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인홀드 니버 - 사회정의사상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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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차 -
서론
본 론
1. 니버의 생애와 사상적 배경
2. 니버 시대 때 미국의 정치적, 종교적인 상황 (시대별로)
1) 1928년 이전, 1928년 당시의 정치적 종교적 상황
2)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미국의 경제 대공황 시기 1928-1935)
3) 제2차 세계대전 시대
4) 제2차 세계대전 이후
5) 1950-1960년의 미국의 정치적 종교적 상황
3. 니버의 인간 이해와 집단 관계 속에서의 사회정의
4. 사회정의 유지를 위한 방법으로서의 니버의 폭력정당론
결 론
1. 니버의 한계
2. 우리 삶에서의 적용
서 론
현대사회는 여러 심각한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빈익빈 부익부 현상, 정치적 불안, 환경오염과 생태계의 위기, 인간성 상실과 소외 현상, 정치적인 폭력과 기득권자의 횡포 등 여러 문제들이 날로 심화되어 가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이러한 현대적 상황 하에서, 인간의 삶과 공동체의 유지 향상을 위하여 올바른 가치관의 척도를 가지는 것과 삶에 대한 규범 수립은 매우 중요한 과제로 부각된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냉전의 이데올로기 대립은 전세계적으로 전쟁과 죽음의 문화를 가져왔었다. 이제 냉전의 시대는 사라졌으나, 강대국들의 자국이기주의로 인한 지구촌 전체의 폭력이 문제로 남아있다. 또한 주위를 돌아보면 인간과 인간 사이의 평화, 나라와 나라 사이의 평화, 남과 북의 평화, 자연과 인간 사이의 평화가 사라져가고 있다. 또 얼마 전에는 미국의 이라크 침략전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치는 것을 매스컴을 통하여 생생히 전달받았다.
우리나라도 지금 다른 어느 국가보다 심각한 위기에 직면해 있다. 미국의 제국주의적 팽창정책과 맞물려 북한의 핵 개발로 인한 전쟁의 조짐이 보이고 있고 과도한 개발정책으로 환경과 인간성 파괴는 비단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회와 국가와의 관계성을 책임있는 정치참여 문제와 연관지어 사고하는 것과, 한편으로 다양한 유무형의 폭력적 상황 앞에서 기독교인이 어떠한 태도를 취해야 할 것인지를 살펴보고자 함은 중요한 일이다.
이에 대하여, 본 발제는 다양한 사회 변화 앞에서 기독교 신앙의 사회참여적인 반성을 촉구하였던 20세기의 위대한 윤리학자인 라인홀드 니버의 관심에서 출발한다. 니버는 철저히 성서적 인간이해를 근거로 한 인간이해를 시도하면서, 현실에 대한 경험과 깊은 통찰을 기반으로 자신의 사상을 형성하여 행동에 연결시키는 기독교 현실주의 사상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니버에게 있어서 신학적으로 관심갖는 작업은 기독교 신앙을 어떤 방식으로 사회집단의 구조와 활동, 결정에다 자신의 통찰을 제시할 것인가 하는 문제로 귀결되었다. 이러한 니버의 "기독교 현실주의"와 "정치적 현실주의"는 193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 전반에 이르기까지 미국의 신학계와 정치계를 주름잡을 정도로 막대한 영향력을 가졌었다. 그런 까닭에 니버의 삶과 사상 그리고 그의 사회정의를 위한 수단으로서의 폭력이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본 론
1. 니버의 생애와 사상적 배경
미국이 낳은 세계적인 신학자 라인홀드 니버(Karl Paul Reinhold Niebuhr)는 1892년 6월 21일 미주리 주 라이트(Wright)시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독일계 미국인 2세였고, 그의 아버지 구스타보 라인홀드 니버는 독일에서 미국으로 이주해 온 복음 개혁 교단 목사로서, 북미 독일 복음협회와 연계되어 있던 미주리의 에덴 신학교를 졸업하였다. 니버는 아버지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특히 스스로를 미국 자유주의적 목사로 여기던 그의 아버지는 니버와 그의 동생인 리처드 니버(Helmut Reinhold Niebuhr)로 하여금 자신이 걸었던 경건주의적인 신학적 교육을 받는 길을 걷게 했다.
