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데거의 철학에 있어서 인간의 문제
하이데거의 철학에 있어서 인간의 문제
http://cafe.naver.com/modernth/695 양 갑 현
1. 존재에 대한 물음과 인간 현존재
하이데거(M. Heidegger)의 필생의 철학적 주제는 존재(Sein)의 문제이다. 『존재와 시간』에서 하이데거는 아주 오래 전에 플라톤이 "존재를 둘러싼 거인들의 싸움"이라 부른 것을 새롭게 부각시키려 한다. 핵심적인 물음은 존재의 의미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우리가 '존재'(있다)를 말할 때 우리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예컨대 나무가 '있다', 인간이 '있다', 신이 '있다'라고 말할 때, 우리는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가? 이 물음은 얼핏 보기에 철학의 한 특정 분과, 즉 존재론의 추상적인 문제 가운데 하나인 것 같다. 그러나 그 물음을 추적해 들어가면, 그것이 사유의 근거와 같은 심연에까지 이르고 있음을 알게 된다. 하이데거의 표현대로 우리는 "존재에 대한 물음과 더불어 칠흑 같은 어둠의 가장자리까지 접근해 들어간다."
그렇다면 이제 이 물음을 어떻게 궤도 위에 올려 놓아야 하는가? 또 인간이 그것에 대해 묻고 있는 존재는 어디에서부터 접근가능하게 되는가? 하이데거는 존재의 이해에서라고 대답한다. 그것은 인간이 항상 어떠한 형태로든 존재가 무엇을 뜻하는지를 이해하고 있는 곳을 말한다. 이러한 존재의 이해는 언어 속에서 표현되고 있지만 또한 사물을 다루는 일상적인 행동과 동료 인간들과의 교제에서도 표현되고 있다. 존재 이해를 해명하기 위하여 하이데거는 이를 상세히 분석해 나가면서 존재 이해의 장소로서의 인간에 대해 이야기한다. 즉, 존재 문제의 해결의 실마리를 다양한 존재자와의 관계 속에서 이미 존재를 이해하고 있으며, 죽음을 향해 있는 존재로서 그 자신 철두철미 시간적 존재인 인간(Dasein)에서 찾는다. 그러고 보면 그의 철학은 근본에 있어서는 존재의 의미를 묻는 존재론 혹은 형이상학이면서 이 존재론을 위해 인간존재의 분석이 전제되어 있는, 그러면서도 존재론 자체의 가능 근거를 구명하는 '기초존재론'(Fundamentalontologie)이라 할 수 있다.
존재론이 인간 현존재의 존재 이해에 그 가능 근거를 갖고 있고, 따라서 기초존재론에서 제일 먼저 문제삼아져야 할 것이 다름아닌 존재를 이해하고 있는 인간 현존재라고 할 경우, 이 때 행해진 현존재 분석은 일면 인간 존재의 해명일 수 있고, 궁극적으로 하이데거가 제한된 형태로나마 제시하고 있는 인간상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하는 실존(實存), 관심(關心), 죽음, 역사성(歷史性) 개념을 중심으로 인간 현존재의 모습을 검토해 본 것이다.
2. 실존의 존재 방식으로 있는 인간
철학사를 통해 인간은 다양한 주의나 노선을 넘어서 항상 특수한 위치를 차지해 왔다. 인간의 존재는 다른 존재자와는 전적으로 구별되는 것으로서 항상 강조되어 왔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인간을 생각할 때, '이성적 동물'(animal rationale)이라는 전통적 정의를 쉽사리 떨쳐버리지 못한다. 어쨌거나 이 정의에서 드러나는 것은, 인간은 동물이되 이성을 갖춘 특출한 동물이라는 것이다. 인간의 있음이나 동물의 있음이나 그 있음(존재)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그것은 둘 다 유한한 피조물로서 존재할 따름이다. 있음에는 구별이 없고 오직 그 본질에만 구별이 있을 뿐이다. 그러기에 인간을 인간으로 만들고 있는 것도 그 있음이 아니고 그 본질 즉 이성인 것이다. 이 이성이 철학사를 통해 다양한 양상으로 강조되어 왔다. 영혼, 지성, 정신, 사고, 주체, 의지, 인격 등등은 이성에 대한 다른 명칭이거나 측면일 뿐이다.
그러나 만일 인간을 인간으로서 특징짓고 있는 것이 본질로서의 이성이 아니고 다른 존재자의 있음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해 왔던 바로 그 있음(존재)에 있다고 한다면, 다시 말해 인간과 동물을 구별짓는 징표가 이성이 아니고 '있음'이라고 한다면, 아마도 우리는 이성적 동물이란 인간에 대한 정의를 더 이상 고수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결국 우리는 인간의 있음에 합당한 개념을 발견하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 오랜 철학사를 통해 선입견으로 물든 인간이라는 개념을 그 있음에서부터 아무런 전제없이 구명하기 위해, 하이데거는 통상적 의미의 인간이란 개념 대신 우리가 지금 그 존재의 본질을 구명하려고 하는 존재자 곧 '거기에 있는 존재자', 즉 현존재라는 새로운 개념을 끌어 들인다.
