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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신학자료1

하이데거

하이데거  
http://cafe.naver.com/modernth/1354   

*모든 것은 존재라고 부를 수 있는가?
존재자는 존재의미를 모두 가지는가?
특정시대에 특정한 존재의미로 규정가능한가?

하이데거의 전기 사상
(1)『존재와 시간』의 철학적 물음으로서 존재의 의미에 대한 물음
*하이데거는 왜 존재의 의미에 대해서 묻는 것을 이 시대에 가장 절박하게 요구되는 철학적 과제로 보았는가?
모든 역사적 시대는 특정한 존재 이해를, 다시 말해서 존재의 의미에 대한 특정한 이해를 전제하고 있다. 이러한 존재 이해가 한 시대의 정치, 경제, 문화등 삶 전체를 궁극적으로 규정하는 것이며, 따라서 한 시대를 극복하고자 할 경우에는 그 시대를 지배하는 존재 이해와의 대결이 필수적이다. 오늘날은 현대를 규정하는 존재 이해가 자신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는 시대이다. 인간은 자연을 인간이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에너지 저장원으로 보면서 자신을 주체로 보고 있지만, 사실은 인간 개개인 역시 자연의 에너지를 최대한 발굴해 내도록 사회적인 기능연관체계에 의해서 닦달 당하는 에너지의 집합체에 불과함.

현대사회에서 진정한 의미의 주체는 구체적인 인간 개개인이 아니라 구체적인 인간들 하나하나를 계산 가능한 노동력으로 이용하면서 존재자 전체에 대한 지배를 확보해 가는 맹목적이고 추상적인 사회적인 기능 연관의 체계이다.

현대란 인간을 비롯한 모든 존재자들이 자신의 고유한 존재를 상실하고 한갓 계산 가능하고 처분 가능한 에너지 집합체로 전락한 니힐리즘의 시대이다. 이 시대란 모든 존재자들의 고유한 존재와 무게가 상실되고 니힐, 즉 공허가 지배하는 시대라는 것이다.

이런 현시대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하이데거에 따르면 정치 사회적인 변혁이전에 인간들의 존재 이해가 바뀌지 않으면 안된다. 현대를 궁극적으로 규정하는 것이 인간을 비롯한 존재자전체를 계산 가능한 에너지 집합체로 보는 존재이해인 한, 현대의 극복은 현대의 존재 이해를 극복하는 새로운 존재 이해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 무엇이 존재이해를 만들어내는가?
인간스스로가 그렇게 현대사회를 바라보게 만드는 것인가? 존재이해를 만들어내는 것을 말하지 않고, 그것이 일단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 그것과 연관된 정치사회적인 것들을 말하지 않고 어찌 존재이해의 변혁을 바랄 수 있는가?

*하이데거에 따르면 현대의 존재 이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서양의 전통 형이상학의 전체와의 대결이 요청된다. 현대를 극복하는 새로운 존재 이해란 현재의 과학기술시대를 포함하는 서구의 전통 전체와의 대결을 통해서 획득될 수 있는 것이다.

플라톤에서 니체에 이르는 전통적인 형이상학은 존재자 전체에 공통된 본질과 존재자 전체의 궁극적 근거를 묻는 것을 자신의 과제로 함. 이렇게 전통형이상학이 자신의 존재 물음을 추구하는 데에 있어서 그것은 하나의 특정한 존재 의미를 전제하고 있다. 전통 형이상학에서는 존재자가 존재한다는 것은 그것이 '이론적 고찰의 대상으로서 눈앞에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하나의 특정한 시간적 의미, 즉 지속적으로 현전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이렇게 존재가가 이론적 고찰의 대상으로서 눈앞에 존재한다고 보는 존재 이해를 극단적으로 밀고 나간 것이 존재자를 계산 가능한 에너지 집합체로 보는 현대의 과학기술적인 존재 이해라고 보고 있다. 따라서 자연과 인간을 황폐화하는 현대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전통형이상학의 존재이해를 극복하지 않으면 안된다.

