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데거의 칸트 해석 2
하이데거의 칸트 해석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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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선험적 연역의 두 길
칸트는 범주 연역의 첫 번째 단락(A84/B116 - A95/B129)에서 범주 연역의 소개를 다루고, 둘째 단락(A95 - A114)과 셋째 단락(A115 -A128)에서 본격적으로 범주 연역을 수행하고 있다. 그러나 각 단락은 다른 방식에서 논구되는데, 즉 네 부분으로 이루어진 둘째 단락은 분류되어진(abgesondert) 그리고 준비적인(vorbereitend) 서술이긴 하나 연역의 증명 목표를 정초해 내고 있다. 그에 대해, 셋째 단락에서는 체계적인(systematisch) 그리고 연관 관계 속에 놓여진 연역이 서술되고, 결국 여기서 연역은 완전하게 통찰될 수 있다. 그러나 연역의 체계적인 표상을 나타내는 세 번째 단락에서도 두 개의 서로 다른 서술방식이 발견된다: "순수 통각에서"(A116) 시작하는 서술과 "아래로부터, 즉 경험에서"(A119) 시작하는 서술. 하이데거의 범주 연역에 대한 해석은 바로 여기에 놓여있다. 그에 따르면 범주 연역의 근본 의도는 초월의 해명이다라는 그의 주장과 함께 칸트 범주 연역의 이 세 번째 단락이 초월의 의미를 명확히 드러낸다.
(1) 통각에서 시작하는 길
통각(Apperzeption)에서 시작하는 길에서 하이데거는 구상력의 순수 종합을 직관과 오성의 매개자 (Mittlerin)로 제시하기 위해 "오성의 구조로부터"({칸트책} 78) 이 순수 오성이 순수 종합에, 결국엔 순수 직관에 의존해 있음을 명확하게 제시하려고 한다. 하이데거의 경우 오성이 인식의 통일을 위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가 라고 묻기에 앞서, 우선적으로 오성 내지는 통각에 대한 칸트의 입장을 - 하이데거가 범주 연역의 해석을 제1판에 한정하듯이 제1판에 따른 칸트의 입장 -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직관의 모든 사실(Daten)에 선행하는 의식의 통일없이 우리의 인식은 가능하지 않고, 이 의식의 통일에 연관해서만 대상의 모든 표상은 가능하다(비교 A107). 이 순수 근원적이며 변하지 않는 의식이 "선험적 통각"(transzendentale Apper- zeption)(A107)이다. 이 통각의 선험적 통일은 법칙에 따른 모든 경험적 표상들의 연관을 가능하게 한다. 그러나 이러한 연관을 가능하게 하는 통각의 통일은 우리가 "기능의 동일성"(Identit t der Funktion)(A108)을 의식하고 있는 한에서만 가능한데, 이 기능의 동일성을 통해서 통각의 통일은 잡다를 종합적으로 결합한다. 따라서 자기 동일성이라는 근원적이며 필연적인 의식은 동시에 개념들, 즉 규칙들에 따른 모든 현상들의 종합을 필연적으로 통일하는 의식이기도 하다(비교 A108). 이 규칙의 통일이 모든 잡다를 규정하므로 이 잡다는 통각의 통일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 아래에 놓이게 된다. 그러나 이 규칙은 바로 표상들의 잡다를 고려한 통각의 통일이며, 이러한 규칙의 능력은 곧 오성이다. 오성은 자연을 위해 법칙을 부여하고, 다시 말하면 오성없이는 그 어디에도 자연은 없고, 결국 규칙에 따른 현상들의 잡다를 종합적으로 통일하려는 것도 가능하지 못하다(비교 A126f). 자연은 단지 통각의 통일에서만 가능하다. 따라서 순수 오성은 범주에서 모든 현상을 근원적으로 통일하는 법칙이며, 그리고 그를 통해 경험을 범주의 형식에 따라 우선적으로 그리고 근원적으로 가능하게 한다(비교 A128).
이러한 이해 속에서 구상력(Einbildungskraft)은 어떠한 위치를 점하는가? 우선적으로 구상력은 종합의 기능(Funktion der Synthesis)이다. 구상력은 한편으론 감성(Sinnlichkeit)에 속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오성에도 속한다. 게다가 이 구상력은 "인간 영혼의 기본 능력"(A124)이기도 하다. 감관(Sinne)은 우리에게 인상(Eindr cke)을 제공하나 이 인상을 합성하지는 못하고, 결국 대상들의 모습(Bilder)을 구성하지 못한다. 대상들의 모습을 구성하기 위해선 인상의 수용성 이외에 이러한 인상을 조합하는 기능이 필요하다. "구상력이 직관의 잡다를 하나의 모습으로 이끌어 낸다"(A120). 그러나 재 생산적 구상력(reproduktive Einblidungskraft)이 연상 법칙에 따라 표상들을 결합하고, 이에 따라 표상 결합의 주관적이며 경험적인 근거인데 반해(비교 A121), 생산적 구상력(produktive Einbildungskraft)은 오성의 규칙에 따라, 범주에 적합하게 표상들을 결합한다(비교 A123). 그러나 여기서 이미 구상력의 종합은 감성에 대한 오성의 영향을 의미한다. 결국 생산적 구상력은 표상들을 연상하게 하는 객관적 근거, 즉 통각의 통일이라는 원칙에서 나타나는 "친화성"(Affinit t)(A122)을 필연적으로 이끌어 낸다. 따라서 칸트가 경험은 단지 구상력의 선험적 기능을 매개로 해서만 가능하다고 언급한 것은 놀라운 사실인데, 그의 변함없는 주된 입장은 순수 통각의 고정 불변하는 자아가 우리의 모든 표상의 상관자(Korrelatum)를 드러내고, 모든 의식은 모든 것을 파악하는 순수 통각에 속한다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순수 구상력은 그 기능을 "지성적"(intellektuell)(A124)으로 만들기 위해 통각을 필요로 한다. 