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신학에 있어서 성령론과 신학방법론의 위기
현대신학에 있어서 성령론과 신학방법론의 위기
http://cafe.naver.com/modernth/1367 이재붕
Ⅰ. 성령론의 위기
1. 바르트의 성령관
[로마서]에서 바르트의 성령개념은 실존론적이고 변증법적 존재로 나타난다. 여기서 성령은 “신 (神)속에서 인간을 향해서 일어난. 그리고 인간 안에서 신을 향해서 일어난 영원한 결단” “실존론적인 의미 부여”이다. 성령은 “투쟁. 초능력. 하나님의 승리와 독재자이며 결코 동시에 휴식. 균형. 균등. 타당성이 아니다.” 성령은 “이것이냐. 저것이냐”이며 “이미 끝난 저것 (schon erledigtes Oder)에 대한 이미 성취된 이것 (ein schon vorweggenommes Entweder)"으로 묘사되고 있다. 바르트는 이 성령이 그리스도의 영이요. 진리의 영. 사랑의 영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은 그의 역설적인 변증법적 신학의 착상 속에서 역설적인 결단의 존재로서 나타나며. 인간으로 하여금 이것이냐 저것이냐에 대한 끊임없는 결단의 투쟁 속에 있게 하고. 안식과 평안과 휴식을 허용하지 않는 역동적인 존재이다. 이러한 변증법적 역설적 운동 속에서 진리와 사랑의 영으로서 성령은 결단의 존재. 곧 키엘케고르의 실존변증법에 의해 주도되는 역설적 존재로 변모하고 있다.
[교회교의학]에서 바르트의 성령개념은 극단적인 기독론적 계시신학의 테두리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 계시의 주관적 현실이 된다. 여기서 성령은 계시의 “주관적 현실”과 “주관적 가능성”으로 묘사된다. 주관적 현실 속의 성령은 구체적인 개개인의 현실이 아니라. 계시의 객관적 현실이 일어나는 인간들의 현실 속에서 역사한다. 바르트는 극단적인 기독론의 계시실증주의에 근거하여 성령을 이해함으로써 성령이 인간들의 실존 속에서 어떻게 역사하는가에 대한 질문은 스쳐 지나가고. 오로지 성령이라는 주관적 현실의 근거 위에서만 주관적 가능성에 관해서 말하려고 한다. 여기서 신자들의 주관은 “교회 현실의 주관적 측면”으로 묘사하여. 구체적인 개인의 실존에 역사하는 성령의 역사가 탈락되고 있다.
바르트는 “계시의 주관적 가능성”에 대하여 말할 때도 하나님 말씀의 선포와 성령의 부음이 일치화 내지 혼동하고 있다.
그의 성령 이해는 극단적인 계시 사건의 주관적 상응이기 때문에. 그의 성령론은 구체적인 개인의 마음 속에 역사하는 인격적인 성령의 역사를 객관주의적인 화해론 속으로 흡수하고 있다.
2. 불트만의 성령관
불트만은 성령을 비신화론화의 맥락에서 이해한다. 성령은 희랍적인 표상에서처럼 인간에게 신의 능력을 부여하며 그에게 지속적으로 귀속되며 그 속에 머무는 초자연적인 능력이 아니라. “지나가는 상태 또는 일회적인 행위를 유발시키면서. 각 상황과 매순간 인간을 붙잡거나 그에게 부여되는 능력”으로 파악된다.
불트만은 성령을 신자에게 부여되는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간주하는 표상이라는. 헬레니즘의 신인 (神人)사상에 영향받은 것으로 본다. 그는 성령을 기독자로 하여금 지나가는 세상으로부터 나오게 하여 다가오는 세계를 향해 결단하도록 하는 힘. 실존의 본래성을 찾도록 하는 능력으로 파악한다. 여기서 성령은 더 이상 신약성서가 증언하는 것처럼 부활이나 영원한 생명을 보장하는 인격적인 신이 아닐 뿐 아니라 신앙의 대상도 아니다 성령은 새로운 행동과 능력의 근원으로서 의지의 변화를 요구하고 전제하는 실존론적 힘이다. 불트만의 실존론적 성령론에서는 신약성서가 증언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과 영생을 믿는 초자연적인 신의 은사요. 삼위일체의 삼위인 인격적인 성령의 개념은 헬레니즘 신비주의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비신화론화 되어 버린다. 여기에 그의 성령론의 위기가 있다.
3. 틸리히의 성령관
틸리히의 존재신학은 성령을 통일 속에서 존재의 힘과 존재의 의미를 실현하는 존재의 현현 (顯現)으로 파악한다
신의 영은 삶의 차원 (dimension of life)로 인간의 정신 속에 거하시고 역사한다. 틸리히는 인간정신과 신 정신의 상관관계를 말한다. 즉 신의 정신은 인간정신 속에 거함으로써 인간정신은 자기자신으로부터 나온다. “신의 영의 내재는 인간정신을 위해서 초월이다 (The in of the divine spirit is an out for the human spirit)". 인간정신은 자기초월로 나아가며 궁극적이고 무제약적인 것에 의해서 붙잡힌다. 여기서 인간정신은 여전히 유한성에 있으나 동시에 자기자신으로 나와서 신적 정신의 충격 속에 들어간다. 틸리히는 이 영의 현재에 붙잡힌 상태를 “황홀”이라는 말로 표현했다. 이 황홀의 경험이 신앙의 행위이다. “황홀로서 영의 사역은 피조적인 구조를 훼파한다.”
