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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거와 비트겐슈타인에 있어서 일상언어의 문제

하이데거와 비트겐슈타인에 있어서 일상언어의 문제
http://cafe.naver.com/modernth/696   (Thomas A. Fay) 
 
비트겐슈타인과 하이데거가 아닌 서로 대립되는 두 언어철학자를 상상하려 한다면, 그것은 적어도 굉장히 어려운 일처럼 보인다. 요컨대 『철학적 탐구』의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의 사용을 강조한 반면, 하이데거는 정확히 그 반대되는 것, 즉 언어에서의 시적인 것의 역할 곧 언어의 비사용적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 비트겐슈타인에 있어 일상언어는 그 너머로 어떠한 호소도 가능하지 않은 일종의 최후의 영역이지만, 반면 하이데거에 있어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일상언어는 너무도 빈번하게 현시하는 본래적 언어(Rede)가 아니라, 오히려 감추는 일종의 진부한 잡담(Gerade)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양자를 상호 결실있는 것으로 입증될지도 모를 모종의 대화 안으로 가져다 놓으려는 바로 그러한 시도가 사실은 애초부터 기껏해야 의문스러운 기도인 것처럼 보인다는 결론을 가지고서, 언어에 대한 접근방식에 있어 이들 위대한 두 사상가 간의 차이점을 거듭 계속해서 지적해내려 할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제안하고자 하는 것은, 이러한 대화가 꽤 귀중한 것일 수 있으며, 그리고 특히 하이데거와 비트겐슈타인을 대화 안으로 가져옴으로써 비트겐슈타인의 일상언어 철학이 갖는 위중한 취약점 중의 하나가 어쩌면 개선될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따라서 필자는 이 논문의 첫 절에서, 『철학적 탐구』에서 제시된 바 비트겐슈타인의 일상언어 철학의 중심점들 중의 몇 가지를 가장 간략한 방식으로 언급하고자 한다. 그리고 2절에서는 이러한 입장이 갖는 상대적인 강점과 약점을 들추어 보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일상언어를 두고 비트겐슈타인-하이데거의 만남이 결실있는 것으로 입증될 수 있는지의 여부를 밝혀보고자 한다.
비트겐슈타인이 지적한 바와 같이, 언어탐구가 시작되는 근원은 일상 생활의 일상언어이다. 이러한 언어는 나타나 있는 그대로 질서지워져 있다. 그러므로 일상 생활에서 격리된 채 아카데믹한 묵상 속에서 언어에 관한 추상적 선험적 이론을 고안해 내는 것은 언어 철학자의 임무가 아니다. 비트겐슈타인은 항상 생각하지 말고 언어가 실제적으로 사용되는 방식을 관찰하라고 언어 철학자를 훈계하면서, 그는 『철학적 탐구』 66절에서 다음과 같이 표명한다.
 "그것들에는 무엇인가가 공통적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들은 '놀이들'이라고 불리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지 말고, -- 그것들 모두에 공통적인 어떤 것이 있는지 여부를 보라.1)
 철학자의 임무란 기술하는 일이다. 비트겐슈타인이 『탐구』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모든 설명은 사라져야 하고, 오직 기술만이 그 자리에 들어서야 한다."2) 언어철학자의 일이란, 언어가 실제적으로 기능하는 방식에 참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관찰하는 것이다. "철학은 언어의 실제 사용을 어떤 방식으로도 침해해서는 안 된다; 철학은 그러니까 결국 그것을 단지 기술할 수 있을 뿐이다."3) 철학자는 낱말이 실제적으로 사용되는 방식을 주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떤 한 낱말이 어떻게 기능하느냐는 추측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 낱말의 적용을 주시하고, 그로부터 배워야 한다."4) 그리고 우리가 주시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일상언어이다. "논리철학이 문장들과 낱말들에 관해서 이야기할 때, 그것은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 우리가 하고 있는 것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는 뜻에서 이야기하고 있다."5) 언어 철학자가 해야 하는 일은 극도로 난해하거나 심원한 어떤 것은 아니다. 이제까지 철학자들 사이에는 그들이 조작해낸 교묘함 속에 스스로 매몰되는 경향이 있어 왔다.