하이데거는 인간 현존재만의 독특한 존재 방식을 '실존'(Existenz)이라고 부른다. 곧 현존재의 본질은 그의 실존에 있다. 오직 인간만이 실존하고 있을 뿐이다. 실존은 일차적으로 인간이라는 현존재가 '존재하고 있다는 그 사실'을 가리킨다. 여기서 인간의 이러한 존재의 사실은 나무나 바위, 풀 등이 거기에 그렇게 있는 그러한 사실과는 다르다. 인간의 있음은 그냥 그렇게 놓여 있음이나 눈앞에 있음이 아니라, 그 있음 그 자체가 떠맡아야 할 과제로 부과되어 있는 그러한 있음이다. 인간은 그 존재함에 있어 바로 이 존재함이 문제가 되고 있는 그러한 존재자인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존재를 떠맡아서 자신의 존재를 형성해 나가며 존재해야 한다. 인간은 그가 지금 현재 무엇인 바 그것이 아니고, 그가 되기로 결심하고 되려고 노력하는 바 그것이다. 이렇듯 인간의 존재는 '가능존재'(Möglichsein)로서 인간의 있음은 폐쇄된 완료형의 있음이 아니라 언제나 개방되어 있는 할 수 있음이다. 그리고 인간 현존재에게 그 존재함에 있어 문제가 되고 있는 바로 그 존재는 각기 나의 존재이다. 이렇게 실존 개념은 각자 자기의 존재를 떠맡아 나름대로 자신의 존재를 존재해야 한다는 사실성, 존재 수행, 각자성의 의미를 함축한다. 결국 인간이 실존으로 규정된 배경에는 전통적 인간 규정(이성적 존재)이 갖는 모종의 사물적 규정에 대한 비판과 그 극복이라는 중대한 사태가 놓여 있는 것이다.
3. 관심 쏟는 존재로서의 인간
하이데거는 존재 이해를 해명하기 위해 현존재 분석을 행하면서, 그 분석을 인간에 대한 추상적 개념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경험적 인간으로부터, 그러한 인간의 자기 이해와 자기 경험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는 또한 인간을 인간 밖의 한 관점, 예컨대 신이라든가 절대 정신 따위에서 고찰하지 않고, 오히려 인간이 그 자신에게 그의 고유한 관점으로 나타나고 있는 그대로 고찰한다. 이러한 시각에서 하이데거는 인간이 돌이니 나무처럼 그냥 단순하게 거기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그 방향으로 자신을 설계하여 선택한 그 가능성 안에서, 그 가능성들로부터 살고 있음을 보여준다. 데카르트 이래 근세철학이 으레 인간을 인위적으로 고립시켜 파악해 왔는데, 하이데거는 그런 식으로 파악하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어떻게 개개인의 인간이 나름대로의 세계를 갖는지, 어떻게 그가 다른 존재자에 파묻혀 또는 다른 인간들과 더불어 실존하고 있는지를 이야기 한다.
하이데거는 인간을 주위 사물들이나 환경과 관계를 맺고 있는 '세계 내 존재'(In-der-Welt-sein)로 규정한다. 현존재는 '관련을 맺어가는 존재' 이외에는 다른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할 정도로 한편으로 자기 자신에 관계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자신을 넘어서 타자(他者)들과의 근원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우리가 이곳 저곳에 있다 할 때, 우리가 처해 있는 거기라는 세계는 인간이라는 현존재에게 그의 실존의 장소로서 속해 있다. 이 세계는 단순히 인간의 의식의 지평 속에 나타나는 객관적인 세계만이 아니라, 우리 인간이 거하는 장이며 활동의 무대이기도 하다. 이와 같이 세계는 인간활동의 영역으로, 이 활동의 주역인 현존재 자체가 이미 자리하고 있는 장소로서 인간존재와 구조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즉, 대상 세계 속의 사물들과 관계하며, 이웃들과 관계하며, 또 자기 자신에 관계하는 존재이다. 하이데거는 이 모든 인간의 행위 가운데 나타나는 관계를 넓은 의미의 관심(Sorge) 현상으로 파악한다.
먼저, 인간은 주위 환경 세계와의 관계에 있어서 '배려(配慮)적인 관심을 쏟고있는'(besorgend) 존재로 나타난다. 이 세계 속에서 인간은 일상적인 도구를 생산, 주문, 사용하는 등 계속해서 사물들과 관계 맺는다. 따라서 세계는 단순히 현존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실천의 대상으로 제공되는 도구적인 것이라는 성격을 지닌다. 다음으로, 인간은 이웃들과의 공동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고려(考慮)적인 관심을 쏟고 있는'(fürsorgend) 존재로 나타난다. 인간은 실질적인 사회를 구성하는 존재로서 상호간에 고려의 관계 가운데 있으며, 이 때의 고려적 관심은 인간 존재의 본질적이고 필연적인 구조를 말한다. 그리고, 인간은 자기 자신과의 관계 속에서 '관심을 쏟고 있는'(sorgend) 존재로 나타난다. 하이데거는 로마의 히기누스(Hyginus)의 쿠라(Cura) 우화를 인용하면서 관심이 존재적으로 볼 때 현존재의 가장 내적인 고유한 본질을 이루고 있음을 시간성과의 관계 속에서 밝히고 있다.
이렇듯 관심은 이미 인간 현존재의 근본 구조로 놓여 있다. 인간은 그의 특수적인 존재방식으로 말미암아 단순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의 존재를 비로소 이룩해 나가야만 하고, 그의 사실이 자기에게 질서지워져 있는 존재이다. 따라서 인간은 '존재해야 함'(das Zu-sein)으로 규정되는데 언제나 자기를 실현시켜 나가야 할 존재로서 독자적인 계획을 가진다. 여기서 현존재의 본질적인 관심 구조가 갖는 두 가지 의미가 나타난다. 즉 현존재가 세계 안에 던져져 얽매어 있다는 사실에 대한 관심과, 그 구속을 벗어나 스스로 계획하고자 하는 미래적인 존재 가능에 대한 관심이다. 현존재의 본질로 파악되는 관심 개념 속에는 현존재의 자기 계획, 시간성, 미래를 향한 계획이 다 포함되어 있다.