영 현재(靈現在)의 현현 (顯現)은 기적적인 성격을 갖는다. 영은 “한 인격을 한 처소에서 다른 처소로 전이 (轉移) 신체 속에 새생명 산출. 딱딱한 신체의 침투”등의 “신체적 영향”과 “방언지식. 다른 사람의 인격의 내적 생각에의 침투. 원격 치유”등의 심리적 영향을 행사한다.
틸리히는 영의 현재의 두가지 중요한 성격을 지적한다. 그것은 보편적 성격과 특별한 성격이다.
영의 현재는 삶의 모든 영역에 대해 보편적인 충격을 주고 있으며. 초자연적인 방식으로 활동하고 있다
불트만이 영을 단지 실존론적인 힘으로 비신화론화시키는데 반해서. 틸리히는 영을 인간정신과 구분된 기적을 일으키는 초자연적인 존재로 파악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은 성서적인 삼위일체적인 삼위의 인격에서 탈락되고 모든 삶에 활력을 주는 존재의 힘으로 이해되어진다. 그러므로 신앙개념도 성서가 증언하는 인격으로 모시는 삼위일체적인 성령에 대한 인격적인 신뢰 행위에서 변질되어. 삶에 활력을 주는 존재의 힘에 참여. 곧 “황홀적인 행위 (ekstatische Akte)로 파악된다.
틸리히의 성령론은 성서의 특수한 삼위일체 구속적인 성령의 사역과 창조의 구조에 일반적으로 삶의 원천으로 역사하는 성령의 사역을 혼동하고 있다.
틸리히는 영에 의한 인간정신의 자기 초월 (Selbsttranszendenz)을 말함에도 불구하고. 이 자기초월은 반드시 성서적 전통에서 말하는 인격신 하나님에 의한 자기 초월 뿐아니라. 다른 종교의 신들에 의한 인간정신의 자기 초월을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의 성령론은 보편주의적 경향을 지니고 있다. 여기서 기독교 신학의 성령론은 일반 종교철학적 성령론 속에 흡수되고 있다. 여기에 그의 성령론의 위기가 있다.
4. 판넨베르크의 성령관
판넨베르크의 보편사신학은 성령을 “모든 생명의 창조적 원천 (schopferischer Ursprung alles Lebens)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는 구약성서적 유대교적 전통을 수납하면서 성령이란 모든 유기체가 출발하는 창조적 원천이라고 이해한다. 그리고 그는 현대생물학의 견해 “생명은 본질적으로 환경과 유기적인 관계속에 있고. 자기초월적이다”라는 삶의 생태학적 자기 초월 사상을 수용한다.
판넨베르크는 틸리히의 황홀경 개념을 비판적으로 수용한다. 틸리히는 황홀경 체험. 곧 영의 현재를 생명과정의 일반현상으로부터 분리시키면서 생의 자기초월을 “생명체 자신의 활동성 (Aktivitat des Lebens selbst)"으로 표상한다 그러나 판넨베르크는 “생명의 자기 초월을 동시에 생명체의 활동성”으로 설명하며 그리고 생명체를 자기한계 너머로 정립하는 “힘의 작용”으로 설명하고 있다. 생명체의 자기보존과 자기통합 기능은 그것의 자기초월 기능에 의존하고 있다. 여기서 판넨베르크는 성령의 우주론적인 차원을 현대 생물학과 대화하면서 재발견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성령의 우주론적 기능만을 강조하고. 구속론적인 기능을 간과하고 있다. 판넨베르크는 하나님 계시사건과 계시말씀을 조명하고. 우리에게 신앙을 일으키는 하나님의 영리역사를 거부하고. 이러한 정통주의적 해석은 영리주의적인 계시 이해라고 비난한다.
그는 성령의 역사 대신에 계시사건에 대한 “규제되지 않는 지각 (unbefangene Wahrnchmung)"을 강조한다. 자연인은 역사적 이성을 통해서 하나님 계시를 “전제없이 볼 수 있는 능력 (das vorausetzungs freie Hinsehen Konnen)"을 소유하고 있다고 말한다 여기서 판넨베르크는 세계 속에 있는 존재적 로고스와 인식능력에 작용하는 인식적인 로고스 사이의 유비 (특히 스토아 학파적인 유비)를 강조하고 있으며. 모든 세계형상은 유한한 의식속에 작용하는 동일한 세계정신의 형식이라는 헤겔의 관념론적 개념을 수용하고 있다.
여기서 성령론은 보편주의적 우주론적인 성령론이 되고. 성서가 증언하는 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 대속의 역사를 조명해 주고. 적용시키는 성서적 성령론에서 이탈하고 있다. 여기에 성령론의 위기가 있다.