이 사실은 구상력의 종합 그 자체는 항상 감각적(sinnlich) 임을 나타내는 것인데, 구상력의 종합은 잡다가 직관에서 현상하는 한에서만 이 잡다를 결합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태가 하이데거에서는 어떻게 나타나는가? 하이데거 자신이 항상 강조하듯이 오성의 가장 내적인 본질은 직관에의 의존성이다. 오성의 의존성이 "오성의 오성다움"(das Verstandsein des Verstandes)({칸트책} 148)이며, 이 오성의 오성다움은 순수 구상력의 순수한 종합에 놓여있다. 하이데거는 구상력을 본래적인 이중적 의미(eigentliche Doppelsinne)에서 형성(Bilden)의 능력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직관하는 능력(Verm gen anzuschauen)으로 구상력은 형상 창출의 의미에서 형성적(bildend)이며, 또 한편 직관할 수 있는 것의 현존에 의존해 있지 않은 능력(ein auf Anwesenheit des Anschaubaren nicht angewiesenes Verm gen)으로 구상력은 스스로 완성된다, 즉 구상력은 형성을 창출해 낸다. 이 형성하는 힘은 "수용적 (hinnehmend; rezeptives)인 형성이며, 동시에 창출하는, 즉 자발적"(schaffend; spontanes)({칸트책} 129)인 형성이다. 하이데거의 경우 구상력은 자발성과 수용성이라는 두 특성을 동시에 지닌다. 순수 직관은 그 자신의 순수성 때문에 자발성이라는 특성을 지니고, 순수 자발적 수용성인 순수 직관은 자신의 본질을 선험적 구상력에서 지닌다(비교 {칸트책}141ff). 따라서 선험적 구상력은 "수용적 자발성"(rezeptive Spontaneit t) ({칸트책} 155)을 의미한다. 게다가 하이데거는 순수 사유의 유한성과 순수 직관에 대한 의존성을 근거로 하여 "오성의 수용성"(Rezeptivit t des Verstandes)({칸트책} 153)을 언급한다. 그러나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칸트와는 무관한 하이데거 자신에게만 고유한 근본 능력인가? 칸트적인 의미로 본다면 구상력은 인식을 위한 근본적인 힘(Grundkraft)이긴 하나, 인식될 수 없는 것으로 이해된다(비교 A15/B29). 그러나 하이데거에 따르면 선험적 구상력은 순수 직관과 순수 사유 사이에 있는 한 능력이 아니라, 두 요소의 근원적인 통일을 가능하게 하는 근본 능력이다. 따라서 순수 구상력은 근본 능력으로 인식의 두 요소, 즉 순수 직관과 순수 사유 어디에로도 환원될 수 없다.
비록 칸트가 {순수이성비판} 제1판에서 인식을 위한 요소로 세 개의 근원, 즉 감관, 구상력, 통각을 단지 두 번 언급하고 있지만(비교 A94/A115), 칸트의 주된 입장은 우리의 인식은 감성과 오성이라는 두 근원에서 기인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인식의 통일을 위한 세 계기(drei Momente)로 순수 직관(시간), 구상력(의 종합), 순수 통각을 강조한다. 여기서 그는 칸트가 구상력을 "영혼의 필수적인 기능"(unentbehrliche Funktion der Seele)(A78)과 "인간 영혼의 근본 능력"(ein Grundverm gen der menschlichen Seele)(A124)으로 표현한 사실에 주목하고 있다. 칸트의 경우 이러한 구상력의 능력은 근원적인 것으로 간주되나 우리에게 알려져 있지 않은 근원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선험적 구상력을 감성과 오성이라는 두 줄기의 뿌리(Wurzel)로 간주한다. 따라서 선험적 구상력은 근원적으로 결합하는(urspr nglich einigend) 것이다. 즉, 고유한 능력으로서 선험적 구상력은 이러한 구상력을 위해 본질 구조적인 연관을 지니는 두 줄기, 즉 감성과 오성의 통일을 형성한다. 결국 근원적인 결합을 의미하는 순수 구상력에서 결합하는 것은(das Einigende) 결합되어 질 요소들(zu eini- gende Elemente)에 본래적으로 자라고 있지 않을 수 없다(비교 {칸트책} 140). 이 근원적인 통일의 형성은 결합(ein Einigen)으로 완성되며, 이 결합의 구조 전체를 위해선 통일의 선취(Vorhabe)가 요구된다.
(2) 아래로부터, 즉 경험적인 것으로부터 시작하는 길
아래로부터, 즉 경험적인 것으로부터 시작하는 길에서 하이데거는 구상력의 순수 종합이 바로 직관과 오성의 매개자(Mittlerin)임을 명백히 드러내고자 한다(비교 {칸트책} 82). 그는 칸트가 범주 연역에서 시간에 대한 순수 구상력의 필연적인 본질 연관성을 상세하고 명확하게 논구하지 않았다고 본다. 그의 해석에 따르면 칸트는 시간을 임의적인 장소(ein beliebiges Feld)로 간주하고, 구상력은 자신을 증명할 목적으로 이 장소에 우연히 한 번 들러 보는 것쯤으로 파악한다(비교 {칸트책} 175). 그에 따라 칸트는 시간을 순수한 지금계기(reine Jetztfolge)로 설정했으나, 이 시간 개념을 결코 시간의 근원성에서 파악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하이데거에 있어서 선험적 구상력은 곧 "근원적인 시간" (urspr ngliche Zeit)({칸트책} 187)을 의미하는데, 선험적 구상력의 근원적인 결합은 그 자체로 시간 연관된(in sich zeitbezogene) 결합이며, 바로 이 결합이 시간을 우선적으로 형성시키기 때문이다(비교 {칸트책} 175).
