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랄프 윈터 '내부자 운동' 비판 (2)

랄프 윈터의 ‘내부자 운동’을 비판한다 (2)
혼합주의나 옅은 믿음을 은폐하는 수단으로 합리화시키는 운동
자료출처 http://blog.naver.com/holyhoon71/80031418197
입력 : 2006년 02월 22일 (수) 03:03:58 / 최종편집 : 2006년 02월 22일 (수) 18:18:18 [조회수 : 315] 정양호 ( paulchung
요즘 국내외 선교 일각에서 ‘내부자 운동’(Insider Movement)에 대한 논의가 그 어느 때보다 뜨거운 감자로 떠오르고 있다. 하지만 내부자 운동의 정의에서부터 일관된 초점이 없고 의견이 분분하다. 국내 전방개척선교단체에서 내놓은 자료에는 ‘다른 종교의 울타리 안에서 어떤 식으로든 그 내부에 머무른 채 예수께 향하는 운동’이라고 애매하게 정의했다. 일반적으로 내부자 운동이란 자신이 속한 종교·세계관·관습· 이방문화를 떠나지 않고도 진실로 예수를 따르는 운동으로 이해한다.

내부자 운동을 지지하는 자들은 기존의 자기 종교적인 표현들을 계속 사용하고 그들의 사원에 머물러 있을 수 있다는 성경적인 모델로 열왕기하 5장에 등장하는 ‘나아만의 이야기’를 거론한다.

죄에 대한 신양 양심의 가책은 정상적인 신앙의 발로이다
“오직 한 가지 일이 있사오니 여호와께서 당신의 종을 사유하시기를 원하나이다 곧 내 주인께서 림몬의 당에 들어가 거기서 숭배하며 내 손을 의지하시매 내가 림몬의 당에서 몸을 굽히오니 내가 림몬의 당에서 몸을 굽힐 때에 여호와께서 이 일에 대하여 당신의 종을 사유하시기를 원하나이다. 엘리사가 가로되 너는 평안히 가라. 저가 엘리사를 떠나 조금 진행하니라.” (왕상 5장 18~19절)

하나님의 특별한 만져주심을 체험한 나아만의 신앙 양심은 즉각 하나님만 섬기겠다는 신앙고백과 동시에 하나님 중심의 신앙생활을 함으로써 당해야 하는 고난이 그를 압박해옴을 고백하고 상담을 요청한다.
곧 18절에 “오직 한 가지 일이 있사오니 여호와께서 당신의 종을 사유하시기를 원하나이다 곧 내 주인께서 림몬의 당에 들어가 거기서 숭배하며 내 손을 의지하시매 내가 림몬의 당에서 몸을 굽히오니 내가 림몬의 당에서 몸을 굽힐 때에 여호와께서 이 일에 대하여 당신의 종을 사유하시기를 원하나이다.”
 
거듭난 자라면 누구든지 죄를 지을 때 오는 양심의 가책을 받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신앙인이요 용서를 구하는 것이 거듭난 자의 바른 자세이다. 전혀 이상한 현상이 아니다.

멀리 선교지가 아니더라도 우리 주변에서도 ‘오직 한 가지 일’이라는 이름표을 단 많은 예를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이는 현실적인 신앙문제이다. 특히 주초문제, 주일성수문제로 직장에서 갈등하고, 신축공사 현장에서 벌어지는 미신행위들, 명절 때 가족의 제사 지내는 문제로 갈등하는 신자들의 상황 등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일제 때 한국교회의 많은 무리들 가운데 신사참배는 우상숭배가 아니라 국민의례라고 하면서 교묘히 죄를 정당화시켰다. 그렇다면 신사참배도 한국판 내부자 운동으로 볼 때 잘 되었던 내부자 운동으로 볼 것인가?