5. 융겔의 성령관
융겔의 사변적 십자가 신학은 성령을 “삼위신의 관계” 다시말하면 “아버지와 아들 관계들 사이의 관계 (die Relation zwisc.hen den Relationen des Vaters und des Sohnes)"로서 파악한다
성령은 “신에 대한 신의 영원한 새로운 관계”이다. 이 관계는 기독론적으로는 “죽은 자로부터의 부활이요”. 존재론적으로는 “사랑자체의 존재”이다. “신은 자기를 헌신하시는 아버지와 헌신되시는 아들의 통일성 속에서 비로소 자기헌신의 사건 (das Ereignis der Dahingabe)이다. ”
자기 헌신의 사건으로서 성령은 신의 자기헌신을 자기소유에 사로잡힌 인간에게 적용한다. 성령의 영원한 새로운 관계를 통해서 인간은 “아버지와 아들의 마주 섬 (das Gegenuker von Vater und Sohn) 속으로 들어온다.
융겔은 삼위일체 신의 비밀에 관해서 말한다. “신은 자기자신으로 가면서. 존재한다. 곧 신은 신으로부터 신에게로 신으로서 (von Gott zu Gott als Gott) 간다.”
1) 자기자신으로부터 나오는 신은 “자기자신의 근원 (Ursprung se.iner Selbst)"이요 성부 신이다. 이 신은 존재와 비존재 이전의 근원적 존재이다. 그러나 융겔은 삼위일체 개념을 사변적으로 해석한다.
“신의 순수한 근원성이 존재를 구성함으로써. 그것은 동시에 무 (das Nichts)도 구성한다. 신이 자기자신으로부터 오기 때문에 그리고 오는 한에 있어서. 존재와 무는 있다.” 신은 무를 자기의 존재계기로서 가지고 있다.
2)“신은 신에게로 간다.” 신은 자기자신으로부터 나와서 신에게로 가고 또한 인간에게로 간다. 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속에서 인간에게로 오셨다. 신은 예수의 죽음 속에서 낯선 것 (Fremde)속으로 가신다. “그러나 그는 죽음속에서 가시며―무로 나아가나―무 속에서 침몰되지 않으신다. 그는 죽음의 낯선 것 속에서도 자기자신으로 간다. 그런 한 그는 죽음에의 승리자이다.” “그래서 그는 그의 종말론적인 목적인 인간에게로 간다.” 여기서 무는 신이 자기자신에게로 나아가는 계기로 표상되고 있으며. 인간의 구속을 위한 신의 대속적죽음의 의미가 사변적으로 해석되고 있다.
3) “신은 신으로서 온다 (Gott kommt als Gott)” “신은 소멸 (Vergehen)속에서도 소외되지 않는다.” “신은 오히려 반대로 죽음과 소멸을 소외시킨다.” 신은 그의 옴 속에서 (im Kommen)근원과 동시에 목적이 되시며. 스스로 이 근원과 목적을 매개한다. 성령은 신의 셋째 존재 방식으로서 “매개 (Vermittlung)"이다. 성령은 “사랑의 띠 (Vinculum Caritatis)"이다. 융겔은 틸리히. 판넨베르크. 불트만과는 달리 성령이 부여하는 신앙의 역할을 강조한다. 융겔은 “성령 속에서만 '예수는 주이다'는 문장이 믿어질 수 있다”고 말한다. 성령없이는 “예수와 신의 동일성”은 “과거로 머물며”. 우리는 예수를 주요 영원한 아들로서 신앙할 수 없다.”
여기서 성령은 “신의 고유한 생명에의 참여”이다. 이것은 “인격적인 힘”이요 “미래를 여는 힘”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융겔의 성령론은 전통적인 성령론을 그대로 수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신론과 기독론이 사변적 십자가 신학에 의해서 구조되어 있는 측면을 고려할 때. 그의 성령상(像)은 신으로 부터 신에게로 가는 신의 존재―존재와 무를 그의 존재방식으로 내포하고 있는 신―의 사변적 운동의 매개요. “생명을 위해서 생명과 죽음의 통일성”인 신의 존재가 지니고 있는 낭만주의적인 사랑의 띠로서 표상되어진다.
여기서 그의 성령론은 구체적인 구속의 적용.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보혈의 적용이라는 구체적인 구속행위에 관해서 침묵하고. 단지 신의 사랑을 인간에게 매개하는 인격적인 힘이요. 미래를 여는 힘만을 언급하고 있다.
Ⅱ. 신학 방법론의 위기
이처럼 현대신학에 있어서 신론. 기독론과 성령론의 위기는 신학 방법론 위기에 의해서 초래되고 있다. 초기 바르트 신학은 변증법에. 후기 바르트 신학은 극단적인 기독론의 사고에. 불트만의 신학은 역사적 비판학과 실존론적 사고에. 틸리히는 상관관계의 방법과 존재론적 사고에. 판넨베르크의 신학은 보편사적 사고에. 융겔의 신학은 사변적이고 낭만주의적 사고에 지배되고 있다.
