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신부가 말하는 C.S.루이스의 천주교 개종
천주교 신부가 말하는 C.S.루이스의 천주교 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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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신부가 말하는 C.S.루이스의 천주교 개종
M. 피오트로프스키 신부
“우리는 하느님에게서 나왔다.”
버나드 나탄손 박사가 하느님께의 믿음에 이르게 된 길은 가시밭길이었다.
“나는 영적인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나는 지상적이고 육적인 것만을 동경했다. 나의 목표들은 모조리 구체적이고 손에 잡히는 감각적인 것들이었다. 당장에 현금으로 바꿀 수 있는 것들이었다. 경직된 유대인 무신론자이며 피상적인 유대인이었던 나는 눈에 보이지 않고 뜬구름 잡는 것 같은 모든 것을 경멸했다.”
1978년에서 1988년까지의 기간은 그에게 특별히 힘든 시간이었다. 매우 고통스런 방법으로 자기 삶의 짐을 체험하는 시간이었다.
“나는 매일 새벽 네다섯 시 사이에 일어나 어둠 속을 응시하면서 배심원과 판사들이 나에게 무죄 판결을 내리는 장면을 상상하곤 했다. 그러나 그 희망으로 기도한 적은 없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흐른 뒤 희망이 상상으로 끝나고 나면 나는 불을 켜고 죄를 주제로 쓴 문학서를 펼쳤다. 성 아우구스티노, 도스토예프스키, 폴틸리히, 키에르 케고르, 니부르 그리고 루이스 멈포드의 글과 왈도 프랑크의 고백에 나오는 구절까지 읽고 또 읽었다.”
너무 절망한 나머지 그는 자살을 생각하기도 했다. 자신의 손에서 생명을 빼앗긴 수천 명의 무죄한 아이들에 대한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을 에워싸는 정신적인 고통과 절망감을 약물이나 알코올 또는 자기 최면술과 신경정신과 상담을 통해 벗어나려고 애썼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러면서 그는 생명 운동에 깊이 참여했다. 강연과 책과 정치적 활동도 동원했다. 하지만 하느님께 대한 신앙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의식적으로 멀리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낙태 시술 병원 앞에서 수백 명의 경찰관들에 의해 둘러싸인 채 낙태 반대 집회를 열고 있는 사람들을 보게 되었다. 그들은 큰 소리나 폭력을 동원하지 않았다. 오로지 조용히 기도에만 몰두했다. 기도하는 그들의 얼굴에서는 진실한 사랑의 빛이 흘렀다. 그들은 잠시도 쉬지 않고 기도에 몰두했으며 절대적 비폭력의 원칙을 지켰다. 그것은 그에게 감동과 놀라움을 선물했다.
“그날 나는 그들의 순수한 사랑과 기도에 놀랐다. 그들은 태어나지 않은 아이들을 위해 기도했고, 불안에 휩싸인 임신 여성들을 위해 기도했으며, 의사와 간호사들을 위해 기도했다. 그들은 심지어 자신들을 에워싸고 있는 경찰관들과 언론 매체를 위해서도 기도했다. 그들은 서로를 위해서도 기도했다. 하지만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결코 기도하지 않았다. 그런 그들을 지켜보면서 나는 자문했다. 어떻게 이 사람들은 말도 못하고 볼 수도 없고 자신들에게 고맙다는 인사조차도 할 수 없는 누군가를 위해 기도할 수 있단 말인가?”
그날 그런 체험 이후 버나드 나탄손 박사는 생애 처음으로 하느님이란 존재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그때 이후로 나는 하느님에 대한 생각과 친해지기 시작했다. 어떤 문제를 통해서 나에게 구원과 자비의 길을 보여주려 했던 하느님을 자주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그때껏 내가 굳게 매달려 있었던 18세기 철학과 이별을 고했다. 갑자가 나의 과거는 죄와 멸망의 더러운 늪이 되었다. 그런 생각은 나 자신을 가장 사악한 범죄자로 고발했다. 그러나 동시에, 마치 기적처럼, 나의 죄 때문에 누군가가 2000년 전에 돌아가셨다는 사실은 나에게 희미하게나 희망의 불꽃을 던져주었다.”
