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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신학자료1

현대신학의 위기와 그 근황 1

현대신학의 위기와 그 근황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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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신학의 위기와 그 근황
 
         목 차             
 
Ⅰ. 현대신학의 집안싸움
 1. 序論 ................................................. 3
 2. 本論 ................................................. 4
  1) 불트만 ........................................... 4
  2) 판넨베르그와 몰트만 ................. 6
  3) 집안싸움 .........................................10
 3. 結論 ..................................................12
Ⅱ. 聖經을 해부하는 현대신학
 1. 집도하는 불트만 ..............................13
 2. 차원 신학자들 ..................................14
  1) 바르트 ..............................................14
  2) 부른너 ..............................................15
  3) 틸리히 ...............................................15
 3. 성경과 두개의 차원개념 ..................15
Ⅲ. 정통신학을 위협하는 三대 新神學과 總神人의 결의 ...17
Ⅳ. 미국신학의 근황
 1. 序論 ..............................................21
 2. 舊 프린스톤 신학의 몰락과 자유주의의 팽배 .........21
 3. 거물신학자시대 - 바르트, 불트만 틸리히시대 ........23
 4. 死神神學시대 - 미국신학의 소아병적 발작 ..............24
 5. 미국신학의 새로운 문제아들 .......................................24
 6. 結論 ...................................................................................24
Ⅴ. 유럽신학의 근황
 1. 자유주의 삼총사의 몰락과 칼바르트의 등장 ..........27
 2. 칼발트의 실각 ................................................................28
 3. 불트만의 붕괴 ................................................................28
 4. 어지러운 신학의 판도 ..................................................28
 5. 유럽신학의 새 주역들 ..................................................29
 6. 신학적 축의 변동 ...........................................................30
 7. 유럽신학은 산간벽지 신학인가? .................................33
*  總結論 - 終末이 가까운 現代神學 ................................37
 
 
 
Ⅰ. 현대신학의 집안싸움
 1. 序論
지난 10년간 개신교의 신학을 주름잡던 바의 불트만(Rodolf Bultmann)의 이론은 이제 급속도로 쇠퇴되어 가고 있다. 금일 그의 추종자라고 스스로 생각하는 자들도 그의 생각과 완전히는 일치하지 않으며, 이런 저런 면들을 들어 그의 신학에 반항을 일으키고 있다.
불트만 신학의 쇠퇴와 몰락을 역사적 사실로서 받아 들일 때, 프로테스탄트(Protestant) 신학의 미래는 예수 그리스도 및 그의 계시의 역사성에 관한 특별한 강조와 더불어 불트만 사상의 나머지에 대한 新神學의 건설을 위해 경쟁하는 젊은 신학자들의 무리의 손아귀 속에 놓여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합당한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한 젊은 신학자 가운데서도 마인즈(Mainz)대학교의 판넨 베르그 교수와 튀빙겐 대학교의 몰트만(Jurgen Moltmann)교수는 가장 흥미를 돋군다. 왜냐하면, 그들은 불트만(R,Bultmann)에 있어서와 같은 주관적이며 自意的 神學으로부터 根本的으로 離脫하며,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종말론적 미래와, 미래와 결부된 기독교인의 소망이라는 말로서 기독교 메시지에 대하여 매혹적인 再解釋을 함으로써 그들은 불트만과 訣別하는 듯이 보인다. 오늘날 그들의 신학은 {소망의 신학}(theology of hope)혹은 {역사로서의 신학}(theology as history)혹은 [그리스도 부활의 신학]이라 불리우며 신학 연구가들에 있어서 토론의 초점이 된 것이다.
 2. 本論
  1) 불트만
불트만(Rudolf Bultmann)에 의할 것 같으면 신약에 기록된 바의 기독교의 소망은 유대적이며 헬라적인 양 根源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소망에는 먼저 유대적인 근원이 있다. 하나님께서 지시한 바의 심판자이며구세주로서의 人子의 오심에 대한 구약적인 기대에로 소급하여 생각할 수 있다. 하늘로서 구름을 타고 재림하실 그리스도를 말하는 바의 신약은 유대인 사상에 있어서의 [인자의 오심](Coming of the Son of Man)과 비길  만한 것이다. 불트만에 의하면 기독교의 所望은 역시 헬라적인 사상의 근원을 갖는다. 헬라인들은 경건한 자의 영혼은 죽은 후에 하늘로 올리워 간다고 하는 기대에 머리가 저려 있다. 이 헬라인적이며 그노시스주의적 소망의 개념은 이 현세의 완전한 파괴와 아울러 인생들의 영혼의 편력(방황)을 광명의 세계로 향하게 해주는 것이라고 상상하도록 한다. 이와같은 헬라적인 소망의 개념은 신약의 종말론적 메시지 속에서 발견되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불트만은 소망의 양 개념-유대적이며 헬라적인 개념-은 본질상 신화론적이라고 지적함에 이른다.