1. 바르트의 신학 방법론
초기 바르트의 계시 사상은 변증법적 사고에 지배되고 있다. 로마서 1판은 헤르만의 종교적 개인주의와 경건주의와 결별하고 하나님 나라의 객관적 승리를 선포한다. 여기서 인간은 역사적으로 성장하는 신왕국의 동역자요. “보편적 신 능력의 부분”이다. 신의 역사 (歷史)는 변증법적 종합. 곧 세계에 대한 긍정과 부정의 종합 속에서 성장한다. “우리 속에 있는 신적(神的)로 것 (das Gottliche in uns)"은 윤리적 인간이 갖는 신에 대한 직접적 관계가 아니라. 신의 새창조 능력에 의해서 인간의 자연적 본성이 부정되고 새롭게 긍정되는 변증법적 관계이다.
이 하나님나라 개념은 블룸하르트 (Blumhardt) 부자에 의해 제시된 신본주의 사상―세계쇄신이란 오로지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 실현되며 인간의 도덕성에 의한 것이 아니다―의 영향을 받고 있다 신의 나라는 세계사 속에서 어떤 목표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것은 “하늘로부터 수직적으로” 내려온다. 여기서 바르트사상은 계시 초절(招絶)사상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 이러한 초절사상은 [로마서] 2판에서는 키에르케고르의 변증법사상 영향으로 더욱더 심화되고 있다.
로마서. 2판의 바르트 사상에서는 신과 인간의 무한한 질적 차이가 강조되고. 신과 인간 사이의 어떤 직접적 관계도 부정되며. 신은 "신적 타자 (神的 他者)"로서 파악된다. 신 존재에 대한 신학적 진술은 직접적으로는 불가능하다. 신의 존재는 키에르케고르의 “순간”. “동시성” 개념을 통해서 변증법적으로만 진술된다.
신은 순간 속에서 이 세계에 알려지나 동시에 은폐된다. 세계 속에서의 신 인식은 “불가능한 가능성”이다. 신은 영원 속에 계시고. 세계나 역사 속에 계시지 않는다. 변증법적 사고에 의해 비로소 인식되는 신의 존재는 알려지는 동시에 은폐되는 초절적 존재 (招絶的 存在) 이므로, 신인식은 역설적으로만 가능하다. 바르트의 .로마서.는 이처럼 변증법적 사고에 의해서 지배되고 있다 변증법적 사고는 바르트 .로마서. 주석의 방법론적 사고가 되어 버리고 있다. 그것은 초월적인 신을 드러내는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을지언정 성서적 신을 드러내는 유일한 방법이 될 수는 없다. 이 변증법적 사고는 [로마서] 2판의 신개념을 초절적 존재로 변형시키고 있다.
바르트의 [교회 교의학] 사상은 [로마서] 사상의 변증법적 사고에 극단적으로 대립되는 범기독론적 사고에 지배되고 있다. 교회 교의학 사고의 주춧돌은 예정론이다. 예정론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선택 안에서 신의 원결정(原決定)이다. 여기서 바르트는 기독론적인 집중으로 로마서의 변증법적 사고를 극복한다. 그러나 바르트의 사고는 기독론 중심의 사고를 넘어서서 기독론을 그의 신학적 사고의 원리로 파악하게 됨으로써. 범기독론적 사고로 나아간다. 이러한 극단적인 기독론적 사고는 바르트의 교의학적 사고를 보편구원론적인 체계로 변형시키고 있다.
그의 보편구원론적 체계는 그의 예정론에서 기초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선택하시는 신이요. 선택되는 인간이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선택 안에서 인간에게 첫째의 것. 선택. 행복과 생명을 자기자신에게 두번째의 것. 유기. 저주와 죽음을 생각하셨다”그러므로 유일하게 선택된 자는 인간이요. 유일하게 유기된 자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이 은총의 선택론은 보편 기독론적으로 기초되어 있으며. 보편구원론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바르트의 보편기독론적인 체계속에서 어거스틴. 루터와 칼빈에 의해 견지되어 왔던 이중예정론 (二重豫定論)은 기독론적인 일원 (一元) 예정론으로 변형되고 있다 이러한 보편구원론으로 구조된 예정론은 바르트 신학체계를 로마서의 위기사상과 변증법적 사고체계에서 벗어나. 극단적인 화해와 낙관주의에 지배되도록 하고 있다.
개혁주의적 교의학 계열인 창조와 구속. 율법과 복음의 순서는 이러한 극단적인 기독론의 사고에 의해서 구속과 창조. 복음과 율법의 순서로 변형되고 있다. 기독론적 사고는 어거스틴. 루터와 칼빈에서 보는 것처럼. 신학의 중심에는 틀림없으나. 이것이 바르트처럼 극단화 될 때. 그리스도는 더이상 인격이기 보다는. 신학적 원리가 되어 버린다. 그래서 개혁신학사상이 강조하는 종말론적인 심판의 지평. 복음이 우리를 향해 부과하는 인간의 순종과 결단의 책임성이 탈락되고. 만유의 회복이라는 사변적인 낙관주의가 교의학적 사고를 지배하게 된다. 여기에 방법론의 위기가 있다.
