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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트만의 보편 화해론에 대한 비판적 고찰

몰트만의 보편 화해론에 대한 비판적 고찰


 김영한(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장/조직신학) 

자료출처 한국복음주의 조직신학회  http://theologia.co.kr/theologia.htm



머리말


이미 들어선 새천년과 더불어 종말론은 기독교회의 진지한 관심의 대상이다.  종말론은 기독교신앙의 고백 가운데 가장 중요한 신앙의 항목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종말론적 소망과 관련하여 만유회복 내지 보편 화해는 현대의 자유로운 신자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강조하는 현대신학자들에 의하여 주요 의제로 등장하고 있다. 더욱이 바르트 이래로 독일의 뮌헨의 보편사 신학자 판넨베르그. 그리고 튀빙엔의 신학자 몰트만이 그의 소망의 신학에 입각한 보편 화해론, 다시 말하면 보편 구원론을 주장하고 있다. 이것은 몰트만 저서의 번역을 통하여 한국 교회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고 있다.  필자는 성경적 복음주의적 종교개혁적 신학의 입장에서 몰트만의 이러한 신학적 주장을 분석하고 이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하고자 한다.   



1. 십자가 신학적 착상 



몰트만은 종말론의 가장 예민한 잇슈인 최후의 심판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해서 그의 소망의 정치신학이 근거하고 있는 십자가 신학의 착상에서 시작한다: “종말론적 문제들에 대하여 해답을 구하기 위해서는 ”멀리 방황할 필요없이“, ”골고다에서 일어난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의 깊이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몰트만은 “그리스도의 지옥여행에서만 ”한계가 없는 화해의 확실성과 ‘모든 사물의 회복’, 만유의 회복,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세계의 새 창조를 기다리는 희망의 참된 근거를 발견할 수 있다“1)고 말한다. ”그리스도의 지옥여행“이 바로 ”만유의 화해를 위한 신적 근거“이다. 몰트만은 그리스도의 지옥여행을 ”아무것도 상실되지 않으며 오히려 모든 것이 회복되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로 모아진다는 확신을 근거시키는 것“으로 해석한다.



몰트만은 이 십자가 신학적 착상을 종교개혁자 루터에게서 가져온다. 루터는 선택과 예정에 관한 시험 속에서의 해답을 “그리스도의 상처”에서 찾았다: “너는 그리스도의 상처로부터 시작하여라. 그러면 예정에 관한 모든 토의는 곧 중지될 것이다”.2) “그리스도의 상처를 보아라. 거기에 너희 선택이 확실히 있다”. 루터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버림받음 속에서 지옥과 하나님의 버리심과 영원한 죽음의 고통을 우리를 대신하여 당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의 버림받음의 상처와 고통 속에서 우리의 예정과 선택을 알게된다는 것이다.



몰트만은 이러한 그리스도의 지옥 여행을 다음같이 해석한다. “지옥의 경험 속에서도 당신은 함께 계신다”. “우리 가운데서 지옥에 대한 우리의 경험 속에 있기 위하여, 당신은 우리를 위해 지옥의 경험을 당하였다”. “지옥과 죽음은 하나님 안에서 지양되었다”.3) 몰트만은 만유의 화해의 근거를 그리스도가 “그의 고난과 죽음 속에서 하나님으로 버림받고” “총체적인 지옥의 저주를 경험하였다”는 데서 찾는다.4) 그는 다음같이 말한다. “만유회복에 대한 희망의 참된 기독교적 근거는 십자가 신학이다” “십자가 신학으로부터 나오는 유일한 실제적 귀결은 모든 사물의 회복이다”5)



