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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양 종교의 합일의 가능성 (종교 다원주의)2

동서양 종교의 합일의 가능성 (종교 다원주의)2
http://cafe.naver.com/modernth/375   

   그러나 이러한  과정신학의 신론에 대하여 사실  복음주의 교회가 받아들일 수없는 비성서적 요소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들은 첫째, 과정신학자들은그들의 종말을 가져올 출발점을  택한다. 현대인의 존재들, 곧 자율적이며 독립적인 자연과 그 세상을 자신의 범주에 예속시키는 인간의 자유의 종합, 자멸적인 이종합이 그들의 출발점인  것이다. 거기서부터 과정신학자들은 우주 위에 초월하신존재라는 성경적인 신관을 거부한다. 그대신 그들은 만사가 '하나님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며 그  하나님은 존재라기 보다는 진화의  배후에 있는 동력으로서 항상역사와 자연의 모든 것 가운데 나타난다는 것이다. 바로 이 기본적인 개념에서 이새 경향에 대한 이름, 즉 '과정'이라 하는 용어가 기원하는 것이다. 둘째, 과정신학자들은 하나님의 주권을  약화시킨다. 하나님은 '우주의 공동 창조자'라고 화이트헤드는 말한다. 하나님의 창조는 계속적인 진화 과정이요, 질서와 인간이 그 미래를 결정하는 자유의  공존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신학에는 '종말론'이부재하며, 역사와 인간을 배정하고 형성하는 주권적인 하나님이란 없다. 셋째, 과정신학은 인격존재로서의 하나님이란 생각을 말소(말소)시키려 한다. 성경의 인격적인 하나님은  자신을 계시하시고, 자신의 능력으로  말씀하시고 행하시며, 자기목적들을 조리있게 선포하신다.  그러나 과정신학의 하나님은 '인격적으로 정리된연속적인 경험들'이며 인간경험에서  얻은 유추(류추)에 근거하여 요청된 지적 개념일 뿐이다. 넷째, 과정신학은  하나님의 초월성을 인정한다는 말을 그의 초자연성과 절대적 초월성을 부인함으로써 스스로 부인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택한 자인예수를 통하여 온 인류에게 퍼지는 우주의 법칙으로 변질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과정신학의  모델은 이성적인 형이상학에 의하여 양극성을 극복하는 전체적인 합일의  변화를 설명하는데는 성공하였으나, 성서적 신관을 부인함으로써  전통적 기독교로부터 외면당할 수 밖에 없다 하겠다.
   2. 종교다원주의
서양의 '같음'의 지배적 이행이 동양의 해체와 더불어 '다름'으로 비약할 수 밖에 없는 현대의 상황 속에서 기독교의 절대성은  크게 위협받고 있다. 기독교 유일의 복음과  타종교 만민 보편의 구원이 바로그것이다. 우리는 이시대 기독교의 가장 큰 이 위협을 '종교 다원주의'라고 부르고 있다. 이는 서구 기독교 뿐만 아니라 가장 복음주의적인 교회를 가진 한국 기독교에게서도 전통적 기독교의 존립을 뒤흔드는 도전이며, 새로운 선교 방법론의  모색연구를 전환케 하는 것이었다. 진리의 한 다른 면으로서의 동양 종교는 절대 유일의 참진리인 기독교에  도전장을 내고, 대화의 장에서 겨루어 보자 하는 시도로 육박해 오고 있다. 과연 우리는 이를 배타할 것인가? 포용할 것인가? 아니면 병행할 것인가?종교다원주의의 주장들 속에는 일관되게 흐르는 하나의 근원이 있다. 그것은 '하나와 다수의 논리' 즉,하나는 다수 속에서  드러난다고 하는 것이다. 이 논리의 가장  오래된 공식화는 '하나'에 대한 베다의언급 속에서, 또는 불교의 업(karma)의 인과법칙 속에서, 그리고 서양철학의 Logos 개념 속에서 찾아볼수 있다. 칼 야스퍼스, 존힉 등 현대의 종교학자들이 채택하고 있는 이 논리는 종교다원주의에 대한 가장 오래고도 가장 현대적인  설명방식이다.  그러므로 종교들 간의 '대화'는 가능한  것이 아니라 필연적인 것이 된다. 이 대화는 주로  세계적인 절대적 보편 종교가 되어 왔던 기독교에 대한 비판에서부터시작하는데, 기독교 절대신론에 대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에 대한 만인구원론등이 그것이다. 우선 기독교 절대신론을  거부하고 모든 종교에서 나타나는 궁극적 신, 또는 보편적 신으로서의 길을 연  것은 칼 바르트이다.  그는  [교리교의학] 1권 2부에서 '종교의  철폐로서 하나님의계시'라는 그의 종교관을 제시하고 있는데 이는 다음과 같다.        "계시는 참  종교의 자리로써 교회를 선택한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기독교 종교가 인간 종교의 완성된 종교임을 의미하지 않으며, 기독교 종    교가 다른  종교보다 우월한 참 종교라는  의미가 아니다. 우리는 기독교    종교의 진리와 계시의 은혜 간의 관계를 너무 많이 강조할 수 없다."   자연계시를 철저히 부정하는  바르트의 사상은 마치 보수신학처럼 보이지만 계시를 명제적, 교리적, 단언적인 것이 아닌 역동적, 인격적, 비명제적인 것으로 봄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을 거부하고, 성경 이외의 모든 문화와 종교에도 하나님의 역사와 계시가 가능하다는 보편적  신관으로서의 길을 연 것이었다.그러므로 종교다원주의 신학자들은 기독교의 '오직 예수의 이름으로만' 구원이 가능하다는 핵심적 교리를 강력히 부인한다.  폴 F.니터는 그의 책 [오직 예수 이름으로만? (No  other Name?)]에서 '유일한'이란 형용사로  표현된 성경의 기도문은초대교회 신앙 공동체로부터의 고백적 증언이며 형이상학적 원리가 아니라, '종교적 언어' 즉 '사랑의 언어', '애무의  언어'로 규정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한국의 파니카' 유동식 교수는 기독교와 타종교간의 관계를 태양과 위성들간의 관계로설명하면서  파니카의 예를 들어 설명한다.       "파니카 신부가 말한 바와 같이 그들이 구원을 받는 것은 자기들의 종    교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에 의해서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    리스도의 이름을 실제로는 모르는 것이며, 그들이 복음의 은혜 아래 사는    것은 기독교의 형식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종교 형식에 의해서였다."   즉 그는 복음의 입장에서 이 세상을 근본적으로 안(inside)과 밖(outside)으로구분할 것을 거부하고, 틸리히처럼 '숨어있는 교회(latemt church)'와 '드러난 교회(manifest church)'로 보아 전세계가  신의 자녀로서 교회 안에 속하여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일본의  야끼 세이찌(팔목성)와 그  사상적 맥을같이하는 변선환교수 역시 예수와 그리스도를 구분하는 오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있다.  즉 그는 예수와 그리스도를  구분하여 모든 종교는 우주적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나의 원을 그린다고  설명하면서, 더 나아가 모든 종교가 체험하는 신은궁극적으로는 하나의 신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그리스도는 절대적 존재자이지 인격적인 신과는 다른  것이다. 그는 노골적으로 기독교의 하나님은 서양 신학의 산물이며,  우리는 이 잘못된 서양  하나님의 개념으로부터 탈피해야 한다고역설하는 것이다.       "우리는 식민주의  선교사들이 가르치는  하나님을 비구상화할 때에만    우리는 인류역사 속에서 오랫동안  모든 인류를 위해 역사해 오신 하나님    을 알 수 있다. 궁극적 실재를 상징하는 모든 다양한 이름들은 비록 물질    적으로 다른 신들을 가리킨다 할지라도, 모든 다른 신들은 궁극적으로 모    두 동일하신 한분 하나님에 대한 경험이다."   종교다원주의는 많은 성서적 언어를  가지고 있다. 마치 그들의 하나님은 전통적 기독교의 하나님보다 더  위대하며 장엄한 듯 보인다. 그러나 그들이 주장하는종교체계가 이미 성서로부터 멀리 떠나 있다는 것은 주지(주지)의 사실이다. 그들은 인격적 하나님을 궁극적 형이상학의 존재로 대치시켜 버렸고, 성육신하여 이땅에서 대속의 사역을 이루신 예수그리스도의 사역을 마치 오래되고 낡은 과거적 사건이며, 서양 제국주의의  선봉, 기독교가 만들어 낸  독단으로 간주해 버리고 만다. 오늘날 불확실성과 다원성의  이 시대에 적합한 상황 신학이 필요하다는 것은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이지만, 성경으로부터 상황(from text to context)에의 접근을 거부하고, 상황으로부터 성경(from context to text)에 접근하여가는 종교다원주의의 방법론은 필연적으로 오류에 부딪힐 수 밖에 없다 하겠다.
