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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속화를 생각한다

세속화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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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cafe.naver.com/calgaryreformed.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1410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세속화는 피할 수 없는 현상의 하나이다. 더욱이 포스트모더니즘의 거센 물결에 휩쓸리고 있는 시대적 풍조를 감안한다면 세속화문제는 한번쯤 짚고 넘어가야 문제인 것이다. 보편적으로 오늘 우리시대의 정신구조나 가치체계는 초월적 세계의 문제나 초자연적 세계의 문제를 기피하며 인간의 이성을 인식론의 중심에 둔 계몽시대의 사상으로 회귀하고 있는 것 같은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세속화를 말한다면 세상풍속과 세속이라는 범위를 벗어나지 못한 사상적 사조의 일체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흔히 인간의 삶을 구분할 때 고상하고 이상적이며 전통적인 관념의 선상에 있는 말에 대립적인 것이 세속적인 것 일진데 세속화란 결국 인간의 삶에 방향이 시대적 조류에 따라 흘러가는 보편적 의식의 세계를 이름일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세속화란 오늘을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한편으로는 자못 심각한 문제로 부딪쳐올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우리 시대가 이미 사상적으로 세속화되어 버린 오랜 현상을 부정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신학의 세속화현상 역시 가속도를 내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를 사는 우리가 오늘의 세속화현상을 보면서 세속화의 거친 도전 앞에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세속화과정 자체를 무신론이나 탈종교화운동의 전형인양 오해해서도 않될 것이다. 그러므로 세속화와 세속주의는 분명 구분해야 한다. 세속화는 기독교신앙의 관점에서 볼 때 인간에게 내려진 이 세상에 대한 청지기적 관리사명을 수행해야 하는 현장이며 역사적 과정의 일환이라는 의미에서 기독교가 관심을 표명해야할 현장인 것이다. 그러나 세속주의는 이 세상을 절대화하는 인간의 내재주의적 세계관을 표방하면서 세상의 주인은 현실적 삶을 살고 역사의 현장에 서있는 인간임을 주장하는 사상이다.

그러므로 엄밀하게 말하자면 세속화와 세속주의는 구분되어야 하며 대처방안 역시 다른 것이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시대적 조류에 편승하고 있는 세속화현상은 별반 세속주의와 구분없이 (특히 신앙적 측면에서)동일한 범주에서 다양한 형태로 발전해가고 있는 양상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세속화에 대한 내 생각의 방향도 다분히 이 둘을 구분하지 않고 동일선상에 놓고 서술해 보고자 한다.


 

1965년에 미국 하버드대학의 유명한 신학교수인 Harvery Cox는 ‘세속도시’라는 책을 썼다. 그 후 이책의 사회적 반향은 놀라울만큼 확산되었다. 그는 자신의 책 ‘세속도시’에서 세속화를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현대사회는 부족사회에서 촌락사회를 거쳐 발전한 기술문명사회로 규정하면서 부족사회는 신화적 세계관에 살았으며 촌락사회는 문자와 기술에 의한 문명의 수단으로 합리적 종교의식을 가지고 살았으나 기술문명의 사회는 인간의 모든 영역을 세속화시키는 현대의 인간으로 정형화 시켰다. 세속사회의 세대는 종교가 없는 시대이다”

 

그런가 하면 화란출신의 세속신학자인 C.A van peursen 역시 세속화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인간의 이성과 언어를 지배해 오던 종교로부터의 해방이며 형이상학으로부터 인간을 해방하는 것을 의미한다”

퍼슨의 이 말은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무엇을 상징적으로 의미하는 것인가 하는 물음을 당연히 제기하게 만드는 것으로 현대가 보여주는 현상적인 세속화의 거센 물결을 무작정 부정할 수만은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세속화의 중요성은 단순한 역사의 흐름속에 겹가지적 사상풍조로 치부하기엔 종교와 연관되어 있는 문제가 심각성을 내포하고 있기에 묻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그곳에 종교, 아니 신앙의 자리가 있는가? 이 같은 물음에 하비 콕스의 말을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