여기서, 우리가 말하자면 제 정신을 잃지 않기는 어렵다. 즉 우리가 그릇된 길에 빠지지 않으려면 우리는 일상적 사유물들 곁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것을 보기는 어렵다. 그 그릇된 길에 빠지면 마치 우리는 우리의 수단들로써는 전혀 기술할 수 없을 터인 최고로 정교한 것들을 기술해야 할 것처럼 보인다. 우리에게는 마치 어떤 파괴된 거미줄을 우리의 손가락으로 정리해 놓아야 하는 듯한 느낌이 든다.6)
 상아탑이라는 세련된 지적 분위기 속에서 이뤄지는 철학자들의 사색은 너무나도 공허한 것이어서 어떤 확고한 발걸음도 더 이상 내딛을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그런 까닭에 비트겐슈타인은 언어 철학자를 다음과 같이 훈계한다.
우리는 마찰이 없는, 그러니까 어떤 뜻에서는 그 조건이 이상적인,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또한 걸어갈 수도 없는 빙판에 빠져들었다. 우리는 걸어가고 싶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마찰이 필요하다. 거친 대지로 되돌아가자!7)
 이러한 거친 대지는 다름아닌 우리의 일상언어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일상언어가 그 자체로 질서지워져 있다면, 대체 왜 거기에 철학자가 필요한가?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 언어의 작용을 오해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혼돈에 빠지는 주된 원인은 바로 다름아닌 우리 언어 사용에 대한 이와 같은 오해에서 비롯된다. 비트겐슈타인이 지적한 대로
 우리의 몰이해의 한 가지 주요 원천은, 우리가 우리의 낱말들의 사용을 일목 요연하게 보지 못한다는 점이다.8)
 이와 같이 우리 언어가 실제적으로 기능하는 방식을 오해하려는 경향이 있기에, 철학자의 과업이란 요법적인 일일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철학자는 문제를 마치 질병처럼 다룬다."9) 철학자는 우리 언어 사용에 관한 오해를 제거하는데 도움을 준다. 따라서 철학자가 여기에서 채용하고 있는 기술을, 그것이 사물을 풀어 헤치기 때문에 즉 하나의 표현 형식을 다른 표현 형식으로 대체하기 때문에 '분석'이라고 일컬을 수 있겠다.
이 고찰은 오해들을 제거함으로써 우리의 문제에 빛을 가져온다. 낱말들의 사용에 관계된,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 언어의 상이한 영역들에서의 표현형식들 간의 어떤 유사성들에 의해 야기되는 오해들. -- 그것들 중 어떤 것들은 하나의 표현 형식을 다른 어떤 하나의 표현 형식으로 대체함으로써 제거될 수 있다. 우리는 이것을 우리의 표현 형식들의 "분석"이라고 부를 수 있다. 왜냐하면 때때로 그 과정은 분해하는 것과 유사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10)
 모든 혼돈이 말끔이 치워지고 또 우리 언어에 대한 오해들이 제거되었을 때, 철학적 문제들은 사라질 것이고,11) 비트겐슈타인의 유명한 표현에 따른다면, 파리는 파리통에서 빠져 나갈 것이다.12)