   3. 새로운 모델과 그 동향
   우리는 이제 막다른 길에 도달했다. 서양의 같음이 그 지배적 이행을 계속하여수많은 명제를 쏟아 놓을 때에도, 동양의 다름이 침묵하며 조요(조요)하게 존재를비추어 줄 때에도, 더 나아가 이를 통합하여 존재를 '생성'으로 바꾸어 버린 과정신학에서도, 종교를  통합하여 세계 보편종교를  추구하는 종교다원주의에서도 참존재의 모습은 찾아질 수  없었다. 절대는 상대를, 계시는 이성을, 무모순은 모순을, 합리는 경험을 배제하고선 그들의 설명은 언제나 반쪽 짜리였다. 세계를 비추는 이 두개의 축 사이에서 그 통합을 바라왔던 현대인의 시도는 언제나 참 존재를설명하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그것이  이 현대를 사는 이들의 불안이며 실존이다.이 가운데서 우리 기독교인은 어떻게  참 존재이신 하나님을 알며 그 하나님을 어떻게 전할 수 있는가?
   (1) 대전제로의 회귀   우리는  처음부터 우리를 규정했던 대전제를 다시 우리의 제일(제일)전제로 삼아야 한다. 즉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는 그를 이해할 수 없으며,하나님께서 모든 선의 근원이시며, 그분 밖에서는 아무것도 찾아서는 안된다는 것을 확신하지 않는 한, 단순히 하나님을 경외와 찬양의 대상으로 주장하는 것은 충분치 못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참 존재를 찾는 원인이 그를 경외하고 찬양하기 위함이며, 그렇지  않고는 우리가 절대로 참 존재이신 하나님을 인식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다. 동시에 우리  타락한 인간이 절대 하나님의 전부를안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칼빈은  그의 [기독교 강요]에서 다음과같이 경고한다.       "하나님은 과연 어떤 분이신가? 이런 질문을 제기하는 사람은 다만 헛    된 사변(사변)으로  장난하고 있을 뿐이다.  이보다는 '하나님의 본성(본    성)은 무엇인가?'를  물으며, 그의 본성과 일치된  것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I.ii.2)"   다시  말하면   인간이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것은  '공허한  사색(vacuaspeculatio)'이며 하나의 말장난(language game)에 지나지 않음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한 모든 명제는 성경에 기록된 것 외에는 어떤 것도 불충분하며 더 나아가 말장난에 지나지  않음이다. 현대의 논리학이 '일반논리'에서 '관계논리'로 전환하는 것은 이를 더욱 극명(극명)히 보여 주는 것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참존재 즉,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하나님께서 주신 본래부터의 마음과 성경을 통해서  획득된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특별 계시와 일반 계시를주신 까닭이다. 우리는 이 특별  계시와 일반 계시가 서로 대립하지 않음을 안다.현대인은 이 진리를 다시 깨닫기 위해 현대의 너무 오랜 시간을 소비했다. 우리는이 세계 가운데에서 계시와 이성이 서로 독립적으로는 불충분하지만 그 둘이 교차하는 곳에 참  하나님을 아는 길이 있음을  이제는 안다. 