2. 최후 심판 - 그리스도 구속 사역의 완성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의는 “복수하는 의가 아니라 회복하는 의” 이다.  그것은 “그의 것을 그에게(suum cuique) 돌려주는 의“가 아니라 ”법을 세우며, 의롭게 하는 의“이다. 몰트만은  “십자가에 달려 죽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는 속죄의 벌에 대한 법이 집행되지 않는다‘고 해석한다. ”영원한 죽음의 벌이 선고되지 않는다“.6) 여기서 몰트만은 십자가의 사건을 단지 사회적 정의를 회복하는 정치적 의를 회복하는 사건으로 격하시키고 있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 분 안에서 우리는 최후의 심판자, 곧 고발당한 사람들을 위하여 그들을 대신하여, 그들의 행복을 위하여 심판을 받은 자가 된 그분을 인식한다”7)  그리하여 그는 이 정치적 사건인 십자가의 사건을 최후의 심판 사건의 해석의 틀로 사용하고 있다. “불법으로 인하여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에게 법을 세워주고 하나님 없는 사람들을 의롭게 하는 하나님의 의를 그리스도의 역사 속에서 경험한 사람은, 최후심판 때에 어떤 의가 이 파괴된 세계를 다시 회복하며 모든 사물을 바르게 돌려놓을 것인가를 안다”.

  

몰트만은 여기서 이 최후의 심판에 적용되는 의는 하나님의 공의가 아니라 칭의의 의라고 해석하면서 십자가의 사건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칭의의 의와 최후의 심판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심판의 공의를 혼동하고 있다. “그것은 복수하는 의, 곧 그의 것을 그에게 돌려주는 의, 악한 사람들에게는 악한 것을, 선한 사람들에게는 선한 것을 되돌려주는 의가 아니라, 법을 세우며 회복하고 의롭게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되신 아브라함의 하나님의 의이다”.8)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에도 죄값에 대하여 복수하는 의가 있는 것을 인정해야한다. 단지 하나님은 죄값에 대한 복수를 그의 아들에게 하심으로 죄인에게는 용서의 의, 의인(義認) 내지 칭의(稱義)의 의를 주신 것이다. 그런데 몰트만은 역사 종말에  심판하시는 하나님에게서 복수하는 의를 제거함으로써 하나님을 초대교회의 이단 마르시온(Marcion)의 하나님으로 변형시키고 있지나 않는가?  



3. 최후의 심판 - 만유 회복의 시작



몰트만은 최후 심판을 만유 회복으로 이해함으로써 기독교 종말론에서 종말론의 성격을 제거하고 그것을 새 창조론, 만유 회복론으로 변형시키고 있다. 몰트만은 이렇게 피력한다. “최후 심판은 종말이 아니라 시작이다. 그것의 목적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한 모든 사물의 회복이다”.9) 몰트만은 “예수가 심판자라면, 그는 그 자신이 계시한 것과는 다른 의, 곧 원수 사랑의 법,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과 병든 사람들과 죄인들을 용납하는 법과는 다른 의에 따라 심판 할 수” 없다고 본다. 몰트만에 의하면 “최후의 심판 때 사용되는 의는 법을 세우고 구원하는 하나님의 의, 율법과 예언자들이 증언하는 의, 사도 바울이 그의 복음에서 선포한 칭의의 의와는 다른 의”가 아니다. 몰트만은 “최후의 심판이 이스라엘의 역사와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계시한 것과는 다른 “심판의 두가지 결과”라면 “기독교신앙은 내적 모순에 빠진다”고 본다. 



몰트만은 여기서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심판과 멸망”이란 영원한(aionios) 것이 아니라고 주석한다. 마가복음 9장 49절의 “지옥의 불”도 정화의 불(Reinigungsfeuer)로 해석한다. 그는 다음같이 결론 내린다. “심판과 멸망과 ‘영원한 죽음’에 대하여 진술된 것은 마지막 시간적이고 시대적인 것을 의미하며 ‘영원한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멸망은 종말론적으로 마지막 이전의 것으로서 마지막의 것의 지평 속에 있기 때문이다”.10)  이러한 몰트만의 만유 회복의 사고 구조 속에서는 바르트의 보편 화해론처럼11) 종말론의 엄격한 종말의 성격이 탈락되고 종말론이란 만유 회복을 위한 계기에 지나지 않는다.