4. 죽음에의 존재로서의 인간
하이데거는 인간 현존재의 존재를 가능으로, 존재 가능으로 파악하고 있다. 가능이라는 것은 현재 만나고 있는 존재자로부터 항상 새롭게 얻어 내어, 자기 고유의 존재가능으로 만들기 위해 미리 앞에 가 보는 식으로 파악되어야 한다. 그러나 하나의 결정적인 점에서 이 가능이라는 것은 이미 결정되어 있다. 즉 현존재의 피할 수 없는 가능은 죽음인 것이다. 그러기에 현존재는 자기의 존재와의 관계에서 항상 이미 이러한 절대적인 현존재의 불가능이라는 가능에 관계하고 있다. 현존재가 그것으로써 자기의 존재 가능의 가능성을 붙잡고 있는 앞서 가 있음은 '죽음에로의 존재' 안에 가장 근원적인 구체성을 내보인다. 이 존재 가능의 건너뛸 수 없는 가능성이 죽음이라는 말은 곧 현존재는 자기 자신의 죽음과 관계를 맺지 않고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피투성(Geworfenheit)이라는 것도 현존재가 죽음 속에 내던져져 있음 이외의 다른 아무것도 아니다. 곧 현존재가 일정한 시간과 장소와 환경 아래 실존해야 한다는 현존재의 구속성을 뜻하는 것이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현존재는 우선 죽음으로 향한 자신의 고유한 존재를 피해서 은닉하면서 존재한다. 곧 일상적인 죽음에로의 존재는 하나의 끊임없는 죽음으로부터의 도피이다. 죽음에로의 존재는 오직 불안(不安) 속에서만 근원적으로 드러내어지고 있는 것이기에, 죽음으로부터의 도피는 죽음에 대한 끊이지 않는 안심이라는 성격을 띤다.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불안의 용기가 피어오르게 놔두지 않는다. 그러나 이 도피가 거기에서 피하려고 하는 그 '무엇으로부터'를 보여주면, 도망치고 있는 현존재가 어떻게 자신의 죽음을 이해하고 있는지를 드러내 보여줄 수 있게 될 것이다.
죽음으로부터의 끊임없는 도피 역시 그것과의 한 관계이다. 이러한 식의 특수한 죽음을 향한 존재 양식에서 현존재의 존재 이행의 한 특수한 양태가 유출되어 나오는데, 이것을 하이데거는 '비본래성'(非本來性)이라 칭한다. 반면, 죽음이 죽어가고 있는 개별 인간으로 만들듯이 죽음에 미리 가 봄으로써, 여기서 문제가 되는 그 존재 가능이 어느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각자의 고유한 존재 가능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아무도 다른 사람을 대신해서 그의 죽음을 죽어줄 수 없듯이, 아무도 다른 사람을 대신해서 그의 삶을, 존재를 살아 줄 수 없는 것이다. 죽음이 바로 내 자신의 죽음이듯이, 나의 삶 역시 내 자신의 고유한 삶인 것이다. 나는 죽음에 미리 앞서 가 보기로 결단함으로써, 나의 존재가능을 뚜렷하게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내 자신의 고유한 존재 가능으로 이행하는 것이다. 이렇게 현존재가 자기 자신의 고유한 존재를 이행하는 양태를 하이데거는 '본래성'(本來性)이라 칭한다. 죽음에 대한 결단을 가지고 미리 앞서 가 보는 것이 실존의 본래성을 위한 전제이다.
인간 안에서 그 인간을 특징짓고 있는 것으로 무한한 어떤 것, 절대적인 어떤 것, 필연적인 어떤 것을 찾았던 전통의 형이상학과는 다르게, 하이데거는 유한한 존재, 죽음을 향해 존재하고 있는 존재자, 개별자로서 상황에 얽매어 우연에 규정되고 있는 존재자로서의 인간 현존재를 부각시킨다. 죽음을 향한 존재, 죽음을 미리 앞서 가 보는 존재로서의 인간 현존재는 나면서부터 아무도 대신할 수도 피할 수도 없는 존재 가능으로서 죽음을 안고 존재에 내던져져 있다. 인간 현존재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죽음을 예기하면서 또 과거를 자기 속에 지니고 미래를 향하면서 현재 속에 살아가는 존재인 것이다.
5. 역사적 존재로서의 인간
하이데거는 인간 현존재의 한 구조 형식으로서 역사성(Geschichtlichkeit)을 말한다. 그는 종전의 철학의 관심이 객간적인 역사로 말한 것과는 반대로, 역사를 형성하는 인간이라는 현존재의 독특한 구조 형태인 역사성에 주목한다. 객관적인 역사 그 자체도 인간의 주관적인 역사성에로 환원되어야 할 성질의 것이다. 따라서 그가 이해하려는 역사 개념은 역사에 관한 과학이나 대상으로서의 역사가 아니다. 그는 현존재의 움직임 자체가 근본에 있어서 역사적이라고 한다. 이 현존재의 움직임은 단순히 현존하는 것들의 움직임이나 안간 밖의 움직임과는 구별되며, 현존재에 있어서만의 이러한 특수한 움직임을 '생기'(生起, Geschehen)라고 칭한다. 이러한 현존재의 생기구조가 역사성을 가능하게 한다. 그리고 현존재가 언제나 역사를 가지고 있고 또 가질 수 있는 것도 사실은 현존재가 이 역사성에 의해서 구성되어 있기에 그런 것이다.
그런데 인간의 주체적인 역사성은 현존재의 존재 구조인 시간성 속에 근거한다. 하이데거는 '히기누스의 우화'를 통해 먼저 인간의 일생이 염려(관심)의 지배 하에 있다는 것, 그리고 인간의 근원적인 존재 의미를 향하여 이러한 운명적인 심판을 내린 것이 사트룬(Satrun), 즉 시간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따라서 인간 현존재가 역사를 가질 수 있는 근거도, 자신이 역사적 존재로 불리워지는 것도 다름아닌 인간의 존재 의미가 시간적으로 규정됨으로 말미 암는다.