서양의 '같음의 논리'와동양의 '다름의 침묵'이 각자로는  불충분하지만, 이 둘을 동시에 볼 때에는 우리의 참존재에 대한 지식을 풍성하게 한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이세계 가운데 모든대립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경외)  앞에서는 모두 통합되어 풍성한 찬양으로 변화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는  것이다. 이 속에 진정한 동서양 합일이 있고 전일(전일)이 있다 하겠다.   우리는 우리의 전통적 기독교가  분명 서구의 역사 가운데 잉태된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전통적 기독교의 언어가 서구적 사유와 논리로서 꽉  채워진 것이라는 지적은 당연하다.  그러므로 서구적 기독교가 동양적사유나 논리를 고려해야 한다는 것은 타당하다. 무모순성의 진리는 모순성으로 보충되어야 한다는 것  또한 옳다. 절대는 상대와  떨어져 생각될 수 없음이 그러하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가능케하는 절대는 언제나 주장되어야 한다. '상대'없는'절대'는 불가능하지만,  '절대'없는 '상대'는  더더욱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즉'상대를 상대이게 하는 절대'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절대'는 상대적이고 제한적인 어떤 진술 안에 갇힐 수 없다. 그것은 '하나의 존재(a being)'가 아니라 '모든  개개  존재들(all  beings)'의  원천이자  근저이며,  바로 존재  자체(beingitself)이기 때문이다.  이는 하나님에 대한 진술이다. 하나님 외에 절대적인 것은 없다. 이것이 신과 인간을  구분하는 기준이며, 천국과 이 세상을 가름짓는 경계선인 것이다. 혹자는 절대가 상대를  가능케 하는 것처럼, 상대 역시 절대를 가능케하므로 상대의  우선성을 외칠지 모른다. 그러나  성경이 제시하는 이 세계는그러하지 않다. 이  세계는 홀로 절대자이신 하나님에게서  나왔다. 이 세계는 무(무)로부터 시작한 것이 아닌, 하나님이라 하는 유(유)로부터 창조된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진정한 합일이 있다.   그러나 인간은  다르다. 범죄한 인간의 세게는  절대와 상대가 혼재하여 있다.인간의 마음은  이를 동시에 바라보지만 인간의  언어는 그러하지 못하다. 인간의진술은 언제나 상대적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폴 틸리히는 이를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지식에서의 절대적인  것들에 대한 우리의  진술은 모두 상대적이다.    바로 여기서의 나의  진술도 마찬가지이다...누구도 그것들을 피할 수 없    다. 그것들에 대해 반론을 해도, 제기한다 해도, 그러기 위해서는 그것들    을 사용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것이 서양의 진술이 동양의 침묵 앞에서 해체된 이유이다. 인간의 언어는 모두 상대적이어서 인간의 지식으로는  진정한 앎에 이를 수 없다. 언어를 포기해야얻어지는 다른 종류의 진리가  있기 대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말하기를 포기할 수없다. 여기에 현대인의 위기와 불안의 정체성이 있다. 현대인은 그들의 마음이 바라보는 참존재를 말하려 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진정한 앎을 포기한다. 그들의 앎에 대한 포기는 하나님을 경외함에 대한 포기이다. 그러므로 이 시대는 인간의 유한성을 깨닫지 못하는 불신(불신)의 시대이며 배도(배도)의 시대인 것이다.
