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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거에서의 세계의 의미2

하이데거에서의 세계의 의미2 
http://cafe.naver.com/modernth/961   
 
4. 세계 형성
 우리는 지금 세계를 주제적으로 묻고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 물음은 '세계'를 하나의 '정의'의 형태로 얻고자 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그 물음을 통해 철학의 본래적 물음을 현실적으로 전개해 나가기 위함이다. 철학이란 '철학'이란 개념으로서가 아니라 철학함으로 존재한다. 좀 더 정확히 하자면 철학은 철학함으로 '형성된다'. 이러한 철학은 인간의 고유한 활동이다.53)
이렇듯 철학이 철학함이라면, 그것도 당연하게 현존재의 철학함이라면, 철학은 하나의 '행동관계(Verhalten)'인데, 이때 행동관계라 함은 무엇과 무엇의 관계이며, '무엇에로 향해 있음(Ausgerichtetsein-auf)'의 구조를 갖을 텐데, 우리가 전체 쪽을 향해 내몰려 있도록 한다. 그런 의미에서 철학은 일종의 '내몰려 있도록 함(Getriebenheit)'이다. 이는 우리가 전체 안에 존재하려는 데에로 내몰려 있다는 것이며, 이러한 " '전체 안에(im Ganzen)'와 이 '전체 안에'의 '전체적인 것들(Ganze)'을 우리는 '세계'라 지칭한다"54) 일반적인 의미로 신적인 존재자가 아닌 존재자 전체라고 우선 말할 수 있을 텐데, 그렇다면 인간도 그렇게 이해된 세계의 한 토막인 셈이다. 그러나 인간은 단지 세계내부에서 발견되는 세계를 함께 이루고 있는 세계의 한 토막으로서만 간주되는 게 아니라, 세계를 마주하고 서 있기도 하는데, 이러한 '마주 서 있음(Gegenuberstehen)'이란 일종의 '세계를 갖고 있음(ein Haben der Welt)'이며 곧 세계를 그 안에서 인간이 움직이고 있고 그것하고 대면하고 있는 인간이 지배하면서(beherrschen) 동시에 복종하고(bedienen) 있고 그것에 인간이 떠 넘겨져 있는 바로 그러한 것으로서 가지고 있음이다. 그런데 인간 외에 여타의 존재자들 동물, 식물, 물건 등과 같은 경우는 어떠한가? 그러한 존재자들은 세계를 가지고 있는가?
하이데거는 이러한 물음에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논제로 논제화한다. 1. '돌은 세계 없이 존재한다'(der Stein ist weltlos) 2. '동물은 세계빈곤으로 존재한다'(der Tier ist weltarm) 3. '인간은 세계를 형성하며 존재한다'(der Mensch ist weltbildend)가 그것이다. 우리는 이 논제를 통해 '세계란 무엇인가?'하는 물음을 전개해 나갈 수 있으며, 그 길은 일종의 비교고찰이며, 각각 즉 인간, 동물, 돌의 세계에 대한 그때마다의 연관이다. 이러한 연관의 차이는 '세계'를 부각시킬 것이다.
 4-1. 동물의 세계빈곤으로 있음과 돌의 세계 없이 있음
 우리는 다음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의 현상과 만나려고 한다. 동물인 곰은 겨울잠을 자기 위해 동굴 속으로 들어간다. 곰은 겨울잠을 잘 때는 아무 것도 먹지 않기 때문에, 미리 생명유지를 위해 많은 먹이를 미리 먹어둬야 한다. 그래서 곰은 계곡으로 간다. 마침 알을 낳기 위해 계곡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던 연어를 만난다. 곰은 연어를 넙죽 넙죽 잡아먹는다. 겨울잠을 자기에 충분할 만치 잡아먹는다. 그리고는 잠자기에 좋은 안전한 동굴 하나를 골라서는 몇 달이고 잠에 골아 떨어진다. 곰이 동굴에서 이렇게 잠을 자고 있는데 어떤 사람들에게 발견된다. 그들은 마취제로 곰을 마취시킨 뒤  곰의 몸무게를 달고 발의 크기를 측정한다. 그리고 곰이 자고 있던 동굴의 형태와 동굴의 크기를 측정한다.
곰은 계곡과 연어를 접촉했고 동굴을 접촉했다. 곰은 계곡에서 연어를 잡아먹는 데 관심을 가지고, 동굴에서 겨울잠을 자는 데 관심을 가지고 있다. 곰에게 연어가 왜 상류로 올라오는지는 관심 밖이다. 그리고 그 동굴이 풍화작용에 의해 생성되었는지, 석회암이 녹아 형성되었는지 역시도 관심 밖이다. 다만 배부르게 잡아먹을 수 있는 연어일 뿐이며, 잠자기에 좋은 동굴일 뿐이다. 이렇듯 곰이 접촉하는 존재자는 한정되어있다. 이런 의미에서 "곰은 세계를 덜 가지고 존재한다." 연어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연어는 무슨 힘에 사로잡혀 강의 상류로 올라간다. 그리고 곰이란 놈에게 재수없이 잡혀 먹이가 되고 만다. 연어가 접촉하는 것은 거친 물살과 곰뿐이다. 연어 역시 세계를 덜 가지고 존재한다. 이때 '덜 가지고 있음'은 단순히 보다 많음, 보다 적음이라는 양적 의미만은 아니다. 오히려 곰은 연어를 연어로서는 알고 있지 못함이다. 또한 연어는 곰을 곰으로서 알고 있지 못함이다.55) 바로 이런 의미에서 동물은 세계를 덜 가지고 존재한다.