그는 하느님을 찾기 위해 영적인 여행을 계속했다. 그는 말콤 머저리지, 헨리 뉴먼 추기경, 그레이엄 그린, C. S. 루이스, 워커 퍼시 등의 위대한 가톨릭 개종자들의 전기를 매우 열심히 읽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눈물을 흘렸다고 그는 고백했다.
“하느님이 아니었다면 나는 멸망으로 떨어져야 마땅했다. 그분을 찾기 위해서 온 세상 곳곳을 돌아다니는 것이 나의 운명이었다. 그러나 이제 나는 더할 수 없는 강한 원의로 그분의 옷자락을 붙잡고 있다. 그러면서 나는 의대 지도교수이며 학창시절 나의 영웅이었던 칼 스턴 교수를 떠올리게 되었으며 그가 자기 동생에게 썼던 편지글도 새로이 다가왔다. ‘그 사실에 대해서 의심할 바가 없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께로 달려간다. 우리는 하느님에게서 나왔다. 그러나 그분은 언제나 사물의 한가운데에 계신다.’”
버나드는 생명 운동가들이 자신을 위해서 기도했다는 사실을 확신했다. 그의 내면에서 부드럽고 자연스런 방법으로 영적인 탈바꿈이 일어났으며 그것은 그에게 내적인 홀가분함과 평온함을 선물했다. 그는 매주 규칙적으로 존 맥클로스키 신부와 만나면서 그의 영적 지도를 받으며 신앙의 길로 인도되었다.
1996년 12월 9일 뉴욕에 있는 성 페트릭 대성당에서 버나드는 존 오코너 추기경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그의 유대인 친구들은 버나드의 결정을 받아들였다.
“이제 나는 그리스도를 받아 들였다. 이것은 나에게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나는 유대인의 문화와 전통 속에서 성장하고 살았으며 나는 유대 민족의 일원이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변하지 않을 것이며 나는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이 시기부터 그는 규칙적으로 미사에 참례했으며, 고해성사를 받았고, 깊은 기도의 삶을 살았다. 학자로서 그는 자신의 책과 영화와 세미나를 통해 모든 생명의 주인은 거룩한 하느님이시며, 그래서 아무도 생명을 함부로 없앨 수 있는 권리를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주장했다. 이로써 전 세계에서 낙태의 최고 옹호론자였던 사람이며, “뻣뻣한 목을 가진 무신론자”였던 사람인 버나드 나탄손 박사가 독실한 가톨릭 신자가 된 일은 의심할 바 없이 20세기에 있었던 가장 위대한 개종 사건 중 하나가 된 것이다.
그는 1996년 10월 19일 폴란드를 방문하여 포르친스키 회랑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폴란드의 국회의원들에게 이렇게 호소했다.
“여러분에게 간곡하게 호소합니다. 낙태를 합법화하는 방향으로는 단 한 발짝도 나가지 마십시오! 역사는 그런 여러분을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 미국에서 우리가 했던 실수를 바탕으로 경고합니다. 낙태를 찬성하는 한 표는 동시에 안락사를 찬성하는 표가 될 것이며 나아가 노인과 장애인도 죽이는 표가 될 것입니다. 그 한 표는 궁극적으로 유전학 연구에 쓰이면서 모든 인간을 생명이 아닌 죽음의 골짜기로 몰아가는 첫 걸음이 될 것입니다.
(※ 위 글의 모든 인용문은 버나드 나탄손 박사의 <하느님의 손 - 죽음에서 생명으로의 여행 - 개종한 낙태 전문의의 이야기>(오스트리아, 1997)에서 발췌되었다.)