   (2) 교회에 대한 침묵과 세상에 대한 NETI   기독교는 본질적으로 선교 공동체이다.  기독교는 산 속에서 수도하는 여타 종교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기독교인은  전해야 하고 말해야 하는 것이다. 배도와불신의 시대 속에 기독교인은 더욱  전하려 하고 더욱 말하려 하지만 무모순의 진리의 한 면이 모순임을 아는 상대화된 현대인은 우리의 진술조차 상대화하여 받아들일 뿐이다. 이미  현대의 사상은 이 세계의  진리관이 양분되어 있으며, 그것이전일(전일)되어야 한다는 것을 안다. 언제나 기독교인은 "이것이냐 저것이냐?" 라는 질문 속에서 이것을 전하고  나면 남는, 또는 저것을 말하고 나면 아쉬운 공허감을 감출 수 없다. 붙잡았다고  느끼는 순간, 동시에 놓쳤다고 하는 또다른 느낌이 드는 것은 왜일까? 그럼에도  기독교인은 전해야 한다. 이것이 현대 기독교 선교의 방법론적 위기인 것이다.   우리가 진정 말해야  한다면 '말하지 않음'으로 말할  수 있다. 즉 '침묵'으로말한다는 것이다.  본회퍼는 그의 [신도의 공동생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침묵은 말없는 것과는 다르고...침묵은 말의 넘침이요, 말의 도취요,    말의 제사입니다.  반면에 말없는 것은 제물로  드려진 거룩한 것이 못되    고, 병신이 되어 속된 것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사귐을 새로 세우고 매    는 말에는 침묵이 뒤따릅니다."   그러나 이러한 '침묵'은 성도의  공동체 가운데에 있을 때에만 의미 있는 것이며, 현대의 이방인들을 "가르쳐 지키게"(마 28:20) 하는 데에는 부적합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새로운 방법론을 모색해야 한다.   한가지 방법이 있다. 다시  우리가 말해야 한다면 우리는 '-이다'라 하지 않고'-아니다'라고 말함으로 말할 수  있다. 이는 서구적 방법론으로부터 동양적 방법론으로의 대전환을 의미하는 것인데 이는 동양이 침묵하면서 말하는 방법이다. 동양화에서 흔히 쓰이는 화법  중에 홍운탁월법(또는 홍탁이라고도 함)이라 하는 것이 있다.  만약 구름 가운데에 달을 그리고자 할 때, 서구의 화법이 달을 그리고그 안을 채색하여 달을 그려낸다고 하면, 이 홍탁이라 하는 화법은 반대로 구름을물들여 달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는 인도철학의 [우파니사드] 사상가들에 의해 주장되는 "NETI, NETI의 방법"과도 흡사하다. 즉 그것은 "이것도 아니고, 이것도 아니고... 이것도 아니고..." 하여 개념의  실체를 찾아가는 방법이다.  우리는 이역논리의 전형을 요한복음 8:1-11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에서 찾을 수 있다. 그에게 주어진  질문은 그가 선포한 사랑의  복음을 깨고 간음한 여인을 돌로칠 것인가, 아니면 모세의 율법을 깨고 용서할 것인가 였다. 선택이 강요된 두 질문 가운데 어느 것 하나도  해답은 없었다. 그들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예수에게이것은 시험이었고 그가 선포한 말씀에 대한 위기였다. 이 상황의 타결은 두 질문모두를 NETI하고  두 질문이 교차하는 곳에  있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너희중에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7절)" 이 기가 막힌 말씀은 위기에 있는 현대인의 실존에 빛을 비추어 준다.   서양철학과 같이  서양의 신학은 여태까지 사물의  다름들 속에 자기 동일화할수 있는  '같음'을 종합하여 '명제'를 추구하여  왔다. 이것이 인간의 연역논리가도달해야 하는 정의의 최종적  결과라면, 그와 반대로 그것의 아님을 반복하며 그실체에 접근하여 가는 것도 또한  훌륭한 정의의 방법이라 할 수 있다. 