2. 불트만의 신학 방법론
불트만의 신학사고는 한편으로는 역사적 비판학과 다른 한편으로는 실존론적 사고에 지배를 받고 있다.
현대 자유주의 신학의 역사 비판학 방법에 영향을 받아 불트만은 현대의 자연과학적 세계상의 관점에서 신약성서를 이해한다. 현대 역사 비판학의 방법은 상관관계. 유비. 비판이라는 내재적 인과율에 의한 역사적 사건의 확증이다. 이러한 내재적 인과율에 비추어서 성서의 세계상은 신화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신약성서가 증언하고 있는 예수의 생애와 복음행적은 결단코 역사적인 예수의 역사적 실제 모습이 아니라. 초대교회의 신앙고백이 되어 버린다.
이러한 내재적 인과율에 입각한 역사적 비판에 의해서 불트만은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구속사건이 일어났다는 순수사실(das bloe Da)을 제외하고는. 신약성서에 증언된 모든 예수의 말씀. 동정녀 탄생. 기적 행하심. 십자가 죽음과 부활과 승천 사실. 재림 예언 등은 신화론적인 진술이라고 단정한다.
이처럼 자유주의적 역사 비판학적 방법은 불트만의 신학사상으로 하여금. 역사적 사실을 부정하고. 오로지 케리그마 (kerygma)의 의미성만을 인정하도록 했다. 역사적 비판학적 방법은 신약성서에 나타난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구속사건을 부정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불트만의 실존론적 해석학적 사고는 이러한 신화론적 표상으로 증언되어 있는 케리그마의 의미성 (Bedeutsamkeit)을 실존론적으로 드러낸다. 그는 하이덱거의 실존분석의 착상을 성서 이해에 도입해서 신약성서의 케리그마가 지니고 있는 실존이해를 드러내려고 한다. 이러한 신화해명의 시도가 그의 비신화론화의 프로그램이다.
이러한 실존론적 해석은 예수의 동정녀 탄생. 메시야적 사역. 십자가 대속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이라는 성서적 케리그마의 사건성을 신화론적인 표상으로 간주하여 제거해 버리고. 이 케리그마의 실존론적 의미성만을 인정하기에 이른다.
여기서 불트만의 방법론에서는 케리그마와 역사 사이의 연속성이 부정되는 방법적 이원론이 야기된다
역사비판적 사고와 실론론적 사고는 성서의 계시사실을 드러낼 수 있도록 제한적으로 사용되어야 한다. 그러나 불트만은 양자를 극단적으로 사용함으로써 극단적인 역사 비판적 사고를 통해서 신약성서가 증언하는 초자연적 구속사건을 부정하기에 이르고. 극단적인 실존론적 사고를 통해서 신약성서 케리그마를 비신화론화하고. 그 구속론적 의미를 인간학적 실존론적 의미성으로 변형시키기에 이른다. 여기에 방법론의 위기가 있다.
3. 틸리히의 신학 방법론
틸리히의 새존재 신학은 상관관계의 방법과 후기 쉘링에 영향받은 신비―존재론적 사변적 방법에 지배되고 있다.
틸리히의 상관관계의 방법―철학은 질문을 제시하고 계시는 해답을 준다―은 성서 메시지와 인간 실존의 상황 사이의 관계를 매개하는 점에 있어서 문화신학의 방법으로서 유용한 측면을 제시해 주고 있다.
상관관계적인 착상을 가지고 틸리히는 변증법적 사고에 있어서 야기되는 신―인간 사이의 접촉점 상실을 극복하고. 자유주의 사고에 있어서 야기되는 양자사이의 경계 혼동내지 상실을 극복한다 그는 철학과 신학. 이성과 계시. 문화와 종교. 세속과 거룩. 제약적인 것과 무제약적인 것. 사고와 신앙의 경계에서 사고하면서. 양자의 분리보다는 연결을 시도한다. 그런 점에 있어서 그의 상관관계적 사고는 문화신학적 착상으로 유용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틸리히는 이 상관관계의 방법론적 사고에 있어서. 메시지와 상황 사이의 균형을 취하지 않고. 상황에 의존해서 메시지를 변형시키고 있다. 상황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사고란 그가 성서 메시지를 하나님의 아들. 삼위일체의 제2위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부터 후기 쉘링의 사상에서 영향받은 새존재의 복음으로 변형시키는데 있다.
그는 현대의 무종교적 상황을 지나치게 의식하여. 기독교적인 개념을 철학적 개념내지 심층심리학적 개념으로 대체한다.
그래서 삼위일체적인 인격신은 “존재 자체”. “무제약적인 것” “존재의 힘”. “모든 존재의 근거와 의미”로 변모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삼위일체의 제2위 되신 구속자가 아니라. “새 존재의 담지자”가 되고. 성령은 인격적인 위로자요 삼위일체 신의 구속에 대한 증언자가 아니라 “통일속에서 존재의 힘과 존재의 의미를 실현하는 존재의 현현(顯現)"으로 변모된다. 신앙은 삼위일체 신에 대한 인격적인 신뢰가 아니라. 유한한 현실의 초월적 근거와 의미로서 모든 유한한 현실 속에 실재하는 신적인 것. 궁극적인 것에 대한 관심이다.
