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바르트 - 계시관
칼 바르트 - 계시관
자료출처:http://kr.blog.yahoo.com/visions72000/1604
1) 그의 대작 「교회 교의학」(Church Dogmatics)은 크게 4권으로 (= 세밀하게 나누면 13권이 된다 ) 되어 있는데 (= 원래 5권을 쓰기로 했으나 그의 생전에 완성하지 못했다 ) 그 중 첫 권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교리”이다. 그의 신학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 말씀 )의 신학” 혹은 “( 계시 )의 신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말씀” 혹은 “계시”의 초월적 개념으로 ‘신학’의 가능성을 다시 확립시키려 했던 것이다.
2) 구 자유주의(old liberalism)는 신학이 아니라 문화적 ( 인간 )학에 불과하다고 믿었던 바르트에게는 계시야 말로 “초월적 하나님”을 회복시키는 유일한 길이었다. 사실 그의 계시관은 단지 성경관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의 계시관이 바로 신론이요 기독론이요 성령론이다. 그러므로 바르트 신학의 핵심은 바로 그의 ( 계시 )관이라고 할 수 있다.
3) 그러면 바르트가 말하는 계시란 무엇인가? 우리가 믿는 것과 같이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신을 나타내고 그의 뜻을 알려주시는 것”인가? ( 그렇지 않다 ). 물론 “계시”라는 말 자체의 의미가 하나님의 나타나심을 뜻하기 때문에, 이런 형식적인 의미로는 바르트가 말하는 계시라는 단어와 우리가 말하는 계시라는 ( 단어 )는 같다고 하겠다.
4) 그러나 그의 계시관은 우리의 계시관과 다르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한마디로 바르트의 계시는 “초월적 하나님”의 “전적으로 나타나심”(= wholly revealed )을 의미한다. 그는 성부를 Revealer, 성자를 Revealation, 성령을 Revealed 로 표현한다. 이는 완전한 양태론(= modalism )적 주장이다.
5) 바르트에게는 인간과 질적으로 영원한 차이를 가지신 하나님이 어떤 ( 역사 )적인(= 달력의 의미로 ) 사건이나 인간의 ( 언어 ) 속에 나타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이것은 다시금 신학을 ( 인간 )학으로 만드는 결과라고 바르트는 믿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믿고 있는 것처럼 “신성이 그의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된다”든지 “하나님이 인간의 ( 언어 )로(= 성경 ) 자신을 ( 계시 )”했다고 믿는 것이 아니다.
6) 바르트가 하나님은 전적으로 자신을 나타내셨다고 말하는 의미는, 하나님이 ( 초월 )성을 잃지 않고 “사건”(= event )으로 자신을 나타내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사건의 의미는 ( 역사 )적 사건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계시의 행위”를 의미한다. 마치 키에르케고르가 주장했듯이 영원한 진리가 인간에게 다가온 어떤 역설적 행위를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믿고 있듯이 “하나님께서 그의 종들을 통하여 ( 언어 )로 계시를 주셨다”라고 한다면, 그런 하나님은 “( 초월 )적 하나님”이 되지 못한다고 바르트는 믿고 있는 것이다.
7) 따라서 그 초월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순간적 나타나심(= 사건 혹은 행위 )”으로 하나님이 계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르트는 계시는 인간의 언어와 동일시 할 수 없고 ( 믿음 )이 반영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런 말들도 참으로 애매한 것이다. 언어로 기록된 성경은 계시가 ( 아니라 )고 말해놓고는 그 계시를 알려면 믿음이
( 있어 )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 한국교회의 많은 목회자들과 소위 성령사역자들이 바르트의 이런 신학사상을 그 의미를 알지도 못한 채 사용하고 있다.
8) 어쨌든 바르트는 사건으로서의 계시는 어떤 역사적 형태 혹은 방편을 동반한다고 주장한다. 즉 계시의 세 가지 방편으로 그는 “( 그리스도, 성경, 설교 )”를 말한다. 계시가 단지 추상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 역사 )적 형태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런 표현에서 많은 사람들은 마치 바르트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있고,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 선포로 정의하며 그 위상을 높였다고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9) 그러나 바르트는 계시란 반드시 역사적이지만 역사적인 것이 하나님의 계시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계시가 역사의 ( 사건 )으로 나타나지만 그 사건을 통해서 계시를 온전히 알 수 ( 없다 )는 것이다. 이 말도 참으로 애매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우리는 조심해야 한다. “계시가 역사적”이라는 말에는 우리가 동의하지만, “역사적인 것은 하나님의 계시가 될 수 없다”는 것은 우리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계시가 역사적 ( 성경 )에 나타났다고 그는 말하지만 그 사건을 통해서 ( 계시 )를 볼 수 없다는 그의 말은 정말 까다롭기만 하다.