따라서 하이데거는 또 하나의 형이상학의 제시가 아니라 형이상학 내지 존재론의 새로운 정초가 문제된다. 하이데거에게는 지금까지 전혀 물어지지 않은 채 자명하게 전제된 존재의 의미를 문제 삼으면서, 근원적이고 본래적인 존재 의미라는 토대 위에서 존재자들의 존재 내지 본질에 대한 탐색인 존재론을 새롭게 추구하는 것이 철학적 과제가 된다.

---->앞서의 형이상학과의 차이가 무엇인가?????

하이데거에 따르면 우리 인간은 자기 자신 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존재자들의 존재 내지 본질을 불명료하게나마 이미 이해하고 있다. 따라서 현존재는 자기 자신과 다른 존재자들에 대해서 동물과는 달리 그것들의 고유한 존재에 있어서 그것들과 관계를 맺으려 한다. 그러나 우선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자신의 본래적인 존재와 다른 존재자들의 존재를 망각하고 존재자들과의 관계에서 우리의 이해 관심을 관철한다. 그럼에도 우리에게 존재는 가장 가까이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존재를 이해하지 않고는 존재자 전체에 대해서 관계를 맺을 수 없으며 존재자가 인간의 이해 관심으로부터 독립하여 하나의 독자적이고 고유한 존재를 갖는 것으로서 존재한다고도 말할 수 없기 때문임.

하이데거는 실존주의자이니까~~~~~~
 
하이데거는 인간 현존재를 분석함에 있어서 동물이나 신 등 인간이 아닌 존재자로부터 인간을 해석하려 하지 않고 인간의 삶을 인간의 삶 자체로부터 이해하고자 한다. 즉 그것이 목표하는 것은 인간의 '사실적인 삶에 대한 해석학'이다.

☞ 판단의 기준이 자기 자신이 되어 버렸다.
 
(2)현존재의 실존성
인간은 자신의 존재를 문제 삼는다. 자신의 존재를 문제 삼는다는 것은 자신의 현재의 존재 방식에 의문을 품고 새로운 존재 방식을 모색한다는 것.
☞ 인류는 늘 이 문제로 하나님게 반항을 해 왔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인간은 우성 그리고 대개는 비본래적인 방식으로 존재한다. 비본래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얄팍하고 산만한 삶을 살고 있다는 것.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심층에서 자신의 삶이 깊이와 전체성을 갖게 되기를 갈구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삶에 대해 불명료하게나마 이해하고 있음.
☞ 이대로 죽기가 싫으니까......,

인간은 자신의 존재 방식, 자신의 삶의 방식 자체를 문제 삼지 않고 더욱 자극적이고 신선한 사건을 찾아 나선다.

그런데도 우리는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우리의 비본래적인 삶과 존재 방식에 회의를 품으면서 진정한 존재 방식을 희구한다. 인간에게는 항상 자신의 본래적인 존재 가능성이 문제인 것이다. 인간은 가능성을 자신의 본질로 갖는 존재자이다. 인간의 진정한 본질이나 진정한 존재는 우리에게 단순히 주어져 있지 않고 과제로 부과되어 있다. 인간이 자신의 고유한 존재를 문제 삼는 것에 주목하면서 하이데거는 인간을 '실존'이라고 부른다.

하이데거에서 인간은 세계 내 존재로서 항상 다른 인간, 다른 존재자들과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한다. 본래적인 존재 방식 또는 고유한 존재 방식이란 자신과의 진정한 관계 방식뿐 아니라 사물들에 대한 진정한 관계 방식을 의미한다.
☞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을 규정하지 않고 새로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판을 짜가자는 것이다.
 
존재자 전체의 존재가 세계이다.
인간에게 자신과 존재자 전체의 고유한 존재(세계)가 이미 개시되어 있다는 사태를 주목하면서 하이데거는 인간을 현존재라고 불렀다. 인간이 현존재라는 것, 인간에게 자신과 세계의 존재가 열려 있다는 사실이 바로 인간의 실존성, 다시 말해 인간이 자신의 존재를 문제 삼는 것을 가능하게 함.
☞ 그러나 그 한계를 알지 못한다.