“세속화현상은 세계의 종교적 이해로부터 세계를 풀어놓으며 모든 폐쇄적인 세계관을 헤쳐버리고 모든 초자연적인 신화와 거룩한 상징들을 깨트려버릴 것이다”

 

이런 현상은 우리들 관점을 신의 문제로부터 인간의 문제로 옮겨가게 만드는 것으로 결국 세속화란 세상을 인간 손에 맡겨진 역사의 비운명화로 말하게 만들고 말 것이다. 이는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섭리와 주권적 역사를 부정하는 것으로 세속화 또는 세속신학이 지향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명료하게 보여주고 있음이다. 다시 말하면 행복도 불행도 인간에 의한 의무된 사실로 인식하려는 관점으로 신의 영역을 인간의 영역으로 전이하려는 것으로 밖에 해석이 되지 않는다.

이는 Bon hoeffer 가 성인된 세계의 의식을 주장하며 역사에 반영하는 사상으로 볼수 있으며 곧 하나님 없이도 살아갈 수 있는 세상, 종교가 필요 없는 세계인 것이다. 성인된 세계에 살고 있는 성인인 인간은 모든 책임을 자신이 감당할 수 있기 때문에 종교가 필요 없으며 자신들이 스스로 신과 같은 위치에서 행동하며 자신을 스스로 책임진다는 사상으로 기독교의 전통적인 하나님은 불필요하다는 세속화신학에 맞닿아 있는 것이다.

 

하비콕스역시 이 같은 노파심에 적정한 문제의식을 던져준다.

“세속화는 종교적 세계관을 상대화시킴으로 무해한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이 말이 의미하는 문제는 기존에 가지고 있던 신적개념을 하나의 미신적 수준으로 전락시키거나 아니면 한 집단의 수호신 정도로 격하시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속화시대에 사는 세속도시 인간들에게 신의 존재는 이제 아무런 기대도 역할도 하지 못하는 전시관 속에 있는 박제품이나 인형 같은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현대를 사는 사람들에게서 가장 경계하고 두려워해야 할 것이 다름 아닌 종교 즉, 신(God)을 상실한 인간의 도약이다. 인간은 결국 인간일 뿐이다. 문명의 첨단을 넘는다 해도 인간은 자기 한계를 극복할 수없다. 유한한 인간이 궁극적으로 바라볼 곳은 무한한 존재인 신을 향한 열망이어야 한다. 철학적 표현을 빌린다면 신을 향한 관념의 열망체에서 실존의 열망체로 극복되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인간성에 관한 마지막 안식처가 되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는 매일같이 인간성이 파괴되는 현장들을 보고 있지 않는가. 인간에게서 인간성 상실은 이미 인간으로서 존재가치가 없는 것이나 다름 아니기 때문인 것이다. 이 같은 세속적현상에 세속화의 이름으로 신앙적 기름을 끼얹은 사람은 다름아닌 독일의 유명한 실천신학자인 Bon hoeffer 이다.

“세속화현상은 종교에 대한 미성숙한 의존으로부터 벗어나려는 표시이다” 

“전통적인 초월적 의미를 내재적 의미로 피안의 세계에 대한 관심을 차안의 세계에 대한 관심으로 돌림으로 전통적인 속의의 영역에 거룩성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본 훼퍼의 표현을 빌리면 세속화는 신의 주권이던 인간 삶의 영역을 이제 인간영역으로 돌려세우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인간을 성숙한 존재로 보며 시대를 열어갈 수 있는 원인자로 파악하려는 사상의 일단이다.

 

오늘날 일단의 기독교그룹에서 본회퍼는 대단한 인기를 지니고 있는 신학자이다. 그가 세속화신학에 불을 지폈고 그 불이 현재 맹렬하게 타오르고 있는, 우리 시대의 우려할 신앙의 지표를 흔들고 있는 상황을 인식할 때 그리스도인으로 참 신앙을 고백할 수 있는 시금석을 위해서라도 시대적 조류를 파악할 수 있어야 하며 그것은 더욱 참 신앙의 당위성을 위해서라도 반듯이 필요한 것이다.

