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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카톨릭 신비주의 (Roman Catholic Mysticism)

로마 카톨릭 신비주의 (Roman Catholic Mysticism)
자료출처
http://adamo.x-y.net/bbs/view.php?id=bi&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25
 
나는 오늘날 성경을 가르치는 많은 사람들이 갖고 있는 공통적인 문제점 하나를 발견했다. 
그것은 많은 현대의 성경교사들이 심각한 오류를 범하고 있는 자들을 신뢰한다는 것이다. 
워렌은 독자들에게 로마 카톨릭 신비주의 냄새가 풍기는 명상이나 묵상을 하도록 고무시킨다.


하나님과 끊임없이 대화하는 법을 배울 수 있는 고전이 「하나님의 임재연습(The Practice of the Presence of God)」이다.  이는 17세기에 로렌스 형제(Brother Lawrence)에 의해 쓰여졌는데 그는 프랑스 수도원의 조리사였다.  그는 식사를 준비하고 설거지를 하는 것과 같은 가장 일상적이고 작은 일도 예배 그리고 하나님과의 교제로 바꿀 줄 알았다.  그에 의하면 하나님과의 친구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행동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태도를 바꾸는 것이다.  우리 자신을 위해 하던 일들을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것이다.  그것이 먹는 것이든, 목욕하는 것이든, 일을 하는 것이든, 쉬거나 쓰레기를 버리는 것이든 상관이 없다. (p. 119) (강조된 부분은 워렌 자신에 의한 것임.)

이 내용은 ‘하나님의 가장 좋은 친구가 되는 것’이라는 소주제에 포함되어 있다.  생각해 볼 문제는 이것이다.  과연 하나님께서 ‘가장 좋은 친구’를 갖고 계실까?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그분의 임재를 연습함으로써’ 그분의 ‘가장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까?  그렇게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로마 카톨릭 수도승들의 밀교적 명상과 은둔생활은 진실한 크리스천의 삶과는 전혀 거리가 먼 것이다.  그것은 속임수다.  그것은 겉으로 보여지는 경건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영성이란 것이 인간이 반드시 내적으로 뭔가를 감각적으로 느껴야만 하는 것처럼 만든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진실한 신자들의 삶은 그런 것과 관계가 없다.

신자는 삶 가운데서 짓는 죄의 문제와 삶 가운데서 발생하는 모든 문제들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서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신뢰하고 사람들을 바라보지 않아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성령님께서는 신자 안에 사시면서 그를 진리로 인도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그분의 왕좌에서 불러 내릴 수 없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연습’할 수 없다.  우리가 나름대로 좋은 의도를 가지고 어떤 연습을 통해서 하나님을 우리 앞으로 불러올 수 있다는(임재시킬 수 있다는) 생각은 참으로 주제넘은 설정이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임재 연습’이 의미하는 바다.  이러한 이론은 뉴에이지 식 기독교다. 
사실 워렌은 다른 곳에서 뉴에이지 식 기독교에 대해서 경계해야 한다고 말했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로마 카톨릭 신비주의에 감염된 워렌은 분별력을 상실했다. 
뿐만 아니라 워렌은 자신을 따르고 신뢰하는 어리숙하고 무늬만 크리스천인 사람들에게 이러한 흐리멍텅한 분별력을 옮겨 심어주고 있다.  워렌이 인용하는 로마 카톨릭 신비주의자는 로렌스 형제 한 사람만이 아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연습하는 것은 하나의 기술이고, 발전시킬 수 있는 습관이다. 
마치 음악가들이 쉽게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하기 위해 음계를 매일 연습하듯이 우리도 하루 일과 중 각기 다른 시간에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을 스스로 노력해서 연습해야 한다.  하나님을 기억하기 위한 훈련과 연습을 해야 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하나님이 그 순간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계속적으로 상기시켜줄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하다 … 하나님의 임재를 생각나도록 만드는 물건들을 주변에 두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라.  작은 쪽지에 ‘하나님은 지금 나와 함께, 나를 위해 계신다!’라고 써놓을 수 도 있다.  베네딕트 수도사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그 시간의 기도'를 갖기 위해 시간마다 종을 쳤다. (pp. 120~121)
워렌 같이 영향력 있는 사람이 이런 식으로 로마 카톨릭 수도사들에 대해서 언급하게 될 때 독자들은 로마 카톨릭도 신뢰할 만한 대상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카톨릭 신비주의자들이나 수도승들의 인격 자체를 모욕하자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들이 행하는 것들이 비성경적이라는 말이다.  그러한 사람들을 모범사례로 듦으로써 불경건한 영성으로부터 분리되도록 다짐해야 할 신자들의 마음에서 경계의 벽을 허물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이에 더 나가서 워렌은 십자가의 성 요한(St. John of the Cross)이나 핸리 나우웬(Henri Nouwen)같은 로마 카톨릭 신비주의자들을 용인하고 받아들인다.  헨리 나우웬은 로마 카톨릭 신비주의에 심리학을 혼합한 사람으로 나중에 카톨릭 사제가 된 사람이다.  이런 식의 신비주의는 뉴에이지 기독교와 잘 맞아떨어진다.  뉴에이지 기독교에서는 소위 ‘영적 성장’을 이룰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이 무엇이든지 유용한 것으로 취급한다.
진실한 신자는 하루 종일 하나님을 생각하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마치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매 순간 우리 생각 속에 의식적으로 끊임없이 떠오른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 말은 우리가 생각하거나 말하거나 행동하는 중에 그분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의심의 여지 없이 선명하게 알 수 있다는 뜻이다.  성령님께서 그분이 우리에게 알리기 원하는 것들을 우리 마음속에 떠오르게 하신다. 
의도적으로 하나님께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또 그렇게 되기 위해서 연습하는 사람들은 비록 구원은 받았다 하더라도 영적으로 전혀 성숙하지 못한 사람이거나 아니면 참된 신자가 아니다.  사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의 경건함을 인정받기 위해서 뭔가에 도취되는 경험을 추구하는 종교인들이다.  스스로 깨닫든 깨닫지 못하든 간에 로마 카톨릭 신비주의를 권하는 사람들 중 상당수는 뉴에이지 운동에 한 발짝을 들여놓은 사람들이다.  뉴에이지 운동 역시 위에 언급한 사람들과 같은 신비주의자들을 호평하고 추천한다. 
리처드 포스터(Richard Foster)가 운영하는 레노바베(Renovar?)라는 단체가 그 중 하나이다. (「Media Spotlight」의 특별 기고 ‘Renovar? : Taking Leave of One's Senses를 볼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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