이러한 신비존재론적인 사변적 사고 속에서 인격적인 신. 그리스도. 성령 개념은 중성적인 개념으로 변질되고. 범신론적인 혼동이 야기되고 있다.
그리하여 그의 새존재에 대한 사변적 사고는 개혁주의적 의인론을 보편주의적으로 해석해 버린다. 그는 의인을 보편적 로고스적 기독론에 의해서 신앙자 뿐아니라. 불신자. 회의자. 무신론자에게도 적용시키고 있다 그럼으로써 그의 새존재 신학은 이 신비적 존재론적 사변에 의해서 만인구원론 사상으로 나아가고 있다. 여기에 신학 방법론의 위기가 있다.
4. 판넨베르크의 신학 방법론
판넨베르크의 역사신학은 보편사적 사고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 바르트의 극단적인 기독론적 사고가 지니는 방법론적 협착성이 계시를 원역사의 항구 속에 정박시키고. 불트만의 실존론적 사고가 지니는 방법론적 협착성이 계시를 실존의 역사성 속에 제한시키는 데 대한 반작용으로서. 판넨베르크는 보편사를 신의 계시 영역으로 제시한다. 그의 보편사적 사고는 바르트나 불트만의 신학 방법론이 기독교 계시를 특수한 영역에 제한시키려는 시도에 대항하여. 기독교 계시를 역사의 모든 영역으로 파악한다. 그래서 판넨베르크는 그의 계시신학을 보편사신학으로 정립해서. 희랍적인 철학적 신 질문과 역사학적 신 질문에 대해서도 탁월한 기독교적 해답을 제시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의 보편사적 사고는 한편으로는 유대교 묵시록의 역사 이해에 근거하고 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헤겔의 이성주의 역사 이해에 근거하고 있다. 진정한 성서적 사고는 유대교 묵시록이 제시하고 있는 은폐성 속에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역사계시이다. 그러나 판넨베르크의 사고는 헤겔의 이성주의적 역사 이해에 지배된다. 묵시록의 역사 이해는 역사 전체를 개관하고 있다. 묵시록적 표상에 의하면 역사 속에서 드러내시는 신은 역사 도중에는 은폐되어 있다. 그러나 헤겔의 역사 이해는 역사 전체를 개관할 뿐아니라. 역사 속에서 신이 역사 행위 속에서 사건의 연관을 통해서 자명하게 스스로를 드러낸다고 본다. 여기서 판넨베르크의 계시이해는 유대교 묵시록적인 이해에 의해 주도되지 않고. 헤겔의 이성주의 계시 이해에 의해서 주도되고 있다.
이러한 보편사적 사고는 계시사건을 역사사건과 동일시 하고 있기 때문에 계시사건이 지니는 구속론적 은폐성을 탈락시키고. 역사 종국의 의미를 오로지 신성의 보편적 증거로서 파악하기에 이른다. 성서적 증언에 의하면 역사 종국의 의미란 역사의 구속이다. 역사 구속을 위해서 임하는 신은 이제 불신자들에게도 참신으로 드러난다.
판넨베르크의 보편사 사고는 헤겔의 역사 철학의 계시이해에 의해 영향 받고 있기 때문에 역사 일반 과정과 역사 구속의 과정을 혼동하기에 이른다
판넨베르크의 보편사적 사고는 역사만을 계시의 유일한 범주로 봄으로써 성서적 계시의 다른 범주. 율법 부여. 예언의 말씀. 지혜의 말씀을 도외시 하기에 이르고 있다.
그의 기독론적 착상도 보편사적 사고에 의해 주도되어. 구속론적 착상을 도외시하고 예수의 역사적 모습 속에서 기독론적 의미성을 드러내려고 한다. 여기서 그의 기독론은 구속론적 관심에서 추상화된 순수 역사적 관심에 의해 주도되며. 구약성서에 있는 고난의 종의 사상. 메시아의 도래 사상 등을 도외시하고. 단지 유대교 묵시록의 죽은 자의 부활 사상의 지평에서 전개되고 있다. 여기에 그의 보편사적 신학적 사고의 일면성과 제한성이 있다. 역사는 성서계시의 하나의 범주이지 유일한 범주가 아니다. 그런데 판넨베르크는 성서의 계시를 오로지 역사 범주로서만 이해하고자 한다.
5. 융겔의 신학 방법론
융겔의 사변적 십자가 신학은 바르트의 계시 신학적 사고와 헤겔의 사변적 종교철학에 지배되고 있다.
융겔은 바르트의 계시 신학적 사고의 영향아래서 판넨베르크의 역사적 자연신학적 사고를 거부하고. 신 인식이란 이성적 통찰이 아니라 신앙사건이라고 말한다. 계시적 사고 안에서 그는 판넨베르크에 의한 신 사고의 보편성 요구를 수용한다. 신 경험은 우리의 세계 개념과 모순 속에 있다 할지라도. 이 모순 기능 속에서 “인간의 세계 경험과 자기 경험을 견디어 내는 경험으로 증명될 수 있어야 한다.” 신의 보편성은 “신의 계시 근거 위에서” 세계 경험과 자기 경험 속에서 이성적으로 증명될 수 있다.