(3)세계 내 존재로서의 현존재
현존재는 자신의 존재를 문제 삼되 하나의 특정한 세계 안에서 자신의 존재를 문제 삼는다. 현존재는 자신이 속하는 세계를 자신이 가능케 하는 방식으로 존재한다. 현존재는 자신의 세계를 건립하는 방식으로 존재한다.
세계는 현존재가 살아가는 장으로서 현존재의 존립을 가능하게 해주지만, 현존재 역시 세계가 그러한 세계로서 존재하게 하는 것. 현존재의 존재 방식에 따라서 현존재가 살아가는 세계가 달리 나타남.

우리의 일상적 삶에서 존재자는 우선 도구로서 드러나는 것이다. 존재자가 이렇게 도구로서 드러날 경우 그것은 자신의 존재 의미를 목적들의 지시 연관의 전체 안에서 갖게 된다. 모든 도구적 존재자는 이러한 목적 연관의 전체 안에서 자신의 존재 의미를 획득하며 이러한 목적 연관의 체계 내에서 자신을 드러낸다.
 
따라서 어떤 존재자가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이러한 목적 연관의 전체가 이미 개시되어 있지 않으면 안된다. 이런 목적 연관의 전체가 인간이 그 안에서 거주하는 세계이다. 전체성으로서의 세계는 존재자가 드러나기 위한 가능성의 조건으로서 세계 내에 드러나는 존재자보다 앞서서(apriori) 존재하는 것이다. 세계는 존재자가 드러나기 위해서 이미 드러나 있지 않으면 안 되는 지평인 것.

근대 인식론과의 차이를 가지는 지점으로서, 현존재는 현존재가 이미 항상 그 안에서 체류하고 있는 세계를 매개로 하여 존재자에 관계한다. 즉 존재자에 대한 관계가 가능하기 위해서 현존재는 이미 세계에 대한 이해를 갖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이를 시간적인 선후관계로서 생각해선 안되며, 세계에 대한 이해란 존재자에 대한 현존재의 구체적인 관계 안에서 수행되는 것.

현존재가 궁극적으로 관심을 갖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신의 고유한 존재 가능성, 자신의 진정한 자기 이외의 것이 아니다.
☞ 결국 자기발견으로 가게 되는데?
 
현존재의 자기 실현과 세계 이해는 서로 내밀한 관계를 가진다. 세계이해란 세계를 하나의 대상처럼 개념 파악한다는 것이 아니라 현존재의 자기 실현을 위해서 그리고 현존재의 자기실현을 통해서 하나의 목적 연관의 전체를 건립한다는 것을 의미함.
☞ 인간이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자기가 자기와 세계에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이 얼마나 가치가 있고 의미가 있는가?
 
세계는 현존재의 구체적인 실존 수행을 통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이렇게 세계와 현존재가 서로를 가능케하는 근원적인 공속 관계를 하이데거는 '세계 내 존재'라는 말로 의미하고자 하는 것. 안간과 세계를 분리된 실체로 보는 전통적인 파악 방식이 극복되는 것.
☞ 과연 성경이 분리되었다고 보는가? 그 분리의 차이점이 무엇인가?

(4)세계의 본래적인 개현과 죽음
세계가 인간이 본래적으로 실존하느냐 아니면 비본래적으로 실존하느냐에 따라서 세계도 본래적으로 또는 비본래적으로 드러남. 현존재가 진정한 자기를 구현한다는 것은 다른 한편으로는 그가 진정한 세계 안에서 거주하는 것을 의미함.

현존재의 진정한 자기 발견과 세계의 근원적인 개시는 어떻게 해서 가능한가?
하이데거는 현존재를 세계 내 존재라고 부른 반면 여타의 존재자들은 내세계적 존재라고 부름으로써 양자를 구별함. 즉 인간은 세계내에 있으면서도 세계를 건립하지만 여타의 존재자는 그냥 세계에 있음.