이제 비트겐슈타인은 잠시 접어두고 하이데거를 주목해 보기로 하자. 하이데거 역시 일상언어의 문제를 『존재와 시간』의 한 절을 바칠만큼 비중있게 고려하였다.13) 하이데거는 말(Rede,λογοσ)와 잡담(Gerede)을 구분한다.(SZ, 34-35절) 말은 현존재의 실존론적 구조를 이루는 요소들 중의 하나이다. 이 실존론적 구조에 힘입어 말은 그것의 의미를 분절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잡담은 퇴락성(Verfallenheit)에 있어서 현존재의 존재의 가능한 하나의 방식이다.14) 이러한 퇴락성의 조건 속에서 현존재는 대개 "세인"이라는 비본래성에로 빠져드는 자신을 발견한다.15) 존재론적 수준에서 현존재가 말을 통해 존재에로 열려 있는 것과 같이,16) 존재적 수준에서 현존재는 스스로를 "군중" -- 군중은 진부한 일상 잡담 속에서 자신의 표현을 찾는다. -- 속에 빠뜨리는 경향이 있다.17)
그런 까닭에 하이데거는 일상언어를 그것으로 모든 언어사용이 판결되는 궁극적인 규준으로 삼는데 있어 비트겐슈타인에 결코 동의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하이데거가 통찰한 바와 같이, 너무 빈번하게도 모든 우리 일상언어는 진부성에로 떨어지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비트겐슈타인의 입장에 있어서 어떤 약점을 볼 수 있다. 실제로 일상언어는 그것으로 언어가 판결되는 적절한 규범을 우리에게 제공하고 있는가? 이것은, 예컨대 비트겐슈타인이 『탐구』 98절에서 말했듯이, 일상언어에는 아무런 잘못된 것도 없으며 그것은 있는 그대로 완전한 질서 속에 있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그것은 어떠한 비판에도 구애받지 않는다. 우리가 이미 본 바와 같이, 철학자는 언어를 기술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며 결국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놓아 둘 수밖에 없다.18) 그렇지만 비트겐슈타인에게 있어 언어가 삶의 한 형식이라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언어가 삶의 형식에 강제되어 있다는 결론은 그러므로 삶의 형식들이 모든 비판으로부터 면제되어 있다는 식으로 비쳐진다. 그렇지만 이와 같은 입장은 단순히 현상 유지를 위한 하나의 변명은 아닌가? 결국에 가서 분석이 실제로 모든 사회 변화를 불가능하게 하는 것은 아닌가? 그리고 정말로 일상언어가 우리에게 적합한 궁극적인 근거를 제공해 주고 있는가? 비트겐슈타인이 제시한 예로부터, 우리가 어떤 언어-놀이를 다른 종류의 놀이로 생각한다면, 이 점은 꽤 분명해 진다. 예를 들어 정치적 언어-놀이를 생각해 보기로 하자. 나치 독일에서 히틀러와 에이히만을 낳게한 "생존 공간", "유대인 문제", "일체의 모든 것을 능가하는 독일", "아리안 혈통의 순수성 보존" 등과 같은 언어 사용은 비판에서 면제되기가 거의 어렵게 되어 있다는 것은 꽤 명백한 듯이 보인다. 혹은 특히 미국 남부에서, 예컨대 "(백인이 흑인을 차별할 때의 구실로 쓰는 말인) 격리하지만 평등"(seperate but equal), "literacy requirement", "(교육이나 고용에서 일정 수의 흑인, 여성 등의) 할당 제도"(quotasystem) 등과 같은 언어를 가지고 행해지고 있는 인종주의적 언어-놀이에 있어, 얼마나 많은 불의가 삶의 형식 안에서 이와 같은 언어-놀이로 정당화되었던가? 