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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거의 ‘실존’과 ‘존재론적 차이’

하이데거의 ‘실존’과 ‘존재론적 차이’
http://blog.naver.com/artnstudy/110079688304

 

▲하이데거의 철학에서 중요한 개념 - Dasein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두 가지만 알면 하이데거는 어렵지 않습니다. 하나는 Dasein, 다른 하나는 “존재와 존재자의 존재론적 차이”입니다. Dasein과 같은 경우 현존재라고 흔히 번역을 하는데, 그리 잘 된 거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영어로는 “there is”라고 번역하면 된다는 것을 알면 됩니다. “컵이 있다.”고 할 때, “There is a cup”이라고 하지요. 나 자신도 “There is”인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산(山)길을 걸어가다가 어느 순간 폭포를 보았을 때, “폭포다!”라고 하죠. 내가 거기에 있기 때문에 폭포가 내게 오는 것이죠. 나라는 존재는 그런 것입니다. 우리는 “there is”를 가능하게 하는 존재입니다. 여러분 각자 각자가 존재하기 때문에 세계가 펼쳐진다는 느낌을 받으면 됩니다.


존재와 존재자에 대하여

하이데거가 좋아하는 오솔길이라는 테마가 있습니다. 나무가 자라는 사이에 좁은 길입니다. 나무가 빽빽해서 길이 굽어있는 것은 보이지 않습니다. 즉 there is가 붕괴되는 공간이죠. 그런 공간을 가다가 갑자기 공터가 열립니다. 거기 꽃이 하나 피어있어요. 너무나 예쁜 꽃입니다. 그렇게 there is가 환히 열려있는 공간, 그 느낌이 ‘존재’에 대한 느낌입니다. 그리고 그 꽃은 ‘존재자’입니다.

 


그 다음 두 번째 이야기가 도출이 됩니다. 환히 열린 공간이 꽃을 품고 나에게 건너옵니다. 과학적으로는 우리가 그 곳으로 간 것이지만 하이데거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공간의 이미지는 아닙니다. 하이데거는 Dasein으로서의 인간은 ‘함께 속해 있다.’라고 합니다.

암흑의 터널 속에는 there is라는 것이 있을 수 없죠. 그러다 갑자기 환히 트이면서, 있음이 ‘나’와 같이 온다는 겁니다. 말하자면 “존재의 품어주는 건너옴.” 그 강도의 느낌을
“존재의 소리를 듣는 것.”이라고 합니다. 동시에 ‘나’도 there is로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실존주의? 하이데거의 ‘실존’과 ‘존재론적 차이’

실존주의 할 때, existence를 단지 실존(實存)이라고 번역하면 안 됩니다. 오히려 탈(脫)존이라고 번역해야 합니다. 바깥으로 존재함. 이 개념은 하이데거에서부터 메를로 퐁티(Maurice Merleau-Ponty, 1908~1961)까지 모두 공유하는 것입니다. 바깥으로 터 있는 존재. 바깥으로 있는 것이 바로 Dasein입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고립된 것이 아니라 트여있는 존재라는 것이 핵심적인 개념입니다.


그래서 하이데거가 이해하기 힘든 측면이 있습니다. 말장난 같기도 하지만 이 느낌에서 계속 반복됩니다. “존재의 품어주는 건너옴.”과 “존재자의 품어지는 도래함.” 이 두 가지를 구별하는 것이 존재론적 차이의 구별입니다.


▲하이데거 말하다. “지금까지의 형이상학은 존재를 망각한 것.”

한 개인이 있습니다. 그런데 개인은 사람입니다. 그 위로 올라가면 사람은 동물에 포함됩니다. 개도 그렇게 올라가면 동물이라는 범주에 포함됩니다. 꽃이 있고, 풀이 있는데 그것들은 식물입니다. 이렇게 범주를 올라갈 수 있죠. 계속 올라가서 가장 위에 있는 것이 ‘존재’입니다. 이러한 도식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도식입니다. 존재란, “내포는 하나인데 외연은 무한대.”인 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다 ‘존재’에 해당하죠.

 


거꾸로 한 개인은 “내포는 무한대이고 외연은 하나.”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외연이란 논리학에서 ‘지시대상’을 말합니다. 내포는 ‘의미’이고. 그런데 이 관점은 ‘존재’가 망각된 것입니다. 존재가 개인의 속성처럼 이해되기 때문입니다. 개인은 사람이면서, 동물이면서 존재다? 존재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이데거는 시인들을 좋아합니다. 시인들은 존재의 소리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도식에서는 그런 존재의 소리가 없죠. 그래서 하이데거는 자기 앞의 모든 철학의 역사가 ‘존재 망각의 역사’라고 간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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