현존재의 존재의미, 즉 그의 본래적인 가능성은 우리가 이미 살고 있는 세계의 목적 연관의 전체 내에서 개시될 수 는 없다. 현존재의 진정한 실존 가능성은 비본래적인 세계 내에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내면에서 그리고 우리 내면으로의 귀환을 가능케 하는 것으로서의 죽음으로의 선구에 의해서 발견 될 수 있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죽음은 현존재의 '가장 고유하고 가장 극단적이며 다른 가능성에 의해서 능가될 수 없는 가능성'이다. 죽음은 어느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구체적이고 유일한 존재로서의 나의 죽음이다. 죽음은 각자에게 고유한 것이다. 따라서 죽음과 더불어 외부로부터 나에게 부과되는 모든 낯선 규정은 의미를 상실하고, 이를 통해 나에게 절대적으로 고유한 것이 비로서 드러난다. 이렇게 나에게 고유한 것은 현존재의 본래적인 진리이기에 가장 근원적인 진리이다.

죽음의 경험을 통해서 현존재는 자신의 가장 고유한 존재 가능성에 직면하게 된다. 이런 가능성은 현존재가 비본래적인 존재 방식에서 자신의 고유한 존재 의미로 여겨왔던 모든 가능성들의 허망함을 드러내고 그것들을 무로 떨어뜨리는 극단적인 가능성이기에 그것은 능가될 수 없는 가능성이다.

이러한 극단적 가능성은 다른 모든 가능성들에게 위계와 질서를 부과하고 이를 통해 실존의 전체성과 통일성을 가능케 하는 가능성이다. 죽음은 가장 고유한 가능성으로서 현존재를 단적으로 정초하는 근거이며 현존재의 최고의 심급이다.

죽음의 경험으로부터 도피하지 않고 그것에 직면하는 것을 통해 현존재의 궁극목적으로서의 진정한 자기가 개시되는 것이다. 이는 죽음을 극복하려는 것이다. 회의주의가 아니다. 그 이후에 일상적인 세계로 돌아온다. 그것은 죽음에의 경험 이후의 세계는 그 이전의 세계와 다르다.
☞ 죽기가 아깝지~이렇게 사유하는 존재가 소멸된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가 하고 말이다.
 
(5)죽음과 세계 내 존재의 퇴락 그리고 불안
그러나 인간은 앞선 (죽음)결단이전에 자신이 세계를 건립하는 자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일상적인 세계가 제시하는 가능성들을 맹목적으로 추구할 뿐이다. 이 때 죽음은 단지 하나의 재앙으로서만 나타난다. 그리고 그것과 대면하지 않고, 도피하려한다. 죽음을 세계 안에서 일어나는 하나의 자연적인 사건으로서만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죽음이란 우리에게 결단을 요구하는 사건이다.

죽음은 현재의 일상에서는 망각되고 은폐된 것인데 어떻게 우리에게 고지될 수 있는가? 하이데거에 따르면 죽음은 불안이란 현존재의 근본 기분을 통하여 자신을 고지한다. 기분은 우리의 의식적 노력의 산물이 아니고 그때그때마다 우리를 엄습하는 성질을 갖는다. 이러한 기분중 우리의 실존과 우리가 그 안에서 사는 세계를 근본적으로 규정하는 기분을 하이데거는 근본 기분이라고 한다. 따라서 하이데거가 죽음을 논할 때의 죽음은 자연적 사건으로서의 죽음이 문제되지 않고, 우리가 안주하는 일상적인 세계와 그 세계 안에서의 우리ㅐ 자신의 일상적인 활동들 그리고 우리가 이미 친숙하게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한 자기 자신과 자신이 관계하는 존재자들이 의미를 상실하고, 새로운 세계와 진정한 행위 가능성들 그리고 진정한 자신과 존재자들의 개시가 일어나는 사건으로서의 죽음이 문제되고 있다.

하이데거에게 현존재가 어떤 사태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러한 사태를 객관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실존 전체의 새로운 기투를 포함하는 것이다. 이해는 항상 실존의 변화를 수반하는 것. 따라서 인간이 죽음에 던져져 있다는 사실의 이해는 하나의 근본 기분, 즉 불안이란 근본 기분 안에서 가능하게 되며 이렇게 불안이란 기분에 근거하고 있는 죽음에 대한 이해만이 그러한 사실을 이해하기 전의 실존과 그것을 이해한 후의 실존 사이에 심각한 균열을 낳으면서 현존재의 도약을 마련할 수 있다.