그러므로 이와 같은 언어-놀이는 특별한 삶의 형식들을 드러내 보인다. 일상언어를 온갖 비판으로부터 면제시키는 일은, 그것과 뒤엉켜 떨어질 수 없는 삶의 형식에 유사한 면제를 승인한 꼴이 된다. 우리가 언어-놀이를 이해하고 그것을 가능한 모든 비판으로부터 떼어 놓는다면, 또 삶의 형식인 사회적 구조 안에서 우리의 장을 인지한다면, 우리는 비판이 제거된 언어, 예컨대 정치적 언어-놀이 혹은 인종주의자의 언어-놀이, 그리고 그에 상응하는 삶의 형식을 수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이와 같은 사회 구조 안에서 그것이 어떤 기능을 하고, 또 그것에 대해 어떤 의문도 제기하지 않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알고 있다. 그러므로 비트겐슈타인은 『탐구』 말미에서 다음과 같이 표명하고 있다. "받아들여져야 하는 것, 주어진 것은 삶의 형식들이라고 말해질 수 있을 것이다."19)
일상언어를 그 자체 의문이 제기될 수도 비판될 수도 없는 최후의 법정으로서 보는 비트겐슈타인의 입장은 적어도 의문의 여지가 있는 듯이 보인다. 아마도 우리는 여기서 비트겐슈타인과 하이데거의 사유가 결실있는 접촉으로 끌어질 수 있는 지점에 도달한다. 많은 철학적 문제에 관해서 매우 인위적인 어떤 것을 본 점에서, 그리고 언어를 그의 표현대로 "형이상학으로부터 되돌려"20) 놓은 점에서 비트겐슈타인은 확실히 옳았다. 이 점에 관해서 하이데거와 비트겐슈타인은 확실히 일치할 것이다. 하이데거는 대부분의 일상언어, 예컨대 언어-놀이를 광고하는 뉴욕의 매디슨 어베뉴가의 은어, 직업 교육, 사업 세계에 있어서의 은어 등이 그것을 넘어 어떤 호소도 가능하지 않은 최후의 법정으로서는 확실히 부적절하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그는 매우 조심스럽게 '말' -- 그것은 현존재의 본래적 가능성들 중 하나를 이룬다. -- 과 '잡담'을 구분한다. 즉, 그는 개시하는 말함과 은폐하는 말함을 구별짓는다.21) 현존재가 어떤 '퇴락'의 상황에 놓일 경우,22) 끊입없이 비본래성에로 견인되며,23) 그리고 이런 상황 하에서 언어는 너무도 타락하여 단순한 잡담으로 가십으로 또 무익한 지껄임으로 변질되어 버린다. 언어는 오로지 하나의 관점으로부터 볼 때 도구적 성격으로 드러나며, 그것의 목적은 의사소통의 수단으로 드러난다. 비트겐슈타인이 옳게 보았고, 그리고 다시 이 점에서 하이데는 언어가 삶의 한 형식이라는 비트겐슈타인의 견해에 진정으로 동의할 것이다. 그러므로 병행하여 혹은 더 정확하게는 상호 침투함으로써, 언어를 혹성적 의사 소통 매체로 전개함은 결국 인간 그 자신의 혹성 기술화를 동반하였다. 하이데거에 있어서 언어 질문이 문제되는 것은 인간 자신과 그의 운명 이외에 다른 것은 아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하이데거는 특히 그의 후기의 작품에서 시적인 것을 강조한다. 왜냐하면 여기에서의 언어는 이용되어야 하는 단지 편리한 일용품은 아니기 때문이다. 시에서 시인은 언어를 돌보며, 따라서 너무 쉽사리 일상적으로 떨어지는 진부성으로부터 언어를 보호한다. 하이데거가 본 바와 같이, 언어가 적절하게 이해되려면 시적인 것으로부터 이해되지 않으면 안 된다.