그럼 동굴은 어떠한가? 동굴은 곰을 접촉하고 있는가? 동굴은 곰을 곰으로서 알고 있는가? 곰은 동굴에 몸을 누이고 잠들었다. 동굴의 표면과 곰의 살갗이 맞닿았다. 그럼 이런 접촉은 곰의 연어와의 접촉과, 곰의 동굴과의 접촉과는 어떻게 다른가?
곰은 배가 고파서 강으로 갔다. 그리고 연어를 잡아먹었다. 잡아먹다 배가 불러 수많은 연어를 놔두고 돌아선다. 곰은 동굴로 향한다. 곰은 자신의 배부름을 느끼며, 동굴로 방향을 돌리고 있다. 그리고 동굴에서 잠을 잔다. 그리고 동굴은 거기 가만히 곰의 잠자리가 되면서 있다. 곰은 강으로, 동굴로 향해 있다. 이처럼 동물은 '....에로 향해' 있다. 이 '....에로 향해있음'은 무엇인가? 곰은 강을 강으로서 알고 향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다만 습관화 된 어떤 것이다. 이렇듯 '....로 향해있음'이 습관화된 어떤 것이라면 도대체 '....에로 향해있다'는 것인가? 단순히 곰이 동굴로 돌아서 있다는 의미에서만 인가? 그리고 '습관화 된'이란 무슨 의미인가? 어떤 인간이 아침 7시에 일어나는 것이 습관화되었다는 그런 의미인가? 동굴은 습관적으로 곰의 잠자리가 된다고 할 수 있는가?
'....에로 향해있음'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무엇인가를 해낼 수 있어야 한다. 곰이 동굴로 향해있는 것은 향해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 언뜻 단순한 말장난으로 비춰질지 모르겠으나 이것은 중요하다. - 그리고 향해있을 수 있다는 것은 '해낼 수 있음'에 근거하는데, 즉 하나의 '행동(Benehmen)'에 근거하고 있다. 따라서 곰이 동굴로 향해있음은 하나의 행동이며, 이렇게 행동하기에 곰일 수 있다. 즉 곰이 곰일 수 있는 것은 곰이 동굴로 '방향잡힌 행동(als Fahigsein zum Benehmen)'이기에 그런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곰의 행동은 인간의 행동과 어떻게 다른가? 이에 대한 대답이 '습관화된'의 의미이다. 여기서 '습관화'란 회사에 8시까지 출근하기 위해서 7시에 일어나는 인간의 행동과는 구별되는 일종의 '충동(Trieb)'속에 동물 자신을 간직함이며, 이러한 충동질(Treiben)의 와중에서 동물은 그 자신으로 존재한다.56) 따라서 습관화된 이런 충동질 속에 있는 동물의 행동을 우리는 '행태(Benehmen)'라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동굴은 애시당초 '습관적'일 수도 없다. 동굴은 애시당초 충동질 속에 놓여있지 조차도 않다.57)
이렇듯 동물은 '....에로 방향잡혀 있음'인데. 이는 '사로잡혀있음(Benommenheit)'에서58) 이해 될 수 있다. 그것은 행태가 충동질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사로잡혀 있음은 무엇인가?
곰은 겨울잠이라는 충동에 충동질되어 있다. 그것은 인간의 경우처럼 반성적인 행위(Handeln)가 아니라 충동질에 붙잡혀있다. 이렇게 붙잡혀 있을 때 동물은 자기자신으로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충동질에 붙잡혀 있음은 동물을 동물로서 있게끔 하는 것이다. 이렇게 붙잡혀있는 동물은 충동질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가능성이 박탈되어 있다. 가령 곰이 겨울잠이라는 충동에 충동질되어 있을 때, 곰이 겨울잠이라는 충동질을 반성해보고  충동질을 거슬러 나갈 수 없는데, 이렇듯 동물은 충동질에 압도당하여 있다(Hingenommensein). 다시 말하면 충동질에 의해 ....에로 압도당하여 있다. 가령 곰은 충동질에 의해 겨울잠에로 압도당하여 있으며, 동굴로 향해있도록 압도당하여 있다. 이렇듯 곰은 자신의 충동에 압도당하여 그것을 따를 뿐이다. 곰이 동굴로 가도록 압도당하여 있는 것은 곰이 충동에 사로잡혀있기에 가능하다.
우리는 여기서 혹 이런 의문에 빠질지도 모른다. 우리 인간도 무엇인가에 사는가? 가령 하난 남자는 사랑하는 한 여자에 사로잡히지 않는가? 최소한 우리는 '사로잡혀있다'라고 우리 인간 자신에도 적용시켜 말하고 있지 않은가? 물론 인간도 무엇인가에 '사로잡혀 있다'고 말한다. "갑돌이는 길을 가다 지나치는 한 여인을 보고 한 눈에 반해버렸다. 그날 도서관에 앉은 그가 보고 있는 책에서는 글의 내용이 아닌 그녀의 얼굴이 보이고, 잠자는 그는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한다. 그는 그녀에게 완전히 '사로잡혀 버렸다'."
우리는 앞서에서 인간의 행동을 행위(Handeln)라고 하고 동굴의 그서을 행태(Benehmen)라고 했었다. 이제 우리는 이 차이를 드러내야 한다. 인간의 행위는 염려에 근거하고 있는데,59) 이러한 염려에 근거해서 즉 자신의 존재가능 '때문에' 배려하고 심려한다. 가령 갑돌이가 그녀에게 사로잡힌 것은 근원적으로는 자신의 존재가능 때문이지 않은가? 갑돌이가 그녀에게 사로잡힐 때, 그때서야 비로소 갑돌이가 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반면 행태는 어떠한가? 곰은 겨울잠에 사로잡혀 있을 때, 곰일 수 있는데, 이처럼 사로잡혀 있음, 즉 충동질에 사로잡혀 있음은 곰의 근거가 되지만, 인간에게는 그렇지 않다.
