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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엘 오스틴의 "긍정의 힘"은 일종의 자기최면이다.

조엘 오스틴의 "긍정의 힘"은 일종의 자기최면이다. 
"긍정의 힘"은 인본주의 믿음신학,믿음의 말 운동에 불과, 성경적인 복음이 아니라, 다른 복음이다
 
기독교 신비주의 은사운동이 한창 번창할 때에, 다른 한편에서는 "믿음 신학" 또는 "믿음의 말 운동"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 운동은 노만 빈센트와 그에게 수학한 로버트 슐러 등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이 운동은 조엘 오스틴의 "긍정의 힘"(믿는 대로 된다)과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믿음신학은 성령 운동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는데, 조 목사의 경우에도, 전형적인 성령운동 및 믿음 신학의 유형에 속한다.
믿음신학은 한 마디로, 일종의 쇠뇌이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좋은 일들이 생긴다는 것이다. 하나님 마저도 이 원칙에는 어쩔 수 없다고 한다. "말의 힘", "언어의 힘"은 '발설된 말의 힘'이다.
따라서, 어떤 말을 하느냐에 따라서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이다. 결국, 형통신학과 믿음신학은 같은 노선에 서게 된다. 특히 입에서 밖으로 나오는 말의 힘은 복과 저주를 결정하는 것이라고 쇠뇌시킨다. 그러므로, 언제나 적극적인 말, 좋은 말, 형통의 말을 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이것은 인간적인 차원에서 별로 나쁠 것은 없다.
그러나, 이것은 믿음이 아니다. 믿음은 언제나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와의 인격적인 교제이기 때문이다.
조엘 오스틴의 "긍정의 힘"에서 가르침은 일종의 자기 최면이다. 적극적인 생각과 말로 사람들의 마음이 쇠뇌된다. 그래서, 교인들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성공을 위한 명상과 자기 최면에 빠지는 "긍정적인 사람들"이 되고 만다. 이러한 조엘 오스틴의 "긍정의 힘"이 "무엇이 잘못인가"라고 질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본주의적 믿음신학은 하나님의 나라와 영생을 앋는 것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는 데 심각한 오류가 있다. 이 세상에서 믿지 않는 자들에게도 이러한 가르침은 수없이 많이 있으며, 뉴에이지 운동도 바로 이러한 가르침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주인공이 언제나 자기 자신이란 점이 기독교와 다르다.
이러한 믿음신학에 속한 자들이 쓴 책들을 보면, 그 제목만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다.
"네 안에 잠재되어 있는 거인을 잠 깨워라", "우리의 말은 자신에게 하는 예언이다.", "믿는대로 된다.", "긍정적인 말의 힘", "형통의 원리와 말의 원리", "우리 속에 잠자는 거대한 거인을 깨우라."
그러나, 이러한 가르침은 자기최면과 긍정적인 명상일뿐, 참된 기독교 신앙이 아니다.   나아가 범신론적인 뉴에이지와 연결되는 첫 단계이다.
그 이유는 "긍정의 힘"의 가르침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쇠뇌이며, 나아가 인간에게 신성이 있다는 영지주의자와 같은 사상이기 때문이다. 인간에게는 자기 스스로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말하면, 저절로 발생하는 힘과 능력이 있다고 주장하는 점에서, 뉴에이지가 추구하는 사상과 전혀 다를 바 없다.
기독교 신앙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계신 성령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사귐)이다. 하나님과의 참된 교제가 있으려면,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해야만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벗어나는 하나님과의 만남은 참 하나님이 아니다. 십자가의 고난을 피하여 만나는 성령의 역사는 성령의 역사가 아니다.
우리 인간들에게 하나님께로 나올 수 있도록 해주신,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는 길 밖에는 다른 길은 없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오는 길에는 죄 문제를 해결하는 길로서 반드시 십자가와 부활을 통과해야 한다. 
특히, 고난의 문제에 대하여 십자가는 우리에게 가장 깊은 비밀을 보여주고 있다. 십자가를 통하지 않고서는 이 땅에서 고난의 문제를 그 누구도 해결할 수가 없다.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큰 신비는 이 땅에서 죄의 저주로 인한 고난이 그리스도 안에서는 축복으로 바뀐다는 점이다. 즉, 고난 가운데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고 거룩해지며 고난을 통과한 이후에 보장되는 영원한 영광(면류관,상급)을 바랄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자녀들에게 고난을 허락하신다.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생각컨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7-18).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우리가 환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와 구원을 위함이요, 혹 위로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를 위함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나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고후 1:50-6).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빌 1:29).
우리의 신앙 생활에 있어서 꼭 필요한 것은, 우리 속에 잠자는 거인을 깨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떠나면 죄 가운데 영원히 멸망받는다는 의식을 깨우는 것이다. 그래야 영벌을 받지 않는다. 그래야 멸망받지 않는다.
믿음의 신학을 믿고, 이 땅에서 잠깐 형통을 누린다고 착각하며 축복의 하나님, 마치 알라딘의 지니와 같은 하나님, 나아가 온 종일 활홍경에 빠지게 하는 어떤 영에 속을 것이 아니라, 회개로부터 시작하여 날마다 자신의 죄와 싸우며 죄를 십자가에 죽이는 과정이 이 땅에서의 삷이어야 한다.
이러한 치열한 영적 전쟁을 치르다보면, 자기 자신도 모르게 주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이 나타나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의 삶이다.
조엘 오스틴이나 조 목사의 주장처럼, 내가 형통할 것이라는 말을 입으로 반복하고, 내가 긍정적인 생각을 하는 것이, 도대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무슨 상관이 있다는 것인가?
한국 교회는 이러한 "긍정의 힘 신학", "믿음 신학", "형통주의 신학"은 모두 바알 우상을 섬기며 기복주의를 부르짖는 샤머니즘의 주문을 외는 것과 별로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결코, "긍정의 힘" 신학과 믿음 신학, 형통주의 신학은  성경적 복음의 가르침이 아니라, 다른 복음이다.
 
  
[유니온뉴스]
http://www.cun.or.kr/news/articleView.html?idxno=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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