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바르트 - 역사관(직접과 간접)
칼 바르트 - 역사관(직접과 간접)
자료출처 http://kr.blog.yahoo.com/visions72000/1607
1) 바르트는 “일반역사”(= Historie )와 “초 역사”(= Geschichte )라는 두 종류의 역사를 말한다. 그리고 바르트는 후자가 바로 ( 진정 )한 의미의 역사라고 한다. 즉 창조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등 성경의 사건들이 우리 ( 구원 )과 관련되는 진정한 ( 믿음 )의 사건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아는 식의 일반역사가 아니라 원-역사에서 발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의미에 집중하는 큐티의 오해와 위험성은 이미 살펴보았다 )
2) 바르트는 ( 역사성 )이 결여된 사건은 우리에게 무의미하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직접적 일반 역사”가 아니라 “간접적 원-역사”를 도입한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역사의 사건을 직접적 개념의 일반 역사로 보자니 하나님의 ( 초월 )성이 상실될 것이고,(= 신차와 중고차 ) 어떤 추상적 개념으로만 한정하자니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부여될 어떤 힘이(= 예를 들어 신앙, 결단, 종교성 등을 불러 일으키는 힘이 ) 결여될 것으로 본 것이다. 그래서 초역사의 개념을 도입한 것이다.
3) 따라서 바르트의 종말론 역시 그의 역사관에 비추어 이해해야 한다. 바르트는 주장하기를 종말은 달력의 시간에 나타날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 이유는 이미 지적했듯이 그렇게 되면 그 종말은 진정한 의미가 결여되고 우리 ( 구원 )과는 상관이 없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4) 그래서 바르트는 예수의 재림은 이미 ( 부활 )과 ( 오순절 )에 일어났다고 한다. 그에게 재림이란 어떤 “심판”을 의미한다. “마지막 때가 가까왔다” 라는 말은 모든 삶이 신적 심판아래 있기 때문에 항상 “위기”(= crisis ) 아래 있다는 말이라고 한다. 바르트의 신학을 “위기의 신학”이라고 말할 때는 바로 “신적 심판”이 그의 신학의 핵심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심판이라는 동일한 용어 때문에 바르트를 오해하지는 말아야 한다.
5) 그러면 어떤 심판인가? 이는 바로 “전적 타자”인 하나님이 ( 인간 ) 세계에 들어오는 (= 간접적으로 혹은 초역사적으로 ) 그 자체가 심판인 것이다. 물론 이 심판이라는 개념은 성경에서 말하는 “( 선악 )간의 심판”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키에르케고르가 말하는 “역설”(= paradox )과 같은 것이다. 키에르케고르는 인간과 영원한 ( 질적 ) 차이를 지니신 하나님이 인간 세계에 들어오는 그 자체를 역설로 보았다고 하면, 바르트는 그것을 심판 혹은 위기로 본 것이다.
6) 그러므로 바르트에게 있어서 종말이란 현재적 삶의 궁극적 차원을 보여주는 어떤 은유(= metaphor )와 같은 것이다. 또한 그는 우리가 종말적인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어떻게 받는지는 ( 모르지만 ) 분명 받을 것이라고 한다. 이것 역시 ( 간접 )성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7) 그러면 이러한 바르트의 역사관을 우리는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먼저 우리는 왜 의미있는 사건은 우리가 아는 식의 역사에, 즉 달력의 시간에 발생되지 않는가를 물어야 할 것이다. 물론 의미있는 사건은 어떤 면에서 ( 초월 )성을 가지고 있다. 시간을 초월해서 현재나 미래에 의미를 부여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믿는 십자가 사건은 시간을 초월해서 지금 우리에게 의미있는 사건으로 나타난다.
8) 그런데 왜 이러한 의미있는 사건이 보통(= 일반 ) 역사에 발생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인가? 그것은 이미 지적했듯이 바르트는 하나님의 초월성을 칸트의 본체론적 세계와 같은 개념으로 국한 시키려고 하는 것이다. 즉 바르트가 믿기로는 신적 사건이 일반 사건이 된다면 그것은 이미 신적 의미를 ( 상실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왜 일반 역사 속의 사건은 그러한 신적 의미가 없다는 것인가? 정말 하나님의 ( 전능 )하심을 믿는다면 일반 역사 속에서도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닌 것이다.
9) 바르트는 바로 이것을 믿기 힘들어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을 믿지 못하고 기독교 신앙의 가능성을 ( 합리 )적으로 세우려는 그는 이렇게 칸트적 ( 철학 ) 체계를 빌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또한 바르트는 일반 역사로서의 동정녀 탄생이나 부활을 말한다. 물론 그것의 진짜 의미는 “원-역사적”이라고 한다. 만약 바르트가 그리스도의 부활을 일반 역사로 본다면 왜 일반 과학자나 역사가들은 그 부활 사건을 의미있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인가? 즉 과학자나 역사가들이 객관적으로 부활 사건을 평가하지 못한다는 것은 부활 등의 사건을 가지고 두 종류의 역사적 ( 구분 )을 하는 것 자체가 ( 문제 )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10) 사실 사람이 믿음이 없다고 해서 부활 사건이 그 사람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은 아니다. 믿든 믿지 않든 간에 부활 사건은 ( 역사 ) 안에서 발생된 것이다. 역사를 ( 초월 )하는 그 무엇으로 확실성을 찾으려고 했던 바르트는 오히려 역사성을 ( 잃어 )버리게 된 것이다. 바르트가 찾고자 했던 초역사적 확실성은 사실 주관적 ( 추상화 )와 크게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자료출처 http://kr.blog.yahoo.com/visions72000/1607
1) 바르트는 “일반역사”(= Historie )와 “초 역사”(= Geschichte )라는 두 종류의 역사를 말한다. 그리고 바르트는 후자가 바로 ( 진정 )한 의미의 역사라고 한다. 즉 창조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등 성경의 사건들이 우리 ( 구원 )과 관련되는 진정한 ( 믿음 )의 사건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아는 식의 일반역사가 아니라 원-역사에서 발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의미에 집중하는 큐티의 오해와 위험성은 이미 살펴보았다 )
2) 바르트는 ( 역사성 )이 결여된 사건은 우리에게 무의미하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직접적 일반 역사”가 아니라 “간접적 원-역사”를 도입한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역사의 사건을 직접적 개념의 일반 역사로 보자니 하나님의 ( 초월 )성이 상실될 것이고,(= 신차와 중고차 ) 어떤 추상적 개념으로만 한정하자니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부여될 어떤 힘이(= 예를 들어 신앙, 결단, 종교성 등을 불러 일으키는 힘이 ) 결여될 것으로 본 것이다. 그래서 초역사의 개념을 도입한 것이다.
