한 비판
맥가브란의 교회성장학에 대한 비판
고재수 교수(캐나다 개혁신학교)
자료출처 http://cafe.naver.com/calgaryreformed/2504
1. 도입
흔히들 교회성장하면 맥가브란이라는 이름을 먼저 떠올린다. 맥가브란은 풀러신학교 소속 선교대학교수로 재직하고 있었다. 그는 1970년에 이 교회성장 문제에 대해 교회성장학이란 책을 썼다. 10년 후인 1980년에는 이책의 개정판이 발간되었다. 맥가브란의 교회성장관은 상당한 영향을 미쳐왔다. 많은 선교사들이 맥가브란의 방법에 따라서 복음을 전하고 있다. 또한 현재 수많은 나라에서 자기들의 기독교회 상황을 이 교회성장의 원리에 따라 보고하고 있다. 이 원리에 따른 복음전도의 실제 결과에 대해서도 여러 책과 글에서 논의되고 있다. 그렇지만 지금은 이 교회성장 이론의 실제적 결과가 아닌 교회성장 이론의 교의학적 출발점들에 대해 논의하고자 한다. 이에 대해 신학적 물음을 제기하는 일은 참으로 필요한 일이다. 교회가 어떤 전도 방법을 쓰기 전에 그리고 어떤 전도방법을 쓰고 있는 동안에도 그 방법이 하나님이 계시하신 말씀에 따라 취한 방법인지의 여부를 물어보아야 한다.
2. 긍정적 평가
맥가브란의 이 책을 읽는 사람은 여러가지 좋은 아이디어를 그 책에서 얻을 수 있다. 특히 복음 전파에 대한 그의 열정을 이 책 전체에서 느낄 수 있다는 점은 참 좋은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의 책에서 우리가 동의할 수 있는 몇 가지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첫째로, 맥가브란은 어떤 사람이 가진 선교사에 대한 생각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선교사란 학교나 병원을 짓도록 도와주고 농부들에게 농사짓는 방법에 대해 충고하며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다' 이런 생각에 대해 맥가브란은 날카롭게 비판하는데 이것은 옳은 것이다. 어떤 신학자들은 선교사의 중요한 임무가 이 땅의 사회정의를 확립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사람들이 이렇게 복음을 받을 준비가 되었을 때 비로소 복음을 전할 수 있다고 한다.
어떤 신학자들은 전도하는 일을 전혀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전도란 전도를 받는 사람이 속한 고유한 교육이나 문화적 배경에서 그들을 격리시키는 것이며 자기 친척들에 의해 여러 문제들을 야기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전도하는 일을 중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예를 들어 암스텔담 자유대학의 베셀스 교수) 이같은 신학적 정황 가운데서 맥가브란이 복음 전하는 것을 첫째되는 임무로 강조한 것은 선교의 중요한 출발점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사회적 불의를 반대해야 한다고 가르치지만 이런 사실 때문에 우리의 가장 중요한 임무인 하나님이 에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신 은혜를 전하는 일을 중단한다면 그것은 안되는 일이다. 사실 복음의 전도와 믿음의 결과로 사회 불의는 기독교인에게서부터 없어져야 한다. 그리고 복음 그 자체가 불의를 가장 근본적으로 반대한다. 우리는 맥가브란의 입장과 같이 복음 전하는 일의 중요성을 견지해야 한다.