융겔은 여기서 그가 한편으로 거부한 자연신학의 사고를 계시신학적 사고 안에서 받아들이려고 한다.
이러한 계시신학 안의 자연신학적 사고 착상은 무신론 사상에 의해 대표된 현대사상에 직면하면서 기독교 신학을 변증해 보고자 하는 그의 시도이다.
그는 현대의 무신론적 사상에 직면해서 십자가 신학의 사상을 전개한다. 융겔은 신의 존재를 .죽음으로부터의 삶.으로 이해한다. 신은 그의 존재 안에서 무(無)의 무화 (無化)시키는 능력을 견디어 내고. 고난받으면서 무화되지 아니하신다. 그러므로 융겔은 십자가 신학을 무신론이 정당성을 갖는 근거로 제시한다. 그는 십자가 신학의 착상 속에서 유신론과 무신론의 양자택일을 극복하고 고난받으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신의 존재 속에서 이 양자의 대립을 극복하고자 한다. 이러한 그의 십자가 신학적 사고는 헤겔의 '신죽음 사상'과 '죽음의 죽음'이라는 정신의 변증법 사고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
헤겔의 정신 현상의 변증법적 사고는 신의 존재가 죽음으로부터 죽음의 죽음이라는 형성으로서의 생명이 되고 있는 과정을 변증법적으로 말하고 있다.
융겔의 십자가 신학적 사고가 헤겔이 종교철학에서 행한 십자가 사건에 대한 사변적 변증법적 해석에 의해 지배되고 있는 결정적인 사실을 융겔이 신 존재가 죽음을 그의 존재의 필연적인 계기로서 수용하는 헤겔의 사상을 받아들이는데 있다. 여기서 융겔의 십자가 신학은 십자가 사건을 더 이상 성서적 의미. 곧 인류의 죄를 위한 대속적이고. 우연적이며. 역사적인 사건이 아니라. 영원한 신이 자기로부터. 자기에게로. 자기로서 실현하는 필연적인 과정의 한 계기로 이해하고 있다. 이 절대적인 정신의 변증법적 자기 전개속에서 성서적인 죄의 타락은 꿈꾸는 무죄상태로부터 변증법적 소외과정으로 들어감. 십자가 사건은 부정의 수납. 부활 사건은 부정의 부정이라는 필연적인 신존재 과정의 한 계기로서 변형되어진다.
여기에 신학적 방법론의 위험성. 곧 종교철학적 사고에 이해 지배되는 교의학적 사고의 위험성이 있다.
Ⅲ. 개혁신학의 진로모색
이러한 현대신학의 위기 속에서 개혁신학은 중대한 사명에 직면해 있다. 필자는 현대신학에 있어서 개혁신학의 과제를 다음 세 가지로 제시해 보고자 한다.
1. '오로지 성경(Sola Scriptura)' 사상의 재발견
첫째. 개혁신학은 모든 신학의 근본 원리인 '오로지 성경 (Sola Scriptura)' 사상을 재발견해야 한다. 현대신학 속에서 개혁신학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모든 신학사상으로 하여금. 신학적 반성의 성서적 합성 (Schriftangemessenheit der theologischen Reflexion) 이념을 일깨워 주는 것이다. 하나님 말씀인 성경은 모든 신학의 반성의 등대요 기준이다.
신학의 반성은 인간의 신 경험과 신앙체험에 대한 추후적인 반성이다. 이 신학의 반성은 인간 이성에 의한 반성이다. 인간 이성은 신이 우리 인간에게 부여해 주신 창조의 일반은사이다. 그러나 인간 이성이 하나님의 뜻에 순응치 않고. 자율적인 지식의 권리를 요구하게 될 때. 그것은 신의 뜻을 스스로 알려고 하는 자아신격화(自我神格化:Selbstvergottlichung)에 이르게 된다. 이것은 첫 인간이 범한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하신 지식의 선악과를 따먹는 교만 (Hybris)의 범죄이다.
인간 이성은 계시의 빛 아래 조명될 때에만 비로소 그 온전한 신 이해의 반성을 수행할 수 있다. 이 계시란 곧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다. 이 성경의 제자가 되기를 배울 때에만 신학의 반성은 비로서 자율성 차원에서 벗어나. 진정한 의미에서 신율성 차원으로 들어갈 수 있다. 신학의 반성이 성경의 계시 말씀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인격적인 신의 로고스를 향해 인간의 지성이 열리는 것을 말한다.
틸리히는 계시를 향해 열리는 신율적 사고를 제시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이해한 복음이 성서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기보다는 형이상학적 새 존재의 복음으로 변질한 이유는 그가 성서적 계시를 그의 신학적 사고의 표준으로 두지 않고. 후기 쉘링적인 계시의 철학에 정위되었기 때문이다. 바르트가 그처럼 하나님 말씀과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외치고. 성경을 신학의 표준으로 삼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신학은 만인구원론의 신학을 향해 열리고 있다.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속자 보다는 오히려 만세 전에 선택된 신학의 원리로 파악함으로써. 성서의 계시가 텍스트의 고유한 사실에 입각해서 증언하는 계시 말씀에 충실하지 못했다.
