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잔언약, 우리시대 '전가의 보도'인가?
로잔언약, 우리시대 '전가의 보도'인가?
최근 복음주의권의 접근, 인본주의적 그릇된 열정
자료출처 http://www.newsnjo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318
시장의 기관장홀리클럽 활동을 문제 삼았던 포항의 불교계와 일부 시민단체들, 한국기독당이 출범했을 때 그들을 바라보던 교계와 국민들의 시선, 최근의 기독교사회책임의 발족에 대하여 이런저런 비판과 우려의 시선을 보내던 사람들.
우리 기독인들은 과연 어떤 관점에서 이러한 문제들을 바라보고 이해해야 할까? 예수 그리스도의 "너희가 세상에서는 환란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신 말씀을 동일하게 적용해도 되는 것일까.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가 매우 혼란스럽고 어지러운 것만은 틀림없는 것 같다. 여기저기에서 부정적이고 비관적인 말들이 쏟아지고 있고, 사회와 일정한 거리를 두어오던 보수 기독교계조차 정치 사회에 대한 자신들의 분명한 목소리를 내고 있기 때문이다.
일각에서 주도해 온 '성시화운동'이나 '홀리클럽'의 경우 이번에 적지않은 어려움을 겪었다. 현장은 경상북도 포항이었고 대상은 포항시장이었으나 홀리클럽과 성시화운동에 대한 세상의 시각과 평가이기에 근본적인 문제제기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취재과정에서 성경이 말하는 입장을 들어보기 위해 몇몇 신학자들의 견해를 들어볼 기회가 있었는데 "타 종교와 공존하여 살아가는 우리의 현실상, 배타적이고 공격적인 선교방식은 오히려 선교의 문을 닫게 할 수 있다"는, 어찌보면 당연한 지적이 나왔다.
이 말은 기독인들이 삶의 터전에서 하나님께서 세상에 부여한 보편 가치에 충실한 삶을 살아가면서 세상의 존경과 인정을 받을 때 자연스럽게 기독교회에 대한 인식이 바뀌어 질 것이란 말로도 풀이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교회가 교회답게 되는 것이 우선이다. 교회가 교회의 사명을 다하지 못하면서 사회에 대해 '이래라 저래라' 한다면 그 말에 귀를 기울일 이가 어디 있겠는가. 오히려 지금처럼 "너희나 잘해라"는 반응만 돌아오지 않을까.
성경적이진 않지만 나름대로(?) 열정적인 기독교회가 오늘날 종종 범하는 오류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특히 복음주의권에서 요즘 자주 들고 나오는 '전가의 보도'같은 논리는 바로 1974년 빌리 그래함, 존 스토트의 주도로 만들어진 '로잔언약'이다.
일부 교계의 학자들은 '로잔언약'에 대해 근원적인 문제제기를 하기도 하지만 대체적으로 빌리 그래함이나 존 스토트의 명성에 압도당한 나머지 정확한 근거나 정당성을 따져 볼 의지도 상실한 채 막연한 추종의 길을 택하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일각에서 "'로잔언약'의 적용이 성경의 가르침에 부합한 것이냐"는 문제제기를 해도 묵살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복음주의권에 상당한 논리적 근거와 타당성을 제공해 주고 있는 '로잔언약'은 한국교회의 주류의 자리를 차지한 복음주의 노선을 따르는 많은 이들의 시각과 행동에 지대한 영향을 주고 있다. 상당수 교계지도자들이 복음주의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고, 그들이 교계와 사회의 주도세력으로 등장하자 복음주의는 자연스럽게 '메인스트림'으로 등장했다.
우리 사회의 복음주의자들은 손봉호, 김명혁, 이만열, 홍정길, 김진홍 등을 들 수 있으며 이들은 한국교계의 대표적인 지도자로 지칭되고 있고, 그에 걸맞는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역사적 정통 개혁주의 노선을 지지하고 따르는 나로서는 다소 긍정하기 힘들지만, 이들의 세계관이나 성경관이 옳다고 하더라도 오늘날 복음주의권이 우리 사회에 대해 적용하는 방식까지 옳다고 할 수 있을까.