둘째로, 맥가브란은 복음을 전하는 것은 설득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이생각도 중요한 것이다. 물론 선교사는 사람들로 하여금 억지로 예수를 믿게하려 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복음을 전하는 것은 어떤것을 제공하는 것과는 전적으로 다르다. 예를 들어 누구에게 '사과 드세요' 하고 말하는 것과 '예수님을 믿으세요' 라고 말하는 것은 성격이 완전히 다른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사과는 받지 않아도 별 문제가 되지 않지만 에수님의 은혜는 꼭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믿음과 회개의 명령을 포함하는 것이다. 믿으은 우리에게 명령으로 주어진 것이며(요일3:3) 복음을 듣고서 믿지 않는 것은 불순종이다(행14:2, 19:9)
그래서 신약에는 설득한다는 개념이 여러군데 나온다. 사도 바울은 그의 전도 사역에 대해 이렇게 썼다. '우리가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을 권하노라'(고후5:11) 여기서 권한다는 말은 사람들이 복음을 받도록 전도자가 애를 쓴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을 전할 때 복음을 단순히 흥미있는 이론으로 제시할 것이 아니라 꼭 필요한 생명의 말씀으로 제시해야 한다. 예수님 외에는 구원으로 인도하는 다른 길이 없기 때문에(예를 들어 요14:6, 행4:12) 우리는 그들에게 예수께서 이루신 구원을 받아들이라고 설득해야만 한다.
셋째로, 맥가브란은 교회의 위치를 올바르게 강조한다. 선교사들은 종종 교회가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맥가브란은 신자들이 그리스도안에 즉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일부가 되어야 함을 주장한다. 선교사들은 종종 사람이 구원만 얻으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자주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교회를 무시하는 상황 가운데서 맥가브란이 교회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일은 좋은 것이다.
이러한 교회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시를 고려해 볼 때 옳은 일이다. 신약에서 볼 때 교회는 예수께서 열두제자를 세울 때부터(막3:16) 열두 기초석이 있고 그 위에 어린양의 열두 사도의 이름이 있는 새 예루살렘까지(계21:14) 중심된 역할을 한다. 하나님께서 전도를 통해 하나님의 왕국을 세우신다고 말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히 말할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전도를 통하여 당신의 교회를 세우신다는 사실이다(엡2:19-22)
넷째로, 맥가브란은 어떤 사람이 기독신자가 되었을 때 교회는 그 초신자를 위해 더 많이 도와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맥가브란은 그것을 'folding and feeding' 이라고 하는데 교회가 그들을 한 우리안의 양떼로 보고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점 역시 중요하다 우리가 어떤 사람으로 하여금 예수 믿는 자가 되도록 애를 쓰고서 그 사람이 교회의 한 구성원이 되었을 때는 그를 위해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은 좋지 않다. 왜냐하면 그 초신자는 특별한 돌봄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이 사실에 대해 두가지 이유를 들 수 있다. 첫째로 그 사람은 신앙생활에서 신자들이 하나님을 어떻게 섬겨야 하는지를 아직 잘 모른다. 그래서 에수께서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전도의 대 위임령을 내릴 때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하셨을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고 하셨던 것이다. 모든 교인들이 다 하나님의 뜻을 차츰 더 잘 이해하고 배워야 하는 것처럼 새 교인들도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게 되도록 특별한 보살핌을 받아야 한다. 둘째 이유는 어떤 사람이 이제 교회에 속하게 되었다고 해서 사단이 그 사람을 유혹하는 일을 그만두지는 않기 때문이다. 사단은 교회의 약한 부분을 잘 알고 있으며 이 초신자들이 일반적으로 사단에게 쉽게 속는 편이다(마12:43이하, 13:19이하) 그래서 맥가브린이 올바로 지적한 것처럼 교회는 이 새신자들을 계속 말씀으로 먹여야 한다.
3. 비판할 요소들
지금까지는 맥가브란의 좋은 점 네가지를 말했지만, 교회성장이라는 맥가브란의 본질적인 학설에 대해서는 아직 언급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 위의 해석은 이 네가지 긍정적인 면들을 그의 이론이라는 문맥에서 뽑아 낸 채 평가한 것이었다.
이제부터는 본론인 교회성장이라는 주제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하겠다. 우리는 그의 주장에 대해 평가를 해야 하는데, 그는 이 평가에 대해 좀 이상한 말을 했다. 그는 자기의 교회성장의 사상이 여러교파 즉 침례교, 칼빈주의, 순복음 등으로부터 비판을 받았다고 한다. 이런 비판에 대한 대답으로서 그는 교회성장 원리들은 더 성경적이고 신학적인 것이므로 교파마다 이 원리들에 각자의 교리를 알맞게 첨가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교회가 이 작업을 잘 했느냐의 여부는 교회가 크게 성장했느냐의 여부로 증명된다는 것이다.