(자료출처 http://blog.daum.net/hakema/5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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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PTministries 정태홍 목사
http://www.esesang91.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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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신부가 말하는 C.S.루이스의 천주교 개종
M. 피오트로프스키 신부
“우리는 하느님에게서 나왔다.”
버나드 나탄손 박사가 하느님께의 믿음에 이르게 된 길은 가시밭길이었다.
“나는 영적인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나는 지상적이고 육적인 것만을 동경했다. 나의 목표들은 모조리 구체적이고 손에 잡히는 감각적인 것들이었다. 당장에 현금으로 바꿀 수 있는 것들이었다. 경직된 유대인 무신론자이며 피상적인 유대인이었던 나는 눈에 보이지 않고 뜬구름 잡는 것 같은 모든 것을 경멸했다.”
1978년에서 1988년까지의 기간은 그에게 특별히 힘든 시간이었다. 매우 고통스런 방법으로 자기 삶의 짐을 체험하는 시간이었다.
“나는 매일 새벽 네다섯 시 사이에 일어나 어둠 속을 응시하면서 배심원과 판사들이 나에게 무죄 판결을 내리는 장면을 상상하곤 했다. 그러나 그 희망으로 기도한 적은 없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흐른 뒤 희망이 상상으로 끝나고 나면 나는 불을 켜고 죄를 주제로 쓴 문학서를 펼쳤다. 성 아우구스티노, 도스토예프스키, 폴틸리히, 키에르 케고르, 니부르 그리고 루이스 멈포드의 글과 왈도 프랑크의 고백에 나오는 구절까지 읽고 또 읽었다.”
너무 절망한 나머지 그는 자살을 생각하기도 했다. 자신의 손에서 생명을 빼앗긴 수천 명의 무죄한 아이들에 대한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을 에워싸는 정신적인 고통과 절망감을 약물이나 알코올 또는 자기 최면술과 신경정신과 상담을 통해 벗어나려고 애썼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러면서 그는 생명 운동에 깊이 참여했다. 강연과 책과 정치적 활동도 동원했다. 하지만 하느님께 대한 신앙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의식적으로 멀리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낙태 시술 병원 앞에서 수백 명의 경찰관들에 의해 둘러싸인 채 낙태 반대 집회를 열고 있는 사람들을 보게 되었다. 그들은 큰 소리나 폭력을 동원하지 않았다. 오로지 조용히 기도에만 몰두했다. 기도하는 그들의 얼굴에서는 진실한 사랑의 빛이 흘렀다. 그들은 잠시도 쉬지 않고 기도에 몰두했으며 절대적 비폭력의 원칙을 지켰다. 그것은 그에게 감동과 놀라움을 선물했다.
“그날 나는 그들의 순수한 사랑과 기도에 놀랐다. 그들은 태어나지 않은 아이들을 위해 기도했고, 불안에 휩싸인 임신 여성들을 위해 기도했으며, 의사와 간호사들을 위해 기도했다. 그들은 심지어 자신들을 에워싸고 있는 경찰관들과 언론 매체를 위해서도 기도했다. 그들은 서로를 위해서도 기도했다. 하지만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결코 기도하지 않았다. 그런 그들을 지켜보면서 나는 자문했다. 어떻게 이 사람들은 말도 못하고 볼 수도 없고 자신들에게 고맙다는 인사조차도 할 수 없는 누군가를 위해 기도할 수 있단 말인가?”
그날 그런 체험 이후 버나드 나탄손 박사는 생애 처음으로 하느님이란 존재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그때 이후로 나는 하느님에 대한 생각과 친해지기 시작했다. 어떤 문제를 통해서 나에게 구원과 자비의 길을 보여주려 했던 하느님을 자주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그때껏 내가 굳게 매달려 있었던 18세기 철학과 이별을 고했다. 갑자가 나의 과거는 죄와 멸망의 더러운 늪이 되었다. 그런 생각은 나 자신을 가장 사악한 범죄자로 고발했다. 그러나 동시에, 마치 기적처럼, 나의 죄 때문에 누군가가 2000년 전에 돌아가셨다는 사실은 나에게 희미하게나 희망의 불꽃을 던져주었다.”