4. 성경 주석학적 근거



몰트만은 만유 회복론에 대한 성경 주석학적 근거를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에베소서 1장 10절: "하나님의 경륜은 때가 차면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 분을 머리로 하여 통일 시키는 것이다".  골로새서 1장 20절: "그리스도의 피로 평화를 이루셔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나 다 기쁘게 자기와 화해시키셨다." 몰트만은 에베소서와 골로새서의 우주적 기독론에 있어서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들”이란 “모든 사람과 땅 위에 있는 생물은 물론 천사, 분명히 불순종한 천사들”을 의미하며, 이들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화해된다”고 해석하고 있다.


그러므로 몰트만은 이 두 구절은 “모든 사물의 회복, 세계의 완성(recapitulatio mundi)의 형태를 향한 만유의 귀향을 말한다”고 해석한다.12) 또한 몰트만은 빌립보서 2장의 그리스도 찬가도 만유 회복의 비젼을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 있는 모든 이들 모두가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게 하시고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고백하게 하셔서,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다”(빌2:10-11). 몰트만은 고린도 전서 15장 부활의 章(장)도 두가지 심판에 대하여 아무 것도 말하지 않는다고 해석하고 있다. 이 부활의 장도 몰트만은  아담 -그리스도의 유형론을 말하면서 만유 회복을 제시하고 있다고 본다. 



몰트만은 그리고 만유 회복론을 지지하는 성경 구절로서 다음 구절을 든다: 로마서 5:18: “한 사람의 범죄 행위 때문에 모든 사람이 의롭게 하여 주심을 받아서, 생명을 얻었다 ”. 고전 15장 25절: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는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을 것이다”.  로마서 11장 32절: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않는 상태에 가두신 것은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시려는 것이다”.



그러나 몰트만이 보편 화해론을 지지하기 위해서 지시하는 이 성경 구절들은 몰트만 자신과 만유 화해론자들이 일반적으로 만유 화해론적으로  해석하는 구절일 뿐이지 그가 열거한 성경 구절들이 바로 보편 화해론을 입증하는 것은 아니다. 에베소서 1장 10절과 골로새서 1장 20절에서 바울이 말하는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모든 것을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해하였다”는 구절은 오리게네스와 몰트만 등이 해석하는 바 만유 회복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그리스도 화해의 우주적이고 보편적 범위를 말하는 것이지, 이것이 반드시 최후의 심판의 두 가지 결과를 배제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우주적 주권과 권세 아래서 만유가 그에게 통일되고 그의 주권 아래서 최후의 심판의 두 가지 결과, 영생과 영벌이 나누어진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이 전통적인 교회의 가르침이다.   



더군다나 이상의 구절들은 최후 심판의 두 가지 결과에 대한 명백한 구절과 연관에서 조명되어야 한다. 마태복음 25장 31-46절은 슬기로운 처녀들과 어리석은 처녀들 대하여 말하며 인자의 세계심판의 비전을 제시한다. 세계 심판자는 그의 왼편에 있는 사람들에게 다음같이 말한다: “저주받은 자들아, 내게서 떠나서 악마와 그 부하들을 가두려고 준비한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라”. 그리고 세계 심판자는 그의 오른 편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는 말한다 : “와서 창세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한 이 나라를 차지하라. 여기 내 형제 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바로 내게 한 것이다”. 마가복음은 9장 45절은 “지옥”에 대하여 말하며 48절은 “영원한 불”에 대하여 말한다. 누가복음 16장 23절에 의하면 부자는 “지옥과 고통 ”에 떨어지고, 가난한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진다



요한계시록 20장에는 천년왕국 후에 다가올 최후의 심판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며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계 20:12-15)



5. 성경적 복음주의적 입장에서 비판적 고찰



이상의 몰트만의 만유 회복론에 대하여 성경적이고 복음주의적 관점에서 다음 같은 비판적인 입론이 제기될 수 있다.  



