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급 대중목회자와 미국의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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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제 이 A급 대중목회자들에 대해, 좀 더 깊이 들어가 볼 생각이다. 물론, 신학을 하는 전문가가 아닌 만큼, 그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지만, 그러나 오히려 이것이 이런 글을 쓰는 데는 장점인 면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나라에서 신학을 하면서 이런 작업을 수행하기란, 여러 불이익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다. 그만큼 이 나라에서의 신학은, 교단 정치, 그 권력 안에 안주하거나 오히려 기생해 온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당장, 이 대중목회자들의 영향력 아래 있는 대학 강단에서 쫓겨나거나 밥 그릇을 잃을 일을 자청할 신학자가 몇이나 있을 것인가. 이런 현실이라면, 그들은 이 땅의 교회가 망하면, 더불어 망할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다. 어쩌면, 이 대중목회자들로 인해, 교회가 유명해지고 대형화되면서, 이들로선 여러 모로 유익했을 것이다. 그런 바람은 그들의 일자리며, 여러 곳에 강의를 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측면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 사회의 심각성도, 바로 이 대중목회자들이 노정하는 것과 다를 게 없다는데 있을 것이다. 이 신학자들이, 과연 이 땅에 전해지는 복음을 어떻게 바라보며 느끼는가. 그들 자신은, 어떤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서 있는가. 미국이나 유럽 유수의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이가 상당수인, 그들이 오늘 날 한국 교회의 현실을 어떻게 진단하는가. 얼마 전 한 기독교 잡지는, 이들 신학자들에 의한 이 나라의 대표적인 A급 대중목회자들의 설교 비평을 시도한 적이 있었다. 역시 그 비평은 일정 수준을 넘지 못했다. 장,단점을 적당히 지적하는 식의, 일종의 양비론적 시각이었다. 이건, 이들 대중목회자의 정체며 문제성을 오히려 흐릴 위험성이 있다.
나는 신학이 이래선 안 된다고 본다. 칼 바르트나, 불트만을 비롯, 요즘 유행하는 현대신학에 이르기까지 그 명석한 해석이며, 비판하기를 즐기는, 이 나라의 신학자들을, 나는 솔직히 밥 벌어먹기에 충실한 이 분야 지식인들로 밖에 보지 않는다. 그러나 신학이 이렇게 될 때, 일반 지식 사회 보다 그 양상이 훨씬 나쁘며, 심각하다는 걸 그들이 더 잘 알 것이다. 그들은, 왜 그 신학의 거성(巨星)들이 그런 신학을 하였는지, 그 실존적 물음을 자신에게 치열하게 던지지 않는다. 적어도 그들 신학자들은, 그 시대, 복음과 신학의 위기 앞에서 온 정열을 바쳐, 그 것을 지키고자 하였다. 아니, 인간들로 인해 잘못 해석되거나 타락해버린 복음이며, 신학을 회복시키고자 하였다. 1918년, 자펜빌의 조그만 목사관에서 청년 바르트가 왜 로마서 주석을 쓸 수밖에 없었던가. 그 시대의 복음이며, 신학은 어떠하였던가.
이 나라 교회의 현실은 어떠한가. 교회 안의 물신 숭배, 성공 지상주의, 사대주의적 전쟁 지지, 온갖 탐욕과 부패. 이들 신학자들이 속한 교단의, 소위 성직자란 자들의 이런저런 선거를 보라. 총회장 선거에서는 10당 8락이라고 하여, 10억 쓰면 당선되고 8억 쓰면 떨어진다는 이야기가 공공연한 비밀이라고 한다. 일반 사회 보다 더한 이런 시궁창에, 결코 하나님이 계시지 않으며, 이미 거기에 심판이 있다는 신학을, 그들은 용기 있게 수행하지 않는다. 가소롭게도, 이들이 여러 현대 신학을 비판적으로 입에 올리며, 대중목회자들 처럼 팔아먹는데 여념이 없다.
사실, 이 나라의 신학이 이 지경이 아닌가. 여기에서, 신학자는 하나님을 향해, 자신을 향해 어떤 고뇌에 찬, 분노에 찬 물음을 던져야 하는가. 나는 그런 신학자를 보고 싶다. 만약 그런 신학자들이 있었다면, 이런 대중목회자들이 하나님의 능력 있는 종인 양 교회의 머리 위에 앉아 군림하는 비극은 없었을 것이며, 나 같은 이가, 이런 작업을 감행하기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A급 대중목회자들이 노정하는 여러 문제들을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기 위해서도, 앞서 언급한 그 미국의 신학을 좀 더 파고들 필요성이 있겠다. 이라크 전쟁 이후, 세계의 양심적인 기독교인들은 미국 부시 대통령이 보수적인 감리교도라는데 주목하며, 당혹해 한다. 그는 39살 때인 1985년에 하나님의 존재를 느끼고 받아들이는 격렬한 정신적 체험을 한 후 술을 끊고 방탕한 생활에서 벗어나 성경 공부에 열심일 만큼 신앙생활을 해 온 정치인이라는 걸, 이제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부시는 이라크 전쟁을 선과 악의 싸움이라고 확신에 차 주장하며, 단지 미국의 대통령이 아닌, 기독교인으로서의 이미지를 부각시키려 한다. 마치 이 선과 악의 전쟁을 주관하는 하나님의 대리자 같다.