개인의 고유한 실존적인 시간성은 현존재가 불가피한 최종적 가능성인 죽음에 자기 자신을 내던짐으로써 온전하게 드러난다. 바로 이러한 고유한 시간성이 현존재에 있어서 고유한 역사성을 가능하게 한다. 그리고 이 역사성은 개별적인 인간이 그 속에서 살 공동체나 민족과의 연결을 필연적으로 전제한다. 인간은 세계 내 존재일 수 밖에 없으며, 따라서 타인과의 공존은 본질적인 것으로 자기의 사건은 곧 공존의 사건이며 이것은 하나의 역운(Geschick)으로 규정된다. 이렇게 역사성은 타인과의 공동 운명체의 성질을 띠기에 인간이 물려받고 있는 유산 또한 필연적으로 공동적인 유산이 된다. 인간은 하나의 공동적인 역사에 의하여 결합된 그의 이웃과 더불어 이미 공동적인 유산 속에 놓여 있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공동적인 유산 속에 놓여 있는 인간의 역사성 속에 역사의 진보나 발전이 아닌 유산의 전승을 통한 인간의 자기 충실성을 보려고 한다. 즉, 실존적 인간은 이 유산 속에 담겨 있는 정신적인 내용들을 자기화하여 그것들과 동화하려고 노력함으로써 변화하는 역사 안에서 최후적이고 확고한 입장을 획득하게 된다. 따라서 현존재의 역사성 속에는 유산 속에 면면이 이어 오는 실존적인 가능성을 각각의 현존재의 마음 속에 새롭게 실현시키는 방법이 요구되는데 그것은 '반복'이다. 그런데 이 반복은 과거의 것을 다시 가져 온다거나 현재를 앞질러 간 것에 다시 매어 두는 것은 아니며, 그것은 어떤 결단된 자기 계획으로부터 나온다.
하이데거에 있어서 인간 현존재의 역사성은 시간성에서처럼 미래 지향적이다. 오직 미래 만이 현존재의 역사성을 드러낸다. 미래는 본원적이고 본래적인 시간성의 근원 현상으로, 이 미래는 현존재의 존재를 성취할 수 있는 가능성이면서도, 불가피한 죽음이라는 최종적인 가능성이 그것을 뒷받침한다. 그러므로 미래는 끝이 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유한성으로 이해된다. 이것은 죽음에로의 본래적인 존재, 즉 시간성의 종말이 현존재의 역사성의 숨은 근거임을 뜻하는 것이며, 결국 역사는 인간의 유한성(有限性)이 표현된 것으로 이해된다.
이제까지의 논의는 하이데거의 기초존재론에 드러난 인간에 초점을 마추어 본 것이다. 인간은 실존의 방식으로 존재하며, 세계 내 존재로서 자신 나아가 세계 안에서 만나는 다른 존재자들에 부단한 관심을 유지하면서, 죽음에로의 존재로서 역사적 존재로서 존재하고 있음을 살폈다. 그러나 『존재와 시간』에서 근원적으로 논의되었던 것은 인간에 대해서가 아니고 존재 일반의 의미에 대한 것이었음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인간의 유한한 실존이란 이 목적에 이르는 통과점으로서만 고찰되었다는 점이다. 분명히 시간이 인간 현존재의 이해가 행해지는 지평으로 입증되고 있다.
그러나 기초존재론이 견지하고 있는 물음에서, 우리는 존재론 뿐만 아니라 인간학의 측면이 한데 어우러저 있음을 본다. 때문에 거기서 인간학적 측면만을 따로 떼어 논의한다는 것 자체를 어렵게 하는 것도 사실이다. 어쨌든 존재에 대한 연구는 인간에 대한 연구로부터 분리되지 않는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하이데거는 『사유란 무엇인가?』에서 "인간의 본질에 대한 모든 철학적 학설은 자기 내적으로 이미 존재자의 존재에 관한 학설이며, 존재에 관한 모든 학설은 자기 내적으로 이미 인간의 본질에 관한 학설"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물론 현존재 분석에서 다뤄진 인간 존재론이 던져주는 인간상은 제한적인 것이어서, 오늘날의 철학적 인간학이 일구어 놓은 풍부한 성과들에 견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철학적 인간학은 하이데거가 마련한 존재론적 인간 해명의 토대 위에서 풍요로워질 수 있었다는 점도 간과돼서는 안될 것이다. 과학과 기술이 세계를 지배하고 인간이 물화되는 고향 상실의 위기에 처해있는 오늘날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 부단한 관심을 갖고 스스로 묻는자라는 것, 인간은 한갓된 사물존재자로 읽혀져서는 안된다는 것, 더욱이 고립된 무세계적인 주관으로 취급되어서는 안된다는 하이데거의 가르침은 여전히 유효한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하여 겔벤(M. Gelven)의 다음과 말은 음미해 볼만하다: "....하이데거의 인간은 그의 철학과 마찬가지로 근대 시대의 근본적 혁명을 반영하고 있다. 이 인간은 자기의 고유한 가능태들을 날카롭게 인지하고, 그에게 있어서 자신의 본래성에 대한 책임을 직접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짐지우고 있는 바로 그런 인간이다. 그리고 이 인간은 비본래성, 기계에 의한 불구화, 그리고 자기 한계에 대한 적절한 이해의 결여로 인해 자신의 영혼이 질식될 수 있는 인간이기도 하다. 하이데거의 인간은 도스토예프스키, 토마스 만, 헤르만 헤세, 니체, 그리고 심지어 싸르트르의 탐구에서 추구되었던 인간이다. 그것은 오늘날의 젊은이들이 친근감을 느끼는 인간, 즉 자신의 본질이 기술 관료의 교묘한 술책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그런 인간이다. 그렇지만 이 인간은 감정에서 또는 어떤 '원인'에서 그의 근거를 발견하는 그런 인간이 아니다. 그의 가장 내밀하고 가장 가치있는 특성은 심오하고 교육된 이성을 통한 철학적 탐구에 의해 폭로될 수 있다. 따라서 『존재와 시간』 바로 그 연구란 인간이 현존하는 바 -- 자신의 존재 방식에 관해 관심 쏟는 존재자 -- 의 일부인 것이다."