이제 선험적인 구상력은 근원적으로 결합하는 중간일 뿐만 아니라, 감성과 오성이라는 두 줄기의 뿌리로 본래의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강조한다: "선험적 구상력을 두 줄기의 뿌리로 해석하는 일은 자연히 이 뿌리의 뿌리 박힘(Verwurzelung), 즉 근원적 시간에로 환원됨을 의미한다"({칸트책} 196). 그는 순수 종합의 양상들(Modi), 즉 순수 각지(reine Apprehension), 순수 재생산(reine Reproduktion), 순수 재인식(reine Rekognition)을 시간의 양상들, 즉 현재(Gegenwart), 현재성(Gewesenheit), 미래(Zukunft)에 따라 논구한다(비교{칸트책} 179ff). 순수 종합의 세 양상은 그 자체 근원적으로 일치하며 시간 형성적이며, 시간 자체의 시간화(Zeitigung)를 드러낸다. 그러나 이 순수 종합의 세 양상은 시간 양상들을 결합하는 시간 속에서(in der dreifach-einigen Zeit) 근원적으로 일치하기 때문에, 순수 인식 요소들의 근원적인 결합 가능성도 이 순수 종합의 세 양상에 놓여있다. 시간의 세 양상, 즉 현재, 현재성, 미래등을 근원적으로 결합하는 형성이 결합(Einigung)을 가능하게 하고, 이 결합의 통일(Einheit)에서 초월이 형성된다(비교 {칸트책} 196). 결국 근원적인 시간인 선험적인 구상력은 그 자체 본질적으로 자발적 수용성이며 동시에 수용적 자발성인 것이다. 이러한 통일에 있어서만 자발적 수용성인 순수 감성과 수용적 자발성인 순수 통각은 서로 공속할 수 있다.
자발성과 수용성의 두 이질적인 특성을 지니는 하이데거적인 시간의 의미를 더 명백히 하기 위해 시간과 자기임(Selbstheit)의 관계에 대한 논구가 필요하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칸트는 그의 범주 연역에서 시간 자체에 대해서 그리고 이 시간의 통각과의 관계를 논구하지 않았고, 결속(Verbindung) 내지는 종합(Syn- thesis)은 오성의 자발성에 속하기 때문에 시간이 속해 있는 감성 자체에는 어떠한 결속성(Verbundenheit)도 가능하지 않다라는 사실만을 지적했다. 칸트가 시간과 공간을 수용성의 조건으로 논구하고 사유 내지는 통각을 자발성의 조건으로 논구했을 때, 어떻게 순수 사유가 시간 특성을 지닐 수 있을까? 실재로 칸트는 범주 연역을 고려하여 시간을 순수 직관 형식으로서 단지 감관의 촉발 내에서만, 다시 말하면 수용성의 조건으로만 설명한다. 따라서 시간 자체는 결코 자기 활동성에 관련된 종합이라는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비교 A77/B102). 그러나 하이데거에 의하면 모든 대상 표상은 필연적으로 시간에 의해 촉발되고, 게다가 시간은 스스로 촉발된다: "시간은 그 본질상 순수한 자기 자신의 촉발이다"({칸트책} 189). 모든 촉발은 이미 현존하는 존재자의 자기 통보(das Sich- melden)이며, 시간은 순수 직관으로 이 직관 속에서 형성된 직관되어진 것(das in ihr gebildeten Angeschauten)과 함께, 게다가 경험의 도움없이, 자기 자신에 관계하기 때문에, 시간은 순수 자기 촉발의 의미를 지닌다. 또한 순수 자기 촉발인 시간은 유한한 주관의 본질에 속하는 자기 자신에 관련된 어떤 것(so etwas wie Sich-selbst-angehen)의 본질을 형성하기 때문에 "주관성의 본질 구조" (die Wesensstruktur der Subjektivit t)({칸트책} 189)를 형성한다. 대립해 있게함 자체(das Gegenstehenlassen als solches)를 순수하게 촉발한다는 것은 "어떤 것으로부터 순수하게 대립해 있게 함"(das reine Gegenstehenlassen von …), 즉 순수 통각에 "어떤 대립적인 것"(so etwas wie ein Gegen-es)({칸트책} 189f.)을 이끌어 대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시간은 통각의 내적인 가능성에 속하고, 자기(das Selbst)가 자기 의식과 같은 어떤 것(so etwas wie Selbst- bewu tsein)일 수 있는 정도로 유한한 자기성(endliche Selbstheit)을 근원적으로 형성한다. 시간은 자기성 자체의 본질 속에서 형성되어야 하며, 이와 함께 이 자기성을 우선적으로 드러내지 않을 수 없다. 결국 시간은 유한한 자기 자체의 "선험적인 근원 구조"(transzendentale Urstruktur)({칸트책} 191)를 부여한다. 하이데거는 시간과 통각은 더 이상 결합할 수 없이 그리고 이질적으로 대립해 있는 것이 아니며, 칸트도 이 둘을, 비록 그가 이 둘 자체를 명확하게 보지는 못했더라도, 그것의 근원적인 같음(urspr ngliche Selbigkeit) 속에서 함께 이끌어 내고 있다고 언급한다(비교 {칸트책} 191f.): 근원적인 시간인 자아(das Ich)가 어떤 것으로부터 대립해 있게 함(das Gegenstehenlassen von …), 즉 초월을 형성한다.