니버는 에덴 신학교에 1912년에 입학하여 일년을 공부한 후 예일대학 신학부에 들어가 신학사와 석사 학위를 받았다. 갑작스러운 그의 아버지의 죽음으로 하여 그는 박사 과정을 공부하던 중 고향으로 돌아가 아버지의 목회 공석을 5개월간 메웠다. 이어 1915년 안수를 받은 후 그는 그가 속한 교단으로부터 미국의 자동차 공업 도시인 디트로이트로 파송을 받아 그곳에서 미국 유니온 신학교로부터 초빙을 받기까지 13년간(1915-1928) 산업도시 목회를 하였다.
니버가 목회를 시작했던 1515년은 역사의 분수령이 되는 시기였다. 파나마 운하가 1914년 개통되었고, 제 1차 세계대전이 1915년에 일어났으며, 미국의 생산력이 극도로 상승한 시기였다. 이러한 때에 그가 디트로이트에서 보고 느낀 것은 대량 생산을 위해서 모든 것이 기계화되는 과정이었다. 니버는 그곳에서 아메리칸 유토피아를 내세운 헨리 포드의 자동차 공장의 노동자들이 겪는 비참한 생활상을 몸소 체험하게 되면서 자본주의에 대한 혐오감을 갖게 되었다. 그가 교회에서 13년 간 목회하는 동안에 처음 20여명이었던 교회가 650여명으로 성장하였는데, 이 교회는 그가 노동운동을 지원하는 사회활동의 중심이 되었고, 후에 그의 평화주의 운동 시기에도 중심을 이루게 된다. 디트로이트에서의 목회는 그로 하여금 산업화된 사회가 밟고 서있는 노동자들의 현실을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하였다. 그는 노동자들의 편에 서서 헨리 포드에 대하여 공개적인 비판을 하였으며, 노동현장의 비인간적 현실에 대한 보고서들을 만들어 교단 통로를 통하여 전세계에 알리는 일도 하였다. 1923년 니버는 세미나 참석차 유럽과 독일을 방문하게 되었는데, 이 여행에서 그는 1차 세계대전 이후 프랑스의 점령 하에 있었던 독일의 비참한 상황을 바라보고 대조적으로 영국의 노동복지정책을 보게 된다. 여기에서 그는 사회민주주의가 기독교 이상에 가장 근사한 정책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이것이 미국 장래를 위한 최선의 길이라는 암시를 받게 된다.
1928년 니버는 유니온 신학교 학장이었던 셔우드 에디(Sherwood Eddy)가 「미래세계(World Tomorrow)」라는 잡지의 편집 책임을 맡게 하기 위해 뉴욕으로 불러들였는데, 그때부터 시간 강사로 유니온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였고 곧 이어 교수로 강의하게 되었다. 니버는 유니온 신학교에서 주로 기독교사회윤리를 강의하면서 30년이 넘는 세월동안 수많은 강의와 강연들 그리고 신학적 저술들을 통하여 윤리학자와 신학자로서의 그의 이름을 미국에서 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 알리게 된다.