http://cafe.naver.com/modernth/695 양 갑 현
1. 존재에 대한 물음과 인간 현존재
하이데거(M. Heidegger)의 필생의 철학적 주제는 존재(Sein)의 문제이다. 『존재와 시간』에서 하이데거는 아주 오래 전에 플라톤이 "존재를 둘러싼 거인들의 싸움"이라 부른 것을 새롭게 부각시키려 한다. 핵심적인 물음은 존재의 의미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우리가 '존재'(있다)를 말할 때 우리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예컨대 나무가 '있다', 인간이 '있다', 신이 '있다'라고 말할 때, 우리는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가? 이 물음은 얼핏 보기에 철학의 한 특정 분과, 즉 존재론의 추상적인 문제 가운데 하나인 것 같다. 그러나 그 물음을 추적해 들어가면, 그것이 사유의 근거와 같은 심연에까지 이르고 있음을 알게 된다. 하이데거의 표현대로 우리는 "존재에 대한 물음과 더불어 칠흑 같은 어둠의 가장자리까지 접근해 들어간다."
그렇다면 이제 이 물음을 어떻게 궤도 위에 올려 놓아야 하는가? 또 인간이 그것에 대해 묻고 있는 존재는 어디에서부터 접근가능하게 되는가? 하이데거는 존재의 이해에서라고 대답한다. 그것은 인간이 항상 어떠한 형태로든 존재가 무엇을 뜻하는지를 이해하고 있는 곳을 말한다. 이러한 존재의 이해는 언어 속에서 표현되고 있지만 또한 사물을 다루는 일상적인 행동과 동료 인간들과의 교제에서도 표현되고 있다. 존재 이해를 해명하기 위하여 하이데거는 이를 상세히 분석해 나가면서 존재 이해의 장소로서의 인간에 대해 이야기한다. 즉, 존재 문제의 해결의 실마리를 다양한 존재자와의 관계 속에서 이미 존재를 이해하고 있으며, 죽음을 향해 있는 존재로서 그 자신 철두철미 시간적 존재인 인간(Dasein)에서 찾는다. 그러고 보면 그의 철학은 근본에 있어서는 존재의 의미를 묻는 존재론 혹은 형이상학이면서 이 존재론을 위해 인간존재의 분석이 전제되어 있는, 그러면서도 존재론 자체의 가능 근거를 구명하는 '기초존재론'(Fundamentalontologie)이라 할 수 있다.
존재론이 인간 현존재의 존재 이해에 그 가능 근거를 갖고 있고, 따라서 기초존재론에서 제일 먼저 문제삼아져야 할 것이 다름아닌 존재를 이해하고 있는 인간 현존재라고 할 경우, 이 때 행해진 현존재 분석은 일면 인간 존재의 해명일 수 있고, 궁극적으로 하이데거가 제한된 형태로나마 제시하고 있는 인간상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하는 실존(實存), 관심(關心), 죽음, 역사성(歷史性) 개념을 중심으로 인간 현존재의 모습을 검토해 본 것이다.
2. 실존의 존재 방식으로 있는 인간
철학사를 통해 인간은 다양한 주의나 노선을 넘어서 항상 특수한 위치를 차지해 왔다. 인간의 존재는 다른 존재자와는 전적으로 구별되는 것으로서 항상 강조되어 왔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인간을 생각할 때, '이성적 동물'(animal rationale)이라는 전통적 정의를 쉽사리 떨쳐버리지 못한다. 어쨌거나 이 정의에서 드러나는 것은, 인간은 동물이되 이성을 갖춘 특출한 동물이라는 것이다. 인간의 있음이나 동물의 있음이나 그 있음(존재)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그것은 둘 다 유한한 피조물로서 존재할 따름이다. 있음에는 구별이 없고 오직 그 본질에만 구별이 있을 뿐이다. 그러기에 인간을 인간으로 만들고 있는 것도 그 있음이 아니고 그 본질 즉 이성인 것이다. 이 이성이 철학사를 통해 다양한 양상으로 강조되어 왔다. 영혼, 지성, 정신, 사고, 주체, 의지, 인격 등등은 이성에 대한 다른 명칭이거나 측면일 뿐이다.
그러나 만일 인간을 인간으로서 특징짓고 있는 것이 본질로서의 이성이 아니고 다른 존재자의 있음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해 왔던 바로 그 있음(존재)에 있다고 한다면, 다시 말해 인간과 동물을 구별짓는 징표가 이성이 아니고 '있음'이라고 한다면, 아마도 우리는 이성적 동물이란 인간에 대한 정의를 더 이상 고수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결국 우리는 인간의 있음에 합당한 개념을 발견하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 오랜 철학사를 통해 선입견으로 물든 인간이라는 개념을 그 있음에서부터 아무런 전제없이 구명하기 위해, 하이데거는 통상적 의미의 인간이란 개념 대신 우리가 지금 그 존재의 본질을 구명하려고 하는 존재자 곧 '거기에 있는 존재자', 즉 현존재라는 새로운 개념을 끌어 들인다.