그런데 곰이 충동질에 사로잡혀있는 행태라 하더라도 하나의 행동이라면 다른 것을 향해 '열려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행동이란 ....와의 관계에서 가능한데, 그렇다면 이것이 열려있어야 관계할 수 있으며, 행동이 강하게 된다. 그렇다면 곰에게 열려있는 것은 무엇인가? 곰은 자신의 열려있는 것을 가진다. 곰은 그 열려있는 것에서만 ....을 해낼 수 있다. 우리는 이런 해낼 수 있는 곰의 영역을, 거기에서 자유로이 해낼 수 있는, 그리고 거기에서만 해낼 수 있어야 하는, 그런 울타리(Umring)를 갖는다. 이 울타리는 동물의 자기 보존(Arterhaltung)의 영역이 되는데, 이를 우리는 '억제를 푸는 울(Enthemmungsring)'이라 한다.60) 이 안에서 곰은 자신을 보존하며, 사로잡혀 있다. 그리고 이 사로잡혀 있음은 곰의 자기 근거가 되고 있다. 이제 우리는 동물의 이러한 사로잡혀 있음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61)
1. 사로잡혀있음은 붙잡혀있음(Genommenheit)이다. 하나의 동물의 움직임은 습관화된 행태일 뿐, 결코 어떤 것을 어떤 것으로 이해할 수는 없다. 곰은 연어를 연어로서 이해할 수 없다. 2. 사로잡혀있음은 충동질(Treiben)에로 붙잡혀 있음이다. 이 충동질 속에서 동물은 다른 것과의 연관 속으로 개방되어 있다. 동물은 충동질로 ....에로 압도당하여 있다. 곰은 먹이에 사로잡혀있다. 그것은 충동질에 압도당해 있음이다. 3. 사로잡혀있음은 서로서로 내모는 충동질 전체 안으로 붙잡혀 있음(Eingenommenheit)이다. 곰은 연어가 연어로서 이해되지 못하듯 자신을 자신으로서 이해하고 있지도 못하다. 4. 사로잡혀있음은 다른 것에로 향해 있음이다. 곰은 먹이에, 잠에로 향해있다. 5. 사로잡혀있음은 다른 것을 향한 열려있음과 더불어 하나의 울타리를 함께 가져온다. 이 울타리를 치면서 동물은 자신을 보존한다. 곰은 연어와 접촉하며 있으면서 자신의 충동질에 잡혀있으면서 행동하는 영역을 가진다. 6. 사로잡혀있음은  행태가 일어날 수 있는 가능 조건이다. 곰은 사로잡혀있기에 연어를 잡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동굴은 사로잡혀있지 조차도 않다. 사로잡혀 ....에로 향하고 있지 조차도 않다. 동굴은 ....와 접촉할 수 없다. 동굴은 그 자신 동굴로 있으면서, 다른 존재자에 접근할 수 있는 통로가 없기에, 다른 것 자체에 다다를 수도 없고 다른 것 자체를 소유할 수도 없다. 동굴은 다른 존재자에로 '접근할 수 있는 통로가 없음(Zugangslosigkeit)'이 속한다.62) 따라서 우리는 곰의 접촉할 수 있음과 동굴의 접촉할 수 없음을 본다. 그리고 우리가 앞에서 동물은 세계빈곤으로 있음, 인간은 세계를 형성하며 있음, 돌은 세계 없이 있음이라고 했을 때, 우리는 잠정적이나마 세계를 "각기 그때마다 접근할 수 있고 왕래할 수 있는 존재자이다"63)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곰은 세계를 가지고 있다. 곰은 연어와 동굴과 접촉하고 있기에 그렇다. 그런데 '세계 빈곤적'은 무엇인가? 우리는 다시 곰에게로 눈을 돌려보자. 곰은 연어를 잡아먹었다. 다시 말해 곰은 연어에 접근했다. 그런데 어떻게 접근했는가? 곰은 배가 고파서 접근했다. '그래. 내가 90일간 잠을 자야 하는데, 하루에 필요한 열량은 1만 2천 cal야. 그러니까 나는 90일간 108만 cal가 필요해. 그런데 나는 잠을 잘 때 2천 cal만 소모하니까 내 가 실제로 필요한 cal는 18만 cal인 셈이지. 연어 한 마리에 1천cal가 있으니 180마리를 잡아먹으면 되겠군. 아차 내가 연어를 잡아먹고 동굴까지 돌아가는 길을 계산에 넣지 않았군......' 곰은 이렇게 연어에 접근하는가? 물론 아니다. 오히려 곰은 그냥 접근한다. 그것은 하나의 행태이다. 그것은 사로잡혀 있는 행태이다. 곰은 연어에로 접근하도록 충동질되어 있는 것이다. 곰은 접근하도록 충동질에 압도당해 있음이다. 곰에게는 연어를 연어로서 인지할 수 있는 가능성이 박탈되어 있다. 그것도 곰에게 추후적으로 박탈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이미 앞서 박탈되어 있다(Genommenheit).64) 이것은 동물 행태의 사로잡혀있음이다. 곰은 연어를 잡아먹는 데 사로잡혀있고, 동굴 속에서 겨울잠을 자도록 사로잡혀있다. 이렇게 동물은 사로잡혀 있는 가운데 다른 존재자에로 접근한다. 이 접근은 그 존재자를 그 존재자로서 접근함이 아니다. (접근 가능한 존재자를) 존재하는  것으로서 경험할 수 있고 개방시킬 수 있는 것은 오직 우리들뿐이다.
