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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신학의 동향

최근 신학의 동향
http://cafe.naver.com/modernth/929 구춘서(한일장신대 신학부 교수)
 
신학은 하늘에서 그냥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신학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의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여러 가지 위기를 경험하는 신앙인들이 그 위기 속에서 하나님의 해방과 구원을 찾는 가운데 이루어진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신앙하는 바를 체계적이고 과학적으로 서술하려고 시도하는 것을 '신학한다'고 한다면, 적어도 신학하는 작업에는 두 가지가 포함되어야 한다. 첫째는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fides quaerens intellectum: faith seeking understanding)이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믿는 것들이 실제 생활에서 경험하고 인식하는 것들과 어떻게 관련되는지를 비판적으로 고찰하는 작업이다. 둘째는 이러한 신학적 작업을 논리적 또는 과학적(학문이라는 의미에서)으로 전개하여 신앙 공동체 내외에서 그 타당성을 획득하는 일이다. 이런 점에서 신학은 신학자가 살고 있는 당대의 정치, 경제, 문화, 사회, 종교 등 상황과 끊임없는 대화를 통해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 대한 비판적 이해를 추구하는 가운데 형성된다.
 
오늘 날 신학이 이루어지는 상황은 탈현대적이고, 서구 중심에서 벗어나려는 탈식민지적인 경향을 보이고 있으며, 또한 온갖 억압과 차별, 즉 성차별, 인종차별, 문화적 차별, 계급적 차별이 총체적으로 문제시되고 있는 상황이다. 이처럼 오늘날의 신학은 우리가 살고 있는 정치적, 문화적 상황과 직접적 관계를 맺으며 이루어진다.
 
우리는 이런 상황에서 전개되는 복잡다기한 현대 신학의 움직임을 두 가지 큰 흐름으로 대별해 볼 수 있다. 첫째는 보다 통전적이고 우주적인 구원을 추구하는 거대담론적 신학의 방향이고, 둘째는 더욱더 세분화되고 특수한 억압의 경험에 근거하여 해방의 신학을 전개하는 방향이다. 이 두 가지 신학적 흐름은 정반대 방향으로 보이지만 더 깊은 곳에서는 탈현대적, 탈서구적 상황에서 '신학하는 것'의 본질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상통한다. 
 
앞에서 말했듯이 오늘날 신학자들에게 두드러진 경향 중 하나는 신학자들이 현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지구 전체의 위기 상황에 관심을 가지고 통전적으로 신학 작업을 전개한다는 점이다. 이는 최근 신학 조류의 중심이 되어 온 해방의 신학에 대한 반성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해방의 신학은 가부장적 제도에 의해 야기된 성차별을 타파하기 위한 여성신학, 인종차별 철폐를 주장하는 흑인신학, 타종교를 가진 사람들과의 대화를 모색하는 종교다원주의신학, 가난한 사람들의 해방을 강조하면서 남미 중심으로 전개된 해방신학, 문화적 소외의 문제를 제기하는 아프리카 신학 등 지구상 특정한 부류의 사람들에 의해 제기되었던 해방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었다. 이러한 해방신학들의 공통점은 인간중심적 신학이라는 것이다. 이 인간중심적 신학에 대한 반성으로 이제 지구 또는 우주 전체의 해방과 구원의 문제에 관심을 두는 것이 최근 신학의 중심적 경향이라고 할 수 있다.
 
아인슈타인이 과학자로서 일생 고민했던 질문은 "우주는 인간에게 친구인가 아니면 적인가(friend or foe?)"라는 질문이었다. 아인슈타인의 이 질문은 예수 그리스도 당시 사람들이 질문했던 "천사가 인간 편인가 아닌가?"하는 질문과 같은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예수 그리스도 당시의 사람들은 천체의 운행을 담당하고 있는 천사가 과연 인간에게 우호적인가 아닌가를 질문했던 것이다. 예수 당시 예수의 제자들은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찾을 수 있었다. 즉 하늘과 땅의 일체를 통합하고 관리하고 구원하시는 분이 그리스도라는 우주적 그리스도(Cosmic Christ)가 문제의 해답이었던 것이다.(Matthew Fox, The Coming of Cosmic Christ(San Francisco, Harper & Row, 1988), p. 1.) 오늘 날 우주적 그리스도에 관심하는 신학자들은 다시 2,000년 전으로 돌아가 통전적이고 전체적인 생명의 구원 문제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는 듯 보인다. 우주적 그리스도에 대한 새로운 관심에 바탕을 둔 최근 신학자들의 작업은 몇 가지 뚜렷한 경향을 보이고 있다.
 