하이데거는 인간 현존재만의 독특한 존재 방식을 '실존'(Existenz)이라고 부른다. 곧 현존재의 본질은 그의 실존에 있다. 오직 인간만이 실존하고 있을 뿐이다. 실존은 일차적으로 인간이라는 현존재가 '존재하고 있다는 그 사실'을 가리킨다. 여기서 인간의 이러한 존재의 사실은 나무나 바위, 풀 등이 거기에 그렇게 있는 그러한 사실과는 다르다. 인간의 있음은 그냥 그렇게 놓여 있음이나 눈앞에 있음이 아니라, 그 있음 그 자체가 떠맡아야 할 과제로 부과되어 있는 그러한 있음이다. 인간은 그 존재함에 있어 바로 이 존재함이 문제가 되고 있는 그러한 존재자인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존재를 떠맡아서 자신의 존재를 형성해 나가며 존재해야 한다. 인간은 그가 지금 현재 무엇인 바 그것이 아니고, 그가 되기로 결심하고 되려고 노력하는 바 그것이다. 이렇듯 인간의 존재는 '가능존재'(Möglichsein)로서 인간의 있음은 폐쇄된 완료형의 있음이 아니라 언제나 개방되어 있는 할 수 있음이다. 그리고 인간 현존재에게 그 존재함에 있어 문제가 되고 있는 바로 그 존재는 각기 나의 존재이다. 이렇게 실존 개념은 각자 자기의 존재를 떠맡아 나름대로 자신의 존재를 존재해야 한다는 사실성, 존재 수행, 각자성의 의미를 함축한다. 결국 인간이 실존으로 규정된 배경에는 전통적 인간 규정(이성적 존재)이 갖는 모종의 사물적 규정에 대한 비판과 그 극복이라는 중대한 사태가 놓여 있는 것이다.
3. 관심 쏟는 존재로서의 인간
하이데거는 존재 이해를 해명하기 위해 현존재 분석을 행하면서, 그 분석을 인간에 대한 추상적 개념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경험적 인간으로부터, 그러한 인간의 자기 이해와 자기 경험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는 또한 인간을 인간 밖의 한 관점, 예컨대 신이라든가 절대 정신 따위에서 고찰하지 않고, 오히려 인간이 그 자신에게 그의 고유한 관점으로 나타나고 있는 그대로 고찰한다. 이러한 시각에서 하이데거는 인간이 돌이니 나무처럼 그냥 단순하게 거기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그 방향으로 자신을 설계하여 선택한 그 가능성 안에서, 그 가능성들로부터 살고 있음을 보여준다. 데카르트 이래 근세철학이 으레 인간을 인위적으로 고립시켜 파악해 왔는데, 하이데거는 그런 식으로 파악하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어떻게 개개인의 인간이 나름대로의 세계를 갖는지, 어떻게 그가 다른 존재자에 파묻혀 또는 다른 인간들과 더불어 실존하고 있는지를 이야기 한다.
하이데거는 인간을 주위 사물들이나 환경과 관계를 맺고 있는 '세계 내 존재'(In-der-Welt-sein)로 규정한다. 현존재는 '관련을 맺어가는 존재' 이외에는 다른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할 정도로 한편으로 자기 자신에 관계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자신을 넘어서 타자(他者)들과의 근원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우리가 이곳 저곳에 있다 할 때, 우리가 처해 있는 거기라는 세계는 인간이라는 현존재에게 그의 실존의 장소로서 속해 있다. 이 세계는 단순히 인간의 의식의 지평 속에 나타나는 객관적인 세계만이 아니라, 우리 인간이 거하는 장이며 활동의 무대이기도 하다. 이와 같이 세계는 인간활동의 영역으로, 이 활동의 주역인 현존재 자체가 이미 자리하고 있는 장소로서 인간존재와 구조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즉, 대상 세계 속의 사물들과 관계하며, 이웃들과 관계하며, 또 자기 자신에 관계하는 존재이다. 하이데거는 이 모든 인간의 행위 가운데 나타나는 관계를 넓은 의미의 관심(Sorge) 현상으로 파악한다.
먼저, 인간은 주위 환경 세계와의 관계에 있어서 '배려(配慮)적인 관심을 쏟고있는'(besorgend) 존재로 나타난다. 이 세계 속에서 인간은 일상적인 도구를 생산, 주문, 사용하는 등 계속해서 사물들과 관계 맺는다. 따라서 세계는 단순히 현존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실천의 대상으로 제공되는 도구적인 것이라는 성격을 지닌다. 다음으로, 인간은 이웃들과의 공동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고려(考慮)적인 관심을 쏟고 있는'(fürsorgend) 존재로 나타난다. 인간은 실질적인 사회를 구성하는 존재로서 상호간에 고려의 관계 가운데 있으며, 이 때의 고려적 관심은 인간 존재의 본질적이고 필연적인 구조를 말한다. 그리고, 인간은 자기 자신과의 관계 속에서 '관심을 쏟고 있는'(sorgend) 존재로 나타난다. 하이데거는 로마의 히기누스(Hyginus)의 쿠라(Cura) 우화를 인용하면서 관심이 존재적으로 볼 때 현존재의 가장 내적인 고유한 본질을 이루고 있음을 시간성과의 관계 속에서 밝히고 있다.
이렇듯 관심은 이미 인간 현존재의 근본 구조로 놓여 있다. 인간은 그의 특수적인 존재방식으로 말미암아 단순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의 존재를 비로소 이룩해 나가야만 하고, 그의 사실이 자기에게 질서지워져 있는 존재이다. 따라서 인간은 '존재해야 함'(das Zu-sein)으로 규정되는데 언제나 자기를 실현시켜 나가야 할 존재로서 독자적인 계획을 가진다. 여기서 현존재의 본질적인 관심 구조가 갖는 두 가지 의미가 나타난다. 즉 현존재가 세계 안에 던져져 얽매어 있다는 사실에 대한 관심과, 그 구속을 벗어나 스스로 계획하고자 하는 미래적인 존재 가능에 대한 관심이다. 현존재의 본질로 파악되는 관심 개념 속에는 현존재의 자기 계획, 시간성, 미래를 향한 계획이 다 포함되어 있다.