사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세계와 동물의 세계가 질적으로 다르게 잇는 것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동물이 도대체 어떤 것을 어떤 것으로서, 어떤 것을 어떤 존재자로서 인지(Vernehmen)할 수 있는가 없는가가 중요하다.65) 가령 곰은 과연 연어를 연어로서 보고 있는가? 그리고 인간은 어떠한가?
 4-2. 인간의 세계를 형성하며 있음
 과연 인간은 연어로서 보고 있는 것인가? '....로서'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인간은 연어를 먹는 것으로, 물고기로서 그리고 동물의 귀소본능 연구의 자료로서 이해하고 있다. 즉 인간은 무엇을 어떤 것'으로서' 이해하고 있다. 이해에서 밝혀진 것, 이해된 것은 이미 그것 자체에서 있어 '무엇으로서가'가 두드러지게 부각될 수 있는 방식으로 접근가능한데, 이것은 해석(Auslegung)을 구성하고 있다.66) 이러한 '....로서'는 '....을 위한'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 즉 연어를 먹는 것으로서 이해함은 먹기 위한 것으로, 또 동물회귀본능 자료로서 이해함은 연어를 연구하기 위해서 이다. 그리고 이러한 '위해서'는 현존재의 '....때문에'에 즉 '염려'에 근거한다. 그러나 곰은 어떠한가? 곰은 연어를 자신의 '....때문에'에서 만나는가? 물론 아니다. 곰은 충동질에 사로잡혀 있음에서 연어와 만난다.
그렇다면, "'세계가 다른 무엇보다도 존재자의 접근가능성이다'이라는 세계 개념에 대한 이러한 묘사는......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쉽다. 따라서 우리는 세계는 존재자의 접근가능성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계는 다른 무엇보다도 '존재자의 존재자로서의 접근가능성(Zuganglichkeit von Seiendem als solchem)'을 뜻한다고 말해야만 한다."67)
그런데 접근가능성은 존재자가 그 자체로서 개방될 수 있는 경우에만 일어나는데, 즉 접근가능성은 개방가능성에 근거하는데, 그렇다면 '존재자의 존재자로서의 접근가능성'으로서의 세계는 그 존재자의 개방가능성에 근거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세계가 개방가능한 존재자를 뜻하는 것인가? 아니다. "세계는 오히려 사실적 개방가능한 존재자의 개방가능성이다(sondern die Offenbarkeit des je faktisch offenbaren Seienden)".68) 그리고 이 개방가능성은 존재자와 함께 일어나는 그런 것인데, 개방가능성이 하나의 세계성격이라 할 경우 세계와 같은 것이 없다가 새로 생겨나는 그런 것인가? 그리고 존재자는 세계없이도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인가? 그래서 인간이 세계를 형성하며 있다고 하는 것인가? 도대체 인간이 세계를 형성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없던 세계가 인간에 의해 있게 된다는 것인가?
우리는 앞서에서 잠정적으로나마 세계를 존재자 자체의 개방가능성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 개방가능성은 인간에게 열려 있는 개방가능성이다. 물론 그것은 -무엇이 무엇으로서 열려있는 개방가능성이다. 그런데 그것은 인간에게 어떻게 열리는가? 이처럼 그것은 하나의 기분에서 드러나고 있다. 망치는 기분에서 못을 박는 도구로서 때로는 흉기로서 드러나고 있으며, '아내'는 사랑하는 아내로, 미운 원수로 드러나 있다. 이렇듯 세계는 근본기분에서 '일어나고'있다.  즉 세계는 일종의 '일어남(Geschehen)'이다. 따라서 세계는 단순히 세계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때마다 각기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세계는 세계형성에 속해있다(Welt ist zugehorig der Weltbildung)"69)고 할만 하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이 형성하고 있는데, 반면 "세계가 기분에서 드러난다면 동물에게는 세계도 주위세계도 없는 것이다."70) 그리고, 이 말은 인간이 세계를 추후적으로 형성한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계형성이 일어나는데 근거해서만 비로소 인간이 실존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이다.71) 즉 인간이 세계를 형성하면서 존재한다는 말은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인간일 수 있는 가능적 근거이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는 인간의 한 객체로서 인식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계는 인간과의 한 계기에서 함께 물어지고 있는 것이다.72) 그리고 이를 위해 앞의 곰 이야기에로 돌아가 보자.
 곰이 동굴에서 이렇게 잠을 자고 있는데 어떤 사람들에게 발견된다. 그들은 마취제로 곰을 마취시킨 뒤  곰의 몸무게를 달고 발의 크기를 측정한다. 그리고 곰이 자고 있던 동굴의 형태와 동굴의 크기를 측정한다. 그들은 곰에게 관심이 있다. 그리고 동굴에 관심이 있다. 그러나 그 관심은 곰이 연어에게 관심을 가졌던 것과는 사뭇 다르다. 왜냐하면 인간은 곰을 곰으로서 보는데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곰은 연어를 연어로서 보는 데는 관심이 없다. 오히려 이러한 '로서'는 동물에게는 근본적으로 닫혀있다.73)
 인간이 곰을 곰으로서 관심을 가짐은 인간이 곰과 관계 맺고 있음이다. 따라서 '로서'는 어떤 관계다. 또한 '로서'는 전체와 관계 맺고 있음이다. 인간이 곰의 무게를 달고 발의 크기를 재는 등의 관찰은 곰의 한 부분이 아닌 곰 전체를 알려함이기에 그렇다. 인간은 곰을 곰 그 자체에서 그리고 그 전체에서 알려한다. 인간은 곰이 어디에서 살며, 어떤 먹이를 먹는지에 대해서 안다. 그러나 인간은 아직 곰들만의 독특한 버릇들을 다 알고 있지는 못하다. 인간은 이렇듯 동물을 동물 그 자체로 그리고 그 전체에서 알려 하며, 알아가고 있다. 우리가 곰에 대해서 알아가는 만큼 우리가 곰과 맺는 관계는 조금씩 달라진다. 그것은 인간의 세계가 조금씩 달라짐이다. 만약 앞에서 규정했듯이 세계는 존재자가 그 자체로 그리고 전체 안에서 개방되어 있음이라면 이런 의미에서 인간은 세계를 형성하며 존재한다.