오히려 이방법론은 서구의 '같음의 논리'의 이행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에까지 설명을 시도한 서구 신학의 오류를 만회할  수 있는, 이 시대에 적합한 새로운 변증학의 방법론인 듯 싶다. 양극성을 아는  우리에게 그것을 하나로 말하라 하면 주저할 수 밖에 없지만, 우리는 그들의 정의와  전제를 NETI할 수는 있다. 존재를 비추는 두개의 축 가운데에서 자신의 좌표를  어디에 찍어야 할지 몰라 불안해 하는 현대인들에게, 그들의 전제를 NETI, NETI하여  그 두개의 축이 만나는 최초의 자리로 좁혀가는 방식으로 이 방법론은 크게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계속되는 반복의 자기부정을 통해 현대인은 참 존재이신 하나님과 만날 수 밖에 없으며 우리는 그 접촉점에서 부터 우리의 선교를 시작해  갈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결코 서양을 우월시하여 동양을 무시하거나, 또는 동양을 확대하여 서양을 축소화하는 오류를 다시는범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이  세계는 서양의 같음을 NETI하고, 동양의 다름 또한NETI하여, 진정한  진리를 거부하는 현대의 정신  속에 동서양을 합일하는 진정한절대자이신 하나님을  인식시켜야 한다. 이에  신도(신도)의 공동체로서의 교회는침묵함으로 '삶'을 세우고, 이  세계의 모든 비진리들에 대하여 NETI함으로써, 허물어져 가는 현대의 정신 속에  기독교 유일의 복음을 재수립해야 할 것이라 하겠다.
   VI. 결론
   우리는 가야 할 곳을 잊은  것이 아니라 어디에 있는지를 모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대인은 가려고 하지도  않고 있으려 하지도 않는다. 우리는 돌도끼를 만들면서부터 추상적 형이상학을 만들어 온 인간이 사물들 속에 드러나는 '같음'을 자기 동일화하여 그 지배적 이행으로 이 세계의 절반을 차지해 온 서양의 정신을 보았다. 동시에 H.Hesse라는 한  틈을 통하여 사물의 '다름'을 인식하며, 홀로 침묵하여 온 나머지 절반세계의 고고한 동양 정신 또한 살펴보았다. 20세기 극에 달한같음의 지배적 이행이 침묵하는  '다름'을 해체시키며, 스스로 파국에 달할 수 밖에 없었던  역사적 사건도 우리는 목도(목도)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시대를'문명의 전환기'라고 부르는 것이다.    '문명의 전환'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나의 문명이 죽고 어떤 다른 문명이새로 등장한 것을 의미하는가?  그렇다면  무엇이 죽고 무엇이 새로 등장한 것일까? 많은 동서양 학자들은 기독교로 대표되는 서구의 몰락을 지적하고, 동시에 많은 가능성을 지닌 동양의  대두를 전환의 내용으로 삼는다. 우리는 그들의 진술에동의할 수 있는가? 과연 기독교는 몰락하는 문명의 과거적 사건으로 묻혀 버리고,새로 태어나는 문명과의 단절을 수긍할 수 밖에 없는가? 그렇지 않다. 이 시대 문명전환의 핵심은 '해체'이며  '말할 수 없는 전일(전일)'이다. 아퀴나스적 기원이현대 사회에 전하여 준 합리주의의 전통이 키에르케고르로부터 비약될 수 밖에 없는 '해체'이며, 인류의 역사동안  침묵을 지켜온 '다름'의 동양이 그 파국을 맞아말하기를 강요당하고 있는 '해체'이다. 현대인은 이 세계를 설명하는 참된 두개의축을 얻는 대신,  그들이 서야 할 좌표를 잊었다. 그들은  때론 이 축에, 때론 저축에, 이 축과 저  축 사이를 헤메이며 전전긍긍(전전긍긍)을 면치못한다. 그러나그들은 그 둘중  어느 하나도 참 존재를 설명하는  데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 그들은 참된 '전일(전일)'을  바라지만 그들에겐 그것을 설명해 낼 언어가 없다. 그러므로 '말할 수 없는 전일의 시대'인 것이다. 그들은 참된 앎을 포기해 버렸다. 