아메리칸 유토피아즘이 1920년말의 세계 대공황으로 쇠퇴하게 되자 니버는 종교사회주의자로 차츰 변하게 된다. 당시의 종교 사회주의 운동은 성서 속에 나타난 예언자적 종교가 지시하는 가치들을 사회 속에 적용하려는 성직자, 평신도들의 운동이었다. 그 결과 이 운동은 어쩔 수 없이 자본주의 사상과는 대립되는 입장을 취하게 되었다. 1931년 그는 '기독교 사회주의자 연맹'을 결성하는데 앞장을 섰고 30년대 초기에는 사회주의당의 뉴욕시 의회 의원(1930), 그리고 주 의회 의원(1932)으로 출마하기도 했으나 선출되지는 못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마르크스주의에 심취하여 미국의 자본주의 사회를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그는 1930년에 소련을 다녀오게 되는데 그때 그가 발견한 것은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면이었다. 즉 그는 산업화가 상당히 진척되어 있는데 대하여는 깊은 감명을 받은 반면에 인간의 가치를 무시해가면서 능률을 강조해 가는데 대해서는 경계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1930년 후반에 들어서면서 니버는 점차 파시즘과 공산주의운동의 과격함에 대하여 실망하게 된 후 1940년에는 사회주의당에서 탈퇴하고 자유민주당의 루즈벨트를 이념적으로 지지하게 되었다. 이어 세계 2차 대전이 발발하면서 일어나는 정치적 현실을 바라보면서 니버는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사회주의 사상과 평화주의 사상을 포기하였다. 그러한 방향으로는 서구 세계의 문명이 남아날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소위 자유주의적 사상의 낙관적 기대는 더욱 심원한 악의 힘을 견디지 못할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니버는 좌파적 민주주의 입장에서 연합군을 지지하는 편에 서게 된다. 이러한 입장의 변화는 자연히 「크리스챤 센츄리」지의 입장과 결별하여 1941년 니버는 파시즘과 공산주의와의 신학적이며 정치적인 논쟁을 이끌어 간 「기독교의 위기」를 창간하고, 1944년에는 자유당을 창당하는 멤버가 되었다.
니버의 30대는 특히 에큐메니컬 운동에도 깊이 참여하게 되었는데, 그는 1937년 옥스퍼드에서 열린 "삶과 사역"회의에 참가했으며, 1939년에는 에딘버러의 기포드 강연을 맡고, 1948년 세계교회협의회의 제1차 총회의 강연을 하였다. 1964년 대통령이 수여하는 자유의 메달을 수여하기도 했다. 그는 1960년에 이르기까지 유니온 신학교에서 교수를 하였고, 그의 생애에 걸쳐서 무수한 저작을 저술하였다.
니버는 자신의 삶의 후기에 온 뇌출혈로 인하여 1952년 이후 근20년 간을 죽음의 위협을 간직하고 살아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원래의 모습대로 탁월한 설교가, 목사, 신학대학의 교수로서 살아가는 면모를 잃지 않았다. 그는 바울의 고백처럼,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우리가 죽어도 주를 위해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나 죽으나 주의 것입니다. "라는 고백을 구현하면서 살아갔다. 그의 사후에 발표된 "국외자의 인생관"에서 자신에게 두 가지 새로운 관점의 변화가 있음을 고백하였는데, 그 첫째는 교회가 세상을 향하여 설교하는 교회로만 이해했던 것에서 이제는 세상을 듣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며, 둘째 죽음에 대한 숙고로서 존재의 신비를 하나님 손에 맡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정의를 위해 투쟁하고 설교하고, 요구하는 교회와 회중을 늘 생각하던 그가, 사회와 세상으로부터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하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은, 그가 뇌출혈 이후 죽음에 위협받고 있는 한 기독교 신학자로서 그리고 일선에서 힘차게 활동하지 못하는 국외자 같은 입장에서 새롭게 경험한 신학적 이해였을 것이다.
2. 니버 시대 때 미국의 정치적, 종교적인 상황 (시대별로)
1) 1928년 이전, 1928년 당시의 정치적 종교적 상황
니버에 대해서 이해하고 니버가 각 시대적 상황에 대해서 책을 내기 전 그가 성장해온 정치적인 상황과 시대적인 상황을 알아야 그 사상과 신앙관을 알 수 있을 것이다.