근본기분으로서의 불안이란 인간이 조성해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엄습하는 것이다. 불안은 우리의 실존을 항상 철저하게 기분지우고 있다. 우리는 일상적인 가능성에 집착함으로써 이러한 불안으로부터 도피하고자 한다. 그러나 불안은 제거되지 않고, 불안은 일상적 가능성들에 대한 공포로 변형되어 간다. 공포는 비본래적인 실존 양식에서 불안이 나타나는 방식이다.

불안이란 근본 기분안에서는 죽음 내지 無는 우리에게 우리의 대상화를 통해서 우리가 언젠가는 지배해야하는 한계 이념으로서 나타나는 게 아니라, 우리의 실존 방식을 뒤바꾸면서 우리에게 세계를 달리 드러내는 근원으로서 드러난다.

(6)현존재의 단독자화와 세계의 개현 그리고 현존재의 존재 의미로서의 시간성
불안을 인수하면서 죽음에 앞서 달려가는 것을 통해서 현존재는 분산된 일상적 세계에서 벗어나면서 자신의 본래적 자기에 직면한다. 즉 현존재는 단독자가 된다.
이러한 단독자화는 현존재가 자신의 내면으로 도피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단독자화는 인간이 자신의 본래적 자기를 발견하는 사건일 뿐이다. 이러한 자기, 즉 본래성이란 너에 대한 나의 관계와 우리에 대한 나의 관계 그리고 너희들에 대한 우리의 관계가 근거하는 현존재이다. 새롭게 드러나는 이러한 가능성들은 그 어느 것에 의해서도 규정되지 않은 죽음, 즉 무로부터 길러지는 것이므로 창조적인 가능성들이다. 나와 세계의 근원적인 개시를 향한 길이다. 단독자화는 현존재의 궁극목표와 아울러 전체적인 세계가 열리기 위한 근거이다.

죽음으로의 선구는 이제 하이데거가 현존재의 존재의미를 시간성으로서 드러내는데 있어서 결정적인 단서 역할을 한다. 죽음으로 선구하는 결단은 현존재가 자신의 장래의 가능성, 즉 자신의 진정한 자기에로 선구하면서 자신이 이미 던져져 있는 자신의 처지와 그 가능성들을 적극적으로 인수하고 새로운 빛 아래에서 반복하는 것을 가능케한다. 현재는 유한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현재는 죽음으로의 선구로 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현재는 수학적인 지금의 한 점이 아니고 현존재의 유한성을 통해서 절박성을 갖게 되는 그때그대마다의 결단의 시간이다.
현존재의 존재의미가 시간성이라 함은 우선 대부분의 경우는 은폐되어 있고, 망각되어 있는 현존재의 본래적인 삶이 시간적인 구조를 갖는다는 것, 즉 매순간 순간을 근원적인 無내지 죽음으로의 선구를 통해 자신이 이미 처해 있는 과거를 새롭게 인수하면서 현재를 창조적으로 형성하는 삶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7)존재 물음과 시간 그리고 전통 형이상학의 파괴
현존재의 존재 뿐만 아니라 다른 여타의 존재자들의 존재 전체를 우리는 세계라고 부를 수 있다. 현존재가 이런 존재자의 존재 전체 내지 세계를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의 궁극적 근거를 현존재의 시간성, 즉 궁극적인 심연으로서의 죽음에 관계할 수 있는 현존재의 고유한 본질에서 찾았다.

현존재가 우선 대부분의 경우 자신의 본래적인 존재와 다른 존재자들의 존재를 망각하고 있다는 사실은 현존재의 고유한 존재에 대한 망각, 즉 존재 일반의 기투를 가능케하는 근원적인 시간성의 망각에 근거하고 있다.