첫째, 이들은 공동체적 내지 학제간적 접근(interdisciplinary approach)으로 신학을 전개하려 한다는 사실이다. 특별히 관심을 끄는 대목은 신학자들과 물리학자들 간의 대화이다. 가령『가이아』(Gaia)라는 책을 쓴 물리학자 제임스 러브록(James Lovelock)은 다른 동료 자연과학자들이 자신을 과학계의 이단아처럼 파문하려 하는데 도리어 종교인들이 자신을 초대하여 강연을 듣고 대화하고 싶어 한다고 신학자들의 변화된 모습을 소개한다. 갈릴레오를 파문한 기독교계가 적극적으로 과학자들과 대화를 모색한다는 점에서 변화된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최근에는 정치경제학자, 종교학자, 문화 인류학자들이 함께 모여 신학을 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이들은 지구를 살리기 위한 관심 가운데 생명공학, 물리학, 철학, 종교학 등 새로운 우주론을 바탕으로 하여 신학을 하려 한다.
 
이들은 동양종교의 지혜와 적극적으로 만남을 시도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따라서 서양의 신학교에서 동양종교에 대한 관심은 대단히 높이지고 있으며, 중요한 학술지들이 많이 출간되고 있다. 최근 Religions in East and West라는 학술지가 출간되어 서양학자들의 동양종교에 대한 연구 업적을 매달 출판하기 시작하고 있다. 힌두교, 유교, 불교, 이슬람, 신도(神道) 등 동양종교가〈미국 종교학회〉(American Academy of Religions)에서 가장 많은 학자들의 관심을 끄는 분야이다. 앞으로의 신학은 파니카(Raimundo Panikkar)가 강조하는 바와 같이 종교간 협력과 대화를 추구하는 보편적 에큐메니즘(universal ecumenism)의 큰 틀을 벗어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둘째, 첫 번째 경우와 큰 틀에서는 비슷하지만 각론에서는 조금 달리 가는 신학적 방향이다. 즉 지금까지의 전통적 신학이 시간의 흐름으로서의 역사에 초점을 둔 신학을 전개했다면, 이제는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모든 존재의 넓은 지평에서 신학을 하려는 움직임이다. 이것은 관계와 몸을 중시하는 여성신학의 총체적 경험이 녹아 있는 방향이다. 여기서는 창조론을 적극적으로 새롭게 해석하여, 전통적 신학에서 인간에게 부여한 특별한 경험을 부정하고 다른 동물, 식물, 무생물 등 존재하는 모든 것이 공간을 차지하고 생명을 유지한다는 점에서 인간과 동일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지구는 모든 생명체가 살아가는 하나님의 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신학적 방향에 대해 한 여성신학자는 다음과 같이 그 의의를 설명한다.
 
우리가 이 확대된 자아 정의를 생각하고 느낄 수 있게 될 때, 우리는 지구가 당면하고 있는 위기에 적절하고 책임감 있게 대응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인간 중심적인 관점에서 벗어나 지구를 새로운 방법으로 바라보도록 진보적이 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우리는 알도 레오폴드(Aldo Leopold)가 "한 종이 다른 종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은 태양 아래 새로운 일이다."(Aldo Leopold, A Sand County Almanac and Sketches Here and There (New York: Oxford Univ. Press, 1949), p. 110. ) 라고 언급한 것처럼 다른 종들의 고통과 심지어는 지구 그 자체의 고통에 대해 공감을 느낄 필요가 있다. 그것은 참으로 새로운 것이고, 내가 나와 친근하고 소중한 이들을 보살피는 방법과 유사한 방법으로 다른 종들을 돌보는 감정인 넓은 범위의 자아정체성을 필요로 한다. 단지 손실을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대해 느끼고 울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입장에서 죄란 우리 인간이 다른 인간과 동물과 모든 존재하는 것과의 바른 관계를 파괴하는 것이요, 자기 이상의 위치를 차지하려는 것이며, 구원이란 바른 관계의 회복이라고 본다. 이러한 신학은 전통신학이 갖고 있는 이원론적인 사고를 적극적으로 극복하려고 한다.
 