인간이 세계를 형성하며 있음은 '로서'로 관계맺음이다. 이 관계맺음은 현존재가 세계 안에 있음에 근거한다. 그렇다면 이 세계 안에 있음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현존재가 세계 안에 처해있음이다. 그리고 이 처해있음은 언제나 기분 잡혀 있음이다.74) 기분은 현존재가 어떤 상태에 있으며 어떤 상태로 되는가를 드러내 보여준다.  즉 현존재의 처해있음의 기분 잡혀있음에서 세계가 각기 그때마다 열어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세계는 "현존재가 실존하는 한 그에게는 자신의 존재와 함께 어떤 세계가 앞서 던져져 있다. '실존함'이란 무엇보다도 '자신의 세계를 미리부터 던지고 있음'을 의미한다.75) 이것은 현존재가 세계에 처해있으면서 자기자신을 이러저러한 가능성들 속으로 던지는 것이다. 따라서 처해있음은 자신의 가능성들에로 내던져져 있는 것이며, 동시에 이 가능성들에서 그때마다 자신으로 있을 가능성을 내던지는 것이다. 이러한 내던짐을 우리는 기획투사라 이름하는데, 인간이 세계를 형성하며 있음은 이러한 의미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인간이 세계를 형성하며 존재함은 이렇게 기획투사하며 존재함이다. 따라서 이렇게 현존재가 실존하는 경우에만, 그리고 그런 한에서만 세계는 존재한다. 세계를 형성하며 존재함이 인간에게 추후적인 것은 아니며, 오히려 인간이 세계를 형성하며 존재할 때 인간은 인간일 수 있는 것이다.
 
5. 하늘-사람-땅의 관계맺음으로서의 세계  - 우리의 과제
 우리의 첫 물음은 '세계가 무엇인가?'였다. 그것은 다시 우리에게 있어서 "세계의 의미 물음"으로 정리될 수 있었다. 세계는 저 멀리 천상의 세계가 아니라 바로 우리의 지금 여기의 세계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서 세계를 만나면 , 그 세계에서 우리 자신을 만난다. 현존재가 자기 가능성의 실현이라면, 바로 실현의 지평은 세계이며, 그리고 마찬가지로 세계가 '일어나고 있음'이라면 그 근거는 현존재의 가능에서다. 현존재가 세계-내-존재이며, 시간적이고 세계를 스스로 만들어 가는 역사적 존재이기에, 현존재가 세계 의존적 존재이기에,76) 동시에 세계는 세계-내-존재의 세계이며, 세계 역시 시간적이고 일어나고 있는 세계-내-존재에 의존적이다.
세계는 현존재의 처해있음의 기분 잡혀있음에서 열어 보이고 있는데, 그것은 현존재가 이미 기분 잡힌 채 세계 내에 실존함이다. 그런 의미에서 세계는 현존재의 실존에 함께 던져져 있는 셈이며, 현존재는 이미 자신의 세계를 미리부터 던지고 있음이며 자신을 이러저러한 가능성 속으로 던지고 있다. 따라서 처해있음은 현존재가 자신의 가능성들에로 내던져져 있는 것이며, 동시에 이 가능성들에서 그때마다 자신으로 있을 가능성을 내던지는 것이다. 이렇게 현존재는 기획투사하며 있음이다.77) 이러한 기획 투사하는 현존재와 함께 세계는 열어 밝혀져 있으며, 그러함에 세계는 형성하며 존재하고 또한 현존재 자신 또한 자신을 형성하며 존재하고 있다. 세계는 결코 '그 자체에 있어서'의 세계가 아니며, 현존재의 근본기분에서 열려지는 것이며, 기획 투사하는 형성함의 있음이다. 그리고 이미, 앞서 현존재와 관련 맺고있음 그것이다. 그 관련 맺고있음에서 세계는 인간에게 있어서 "존재자의 열려있음의 사건"이다.78)
하이데거에 따르면 "땅과 하늘, 신적인 것과 죽을자 이 넷의 단일성(Holon)을 사방(Geviert)이라 칭하고 이것을 세계라 하였다."79) 이 때 '사방'이라 함은 넷 중 어느 것도 다른 셋이 없이는 가능하지 않으며 그 각각은 거울이 반영하는 방식으로 다른 것들과 결속되어 "넷의 각각은 개개의 다른 것 안에서 거울에 비치듯이 비쳐 나온다."80) 따라서 우리는 세계를 개념 속에 비춰지는 것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거울을 보듯, 거울 놀이- 우리 자신의 세계를 거울이 비추이는 대로 보고, 그것을 다시 거울에 되 비추면서 우리자신에 대한 숙고가 필요한 것이다.81)
우리말에는 '터'라는 말이 있다. '터'는 집을 지을 수 있도록 트여있는 공간이다. 또는 현존재가 실존하고 있는 삶의 공간이다. '터'는 우리가 '잡고', '닦고', '다지고'한다. 터를 잡음은 1) 터를 골라 정하다 2) 밑자리를 만들다 는 것을 의미하며, 터를 닦음은 1) 건물은 세울 자리를 고르고 다지다 2) 토대를 굳게 다진다는 의미이며, 그리고 터를 다짐은 무게가 있는 물건으로 터를 단단히 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세 가지는 하나의 계기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것은 건물을 세우기 위해 '터'를 필요로 한 것이다. 따라서 '터'는 건물을 세우기 위한 '트여있는 빈 것'이며, 건물을 세우기 위해 '잡혀 다져져 있어 꽉 차 있는 것'이다. 또한 건물이 다 지어졌을 때, 그 건물은 삶의 '터'가 되는데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건물 터에 건물을 세워야만, 즉 터를 없애야만 우리는 새로운 터를 잡을 수 있다. 즉 터는 터의 없앰과 터의 있게함이 함께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터에서 '트여있음'과 '차있음'을 함께 보며, '터를 없앰'과 '터를 있게 함'을 함께 본다. 이러한 터는 세계이며, 현존재의 근거이다. 세계에 근거해서 현존재는 실존하며, 또한 현존재에 근거해서 세계는 형성된다. 또한 현존재는 세계에 근거해서 실존하면서도 끊임없이 세계를 없애고 세계를 있게 한다. 즉 '세계'는 우리가 트여있는 즉 자유로울 수 있는 빈 거기이며, 동시에 우리의 삶의 세계가 될 수 있게 차 있는 집 지워진 거기이다. 또한 세계가 존재자의 열려있음의 사건이라면, 세계를 없애고 세계를 있게 하는 형성의 사건이다. 현존재는 이처럼 세계에 의존하면서 세계를 열어 밝히고 있으며, 또한 그 세계를 세계로 형성하고 있다. 동시에 이럴 때만 우리는 실존할 수 있음이다. 그런 의미에서 세계는 현존재를 현존재로서 밝혀내고 있는 '거기'이다. 또한 세계는 현존재가 '밝혀내고 있음' 그것이다. 왜냐하면 세계는 현존재 의존적이며, 현존재에 의해 세계가 의미있기 때문이다.