위의 이 주장은 이상하다. 그렇게 보는 이유는 어떤 주장이 옳은 것인지 아닌지를 그것의 성공여부에 따라 판단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잘못된 생각이 그런 성공을 초래할 수도 있고 옳은 생각이 아주 적은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이 교회성장 이론이 옳은 것인지의 여부는 그 학설에 따른 실제적인 성공의 문제가 아니라 그 학설이 성경적인 것인가 하는 문제에 따라 결정되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그의 교회성장 이론을 성경과 비교해야 한다. 여기서는 그것을 교의학적인 측면에서 다루도록 하겠는데 특히 세가지 측면, 즉 인간론, 신론, 교회론에 있어서 이 학설이 성경적인 것인지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인간론
맥가브린은 인간에 대해 특별한 용어를 만들어서 많이 사용하였다. 그것은 찾아낼 수 있는 사람, 얻을수 있는 사람, 복음을 받을 수 있는 사람 등이다. 맥가브린은 이 용어들을 사용하면서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맥가브란이 의미하는 것은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찾을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은 아니다. 그의 설명은 이렇다.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받고 싶어하지 않지만 동시에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받고 싶어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류의 큰 무리들이 복음을 듣고 그것을 기쁘게 받도록 그들의 생활을 인도하신다. 그래서 우리 신자들은 바로 그런 사람들을 찾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서 우리는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찾아낼 수 있는 사람’ 이므로 그들로 하여금 믿도록 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가 나가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찾아낼 수 있는 많은 사람들을 버리는 것이 되고 그것은 우리의 책임이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음을 받도록 일하셨는데도 우리가 그들을 위해 애를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상이 맥가브란의 생각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찾아낼 수 있는 사람’ 이라는 말을 쓸 수 있는가? 어떤 때는 많은 무리들이 예수 믿는 사람으로 되는 것을 볼수 있지만 이 사실이 ‘찾아 낼 수 있는 사람’ 이라는 말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오직 성경만이 인간이 복음을 받을 수 있고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노력을 할 수 있느냐의 문제를 결정할 것이다. 성경은 이에 대해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구약에 나오는 인간에 대한 가르침을 애써 모을 필요는 없다. 사도 바울이 이미 우리를 위해서 이러한 일을 해 두었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3장에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자도 없고(13절)...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18절)라고 썼다. 이와같이 구약을 인용하면서 사도바울은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 없다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 없다는 이 사실이 신약시대에 와서는 즉 복음을 모든 족속에게 전달해야할 이 시대에 와서는 바뀌어졌는가? 아니다. 사도바울이 구약의 계시를 인용하지 않고서 자기 자신의 권위로 쓸 때에도 신약시대에 관하여 비스산 말을 썼다. 그는 에베소서를 쓸 때 에베소 교인들이 전에는 전적으로 타락했던 사람들이었다고 했다. ‘그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며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엡2:2,3) 그렇다면 그들이 전에는 즉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과 똑같이 타락한 사람이었다. 이 때문에 사도 바울은 그들에 대하여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 라는 말을 사용했다(엡2:1) 선교사가 아무리 열심히 외친다 하더라도 죽은 사람은 들을 능력이 없으며 그들을 가리켜 ‘찾아낼 수 있는 사람’ 이라고 부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맥가브란은 ‘찾아낼 수 있는 사람’ ‘믿을 수 있는 사람’ ‘복음을 받을 수 있는 사람’ 등에 대해 말하면서 이 하나님의 말씀에 나오는 인간에 대한 원리적인 계시를 무시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받도록 그들을 준비하지 않는가? 맥가브란은 하나님의 햇빛과 비를 주심, 보호, 그리고 성령이 사람들을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과 하나님의 인도가 사람들을 준비시키지 않았는가?