셋째, 여성신학자들을 중심으로 시작되어 점차 전체 신학계로 영향력을 확대해가고 있는 신학으로서,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서로 관련되어 있다고 하는 '관계'의 신학이다. 이들 신학자들은 태초에 '관계'가 있었다고 주장하며, 이 관계의 파괴야말로 바로 인간이 저지른 범죄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 부서진 관계를 회복시키는 것이 구원을 이루는 길이라고 본다. 이 관계의 신학은 계급적이고 위계적인 질서에 대해 근본적 질문을 던진다. 즉 창조주 대 피조물, 남자 대 여자, 인간 대 동물, 생물 대 무생물 등으로 이분화시켜 이 두 쌍 가운데 앞에 있는 것이 뒤에 있는 것보다 좋다고 생각하는 것은 차별적 사고를 낳게 한다고 비판한다. 따라서 이 신학자들은 일체의 존재하는 것들이 관련되어 있고 상호 도움을 주는 관계를 모색하는 가운데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관계의 중요성을 대단히 강조한다.
 
『하나님의 구원』(The Redemption of God)을 쓴 카터 헤이워드(Carter Heyward)와 같은 여성신학자들은 심지어 우리가 없으면 하나님도 의미가 없다고 주장한다. 기독교인들이 들으면 의아해 할 수밖에 없는 이런 극단적 주장을 서슴없이 하는 이들은 그 어떤 존재도 정당하고, 우리들 사이의 바른 관계를 파괴하는 것이라면 어떤 것도 거부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은 바른 관계를 이끄시는 분이기 때문에 독단적이고 가부장적인 하나님은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 가부장적이고 독단적인 하나님은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우상에 지나지 않는다. 헤이워드는 최근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중요한 책을 출간했는데 그 제목이『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로부터 예수를 구출하기』(Saving Jesus from Those Who are Right)이다. 이 책에서 그는 기독교 우익들이 자신들은 옳고 다른 생각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이 도리어 그리스도를 구속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비판하고 있다. 현재 미국의 보수주의가 득세하는 점을 감안할 때, 헤이워드의 책은 기독교인들 뿐 아니라 정치적으로 바른 관심을 갖는 이들을 위해 좋은 책이다.
 
관계를 강조하는 또 다른 신학자 비벌리 해리슨(Beverley Harrison)은 분노는 우리가 사회적 관계에서 부당한 관계를 강요받을 때 생기는 반응이라고 하면서 이 분노가 도리어 사랑의 사역에 있어 힘이라고(The power of anger in the work of love) 주장하기도 한다.
 
이상과 같은 신학들이 넓은 의미에서 우주적이며 몸을 강조하며 관계를 강조하는 통전적인 신학의 경향이다. 이런 신학들은 70년대와 80년대를 거치면서 다양하게 발전한 해방신학을 넘어서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통전적이고 우주적인 신학을 전개하려는 방향과는 대조적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보다 구체적이고 특수한 역사적 상황에서 억압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해방의 신학을 전개하려는 경향도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것은 억압받는 공동체 가운데서도 주로 소수자에 의해 나오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같은 여성신학자들이라 해도 레즈비안 여성신학자들은 자신들의 신학을 보다 구체적으로 자신들의 공동체를 향하여 전개한다는 점에서 일반 여성신학자들과 관심을 달리한다. 그들은 관계를 중시한다는 점에서는 여성신학자들과 같은 경향을 보이지만, 신성에 대한 이해에 있어 에로틱 파워를 신성한 것으로 보려는 경향을 강하게 드러낸다.
 