우리말의 모음의 기본글자는 '·, ㅡ, l' 인데, 이것은 각각 하늘, 땅, 사람을 의미한다고 한다. 이는 다시  '·, l, ㅡ '로  자리바꿈 할 수 있는데, '·'는 'l'와 관계 맺고 있으며, 'ㅡ'도 'l'와 관계 맺고 있다. 우리의 세계는 이렇게 인간이 하늘과 땅과 관련 맺고  있음이다. 인간이 하늘과 땅과 관련 맺고 있을 때 인간은 인간이며, 동시에 어떻게 관련 맺고 있는냐가 곧 세계인 것이다. 따라서 '세계는 무엇이다'는 '인간의 하늘과 땅의 관련맺음이 어떠하다'이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사방은 우리말 天, 地, 人의 관계맺음인 것이다.
지금까지의 우리의 탐구는 세계에 대한 하나의 '개념'을 제공하지는 못했다. 오히려 '개념'에 의한 '세계'를 해체시켜 놓았으며, 어찌보면 혼란스럽게 하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세계'를 애초부터 개념으로 파악하려고 하지도 않았으며, 세계를 해체해 세계를 들여다보고자 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세계'에 어떤 개념을 제공해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물음의 길을 제공해 주어야 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세계 의미 물음'으로 길을 잡았으며, 그 길은 각기 그때마다의 우리의 세계가 우리의 물음이 닿아있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 현재 우리가 이고 있는 하늘과 발붙이고 있는 땅과 우리 자신, 인간, 현존재의 모습을 반성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남은 과제가 될 것이다.
하이데거가 <<진리의 본질>>82)에서 동굴의 비유로 암시하고 있음이 그것이다. 동굴 안의 사람들이 동굴 밖의 빛에 의해 형성된 그림자만을 보고, 그 그림자를 있게 하는 빛을 알지 못할 때, 그리고 그 그림자를 있게 하는 그것을 보지 못할 때, 빛을 알았던, 그림자를 있게 하는 바로 그것을 보았던 선각자는 동굴 밖의 빛에 대해 동굴안 사람들에게 목숨을 걸고 알려준다. 동굴안 사람들에게 세계는 그림자의 세계라면 그 선각자에게서의 세계는 빛의 세계인 것이다. 우리가 지금 여기서 세계의 의미를 새로이 묻는 것은 세계를 빛의 세계에서 우리의 세계를 열어 밝혀야 하기 때문이다. 이데올로기나 자본의 눈에 의한, 혹은 기계의 눈에 의한 세계가 아니라 세계를 비추이는 그 빛에 의해, 오히려 빛나고 있는 그 세계를 빛나고 있는 데로 보기 위한 것이다.
이제 우리의 숙제는 세계를 빛 가운데 자리 매김하는 데 있다. 자리 매김한다는 것은 세계를 형성한다는 것의 또 다른 말이다. 따라서 우리는 세계를 빛 가운데 드러나도록 형성해야 한다. 그것은 우리의 존재가능을 그 빛에 따라 내던지는 것이다.
 
참 고 문 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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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ie Zeit der Weltbildes, Holzwege(숲길), (Frankfurt a,M. 1977). 최상욱 옮김, <<세     계상의 시대>>, (서광사,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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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infuhrung in die Metaphysik, (Frankfurt a.M., 1983). 박휘근 옮김, <<형이상학 입문>>, (문예출판사,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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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다른 저자의 글
 2-1. 외국 저자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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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Hirschberger, Geschichte der Philosophie: Neuzeit und Gegenwart, 강성위 옮김, <<서양철학사 下>>, (이문출판사, 1991).