첫째, 몰트만은 십자가 대속의 의미를 그의 소망의 종말론으로 변질시키고 있다. 몰트만은 다음 같이 피력한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죽음과 부활 속에서 완성한 것이, 그의 복음을 통하여 모든 사람에게 선포되며, 그가 나타나실 때 모든 사람과 모든 것 안에서 드러날 것이다”.13) 몰트만은 창조에 있어서 “죄가 첫째의 일이 아니라 창조의 근원적 복이 첫째의 일”14)로 해석하고 있다. 그는 창조의 복을 새 창조인 종말 차원에도 그대로 적용하고 있다: “ ‘보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하노라’(계21:5). 이것이 마지막의 것이다. 하늘과 땅의 새 창조에 있어서 죽음은 더 이상 있지 않을 것이다. ‘자연적 죽음’도, ‘죄의 죽음’도, ‘영원한 죽음’ 도 없을 것이다”.15) 여기서 몰트만은 최종적인 것에서 죄와 사망과 음부의 영원한 분리와 심판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 몰트만은  미하엘리스(Walter Michaelis)의 만유회복론을 인용하면서16) “만물의 화해”가 하나님의 구원계획의 마지막 목적이라고 해석한다. 하나님의 “최후심판은 두가지 결과를 갖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물의 새 창조를 위하여 하나님의 의를 보편적으로 관철시키는 데에 봉사한다”.17)  여기서 몰트만은 종말이 갖는 심판과 분리의 차원을 탈락시키고 있다.



둘째, 몰트만은 특수 구속론을 보편 구속론과 혼동하고 있다. 믿는 자의 구속과 모든 자의 구속을 혼동하고 있다. 필자의 견해에 의하면 몰트만이 인용한 루터에 있어서 보편구원의 문장인 “죽음의 준비에 대한 설교”(1519)는 불신자를 포함한 모든 사람에 대한 예정이나 선택의 문장이 아니다. 그것은 더구나 보편구원의 문장이 아니다.  다음은 루터의 설교문이다. “너는 지옥과 고통의 영원을 선택과 함께 네 안에서, 지옥 안에서, 멸망 받은 사람들 가운데서 보아서는 안 된다. 너는 온 세계에 있는 선택받지 못한 만은 사람들을 염려해서는 안 된다. ..너를 위하여 지옥으로 갔으며, ...영원히 멸망 받은 자로 하나님의 버림을 받은 그리스도의 천상의 상을 보아라. 보아라, 그 상 안에서 너의 지옥이 극복되어 있으며, 너의 불확실한 선택이 확실하게 되어 있다.“18) 여기서 루터는 불신자나 보편적인 인류에 대한 예정과 선택에 대하여 말하고 있지 않고 바로 자기의 구원과 예정과 선택에 대하여 시험받으며 번민하고 있는 개인, 바로  신앙을 가지고 십자가를 바라보는 개별신자의 실존적 체험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고 읽는 것이 바른 해석일 것이다. 



몰트만은 만유 회복론의 근거를 인본주의적 낙관주의에서 찾지 않고 십자가 신학에서 찾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유 회복에 대한 희망의 참된 기독교적 근거는 십자가 신학이다”고 말함으로써 몰트만은 믿는 자의 대속을 위한 십자가를 불신자까지  포함한 모든 인류에  대한 구속으로 확장시키고 있다. “십자가 신학으로부터 나오는 유일한 실제적 귀결은 모든 사물의 회복이다”19)고 말함으로써 몰트만은 믿는 자의 대속의 십자가 신학을 불신자까지 포함한 모든 인류의 회복이라는 보편 구속론으로 귀결시키고 있다. 그리하여 몰트만은 그가 출발한 루터의 십자가신학을 루터가 전혀 의도하지 않았던 보편 화해론으로 변질시키고 있다. 몰트만은 십자가의 사건을 바로 만유 화해의 사건으로 단정지으면서 이것을 인간 믿음을 조건으로 하는 특수한 구속의 사건이 아니라 바로 만유 화해의 사건으로 해석하고 있다.