흑인여성신학자들도 일반적인 흑인신학에 만족하지 않는다. 이들은 자신들의 신학을 페미니스트 신학이 아니라 워머니스트(Womanist) 신학이라고 부르면서, 흑인신학자들은 혹독한 인종차별로부터의 해방만을 강조하지만 사실 흑인 여성노예들의 경우는 생존이 더 중요한 과제였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사막에 자식과 함께 쫓겨 난 하갈의 이야기를 더 중요시하며, 노예여성들의 경험을 대리자의 경험으로 해석한다. 즉 노예여성들은 주인의 자녀를 키우는 유모역할, 들판에서 일하는 노동자역할, 그리고 주인의 성적 만족을 채워주는 역할을 감당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경험을 토대로 하여 흑인여성신학자들은 예수그리스도는 인류를 위한 대리자라는 인식 아래서 자신들의 신학을 전개하고 있다.
 
그 자신이 시인이기도 한 들로리스 월리암스(Delores Williams)는 많은 흑인 시인들과 드라마작가들의 작품을 사용하면서 워머니스트 신학을 발전시키려 하고 있다. 특히 그녀는 성경을 흑인여성들의 입장에서 읽는데 탁월한 능력을 보이고 있다. 그는 워머니스트 신학의 자료는 흑인여성노예들의 사회전기, 흑인여성들의 창조적인 문학작품, 자서전, 그리고 흑인 여성학자들의 학술적 저작들과 흑인여성들의 교회에서의 간증 등이라고 말한다.(Delores Williams, "Womanist Theology: Black Women's Voices,"Christianity and Crisis 47(March 2, 1987), p. 180.) 그는 한국 민중신학이 밥상공동체를 강조하듯이 흑인공동체의 '환영식탁'(welcome table)을 새로운 교회론의 형태로 제시하고 있다.
 
윌리암스는 워머니스트 신학에 몇 가지 강조점이 있다고 한다. 첫째, 이 세상에 존재하는 방식과 흑인여성들의 문화를 강조하고 즐거워하는 것이다. 둘째, 흑인남성과 함께 임무를 나눌 수 있는 생존을 위한 공동체를 만들고 유지하는 것이다. 셋째, 흑인여성들로 하여금 "어쨌거나"(regardless) 자신들을 사랑하도록 결단시키는 것이다. 넷째, 그들의 성적 선택을 존중하라는 것이다. "워머니스트는 다른 여성들을 성적으로 그리고 성적인 것과 관계없이 사랑한다."(Ibid., p. 182.) 다섯째, 워머니스트 신학은 모든 피부색주의(colorism)에 반대한다. 윌리암스는 "피부색깔의 다양성이 보편성의 본질이다."(Color variety is the substance of universality.)고 강조한다.(Ibid., p. 183.) 워머니스트 신학의 주제는 '어머니 되는 것'과 '양육'이다.
 
이러한 워머니스트 신학과 유사하게 미국의 토착 인디언들의 관점에서 전개하는 신학, 히스패닉 여성공동체의 입장에서 전개하는 신학, 아시안 아메리칸의 입장에서 전개하는 신학, 아프리카 신학, 아시아 여성신학 등 구체적이고 특수한 경험을 신학화하는 작업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그런가 하면 장애인들이 당하는 고통을 신학화하는 신학들도 나오고 있다. 이들은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통해 장애인들에 대한 신학을 강조하고 있다. 그중 한 학자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간단히 말해, 창조는 사물의 기원들보다는 관계들에 관한 것으로 봐야 한다.(다음을 보라. Janet Martin Soskice, "Creation and Relation," Theology 94 (1991): pp. 31-39; cf. B. A Gerrish, "Nature and the Theater of Redemption: Schleiermacher on Christian Dogmatics and the Creation Story," Continuing the Reformation: Essays on Modern Religious Thought (Chicago: Univ. of Chicago Press, 1993), pp. 196-216.) 창조 교리는, 세상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인류가 어떻게 지금의 그런 종류의 존재가 되었는지에 대한 설명을 의미하기보다는, 아직 낮일 때 우리가 일하도록(요 9:4) 부르심을 받은 그 질서를 규정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 정의로운 질서는 (1) 인간의 다양성을 어떤 가정적 동일성으로 축소함 없이 모든 인간을 존재의 근원으로서의 하나님과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본다. (2) 죄와 악의 관련을 자연과 사회적 질서 전체에 적용될 때만 수용하되, 개인의 삶에서는 그것을 변치 않는 정확한 법칙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한다. (3)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는 창조된 전체 존재와의 바른 관계와 통합적으로 관계된 것임을 주장한다. 그리고 (4) 창조/섭리나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작업을 완결된 행위라기보다는 계속되고 있는 과정으로 이해한다. 
 