초신자라 할 수 있는 나아만 장군도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나님 앞에서 이미 저질러온 죄와 앞으로 다가올 죄악의 압력 즉, 이렇게 하자니 하나님께 죄를 짓게 되고, 저렇게 하자니 세상의 주인을 거역하게 되는 상황이었다(세상의 왕을 기쁘시게 할거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인가?(행 4:19)). 오직 하나님만 섬겨야 하는데 문화적·정치적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자신의 나약함 대해 정직하게 용서를 구하였다.

아마도 첩첩 산중으로 꽉 막혀 숨막힐 듯한 상황 속에 사도 바울처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하며 죄의 고통과 현실의 암담함에 울부짖으며 괴로워하고 아파했을 그의 모습을 가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평안히 가라는 의미는 ‘내부자 운동’과 별개이다
나아만의 두 번째 요구는 우리가 다루는 유대교가 아닌 다른 종교 가운데에 머무른 채, 내부자 운동의 가능성에 대한 성경적 모델이 있는가 하는 질문과 직접 관련된다고 할 수 있다. 나아만은 엘리사에게 자신이 앗시리아에 돌아가면 자신의 왕을 따라 림몬의 당에 들어가서 거기에 절할 것인데, 그것을 용서할 것을 요청한다.
이에 엘리사의 반응은 어떠한가? “평안히 가라”(Go in peace)고 한 것이 사죄의 요구에 대한 답변이다. 여기서 참 하나님을 발견하고 믿게 되었지만, 극단적인 현실 상황이나 인간의 나약성 때문에 부득이 자신이 처한 종교생활과 관습에서 헤어 나올 수 없는 진솔한 고뇌를 발견한다.

나아만이 처한 상황은 죤트라비스의 ‘C1 to C6 spectrum’의 분류를 적용한다면, C4(무슬림 권에서 예수신자로 무슬림으로 보지 않음) 단계를 지나 C5(자신들을 무슬림인데 예수를 믿는 신자, 또는 선교사가 전략적으로 전도하기 위해 무슬림이 되는 경우) 상황이라 할 만하다.

신앙을 고백한 순간부터 신앙은 성장하고, 성장에 따른 열매가 있기 마련이다. 나아만은 어떤 면에서 아주 어려운 상황에서 하나님의 특별 섭리로 태어난 신자라 할 수 있다. 감당할 만한 실력도 없는 어린 신자에게 술과 담배를 당장 끊어라, 주일 성수하는 직장으로 옮겨라 혹은 찬양대·주일학교 교사 등 봉사를 하라고 요구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결국 “평안히 가라”는 인사는 이방종교를 떠나지 않고 하나님을 섬겨도 괜찮다는 이른바 내부자 운동을 허용한 것으로 볼 수 없다. 이 인사는 신앙의 난제여서 대답하기 곤란하니 그냥 가라는 뜻인지, 하나님이 당신의 사정을 이해하실 것이니 염려 말라는 뜻인지 명확하지는 않다. 하지만 축복의 인사 한마디로 대답을 대신하며 떠나보내야만 하는 나아만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엘리야는 마치 어린 교인들을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하는 목자의 심정이었을 것이다. 그런 엘리야의 심정이 어린 자식을 걱정하는 부모의 심정으로, 죄인을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우리 예수님의 모습으로 다가오는 것은 왜일까.

간혹 신앙생활 출발부터 모든 것을 정리하고 죽을 각오를 하는 신자들도 있지만, 어린아이의 특권인양 똥오줌을 아무데나 싸는 사람들도 있다. 어른에게는 아무 것도 아닌데 어린아이에게는 걱정거리가 되기도 한다. 부모는 어린아이의 철없는 행동을 한시적(限時的)으로 는 용인하지만, 성장을 해도 계속 그런 철없는 행동을 반복한다면 마침내 그를 낳은 부모에게 짐이 되고 말 것이다.