참존재이신 하나님에 대한 앎을 저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대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부터 떠난 배도(배도)의 시대이며, 불신(불신)의 시대인 것이다.   이러한 시대 가운데 기독교는  어디로 가야 하는 것인가? 대립과 갈등, 불안과위협이라는 인류의 보편적 문제 상황에  대하여 각 시대와 사회는 그 특유의 해결을 제시해 왔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재래의 형이상학, 종교, 이념 체계 또는 이데올로기들은 그러한 해결을 제시하는 훌륭한  역할을 해 왔다.  그러나 그러한 전통적 체계들은 거의 예외없이  언제나 단일한, 적어도 연속성 있고 동질적인 사회문화권을 전제로 성립해 왔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과 같은 이질적인 정신과 세력들이 교차하는 불연속적  세계 상황에서는, 새로운 대응과 사유형식이 요청된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 전통적 기독교가 나아가야 할 길이 있다 하겠다. 기독교는몰락해 가는 전통 속에 과거적 유산으로 묻혀져야 할 것이 아니라, 새로 태어나는문명 속에 그 주도자가 되어야  하는 까닭이다. 그것이 이 시대에 향한 우리의 사명인 것이다.   그것은 무엇으로 가능한가? 선교적 공동체인 기독교는 마땅히 '복음을 전함'으로써이다. 그러나 어떻게 전할 것인가? 과거와 같이 확장되는 문명권의 일부로서?현대 기독교 선교의  위기는 서구 합리주의의 몰락과  함께 모든 종류의 절대성이무너져 내렸다는 데에 있다. 모든 것이 상대화된 시대 속에서 서구적 전통 가운데확정된 기독교의 언어를 우리는  어떻게 수호하며 어떻게 전할 수 있는가? 보편개념이 없는 언어는 가능하며, 언어없는 전달은 또한 가능한가? 우리는 여기서 새로운 기독교 선교의 변증과 새로운 방법론을 모색해야 한다. 본고는 이에 대해 몇가지 전제와 방법론을 제시하였다.   첫째 종교개혁의 전통으로의  회귀가 그것이다. 즉, 우리가 참존재이신 하나님을 알아야 할 까닭이 그를 경외하고 찬양함이고, 그것 없이는 하나님을 이해할 수없다는 것이다.  둘째 범죄한 유한성의 인간은  하나님이 전모습을 도저히 알아낼수 없다는 것이며, 유한한 인간의 언어는 도저히 하나님의 전모습을 표현해 낼 수없다는 것이다. 이 두가지  전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지막 날에 우리를 진정한회복으로 인도하시기  전까지는, 끝까지 우리를  규정하는 제일 전제(제일전제)가될 것이다. 또한 우리가  죄인이며 동시에 의인이라는 자신에 대한 이중적 정체성은 이 세계의 양극성을 결정짓는다.  이 세계는 하나님의 도성, 세상의 도성이 함께 참여하여 있는 곳이며, 모든 종류의 대립, 즉 보편과 개체, 절대와 상대, 모순과 무모순, 선과 악, 그리고  가견적 교회와 불가견적 교회라 하는 교회 자체내의대립까지도 혼재하여  있다. 절대를 전하여도 상대화하는  이 세계 속에서 우리는먼저 교회 안에서 '침묵함으로  삶'을 세워야 한다. 성도의 공동체 안에서의 침묵은 말이 없음이 아니라, 말의  넘침이며 진정한 경외이다. 또한 성도는 이 세상에대하여 과감히 NETI를 외쳐야 한다.  교회는 모든 비진리에 맞서 싸워야 하며,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그리스도 유일의 복음을 수호하여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냐 저것이냐 선택을 강요하는 현대인에게, 선포된 말씀을 수호하기 위해그들의 전제를 NETI하여 그들의  실존을 비추어야 한다. 이 접촉점만이 두개의 축사이를 방황하는 현대인을 그들의 최초  자리로 좁혀 가게 할 수 있다. 그것은 해체되어 가는 문명 속에서 새로  태어나는 문명을 주도할 기독교가 가야 할 일이기때문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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