이상의 인용문에서 제기된 문제를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은 것이 될 것이다. 첫 번째 문제는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 교리를 재해석하는 것이다. 즉 우리 모두가 서로의 관계에서는 매우 다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똑같은 피조물들이라는 것의 의미를 포착하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우리가 보여야 하는 신실한 반응은 "우리 모두는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의존 속에서 다른 모든 피조물들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겸손한 태도일 것이다.
 
두 번째 논점은 죄와 악 사이에 관련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개별적이고 개인적인 차원에서보다는 구조적인 것으로 본다. 이러한 접근은 개인에 대한 신정론적 질문을 악화시키지 않으며, 악으로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낙인찍거나 희생양으로 삼는 것을 비판한다. 가령, 요한복음 9장에 나오는 소경으로 태어난 사람에 대해 그 부모나 조상이 잘못했을 것이라고 단정하고 예수님께 질문했던 제자들의 자세는 오늘날도 많은 병원이나 사회에서 그대로 반복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장애인으로 태어난 것을 부모의 잘못으로 봄으로써 장애인이 그 자체로서 하나님의 피조물임을 보지 못하는 시각을 교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세 번째 논점은, 창조가 화해에 의해 성취될 정의로운 질서에 대한 비전을 제공한다는 생각이다. 이 정의의 질서는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만이 아니라 인간과 다른 동료와의 관계, 자연과의 관계, 그리고 물론 자연 자체의 내적인 관계들까지를 포함한다. 그렇다면, 화해는 그 정의(定義)상 내세적일 리가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자신과 화해시키시는 것은 분명히 이 세상이고 이 인류이다. 그리고 인간들은 그들의 삶 속에서 정의로운 질서의 비전을 실현하기 위해 일하는 한, 하나님의 화해의 사역에 동참할 수 있다는 것이다.
 
네 번째 논점은 과정으로서의 창조에 대한 성서적 관점을 되찾게 한다. 창조된 질서에 대한 하나님의 사역은 진행 중이며, 완벽(perfection)은 창조의 목표로서 우리 앞에 있다. 따라서, 과거처럼 창조와 구원의 섭리를 분리시키는 교리는 더 이상 창조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이다. 이렇게 장애인들을 위한 신학은 단순히 장애인들의 고통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보다 더 높은 차원에서 모든 피조물들의 올바른 관계를 지향하고 있다.
 
이 외에도 지면 관계상 자세히 설명할 수 없지만 전통적인 죄의 교리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통하여 중독자들의 문제를 다루는 신학도 최근에 등장하고 있다.
 
이렇게 최근의 신학은 통전적이고 관계적인 우주적 신학으로, 즉 인간만 아니라 존재하는 모든 생명을 살리고 구원하는 방향으로 나가려는 신학과, 구체적이고 특수한 사람들의 경험을 반영하여 그들의 공동체를 위한 신학으로 나가려는 두 가지 경향을 보인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지금까지 신학을 지배해 왔던 서구 백인 남성들의 시각에서 벗어나 탈서구적이며 대화적이고, 관계적이며 해방 지향적이라는 점에서 신학하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도전을 준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은 또한 한 종교 전통의 한계를 넘어서 다른 종교들에 대해 적극적 관심을 보이며, 동시에 지구상 가난한 자들에 대한 관심도 높다. 가령 폴 니터(Paul Knitter)라는 신학자는 종교다원주의 신학에서 종교 해방신학(Liberation Theology of Religions)으로, 그리고 최근에는 지구적 책임신학(Globally Responsible Theology)으로 나아가는 경향을 보이고 있는데, 이것이 아마 가장 최근의 신학적 관심을 보여주는 예가 아닌가 생각된다. 이렇게 풍성하고 다양한 신학의 전개는 우리 신앙인에게 중요한 도전으로 다가온다. 우리는 오늘 어떻게 하나님을 믿으며 신앙해야 할지 신학자들의 고민을 진지하게 공유하면서 신앙의 내용을 우리 삶에 실천하는 행동하는 신앙인, 신학자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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