확실히 비트겐슈타인이 『탐구』에서 언어의 도구적 성격을 강조한 것은 사실이지만,24) 『탐구』의 뒷 부분에서는 그 역시 언어의 시적인 성격을 인정하고 있음을 암시한 대목도 보인다.25) 전개되지 못한 비트겐슈타인의 사유의 이런 측면은 아마도 시적인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하이데거와의 대화에 있어 보다 효과적으로 나타내질 수 있으며, 또 그것이 응당 강조될만한 가치가 있음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이런 측면은 『탐구』에서 제공했던 것보다 더 균형잡힌 언어철학에로 나아가도록 도울 것이다. 그리고 이런 측면은 두 가지 방식에서 그렇다. 첫째로, 단어들의 도구적 성격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강조에, 특히 단어들이 사용되는 방식들의 다양성에 대한 그의 강조에 대단한 가치가 놓여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렇지만 언어를 전적으로 단어의 도구적 성격의 관점에서 또는 의사 전달 수단의 관점에서만 본다면, 그 깊은 욕구, 인간적 욕구는 무시되게 된다. 하이데거와 비트겐슈타인의 견해에 의하면, 인간은 그 안에 자신의 본래적인 장을 가지고 있는 언어에서 소외되고, 더욱이 그가 생존할 수 있는 유일한 요소인 언어에서 소외됨으로써 바로 그의 인간으로서의 본질은 위협받게 된다. 비트겐슈타인의 사유 속에 포함된 시적인 것의 중요성 -- 비록 전개되지 않고 또 주제하되지 않은 형식 속에 있기는 하지만 -- 을 전면에 가져옴으로써 양자 간의 대화는 아마도 보다 균형잡힌 입장으로 이끌어질 수 있을 것이다. 둘째로, 일상언어를 언어의 궁극적인 규준으로 인정함으로써, 언어철학자는 자기 자신의 관점과 그 자신을 발견하는 사회의 관점에 사로잡히는 경향이 있다. 그 마지막 분석에 있어서 언어에 대한 이러한 접근은 언어철학자를 현상 유지의 변명자로 만든다. 이것은 왜 그렇게 되는가? 왜냐하면 언어-놀이는 삶의 한 형식이기 때문이다. 비트겐슈타인은 확실히 "언어-놀이"라는 개념을 선택하게 된 것도 바로 이 점을 지적해 내기 위해서였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철학자의 작업이 단순히 기술하는 것이고, 결국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놓아 두는 것"26)이라면, 이것은 그것과 동일한 삶의 형식에 대해 비판으로부터 유사한 면책특권을 승인한 것처럼 보인다. 만일 언어에 대해 어떠한 비판도 가능하지 않다면, 언어는 결국 썩고 말 것이다. 하이데거는 우리의 일상 세계에서의 일상언어가 진부하고 권태스러운 공허성 안으로 너무도 쉽게 전락하고 있음을 보았다. 시인들은 언어를 조심스럽게 사용함으로써 언어를 이런 공허성으로부터 보호되도록 도와준다.
비트겐슈타인과 하이데거는 외면상의 정의 -- 그것이 언어 문제 해결의 열쇄로서 받아들여질 경우 -- 가 부적절한 것임을 통찰했다. 『탐구』에서 비트겐슈타인은, 그것이 언어-놀이를 이해하기 위한 열쇄일지는 몰라도, 우리 자신보다도 더 본원적인 것은 바로 언어-놀이임을 지적했다. 외면상의 정의 그 자체는 -- 만일 그것이 의미있는 것이라면 -- 전체적인 언어 문맥을 전제한다. 하이데거는 확실히 이 점에 동의할 것이다. 즉, 시작(詩作)으로부터 태어난 낱말은 단순히 이미 현전하는 한 사물에 적용되는 부호, 곧 우리가 거기에 이름을 지시하고 이름을 붙이는 그런 부호는 아니다.27) 차라리 시작을 통하여 사물은 처음으로 사물로서 환기되며, 그리고 동시에 세계도 사물과 더불어 함께 소환된다. 사물은 어떤 세계 안에서만 사물일 수 있고, 구체적인 의미 구조도 유의미성 전체의 지평, 즉 세계 안에서만 의미를 갖는다. 시작은 끊임없이 새롭게 행해져야 하는 존재의 개시인 까닭에, 정체에로 향하는 경향은 되돌려진다. 인간 -- 그가 본래적으로 실존할 경우 -- 을 위한 적절한 거처인 언어, 즉 존재의 집인 언어는 끊임없이 새롭게 축조되고 있음에 틀림없다.