만유 화해를 주장하기 위해서 몰트만이 제시하는 십자가 신학적 문장은 다음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신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희생과 부활에서 단일회적으로 결단되었다. 하나님은 소수의 선택받은 자들뿐만 아니라 우주를 그 자신과 화해시켰다(고후 5:19). 하나님은 믿는 사람들뿐 아니라 ‘세상’을 사랑하셨다(요 3:16). 멸망에서 구원으로의 위대한 전환은 골고다에서 일어났으며, 우리의 신앙의 결단이나 전향의 시간에 비로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20) 여기서 몰트만은 그리스도의 대속의 사건을 만유 화해의 사건으로 해석함으로써 신앙과 불신앙의 구분을 무효화하고 있으며 신앙의 결단 이전에 이미 골고다에서 일어난 보편구원의 사건을 강조하고 있다.



셋째, 몰트만은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를 희망의 낙관주의 안에서 해소시키고 있다. “십자가에 달려죽은 그리스도의 심판에서는 ‘속죄의 벌에 관한 법이 집행되지 않는다”.21) 몰트만은 “사람이 한번 죽는 것은 정한 일이요, 그 뒤에는 심판이 있다”(히 9:27)라는  히브리서의 말씀을 희망의 낙관주의의 틀 안에서 다음같이 해석한다: “축복 받는 일이 신앙과 결합되어 있다면, 신약성경의 모든 보편적 진술을 우리는 하나님의 선한 구원의 뜻과 관련시켜야지, 역사의 결과와 관련시켜서는 안될 것이다”.22) 그는 다음같이 선언한다: “영원한 죽음의 벌이 선고되지 않는다”.23)  “십자가에서 일어난 그의 지옥과 같은 죽음으로부터 부활한 이후로 더 이상 ‘영원히 멸망되어 있음(Verdammt-in-alle-Ewigkeit)은 존재하지 않는다”.24) 여기서 몰트만은 영원한  멸망과 심판을 부인하고 있다. “최후의 심판은 위협이 아니라” 만유의 회복이라고 다음같이 주장한다.25) “모든 죄인, 악한 자들과 폭력을 행하는 자들, 살인자들과 사단의 자식들, 모든 마귀와 타락한 천사들이 하나님의 심판 속에서 해방되며 그들이 치명적인 사멸에서 변화됨으로써 그들의 참된 피조물적 본질로 구원을 받는다”.26) 여기서 몰트만의 종말론적 사고에는 최후심판과 영원한 멸망의 측면은 탈락되고 사단까지도 구원얻는 만유 회복의 소망의 관념론이 지배하고 있다.  



넷째, 몰트만은 최후의 심판을 보편적 화해의 종말로 그리면서 소망의 새 창조론으로 변질시키고 있다. 몰트만은 다음 같이 피력하고 있다: “소위 최후심판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편적 계시와 그의 구원의 사역의 완성에 불과하다”.27) “최후심판은 종말이 아니라 시작이다” “그것의 목적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한 모든 사물의 회복이다”.28) “최후의 심판에 대한 선포의 종말론적 의미는 구원하는 하나님의 나라이다”. 여기서 몰트만은 악한 자를 벌하시는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을 부정하고 있고 두려운 최후의 심판을 단지 새로운 회복이요 소망의 시작으로 변질시키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복음 선포에서 최후심판 때  두 가지 부활에 관하여 말씀하고 있다.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 5:28-9). 예수님은 마태복음 25장에서 최후의 심판 때 두 가지의 결과를 열처녀 비유(마 25:1-13)와 달란트 비유(마 25:14-30)와 양과 염소의 비유(마 25:31-46)로서 명료히 말씀하고 있다.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인자는 의인과 악인을 양과 염소처럼 분별하고 영생과 영벌을 판결한다.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 같이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 들에게 이르시되 나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마 25:31-46).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의인의 기준은 형제 중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사랑을 베푼 것이며, 악인의 기준도 형제 중 지극히 작은 자에게 사랑을 베풀지 아니한 것이다.