9.11 테러 직후 부시는 자신을 지탱해 주고 위기 극복의 거대한 과업을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불어넣어 준 것이 바로 신앙이었다고 밝혔다. 또한, 테러의 위험에 맞서 나라를 이끄는 것이 신이 내게 맡긴 임무라고 믿었다고 말했다. 어쨌든, 후세인의 폭정, 이슬람 국가인 이라크는, 인간의 존엄과 자유,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서도, 이 전쟁은 필요한 전쟁이라고 보는 기독교인들이 많다. 한국 보수 교회의 목사, 교인들도 대체로 그렇다. 이 선한 전쟁은, 구약성서의 히브리 민족의 전쟁에서 유래한다. 미국적 민주주의의 이식은, 곧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 선한 전쟁이 초래하는 또 다른 악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거나, 하나님을 향해 기도하지 않는다. 이라크 포로들을 학대한, 미군들의 행위가 전 세계인의 분노를 산 게 엊그제인데,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전쟁 지휘관인 제임스 메티스 미 해병대 전투개발사령부 사령관은, 한 공개 토론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불의의 세력과) 사실 싸우는 것은 무척 재미있다. 사람을 쏘는 것은 재미있으며, 솔직히 나는 싸우는 일을 좋아한다' 하긴, 미국인들이 존경해마지 않는 노벨 평화상 수상자이자 26대 대통령인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친구에게 이렇게 썼다. '진실로 확신하건대... 나는 거의 어떤 전쟁이라도 환영할 것이네. 왜냐하면 이 나라는 전쟁을 필요로 한다고 보기 때문일세.'
이라크를 침략한 진의가 무엇이든, 그들은 자기들 식의 매우 편리한 신의 뜻과 그 해답을 가지고 있으며, 자신들이 퍼붓는 포탄에 죽어가는 그 영혼들, 생명 하나하나가, ‘천하 보다 귀하다'는 예수의 복음과는 너무나 멀리 있음에도, 이미 그 것을 심각한 죄악이라 보지 않는다. 여기에는 자신들이야말로 하나님의 선한 백성이며, 이 정의의 전쟁을 위해선 그 정도는 각오해야 한다는, 미국식 기독교에 바탕한 민족주의의 우월감이 배어있다.
그러나 여기엔 이미 초월자로서의 신은 존재할 공간이 없다. 아니, 있더라도 그들 식의 아주 편협하거나 이기적인 신이 있다. <블로백>의 저자인 찰머스 존슨은, 부시의 이라크 전쟁에 대해 '그는 석유를 통제할 실제적인 필요를 포착했으며 부시 행정부는 이를 위해서라면 디까지라도 가려 한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메시아적 열광과 융합했다. 그는 미국이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나라라고 믿는다. 그는 제국을 정당화하기 위해 신학적인 용어를 사용하는 것을 꺼리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에라스무스는 전쟁을 이렇게 묘사한다. '그 보다 더 사악하고, 그 보다 더 비참하고, 그 보다 더 심하게 파괴적이고, 그 보다 더 교묘하게 집요하고, 그 보다 더 역겨운 것은 없다'
어쩌면 부시의 이라크 전쟁이야말로, 내가 말하고자 하는 그 '미국의 신학'의 본질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 준다고 하겠다. 21세기인 오늘, 부시는 19세기의 전쟁이 필요하다는 신념(?)을 가진 시어도어 루스벨트조차 내세우지 않은, 하나님의 이름을 버젓이 팔며, 선과 악의 싸움인 양 인류를 기만한다.
그런 부시가 기후변화협약(UNFCCC)에 따른 도쿄의정서 비준을 거부한다. 미국은 전 세계 이산화탄소 배출량의 23.7%를 차지하는, 가장 책임이 무거운 나라다. 헌데, 자국의 경제적 부담을 이유로, 인류의 재앙 앞에서, 자신들의 책임이 가장 큰 이런 국제 협약에, 부시며 그 부유한 나라의 기독교인들은 아주 비성서적이며 무책임하기 짝이 없는 자세를 취한다. 자신들이 누리는 부며, 눈앞의 이익을 위해, 그들은 '평화와 사랑의 공동체'를 지향해야 하는 기본적인 기독교적 윤리며 양심을 내팽개친다.
어디 이 뿐인가. 포괄적 핵실험 금지조약(CTBT), 구소련과 맺은 요격 미사일 개발 금지 조약(ABM), 국제 형사 재판소(ICC) 설치 조약, 생화학무기 금지 협정, 고문 방지 협약, 소형 무기 국제 거래 제한 협약 등을 잇따라 탈퇴, 거부 또는 폐기하는 걸 서슴지 않고 있다. 이는 그들이 철저히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신의 이름을 팔고 있음을 뜻한다. 이런 위선과 기만을, 하나님이 용서할 것인가. 아니, 그들은 자신들의 탐욕과 이기적 욕망조차 신의 뜻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만큼 오만하며, 그들의 기독교며, 신학이 갈 때까지 가버렸다는 뜻일 것이다.