나아만의 이야기를 다 알 수 없다. 하지만 예수님의 언급에서 보면(눅 4:27), 특별 섭리로 부름 받은 그는 이방종교의 틀 때문에 그의 신앙생활이 순탄치 않았을 것이다. C5를 지나 C6(핍박 받는 지하신자 또는 순교자)에 이르는 신앙인이 되었는지 알 길이 없다. 아마 택자를 향한 하나님의 특별 섭리로 순조롭게 피하는 길을 만났든지, 아니면 다니엘처럼 불같은 시험을 통과했을지 모른다. 다만 하나님의 은혜로 그의 신앙이 성장해서 ‘보이는’ 왕보다는 ‘보이지 아니하는’ 왕을 기쁘시게 하는 자리까지 이르렀을 것으로 짐작할 뿐이다.
 

교회운동은 거추장스런 서구풍(form)이 아니라 성경에서 출발했다
이런 관점에서, 랄프 윈터가 주창하는 내부자 운동을 말할 때 소위 무슬림 예수신자·힌두 예수신자·부다 예수신자·카톨릭 예수신자·정교회 예수신자·몰몬교 예수신자·여호와의증인 예수신자 등으로 불리는 사례들 속에 본질적으로 하나님 외에 다른 우상을 배격해야만 하는 신앙 양심의 가책을 떠올리지 않는 데 큰 문제가 있다.
다른 이야기이지만, 항간에 북한의 봉수교회의 진위(眞僞)가 논의된 바 있었다. 김 씨를 살아 있는 신으로 받들면서 다른 한편으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한다. 어쨌든 이런 교회도 중요한 내부자 운동이라고 관련지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한편 관제된 봉수교회와 목숨을 걸고 신앙을 지키기 위해 지하로 들어간 지하교인들, 순교자들과 같은 질과 레벨로 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북한의 지하교회에서 울부짖는 기도를 하나님 외에 누가 알아주겠는가? 아마 봉수교회 교인들은 지하교인들을 보고 “당신들은 땅속에서 마음이라도 편했겠지만 우리들은 마음에도 없는 절을 하며 신앙을 지키느라고 당신들보다 맘고생이 더 심했다”고 큰소리칠지도 모르는 현실을 일제시대를 지나온 한국교회는 이미 경험했다.

G. Cowin(SIM-USA)은 ‘전방개척선교’(Mission Frontiers,vol.28,No.1)의 지상논쟁에서 내부자 운동의 어떤 내용들이 분명히 크게 잘못 인도하고 있다고 랄프 윈터의 이 운동을 신랄하게 공박하였다(Some of content seemed highly misleading or clearly wrong on the subject of Insider Movements). 또한 그는 오늘날 선교 필드 경험이 많은 선교 지도자들은 진실한 그리스도인도 무슬림·힌두교·불교인이라고 실제로 응답할 수 있다는 이 발상을 거부할 것이라고 하였다.

이 내부자 운동은 기본적으로 모슬렘권 선교필드에 초점이 맞춰진 맞춤전략의 하나로 계발된 아이디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운동이 기독교의 정체성을 짓밟으면서까지 선교의 상황화를 추구한다면 본질과 수단을 혼동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 운동이 윈터 자신도 우려했듯이, 혼합주의나 옅은 믿음을 은폐하는 수단으로 합리화시킴으로, 전투하는 지상교회의 순교신앙을 욕되게 하고 복음과 거리가 먼 이단까지 정통성을 부여해줄 수 있다. 그러하기에 극히 위험하고 비복음적·비신학적 사상으로 경계하는 것이다.

이 운동은 2000년간 진행되어온 교회운동이 마치 거추장스런 서구풍(Western Form)인양 동일시함으로 현대 선교 필드의 여기저기에서 설 자리를 잃고 있는 서구(미국)선교의 돌파구를 찾고자 하는 노력의 하나로 엿보인다. 하지만 내부자 운동 같은 “교회 없는 기교”(Churchless Christianity) 운동이 새로운 대안인 것처럼 무분별하게 떠벌리는 것은 선교 전략에 크게 혼란을 가져올 뿐만 아니라, 마침내 세계선교의 역량을 무력화시키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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