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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신학자료2

프릿츠 부리의 종교다원주의에 대한 대응

부리의 종교다원주의에 대한 대응 
http://cafe.naver.com/modernth/118   
 
출처: Fritz Buri, Jan Milic Lochman, Heinrich Ott, Dogmatik im Dialog Bd.1: Die Kirche und die Letzten Dinge, Gütersloher Verlagshaus Gerd Mohn, Gütersloh 1973.

§6.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는가?
 

a) 프릿츠 부리 (66-69쪽)

<전통적인 기본음>

구원의 배타성에서는 카톨릭의 성례전적 교회이해나, 개신교의 말씀 중심주의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불트만과 로빈슨의 기본음>

개신교의 구원요구의 배타성에 대해 어느정도 약화되는 경향의 예를 오히려 불트만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데, 20년 후에 로빈슨은 "신에게 솔직히"에서 하나님의 변화에 대해 말하고, 다음과 같이 해명했다. "어떠한 하나님 그림(Gottesbild)도 인정하지 않는 것이 진정한 하나님 신앙이다. 진정한 신앙은 영원이 매순간 현재 안에서, 그 때마다 우리 삶의 변화하는 상황 안에서 우리를 만나게 된다는 것을 준비하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영원과의 영원한 구원을 위한 만남이 언제든지 특별한 상황에 일어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 사건의 유일회성을 포기하는 일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구원 사건의 유일회성에 정초하고 있는 전통적인 기독교의 구원사건 이해를 포기하는 일이 된다.
 

<성서적 기본음>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것은 성서적이다. 성서에서 구원의 보편성이 전개되는 곳에서도 그 구원의 보편성은 하나님의 백성을 향해 있는 것이다. 하나님 한 분의 구원사건과는 별도의 구원가능성을 염두에 둘 때, 성서의 중심구원사건이 의심스럽게 된다.

교회가 자연적 신인식의 가능성을 인정할 때는 항상 이러한 성서적 사신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에, 이러한 자연적 신인식과 그 구원가능성을 단지 전단계로 또는 불충분한 것으로 취급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목적도 다름 아니라, 이방인이든 다른 종교 신앙인이든 모두 하나의 유일한 참된 양우리에 불러들이는 것이었다.
 

<신개신교주의와 근대주의>

㉠ 계몽주의와 독일 관념론의 영향 아래 서 있는 신개신교주의 신학은 교회의 배타적인 구원을 극복하기 위한 동인을 교회에서가 아니라, 교회밖에서 찾았다는 점에서 획기적이다. 교회 안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교회의 구원확신 밖에서 교회의 교리생산과 교리신앙의 심리학적, 사회학적 배경을 인지한 것이다.

㉡ 이로 인해 교회의 구원개념은 비평을 받게 되었다. 기존의 구원개념은 신학적 무게를 잃어버렸다. 그 대신에 세속적인 형태와 힘을 얻게 되었다. 예컨대, 히틀러에 대한 인사로서 구원-히틀러(Heil Hitler)! 이 때, 구원은 개인주의적인 성격을 띄지 않는다.

㉢ 그러나 구원은 공동체적 성격을 가지고 있기에, 이 점에서 교회 밖에 구원이 없다는 언술은 긍정적으로, 진리는 단지 공동체에만 있다고 말해 질 수 있다. 그렇다면, 진리의 확실성이 단지 연구자와 실험자의 공동체에서만 실증될 수 있듯이, 신앙의 확신의 진리와 관련해서는 이 진리는 확신을 얻은 자에게 다른 사람에게는 그러한 인격적 확신의 가능성이 있음을 존중해 줄 것을 요구한다. 더욱이, 신앙의 확신자는 공동체의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이 공동체에서만 가능하게 되는 책임적 존재로서의 삶의 가능성을 실현하도록 돕는다. 이러한 책임적인 존재의 공동체는 에클레시아라고 할 수 있다.
 

☞ 부리는 에클레시아라는 말을 통해, 기독교 교회의 본질적인 요소를 지적하고 동시에, 동시에 비인간적인, 비인격적이고 무책임적인 역사적 교회의 구원배타성을 지적하고자 한다. 이 때,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말은, 공동체를 통해서만 구원을 얻는다는 의미로 이해되고, 구원의 공동체적 성격이 강조된다. 그러나 부리는 보편적 구원이라든가, 자연적 신인식의 가능성에 대해 구원의 문을 개방하고 있지는 않은 듯 하다. 왜냐하면, 이러한 가능성들은 비성서적일 뿐 아니라, 히틀러에게서 보듯이 위험스럽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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