4. 맺는 말
왜 칸트는 제1판에 따른 오성 개념, 즉 범주 연역의 논구를 제2판에서는 완전히 새롭게 시도했는가? 이에 대한 근거로 그는 제2판 서문(Vorrede)에서 범주 연역의 애매성(Dunkelheit)을 벗어나기 위해 개량을 시도했다라고 말한다(비교 B XXXVIII). 그러나 하이데거는 이런 칸트의 변화된 모습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 하이데거의 경우에도 제2판의 범주 연역이 일종의 개량을 의미하는가? 인간 영혼의 근본 능력인 선험적 구상력이 삭제되고, 이 구상력의 기능이 단순한 자발성인 오성에 위임된다면, 순수 감성과 순수 사유를 그의 통일성을 고려하여 파악하려는 가능성은 사라지고 만다는 것이 하이데거의 기본 입장으로, 칸트는 제2판의 범주 연역에서 구상력의 주된 역할을 오성으로 환원해 버렸고 결국 순수 감성과 순수 직관인 시간의 의미를 그르치고 있다고 하이데거는 비판한다. 그 때문에 하이데거는 원칙적으로 제2판보다는 제1판을 선호하고 우위를 부여한다. 그러나 칸트의 경우에 있어 그리고 일반적인 경우에서도 개량은 우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제2판뿐만 아니라 제1판에서도 범주의 선험적 연역에 대한 칸트의 주된 시도는 단지 감성 내지는 경험의 모든 대상에 대한 오성의 관계만을 논구하려는 것이다. 제1판에선 이러한 관계를 매개해주는 구상력의 역할을 부각시킴으로 해서 사유의 기능인 범주가 애매하게 남아있던 반면, 제2판에서는 '나는 생각한다'라는 선험적 자기의식(Apperzeption)의 통일성에 의해 범주의 객관적 타당성이 명확하게 드러났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이데거는 직관, 즉 시간에 대한 범주의 의존성을 근거로 오성은 범주 연역에서 - 제1판에서 뿐만 아니라 제2판에서도 - 그의 우위를 포기했고, 오성의 본질은 시간에 연관된 선험적 구상력의 순수 종합 속에 놓여있다고 역설한다: "순수 구상력을 순수 사유의 기능에서 논구하는 모든 설명은 순수 구상력의 특별한 본질을 오인하는 것이다"({칸트책} 197).
하이데거 자신이 말하듯이 그의 칸트 해석은 칸트적인 정초라는 내적인 동요에 따른다(비교 {칸트책} 43).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해석은 칸트의 본래적인 소질이나 그 소질의 정식화를 유지하고 있지는 못하다. 그의 해석은 오히려 그의 주저 {존재와 시간}(1927)의 물음 설정 위에 놓여있다: "{순수이성비판}의 해석은 {존재와 시간}의 두 번째 부분의 완성과의 연관 속에서 피어났다"({칸트책} XVI). 결국 하이데거는 칸트가 이미 말했던 것, 즉 칸트 철학이 드러냈던 본질적인 아니라, 단지 칸트가 말하고자 했었던 것, 다시 말하면 칸트 철학을 자신의 입장에서 재 설정함으로 해서 칸트의 논의, 더 정확하게는 {순수이성비판}의 결정적인 내용을 드러내려고 한다(비교 {칸트책} 201).
참고서적
I. Kant; Kritik der reinen Vernunft. Hrsg. von Schmidt. Hamburg 1971 [A: erste Originalausgabe (1781); B: zweite Originalausgabe (1787)].
M. Heidegger; Kant und das Problem der Metaphysik. 5. Auflage. Frankfurt a. M. 1991.
M. Heidegger; Die Grundprobleme der Ph nomenologie. In:Gesamtausgabe Bd. 24. Frankfurt a. M. 1975.
M. Heidegger; Ph nomenologische Interpretation von Kants 'Kritik der reinen Vernunft'. In: Gesamtausgabe Bd. 25. Frankfurt a. M. 1977.
M. Baum; Deduktion und Beweis in Kants Transzendentalphilosophie. Unter- suchungen zur 'Kritik der reinen Vernunft'. K nigstein/Ts. 1986
W. Carl; Die Transzendentale Deduktion der Kategorien in der ersten Auflage der 'Kritik der reinen Vernunft'. Ein Kommentar. Frankfurt a. M. 1992.
D. Dahlstrom; Heidegger's Kantian Turn: Notes to his commentary on the 'Kritik der reinen Vernunft'. In: Review of Metaphysics 1991.
D. Henrich; ber die Einheit der Subjektivit t. In: Philosophische Rundschau. Bd. 3(1955).
D. K hler; Martin Heidegger. Die Schematisierung des Seinssinnes als The- matik des dritten Abschnitts von 'Sein und Zeit'. Bonn 1993.
[Zusammenfassung]
Heideggers Deutung von der transzendentalen Kategorien
Deduktion in Kants 'Kritik der reinen Vernunft'
Park, Pil-Bae(Sungkyunkwan Univ.)
Nach Kant entspringt unsere Erkenntnis aus der Rezeptivit t der Eindr cke und der Spontaneit t der Begriffe. Also sind Anschauung und Begriff die Bedingungen, unter denen allein die Erkenntnis eines Gegenstandes m glich ist. Sie bed rfen aber einer Deduktion. Durch die Deduktion der reinen Verstandesbegriffe will Kant das Verh ltnis zur Sinnlichkeit bzw. zu allen Gegenst nden der Erfahrung, mithin die objektive G ltigkeit der Kategorien begreiflich machen.