19세기는 혁명의 시대였다. 초기 자본주의 제도에서 오는 여러 가지 경제적인 폐단과 사회악에 대한 반동의 시대였다. 구라파와 영국에서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와 그리스도교 사회주의운동의 맹렬한 활동의 결과로써 사회문제에 관한 법률도 이미 제정되어 있었다. 그러 나, 칼빈주의적인 청교도 사상의 영향과 경건주의의 영향을 받은 미국 사람들과 교회들은 자유주의 경제체제에 만족하고 있었다. 당시의 미국은 남북전쟁 후 산업화가 급속히 진행 되고 있었으며 이른바 자유방임적인 자본주의가 형성되어져 가고 있었다. 또한, 아담 스미 스의 「국부론」이후 자유주의 경제론과 적자생존을 표방하는 사회적인 진화론에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경제동향의 자율성에 간섭하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자유경쟁은 종당에 모든 사회악을 다 시정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였다. 교회의 지도자들은 민주주의와 자유 방임적인 자본주의가 모든 정치적,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해 줄 것으로 믿고 또한 기대를 걸고 있었다. 그런데, 그 당시 개신교회들은 실질적으로는 개인주의적인 기독교의 풍토 가운데서 사회적인 공헌을 거의 하지 못하였다. 사회악에 있어서도 그것은 개인들이 아직도 다 구원을 받지 못한 까닭이라고 보았다. 노동자들의 비참한 생활은 그들이 게으르고 저축성이 없고 부정직하기 때문이며, 그리스도교의 덕은 부지런하고 검소하고 정직한 생활을 함으로써 세속적인 성공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보았다. 더욱이 노동자들의 대부분이 구라파에서 최근 이민해 온 카톨릭 신자들이었기 때문에 종류 이상의 계급을 지배하고 있던 개신교도들은 그들이 비참한 생활에 대하여 자연히 등한시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현존하는 사회제도를 그대로 옳은 것이라고 믿고 교회는 사회불균등의 문제에 대해서 개인적인 자선 사업만을 함으로써 무마하고자 하였으며, 사회구조를 변혁하려는 시도는 거의 행해지지 않았다. 그러나, 1877년 이후로 큰 동맹파업이 계속적으로 일어나고 이 노동 분쟁으로 인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리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1877년과 1886년의 철도 종업원 동맹파업과 1892년의 카네기 제강회사에 대한 동맹파업은 가장 비참한 것이었다. 그리고, 계속되는 노동분쟁을 계기로 일부 교회 지도자들은 현존하는 사회제도와 경제기구에 대해서 의심을 품게 되었다. 그들은 빈곤이나 실업과 같은 사회 문제들은 박애주의에 의해서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인들이 사회적인 양심을 환기시킴으로써 그에 이어지는 사회질서의 근본적인 변화에 의해서 해결될 수 있음을 주장하였다. 이들은 특별히 노동자들을 위해서 많은 관심을 기울였으며 그들의 입장에 서서 여러 가지의 뒷받침과 협조를 하였다. 특별히 노동운동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사회신조에 영향을 주어 산업 본쟁에 있어서의 교회의 역할, 아동 노동의 폐지와 노동시간 단축, 최저 임금제, 산업생산에 따른 적절한 분배를 주장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특히 사회의 위기성을 인식하고, 무신론적인 사회주의를 대신할 수 있는 길을 찾으면서 현존하는 사회를 타당하다고 보는 보수주의 진영에 대항하여 사랑과 인류 동포애로 가득 찬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며 개인 하나하나의 구원만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구원을 찾아보려는 운동을 일으켰는데, 그 운동이 사회복음운동이다. 이 운동의 대표적인 특성으로는 복음을 사회문제에 적응시키는 것이 아니라, 단지 복음 안에서의 사회문제를 강조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현대 산업주의의 팽창과 관련해서 일어난 사회문제에 대한 미국 개신교의 응답이다라고 이야기할 수가 있다.