4. 죽음에의 존재로서의 인간
하이데거는 인간 현존재의 존재를 가능으로, 존재 가능으로 파악하고 있다. 가능이라는 것은 현재 만나고 있는 존재자로부터 항상 새롭게 얻어 내어, 자기 고유의 존재가능으로 만들기 위해 미리 앞에 가 보는 식으로 파악되어야 한다. 그러나 하나의 결정적인 점에서 이 가능이라는 것은 이미 결정되어 있다. 즉 현존재의 피할 수 없는 가능은 죽음인 것이다. 그러기에 현존재는 자기의 존재와의 관계에서 항상 이미 이러한 절대적인 현존재의 불가능이라는 가능에 관계하고 있다. 현존재가 그것으로써 자기의 존재 가능의 가능성을 붙잡고 있는 앞서 가 있음은 '죽음에로의 존재' 안에 가장 근원적인 구체성을 내보인다. 이 존재 가능의 건너뛸 수 없는 가능성이 죽음이라는 말은 곧 현존재는 자기 자신의 죽음과 관계를 맺지 않고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피투성(Geworfenheit)이라는 것도 현존재가 죽음 속에 내던져져 있음 이외의 다른 아무것도 아니다. 곧 현존재가 일정한 시간과 장소와 환경 아래 실존해야 한다는 현존재의 구속성을 뜻하는 것이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현존재는 우선 죽음으로 향한 자신의 고유한 존재를 피해서 은닉하면서 존재한다. 곧 일상적인 죽음에로의 존재는 하나의 끊임없는 죽음으로부터의 도피이다. 죽음에로의 존재는 오직 불안(不安) 속에서만 근원적으로 드러내어지고 있는 것이기에, 죽음으로부터의 도피는 죽음에 대한 끊이지 않는 안심이라는 성격을 띤다.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불안의 용기가 피어오르게 놔두지 않는다. 그러나 이 도피가 거기에서 피하려고 하는 그 '무엇으로부터'를 보여주면, 도망치고 있는 현존재가 어떻게 자신의 죽음을 이해하고 있는지를 드러내 보여줄 수 있게 될 것이다.
죽음으로부터의 끊임없는 도피 역시 그것과의 한 관계이다. 이러한 식의 특수한 죽음을 향한 존재 양식에서 현존재의 존재 이행의 한 특수한 양태가 유출되어 나오는데, 이것을 하이데거는 '비본래성'(非本來性)이라 칭한다. 반면, 죽음이 죽어가고 있는 개별 인간으로 만들듯이 죽음에 미리 가 봄으로써, 여기서 문제가 되는 그 존재 가능이 어느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각자의 고유한 존재 가능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아무도 다른 사람을 대신해서 그의 죽음을 죽어줄 수 없듯이, 아무도 다른 사람을 대신해서 그의 삶을, 존재를 살아 줄 수 없는 것이다. 죽음이 바로 내 자신의 죽음이듯이, 나의 삶 역시 내 자신의 고유한 삶인 것이다. 나는 죽음에 미리 앞서 가 보기로 결단함으로써, 나의 존재가능을 뚜렷하게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내 자신의 고유한 존재 가능으로 이행하는 것이다. 이렇게 현존재가 자기 자신의 고유한 존재를 이행하는 양태를 하이데거는 '본래성'(本來性)이라 칭한다. 죽음에 대한 결단을 가지고 미리 앞서 가 보는 것이 실존의 본래성을 위한 전제이다.
인간 안에서 그 인간을 특징짓고 있는 것으로 무한한 어떤 것, 절대적인 어떤 것, 필연적인 어떤 것을 찾았던 전통의 형이상학과는 다르게, 하이데거는 유한한 존재, 죽음을 향해 존재하고 있는 존재자, 개별자로서 상황에 얽매어 우연에 규정되고 있는 존재자로서의 인간 현존재를 부각시킨다. 죽음을 향한 존재, 죽음을 미리 앞서 가 보는 존재로서의 인간 현존재는 나면서부터 아무도 대신할 수도 피할 수도 없는 존재 가능으로서 죽음을 안고 존재에 내던져져 있다. 인간 현존재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죽음을 예기하면서 또 과거를 자기 속에 지니고 미래를 향하면서 현재 속에 살아가는 존재인 것이다.
5. 역사적 존재로서의 인간
하이데거는 인간 현존재의 한 구조 형식으로서 역사성(Geschichtlichkeit)을 말한다. 그는 종전의 철학의 관심이 객간적인 역사로 말한 것과는 반대로, 역사를 형성하는 인간이라는 현존재의 독특한 구조 형태인 역사성에 주목한다. 객관적인 역사 그 자체도 인간의 주관적인 역사성에로 환원되어야 할 성질의 것이다. 따라서 그가 이해하려는 역사 개념은 역사에 관한 과학이나 대상으로서의 역사가 아니다. 그는 현존재의 움직임 자체가 근본에 있어서 역사적이라고 한다. 이 현존재의 움직임은 단순히 현존하는 것들의 움직임이나 안간 밖의 움직임과는 구별되며, 현존재에 있어서만의 이러한 특수한 움직임을 '생기'(生起, Geschehen)라고 칭한다. 이러한 현존재의 생기구조가 역사성을 가능하게 한다. 그리고 현존재가 언제나 역사를 가지고 있고 또 가질 수 있는 것도 사실은 현존재가 이 역사성에 의해서 구성되어 있기에 그런 것이다.
그런데 인간의 주체적인 역사성은 현존재의 존재 구조인 시간성 속에 근거한다. 하이데거는 '히기누스의 우화'를 통해 먼저 인간의 일생이 염려(관심)의 지배 하에 있다는 것, 그리고 인간의 근원적인 존재 의미를 향하여 이러한 운명적인 심판을 내린 것이 사트룬(Satrun), 즉 시간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따라서 인간 현존재가 역사를 가질 수 있는 근거도, 자신이 역사적 존재로 불리워지는 것도 다름아닌 인간의 존재 의미가 시간적으로 규정됨으로 말미 암는다.