이 논문의 일반적 목표, 곧 유사점과 일치하는 점들을 밝혀 드러내고자 하는 의도 때문에, 더 나은 대화를 위해 시사적일 수 있는 요소들을 제공할 목적으로, 우리는 비트겐슈타인의 언어-놀이 개념과 하이데거의 지시적 의미 전체성(Bedeutungsganze)28) 개념 간의 유사성을 지적하려 했다. 여기에서 우리는 두 철학자가 물론 동일한 것을 말하고 있다고 제안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바로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하이데거에 있어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시인은 언어와 관련하여 중대한 역할을 수행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몇차례 지적한 바와 같이, 하이데거의 견해에서 일상언어가 전락하는 진부성, 권태성 그리고 공허성의 원인의 하나는 그것을 사용한다는 관점에서 그러한 일상언어와 인간과의 관계이다. 이러한 사용법의 관계를 극복하기 위하여, 하이데거는 인간이 언어에 봉사하고, 다른 방도없이 언어에 의하여 인간이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다. 반면에 비트겐슈타인은 사용을 강조하며, 따라서 언어나 언어-놀이가 의미의 전체적인 관계 문맥으로 보여지는 한에서, 언어에 대한 접근방식에 있어 하이데거와 비트겐슈타인 간에는 유사성이 있지만, 그러나 또한 매우 중요한 차이점도 있다. 비트겐슈타인에 있어서 의미의 규준은 수행이다. 즉, 의미는 우리가 본 바와 같이 삶의 곧 활동의 한 형식인 언어-놀이에서 낱말이 사용되는 방식이다. 반면 하이데거는 언어의 비사용적 측면을 강조한다. 즉, 언어에 봉사해야 되는 것은 바로 인간이다. 그리고 그는 역시 시인의 역할의 중요성을 강조하는데, 왜냐하면 현저하게도 시인은 단지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언어에 의하여 사용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언어를 수호하고 양육하며 돌보는 것이 시인의 임무이다. 한마디로 시인의 임무는 언어를 보존하는 것이다. 그리고 물론 이것은 언어에 대한 하이데거와 비트겐슈타인의 접근 방법 간에 매우 중대한 차이이다.
이런 차이점을 지적함으로써, 그때 어쩌면 비트겐슈타인과 하이데거의 대화가 기여할지도 모를 목적들 중의 하나는 『탐구』에서 배자(胚子)의 형태로 포함되어 있는 시적인 것의 개념의 전개를 촉진하게 될 것이라는 점을 제안하려 한다. 또한 마찬가지로 어쩌면 시적인 것의 중요성을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일상언어를 유일한 규준으로 삼는 입장에 내재되어 있는 약점이 극복될 것이다. 그리고 최소한 동등하게 중요한 언어의 다른 측면들, 예컨대 언어의 역동적이고 혁명적 성격, 평범함과 진부성에로 빠져들기 쉬운 언어의 경향, 인간이 온당하게 체재해도 좋은 한 세계를 형성함에 있어서 언어의 결정적인 중요성과 같은 측면들은 두드러진 것이며 마땅히 고려될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이 글은 Thomas A. Fay, "Heidegger and Wittgenstein on the question of ordinary language", Philosophy Today (Summer 1979):154-159를 번역한 것이다. [역자 주]
<주>
1) Philosophical Investigation, trans. G.E.M. Anscombe (Oxford: Blackwell, 1953) 이하 본문에서는 『탐구』로, 주에서는 PI로 약함.
2) PI, 109.
3) PI, 124.
4) PI, 340.
5) PI, 108.
6) PI, 106.
7) PI, 107.
8) PI, 122.
9) PI, 255.
10) PI, 90.
11) PI, 133.
12) PI, 309.
13) Sein und Zeit, 8th ed. (Tübingen: Niemeyer, 1957). pp. 167-170. 이하 SZ로 약함.
14) SZ, p.167,175.
15) SZ, pp.175-176.
16) SZ, pp.160-161.
17) SZ, pp.168-169.
18) PI, 124.
19) PI, xi.
20) PI, 116.
21) SZ, p.169.
22) SZ, p.176.
23) SZ, p.178.
24) 예를 들어 PI, 11, 14, 15, 23, 41, 53, 360.
25) 예컨대 PI, 527, 528, 529, 530, 531, 533 에서 주어지는 암시를 참조할 것.
26) PI, 124.
27) Unterwege zur Sprache (Pfullingen: Neske, 1959) p.227.
28) SZ, p.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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