10) 따라서 그는 우리와 같은 성경관을 가진 것으로 볼 수 없는 것이다. 사실 바르트에게 있어서 역사적 기록인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가 될 수 ( 없다 )”는 것이 더 핵심적인 것이다. 또한 바르트가 계시의 세 가지 방편 중 하나로 “설교”를 말할 때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 선포”로 보는 것이 아니라 “설교”를 통해서도 하나님의 초월적 계시가 주어짐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성경과 설교를 액면 그대로 ( 동일 )시하는 것이다. 이는 설교의 ( 권위 )를 세운 것이 아니라 성경을 설교 정도로 ( 추락 )시킨 것이다.
11) 그러므로 바르트가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 이다 )”라고 주장할 때 그 “이다”는 우리가 믿는 식의 “이다”가 아님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오히려 그 말은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순간적으로 ( 된다 )(= becomes )”로 이해해야 한다. 즉 바르트는 성경을 ( 무오 )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는 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을 죽은 말씀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초월성을 잃어버린다는 것이다.
12) 그래서 바르트는 성경과 계시를 “동일화” 함에 있어서 그것은 ( 직접 )적 동일이 아니라 ( 간접 )적 동일인 것이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동일시하는 것도 직접적 동일이 아니라 간접적 동일이다 ) 이런 의미에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쉬운 예를 들자면 자동차를 사는 그 순간 그 차는 이미 중고차라서 완전한 신차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계속 신차의 상태를 유지하려면 믿음에 의해서 그냥 도약하면 된다는 것이다. 정말로 치열하고 리얼한 실존주의이다.
13) 또한 바르트도 성경의 영감(= inspiration )을 이야기 한다. 그러나 이 영감은 전통적 기독교가 믿는 그러한 영감이 아니다. 다만 초월적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함에 있어서 불완전한 인간의 언어를 ( 사용 )하셨다는 그 자체가 하나님의 ( 영감 )이라고 믿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 된 말씀이다”라는 바르트의 주장을 듣고 그의 성경관이 복음주의적이라고 ( 오해 )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의 성경관은 다른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성경관보다 더 ( 나을 ) 것도 없는 것이다.
14) 바르트의 계시관에 대해 다시 요약 설명하자면 그의 “계시”는 한마디로 그의 “초월적 하나님”이 어떤 인간적인 요소(= 언어, 시간적 역사를 포함하여 )를 통하지 않고 역사속에 바로 나타나는 방편인 것이다. 그래서 바르트는 계시는 “위에서부터 바로 내려지는”(Senkrecht von Oben)것으로 말한다. 또한 그래서 계시를 하나님의 “전적 나타남”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전적으로 나타나지 않으면 어떤 인간의 언어나 사상 같은 매개체가 중간에 개입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15) 다시 말하면 자신 안에 스스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이 자신의 존재로부터 따로 인간에게 ( 계시 )를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 전적 )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 말은 하나님은 계시 ( 사건 )과 ( 동일 )시된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우리가 믿는 바와 같이 하나님의 존재의 권위와 그의 계시의 권위가 동등하다는 것이 아니라, 계시와 하나님의 실제적 ( 존재 )가 동일시되는 것이다.
16) 이는 오늘 자신의 ( 경험 )과 ( 감정 )에 말씀이 부딪쳐 와야만 ( 진짜 ) 말씀을 만난 것이고 하나님을 만난 것이라는 감정적 은사주의자들의 주장과 동일한 것이다. 즉 아무리 성경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나에게 어떤 ( 실제 )가 되지 않는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주장이다. 그런데 이런 주장에 많은 사람들이 심정적으로 경험적으로 동의한다. 즉 자신의 경험을 ( 계시 )로 만드는데 익숙해져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오늘날 많은 간증들과 ( 큐티 ) 등이 바르트의 영향 아래서 무분별하게 행해지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다.