불트만(R.Bultmann)에 의하면 이제 신약에 있어서의 소망의 말씀은 본질상 神話論的인 것이다. 여기에서 현대인에게 그것(신화론적인 것)의 재해석이 가미되지 않고서는 受納될 리가 없는 것이다. 오늘날 신화론적 사유(thinking) 방식은 현대인에게는 점차로 폐물화되어 가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의 사상은 결정지워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현대인이 수납할 수 있도록 신약의 소망의 메시지를 재해석할 수 있겠는가?  여기 불트만은  비신화화(demythologyzierung)로서 답변한다. 그에  의할 것 같으면 신약의 神話論的 言語로서 잠재적으로 남아 있는 바의 기독교 메시지를 발견하는 수단으로서의 비신화화는 초대 기독교인들 사이에서는 낯선 개념이 아니었다고 한다. 사도 요한과 사도 바울은 약간씩 예수의 종말론적 말씀을 비신화화하였었다.
특히 그것을 靈的인(speirtualize)것으로 만든 것은 요한이며 현재란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선언되는 바의 구원의 계기가 되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초대교회에 있어서도 그리스도의 오심(Parousia)이 더디므로 그것을 領海(spiritualize)함으로써 자체 내의 非神話化를 꾀했던 것이다. 이렇게 전제한 다음에 불트만(R.Bultmann)은 신약의 종말론을 비신화화 함으로써 현저하게 얻은 바의 그의 자신의 기독교의 소망에 대한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기독교의 소망은, 기독교에 있어서 死後에서가 아니라 여기(here), 지금(now)에 있어서 소망 중에 살아야 하는 것을 뜻한다. 기독교인은 미래를 위하여 기약된 존재이며, 동시에 현재에 결단을 내리며 책임을 수행함으로써 스스로 미래를 위한 책임을 지는 자이다. 그는 사후의 삶에 대한 환상을 더 갖지 않으며, 미래에 진정한 실존-그것은 하나님의 미래에 속하는-에 다다를 수 있을 것이라는 소망을 가지고 현재의 삶을 사는 것이다. 그러나 불트만이 말하는 미래란 것은 역사적인 미래를 말함이 아니다. 그것은 실존적으로 파악되어야 한다. 그는 생각하기를 어떤 심오한 방식에 의해서든 미래를 현재로부터 떼어 놓는다는 것은 언제나 오류라고 하는 것이다. 역사의 의미는 현재에 놓여 있는 것이다. 사람이 현재의 책임 있는 존재란 것을 더 많이 알수록 그는 더 명백하게 역사의 의미를 알게 된다. 사람은 현재 외에 과거와 미래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 불트만적인 감각으로 이해된 기독교의 소망은 [영원한 현재]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며, 또한 그 소망은 인간의 과거와 미래 양자에 걸쳐 개인적인 사고방식에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을 뜻한다.
이제 만약에 불트만이 말한 모든 것이 옳다고 한다면 인간의 종말론적 미래와 관련하여 우리 기독교인에게 믿고 소망할만한 무엇이 남겠느냐고 질문해도 좋을 것이다. 거의 남을 만한 것이 없다고 하는 것이 그 대답이다. 불트만의 기독교 소망의 실존주의적 해석은 역사적 이해의 완전한 결핍으로 인하여 그것은 인간의 주관주의적 密室의 獨白으로 둔갑을 한다. 불트만에 있어서 기독교의 소망은 하나님의 地上統治의 역사적 실현을 가리킴도 아니며, 하나님께서 역사적 미래에 있어서 사람에게 약속하신 바를 성취하심을 가리킴도 아니다. 그것은 단순히 다음과 같은 일을 알고 있음을 뜻하는 데 불과하다. 즉, 성도는 여기, 지금(here and now) 하나님 앞에 결단을 내림으로써 그 자신의 존재안에서 죽음을 이기고 생명의 승리를 경험하게 될 것과 사람의 미래에 있을 하나님의 은혜에 스스로를 대비하는 것이다.
