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홍 목사의 성경적 상담 연구소 RBD COUNSELING INSTITUTE
멘탈리티의 핵심 키워드 : 신성한 내면아이, 구상화, 의미와 통일성, 도약~
목록
주의인물

본회퍼 시대를 앞선 신학자 그러나

본회퍼 시대를 앞선 신학자 그러나

자료출처: http://blog.daum.net/jesuah/67

 

끊임없이 나를 움직이고 있는 것은, 도대체 기독교가 오늘 우리에게 무엇이며, 그리스도는 누구인가 하는 문제다. 이런 질문을 이제 신학적인 말이건, 신앙적인 말이건 말에 의해서 말할 수 있는 시대는 지났다. 내면성과 양심의 시대, 즉 일반적으로 종교의 시대(die Zeit der Religion)도 지났다. 우리는 완전히 무종교의 시대(völlig religionslose Zeit)를 맞고 있다. 이제 자연적인 인간은 이미 단순히 종교적인 인간이 될 수 없다. 종교적이라고 보이는 사람들도 결코 그것을 실제의 행위에서 나타내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종교적이라는 말을 무언가 전혀 다른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지난 1900년에 걸친 기독교 선교와 신학은 인간의 종교적 선험성 위에 세워져 있다. 기독교는 항상 종교의 한 형식이었다. 그런데 이 선험성이 전혀 존재하지 않고, 언젠가는 그것이 역사적으로 제약을 받은 잠정적인 인간의 한 표현 형식이었다는 것이 분명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인간이 정말 철저하게 무종교적으로 된다면, -내가 보기에는 그 시대가 이미 왔는데- 기독교는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기독교의 모든 기반이 무너지고, 다만 소수의 ‘최후의 기사들’, 혹은 지적으로 불성실한 사람들만 남게 될 것이다. 그런 사람들과는 종교적으로만 상대할 수 있을 뿐이다. <중략> 내 물음의 핵심은 다음이다. 그리스도는 무종교자의 주(主)도 될 수 있을까? 무종교적 그리스도인이 가능할까? 무종교적 기독교는 무엇인가? 바르트는 이런 문제를 생각하기 시작한 유일한 사람이지만, 그도 이 생각을 철저하게 밀고 나가지는 못하고, 계시 실증주의로 빠지고 말았다.(1944년 4월30일) 본회퍼 - 옥중서간 중에서

 

 

 

 

 

 


 

 

 

 

 

본회퍼 : 세속화 신학을 앞서 질러간 사람. 위의 짧은 글은 나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종교의 시대가 지났다라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정말 그의 말처럼 우리는 종교의 시대가 막을 내린 시대에 살고 있는가? 아니면 고대적인 종교의 한 형태-야스퍼스가 축의 시대에 탄생한 종교라고 부른 그런 종교들-가 이제 숨을 헐떡이지만 그럼에도 명맥을 유지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가? 나는 본회퍼와 달리 여전히 후자라고 생각한다. 물론 서구 유럽은 기독교가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하지만 보라. 세계화가 문화적 정체성의 문제를 불러 일으켜 전통적인 문화들을 다시 불러들이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영국의 유명한 대학의 신학부가 전통적인 신학의 형태로 돌아가고 있단다. 다시 말해, 성서를 세속화하는 것이 아니라 재성화화하고 있단다. 미국도 이제 지저스 세미나를 비롯한 센세이션한 신학이 가고 누가 예수를 부인하는가와 같은 과감한 문구를 들이대며 신학의 재신화화를 부르짖는 학자들이 등장하고 있다. 60년대와 70년대의 세속화 신학은 이제 저물었다. 본회퍼의 생각과 달리 지구화와 세계화로 인해 문화는 아니 종교는 다시 재신화화되고 있다. 결국 바르트의 계시 실증주의가 승리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한국은? 생각할 필요도 없다. 한국에서는 처음부터 신 죽음의 신학이나 세속화 신학은 학문적 담론으로 논의되어 본적이 없다. 아! 있구나. 박봉랑 선생님. 그러나 누가 박봉랑을 기억하는가? 안병무만 기억될 뿐이다. 나는 여기서 갑자기 불안해진다. 민중신학이 갖는 한계점에 대해서 말이다. 과연 민중신학의 틀거리는 신 죽음이나 세속화 신학이라는 다시 말해 본회퍼의 생각을 확장적으로 발전시켜 본 적이 있는가? 글쎄. 해방의 서사는 구원의 서사이기 때문에 신에 대한 죽음을 말하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 물론 민중신학 3세대들은 다르다. 그들에게서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하지만 신의 죽음을 적극적으로 사유하지는 않는 듯이 보인다. 구원의 서사와 성서 텍스트가 죽었음을 사유하지 않는 것. 그래서 약간은 불만족스럽다. 민중신학이 교회의 신앙과 관련한 민감한 사안들에 대해 얼마만큼 목소리를 내본적이 있는가? 예를 들면 기적이나 부활과 같은 문제들. 기적이나 부활과 같은 전통적으로 정통주의 교회들이 중요하게 여겼던 신앙의 양식을 그대로 떠안은 채 무언가를 진행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나는 한국에서 가장 진보적이라 평하는 신학에서도 계시 실증주의가 깔려 있음을 본다. 그러므로 본회퍼의 사유/물음은 아직도 우리의 현실에서는 불가능해 보인다. 하지만 나는 본회퍼를 적극적으로 사유하고 싶다. 그러나 더 확장되어야 할 것 같다. 그리고 확장의 한 예는 말에 의해 말할 수 있는 시대가 끝났음을 알리는 가장 극적인 사유로 종교의 죽음이 아니라 성서 텍스트의 죽음을 사유하는 일일 것이다. 이그나티우스적인 신약 텍스트들은 한번쯤은 죽어 부활할 필요가 있다. 프로테스탄트의 핵심적인 테제인 오직 성서만으로라는 어구는 더이상 유효하지 않다. 무종교 시대의 진정한 신호탄은 이미 죽은 종교 텍스트들처럼 성서 텍스트의 죽음이 극적으로 사유될 때다. 바로 그 때만이 종교는 죽었지만 그럼에도 종교를 대체할 수 있는 성서와 함께 계시의 세계를 끝까지 사유하고 싶어했던 프로테스탄트들의 계시 실증주의적 역사가 비로소 말소될 것이다. 칼빈이 그토록 싫어했던 성령주의자의 시대를 사유하라!   

이 글 공유하기

독자 의견

댓글이 없습니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