물론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햇빛과 비를 주시고 하나님의 섭리가 모든 사람들에게 골고루 미친다는 사실은 성경이 밝혀주고 있지만(시19편, 행14:15-17, 17:26, 롬1:18등) 하나님이 주신 이 선물과 섭리가 복음을 받기 위한 준비라는 사실은 성경 어디에서도 말하고 있지 않다. 도리어 사도 바울은 사람들이 그들 자신의 타락을 인하여 진리를 막는 사람이 되었다고 가르치고 있다(롬1:18)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원하심 능력과 신성을 당신의 만드신 만물을 통해 분명히 보여주심으로 그들은 하나님을 알게 되었으나 그들은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고 했다. (롬1:20,23) 사람들은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일하시는 것을 통하여 하나님을 잘 알면서도 하나님을 거절한다.
우리는 복음을 전할 때 바로 이런 사람만을 만날 것이다. 그들은 악한 마음을 가진 사람일 뿐만 아니라 우리가 복음을 전하기 전에 하나님을 이미 거절한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전도할 때 어떻게 ‘찾아낼 수 있는 사람’을 만날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생각은 성경적 근거가 없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전도할 때 복음을 받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만나리라는 사실을 성경 어디에서도 약속하시지 않았다. 복음은 ‘찾아낼 수 있는 사람’ 이 아니라 ‘하나님을 거절한 사람들’ 에게 전해져야 하는 것이다.
신론
우리는 사도신경을 고백할 때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요며" 라고 한다. 교회는 하나님이 전능하신 분임을 고백한다. 그것은 모든 시대를 통털어 이어져 내려오는 교회의 고백이다. 하나님이 전능하신 분이라는 사실은 신자의 삶에 핵심적인 것이며, 이 사실은 전도하는 일에도 지극히 중요한 것이다. 우리는 맥가브란의 『교회성장학』에서 하나님이 전능하신 신이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다른 사상도 찾아볼 수 있다.
맥가브란은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받기 원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우연한 사실이 아니고 하나님의 역사라고 말한 후 이렇게 쓰고 있다. "미미한 교회 성장만이 계속된다면 얻을 수 있는 사람들을 얻지 못하게 될 것이다. 만일 선교회들과 교회들이 미미한 성장에 만족하면서 계속 존재한다면 천국 잔치를 위한 하나님의 준비는 수포로 돌아갈지도 모른다"
이 인용문에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 대한 맥가브란의 관점이 밝히 드러난다. 그것은 전도 사역에서 하나님은 준비하는 분이시고 우리 인간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믿게 만드는 일을 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준비하시지만 우리가 일을 잘 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준비하신 것은 실패한 것이라는 말이 된다. 맥가브란이 이렇게 말한다면, 하나님이 우리 전도하는 사람들에게 의지할 수 밖에 없는 분으로 나타나게 된다.
맥가브란이 이렇게 생각하는 사실은 다른 곳에 나오는 그의 예를 통하여 확증될 수 있다. 그는 어떤 불타는 집에서 잠자고 있는 사람에 대해 생각해 보자고 한다. 맥가브란은 만약 우리가 그 집에 들어갔을 때 그 사람을 억지로 밖으로 나가게 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 물론 그 사람이 그 불타는 집에서 그대로 있겠다고 고집한다면 그대로 머물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사람을 설득해서 밖으로 나가게 해야 한다. 이처럼 우리 신자들은 예수를 믿도록 애쓰고 노력해야 한다고 맥가브란은 말한다.