  2) 판넨베르그와 몰트만
앞서 불트만(R. Bultmann)은 우리를 실망시켰다. 그가 역사의 참뜻에 관하여 말한 모든 것에 불구하고 그가 실제로 제시하는 바는 기독교 소망의 實存主義的 變形物이며, 그것은 正히 신약성서의 종말론적 메시지의 改惡으로 고려되는 것으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판넨베르그와 몰트만은 오늘날의 후불트만(post Bultmanian) 신학자들 중에 손꼽히며, 그토록 장기간 거부되어 온 [역사적 예수]의 연구를 부활시킴으로써 현대신학을 위한 역사의 인식을 소생시킨 자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신학은 [소망의 신학](theology of hope)이라 불리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역사성을 강조하며 기독교신학을 신약성서의 종말론적 입장에 서서 전폭적으로 재고하기를 제창하기 때문이다.
판텐베르그에 의하면 기독교인의 소망은 원래 역사적 미래에 대한 기대에서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기독교인의 소망이 기대하는 바의 역사적 미래는 하나님께서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사람에게 주신 바의 약속의 성취의 결과로서 이해되는 것이다. 바꾸어 말한다면 기독교에 의하여 이와 같이 기대된 바의 역사적 미래는 성질상 종말론적인 것이다. 또 그의 역사적인 신실성과 불변성을 보여 주시기 위하여 이 미래를 [실현]으로 이끄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의 소망은 하나님의 역사적 신실성 불변성의 입증으로 종말론적 미래가 도래하는 것을 기독교인이 기대하는 것을 뜻한다.
판넨베르그(W. Pannenberg)가 하나님을 말할 때 미래의 능력(die Macht der Zukunft)으로서 말하고 하나님의 진수를 미래양식(future mode)과 동등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판넨베르그에 의하면, 하나님의 존재는 미래발원체(future oriented being)이며, 만약 하나님을 배우고자 할진대 신학은 미래발원신학(future oriented theology)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미래의 능력으로서의 하나님은 사람이 갖는 모든 신개념에 앞서 계시며 우월하시다. 하나님은 이와같이 그의 미래성에 비추어서 인간의 개념구성(선험적)과 도식화(schematization)로 부터 벗어난다.
사람은 자유이기 때문에 인격체이다. 그리고 사람은 하나님이 만드신 미래를 소유하기 때문에만 자유이다.
그의 미래관이 본질상 역사적인 것인 만큼 변증법적이라는 것이 즉시 밝혀진다. 판넨베르그는 역사를 不可分離的 전체로 생각하여 신성한 역사와 세속적 역사로 구별하는 것을 거부한다. 그는 역시 바르트적인 역사의 2형(two-types)적인 견해를 거부한다. 판넨베르그에 의하면 현실 자체가 '종말로 향하여 재촉하는 역사'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미래는 그 끝이 신약성서가 말하는 바의 종말론적 메시지로서 나타날 역사적 미래를 의미한다.
그러나 여전히 실망스럽게도 판넨베르그의 미래와 역사에 대한 사상은 辨證法的 思想型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의 사상에 의하면 미래는 이곳에 아직 이르지 아니 하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욱 그것은 현재 위에 그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통치는 예수님이 그 임박성을 선포한 것과 같이 아직 오지를 아니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예수님의 종말론적 메시지 속에 이미 나타났다고 말한다.
판넨베르그에 의하면 기독교인의 소망은 엄격히 역사적 미래를 뚯하지 않고, 현재를 포함한 모든 제각기의 시대에 살며 소망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그 도래가 느꺼지는 바 미래 안에 성취되는 하나님의 약속을 기대하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우리는 결론을 내린다.
몰트만에 의하면 기독교인의 소망은 신도들에게 있어서 신앙의 확신 속에서 수난 당하고 부활한 그리스도의 미래를 바라보며 기다리는 것을 뜻한다. 소망이란 것은 신앙이 하나님에 의하여 참으로 약속된 바를 믿는 그러한 것들을 기대하는 것(expectation)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기독교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사건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리고 부활 신앙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기독교인의 소망은 보편적인 예수 그리스도의 미래와 관련하여 성취될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본다. 볼트만이 소망과 약속이란 말로써 강조하는 바의 수난하고 승천하신 그리스도의 미래는 역사적 미래라는 사실을 잊어버리지 말자, 볼트만(J.Moltmann)에 의하면 바르트(K.Barth)는 잘못이다. 왜냐하면 그는 종말(eschaton)은 모든 시대에게 超絶的 의미를 부여하며, 또 그것은 [모든 시대를 통하여 동등하게 가깝고 동등하게 먼] 초절적 존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몰트만(R.Bultmann)은 잘못이다. 왜냐하면 종말론적 契機(eschatological moment)를 논하며 여기 지금(here and now)에 있어서의 인간의 결정과 책임을 강조하기 때문인 것이다. 이 두 사람은 초대 기독교의 종말론적 공헌을 발전시키기보다는 그것을 模糊한 것으로 만든 초절적 종말론의 희생자들이다.