요한 계시록 21장에서도 만유의 회복이란 명시적으로 두 가지 면에서 진행된다. 한 면은 눈물과 사망과 애통과 아픈 것의 극복이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 갔음이러라”(계 21:4). 다른 면은 불신자와 악한 자들에 대한 심판이다.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한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계 21:8). 계시록 21장 새 예루살렘 에 관하여  자세히 묘사하면서도 여전히 최후 심판의 두 가지 결과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췸이 쓸 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 양이 그 등이 되심이라.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오리라...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오겠고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오지 못하되 오직 이린 양의 생명 책에 기록된 자들 뿐이라”(계 21:23-27). 요한계시록 마지막 장인 22장에서도 여전히 최후심판의 두 가지 결과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그 두루 마리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 개들과 술객들과 행음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성밖에 있으리라”(계 22:14-15).



종말에 관한 묵시의 기록을 마치면서 사도 요한은 예언의 말씀에 더하거나 빼지 말 것을 경고하며 이것은 바로 거룩한 성에 들어가는 것과 관련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라”(계 22:19) .  따라서 몰트만은 그의 종말론적 사고에 있어서 요한계시록이 만유 회복과 더불어 명시적으로 말하고 있는 이 심판의 두 가지 결과에 관한 구절들에 관하여는 침묵하고 있다.  



다섯째, 몰트만은 역사 종말의 심판을 역사 속에서 일어나는 심판으로 역사 내재화시킨다.

몰트만에 의하면 심판은 역사 종국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정의로운 행위로서 일어난다. “심판은 역사에 관련되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의 측면을 가리킨다. 이 살인적이며 고난 당하는 세계의 모든 죄, 모든 악의, 모든 폭력행위, 모든 불의가 심판 때에 정죄되고 폐기된다”.29) 몰트만은 다음같이 피력한다. “세계 심판과 만유의 화해는 모순이 아니다. 만유의 화해는 하나님이 모든 사람과 모든 것을 그의 영광의 날로 모으시기 위하여 그의 회복시키시고 의롭게 하는 이의 그 속에서 계시하는 세계심판을 통하여 일어난다”.30) 따라서 몰트만은 역사 종국에 일어날 최후의 심판을 역사 가운데 일어나는 하나님의 정의로운 행위로 해석함으로써 그의 종말론은 정치 신학적 성격을 더욱 강하게 가지게 된다. 종말론은 하나님의 역사적인 행위를 넘어서는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종국적인 행위인데 그것을 역사 속에 내재화시킴으로써 역사 종국에 대한 궁극적 의미를 단지 보편적 화해와 만유 회복이라는 사변적 착상에 초점을 두고 있다.



여섯째, 몰트만은 지옥과 죽음의 실재성을 부인하고 있지나 않는가? 몰트만은 루터가 지옥이 “특정한 장소”라고 믿지 않았다고 해석하면서 지옥이란 “세계의 장소가 아니며, 지하의 세계도 아니라고 ”해석한다. 몰트만은 그것을 루터를 따라서 “실존적 경험”으로 해석한다.  “지옥이 분리된 장소가 아니라 실존의 경험”이라고 해석하면서 몰트만은 지옥의 실재성을 부인하고 그것을 실존경험으로 해석하고 있다: “지옥의 경험 속에서도 당신은 함께 계신다”. “우리 가운데서 지옥에 대한 우리의 경험 속에 있기 위하여, 당신은 우리를 위해 지옥의 경험을 당하였다”. “지옥과 죽음은 하나님 안에서 지양되었다”.31) 여기서 지옥의 치명성과 영원한 죽음의 가공(可恐)성이 소망의 낙관주의에 의하여 그림자 지어지며 퇴색하고 있다. 