그는 하느님을 찾기 위해 영적인 여행을 계속했다. 그는 말콤 머저리지, 헨리 뉴먼 추기경, 그레이엄 그린, C. S. 루이스, 워커 퍼시 등의 위대한 가톨릭 개종자들의 전기를 매우 열심히 읽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눈물을 흘렸다고 그는 고백했다.
“하느님이 아니었다면 나는 멸망으로 떨어져야 마땅했다. 그분을 찾기 위해서 온 세상 곳곳을 돌아다니는 것이 나의 운명이었다. 그러나 이제 나는 더할 수 없는 강한 원의로 그분의 옷자락을 붙잡고 있다. 그러면서 나는 의대 지도교수이며 학창시절 나의 영웅이었던 칼 스턴 교수를 떠올리게 되었으며 그가 자기 동생에게 썼던 편지글도 새로이 다가왔다. ‘그 사실에 대해서 의심할 바가 없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께로 달려간다. 우리는 하느님에게서 나왔다. 그러나 그분은 언제나 사물의 한가운데에 계신다.’”
버나드는 생명 운동가들이 자신을 위해서 기도했다는 사실을 확신했다. 그의 내면에서 부드럽고 자연스런 방법으로 영적인 탈바꿈이 일어났으며 그것은 그에게 내적인 홀가분함과 평온함을 선물했다. 그는 매주 규칙적으로 존 맥클로스키 신부와 만나면서 그의 영적 지도를 받으며 신앙의 길로 인도되었다.
1996년 12월 9일 뉴욕에 있는 성 페트릭 대성당에서 버나드는 존 오코너 추기경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그의 유대인 친구들은 버나드의 결정을 받아들였다.
“이제 나는 그리스도를 받아 들였다. 이것은 나에게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나는 유대인의 문화와 전통 속에서 성장하고 살았으며 나는 유대 민족의 일원이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변하지 않을 것이며 나는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이 시기부터 그는 규칙적으로 미사에 참례했으며, 고해성사를 받았고, 깊은 기도의 삶을 살았다. 학자로서 그는 자신의 책과 영화와 세미나를 통해 모든 생명의 주인은 거룩한 하느님이시며, 그래서 아무도 생명을 함부로 없앨 수 있는 권리를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주장했다. 이로써 전 세계에서 낙태의 최고 옹호론자였던 사람이며, “뻣뻣한 목을 가진 무신론자”였던 사람인 버나드 나탄손 박사가 독실한 가톨릭 신자가 된 일은 의심할 바 없이 20세기에 있었던 가장 위대한 개종 사건 중 하나가 된 것이다.
그는 1996년 10월 19일 폴란드를 방문하여 포르친스키 회랑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폴란드의 국회의원들에게 이렇게 호소했다.
“여러분에게 간곡하게 호소합니다. 낙태를 합법화하는 방향으로는 단 한 발짝도 나가지 마십시오! 역사는 그런 여러분을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 미국에서 우리가 했던 실수를 바탕으로 경고합니다. 낙태를 찬성하는 한 표는 동시에 안락사를 찬성하는 표가 될 것이며 나아가 노인과 장애인도 죽이는 표가 될 것입니다. 그 한 표는 궁극적으로 유전학 연구에 쓰이면서 모든 인간을 생명이 아닌 죽음의 골짜기로 몰아가는 첫 걸음이 될 것입니다.
(※ 위 글의 모든 인용문은 버나드 나탄손 박사의 <하느님의 손 - 죽음에서 생명으로의 여행 - 개종한 낙태 전문의의 이야기>(오스트리아, 1997)에서 발췌되었다.)
(자료출처 http://blog.daum.net/hakema/5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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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PTministries 정태홍 목사
http://www.esesang91.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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