개인의 고유한 실존적인 시간성은 현존재가 불가피한 최종적 가능성인 죽음에 자기 자신을 내던짐으로써 온전하게 드러난다. 바로 이러한 고유한 시간성이 현존재에 있어서 고유한 역사성을 가능하게 한다. 그리고 이 역사성은 개별적인 인간이 그 속에서 살 공동체나 민족과의 연결을 필연적으로 전제한다. 인간은 세계 내 존재일 수 밖에 없으며, 따라서 타인과의 공존은 본질적인 것으로 자기의 사건은 곧 공존의 사건이며 이것은 하나의 역운(Geschick)으로 규정된다. 이렇게 역사성은 타인과의 공동 운명체의 성질을 띠기에 인간이 물려받고 있는 유산 또한 필연적으로 공동적인 유산이 된다. 인간은 하나의 공동적인 역사에 의하여 결합된 그의 이웃과 더불어 이미 공동적인 유산 속에 놓여 있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공동적인 유산 속에 놓여 있는 인간의 역사성 속에 역사의 진보나 발전이 아닌 유산의 전승을 통한 인간의 자기 충실성을 보려고 한다. 즉, 실존적 인간은 이 유산 속에 담겨 있는 정신적인 내용들을 자기화하여 그것들과 동화하려고 노력함으로써 변화하는 역사 안에서 최후적이고 확고한 입장을 획득하게 된다. 따라서 현존재의 역사성 속에는 유산 속에 면면이 이어 오는 실존적인 가능성을 각각의 현존재의 마음 속에 새롭게 실현시키는 방법이 요구되는데 그것은 '반복'이다. 그런데 이 반복은 과거의 것을 다시 가져 온다거나 현재를 앞질러 간 것에 다시 매어 두는 것은 아니며, 그것은 어떤 결단된 자기 계획으로부터 나온다.
하이데거에 있어서 인간 현존재의 역사성은 시간성에서처럼 미래 지향적이다. 오직 미래 만이 현존재의 역사성을 드러낸다. 미래는 본원적이고 본래적인 시간성의 근원 현상으로, 이 미래는 현존재의 존재를 성취할 수 있는 가능성이면서도, 불가피한 죽음이라는 최종적인 가능성이 그것을 뒷받침한다. 그러므로 미래는 끝이 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유한성으로 이해된다. 이것은 죽음에로의 본래적인 존재, 즉 시간성의 종말이 현존재의 역사성의 숨은 근거임을 뜻하는 것이며, 결국 역사는 인간의 유한성(有限性)이 표현된 것으로 이해된다.
이제까지의 논의는 하이데거의 기초존재론에 드러난 인간에 초점을 마추어 본 것이다. 인간은 실존의 방식으로 존재하며, 세계 내 존재로서 자신 나아가 세계 안에서 만나는 다른 존재자들에 부단한 관심을 유지하면서, 죽음에로의 존재로서 역사적 존재로서 존재하고 있음을 살폈다. 그러나 『존재와 시간』에서 근원적으로 논의되었던 것은 인간에 대해서가 아니고 존재 일반의 의미에 대한 것이었음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인간의 유한한 실존이란 이 목적에 이르는 통과점으로서만 고찰되었다는 점이다. 분명히 시간이 인간 현존재의 이해가 행해지는 지평으로 입증되고 있다.
그러나 기초존재론이 견지하고 있는 물음에서, 우리는 존재론 뿐만 아니라 인간학의 측면이 한데 어우러저 있음을 본다. 때문에 거기서 인간학적 측면만을 따로 떼어 논의한다는 것 자체를 어렵게 하는 것도 사실이다. 어쨌든 존재에 대한 연구는 인간에 대한 연구로부터 분리되지 않는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하이데거는 『사유란 무엇인가?』에서 "인간의 본질에 대한 모든 철학적 학설은 자기 내적으로 이미 존재자의 존재에 관한 학설이며, 존재에 관한 모든 학설은 자기 내적으로 이미 인간의 본질에 관한 학설"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물론 현존재 분석에서 다뤄진 인간 존재론이 던져주는 인간상은 제한적인 것이어서, 오늘날의 철학적 인간학이 일구어 놓은 풍부한 성과들에 견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철학적 인간학은 하이데거가 마련한 존재론적 인간 해명의 토대 위에서 풍요로워질 수 있었다는 점도 간과돼서는 안될 것이다. 과학과 기술이 세계를 지배하고 인간이 물화되는 고향 상실의 위기에 처해있는 오늘날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 부단한 관심을 갖고 스스로 묻는자라는 것, 인간은 한갓된 사물존재자로 읽혀져서는 안된다는 것, 더욱이 고립된 무세계적인 주관으로 취급되어서는 안된다는 하이데거의 가르침은 여전히 유효한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하여 겔벤(M. Gelven)의 다음과 말은 음미해 볼만하다: "....하이데거의 인간은 그의 철학과 마찬가지로 근대 시대의 근본적 혁명을 반영하고 있다. 이 인간은 자기의 고유한 가능태들을 날카롭게 인지하고, 그에게 있어서 자신의 본래성에 대한 책임을 직접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짐지우고 있는 바로 그런 인간이다. 그리고 이 인간은 비본래성, 기계에 의한 불구화, 그리고 자기 한계에 대한 적절한 이해의 결여로 인해 자신의 영혼이 질식될 수 있는 인간이기도 하다. 하이데거의 인간은 도스토예프스키, 토마스 만, 헤르만 헤세, 니체, 그리고 심지어 싸르트르의 탐구에서 추구되었던 인간이다. 그것은 오늘날의 젊은이들이 친근감을 느끼는 인간, 즉 자신의 본질이 기술 관료의 교묘한 술책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그런 인간이다. 그렇지만 이 인간은 감정에서 또는 어떤 '원인'에서 그의 근거를 발견하는 그런 인간이 아니다. 그의 가장 내밀하고 가장 가치있는 특성은 심오하고 교육된 이성을 통한 철학적 탐구에 의해 폭로될 수 있다. 따라서 『존재와 시간』 바로 그 연구란 인간이 현존하는 바 -- 자신의 존재 방식에 관해 관심 쏟는 존재자 -- 의 일부인 것이다."
독자 의견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