성시화운동이나 사회참여를 주장하는 이들의 면면을 볼 때, 근본주의적인 경향을 가지고 사회와 교회 사이에 높은 담장을 가로질러 두었던 그들의 선배들과는 분명한 차이를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그들의 변화는 이성적으로 판단할 때 교계는 물론 사회로부터도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수 있을 것으로도 보인다.
하지만 그들이 취하는 방법에 있어서 성경의 예수 그리스도나 사도들의 입장들과는 다른, 어떤 면에서 그분들보다 '더 나은'(?)' 입장을 보인다.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과 구분을 두었으나 세상과 분리되어 사는 것이 아닌 세상속의 소금과 빛으로 살아갈 것을 명령했다.
이는 교회가 운동(Movement)이나 구호로 세상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기독인으로서 성경이 가르치는 삶의 모습을 구현하며 살아갈 때 가능한 일이다. 즉 삶 자체의 문제이지 의도적인 조직화나 운동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란 것이다.
조에성경신학원의 이광호 교수같은 이는 "예수께서는 당시 유대사회의 문제점들로 로마 식민통치나 노예제도 등에 대해 제도개선이나 혁명을 말씀하지 않았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오히려 가이사의 것과 하나님의 것을 구분하셨다. 하지만 사회에서의 당신의 제자들의 사명에 대해서 분명한 언급도 하셨다. 사도바울도 그랬다"면서 "역사적 정통 개혁주의자들은 복음주의자들과 달리 더 나은 미래적 교회보다 성경이 말하는 교회를 지향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가르침이 어떠했는지를 살피는 것이 개혁주의"라고 주장했다.
돌아보건대 포항에서 빚어졌던 갈등들은 어떤 면에서 성경보다 더 잘해보려는 인간의 열정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성경의 사도들과 제자들, 교회가 하지 않았던 일들을 우리시대에 해보려고 하는 그릇된 열정에서 빚어진 문제는 아닌가 하는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만큼 생각하고, 성경이 말하는 데까지 걸어가며, 성경이 제한하는 곳에 머무는 것이 신앙인의 모습이라면 오늘날 우리는 어떤 자세로 이 사회를 살아가야 할 것인가.
최근 복음주의권의 접근, 인본주의적 그릇된 열정
자료출처 http://www.newsnjo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318
시장의 기관장홀리클럽 활동을 문제 삼았던 포항의 불교계와 일부 시민단체들, 한국기독당이 출범했을 때 그들을 바라보던 교계와 국민들의 시선, 최근의 기독교사회책임의 발족에 대하여 이런저런 비판과 우려의 시선을 보내던 사람들.
우리 기독인들은 과연 어떤 관점에서 이러한 문제들을 바라보고 이해해야 할까? 예수 그리스도의 "너희가 세상에서는 환란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신 말씀을 동일하게 적용해도 되는 것일까.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가 매우 혼란스럽고 어지러운 것만은 틀림없는 것 같다. 여기저기에서 부정적이고 비관적인 말들이 쏟아지고 있고, 사회와 일정한 거리를 두어오던 보수 기독교계조차 정치 사회에 대한 자신들의 분명한 목소리를 내고 있기 때문이다.
일각에서 주도해 온 '성시화운동'이나 '홀리클럽'의 경우 이번에 적지않은 어려움을 겪었다. 현장은 경상북도 포항이었고 대상은 포항시장이었으나 홀리클럽과 성시화운동에 대한 세상의 시각과 평가이기에 근본적인 문제제기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취재과정에서 성경이 말하는 입장을 들어보기 위해 몇몇 신학자들의 견해를 들어볼 기회가 있었는데 "타 종교와 공존하여 살아가는 우리의 현실상, 배타적이고 공격적인 선교방식은 오히려 선교의 문을 닫게 할 수 있다"는, 어찌보면 당연한 지적이 나왔다.
이 말은 기독인들이 삶의 터전에서 하나님께서 세상에 부여한 보편 가치에 충실한 삶을 살아가면서 세상의 존경과 인정을 받을 때 자연스럽게 기독교회에 대한 인식이 바뀌어 질 것이란 말로도 풀이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교회가 교회답게 되는 것이 우선이다. 교회가 교회의 사명을 다하지 못하면서 사회에 대해 '이래라 저래라' 한다면 그 말에 귀를 기울일 이가 어디 있겠는가. 오히려 지금처럼 "너희나 잘해라"는 반응만 돌아오지 않을까.