Erwin Hufnagel, Einfuhrung in die Hermeneutik, (W. Kohlhammer, 1976). 강학순 옮김, <<해석학의 이해>>, (서광사, 1994).
I. Kant, Kritik der reinen Vernunft, (Frix Meiner Verlag, 1956). 최재희 옮김, <<순수이성비판>>, (박영사,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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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희, <<칸트의 생애와 철학>>, (명문당, 1990)
하석룡, <M. Heidegger에 있어서의 세계-내-존재 분석; 학 일반의 가능성을 중심으로>, (고려대학교, 석사,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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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논문은 필자의 2000년 2월 석사학위 취득 논문을 요약 정리한 것임.
** 한국외국어대학교 대학원 철학과 석사과정.
1) M.Heidegger, Die Zeit der Weltbildes, Holzwege(숲길), (Frankfurt a,M. 1977), S.108-109, 최상욱 옮김, <<세계상의 시대>>, (서광사, 1995), 83-85쪽. (앞으로는 <<세계상의 시대>>로 인용함)
2) '눈앞에 있는 것'은 '눈앞에 있음'에서 이해해 볼 수 있다. 이것은 '손 안에 있음(Zuhandenheit)'의 상대개념인데, '손안에 있음'은 도구의 사용사태, 즉 '위하여-연관'에서의 바라봄을 의미한다. 반대로 '눈앞에 있음'은 '위하여 연관'에서가 아니라 순전한 관찰의 대상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것이다.
3) Martin Heidegger, Die Grundproblems der Phanomenologie, (Frankfurt a.M. 1975), S.238. 이기상 옮김, <<현상학의 근본문제들>>, (문예출판사, 1994), 245쪽. (앞으로는 <<현상학의 근본문제들>>로 인용함) 
4) <<현상학의 근본문제들>>, 7(25).
5) Martin Heidegger, Einfürung in die Metaphysik, (Frankfurt a.M., 1983), S.90, 박휘근  옮김, <<형이상학 입문>>, (문예출판사, 1994), 142쪽. (앞으로는 <<형이상학 입문>>으로 인용함).
6) Martin Heidegger, Sein und Zeit, (Frankfurt a.M., 1975), S.12, 이기상 옮김, <<존재와 시간>>, (까치, 1983), 28쪽. (앞으로는 <<존재와 시간>>으로 인용함).
7) <<존재와 시간>>, 8-11(24-27).
8) <<존재와 시간>>, 11(27).
9) <<존재와 시간>>, 13(29-30).
10) <<존재와 시간>>, 11-15(27-32)참조.
11) <<존재와 시간>>, 12(28). 이처럼 우리는 앞선 이해에 따라 물음의 방향을 잡는다. 그런데 이 이해는 아직 사태가 돋워진 것은 아니며, 그것은 해석을 통해서 돋워지게 된다. (한자경, <하이데거의 해석학적 존재이해>, 계명대 철학연구소, <<해석학과 현대철학>>, (철학과 현실사, 1996), 참조.
12) 이기상, <<하이데거의 실존과 언어>>, (문예출판사, 1991), 56쪽. (앞으로는 <<실존과 언어>>로 인용함)
13) <<존재와 시간>>, 385(503). 이에 대해 페겔러의 설명을 따르자면 "현존재는 현사실적 실존으로서 이미 세계 내에서 시간 내에 있는 존재자 옆에 있음으로서만, 시간의 시간화일 뿐이며, 순간적이며, 세계건립적 역사적이다. 역사성과 병행하여 시간내재성(Innerzeitigkeit)이 성립한다. 시간 내재성은 시간자체의 시간화로 이해되지 말아야 하며, 오히려 시간 내에 있는 존재자에로 방향을 잡고, 그래서 시간의 근원성을 놓치고 만다." 페겔러, <<하이데거 사유의 길>>, 이기상, 이말숙 옮김, (문예출판사, 1993), 69쪽.
14)  Martin Heidegger, Was ist Metaphysik?, (Frankfurt a.M., 1969),  이기상 옮김,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 (서광사, 1994), 14쪽. (앞으로는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로 인용함).
15) <<존재와 시간>>, 12(28).
16) <<존재와 시간>>, 41-42(66-67).
17) <<존재와 시간>>, 42-43(66-69).
18) 우리는 현존재의 존재를 실존으로 파악했는데, 이것은 '존재의 열려있음'에 대해 열린 채 서 있는 그러한 존재자의 존재를 의미한다.<<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 15.
19) <<존재와 시간>>, 16(34).
20) <<존재와 시간>>, 15-16(32-34).
21) <<존재와 시간>>, 53(80-81).
22) <<존재와 시간>>, 67-71(98-105). 배려(Besorgen)는 세계-내-존재로서의 현존재가 자기 자신의 존재가능 때문에 세계내부적 존재자의 존재에다 마음 쏟음이다. 따라서 배려는 '위하여' 연관에서 이해할 수 있다. 배려와 관련하여 심려와 염려를 함께 살펴보아야 한다. 그것은 하나의 연관관계를 가지기 때문이다. 우선 심려는(Fursorge) 자기자신의 존재가능 때문에 타인의 존재에 대해 마음씀이다. 그리고 염려(Sorge)는 현존재가 자기자신의 존재가능 때문에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마음졸임이다. 이것은 배려와 심려의 근거가 된다.(이에 관해 상세하게 정리를 원한다면 다음을 참조. 이기상, 구연상, <<존재와 시간 용어 해설>>, (까치, 1998), 86-87(배려)/ 167-170(심려)/ 210-215(염려)).