제1차 세계대전이후 미국은 독일에 대하여 14가지의 가혹한 평화 협정 조약을 체계하고 그것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특히 독일 국민들에게 가혹한 상처를 주고 미국은 월슨을 통해서 국제연맹을 조직하여 미국을 세계 강국으로 부상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미국 역사 에 있어서 1920-1928년에 시기를 남북 전쟁 전후와 비교한다. 왜냐하면 전후 복구 사업과 한 특권층 공화당의 집권이라는 공통된 특징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시기에 는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사회복음운동이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약 10여 년 동안 미국을 지 배했었던 시기였는데, 이 시기에는 심각한 정치적인 부패상황이 일어나고 있었으며 미국 역사상 가장 최악의 시대라는 평가를 받고 있고 군사력을 키우는 시기임과 동시에 이를 통해서 경제공항 초래와 2차 세계대전을 위한 준비가 이루어진 시기이다. 그래서, 이 시기 속에서 라인홀드 니버는 디트로이트에서 13년 간 목회생활을 하면서, 사회복음운동에 입각해서 노동자의 복지향상을 위해서 포드 자동차 회사와 대결하면서 노동자의 인권문제, 인종문제 등을 적극적으로 해결하고자 하였다. 참고로, 이 시기에 쓰여졌던 그의 첫 저서인 「문명은 종교를 필요로 하는가?」라는 책에서 그는 사회, 경제, 구조의 혁신을 통한 기독교적인 사회질서, 즉, 하나님 나라의 건설은 정치적인 투쟁이나 폭력혁명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용서, 평화적인 설득과 교육, 그리고, 비폭력적인 수단을 통해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2)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미국의 경제 대공황 시기 1928-1935)
1928년 미국의 경제는 "암흑의 화요일"이라 불리는 구가초유의 주가 하락 사태를 시작으 로 본격적인 경제대공황의 시기를 맞이한다. 이 경제 대공황의 이면에는 5가지의 경제공항 의 요인과 정치적, 사회적인 문제와 배고픈 사람에게 복음이 아닌 빵을 주는 종교로 전락 해 버린 교회의 모습을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인 사회"란 책을 통해서 니버는 말하고 있 다.
그렇다면, 이 당시의 미국 내 경제상황은 어떠했는가? 농가의 소득은 1929년과 1932년 사이에 60%가 감소했고 1930년부터 강우량 감소는 물론 일사량 증가로 토지의 사막화를 초래했으며 미국 내 실업이 증가하면서 정통적인 사상인 좋은 아빠, 모범시민의 정신이 무너지고 백인 이기주의로 인해 과거 흑인들이 장악하고 있었던 청소부, 도로 청소원, 가내 하인 등의 일거리까지도 흑인들을 밀어내고 백인들이 차지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제한된 구호도 거의 백인들에게 먼저 돌아갔다. 이 당시 종교는 그저 빵만 나누어주는 정도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러한 시기에 미국의 대통령 후버는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내어놓았다.
그는 기업가들이 생산을 감축하고, 노동자들을 해고하지 말고 임금의 인상과 노동 시간을 감소하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1931년 경제상황이 악화되자 이것은 유명무실해지고 정부는 적자를 면하기 위해서 세금을 인상한다. 그리고 후버는 재건 금융공사 사업을 통한 공공기 관 살리기 운동을 추진해서 15억 달러를 들일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는 이 많은 돈을 직접 쓰기도 그랬고, 오랜 시간 투자하기도 싫어했다. 이 공공사업을 위한 투자는 사실상 20%대의 투자에서 끝나고 만다. 1924년 미의회는 1차 세계대전 참전자에게 1천달러의 보 너스를 지급하기로 판결했지만, 1945년부터 지급하라고 했고 많은 참전 용사들이 1932년 즉시 지급하라는 요청을 했지만 후버는 정부예산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서 철회했고, 급기야는 육군 참모 총장 더글라스 맥아더를 통해서 무력 진압을 하여 100명 이상의 부상자와 아기 1명이 사망하는 사태를 초래하였다. 즉, 정부는 자기의 안정을 위해서 기아민을 돌아보지 않았던 것이었다.