성경에서 입증된 하나님의 계시는 역사적 계시이다. 그것을 [영원한 현재의 나타나심](epiphany)으로서 간주한다는 것은 헬라적 사상과 탐구의 방법의 영향을 받은 결과인 것이다. 그러나 다시금 판넨베르그(Pannenberg)의 경우와 같이 위장 역사관(pseudohistorical viewpoint)의 존재를 발견함으로써 우리는 실망한다. 몰트만이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의 미래를 의미하는 바는 역사상 미래(historical future)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역사적 미래](historic future)이다. 그것은 즉 하나님의 약속을 통하여 마주칠 수 있는 미래를 뜻하고, 그 미래에 대한 지식은 거기에 닿을 수 없는 일시적인 것이며, 단편적인 것이며, 公開的인 것이며, 曲解된 때문에 [소망의 지식]인 것이다.
몰트만(J.Moltmann)이 생각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미래]에서 역사의 개념은 [역사주의]와 실존주의를 능가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歷史主義와 實存主義를 거부한 후에 몰트만은 그의 콧김으로 날려보낸 두 선택물의 어느 틈에 자신의 자리를 정한다. 이러한 견지에서 몰트만의 역사개념은 판넨베르그가 파악하고 있는것과 매우 흡사한 것이라고 斷言할 수 있는 것이다.
몰트만(J.Moltmann)에 의하여 기독교의 소망은 파루시아(Parousia)혹은 [그리스도의 재림]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서는 가버린 누군가가 실제로 돌아옴을 의미하지 아니한다. 그것은 오히려 임박한 도래(eine bevorstehende Ankunft)나, 혹은 더 정확히는 도래하고 있는 미래(eine ankunftige Zukunft)이다. 판넨베르그(W,Pannenberg)처럼 몰트만(Moltmann)은 그리스도의 [Parousia]를 辨證法的 方式으로 파악하려고 하고 있음은 너무나 명백한 일이다. 몰트만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재림(Die Parusi Christi)은 평범한 뜻의 역사상의 사건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단순히 미래의 역사속에 위치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고 있는 미래](anarriving future)이며 현재에 사는 인생살이를 강력히 규제하는 것이다. 더욱이 비록 그것으로부터 완전히 분리시킬 수는 없지만 , 그것은 현실에 있어서 우리의 나날의 생활에서 경험하는 바와 아주 상이한 무엇이다.
  3) 집안 싸움   
판넨베르그와 몰트만(W.Pannenberg, and J.Moltmann)을 세운 [소망의 신학]은 [세속적인 신학이 죽였고 혹은 회피한 하나님에 관하여 논의를 재개시킨 그 능력]은 칭찬 받을만 하다. 소위 신학자들이 하나님 없는 신학 혹은 적어도 하나님을 망각한 신학을 창조하기에 바쁜 즈음에 그것이 현장에 나타난 것이다. 그 후로부터 [소망의 신학]은 하나님의 죽음과 같은 사고방식으로부터 벗어나서 [미래의 하나님]이란 용어로서 신학을 구상하는 일에  관심을 모으게 함으로써 다소간 현대신학을 구제하는 데 성공하였다. 더욱이 실존주의 때문에 하나님의 계시의 역사적 성격을 과소 평가한 불트만(R.Bultmann)과 그의 제자들에게 이의를 제기함으로써 소망의 신학자들은 우리들에게 기독교의 신은 역사 안에서 활동하신 신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장사한 지 삼일 만에 무덤에서 살아나셨기 때문에 세상의 소망이라고 하는 막중한 사실을 다시금 생각나게 해주었다.
이와같은 신학이 세속신학의 물결을 막도록 현대신학의 단상에 나타나지 아니 하였던들 거의 모든 현대 신학자들이 그자체로는 불가능한 바의 신이 없는 신학적 사고의 과제 앞에 무릎을 꿇고 지냈을 것이다. 이리하여 [소망의 신학]은 현대 신학자들을 시지프스와 같은 운명으로부터 해방시켰으며, 아마 이런 이유로서 우리들은 판넨베르그와 몰트만(W.Pannenberg, and J.Moltmann) 양인에게 감사를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뜻하는 미래의 하나님은 역사상의 하나님이 아니며, 변증법적이며, 하나님의 계시와 특히 기독교종말론에 관해서 비성서적 처리방법을 취함으로서 불트만에 못지 않게 잘못되었다.