Heidegger, der die 'Kritik der reinen Vernunft' als eine Begr ndung der Meta- physik ausgelegt hat, h lt diese Deduktion der Kategorien f r ein Stadium von f nf Stadien der Grundlegung der Ontologie. Also bedeutet bei Heidegger die Deduktion der Kategorien als drittes Stadium die innere M glichkeit der Wesenseinheit der ontologischen Synthesis. Seine Auslegung folgt zwar der inneren Bewegung der Kantischen Grundlegung, aber sie h lt sich nicht an die Kantische eigene Dispo- sition und deren Formulierung. Seine Auslegung liegt haupts chlich in der Fragestellung von 'Sein und Zeit'(1927).
Hauptfach : Kants Philosophie. Metaphysik. Erkenntnistheorie
Hauptw rter : Kategorien-Deduktion. Einheit und Synthesis. Reine
Anschauung. Spontane Rezeptivit t. Angewiesenhe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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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선험적 연역의 두 길
칸트는 범주 연역의 첫 번째 단락(A84/B116 - A95/B129)에서 범주 연역의 소개를 다루고, 둘째 단락(A95 - A114)과 셋째 단락(A115 -A128)에서 본격적으로 범주 연역을 수행하고 있다. 그러나 각 단락은 다른 방식에서 논구되는데, 즉 네 부분으로 이루어진 둘째 단락은 분류되어진(abgesondert) 그리고 준비적인(vorbereitend) 서술이긴 하나 연역의 증명 목표를 정초해 내고 있다. 그에 대해, 셋째 단락에서는 체계적인(systematisch) 그리고 연관 관계 속에 놓여진 연역이 서술되고, 결국 여기서 연역은 완전하게 통찰될 수 있다. 그러나 연역의 체계적인 표상을 나타내는 세 번째 단락에서도 두 개의 서로 다른 서술방식이 발견된다: "순수 통각에서"(A116) 시작하는 서술과 "아래로부터, 즉 경험에서"(A119) 시작하는 서술. 하이데거의 범주 연역에 대한 해석은 바로 여기에 놓여있다. 그에 따르면 범주 연역의 근본 의도는 초월의 해명이다라는 그의 주장과 함께 칸트 범주 연역의 이 세 번째 단락이 초월의 의미를 명확히 드러낸다.
(1) 통각에서 시작하는 길
통각(Apperzeption)에서 시작하는 길에서 하이데거는 구상력의 순수 종합을 직관과 오성의 매개자 (Mittlerin)로 제시하기 위해 "오성의 구조로부터"({칸트책} 78) 이 순수 오성이 순수 종합에, 결국엔 순수 직관에 의존해 있음을 명확하게 제시하려고 한다. 하이데거의 경우 오성이 인식의 통일을 위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가 라고 묻기에 앞서, 우선적으로 오성 내지는 통각에 대한 칸트의 입장을 - 하이데거가 범주 연역의 해석을 제1판에 한정하듯이 제1판에 따른 칸트의 입장 -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직관의 모든 사실(Daten)에 선행하는 의식의 통일없이 우리의 인식은 가능하지 않고, 이 의식의 통일에 연관해서만 대상의 모든 표상은 가능하다(비교 A107). 이 순수 근원적이며 변하지 않는 의식이 "선험적 통각"(transzendentale Apper- zeption)(A107)이다. 이 통각의 선험적 통일은 법칙에 따른 모든 경험적 표상들의 연관을 가능하게 한다. 그러나 이러한 연관을 가능하게 하는 통각의 통일은 우리가 "기능의 동일성"(Identit t der Funktion)(A108)을 의식하고 있는 한에서만 가능한데, 이 기능의 동일성을 통해서 통각의 통일은 잡다를 종합적으로 결합한다. 따라서 자기 동일성이라는 근원적이며 필연적인 의식은 동시에 개념들, 즉 규칙들에 따른 모든 현상들의 종합을 필연적으로 통일하는 의식이기도 하다(비교 A108). 이 규칙의 통일이 모든 잡다를 규정하므로 이 잡다는 통각의 통일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 아래에 놓이게 된다. 그러나 이 규칙은 바로 표상들의 잡다를 고려한 통각의 통일이며, 이러한 규칙의 능력은 곧 오성이다. 오성은 자연을 위해 법칙을 부여하고, 다시 말하면 오성없이는 그 어디에도 자연은 없고, 결국 규칙에 따른 현상들의 잡다를 종합적으로 통일하려는 것도 가능하지 못하다(비교 A126f). 자연은 단지 통각의 통일에서만 가능하다. 따라서 순수 오성은 범주에서 모든 현상을 근원적으로 통일하는 법칙이며, 그리고 그를 통해 경험을 범주의 형식에 따라 우선적으로 그리고 근원적으로 가능하게 한다(비교 A128).