그렇지만 이 예화는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맥가브란이 제시한 예화로 말하자면 집안에 있는 사람이 그 집이 불타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고 하더라도 아무도 그 불타는 집에서 나가고 싶어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불타는 상태를 느끼지 못한다. 아니면 나가려고 하지만 구원으로 인도하는 유일한 문으로 나가기를 바라지 않는다. 즉 우리가 아무리 그들이 긴박한 상황 가운데 있다고 설득한다 하더라도 아무도 하나님께 나아와서 구원을 받고 싶어하지 않을 수도 있다. 우리 신자들은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강요해서 믿는 자가 되도록 할 수는 없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역이 우리의 설득력에 달린 것에 불과하다면 아무도 신자가 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성경은 밝히 보여주고 있다. 고린도전서 3:5이하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뇨? 저희는 주께서 각각 주신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 사도 바울은 하나님과 인간의 사역을 다음과 같이 구분했다. 즉 인간, 아볼로나 바울은 심고 물을 주는 사람이며,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시는 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준비하시고 우리들이 믿게 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우리가 준비하고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대로 사람들을 믿게 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사실이 사도행전 16장에 기록되어 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할 때 14절에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들었는데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 고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이 마음을 열어 주시지 않는다면 사람은 복음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고 또 하나님을 믿게 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결국 맥가브란은 인간의 마음 문을 여는 성령님의 사역을 무시한 셈이다. 또 사도행전 13:48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하나님께서 많은 사람들이 영생을 받도록 작정하셨고 그 사람들을 그것을 위해 준비하셨고 복음을 받게 하시고 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이 복음을 받도록 준비하셨을 때 틀림없이 어떤 신자로 하여금 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실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일은 하나님께서 확실히 끝내실 것이다.
그렇지만 맥가브란은 하나님께서 우리 사람들을 의지하고 계신 분인 것처럼 말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하나님은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 우리 신자들을 의지하고 즉 그들을 필요로 하고 또 하나님을 믿는 일에 있어서도 불신자의 동의를 필요로 하는 분이시라는 인상을 준다. 그래서 맥가브란은 하나님이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이 근본적인 기독교 고백을 어떻게 지속할 수 있을까 하고 묻지 않을 수 없다.
교회론
교회라는 것에 대해 맥가브란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이 문제에 대한 대답을 찾을 수 없다. 맥가브란은 그의 책 제목을 『교회성장학』이라고 붙였지만 그 책에서 교회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는 설명하지 않고 있다. 단지 그의 책에서는 교회에 대한 간단한 정의로 '세례받은 신자들의 모임' 이라는 것 외에 아무것도 찾아볼 수 없다.
그렇다면 맥가브란은 무엇을 교회라고 부르는가? 이 문제에는 쉽게 답을 낼 수 있다. 자기 스스로 교회라고 부르는 모든 모임을 맥가브란은 교회라고 불렀다. 맥가브란은 주로 신교 교회에 대해 언급하고 있으며 그 교파들을 구분하지는 않았다. 교회가 자유주의이거나 전통교회이든지 간에 성장해야 한다고 말한다. 어떤 교회이든 간에 교회가 성장하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 또 어떤 지방에서 한 교파가 성장할 수 있으면 어느 교파이든지 간에 거기서 다 성장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말 역시 모든 교회가 근본적으로 동일하다는 생각에 근거한 것이다.
위에서 우리는 맥가브란이 교회를 말할 때 아무 구분도 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받았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맥가브란은 교회들 사이에 어떤 구분을 하고 있다. "우리 구주께서 피로 값주고 사신 교회는 사람을 하나님과 화목시키도록 애쓰는 구원받은 사람들로 구성된다. 그리스도를 전하지 않고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도록 애를 쓰지 않는 교회는 어떤 종교적인 단체는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리스도의 몸은 될 수 없다" 그래서 맥가브란의 생각에 의하면 교회의 특징은 하나밖에 없다. 즉 복음을 전하는 행동만이 교회의 특징인 것이다. 그런데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계시를 전하지 않고 다른 복음을 전할 때에도 맥가브란은 교회라는 말을 썼다.