성경적이진 않지만 나름대로(?) 열정적인 기독교회가 오늘날 종종 범하는 오류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특히 복음주의권에서 요즘 자주 들고 나오는 '전가의 보도'같은 논리는 바로 1974년 빌리 그래함, 존 스토트의 주도로 만들어진 '로잔언약'이다.
일부 교계의 학자들은 '로잔언약'에 대해 근원적인 문제제기를 하기도 하지만 대체적으로 빌리 그래함이나 존 스토트의 명성에 압도당한 나머지 정확한 근거나 정당성을 따져 볼 의지도 상실한 채 막연한 추종의 길을 택하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일각에서 "'로잔언약'의 적용이 성경의 가르침에 부합한 것이냐"는 문제제기를 해도 묵살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복음주의권에 상당한 논리적 근거와 타당성을 제공해 주고 있는 '로잔언약'은 한국교회의 주류의 자리를 차지한 복음주의 노선을 따르는 많은 이들의 시각과 행동에 지대한 영향을 주고 있다. 상당수 교계지도자들이 복음주의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고, 그들이 교계와 사회의 주도세력으로 등장하자 복음주의는 자연스럽게 '메인스트림'으로 등장했다.
우리 사회의 복음주의자들은 손봉호, 김명혁, 이만열, 홍정길, 김진홍 등을 들 수 있으며 이들은 한국교계의 대표적인 지도자로 지칭되고 있고, 그에 걸맞는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역사적 정통 개혁주의 노선을 지지하고 따르는 나로서는 다소 긍정하기 힘들지만, 이들의 세계관이나 성경관이 옳다고 하더라도 오늘날 복음주의권이 우리 사회에 대해 적용하는 방식까지 옳다고 할 수 있을까.
성시화운동이나 사회참여를 주장하는 이들의 면면을 볼 때, 근본주의적인 경향을 가지고 사회와 교회 사이에 높은 담장을 가로질러 두었던 그들의 선배들과는 분명한 차이를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그들의 변화는 이성적으로 판단할 때 교계는 물론 사회로부터도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수 있을 것으로도 보인다.
하지만 그들이 취하는 방법에 있어서 성경의 예수 그리스도나 사도들의 입장들과는 다른, 어떤 면에서 그분들보다 '더 나은'(?)' 입장을 보인다.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과 구분을 두었으나 세상과 분리되어 사는 것이 아닌 세상속의 소금과 빛으로 살아갈 것을 명령했다.
이는 교회가 운동(Movement)이나 구호로 세상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기독인으로서 성경이 가르치는 삶의 모습을 구현하며 살아갈 때 가능한 일이다. 즉 삶 자체의 문제이지 의도적인 조직화나 운동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란 것이다.
조에성경신학원의 이광호 교수같은 이는 "예수께서는 당시 유대사회의 문제점들로 로마 식민통치나 노예제도 등에 대해 제도개선이나 혁명을 말씀하지 않았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오히려 가이사의 것과 하나님의 것을 구분하셨다. 하지만 사회에서의 당신의 제자들의 사명에 대해서 분명한 언급도 하셨다. 사도바울도 그랬다"면서 "역사적 정통 개혁주의자들은 복음주의자들과 달리 더 나은 미래적 교회보다 성경이 말하는 교회를 지향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가르침이 어떠했는지를 살피는 것이 개혁주의"라고 주장했다.
돌아보건대 포항에서 빚어졌던 갈등들은 어떤 면에서 성경보다 더 잘해보려는 인간의 열정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성경의 사도들과 제자들, 교회가 하지 않았던 일들을 우리시대에 해보려고 하는 그릇된 열정에서 빚어진 문제는 아닌가 하는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만큼 생각하고, 성경이 말하는 데까지 걸어가며, 성경이 제한하는 곳에 머무는 것이 신앙인의 모습이라면 오늘날 우리는 어떤 자세로 이 사회를 살아가야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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