이러한 이해 속에서 구상력(Einbildungskraft)은 어떠한 위치를 점하는가? 우선적으로 구상력은 종합의 기능(Funktion der Synthesis)이다. 구상력은 한편으론 감성(Sinnlichkeit)에 속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오성에도 속한다. 게다가 이 구상력은 "인간 영혼의 기본 능력"(A124)이기도 하다. 감관(Sinne)은 우리에게 인상(Eindr cke)을 제공하나 이 인상을 합성하지는 못하고, 결국 대상들의 모습(Bilder)을 구성하지 못한다. 대상들의 모습을 구성하기 위해선 인상의 수용성 이외에 이러한 인상을 조합하는 기능이 필요하다. "구상력이 직관의 잡다를 하나의 모습으로 이끌어 낸다"(A120). 그러나 재 생산적 구상력(reproduktive Einblidungskraft)이 연상 법칙에 따라 표상들을 결합하고, 이에 따라 표상 결합의 주관적이며 경험적인 근거인데 반해(비교 A121), 생산적 구상력(produktive Einbildungskraft)은 오성의 규칙에 따라, 범주에 적합하게 표상들을 결합한다(비교 A123). 그러나 여기서 이미 구상력의 종합은 감성에 대한 오성의 영향을 의미한다. 결국 생산적 구상력은 표상들을 연상하게 하는 객관적 근거, 즉 통각의 통일이라는 원칙에서 나타나는 "친화성"(Affinit t)(A122)을 필연적으로 이끌어 낸다. 따라서 칸트가 경험은 단지 구상력의 선험적 기능을 매개로 해서만 가능하다고 언급한 것은 놀라운 사실인데, 그의 변함없는 주된 입장은 순수 통각의 고정 불변하는 자아가 우리의 모든 표상의 상관자(Korrelatum)를 드러내고, 모든 의식은 모든 것을 파악하는 순수 통각에 속한다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순수 구상력은 그 기능을 "지성적"(intellektuell)(A124)으로 만들기 위해 통각을 필요로 한다. 이 사실은 구상력의 종합 그 자체는 항상 감각적(sinnlich) 임을 나타내는 것인데, 구상력의 종합은 잡다가 직관에서 현상하는 한에서만 이 잡다를 결합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태가 하이데거에서는 어떻게 나타나는가? 하이데거 자신이 항상 강조하듯이 오성의 가장 내적인 본질은 직관에의 의존성이다. 오성의 의존성이 "오성의 오성다움"(das Verstandsein des Verstandes)({칸트책} 148)이며, 이 오성의 오성다움은 순수 구상력의 순수한 종합에 놓여있다. 하이데거는 구상력을 본래적인 이중적 의미(eigentliche Doppelsinne)에서 형성(Bilden)의 능력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직관하는 능력(Verm gen anzuschauen)으로 구상력은 형상 창출의 의미에서 형성적(bildend)이며, 또 한편 직관할 수 있는 것의 현존에 의존해 있지 않은 능력(ein auf Anwesenheit des Anschaubaren nicht angewiesenes Verm gen)으로 구상력은 스스로 완성된다, 즉 구상력은 형성을 창출해 낸다. 이 형성하는 힘은 "수용적 (hinnehmend; rezeptives)인 형성이며, 동시에 창출하는, 즉 자발적"(schaffend; spontanes)({칸트책} 129)인 형성이다. 하이데거의 경우 구상력은 자발성과 수용성이라는 두 특성을 동시에 지닌다. 순수 직관은 그 자신의 순수성 때문에 자발성이라는 특성을 지니고, 순수 자발적 수용성인 순수 직관은 자신의 본질을 선험적 구상력에서 지닌다(비교 {칸트책}141ff). 따라서 선험적 구상력은 "수용적 자발성"(rezeptive Spontaneit t) ({칸트책} 155)을 의미한다. 게다가 하이데거는 순수 사유의 유한성과 순수 직관에 대한 의존성을 근거로 하여 "오성의 수용성"(Rezeptivit t des Verstandes)({칸트책} 153)을 언급한다. 그러나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칸트와는 무관한 하이데거 자신에게만 고유한 근본 능력인가? 칸트적인 의미로 본다면 구상력은 인식을 위한 근본적인 힘(Grundkraft)이긴 하나, 인식될 수 없는 것으로 이해된다(비교 A15/B29). 그러나 하이데거에 따르면 선험적 구상력은 순수 직관과 순수 사유 사이에 있는 한 능력이 아니라, 두 요소의 근원적인 통일을 가능하게 하는 근본 능력이다. 따라서 순수 구상력은 근본 능력으로 인식의 두 요소, 즉 순수 직관과 순수 사유 어디에로도 환원될 수 없다.
비록 칸트가 {순수이성비판} 제1판에서 인식을 위한 요소로 세 개의 근원, 즉 감관, 구상력, 통각을 단지 두 번 언급하고 있지만(비교 A94/A115), 칸트의 주된 입장은 우리의 인식은 감성과 오성이라는 두 근원에서 기인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인식의 통일을 위한 세 계기(drei Momente)로 순수 직관(시간), 구상력(의 종합), 순수 통각을 강조한다. 여기서 그는 칸트가 구상력을 "영혼의 필수적인 기능"(unentbehrliche Funktion der Seele)(A78)과 "인간 영혼의 근본 능력"(ein Grundverm gen der menschlichen Seele)(A124)으로 표현한 사실에 주목하고 있다. 칸트의 경우 이러한 구상력의 능력은 근원적인 것으로 간주되나 우리에게 알려져 있지 않은 근원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선험적 구상력을 감성과 오성이라는 두 줄기의 뿌리(Wurzel)로 간주한다. 따라서 선험적 구상력은 근원적으로 결합하는(urspr nglich einigend) 것이다. 즉, 고유한 능력으로서 선험적 구상력은 이러한 구상력을 위해 본질 구조적인 연관을 지니는 두 줄기, 즉 감성과 오성의 통일을 형성한다. 결국 근원적인 결합을 의미하는 순수 구상력에서 결합하는 것은(das Einigende) 결합되어 질 요소들(zu eini- gende Elemente)에 본래적으로 자라고 있지 않을 수 없다(비교 {칸트책} 140). 이 근원적인 통일의 형성은 결합(ein Einigen)으로 완성되며, 이 결합의 구조 전체를 위해선 통일의 선취(Vorhabe)가 요구된다.
