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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틸리히에 오염된 신학의 현주소

폴 틸리히에 오염된 신학의 현주소

아래 글은 국민일보 미션란에 실린 장로회신학대 조지식학 송용원 교수의 글이다.
이 글은 현대 기독교가 얼마나 변질되었는가?를 실감하게 한다. 
폴 틸리히는 선불교로 간 사람이다.
그런데도 이렇게 말한다는 것은 현대 기독교의 비참함이다. 
기사를 참고해 보자~
글과 이미지 출처 https://www.kmib.co.kr/article/view.asp?arcid=1785833701&code=23111413&sid1=m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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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용원 교수의 신학하는 마음] 외로워하는 우리를 영원한 지금 안에 세워 주소서
입력: 2026-08-06 03:08

<11> 폴 틸리히, 홀로 있으나 외롭지 않은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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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에 열중하고 있는 젊은 시절의 폴 틸리히. 위키미디어 커먼즈

지천명을 앞둔 폴 틸리히(Paul Tillich·1886~1965)는 하루아침에 교수직과 조국을 잃고 모국어로 신학하던 세계마저 떠나야 했습니다. 나치 정권은 반나치 저술과 유대인 학생 옹호를 이유로 그를 독일 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내쫓았고, 1933년 미국행을 택해야 했습니다. 뉴욕에서는 낯선 영어를 다시 배워야 했지요. 첫 영어 강의는 알아듣기 어려웠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서툰 말 속에서 제자 롤로 메이는 평생 기다려 온 진실을 들었다고 회고합니다. 말은 낯설었지만 그 말이 길어 올린 진실은 낯설지 않았던 것이겠지요.

틸리히는 자신을 ‘경계선 위의 사람’으로 이해했습니다. 신학과 철학, 교회와 사회, 종교와 문화, 고향과 타향 사이에 서 있었습니다. 하지만 경계는 어정쩡한 중간지대가 아니었습니다. 그곳은 그의 사고를 새로운 가능성에 열어 주었지만, 삶에서는 한쪽 편을 선택하고 책임져야 하는 고통스러운 자리였습니다. 그의 신학은 경계에 관한 이론이라기보다 경계에서 살아낸 한 인간의 기록과 같았지요.

그보다 앞서 그는 경계의 매서움을 전쟁터에서 절감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군목이던 그는 베르됭의 참상 속에서 수많은 죽음을 목격했고, 전쟁 말기에는 신경쇠약으로 입원했습니다. 그런 생애를 통과한 그가 훗날 말한 ‘흔들리는 토대’는 멋들어진 은유가 아니었습니다. 딛고 있던 세계가 무너진 사람의 처절한 언어였지요. 그는 흔들리지 않는 마음을 약속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모든 토대가 흔들릴 때 무엇이 우리를 붙드는지 물었습니다. 하나님은 세계 안에서 가장 큰 대상이 아니라, 무너지는 우리를 끝내 존재하게 하시는 존재의 근거였습니다.

틸리히가 독일군 군목으로 참전한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포격으로 무너져 내린 프랑스 베르됭 대주교 궁 모습이다. 위키미디어 커먼즈

틸리히에게 인간의 곤경은 단순히 연약해졌다는 데 있지 않았습니다. 인간은 하나님과 자기 자신, 이웃과 세계로부터 멀어진 소외의 존재입니다. 그래서 사람들 한가운데 있어도 외롭고, 자기 자신과 함께 있으면서도 자기가 낯섭니다. 그는 외로움과 고독을 구분했습니다. “외로움은 홀로 있음의 고통이고, 고독은 홀로 있음의 영광”이라고 했습니다. “고독은 홀로 있을지라도 외롭지 않은 경험”이라고도 했지요. 얼마나 많은 사람과 함께 있느냐보다 홀로 있는 자신이 누구 앞에 서 있는지가 더 중요하다고 본 것입니다.

저 역시 틸리히를 깊이 연구한 데이비드 켈시 교수의 수업을 들으며 그의 저작과 씨름하던 시절, 주중에는 학교를 주말에는 이민 개척교회를 오가며 지냈습니다. 신학과 목회를 오가니 얼마나 유익하겠느냐는 말도 들었지만, 사실 어디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한 느낌이 더 컸습니다. 그때 경계선은 책 속의 개념이 아니라 삶의 감각이었습니다. 그러나 틸리히를 읽으며 조금씩 깨달았습니다. 고독은 공동체를 떠나는 고립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홀로 서서 다시 공동체로 돌아갈 말을 배우는 시간이라는 것을.