니버는 이러한 시기에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를 통해서 사회는 도덕적인 인간으로 구성된 사회일지라도 그 사회는 비도덕적일 수 있다. 한 개인은 동정심도 있고 자기를 희생하면서 다른 사람을 도우려는 이타심이나 이해심을 가질 수 있으며, 또, 개인으로서는 양심적이고 이성적일 수 있다. 그러나, 사회집단은 몹시 이기적이며 한 국가나 계급이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서는 부도덕도 감행한다. 즉, 집단적인 이기주의인 님비현상과 핌비현상을 이 책을 통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참고로, 이 책에서는 인간이 완전해질 수 있다고 본 자유주의적, 낙관적인 인간해석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그 반면에 마르크스주의를 아주 상당하게 옹호한 것으로 보아서 이 시기는 니버가 사회주의 사상을 통해서 현실적인 사회문제를 고민하면서 해결하고자 했다는 사실을 느낄 수가 있다.
3) 제2차 세계대전 시대
제2차 세계대전의 발생원인은 1930년대에 미국과 유럽 전 세계를 휩쓸었던 대공황 사태에 서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대공황으로 인해서 각국 정부는 그 당시 실업과 경기 침체에 직면해 있는 국내시장을 보호하기 위해 자기 나라는 물론, 자기의 힘이 미치는 세 계의 여러 지역을 묶어서 고율의 관세로 장벽을 둘러치고 다른 나라의 자본과 상품이 들어 오는 것을 막았다. 이렇게 대공황의 여파로 세계경제가 위축되는 상황 속에서 이미 확보한 시장을 배타적으로 장악하고 블록경제를 구축하려는 시도는 어떤 의미에서는 굉장히 자연 스러운 것이었지만, 동시에 그것은 전세계적인 차원의 경제적인 민족주의를 격화시키면서 국제적인 긴장을 초래하는 요소가 되었다. 그래서, 이러한 대공황으로 인해서 세계는 그 당 시 사회적으로 엄청나게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을 틈타서 그 혼란을 더욱 더 가중시키게 만들었던 세력들이 등장했는데, 그 세력들이 바로 나치즘과 파시즘 세 력들이었다. 그들은 프로테스탄트적인 신앙을 가지고, 자신들을 세계의 구원자로 신격화시 키면서 등장한 세력들이었다. 그들의 야욕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구원의 명분을 내걸면서 전쟁을 통해서 세계의 지배통치권을 독차지하였고, 그래서, 한편으로서는 전쟁을 일으키는 가운데서 인간의 존엄성을 완전히 말살시키는 행위까지 범하게 되었다. 또한, 이 상황에서 중요한 것은, 이 당시 상황이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을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는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미국은 당시 루스벨트 대통령이 취임하여 대공황사태 회복을 위해 뉴딜 정책이라는 경제정책을 시행했었다. (금본위 제도 폐지, 달러 평가절하, 은행과 금융에 대한 통제, 과잉 생산과 임금 인상과 노동 시간 단축, 실업자 구제를 위한 재정 보조금 제공, 전국적 차원에서의 보험금 지급, 아동 노동 폐지, 빈부 격차를 줄이기 위한 누진 소득세 실시, 법인에도 이윤세 부과, 탈세 행위 금지 등등...) 그러나, 이 뉴딜 정책도 결국 금융계와 산업계, 그리고, 사회주의자들의 발발로 인해서 별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뉴딜 정책 전부가 미국의 실업, 빈곤, 불황, 불경기 문제를 궁극적으로 해결해 주는 것은 아니었다. 결국 미국 경제의 완전한 회복을 위해서는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을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미국의 당시 모든 상황의 문제결과가 이 전쟁의 결과에 달려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대상황 속에서 라인홀드 니버는 교만해지고, 자만해져서 자신들이 하나님(신)처럼 되고자 하는 나치즘과 파시즘을 비난하면서, 인간의 생명을 포함한 세계의 모든 운명은 오직 하나님께 달려있으며, 참되신 하나님의 의지에 의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고 말하였다.