  

몰트만은 다음 문장에서도 지옥의 실재성을 부정하고  심지어는 지옥의 파괴를 말한다. “그리스도는 지옥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에, 지옥의 문들이 열렸으며 그것의 담이 무너졌다. 그의 고난을 통하여 그리스도는 지옥을 파괴하였다”.32) “하나님의 사랑이 마지막 불신자를 극복하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그늘이 지옥을 해체하기 때문에, 종말에  하나님이 모든 것 안에 모든 것이 되실 것이다”.33)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지옥에 가서 복음을 선포했다고 말하고 있으며 지옥을 파괴했다거나  해체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최후심판 때 그리스도는 사망과 음부를 영원한 불못 속에 던지실 것이라고 계시록은 증언하고 있을 뿐이다: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계 20:14).  



일곱째, 몰트만의 종말론은 진정한  종말론이 아니다. 그것은 심판이나 사망이 없는 만유 회복론이기 때문이다. 몰트만은  기독교 종말론을 “모든 사물의 회복에 대한 종말론적 이론”으로 해석하고  그것을 “회복시키는 하나님의 심판과 새로운 생명으로 일으키는 하나님 나라라는 두 가지 면”에서 해석하고 있다.34) 몰트만은 최후의 심판을 “하나님이 그의 ‘새로운 세계를 영속적인 의 위에 세우시고 그리하여 영원한 평화로 지으시도록 하기 위하여 모든 것과 모든 것 안에서 그의 의를 계시하시는”35) 회복으로 해석한다. 몰트만은 최후의 심판을 하나님으로부터 기대할 수 있는 ’마지막의 일(das Letzte)이 아니라 ‘마지막 이전의 일”(das Vorletzte)로 해석하며 이 심판은 역사 속에서 의로운 행위로 야기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마지막의 일”이란 “그의 나라와 모든 사물의 새 창조”라고 본다. 이러한 몰트만의 만유 회복론에서는  ”심판이 마지막의 일이 아니라, 의가 그 안에 거하는 새 창조의 궁극적 축복이 마지막의 일”36)이 된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만유 회복이란 최후심판을 통하여 일어나는 것이다. 최후심판 없는 만유 회복이란 성경의 증언과는 다른 것이다.



여덟째, 몰트만의  만유 화해론은 신앙의 결단을 해체시키고 하나님의 은혜를 값싸게 만든다. 몰트만 자신도 이 논리에 동조하고 있다: “모든 사람이 마지막에 구원을 받을 수밖에 없다면” “하나님은 은혜는 자유스러운 은혜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유를 고정시킨다. 그것은 신앙의 결단의 궁극성을 해체시켜버린다”.37) “만유 화해론은 신앙의 결단을 하나님이 그것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것만큼 생각하지 않는다”.38)  몰트만은 만유 화해론이란 “하나님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심판의 두 가지 결과론”이란 “인간의 놀라운 자기 신뢰”를 표현한다고 말하면서 전자의 입장에서 후자를 비판한다: “신앙이냐 아니면 불신앙이냐의 결단이 영원한 의미를 가진다면, 영원한 운명, 열락이냐 아니면 멸망이냐의 문제는 인간의 손안에 있게 된다. 인간으로부터 영원히 무엇이 되느냐 하는 것은, 사실상 인간의 태도에 달려있다. 하나님의 기능은 복음을 통하여 구원을 제시하고 최후 심판 때 인간이 구원을 받아들였느냐 받아들이지 않았느냐를 확정하는 것으로 위축된다.”39) 