판넨베르그와 몰트만(W.Pannenberg and J.Moltmann)이 아는 것과 같은 기독교인의 소망은 성서가 가리키고 있는 역사의 마지막 날에 그리스도의 육체적 재림이라는 소망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그리스도의 미래에 성취될 하나님의 약속을 열망하는 성도를 가리키는 동시에 그리스도의 도래는 변증법상으로 밖에는 달리 이해할 수 없는 것을 가리킨다. 그들에게 있어서 기독교인의 소망은 부활 사건이란 과거를 가리키는 것(이것은 2천년 전에 예루살렘 성문 밖의 십자가에서 죽은[나사렛 예수]라 불리우는 분이 다시 생명으로 환원함을 뜻한다)도 아니며, 역사의 미래에 무덤에서 일어났으며 지금은 하늘에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시는 나사렛 예수가 이 세상에 재림하시는 것을 가리키는 것도 아니다. 기독교인의 소망은 그들에 의하면 기독교인이 미래의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 가지는 유망한 기대를 뜻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미래는 시간적으로 국한시킬 수 없고, 그것은 역사를 초월하여 존재하며 더욱이 그것은 여태까지 미지인 바의 새로운 가능성 안으로 이끌어 가는 것을 뜻한다.
바르트(K.Barth)가 객관화의 요소를 자신의 신학에 도입한 것과 병행하여 불트만 학도들과 그 선배들은 초대교회가 고백한 그리스도와 역사의 예수를 여러가지로 더 의미심장하게 결합하는 일에 노력하였었다. 볼트만과 소망의 신학자들 사이에 일어나고 있는 바는 한갓 아늑하고 작은 집안 싸움에 불과한 것이다.
 3. 結論
오늘날 역사가와 사회학자들이 우리들에게 지적해 주듯이, 현대인은 [실존주의 후 시대]에 살며 또 그들은 그와 같이 오랫동안 그들의 사상을 지배하였던 실존주의적 죄의식과 불안으로부터 해방되기를 열망하고 있다. 그들은 [내일]에 속하는 새로운 가능성을 붙잡기 위하여 소망중에 그들의 팔을 벌린다. 그러므로 [소망의 신학]이 어디서나 모든 사람의 상상의 날개를 사로잡는 것은 오직 자연스러울 따름인 것이다.
[소망의 신학]은 제 때를 만나서 소망의 메시지를 대망하는 자들을 위하여 제 구실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실망스럽게도 그것은 제구실을 십분 발휘하는 일에 실패하고 있다. 솔직히 말해서 [소망의 신학]은 주어진 여건 위에 최악의 실수를 저지르고 있다. 우리 세대에게 성서적 계시에 입각한 단순하며 똑바른 소망의 메시지를 제공해주는 대신에 [소망의 신학]은 인간자율주의의 산물인 순수합리주의와 순수불합리주의와의 혼합물인 소망의 변증법적 사상을 제공해주고 있다.
사람들은 언제나 유행과 최신식의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요즈음은 샤르땅, 블로흐, 그리고 콜링우드(Teilhard de Chardin, Ernst Bloch and R.G.Callingwood)등 제씨의 글을 읽는 것이 신학적으로 유행이며 또 최신식이랄 수가 있다. 그러나 각 시대의 신학자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소명은 그들의 신학을 최신식 유행물로 만들어 사람들의 눈을 휘황하게 현혹시키는 일이 아닌것은 명백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유일하신 창조주요, 통치자요, 심판자이신 삼위일체의 하나님의 진리로써 새로워지도록 하는 것이 신학자의 임무인 것이다.
우리는 소망의 신학자들이 신학자의 참다운 임무가 무엇인가를 깨닫고 용감하게 신성경해석학 써클로 부터 탈출하며 세상의 소망으로서의 역사상의 그리스도를(성경의 사상과 부합하지 않는 역사철학을 계속해서 가르치지 말고)사람들에게 선포해 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판넨베르그와 몰트만(W. Pannenberg and J. Moltmann) 양인은 마침내 신약성경의 종말론을 특징짓는 역사적 사고방식으로 돌아올 때 비로소 그들이 진정한 [소망의 신학]을 하는 신학자들로서의 자격을 갖추게 될 것이다.
