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바르트 서론
칼바르트 서론
자유주의 신학 소고
자료춡처 http://kr.blog.yahoo.com/visions72000/1603
칼 바르트 (Karl Barth, 1886-1968)
서 론
1) 바르트의 신학은 그 ( 까다로움 )과 ( 애매함 )으로 인해서 많은 복음주의자들이 그를 자기 ( 진영 )의 사람으로 생각해 왔다. 아마도 슐라이어마허와 리츨로 시작되었던 구 자유주의(= old liberalism )가 정통보수 신학에서 너무도 벗어났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바르트 신학을 복음적으로 생각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2) 그러나 분명한 것은 바르트 신학은 결코 보수-개혁 주의 신학과 맥을 같이 하고 있지 않을 뿐 아니라 ( 독소 )적 요소가 있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바르트 신학은 ( 비 )성경적 신학이며 칸트, 헤겔, 키에르케고르 같은 철학자들의 사상을 기초로 나름대로 발전시킨 것이다.
3) 물론 당시 바르트가 처했던 상황을 감안하면 동정적 이해를 할 수도 있다. 너무도 자유롭고 인본주의적인 신학에 대항하여 기독교적 신앙의 회복, 성경을 근거로 한 설교의 가능성과 필요성, 초월적 하나님의 위상, 예수 그리스도의 중요성 등을 확립하고자 했던 그의 ( 학문 )적 업적은 크다고 하겠다.
4) 그러나 바른 신학은 인간이 처한 ( 상황 )에서 시작하는 것도 아니요, 다른 사람들의 입장을 생각하여 발전시키는 것도 아니요, 학문적 성취를 위한 것도 아니다. 바른 신학은 하나님의 ( 계시 )로부터 출발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 해석 )하고 이해하는 데서 출발하는 것이다. 그러나 바르트는 성경 자체에서 시작했다기보다는 초월적 기독교를 회복하고픈 마음에 철학적 조명 아래에서 “나름대로의 계시 개념” 개념을 가지고 그의 신학을 시작했던 것이다.
5) 바르트가 자유주의 신학과 급진적인 결별을 하게 된 이유를 몇 가지로 이야기하는데 첫째 이유로 그는 자펜빌의 교인들에게 설교함에 있어서 자유주의 신학이 쓸모없음을 발견했다. 신자들은 감사하게도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대부분이 ( 보수 )적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성경의 ( 무오 )성을 믿고 성경의 계시가 성령으로 ( 영감 ) 되었음을 믿는다. 결과적으로 바르트는 성경을 깊이 ( 연구 )하기 시작했고 자유주의의 철학적 내용이 아니라 성경 안에 있는 초월적 말씀 안에서 그의 교인들을 위한 적절한 설교 내용을 찾게 되었다.
6) 오늘 우리나라의 감신이나 한신 그리고 장신의 신학은 자유주의에 물들어있지만(= 물론 그들은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 그들도 졸업을 하고 목사 안수를 받고나면 자기들의 신학으로 설교를 하다가는 ( 보수 )적 믿음을 견지하고 있는 교인들과 교회로부터 쫓겨나게 될 것을 알고 있다. 따라서 그들의 목회와 설교는 그들이 학교에서 배우고 지지했던 신학과는 다르게 ( 보수 )적으로 한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신학을 하고 목회를 하는 지 알 수 없을 정도이다.
7) 둘째 이유로, 1914년 카이저 빌헬름의 전쟁 정책을 지지하는 93인 독일 지식인들이 낸 지지 성명에 자신이 존경하던 은사들의 이름이 있는 것을 보고 그들이 전쟁의 이데올로기와 타협을 한다는 것은 그들의 자유주의 신학에 어떤 문제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때부터 바르트는 ( 로마서 주석 )을 쓰기 시작했고 그의 자유주의 ( 비판 )은 큰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이 책에서 그는 성경 연구에 적용된 역사-비평도 옳고 축자영감설도 옳다고 말하며 그 둘 중 하나를 택하라 한다면 후자를 택하겠다고 했다.