전통형이상학은 지속적인 현재를 사고함.(눈앞에 지속적으로 현재한다는 의미의 존재의미를 자명하게 전제함. 이는 죽음으로의 선구를 통해서 근원적인 세계를 개시하지 않고 눈 앞에 존재하는 내세계적인 존재자들에 매몰되어 있는 현존재의 퇴락에 원인이 있다.)

근원적인 시간이 모든 존재 이해와 존재 해석의 지평이라는 사실을 시사함.
존재의 의미에 대한 물음은 시간의 본질에 대한 물음이다. 하이데거는 현존재의 시간성으로부터 전통적인 존재론의 존재 경험 배후에 망각된 채로 존재하는 저 시간을 사유하려함.

하이데거는 더 이상 현재란 시간 양상에만 지향하지 않고 시간의 삼차원, 특히 죽음으로의 선구로서의 '장래'에 지향하는 존재의 의미를 사유하려고 한다.

하이데거의 후기사상
하이데거의 전기사상에서는 현존재의 존재 구조에 대한 분석과 그것에 입각한 존재의 의미에 대한 물음이 정태적이고 비역사적인 방식으로 행해짐. 자신의 고유한 존재에 직면하려는 현존재의 결단이란 측면이 결정적인 중요성을 가짐. 자신과 존재자 전체의 고유한 존재를 이해하게 되는 사건에서 죽음으로 선구하려는 현존재의 결단이 가장 결정적인 계기로서 간주.

후기사상에서는 존재의 의미에 대한 물음은 철저하게 역사적인 형태를 띠게 되며 현존재 역시 그의 철저한 역사성에 있어서 파악된다. 현존재의 결단과 통제를 벗어나 현존재가 이미 내던져져 있는 역사 과정 자체가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게 된다. 서구 형이상학 2000년의 역사 안에서 각 시대마다 자신을 달리 드러내는 존재자 전체의 존재와 이러한 존재가 자신을 현존재에게 드러내는 장으로서의 근본 기분이 결정적인 의미를 갖게됨

하이데거에 따르면 철학이란 각 시대마다 달리 열리는 존재자 전체의 존재 내지 본질을 개념적으로 명확히 해석함으로써 각 시대에게 뚜렷한 형태를 부여하고 그 시대를 정초하는 것이다. 이러한 존재자 전체의 존재는 현존재를 엄습하는 그때그때마다의 근본 기분에 의해서 개시된다.

각 시대에 가능한 근본기분과 존재 이해가 그 시대와 그 시대를 정초하는 철학의 성격을 규정한다.
고대철학이란 경이의 기분 안에서 찬란한 모습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존재자 전체, 즉 퓌지스의 해석이다.
근대의 근본경험이란 회의와 의심의 기분에서 열리는 무규정적이면서도 인간의 노력에 따라서 규정 가능한 것으로서의 존재자 전체에 대한 경험이다. 계몽의 시대, 물화의 체계, 기술시대란 존재자 전체가 자신의 고유한 가치와 의미를 잃은 시대로서 니힐리즘이 지배하는 시대이다.
근대와 근대를 마련한 서구의 역사를 극복하는 새로운 존재 개념도 하나의 근본 기분에서 열리지 않으면 안된다.
존재가 존재자에게서 떠나버렸다는 사실에 대한 경악이란 기분은 이미 존재에 대한 예감이다. 경악이란 은닉한 형태로 자신을 고지하는 존재에 현존재가 관심을 집중하게 되는 기분이 바로 경외라는 기분이다. 경악이란 기분이 경외란 기분으로 변전됨으로써 우리는 물화체계의 맹목적인 자기 확장 운동으로부터 결정적으로 거리를 취하게 되며, 존재자 전체는 그리스인드링 보았던 퓌지스로서 '자신을 다시 드러낸다'
현대의 니힐리즘을 극복하는 것, 시대와 역사와의 대결.
우리가 근본기분인 경악 또는 불안 그리고 더 나아가 존재에 대한 경외라는 근본 기분에서 도피하지 않고 그러한 기분을 투철하게 견디면서 그 안에서 현재 자신을 고지하고 있는 존재에 응할 때, 니힐리즘은 극복될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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