Ⅱ. 聖經을 해부하는 현대신학
 1. 집도하는 불트만
불트만은 [성경을 비신화화해야 한다]는 주장을 통해서 오늘날 그 이름을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불트만에 의하면 성경은 비과학적 언어를 사용할 뿐 아니라 과학 이전시대의 세계관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들이 사는 세상위에는 하늘이 있는 데 하늘에는 하나님과 천사들이 거주하고 있으며 인간들이 사는 세상 아래에는 지옥이 있는 데 사탄과 마귀들로 만원이 되어 있다고 하는 생각이 바로 성경이 갖고 있는 삼층 세계관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삼층 세계관은 과학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수락될 수 없다고 한다.
신약성경에서 과학 이전시대의 세계관을 내버리고 비과학적 말들을 가려낸 후에 그리스도의 복음의 핵심을 파악하는 일이 우리의 급선무라고 불트만은 말한다.
 2. 차원 신학자들
  1) 칼 바르트
칼.바르트(Karl Barth)가 불트만(R.Bultmann)의 신학을 하나의 철학적 이론이라고 비평했다 불트만은 성경의 [비신화화]를 주장하지만 불트만의 신학에는 하나의 신화가 있는데 그것은 [과학에 의하여 증명되는 사실만이 사실이라는 주장인 것이다]라고 했다. 그러면 불트만의 [비신화화] 시도를 비평하는  바르트는 보수 기독교인들과 같이 성경의 무오성을 믿는다는 말인가? 결코 그렇지는 않다. 바르트는 [역사과학에 의하여 증명되는 사실들만이 사실인 것은 아니다]라고 말할 때 [두개의 차원]을 분리시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바르트는 그리스도의 부활은 참역사(Geschichte)이며 역사(Historie)가 아니라고 한다. 그는 하나님의 계시의 직접적 성격을 부인한다. 하나님의 계시는 역사의 차원속에 있는 어떤 것과도 동일시 될수 없다. 역사의 차원 속에 있는 것들은 모두가 잘못과 모순을 지니고 있다. 기독교 성경도 역시 역사의 차원을 벗어나지 못함으로 성경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완전한 계시를 찾아 볼수는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성경이 여러가지 잘못과 모순을 내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바로 이성경의 책들 속에서 자신을 나타내시기를 부끄러워 하지 않으셨다.
성경을 해부대 위에 놓고 과학의 칼로 성경을 해부하고 있는 불트만을 바르트는 그의 차원신학을 통해서 후원하고 있는 것이된다.
  2) 부른너
바르트와 함께 新正統主義 神學의 支柱로 알려진 부른너는 근본주의자들은 성경 말씀과 하나님의 말씀을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여 그들은 성경의 문자들을 신격화한다고 주장한다.
 
 3) 틸리히
틸리히는 또 한편 역사과학에 의한 성경비평이 기독교인의 믿음에 영향을 줄 수는 없다는 말을 함으로써 바르트와 부른너와 같이 성경의 역사적 비평을 환영했다. 그는 [인간 예수]와 [새 존재로서의 그리스도]를 분리시켜 전자를 역사적 조사의 대상으로 삼고 후자를 기독교인의 믿음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바르트와 부룬너와 같이 차원 신학을 말하는 신학자라고 볼 수 있으며, 바르트와 부른너(K.Barth and E.Brunner)와 같이 그의 차원신학을 통하여 불트만(R.Bultmann)의 [비신화화]시도를 후원하고 있다고 봐야 하겠다.
 3. 성경과 두개의 차원개념
성경의 유오성과 불완전성을 지지하는 이론적 근거로서 그들의 [두 개의 차원]의 개념을 제시한다.
바르트(K.Barth)가 그의 [교회 교의학]에서 말하는 참역사(Geschichte)와 역사(Historie)의 구별이나, 부른너(E.Brunner)가 말하는 [나와 그것]의 차원 [나와 너]의 차원 구별은 그들의 성경관 뿐 아니라 신학 전체를 지배하는 [두 개의 차원]의 개념들의 존재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미국 연합장로교회의 1967년도 신앙고백문을 작성하기 위한 특별위원회의 일원인 헨드리(G.S.Hendry)박사는 그의 저서 {오늘을 위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The Westminster Confession for Today)에서 그의 성경관을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지리학적 지식이나 수학적 지식과 다르다.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누구에게나 가능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 속에서 사는 사람들에게만 가능한 것이다]. 그는 계속해서 말하기를 [성경의 영감은 하나의 이론이나 학설이 아니다. 이는 신앙인 것이다. 신앙은 학설을 그 기초로 삼을 수 없다. 신앙은 어디까지나 그리고 언제나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 것이다]라고 하였다. 바르트와 부른너의 차원신학을 따르는 헨드리 박사는 물질의 세계, 자연과학의 세계를 [나와 그것]의 차원 속에 두고 인간이 자유하는 세계, 인격적 세계를 [나와 너]의 차원 속에 둔다. 그런데 헨드리 박사에 의하면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인격적인 만남인 것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어떤 學理的 지식을 가르쳐주지 않고 인격적 관계를 통해서만 발생하는 實踐的 지식을 가르쳐 준다.