자료출처:http://kr.blog.yahoo.com/visions72000/1604
1) 그의 대작 「교회 교의학」(Church Dogmatics)은 크게 4권으로 (= 세밀하게 나누면 13권이 된다 ) 되어 있는데 (= 원래 5권을 쓰기로 했으나 그의 생전에 완성하지 못했다 ) 그 중 첫 권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교리”이다. 그의 신학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 말씀 )의 신학” 혹은 “( 계시 )의 신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말씀” 혹은 “계시”의 초월적 개념으로 ‘신학’의 가능성을 다시 확립시키려 했던 것이다.
2) 구 자유주의(old liberalism)는 신학이 아니라 문화적 ( 인간 )학에 불과하다고 믿었던 바르트에게는 계시야 말로 “초월적 하나님”을 회복시키는 유일한 길이었다. 사실 그의 계시관은 단지 성경관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의 계시관이 바로 신론이요 기독론이요 성령론이다. 그러므로 바르트 신학의 핵심은 바로 그의 ( 계시 )관이라고 할 수 있다.
3) 그러면 바르트가 말하는 계시란 무엇인가? 우리가 믿는 것과 같이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신을 나타내고 그의 뜻을 알려주시는 것”인가? ( 그렇지 않다 ). 물론 “계시”라는 말 자체의 의미가 하나님의 나타나심을 뜻하기 때문에, 이런 형식적인 의미로는 바르트가 말하는 계시라는 단어와 우리가 말하는 계시라는 ( 단어 )는 같다고 하겠다.
4) 그러나 그의 계시관은 우리의 계시관과 다르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한마디로 바르트의 계시는 “초월적 하나님”의 “전적으로 나타나심”(= wholly revealed )을 의미한다. 그는 성부를 Revealer, 성자를 Revealation, 성령을 Revealed 로 표현한다. 이는 완전한 양태론(= modalism )적 주장이다.
5) 바르트에게는 인간과 질적으로 영원한 차이를 가지신 하나님이 어떤 ( 역사 )적인(= 달력의 의미로 ) 사건이나 인간의 ( 언어 ) 속에 나타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이것은 다시금 신학을 ( 인간 )학으로 만드는 결과라고 바르트는 믿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믿고 있는 것처럼 “신성이 그의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된다”든지 “하나님이 인간의 ( 언어 )로(= 성경 ) 자신을 ( 계시 )”했다고 믿는 것이 아니다.
6) 바르트가 하나님은 전적으로 자신을 나타내셨다고 말하는 의미는, 하나님이 ( 초월 )성을 잃지 않고 “사건”(= event )으로 자신을 나타내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사건의 의미는 ( 역사 )적 사건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계시의 행위”를 의미한다. 마치 키에르케고르가 주장했듯이 영원한 진리가 인간에게 다가온 어떤 역설적 행위를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믿고 있듯이 “하나님께서 그의 종들을 통하여 ( 언어 )로 계시를 주셨다”라고 한다면, 그런 하나님은 “( 초월 )적 하나님”이 되지 못한다고 바르트는 믿고 있는 것이다.
7) 따라서 그 초월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순간적 나타나심(= 사건 혹은 행위 )”으로 하나님이 계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르트는 계시는 인간의 언어와 동일시 할 수 없고 ( 믿음 )이 반영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런 말들도 참으로 애매한 것이다. 언어로 기록된 성경은 계시가 ( 아니라 )고 말해놓고는 그 계시를 알려면 믿음이
( 있어 )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 한국교회의 많은 목회자들과 소위 성령사역자들이 바르트의 이런 신학사상을 그 의미를 알지도 못한 채 사용하고 있다.
8) 어쨌든 바르트는 사건으로서의 계시는 어떤 역사적 형태 혹은 방편을 동반한다고 주장한다. 즉 계시의 세 가지 방편으로 그는 “( 그리스도, 성경, 설교 )”를 말한다. 계시가 단지 추상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 역사 )적 형태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런 표현에서 많은 사람들은 마치 바르트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있고,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 선포로 정의하며 그 위상을 높였다고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9) 그러나 바르트는 계시란 반드시 역사적이지만 역사적인 것이 하나님의 계시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계시가 역사의 ( 사건 )으로 나타나지만 그 사건을 통해서 계시를 온전히 알 수 ( 없다 )는 것이다. 이 말도 참으로 애매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우리는 조심해야 한다. “계시가 역사적”이라는 말에는 우리가 동의하지만, “역사적인 것은 하나님의 계시가 될 수 없다”는 것은 우리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계시가 역사적 ( 성경 )에 나타났다고 그는 말하지만 그 사건을 통해서 ( 계시 )를 볼 수 없다는 그의 말은 정말 까다롭기만 하다.