하지만 성경에 보면 교회는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유지해야 한다고 되어 있다. 교회에 대해 많이 언급한 에베소서로 예를 들어보자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엡2:19-22)
이 성경 본문의 주제는 교회이다. 사도 바울은 여기서 교회성장에 대해 말한다. 21절에 나오는 "주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라는 말은 헬라어로서는 '주 안에서 성전으로 성장한다' 는 말이다. 이 성장해 나가는 교회에는 어떤 특징이 있는가? 20절에 의하면 그것은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움을 입는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퉁이돌이 되신 것이다. 교회는 사도들과 (신약)선지자들이 예수님에 대해 증언하는 것을 다 받아야 하고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대신하여 돌아가셔서 우리에게 구원을 주신 우리의 구주요 왕으로 예수님을 받아 들여야만 한다. 그렇게 해야만 교회가 예수님을 믿게 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다 진리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엡4:1-5, 골1:23, 요17:20, 10:4, 14 참고)
그렇지만 우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예수님을 우리의 구주로 받아 들이지 않는 교회가 많이 있음을 알고 있다. 이런 교회가 성장할 때 우리는 '이것이 교회성장이다' 고 쉽게 말할 수 있을까? 또 이런 교회성장을 통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을까? 맥가브란은 교회라는 말을 너무 넓은 범위로 사용한다. 교회의 정의를 정확하게 내리지 않고서는 교회성장에 대해서도 잘 말할 수 없다. 전도에 대해 생각할 때 우리는 하나님 말씀에 대한 내용의 충실을 아주 중요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만 예수님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언급하기로 하고 이제 이 부분의 결론을 내려야겠다.
지금까지 우리는 맥가브란의 인간론, 신론, 교회론을 연구하고 그것을 성경적 교리와 비교했다. 인간론에서 맥가브란은 인간의 전적타락을 무시했고, 신론에서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무시했으며, 교회론에서는 교회의 기초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무시했다. 신학적으로 볼 때 맥가브란의 교회성장 이론은 이 세가지 원칙 위에 세워진 것이다. 그런고로 우리는 맥가브란의 교회성장 이론에는 성경적 기초가 없다는 것 외에 다른 결론을 내릴 수가 없다. 이 교회성장의 이론은 우리 전도의 배경으로 사용될 수 없는 것이다.
또 다른 고찰
이러한 결론은 전도에서 어떤 실제적인 결과를 낳는가? 세가지를 언급하고자 한다. 첫째로, 왜 우리가 전도하려고 애를 써야 하는가? 맥가브란은 이에 대해 이렇게 대답했다. 하나님께서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받도록 준비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전도해야 한다. 그렇지만 성경 어디에 하나님이 80년대에 많은 사람들을 준비하시리라는 약속이 나오는가? 하나님은 어디에서도 이것을 약속하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우리가 오늘날 복음을 전할 때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지 않으셨다.
그러면 우리가 전도하지 않아도 괜찮은가? 물론 그렇지 않다. 그러나 우리가 전도해야 하는 까닭은 큰 수확에 대한 약속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28:19에서 제자들과 모든 교회에게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들 삼으라" 고 명령하셨다.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기 때문에 예수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우리를 의롭다 하기 위하여 부활하셨다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많은 사람들이 들으려 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어떤 전도자들과 선교사들이 여러 해 동안 일하고서도 단지 몇 사람만이 개종하는 경우가 있다. 물론 전도를 위해 우리는 열심히 일해야 하지만 바울 사도의 말과 같이 "우리가 심고 물은 주지만 오직 하나님만이 자라게 하시는 분이다"(고전3:6)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없는 것, 즉 개종시키는 일을 할 필요조차 없다. 이런 것은 하나님께 맡겨야만 한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즉 복음을 전하는 일은 꼭 해야 한다.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우리는 복음을 전하고 사람들이 믿도록 애를 써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게서 우리의 일을 당신의 뜻대로 사용하실 것이다. 어떤 때는 하나님께서 많은 사람들을 믿게 하실 것이고 어떤 때는 소수의 사람만 믿게 하실 것이다. 또 어떤 때에는 하나님이 사람을 즉각 개종토록 하실 것이고 어떤 때에는 그 개종을 20년 후에 이루기도 하실 것이다. 그렇지만 그 결과가 어떠하든지 간에 우리는 우리의 할 바 복음 전하는 일을 계속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것을 우리에게 명령하셨기 때문이다. 우리의 전도의 이유는 예수님의 명령이다.