반틸(C.Van Til)은 헨드리의 성경관은 역사적인 기독교 성경관과 상치되는 칸트(I.Kant)의 이원론적 철학에 입각한 주관적이며 실존 주의적인 성경관이라고 평하고 있다. 반틸의 이와 같은 비평은 헨드리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결국 현대 차원신학 전반에 해당하는 비평이기도 하다.
우리는 [두개의 차원]의 개념이 성경에서 오지 않고 칸트의 철학에서 왔기 때문에 잘못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더욱이 칸트의 철학에서 온 [두개의 차원]의 개념을 토대로 하고 그 위에 성경관을 세움은 더 큰 잘못이 아닐 수 없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진리에 관한 마지막 말씀인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가 만물을 판단할때 우리의 판단의 유일한 표준이 되어야 한다.

Ⅲ. 정통신학을 위협하는 三대 新神學과 總神人의 결의
20세기에 전개된 현대신학의 복음주의 기독교에 대한 도전을 우리는 3신주의(3Ns)의 도전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3신주의라 함은 신프로테스탄트주의(Neo Protestantism)와 신정통주의(Neo Orthodoxy),그리고 신복음주의(Neo Evangelicalism)를 두고 하는 말이다.
20세기가 시작할 무렵 슐라이어막허와 릿출의 신학의 잔광을 받아 헤르만과 하르낙 그리고 미국의 워터 라우센부쉬와 같은 신학자들이 소위 [신프로테스탄트주의]라는 새 신학을 형성하고서 복음주의 기독교의 성경적으로 바른 교리와 신앙에 도전 했었다. 그후 1919년 스위스 산골의 한 청년 목사 칼 바르트가 [로마서 강해]를 집필함으로써 점화된 소위 [신정통주의]운동이 요원의 불길처럼 전세계로 번져가면서 복음주의 기독교의 교리와 신앙을 송두리채흔들어 놓는 위력을 과시했다.
그러다가 20세기 후반기에 접어 들면서부터 신정통주의 신학운동의 여력을 빌려 복음주의적 교리와 신앙에 투철치 못한 복음주의 신학자들과 교회지도자들 중에서 신복음주의(Neo Evangelicalism)라는 새로운 신학운동이 일어나게 됐으니, 미국 켈리포니아주에 있는 풀러신학교가 이 운동의 진원지 였었다. 이 신복음주의 운동은 복음주의를 과장하면서 역사적 기독교의 성경적 신앙을 타협하는 대가로서 범세계적인 선교와 교회연합을 성취코자 하는 동기를 가진 운동이다.
20세기 초에 형성된 소위 [신프로테스탄트주의]신학을 루터와 칼빈의 종교개혁 신앙을 포기하고 에라스므스의 인본주의적 신앙으로서의 환원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기독교로부터 모든 초자연성을 제거하고 윤리의 차원으로 기독교를 격하시키는 신학운동이었다.
칼 바르트가 일으킨 신정통주의 신학 운동은 "하나님께로 돌아가자"(Back to God), "성경으로 돌아가자"(Back to the Bible)라는 구호를 외치면서 [신프로테스탄트주의 신학]의 자연주의적 집착을 통박했다는 점에서 복음주의 기독교에 대한 미련을 다분히 지닌 신학운동이었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성경의 영감성과 무오성을 회의하고 기독교 교리와 신앙의 역사적 진리성을 부인하는 등의 사실을 보아 그것은 복음주의 기독교가 진리로 믿고 아는 바에 대한 매우 심각한 도전이었다고 생각지 않을 수 없다. 신정통주의 신학이 꽤 오랜 세월동안 그토록 기독교 지성을 매혹시키고 현대신학계를 석권할 수 있었던 이유는 자유주의 신학의 질주에 제동을 거는 한편 복음주의 기독교의 근본주의적 성격을 고발함으로써 신학적 우파와 좌파에게 아울러 호감을 샀다는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신정통주의는 초자연적 기독교도 만족시키고 현대지성의 과학주의도 만족시킬 수 있는 일석이조적 신학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20세기인의 신학]으로서 참으로 나무랄데가 없는 만점에 가까운 신학으로 오랜동안 크게 각광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신정통주의의 정체를 알고 보면 우리는 그것이 결코 초자연적 기독교가 아니며 오히려 현대지성의 무신론적 요구를 무마하기 위한 초자연적 기독교의 타협을 의미하는 "위장 보수주의 신학"이라는 사실에 동의치 아니하지 못할 것이다.