(2) 아래로부터, 즉 경험적인 것으로부터 시작하는 길
아래로부터, 즉 경험적인 것으로부터 시작하는 길에서 하이데거는 구상력의 순수 종합이 바로 직관과 오성의 매개자(Mittlerin)임을 명백히 드러내고자 한다(비교 {칸트책} 82). 그는 칸트가 범주 연역에서 시간에 대한 순수 구상력의 필연적인 본질 연관성을 상세하고 명확하게 논구하지 않았다고 본다. 그의 해석에 따르면 칸트는 시간을 임의적인 장소(ein beliebiges Feld)로 간주하고, 구상력은 자신을 증명할 목적으로 이 장소에 우연히 한 번 들러 보는 것쯤으로 파악한다(비교 {칸트책} 175). 그에 따라 칸트는 시간을 순수한 지금계기(reine Jetztfolge)로 설정했으나, 이 시간 개념을 결코 시간의 근원성에서 파악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하이데거에 있어서 선험적 구상력은 곧 "근원적인 시간" (urspr ngliche Zeit)({칸트책} 187)을 의미하는데, 선험적 구상력의 근원적인 결합은 그 자체로 시간 연관된(in sich zeitbezogene) 결합이며, 바로 이 결합이 시간을 우선적으로 형성시키기 때문이다(비교 {칸트책} 175).
이제 선험적인 구상력은 근원적으로 결합하는 중간일 뿐만 아니라, 감성과 오성이라는 두 줄기의 뿌리로 본래의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강조한다: "선험적 구상력을 두 줄기의 뿌리로 해석하는 일은 자연히 이 뿌리의 뿌리 박힘(Verwurzelung), 즉 근원적 시간에로 환원됨을 의미한다"({칸트책} 196). 그는 순수 종합의 양상들(Modi), 즉 순수 각지(reine Apprehension), 순수 재생산(reine Reproduktion), 순수 재인식(reine Rekognition)을 시간의 양상들, 즉 현재(Gegenwart), 현재성(Gewesenheit), 미래(Zukunft)에 따라 논구한다(비교{칸트책} 179ff). 순수 종합의 세 양상은 그 자체 근원적으로 일치하며 시간 형성적이며, 시간 자체의 시간화(Zeitigung)를 드러낸다. 그러나 이 순수 종합의 세 양상은 시간 양상들을 결합하는 시간 속에서(in der dreifach-einigen Zeit) 근원적으로 일치하기 때문에, 순수 인식 요소들의 근원적인 결합 가능성도 이 순수 종합의 세 양상에 놓여있다. 시간의 세 양상, 즉 현재, 현재성, 미래등을 근원적으로 결합하는 형성이 결합(Einigung)을 가능하게 하고, 이 결합의 통일(Einheit)에서 초월이 형성된다(비교 {칸트책} 196). 결국 근원적인 시간인 선험적인 구상력은 그 자체 본질적으로 자발적 수용성이며 동시에 수용적 자발성인 것이다. 이러한 통일에 있어서만 자발적 수용성인 순수 감성과 수용적 자발성인 순수 통각은 서로 공속할 수 있다.
자발성과 수용성의 두 이질적인 특성을 지니는 하이데거적인 시간의 의미를 더 명백히 하기 위해 시간과 자기임(Selbstheit)의 관계에 대한 논구가 필요하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칸트는 그의 범주 연역에서 시간 자체에 대해서 그리고 이 시간의 통각과의 관계를 논구하지 않았고, 결속(Verbindung) 내지는 종합(Syn- thesis)은 오성의 자발성에 속하기 때문에 시간이 속해 있는 감성 자체에는 어떠한 결속성(Verbundenheit)도 가능하지 않다라는 사실만을 지적했다. 칸트가 시간과 공간을 수용성의 조건으로 논구하고 사유 내지는 통각을 자발성의 조건으로 논구했을 때, 어떻게 순수 사유가 시간 특성을 지닐 수 있을까? 실재로 칸트는 범주 연역을 고려하여 시간을 순수 직관 형식으로서 단지 감관의 촉발 내에서만, 다시 말하면 수용성의 조건으로만 설명한다. 따라서 시간 자체는 결코 자기 활동성에 관련된 종합이라는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비교 A77/B102). 그러나 하이데거에 의하면 모든 대상 표상은 필연적으로 시간에 의해 촉발되고, 게다가 시간은 스스로 촉발된다: "시간은 그 본질상 순수한 자기 자신의 촉발이다"({칸트책} 189). 모든 촉발은 이미 현존하는 존재자의 자기 통보(das Sich- melden)이며, 시간은 순수 직관으로 이 직관 속에서 형성된 직관되어진 것(das in ihr gebildeten Angeschauten)과 함께, 게다가 경험의 도움없이, 자기 자신에 관계하기 때문에, 시간은 순수 자기 촉발의 의미를 지닌다. 또한 순수 자기 촉발인 시간은 유한한 주관의 본질에 속하는 자기 자신에 관련된 어떤 것(so etwas wie Sich-selbst-angehen)의 본질을 형성하기 때문에 "주관성의 본질 구조" (die Wesensstruktur der Subjektivit t)({칸트책} 189)를 형성한다. 대립해 있게함 자체(das Gegenstehenlassen als solches)를 순수하게 촉발한다는 것은 "어떤 것으로부터 순수하게 대립해 있게 함"(das reine Gegenstehenlassen von …), 즉 순수 통각에 "어떤 대립적인 것"(so etwas wie ein Gegen-es)({칸트책} 189f.)을 이끌어 대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시간은 통각의 내적인 가능성에 속하고, 자기(das Selbst)가 자기 의식과 같은 어떤 것(so etwas wie Selbst- bewu tsein)일 수 있는 정도로 유한한 자기성(endliche Selbstheit)을 근원적으로 형성한다. 시간은 자기성 자체의 본질 속에서 형성되어야 하며, 이와 함께 이 자기성을 우선적으로 드러내지 않을 수 없다. 결국 시간은 유한한 자기 자체의 "선험적인 근원 구조"(transzendentale Urstruktur)({칸트책} 191)를 부여한다. 하이데거는 시간과 통각은 더 이상 결합할 수 없이 그리고 이질적으로 대립해 있는 것이 아니며, 칸트도 이 둘을, 비록 그가 이 둘 자체를 명확하게 보지는 못했더라도, 그것의 근원적인 같음(urspr ngliche Selbigkeit) 속에서 함께 이끌어 내고 있다고 언급한다(비교 {칸트책} 191f.): 근원적인 시간인 자아(das Ich)가 어떤 것으로부터 대립해 있게 함(das Gegenstehenlassen von …), 즉 초월을 형성한다.