하나님의 의지에 대한 복종, 하나님께 모든 것을 내어 맡기는 겸손과 믿음의 자세가 중요하다라는 것이다. 동시에 죄를 뉘우치는 겸손함의 자세를 통하여서 인간의 참된 본성을 회복하고, 그래서, 유한한 인간의 의지와 하나님에 의해서 지배되는 전 세계 질서 사이에 바른 관계를 세울 것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그가 1941-43년에 쓴 「인간의 본성과 운명」이라는 책에 잘 반영되어져 있다. 특별히 책에서는 인간의 존엄성 존중을 추구하는 르네상스와 하나님의 참된 진리의 뜻의 발견을 추구하는 종교개혁의 통합적인 시도를 통하여 전쟁으로 인해서 말살되고 있는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 존중하고, 대공황으로 전 세계가 어렵고 혼란스러운 그 당시 시대 때에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발견하고, 그 뜻에 따라서 삶을 살아가자고 강조하였다.
또한, 우리들이 중요하게 알아두어야 할 것은 제1차 세계대전과 대공황, 그리고, 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서 전 세계의 민주주의 사회와 정신이 완전히 소멸되어졌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대공황과 1,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서 평등과 자유, 인간 존엄성, 삶의 참된 행복을 추구하는 민주주의 사회와 정신이 완전히 말살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상황에서 라인홀드 니버는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들이 빛의 자식들로서, 기독교적인 인간관을 가지고, 현실을 바라보면서 위기의 상황을 대처하고, 이 땅 위에서 올바른 하나님의 자녀들이 될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그가 1944년에 쓴 「빛의 자식들과 어두움의 자식들」이라는 책에 잘 반영되어져 있는데, 특별히 이 책에서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빛의 자식들로, 세속적인 자녀들을 어두움의 자식들로 비유하면서, 빛의 자식들인 우리들이 하나님의 눈으로 세계를 바라보면서, 세속적이면서도 독재적인 야심을 지닌 어두움의 자식들에 맞서서 올바른 기독교적인 인간관을 가지고 이 땅 위에서 진정한 민주주의 사회를 실현하고, 발전시킬 것을 강조하고 있다.(기독교적인 인간관만이 올바른 민주주의 사회를 실현할 수가 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이 시기는 니버의 사상이 크게 전환된 시기라고 이야기할 수가 있다. 니버는 경제 대공황과 그 영향으로 인해서 터지는 제2차 세계대전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그 당시 뉴욕 유니온 신학교 교수로 있었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사상을 전환하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대공황과 2차 세계대전을 통해서 니버는 그 사건 속에서 나타난 인간 존엄성 파괴, 그로 인한 세계질서붕괴, 평등과 자유의 본질 상실 등을 깨닫고서는 이제는 하나님의 뜻이 개입되지 않으면, 올바른 세계질서를 기대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실상 이 때부터 니버가 신정통주의로 전환하게 되었고, 이 신정통주의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냉전시대), 5,60년대, 더 나아가서 니버가 죽은 그 이후의 시기까지도 상당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4)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제 2차 세계대전을 전후로 해서, 미국과 소련 사이에 갑작스런 냉전사태가 일어났는데, 이 냉전은 미국인들의 국내생활에도 상당히 악영향을 주었으며, 또한, 이 냉전시대는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 후에 도 끊임없는 경제성장으로 강력한 번영을 누렸던 시대였지만, 또 한편으로서는 그 다음의 미래가 굉장히 걱정스럽고 불확실한 시대였다. 