본회퍼가 위험인물인 것은 그가 지닌 신학이 세속화신학으로 하나님을 배제한 인간의 능력을 극대화시키며 세상에서 인간의 책임의식을 강조하는 성인된 신앙을 추구하는 신학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비쳐진 그의 행동은 신앙적 양심행동주의로 세상에서 주목받는 이유는 신앙인으로서 세상을 향한 프락시스 때문이다.

본회퍼가 주장하는 것을 들으면 현대인(그리스도인 또는 비그리스도인)들이 왜 그렇게 호응하는지 알수 있을 것이다. 그는 세상 속에 사는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고통에 참여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 시대적 역사에 참여하는 것이며 그 속에 활동하시며 초월하시는 하나님을 매일의 삶속에서 발견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가 여기서 말하는 초월은 하나님의 전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며 다른 사람을 위하여 존재하는 인간, 곧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세속 안에서 발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역사적 예수를 신앙의 모티브로 생각하는 것이지 역사 안으로 들어오신 초월적 하나님의 내재성에 기인한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은 아닌 것이다.

 

본회퍼의 신학이 그의 신앙행동이 왜 그리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것인가. 그것은 아마도 항거정신, 행동하는 신앙양심, 역사적 현실에 참여하는 그의 참여신학 때문이 아닌지 모르겠다. 모르긴 해도 그 절정이 아돌프 히틀러의 암살조직에 가담하여 행동하다 사형을 당한 사건일 것이다. 이는 그 자신의 신학을 반영한 신앙적 행동이었다. 역사에 책임의식을 가지고 행동하는 참여의 용기, 프락시스를 그에게서 보기 때문이다. 오늘날 일단의 무리들이 본회퍼에게 환호하는 결정적인 이유일 것이다.

왜냐하면 이제까지의 기독교계의 우유부단한 행동이 그 단초를 제공한 것에 다름아니기 때문이다. 이론과 논리와 관념은 수북한데 정작 세상이 보기 원하는 프락시스는 볼 수 없었던 기독교계의 무사안일한 행동양식을 역발상적으로 비판하는 행동양식이 현상학적으로 드러난 경우인 것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의 신앙의 양심행동을 보면서 그의 용기있는 프락시스에 감동을 받으며 박수를 보내고 있는가. 여기에 우리 정통적 신앙을 수호하고 있다는 자부심에 젖은 우리들은 부끄러움을 부인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본회퍼의 신학사상이 아무리 멋진 프락시스를 동반할지라도 그의 신학은 본질적으로 초월하신 전능의 하나님을 배제한 윤리적사상이며 인간의 이성과 경험에 신뢰성을 두고자하는 실증주의적 사고유형을 지니고 있는 세속주의 사상에 부합하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정통신학적 관점에서 본회퍼는 대단히 위험한 인물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생각은 이제 피상성을 벗어나야 한다. 세속화가 인간 성숙을 담보하는 것으로 삶의 주도권을 쥐었다면 필연적으로 그에 따른 세속적 도시화에 의해 야기되는 문제(영혼의 구원, 안식)들을 방치하거나 외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비콕스는 세속도시의 문제들을 다음과 같이 피력한다.

“도시화에 따른 연관적 기술, 고도의 기동성, 고도의 집중, 대중전달 등이 뒷받침 될 것이다”

콕스가 말하는 세속도시의 특징은 크게 두 가지이다. 'The Pragmatism' 과 ‘The Profanity'이다. 즉, 실용성과 불경성인 것이다. 이것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것은 무엇인가. 결국 기능적인 관계는 인간을 종으로 묶어놓기 때문에 이로 인한 인격과 전통의 틀이 깨어짐으로 비인격화의 형태적인 결과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달리 표현하자면 세속화 세상에는 실체론적 사고방식은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곳에는 인간 기능을 목적 삼는 실용주의적 실재만 존재하며 아울러 그 어떤 신적인 신성한 것이 존재할 수 없는 불경성만 남아 있을 뿐이다. 이 같은 경향성을 향해 인본주의적 세속화에 앞장 선 프랑스 작가Camus 의 말은 의미심장하다.