다음으로는, 우리가 어디서 복음을 전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맥가브란의 대답은 복음을 받도록 준비된 족속들과 그룹들을 우리가 잘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족속들과 그룹들을 찾기 위한 여러 기준을 만들었고 복음이 가장 잘 전해질 수 있는 곳부터 선교사들이 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개종은 개인적인 것이다. 어떤 족속이나 그룹의 생활방식을 바꾸는 것과 회개하는 것은 다르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성령을 통해서 사람들이 각각 개인적으로 믿게 하실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누구를 믿게 하실 것인지 우리는 미리 알 수 없다. 그래서 선교사들이 자기의 생각에 많은 수확이 있으리라고 기대하면서 어떤 선교지를 택해서 갔지만 그곳에서도 결과가 적을 수 있다. 우리는 어떤 곳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될지 미리 알지 못하기 때문에 위와 같은 조건은 어디에서 우리가 복음을 전할 것인가 하는데 대한 조건이 될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로 갈 수 있는가? 그 문제는 일반적인 것이지만 선교지를 선택하는 일반적인 규칙을 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실 우리에게는 이런 일반적인 대답이 필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때그때마다 전도자가 어디로 가야 할 것인지를 밝히 보이시기 때문이다. 때때로 전도자는 어떤 특별한 곳에 갈 수 있는지 의뢰를 받는다. 이런 초청을 받을 때 그는 기도하면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의논하고 결정해야 한다. 어떤 경우에는 그곳에 선교사가 없는 것이 선교사를 보내는 이유가 될 수도 있다. 또 다른 경우에는 정부의 허락을 받지 못해서 예상된 선교지로 못가고 생각지 않은 선교지로 가게 되기도 한다. 그것도 하나님이 인도하신 결과이다. 또는 자기 나라가 어떤 나라와 특별한 관계를 맺었다는 사실도 선교사를 보낼 근거가 될 수 있다. 또 선교사들끼리도 서로 다르다. 어떤 사람은 도시에서 더 잘 사역할 수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시골에서 더욱 효과적으로 일할 수도 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여러 가지 방식으로 선교계획을 인도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도자와 산교사를 어디로 보내야 하는지 비교적 쉽게 결정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무엇을 위해 우리는 전도자와 선교사를 보내는가? 맥가브란의 대답으로는 새로운 교회를 세우도록 그들을 보낸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렇게 말할 때 우리는 목적과 결과를 혼동하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교회가 생겨날지 미리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전도자는 교회가 생겨나도록 애를 써야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를 주실지의 여부는 모른다.
그렇다면 복음을 전하는 자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다시 한번 예수님이 주신 전도의 대위임령을 생각해 보자.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 이 명령을 들은 제자들은 무엇을 했는가? 사도 요한이 이것을 우리에게 썼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요일1:3) 그들은 예수에 대해 우리가 알아야 할 모든 것을 전했다. 이렇게 해서 그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에게 하나님 및 예수님과의 관계가 생겨났던 것이다.
그러면 오늘의 전도자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정말 그들은 성실하게 하나님의 말씀 전하는 일을 해야 한다. 사람들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도록 진실한 복음을 전하는 것만이 전도자와 선교사의 할 일인 것이다. 그래서 복음의 내용이 아주 중요한 것이다. 맥가브란이 그의 교회론에서 이 중요한 복음의 내용을 무시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복음이 아닌 인간적인 복음을 전할 때 아마 사람들은 그것을 좋아할 것이고 교회가 빨리 세워질 수도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결코 내용을 바꾸거나 약화시켜서는 안된다. 전도자의 첫째 임무는 단순히 교회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아무 손상없이 바르게 전하는 것이다. 이렇게 할 때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교회는 올바로 서게 될 것이다. 교회의 성장 여부는 우리의 영역이 아니다. 어떤 경우에는 교회가 빨리 성장하고 또 어떤 경우에는 빨리 성장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선교사는 주님의 말씀에 충실한 사역자가 되어야 한다. 복음을 전할 때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충실하게 전하는 것은 양적인 교회성장보다 더 중요한 것이다. 전도하는 일은 우리의 책임이고 교회의 성장은 하나님의 사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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