8) 그는 자유주의 신학이 사람들로 하여금 복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케 하는, 즉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과 전혀 다른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들이 그들 스스로의 힘으로 예기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메시지로 인정하기는커녕, 복음을 하나의 종교적 메시지로 바꾸어 인간들에게 자신들이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결과가 되었다고 비판하였다. 이것을 다르게 말하면 그동안의 신학을 “아래로부터 위로”라고 한다면 바르트는 “위로부터 아래로”의 신학을 발전시키려 했다. 하나님의 초월, 복음, 영원, 구원 등은 인간의 보편적 경험이나 이성으로부터 세워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를 통하여 오는 것이므로 순종함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한다. 일견 현재 개혁주의 교회가 쓰고 있는 용어와 동일하게 보인다.
9) 이런 바르트의 신학을 “변증법적 신학” 혹은 “위기(= 심판 )의 신학”이라고 한다. “변증법적”이라는 말은 헤겔보다는 키에르케고르의 철학적 방법을 답습한 것을 의미한다. 인간의 ( 죄성 )과 하나님의 전적 ( 타자성 ) 때문에 하나님의 진리와 인간의 생각이 합리적인 종합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 자기 계시 )의 역설적 진리들은 유한한 인간의 ( 지성 )으로는 신앙의 도약을 통해서만 포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10) 여기서 도약이란 우리가 말하는 성장이나 성숙의 의미가 아니라 실존적 철학으로서의 추상적 개념이다. 즉 ( 그냥 )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름만 있는 유명론에(= nominalism ) 불과한 것이다. 즉 바르트는 키에르케고르가 말하는 “시간과 영원 사이의 무한한 질적 차이”의 개념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이는 플라톤 이래로 전수되어 온 헬라철학의 ( 이원 )론이라고 할 수 있다.
11) 그는 로마서 주석으로 인해 신학적 인정을 받고 1921년에 독일 괴팅겐대학교의 신학교수로 가게 된다. 거기서 리츨학파들과 심각한 갈등을 이루었고, 그는 복음이 직면한 최대의 위험은 그것이 거부되는 것이 아니라, 순순히 받아들여지지만 또 하나의 인간 이성과 문화의 ( 소유 )물로 전락되어 아무런 변화도 일으키지 않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바르트는 뮌스터 대학교로 옮겨 5년을 봉직하다가 1930년 본 대학으로 옮겼다. 거기서 그의 신학의 작은 변화가 오기 시작했다. 자유주의에 대한 거부를 포기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지난 10년 동안 천명하였던 “아니오” 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예”를 더 강조하기 시작했다.
11) 그는 조직신학을 처음에 저술하기를 꺼려했다. 그 이유는 그는 어떤 인간적 사상체계에도 ( 의존 )하지 않는, 절대적으로 신학적이고 그러므로 전적으로 성경적인 신학을 창출하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인간이 가지는 신앙의 ( 주관 )성보다는 하나님의 계시의 ( 객관 )성을 강조하기를 원했다. 기독교 신학이 냉정한 과학이 될 수 없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객관적 자기 계시는 ( 은혜 )와 ( 믿음 )에 의해서만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자기계시라는 범위 안에서 하나님에 대한 ( 지식 )이 가능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12) 따라서 바르트의 신학적 탐구는 오늘 복음주의자들의 견해와 ( 일치 )하는 듯하다. 그러나 조금만 주의 깊게 살펴보면 바르트가 ( 실존 )주의 철학을 근거로 한 ( 유명론 )적 신학을 펼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즉 차라리 "나는 성경을 믿지 않는다"라고 말하면 위험하지 않다. 문제는 "성경과 계시를 믿는다고 말하는 듯한" 그의 신학적 태도이다. 여기에 많은 사람들이 미혹되었고 지금도 한국교회는 그의 신학적 ( 영향 )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자유주의 신학 소고
자료춡처 http://kr.blog.yahoo.com/visions72000/1603
칼 바르트 (Karl Barth, 1886-1968)
서 론
1) 바르트의 신학은 그 ( 까다로움 )과 ( 애매함 )으로 인해서 많은 복음주의자들이 그를 자기 ( 진영 )의 사람으로 생각해 왔다. 아마도 슐라이어마허와 리츨로 시작되었던 구 자유주의(= old liberalism )가 정통보수 신학에서 너무도 벗어났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바르트 신학을 복음적으로 생각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2) 그러나 분명한 것은 바르트 신학은 결코 보수-개혁 주의 신학과 맥을 같이 하고 있지 않을 뿐 아니라 ( 독소 )적 요소가 있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바르트 신학은 ( 비 )성경적 신학이며 칸트, 헤겔, 키에르케고르 같은 철학자들의 사상을 기초로 나름대로 발전시킨 것이다.