4. 맺는 말
왜 칸트는 제1판에 따른 오성 개념, 즉 범주 연역의 논구를 제2판에서는 완전히 새롭게 시도했는가? 이에 대한 근거로 그는 제2판 서문(Vorrede)에서 범주 연역의 애매성(Dunkelheit)을 벗어나기 위해 개량을 시도했다라고 말한다(비교 B XXXVIII). 그러나 하이데거는 이런 칸트의 변화된 모습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 하이데거의 경우에도 제2판의 범주 연역이 일종의 개량을 의미하는가? 인간 영혼의 근본 능력인 선험적 구상력이 삭제되고, 이 구상력의 기능이 단순한 자발성인 오성에 위임된다면, 순수 감성과 순수 사유를 그의 통일성을 고려하여 파악하려는 가능성은 사라지고 만다는 것이 하이데거의 기본 입장으로, 칸트는 제2판의 범주 연역에서 구상력의 주된 역할을 오성으로 환원해 버렸고 결국 순수 감성과 순수 직관인 시간의 의미를 그르치고 있다고 하이데거는 비판한다. 그 때문에 하이데거는 원칙적으로 제2판보다는 제1판을 선호하고 우위를 부여한다. 그러나 칸트의 경우에 있어 그리고 일반적인 경우에서도 개량은 우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제2판뿐만 아니라 제1판에서도 범주의 선험적 연역에 대한 칸트의 주된 시도는 단지 감성 내지는 경험의 모든 대상에 대한 오성의 관계만을 논구하려는 것이다. 제1판에선 이러한 관계를 매개해주는 구상력의 역할을 부각시킴으로 해서 사유의 기능인 범주가 애매하게 남아있던 반면, 제2판에서는 '나는 생각한다'라는 선험적 자기의식(Apperzeption)의 통일성에 의해 범주의 객관적 타당성이 명확하게 드러났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이데거는 직관, 즉 시간에 대한 범주의 의존성을 근거로 오성은 범주 연역에서 - 제1판에서 뿐만 아니라 제2판에서도 - 그의 우위를 포기했고, 오성의 본질은 시간에 연관된 선험적 구상력의 순수 종합 속에 놓여있다고 역설한다: "순수 구상력을 순수 사유의 기능에서 논구하는 모든 설명은 순수 구상력의 특별한 본질을 오인하는 것이다"({칸트책} 197).
하이데거 자신이 말하듯이 그의 칸트 해석은 칸트적인 정초라는 내적인 동요에 따른다(비교 {칸트책} 43).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해석은 칸트의 본래적인 소질이나 그 소질의 정식화를 유지하고 있지는 못하다. 그의 해석은 오히려 그의 주저 {존재와 시간}(1927)의 물음 설정 위에 놓여있다: "{순수이성비판}의 해석은 {존재와 시간}의 두 번째 부분의 완성과의 연관 속에서 피어났다"({칸트책} XVI). 결국 하이데거는 칸트가 이미 말했던 것, 즉 칸트 철학이 드러냈던 본질적인 아니라, 단지 칸트가 말하고자 했었던 것, 다시 말하면 칸트 철학을 자신의 입장에서 재 설정함으로 해서 칸트의 논의, 더 정확하게는 {순수이성비판}의 결정적인 내용을 드러내려고 한다(비교 {칸트책} 201).
참고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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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K hler; Martin Heidegger. Die Schematisierung des Seinssinnes als The- matik des dritten Abschnitts von 'Sein und Zeit'. Bonn 1993.
[Zusammenfassung]
Heideggers Deutung von der transzendentalen Kategorien
Deduktion in Kants 'Kritik der reinen Vernunft'
Park, Pil-Bae(Sungkyunkwan Univ.)
Nach Kant entspringt unsere Erkenntnis aus der Rezeptivit t der Eindr cke und der Spontaneit t der Begriffe. Also sind Anschauung und Begriff die Bedingungen, unter denen allein die Erkenntnis eines Gegenstandes m glich ist. Sie bed rfen aber einer Deduktion. Durch die Deduktion der reinen Verstandesbegriffe will Kant das Verh ltnis zur Sinnlichkeit bzw. zu allen Gegenst nden der Erfahrung, mithin die objektive G ltigkeit der Kategorien begreiflich machen.
Heidegger, der die 'Kritik der reinen Vernunft' als eine Begr ndung der Meta- physik ausgelegt hat, h lt diese Deduktion der Kategorien f r ein Stadium von f nf Stadien der Grundlegung der Ontologie. Also bedeutet bei Heidegger die Deduktion der Kategorien als drittes Stadium die innere M glichkeit der Wesenseinheit der ontologischen Synthesis. Seine Auslegung folgt zwar der inneren Bewegung der Kantischen Grundlegung, aber sie h lt sich nicht an die Kantische eigene Dispo- sition und deren Formulierung. Seine Auslegung liegt haupts chlich in der Fragestellung von 'Sein und Zeit'(1927).
Hauptfach : Kants Philosophie. Metaphysik. Erkenntnistheorie
Hauptw rter : Kategorien-Deduktion. Einheit und Synthesis. Reine
Anschauung. Spontane Rezeptivit t. Angewiesenhe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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