그렇다고, 이런 미국 보수 기독교계의 현실에 대해 걱정하는 그 나라의 또 다른 기독교인들이 있다는 걸 모르지 않지만, 그러나 분명한 건 미국 안의 소위 주류 기독교(신)복음주의, (근본주의)가 타락하였으며, 그 것은 본질에 있어 중세 교회와 다를 게 없는 그 변형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학교에서 백악관까지 영향력 있는 모든 중심에 신의 원칙과 신의 인물을 회복' 시키려 한다. 이들은 이라크 침략을 기독교적으로 뒷받침하는 근거로 종말론과 천년왕국설을 이용했다. 사담 후세인은 적그리스도로, 미국은 영웅적으로 최후의 결전을 수행하고 하나님 왕국을 준비하는 정의의 사도인 것이다. 부시는 자신이 신의 의지를 알고 있으며, 신은 이라크의 정권 교체를 하려는 자신의 결정을 인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들은, 그로 인해 초래되는 악에 대해선 하나님이 인정할 것인가 안 할 것인가 말하지도 않는다. 더욱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한 전쟁이라는 사실을 끝까지 인정하지도 않고 은폐하려 한다. 그러면서도, 기독교 신앙이 가능한 게 그들의 신학이며, 오늘 날 그 '미국의 신학'의 현주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미국 기독교 우파의 대표적인 인물들이라 할 수 있는 제리 팔월과 팻 로버트슨은 9.11테러가 일어난 직후 '자유주의적(liberal)인 시민 자유 단체들, 페미니스트, 동성애자 그리고 낙태 찬성론자들이 이에 대한 부분적인 책임이 있다.... 왜냐하면 그들의 행동은 하느님의 분노를 미국으로 돌려놓았기 때문이다' 라고 말해 물의를 빚었다. 도무지 상식 밖의 발언이, 보수 기독교계의 저명한 인사들의 입에서 나온다. 미국 기독교 연맹 회장이기도 한 로버트슨의 정치적인 발언은 계속되었다.
'수 천 만 명에 이르는 미국 기독교 근본주의 세력은 친 이스라엘 정책을 고수하고 있는 부시 대통령을 압도적으로 지지하고 있다. 부시 대통령이 예루살렘을 포기할 경우, 그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고 제3의 정당을 창당할 것이다' '2004년 대선에서 부시 대통령이 압도적 표차로 승리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 충실한 기도생활을 하는 부시 대통령은 하나님의 축복 아래 선택된 후보다' '북한과 이란의 폭정체제에 대해 침묵으로 용인해선 안된다... (한국)전쟁 후 우리가 한국을 건설했다. 미국이 없었다면 지금처럼 크고 번영하는 경제 강국이 되지 못했을 것이므로 우리는 한국에 대해 북한에 대한 원조와 편의, 핵개발 비용 등의 제공을 중단하라고 요구해야 한다'
나는 이들이 악을 일삼는 독재 국가를 비판할 수 있으며, 기독교인이 공의를 위해 힘쓰는 건 그 신앙적 양심에 따른 거라고 믿는다. 그런데 이들은 친미 성향의 이슬람 독재 국가나 다른 정권들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이 것은 공평하지도 않을뿐더러, 오히려 더 나쁜 것이다. 이들의 모습을 보면, 놀랍게도 일란성 쌍둥이처럼 연상 작용되어 떠오르는 게 있다. 바로 이 나라의 보수 우익 교회들, 시청 앞 광장에서 북한 김정일에 극렬한 증오심을 드러내며, 성조기를 흔들며 부시를 적극 지지하는 인사들의 면면이다. 그렇지만 이런 자리에 나서지 않는 점잖을 빼는 대중목회자들이야말로 이들을 떠받치는 힘이며, 사실 미국의 기독교 우파와 한국의 보수 우익 교회들은, 그 '미국의 신학'을 공유한 한 통속이다.
이들은 '은혜의 나라' 와 그 '베품받은 나라'의 지도적 보수 기독교도들로 끈끈한 인맥을 형성하고 있다.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이 대중목회자들 상당수가, 미국에서 그 신학을 배웠다. 그러나, 미국 기독교 우파는 그들의 신학, 그들의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점에서 주체적이지만, 한국의 보수 기독교는 신학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철저히 그 아류며 사대주의적이라는 점에서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성직자라는 자들이, 온 세계가 부시의 이라크 침략 전쟁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비판하는 상황에서, 이 나라 수도 한 복판에서 성조기를 흔들며 부시를 옹호하는 극우적 당파성을 시위를 하는 건, 바로 천박한 사대주의적 근성이며, 그 아류로서의 신학에서 가능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듯 주체적이지 못한 신학, 또는 사대주의적 근성이 기독교 복음이며 그 성도의 모습일 수 있는가. 오직 하나님을 믿으며, 그 천국 백성으로 살아가는 성도는 모든 것에서 자유하며 진실 되게 행한다는 점에서, 오히려 세상을 굽게 하는 속물이 다된, 타락한 영혼들과는 분명 다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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