20세기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신정통주의 신학의 쇠퇴와 때를 같이 해서 복음주의 기독교에 대한 막강한 도전으로서 등장한 [신복음주의]란 어떤 것인가? 이 [신복음주의]라는 새로운 신학운동은 복음주의 기독교 자체 내에서 일어난 운동이라는 사실을 그 특징으로 하고있다. 즉 신복음주의는 복음주의 기독교내의 [반란적 사건]인 것이다.
이 신학운동은 하롤드 아켕가, 에드워드 카넬, 버나드 램, 칼 헨리, 빌리 그래함 등 소위 [풀러그룹]이라고 일컫는, 복음주의사상에 투철성이 결여된 일련의 복음주의 신학자들과 교회지도자들이 일으킨 운동으로서 범세계적인 선교사업과 교회연합운동의 전개를 위해서 복음주의 기독교의 문호를 에큐메니칼 자유주의 기독교에 대해서 개방하자는 운동, 그러니까 에큐메니칼 기독교에 대한 [문호개방 운동]인 것이다. 오늘날 신복음주의자들은 성경 영감교리에 대한 양보와 창세기 1장의 기독교 진화론적 해석 그리고 알미니안주의와 과학주의, 세속주의등의 포용을 일삼으면서 세계선교와 교회연합을 지상의 과제로 부르짖고 있다.
그레샴 메이천(J.Gresham Machen)박사는 일찌기 말하기를 자유주의 기독교는 불신 지성과 대화하기 위해서 기독교를 포기했기 때문에 기독교가 아니라고 했다. 즉, 신복음주의는 에큐메니칼 기독교와 대화하기 위해서 복음주의를 포기하자는 운동인 것이다. 신프로테스탄트주의 운동 신정통주의에 비해서 신복음주의는 그 성격이 보수적이고 온건하기 때문에 복음주의 기독교에 대한 도전이라기 보다는 복음주의 기독교내에 존재하는 방법론적 견해 차이를 의미할 뿐이라고 하는 말을 우리는 종종 듣는다.
우리 한국 교회는 100년이 채 안되는 그 짧은 성장사의 과정 속에서  현대신학의 3신주의적 도전을 자체로 받아 왔다.
한국 교회사의 초기에는 감리교회가 설립한 협성신학교가 신프로테스탄주의신학의 아지트가 되어 한국의 복음주의 기독교에 대해 도전했고, 그후 일제 말기에 서울 승동교회당 하층에서 시작한 조선신학교는 재빨리 해외에 가서 바르트신학을 배우고 돌아온 김재준 교수의 신학적 리더쉽 하에 한국 복음주의 기독교에 대한 신정통주의적 도전의 기수가 되었다. 그러나 1902년에 평양에서 조선 예수교장로회가 설립한 장로회신학교는 초대 미국선교사 교수들의 복음주의적 신앙입장과 특히 박형룡 목사의 강한 메이천주의적 리더쉽의 덕분으로 협성신학교의 신프로테스탄트 주의를 누르고 조선신학교와 김재준 목사의 신정통주의적 도전을 일단 물리치는 일에 성공했던 것이다.
그러나 해방후 한국에서 신프로테스탄트주의 신학은 그 기세가 크게 꺾인감이 있었지만, 서울에서의 조선신학교의 재개강과 그후 동교의 한국신학대학으로의 발전 그리고 김재준 교수의 좌절모르는  신정통주의를 위한 선전책략 등은 한국에 신정통주의 신학을 널리 보급하는 일에 성공했고, 기어코 1951년의 기독교장로회 교단의 창설과 1959년의 예수교장로회 통합측 교단의 발족을  촉발하고야 말았다.
현금 우리 교회와 우리 모교의 [신복음주의화]를 미연에 방지하고 신복음주의 거부운동에 힘을 모아야 할 또 하나의 역사적 순간에 다달았음을 의식해야 할 것이다.
에큐매니칼 기독교가 근본적으로 용공 기독교이며, 신복음주의는 그와 같은 에큐메니칼 기독교와의 대화와 접근을 모색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위험성이 크다고 인식하고 에큐메니칼 기독교와 그것을 두둔하는 신복음주의를 강력히 거부하는 메이천주의적 노선을 구축함으로써 전세계적으로 그리고 특히 대한민국에 있어서 우리 총신인들이 진정한 반공신학의 확립을 통한 승공적 전열에 참여가 가능한 것이라고 필자는 확신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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