몰트만은 전통적인 최후의 심판론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인간 행위에 의존시킴으로써 제한시킨다고 비판하고 있다: “인간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행위가 그리스도를 이 인간의 구원자로 만든다. 그러하다면 인간 자신이 자기를 구원하거나 멸망시키는 것이 아닌가”.40) 몰트만은 전통적인 최후의 심판론이 인간 믿음의 행위자체를 구원자로 만들어 버리는 결론에 도달한다고 비판하고 있다. 그리고 몰트만은 전통적인 최후의 심판론이 강조하는 인간 신앙의 결단은  하나님의 구원을 힌두교의 카르마 법칙에 얽매이게 하는 것이라고 비난한다: “열락이나 멸망이 인간의 신앙이나 불신앙의 귀결이라면, 하나님은 불필요할 것이며, ‘행위-결과의 연관성’과 카르마의 법칙만으로 연관성을 회복하기에 족할 것이다. 영원과의 관계에서 인간 자신이 그의 행복에 대한 대장장이요, 그 자신의 무덤을 파는 사람이라면, 인간이 그 자신의  하나님일 것이다”.41)



이러한 몰트만의 명제에는 하나님의 주권을 변호하는 내용이 담겨있는 것 같이 보이나 자세히 음미하면 복음의 선포에 대하여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시는 믿음의 결단을 무효화시키는 은밀한 인본주의의 처방이 들어 있다. 그러면 복음의 선포는 필요 없는 것이 되며 인간의 신앙의 노력도 이러한 골고다에서 일어난 화해의 보편주의적 전환에 의하여 무력한 것이 되어 버린다.



몰트만은 복음의 선포와 회개의 촉구를 종교적 상업주의라고 비난하고 있다: “ ‘제공 가운데 있는 교회(Kirche im Angebot)라는 진부한 슬로건은 하나님을 ’모든 사물의 지구촌적 시장화‘로 등장한 이 사회의 종교적 수퍼마켓에 진열된 싸구려 상품의 공급자로 만든다. 그렇다면 ’손님‘이 ’하나님의 왕‘일 것이다”.42) 여기서 몰트만은 교회가 사회를 향하여 교회가 제시하는 복음의 선포를 포기하고 하나님의 보편 화해론을 제시함으로써 불신자들이 복음을 수납하는 것에 대하여는 신경 쓰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교회의 필수적인 복음선포의 사명을 방기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맺음말



몰트만은 만유의 화해와 모든 사물의 회복을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에 근거시킴으로써 보편적 은혜의 신학과 개별적 신앙의 신학 사이의 논쟁을 극복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의 시도는 특별한 은혜와 보편적 은혜를 혼동함으로써 기독교 종말론에 있어서 불신자에 대하여서 까지도 구원의 길을 열어놓는 보편 구원론으로 귀결하였다. 최후의 심판이란 죄인과 거룩한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마지막 청산이요 사실로 “마지막 일”로 이해되어야 한다.

  

몰트만은 전통적인 최후 심판론을 “인간의 놀라운 자기 신뢰”라고 표현하고 자기가 주장하는 만유 화해론을 “하나님에 대한 무한한 신뢰”라고 주장함으로써  인간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골고다에서의 단일회적 영원한 전환과 결단을 강조함으로써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듯이 보이지마는 결국에는 여기에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표방하면서 만유 회복이라는 인간의 사변을 주장하는 새로운 인본주의가 도사리고 있다.  그의 주장은 하나님의 최후심판을 인간이 이해한 하나님의 보편적 구원의 섭리라는 가설 위에서 지옥이 폐기되었으며, 최후심판이 없으며, 심지어는 마귀까지도 구원 얻는다는 만유 회복의 보편적 낙관주의를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성경에서 하나님의 계시한 말씀 밖으로 넘어가는 주장이 아닌가? 



복음주의적 개혁신앙을 가진 목회자와 신학자들은 계시되신 말씀 밖으로 넘어서 사변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계시록의 마지막에 주어진 기록 에 더하지도 빼지도 말하고 경고하고 있다: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서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계 22:18-19). 마지막의 일은 우리의 생각을 넘어서서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경륜과 무한하신 사랑에 맡기는 어린아이와 같은 소박성이 필요할 뿐이다.  말씀이 밝혀주는 데까지 믿고 생각하고 말씀이 멈추는 곳에 믿고 머무는 것이 바로 신실한 개혁 신앙적 사고의 태도이다. 이것은 바로 제2차적 소박성의 사유(a thinking of a second naivity)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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