10) 따라서 그는 우리와 같은 성경관을 가진 것으로 볼 수 없는 것이다. 사실 바르트에게 있어서 역사적 기록인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가 될 수 ( 없다 )”는 것이 더 핵심적인 것이다. 또한 바르트가 계시의 세 가지 방편 중 하나로 “설교”를 말할 때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 선포”로 보는 것이 아니라 “설교”를 통해서도 하나님의 초월적 계시가 주어짐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성경과 설교를 액면 그대로 ( 동일 )시하는 것이다. 이는 설교의 ( 권위 )를 세운 것이 아니라 성경을 설교 정도로 ( 추락 )시킨 것이다.
11) 그러므로 바르트가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 이다 )”라고 주장할 때 그 “이다”는 우리가 믿는 식의 “이다”가 아님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오히려 그 말은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순간적으로 ( 된다 )(= becomes )”로 이해해야 한다. 즉 바르트는 성경을 ( 무오 )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는 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을 죽은 말씀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초월성을 잃어버린다는 것이다.
12) 그래서 바르트는 성경과 계시를 “동일화” 함에 있어서 그것은 ( 직접 )적 동일이 아니라 ( 간접 )적 동일인 것이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동일시하는 것도 직접적 동일이 아니라 간접적 동일이다 ) 이런 의미에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쉬운 예를 들자면 자동차를 사는 그 순간 그 차는 이미 중고차라서 완전한 신차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계속 신차의 상태를 유지하려면 믿음에 의해서 그냥 도약하면 된다는 것이다. 정말로 치열하고 리얼한 실존주의이다.
13) 또한 바르트도 성경의 영감(= inspiration )을 이야기 한다. 그러나 이 영감은 전통적 기독교가 믿는 그러한 영감이 아니다. 다만 초월적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함에 있어서 불완전한 인간의 언어를 ( 사용 )하셨다는 그 자체가 하나님의 ( 영감 )이라고 믿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 된 말씀이다”라는 바르트의 주장을 듣고 그의 성경관이 복음주의적이라고 ( 오해 )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의 성경관은 다른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성경관보다 더 ( 나을 ) 것도 없는 것이다.
14) 바르트의 계시관에 대해 다시 요약 설명하자면 그의 “계시”는 한마디로 그의 “초월적 하나님”이 어떤 인간적인 요소(= 언어, 시간적 역사를 포함하여 )를 통하지 않고 역사속에 바로 나타나는 방편인 것이다. 그래서 바르트는 계시는 “위에서부터 바로 내려지는”(Senkrecht von Oben)것으로 말한다. 또한 그래서 계시를 하나님의 “전적 나타남”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전적으로 나타나지 않으면 어떤 인간의 언어나 사상 같은 매개체가 중간에 개입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15) 다시 말하면 자신 안에 스스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이 자신의 존재로부터 따로 인간에게 ( 계시 )를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 전적 )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 말은 하나님은 계시 ( 사건 )과 ( 동일 )시된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우리가 믿는 바와 같이 하나님의 존재의 권위와 그의 계시의 권위가 동등하다는 것이 아니라, 계시와 하나님의 실제적 ( 존재 )가 동일시되는 것이다.
16) 이는 오늘 자신의 ( 경험 )과 ( 감정 )에 말씀이 부딪쳐 와야만 ( 진짜 ) 말씀을 만난 것이고 하나님을 만난 것이라는 감정적 은사주의자들의 주장과 동일한 것이다. 즉 아무리 성경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나에게 어떤 ( 실제 )가 되지 않는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주장이다. 그런데 이런 주장에 많은 사람들이 심정적으로 경험적으로 동의한다. 즉 자신의 경험을 ( 계시 )로 만드는데 익숙해져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오늘날 많은 간증들과 ( 큐티 ) 등이 바르트의 영향 아래서 무분별하게 행해지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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