방대한 조직신학을 남긴 그가 자신의 사상으로 들어오려는 이들에게 먼저 설교를 읽으라고 한 사실도 의미심장합니다. 틸리히에게 신학자는 정답을 많이 소유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에게 말을 걸어오시는 하나님 앞에서 시대의 가장 깊은 질문을 듣는 사람이었지요. 그에게 설교는 오래된 말을 상처 위에 던지는 일이 아니라 고통받는 이들의 현실에서 영원의 메시지가 새 말을 얻는 자리였습니다. 신학자는 멀리서 고통을 설명하는 사람이 아니라 약한 이들과 함께 약해지면서도 그 자리에 들려오는 하나님의 말을 찾는 사람이어야 했습니다.

외로운 마음은 과거에 밀려나고 미래를 두려워하며 현재를 잃어갑니다. 사람들에게 잊힐까 두려워하고 지난 상처가 오늘을 지배하게 둡니다. 그러나 틸리히가 말한 영원은 죽은 뒤에 시작되는 끝없는 시간이 아닙니다. 영원은 시간의 불안 속으로 내려와 오늘을 참된 현재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고요한 현존입니다. 과거의 사실은 바뀌지 않아도 그 의미는 용서 안에서 달라지고, 미래는 두려움의 시간이 아니라 용기로 맞이할 시간이 됩니다. 영원한 지금은 과거에는 용서를, 미래에는 용기를, 현재에는 안식을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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틸리히의 주요 설교집 ‘새로운 존재(The New Being)’ 영문판 표지와 1959년 타임지 커버를 장식한 노년의 틸리히 초상화. 미국 의회도서관, 타임지 캡처


이것이 가능한 까닭은 하나님이 멀리 계신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틸리히는 “하나님은 우리 자신보다도 우리와 가까이 계십니다”라고 말합니다. 외로운 마음은 자신이 하나님께도 버림받았다고 느끼지만, 고독한 마음은 자신이 하나님의 붙드심 밖으로 완전히 떨어질 수 없음을 배웁니다. 믿음은 의심과 불안을 지워 버리는 확신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붙드시는 분께 자신을 맡기는 용기입니다.

그러니 틸리히에게 구원은 더 강한 사람이 되겠다는 결심이 아닙니다. 새 행동은 새 결심이 아니라 새 존재에서 나옵니다. 그리스도는 외로운 이를 위해 외로워지셨고 그분 안에서 우리를 치유하는 새 존재가 나타났습니다. 은총은 내가 나를 받아들일 만해서 주어지는 평안이 아닙니다. 은총은 스스로를 용납하기 어려운 순간에도, 받아들여질 수 없는 나조차 하나님께 받아들여졌음을 받아들이는 사건이지요. 그 받아들임 안에서 우리는 다시 존재할 용기를 얻고 고독 속에서 사랑을 새로 배웁니다.

경계는 때로 바다와 같습니다. 저는 갈릴리 바다를 묵상할 때면 익숙한 땅을 떠나 건너편으로 향하는 우리네 인생을 떠올립니다. 제자들은 어둠이 내린 그 바다에서 괴로이 노를 저었지요. 우리도 소원의 항구를 향해 노를 젓다가 배가 얼마나 연약한지 깨닫는 사람들인지 모릅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그 바다를 건넜느냐 건너지 못했느냐가 아닐 것입니다. 그 바다에서 누구를 만났느냐가 아닐지요. 틸리히의 신학하는 마음은 풍랑을 없애는 마음이 아니라, 풍랑 속에서도 나보다 가까이 계신 하나님을 만나 홀로 있으나 외롭지 않게 되는 마음입니다. 주여, 일시적인 지금 속에서 외로워하는 우리를 영원한 지금 안에 세워 주소서. 인생 바다에서 괴로이 노 젓는 우리로 하여금 당신께 받아들여진 자신을 받아들이고 다시 사랑하게 하소서.
송용원 교수(장로회신학대 조직신학)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s://www.kmib.co.kr/article/view.asp?arcid=1785833701&code=23111413&sid1=m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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