“인간의 원천을 인간 스스로에게서 찾아야 하는 것이지 결코 신의 창조물이나 부가물로 이해하는 초인간적인 것에서 찾아서는 안된다”

세속도시에 사는 인간에게 신앙은 무엇인가 라는 물음은 어쩌면 우리 모두에게 심각한 질문이 될 것이다. 이에 대한 이해도 역시 하비콕스에게서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세속화는 무신론적 사상이 아니라 세속인을 위한 비종교적 이해를 통해야한다. 신에 대하여 세속화 형식의 복음을 말하는 세속적인 신의 의미를 과제로 부여하는 것이다”

세속도시에 사는 인간이 종교 없는 그들만의 사회로 종교적 과제가 결코 끝났다고 포기해서는 안되는 것이지만 그들에게는 그들만의 문제가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콕스는 말한다.

“세속도시의 현대인들에게는 ‘소외’라는 시대적 정신병을 앓고 있다”   

결국 무엇인가. 인간은 신의 존재는 상실하고 망각하려하지만 정작 자신이 소외되는 마음의 병을 앓는 것이다. 키에르케고르가 말한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 같은 것이다.

 

현대를 사는 우리가 매일같이 느끼는 것이 바로 삶이라는 현장에서 소외라는 병리학적 정신질환으로 시달리는 잠재적 소요들을 안고 있는 인간무리가 다름 아닌 우리 자신이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그렇다면 무엇이 세속도시에 사는 인간을 소외시키는가?

퍼슨은 이를 잘 요약하여 들려준다.

“세속도시의 인간소외는 기동성에 따른 무명성 때문이다. 자기라는 인간의 인격체적 형태는 없고 실용성을 뒷받침해야 하는 기동성에 의한 개체화된 한 구조의 부속품 정도의 자기비하가 소외라는 병리현상을 일으킨다. 심각한 문제는 이곳에서 인간관계는 인격이아니라 부호나 통신기의 역할이라는 자기 상실이다”

이 얼마나 정곡을 찌르는 표현인가. 사실 오늘 현대사회가 안고 있는 딜레마가 아닌가. 정신병원 병동마다 환자들이 왜 그리 넘쳐나는지 그 원인을 우리는 모른 채 외면하지 말고 정직하게 찾아야한다. 세속도시도 인간이 살아야하고, 살아가야하고, 살아남아야 할 곳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병자로 남을 순 없지 않는가?

 

세속화에 대한 담론은 결국 인간에 대한 담론이다. 인간에게서 가장 무서운 것은 무관심이다. 인간은 기계가 아니다. 실용성을 위해 기능적 도구로 무한정 사용해도 되는 그런 존재가 아니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 필요가 없는 그래서 신의 존재를 망각해도 좋은 불경성으로 인한 영혼이 파괴어도 좋을 그런 존재는 더더욱 아니다.

현대의 신학자들이 시대적 현상을 진단하면서 정통적인 신학에 의존하지 않고 현대신학과 사상에 기대어 자신들 나름의 그림을 그려내고 있을지라도 분명한 것은 그들의 진단과 처방을 무시하거나 과소평가해서도 안될 것이라는 문제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인 그리스도인이 관심을 쏟아야 할 것은 세속화의 물결에 자신이 휩쓸려가는 것을 방치하지 말아야 하는 것뿐만 아니라 현상적으로 일어나는 주변의 상황들에도 무관심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할 일이다. 그것은 곧 인격과 인격이 친밀함과 정감으로 교류하고, 하나님과 인간의 인격적 만남이 신령한 교감으로 교통할 수 있어서 세속화에 따른 안일한 의식이나 무관심을 경계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신앙적 측면에서 세속화와 세속주의를 구별할 수 있어야 하며 신학적 원천으로 세속화가 오용되지 못하도록 원천봉쇄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것만이 교회 깊숙이 이미 들어와 있는 변질된 세속화 및 세속주의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지키는 일이 될 것이며 세속화에 대한 면역성을 기르는 길이다. 모두 함께 고민해야 할이지 싶다. 세속화에 대한 생각이 길어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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