23) <<존재와 시간>>, 55(83).
24) <<존재와 시간>>, 57(86).
25)  Martin Heidegger, Die Grundbegriffe der Metaphysik, (Frankfurt a.M. 1983), S. 100-101. (앞으로는 <<형이상학의 근본개념들>>로 인용함).
26)  <<형이상학의 근본개념들>>, 96.
27) <<존재와 시간>>,136-137(189-191).
28) <<존재와 시간>>, 139(193-194).
29) <<존재와 시간>>, 144(200-201).
30) <<현상학의 근본문제들>>, 391-392(389-390), 228-231(220-222).
31) <<현상학의 근본문제들>>, 395-396(393-394).
32) <<존재와 시간>>, 145-146(201-203).
33) <<현상학의 근본문제들>>, 394(392).
34) <<존재와 시간>>, 114(160).
35) <<존재와 시간>>, 117(164).
36) <<존재와 시간>>, 118(165-166).
37) <<존재와 시간>>, 121(169-170).
38) <<존재와 시간>>, 126-127(175-176), 370(485-486).
39) <<존재와 시간>>, 175(240).
40) <<존재와 시간>>, 175-176(240-241).
41) <<존재와 시간>>, 66(97).
42) <<존재와 시간>>, 68(100).
43) <<존재와 시간>>, 83-85(119-122).
44) <<존재와 시간>>, 83-85(119-122).
45) <<존재와 시간>>, 86-87(124-125).
46) <<존재와 시간>>, 87(125).
47) <<존재와 시간>>, 87(125).
48) <<존재와 시간>>, 134(183).
49) <<존재와 시간>>, 136-138(189-192).
50) <<현상학의 근본문제들>>, 239(246).
51) <<존재와 시간>>, 144-145(200-202).
52) <<현상학의 근본문제들>>, 241(248), 249(256).
53) <<형이상학의 근본개념들>>, 6.
54) <<형이상학의 근본개념들>>, 7.
55) <<형이상학의 근본개념들>>, 284-286 참조.
56) <<형이상학의 근본개념들>>, 340.
57) <<형이상학의 근본개념들>>, 374-379 참조.
58) 조사 '에서'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로 이해할 수 있다. 첫 째는 사물이 움직이고 있는 처소를 나타내는 부사격 조사로 이해할 수 있다. 가령 '곰이 동굴에서 잔다'고 할 때이다. 둘 째는 움직임의 출발점을 나타내는 보조사로 이해할 수 있다. 가령 '곰이 강에서 동굴로 간다'고 할 때이다. 마지막으로는 주어로 이해할 수 있다. 가령 '이번 경기는 우리학교에서(가) 이겼어'라고 할 때다. 그런데 여기서의 '에서'는 다음과 같이 확장된 의미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즉 여기서는 ....에로 향해있음이 사로잡혀있음에 근거한다. 또한 ....에로 향해있음은 사로잡혀있음의 장(場)에서만 활동가능하다. 따라서 사로잡혀있음은 ....에로 향해있음의 근거이자 동시에 처소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동물의 본질규정을 위해서는 사로잡혀있음을 물어야 한다.
59) <<존재와 시간>>, 192(260)이하 참조.
60) <<형이상학의 근본개념들>>, 377.
61) <<형이상학의 근본개념들>>, 374-378.
62) <<형이상학의 근본개념들>>, 290.
63) <<형이상학의 근본개념들>>, 289.
64) <<형이상학의 근본개념들>>, 360.
65) <<형이상학의 근본개념들>>, 377.
66) <<존재와 시간>>, 149(207).
67) <<형이상학의 근본개념들>>, 390.
68) <<형이상학의 근본개념들>>, 405.
69) <<형이상학의 근본개념들>>, 413.
70) <<형이상학 입문>>, 48(84).
71) <<형이상학의 근본개념들>>, 414.
72) 함께 물어진다는 것은 시간적으로 같은 시각에 물어진다는 그런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두 가지의 물음은 서로가 서로를 근거 지우고 있다는 의미에서다. 다시 말해 '인간은 누구인가?'라는 물음은 '세계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근거함으로서만 가능하며, '세계가 무엇인가?'라는 물음도 '인간은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근거함으로서만 가능하다. 그리고 두 물음은 해석학적 순환의 관계에 있다.
73) <<형이상학의 근본개념들>>, 397.
74) <<존재와 시간>>, 134(187).
75) <<현상학의 근본 문제들>>, 239(246).
76) 이기상, <새로운 보편 문화논리의 모색 - 해석학, 화용론 그리고 사건론>, <<인문학연구 제 1집>>, (한국외국어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1996), 14-15쪽. (앞으로 <새로운 보편 문화논리의 모색>으로 인용함).
77) <<현상학의 근본문제들>>, 239(246). <<존재와 시간>>, 144-145 (200-202).
78) <새로운 보편 문화논리의 모색>, 43. 이기상, <형이상학에 대한 현대적 접근, 하이데거의 존재사건학 - 형이상에 대한 동서양의 철학적 접근>,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8), 192쪽.(앞으로는 <하이데거의 존재사건학>으로 인용함)
79) M. Heidegger, Bauen Wohnen Denken(건축 거주 사유), Vortrage und Aufsatze(강연과 논문모음집), S.144. <하이데거의 존재사건학>, 191 재인용.
80) M. Heidegger, Ding(사물), S.172. <하이데거의 존재사건학>, 191 재인용.
81) <하이데거의 존재사건학>, 201-205 참조.
82) M.Heidegger, Vom Wesen der Wahrheit, (Frankfurt a.M.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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