3) 따라서 바르트의 종말론 역시 그의 역사관에 비추어 이해해야 한다. 바르트는 주장하기를 종말은 달력의 시간에 나타날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 이유는 이미 지적했듯이 그렇게 되면 그 종말은 진정한 의미가 결여되고 우리 ( 구원 )과는 상관이 없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4) 그래서 바르트는 예수의 재림은 이미 ( 부활 )과 ( 오순절 )에 일어났다고 한다. 그에게 재림이란 어떤 “심판”을 의미한다. “마지막 때가 가까왔다” 라는 말은 모든 삶이 신적 심판아래 있기 때문에 항상 “위기”(= crisis ) 아래 있다는 말이라고 한다. 바르트의 신학을 “위기의 신학”이라고 말할 때는 바로 “신적 심판”이 그의 신학의 핵심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심판이라는 동일한 용어 때문에 바르트를 오해하지는 말아야 한다.
5) 그러면 어떤 심판인가? 이는 바로 “전적 타자”인 하나님이 ( 인간 ) 세계에 들어오는 (= 간접적으로 혹은 초역사적으로 ) 그 자체가 심판인 것이다. 물론 이 심판이라는 개념은 성경에서 말하는 “( 선악 )간의 심판”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키에르케고르가 말하는 “역설”(= paradox )과 같은 것이다. 키에르케고르는 인간과 영원한 ( 질적 ) 차이를 지니신 하나님이 인간 세계에 들어오는 그 자체를 역설로 보았다고 하면, 바르트는 그것을 심판 혹은 위기로 본 것이다.
6) 그러므로 바르트에게 있어서 종말이란 현재적 삶의 궁극적 차원을 보여주는 어떤 은유(= metaphor )와 같은 것이다. 또한 그는 우리가 종말적인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어떻게 받는지는 ( 모르지만 ) 분명 받을 것이라고 한다. 이것 역시 ( 간접 )성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7) 그러면 이러한 바르트의 역사관을 우리는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먼저 우리는 왜 의미있는 사건은 우리가 아는 식의 역사에, 즉 달력의 시간에 발생되지 않는가를 물어야 할 것이다. 물론 의미있는 사건은 어떤 면에서 ( 초월 )성을 가지고 있다. 시간을 초월해서 현재나 미래에 의미를 부여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믿는 십자가 사건은 시간을 초월해서 지금 우리에게 의미있는 사건으로 나타난다.
8) 그런데 왜 이러한 의미있는 사건이 보통(= 일반 ) 역사에 발생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인가? 그것은 이미 지적했듯이 바르트는 하나님의 초월성을 칸트의 본체론적 세계와 같은 개념으로 국한 시키려고 하는 것이다. 즉 바르트가 믿기로는 신적 사건이 일반 사건이 된다면 그것은 이미 신적 의미를 ( 상실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왜 일반 역사 속의 사건은 그러한 신적 의미가 없다는 것인가? 정말 하나님의 ( 전능 )하심을 믿는다면 일반 역사 속에서도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닌 것이다.
9) 바르트는 바로 이것을 믿기 힘들어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을 믿지 못하고 기독교 신앙의 가능성을 ( 합리 )적으로 세우려는 그는 이렇게 칸트적 ( 철학 ) 체계를 빌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또한 바르트는 일반 역사로서의 동정녀 탄생이나 부활을 말한다. 물론 그것의 진짜 의미는 “원-역사적”이라고 한다. 만약 바르트가 그리스도의 부활을 일반 역사로 본다면 왜 일반 과학자나 역사가들은 그 부활 사건을 의미있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인가? 즉 과학자나 역사가들이 객관적으로 부활 사건을 평가하지 못한다는 것은 부활 등의 사건을 가지고 두 종류의 역사적 ( 구분 )을 하는 것 자체가 ( 문제 )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10) 사실 사람이 믿음이 없다고 해서 부활 사건이 그 사람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은 아니다. 믿든 믿지 않든 간에 부활 사건은 ( 역사 ) 안에서 발생된 것이다. 역사를 ( 초월 )하는 그 무엇으로 확실성을 찾으려고 했던 바르트는 오히려 역사성을 ( 잃어 )버리게 된 것이다. 바르트가 찾고자 했던 초역사적 확실성은 사실 주관적 ( 추상화 )와 크게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독자 의견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