그리고, 이 당시 시대는 냉전상황으로 인해 서 군사적인 중요성이 굉장히 강해지고, 따라서, 군사적인 경계 강화, 마찰이 굉장히 심했던 시대였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지 않으면 또 다른 전쟁의 공포가 우리를 어떻게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에서는 여러 가지 기술들과 교통 및 수송 수 단, 원자 무기와 같은 군사적인 기술들이 발달되었는데, 그러나, 이러한 기술의 발달은 냉 전시대의 상황이 반영해 주는 것만큼, 사람들을 더욱 더 혼란과 두려움과 공포와 파괴의 상황으로 몰아 넣어갔다. 그리고, 냉전상황으로 인해서, 세계는 제2차 세계 대전 뒤에 바라던 기대감과는 달리 우리들이 그렇게 바라던 평화로부터 점점 더 멀어져 가고 있었다. 대신에, 그 평화의 자리는 세계구원의 명분을 내걸고 미국과 소련, 두 나라가 마찰, 경쟁을 벌이는 다툼의 자리로 바뀌어지게 되었다. 한 마디로, 미국의 제국적인 욕망과 소련의 이중성과 팽창주의가 서로 충돌하고 있었던 상황이었다라고 말할 수가 있다. 미국과 소련이 자기들이 세계를 구원하는 신이 되겠다고 서로서로 대결을 벌이고 있었던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역사의 모든 주권은 오직 하나님께 전적으로 맡기어져 있다. 그래서, 이러한 시대 속에서 라인홀드 니버는 미국과 소련이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역사를 망각하고, 자기들 욕심과 야욕으로 세계를 지배하고자 할 것이라고 비난하면서, 모든 시대의 사람들에게 보편적인 진리인 그리스도의 복음을 인간이 절대로 외면해서는 안 될 뿐만 아니라, 어떠한 두려움과 공포의 시대 상황 가운데서도, 세속적인 상황에 굴복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역사의 주관자 하나님을 끝까지 지키는 올바른 믿음의 신앙을 가지고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심판과 구원을 포함한 역사는 언제나 하나님의 지배 아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그가 1949년에 쓴 「신앙과 역사」라는 책에서 잘 반영되어져 있다.
5) 1950-1960년의 미국의 정치적 종교적 상황
1950년에서 60년대 초까지 미국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경제적 성장을 이룩했으며 사회적으로 다방면에 변화를 추구해 왔다. 전쟁을 통한 군사비 증가와 일의 증가로 미국은 1945 년에서 60년까지 250%의 경제적인 성장을 이룩하고 인구도 베이비붐의 영향으로 급속히 증가함으로 풍요로운 시대를 경험하게 된다. 이러한 급속한 경제적 성장은 기업 내에 노조를 형성하고 다양한 사회 계층을 형성하게 되는데, 특히 미국 내 중산층 계층의 성장이 주목된다. 이러한 중산층의 성장은 이웃 간의 계층화를 형성하고 상류와 하류사회라는 엄격하고 냉혹한 위계질서가 등장하게 만든다. 텔레비전이 보편화되면서 사람들은 다양한 문화를 간접적으로 체험하게 되고 백인의 중간 계급의 동질화를 강화함은 물론 중산층과 백인 계층이 누리는 풍요로움 삶을 하류계층이 보고 소외감과 상실감을 느끼도록 하고 말았다. 전통적인 여성상이 지배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사회진출이 활발해지고 다양한 직업을 가진 여성들의 증가로 여성의 사회적인 지위가 향상되었다. 그리고, 인종차별적인 행정 과 법률이 흑인들의 인권운동과 사회운동으로 철회되고 바뀌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시기 에 미국의 외교정책과 국제관계 흐름은 냉전 시대와는 별다른 변화는 없었다. 다만 과학의 급속한 발달로 인해서 미국인들은 공산주의 국가인 소련과 공산주의 국가들보다는 더 좋은 나라에 살고 있다는 사상이 지배적이었고 핵 개발로 인해서 지구상의 핵전쟁의 위험으로 두려움 속에 살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강대국들은 서로 견제함으로 평화로움을 누리던 시기였다. 미국은 1950-60년대에 본격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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