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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거 - 가난한 시대를 깨우치는 존재의 목자

하이데거 - 가난한 시대를 깨우치는 존재의 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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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가난한 시대'에 살고 있다. 하이데거는 1945년 12월 릴케 20주기(週期)를 맞아 기념 강연을 하는 자리에서 우리 시대를 '가난한 시대'리고 규정했다. 왜일까? 과거 어느 시대보다도 물질적으로 풍요한 시대에 갑자기 가난을 들고 나오다니.
1989년 9월 26일에 출생하여 1976년 5월 26일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20세기의 가장 큰 격변기를 살아낸 하이데거는 왜 우리 시대를 '가난한 시대'로 체험했을까? 이는 하이데거가 현대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로부터 대답할 수 있다. 우리는 현대를 구성하고 있는 정신을 무엇으로 이해하며, 역으로 현대의 삶의 양식은 우리를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가. 하이데거의 철학을 이 세기의 대표적인 철학으로 볼 수 있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물음 때문이다.

하이데거는 현대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 양식을 '기술'이라고 본다. 근대 이후로 지속적으로 발전해 온 기술은 이제 우리 시대의 상징이 되었으며, 우리 삶을 지배한다. 도대체 기술이란 무엇인가? 사람의 살이는 자연(세계)과 끊임없이 관계하는 데서 이루어진다. 이 관계는 다른 생명체가 자연과 맺는 관계와는 달리 간접적이다. 기술이란 바로 이 도구를 만드는 능력이다. 그런 까닭에 도구와 기술은 동전의 앞 뒷면과 같다. 사람을 일컬어 '도구적 존재'라고 할 만큼 도구는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조건이다. 그런데 유난히 현대만을 '기술의 시대'라고 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현대가 기술에 부여하는 의미나 가치가 다른 어떤 시대보다도 독특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도구를 매개하여 자연(세계)과 관계 맺을 때 도구는 그 관계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사실로부터 새로운 도구의 사용은 자연과 다른 관계를 맺을 것을 요구하기 때문에 도구의 교체는 인간의 자연에 대한 관계의 변화를 의미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현대의 기술로 만든 도구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관계를 변형했다는 것을 가늠할 수 있다. 현대의 도구(기술)가 드러내는 자연(세계)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현대의 도구가 드러내는 자연(세계)은 오로지 기술적인 취급에 의해서만 규정되기에 기술을 넘어선 어떤 지평도 지니지 못한다.

데카르트는 근대과학의 성과에 철학적 기초를 마련해 주기 위해서 이 세계의 본질을 물질적 속성(연장)으로 규정했다. 물질이 지닌 다른 속성이나 가치들은 인간이 물질에 덧붙인데 지나지 않는다. 자연의 사물들이 일정한 의미나 가치를 지닌다면 그것은 인간이 자연을 기술로 취급할 때 부여한 의미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현대의 기술은 자연에 어떤 의미를 부여했을까. 그것은 자연 전체를 기술이 지닌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단순한 재료로 파악한다. 바꾸어 말하면 식물, 동물, 대지가 기술적 생산을 위한 단순한 재료가 되었다는 것이다. 예컨대 이전의 농부는 씨앗을 뿌려 싹이 돋아나는 것을 대지의 생장력에 맡기고 그것이 잘 자라도록 돌보았다. 그런데 기술의 발전은 이제 대지에게 생산을 강제한다.
현대의 기술은 자연에 숨겨진 에너지를 캐내고, 변형하고, 저장하고, 분배하며, 분배한 것을 다시 전환하여 사용하게 한다. 현대의 기술은 이제 뉴멕시코의 타오스 인디언들처럼 자연을 자연으로 대접하지 않는다. 타오스 인디언들은 쇠로 된 쟁이가 어머니인 대지의 기슴에 상처를 낸다고 믿어 사용하지 않았으며, 초봄에는 대지가 임신하였다하여 말발굽의 쇠편자를 떼어내었다. 이는 현대의 도구나 기술로 말미암아 인간이 밭이나, 대지, 자연, 그리고 세계와 얼마나 다른 방식으로 관계 맺게 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하이데거는 근대 이전의 시대에 기술은 자연을 해석하는 다른 형식들과 관계 맺으며 자연을 드러내는 한 형식에 지나지 않았는데 비해 근대 이후의 기술은 자연(세계)과의 관계를 규정하는 유일한 힘이 되었다고 말한다. 근대 이전의 자연을 지배하던 신은 신성을 떠났으며, 세계는 신이 떠난 황혼으로부터 점점 어둠의 시대로 빠져들게 되었다. 하이데거는 기술의 지배로 말미암아 자연의 근거가 사라지고 없는 어둠의 시대를 일컬어 '가난한 시대'라고 했다.

17세기에 황금기를 누렸던 근대 과학은 실재하는 모든 것들을 지각하는 것과 지각되는 것, 즉 주관과 객관으로 구분하였으며, 데카르트는 이를 철학적 사유로 체계지었을 뿐만 아니라 사유하는 주체를 존재자 세계의 중심이 되게 하였다. 그로 인해 자연은 의식하는 주체의 표상이 되고, 표상적 대상이 된 자연은 의식적 주체에 의해 지배되고 처분된다. 기술은 바로 이같은 세계를 지배하고 처분하는 도구로 작용한다. 이러한 세계의 대상화와 기계화는 필연적이고, 의식하는 주체는 마침내 기술에 의해 지배받게 된다. 하이데거는 현대의 이러한 사유를 가리켜 '존재 망각'이라고 부른다.

존재가 망각되었다는 것은 도대체 무슨 뜻일까. 여기 농부의 낡은 신발을 그린 그림을 생각해 보자. 우리는 이 그림을 두 가지 방식으로 볼 수가 있다. 하나는 화폭에 있는 사용되지 않은 한 컬레의 구두만을 보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신발이라는 도구로부터 드러나는 것, 즉 거친 들일을 하는 농부의 고통, 그 신발을 신고 거친 바람이 부는 밭고랑을 천천히 걷는 농부의 강인함, 신발 가죽 위로 피어오르는 대지의 습기와 풍요로움을 보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 신발에서 해 저물녘 들길의 고독, 대지의 소리 없는 부름, 대지의 선물인 잘 익은 곡식에 대한 기대, 그리고 겨울 들판의 황량함을 느끼고 본다. 우리는 첫 번째 방식의 그림보기에서 신발이라는 존재자만을 보며, 두 번째의 방식에서 그 신발뿐만 아니라 그것을 통해 온전히 드러나는 존재의 모습을 본다. 존재를 통해 모든 존재자는 하나의 세계 안에 존재한다. 세계안에 존재하는 단 하나의 존재자를 통해서도 우리는 존재자 전체를 드러내는 존재를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실증적 사유는 존재자만을 인식하고 존재를 보지 못한다. 존재 망각은 여기에 있다.

인간 현존재는 존재의 부름에 응답하고 존재를 마중하는, 그리하여 존재를 보존하는 존재의 목자(牧者)다. 가난한 시대의 인간 현존재는 존재의 부름을 듣지 못하고, 존재를 부정하며, 마침내 자신의 존재 근거를 망각한다. 깨어있으면서 존재의 부름에 응답하려는 하이데거는 가난한 시대의 어둠을 뚫고 존재를 지키려는 존재의 목자이고자 한다.

* 위 글은 경상대신문, 1995년 3월 20일(화요일) 제8면(학술) [세기의 석학] 기획난에 실린 이성환 교수(현 경상대학교 인문대학 철학과)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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