3) 물론 당시 바르트가 처했던 상황을 감안하면 동정적 이해를 할 수도 있다. 너무도 자유롭고 인본주의적인 신학에 대항하여 기독교적 신앙의 회복, 성경을 근거로 한 설교의 가능성과 필요성, 초월적 하나님의 위상, 예수 그리스도의 중요성 등을 확립하고자 했던 그의 ( 학문 )적 업적은 크다고 하겠다.
4) 그러나 바른 신학은 인간이 처한 ( 상황 )에서 시작하는 것도 아니요, 다른 사람들의 입장을 생각하여 발전시키는 것도 아니요, 학문적 성취를 위한 것도 아니다. 바른 신학은 하나님의 ( 계시 )로부터 출발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 해석 )하고 이해하는 데서 출발하는 것이다. 그러나 바르트는 성경 자체에서 시작했다기보다는 초월적 기독교를 회복하고픈 마음에 철학적 조명 아래에서 “나름대로의 계시 개념” 개념을 가지고 그의 신학을 시작했던 것이다.
5) 바르트가 자유주의 신학과 급진적인 결별을 하게 된 이유를 몇 가지로 이야기하는데 첫째 이유로 그는 자펜빌의 교인들에게 설교함에 있어서 자유주의 신학이 쓸모없음을 발견했다. 신자들은 감사하게도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대부분이 ( 보수 )적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성경의 ( 무오 )성을 믿고 성경의 계시가 성령으로 ( 영감 ) 되었음을 믿는다. 결과적으로 바르트는 성경을 깊이 ( 연구 )하기 시작했고 자유주의의 철학적 내용이 아니라 성경 안에 있는 초월적 말씀 안에서 그의 교인들을 위한 적절한 설교 내용을 찾게 되었다.
6) 오늘 우리나라의 감신이나 한신 그리고 장신의 신학은 자유주의에 물들어있지만(= 물론 그들은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 그들도 졸업을 하고 목사 안수를 받고나면 자기들의 신학으로 설교를 하다가는 ( 보수 )적 믿음을 견지하고 있는 교인들과 교회로부터 쫓겨나게 될 것을 알고 있다. 따라서 그들의 목회와 설교는 그들이 학교에서 배우고 지지했던 신학과는 다르게 ( 보수 )적으로 한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신학을 하고 목회를 하는 지 알 수 없을 정도이다.
7) 둘째 이유로, 1914년 카이저 빌헬름의 전쟁 정책을 지지하는 93인 독일 지식인들이 낸 지지 성명에 자신이 존경하던 은사들의 이름이 있는 것을 보고 그들이 전쟁의 이데올로기와 타협을 한다는 것은 그들의 자유주의 신학에 어떤 문제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때부터 바르트는 ( 로마서 주석 )을 쓰기 시작했고 그의 자유주의 ( 비판 )은 큰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이 책에서 그는 성경 연구에 적용된 역사-비평도 옳고 축자영감설도 옳다고 말하며 그 둘 중 하나를 택하라 한다면 후자를 택하겠다고 했다.
8) 그는 자유주의 신학이 사람들로 하여금 복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케 하는, 즉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과 전혀 다른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들이 그들 스스로의 힘으로 예기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메시지로 인정하기는커녕, 복음을 하나의 종교적 메시지로 바꾸어 인간들에게 자신들이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결과가 되었다고 비판하였다. 이것을 다르게 말하면 그동안의 신학을 “아래로부터 위로”라고 한다면 바르트는 “위로부터 아래로”의 신학을 발전시키려 했다. 하나님의 초월, 복음, 영원, 구원 등은 인간의 보편적 경험이나 이성으로부터 세워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를 통하여 오는 것이므로 순종함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한다. 일견 현재 개혁주의 교회가 쓰고 있는 용어와 동일하게 보인다.
9) 이런 바르트의 신학을 “변증법적 신학” 혹은 “위기(= 심판 )의 신학”이라고 한다. “변증법적”이라는 말은 헤겔보다는 키에르케고르의 철학적 방법을 답습한 것을 의미한다. 인간의 ( 죄성 )과 하나님의 전적 ( 타자성 ) 때문에 하나님의 진리와 인간의 생각이 합리적인 종합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 자기 계시 )의 역설적 진리들은 유한한 인간의 ( 지성 )으로는 신앙의 도약을 통해서만 포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10) 여기서 도약이란 우리가 말하는 성장이나 성숙의 의미가 아니라 실존적 철학으로서의 추상적 개념이다. 즉 ( 그냥 )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름만 있는 유명론에(= nominalism ) 불과한 것이다. 즉 바르트는 키에르케고르가 말하는 “시간과 영원 사이의 무한한 질적 차이”의 개념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이는 플라톤 이래로 전수되어 온 헬라철학의 ( 이원 )론이라고 할 수 있다.
11) 그는 로마서 주석으로 인해 신학적 인정을 받고 1921년에 독일 괴팅겐대학교의 신학교수로 가게 된다. 거기서 리츨학파들과 심각한 갈등을 이루었고, 그는 복음이 직면한 최대의 위험은 그것이 거부되는 것이 아니라, 순순히 받아들여지지만 또 하나의 인간 이성과 문화의 ( 소유 )물로 전락되어 아무런 변화도 일으키지 않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바르트는 뮌스터 대학교로 옮겨 5년을 봉직하다가 1930년 본 대학으로 옮겼다. 거기서 그의 신학의 작은 변화가 오기 시작했다. 자유주의에 대한 거부를 포기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지난 10년 동안 천명하였던 “아니오” 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예”를 더 강조하기 시작했다.
11) 그는 조직신학을 처음에 저술하기를 꺼려했다. 그 이유는 그는 어떤 인간적 사상체계에도 ( 의존 )하지 않는, 절대적으로 신학적이고 그러므로 전적으로 성경적인 신학을 창출하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인간이 가지는 신앙의 ( 주관 )성보다는 하나님의 계시의 ( 객관 )성을 강조하기를 원했다. 기독교 신학이 냉정한 과학이 될 수 없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객관적 자기 계시는 ( 은혜 )와 ( 믿음 )에 의해서만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자기계시라는 범위 안에서 하나님에 대한 ( 지식 )이 가능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12) 따라서 바르트의 신학적 탐구는 오늘 복음주의자들의 견해와 ( 일치 )하는 듯하다. 그러나 조금만 주의 깊게 살펴보면 바르트가 ( 실존 )주의 철학을 근거로 한 ( 유명론 )적 신학을 펼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즉 차라리 "나는 성경을 믿지 않는다"라고 말하면 위험하지 않다. 문제는 "성경과 계시를 믿는다고 말하는 듯한" 그의 신학적 태도이다. 여기에 많은 사람들이 미혹되었고 지금도 한국교회는 그의 신학적 ( 영향 )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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