불트만도 신약성서를 현대인들에게 적합하도록 해석하려고 했으나. 그의 실존론적 사고를 지배한것은 신약성서의 계시가 아니라. 하이데거의 실존철학이었다.
판넨베르크도 보편사를 성서적 계시의 범주로 파악했으나. 그는 성서의 계시가 제기하고 있는 역사개념보다는 헤겔이 이해한 역사철학적인 이성주의적 계시 이해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
융겔도 현대의 무신론적인 상황에 대해서 계시 신학적인 측면에서 해답을 제시하려고 했으나. 그가 해답으로서 제시하고 있는 십자가 신학의 착상은 성서적 계시에 근거한 구속론적인 이해에 의해 전개되지 않고. 헤겔의 사변적 철학에 영향받고 있다.
개혁신학은 현대신학의 한 흐름이다. 그러나 개혁신학은 그 풍요한 전통의 보고로부터 창의적으로 사고하고. 현재주의 신학과 토론해야 한다. 그래서 개혁신학은 현재주의 신학이 망각하고 있는 이 성서적 합동에서의 이탈을 지적해 주고. 신학적 반성은 성경 말씀에 일치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예언적 사명을 다 해야 한다.
2. 상관관계의 방법론 의식의 활성화
둘째. 개혁신학은 현대신학의 신학사적인 공헌인 메시지와 상황과의 연결이라는 상관관계의 방법론 의식을 활성화시켜야 한다.
개혁신학은 단순히 전통신학일 수만 없다. 전통신학이란 전통적으로 주어진 교부들과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사상들을 그대로 지키려고만 한다. 따라서 여기에는 신학의 새로운 발전은 없다. 개혁신학은 창의적 사고를 지닌 보수 신학이어야 한다. 개혁신학은 사도들과 종교개혁자들이 전해준 신학의 전통을 오늘날의 시대상황에 적합하게 창조적으로 계승한다.
이러한 기독교전통의 창조적 계승을 수행하기 위해서 개혁신학은 “상관관계의 방법 (Methode der Korrelation)"을 수용한다. 개혁신학은 현대 인간의 문화적 상황이 제기하고 있는 질문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성서적 계시에서부터 제기하고자 한다.
개혁신학의 과제란 성서적계시와 현대의 문화적 상황 사이에 대화의 수행이다. 이 대화에는 해석학적 과제가 요구된다. 왜냐하면 성경의 계시는 2천년이라는 역사의 이해지평을 지니고 있고. 현대의 문화적 상황은 현대적인 이해지평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 둘 사이에 시간적 간격과 더불어 문화적 간격이 존재하고 있다. 이 간격을 좁히고. 성경적 계시가 현대의 문화 상황을 향해 선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 상관관계의 방법을 성경적 계시와 현대의 문화적 상황과 역동적인 대화 속에서 수행되어야 한다. 현대신학자들처럼 현대적 사상의 선입견이 성경의 계시내용을 변질시키서는 안된다.
불트만의 실존론적 사고는 신약성서를 현대의 실존철학과 자연과학적 사고에 입각해서 해석함으로써. 성서적 계시를 실존론적 의미성으로 변질시키고 있다. 틸리히의 존재론적 사고도 성서적 계시개념을 현대의 심층심리학과 철학적 존재론의 범주로 해석함으로써. 성서적 계시 내용을 새 존재적인 의미성으로 변질시켰다. 판넨베르크의 보편사적 사고도 성서적 계시를 현대의 인간학과 이성주의적 역사 범주로써 해석함으로써. 성경의 계시 내용을 보편사적인 연관의 의미성으로 변형시키고 있다. 융겔의 사변적 십자가 신학적 사고도 성경의 계시를 헤겔의 사변 철학적인 존재론 도식으로 해석함으로써. 성경의 계시 내용을 사변철학적인 존재론의 내용으로 변형시키고 있다.
초기 바르트는 현대적인 상황이 제시하는 위기. 불안. 혼돈. 좌절. 간격의 질문에 치중해서 로마서를 해석함으로써. 로마서의 의인사상을 초절주의 사상으로 변형시키고 있다.
후기 바르트는 성경의 계시가 지니고 있는 화해와 은총의 복음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성경의 계시를 보편 기독론과 보편 화해론의 복음으로 변형시키고 있다.
성경의 계시와 현대 상황과의 대화에 있어서 질문과 해답의 운동은 균형잡혀야 한다. 성경의 계시의 메시지 내용은 결단코 현대 상황의 질문과 대화에 있어서 변질되어서는 안된다. 그럴 때 신학은 텍스트 없는 신학. 곧 상대주의적 신학이 되어버린다.
성경의 계시는 현대 상황이 제기하는 질문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럼으로써 시대착오적인 신학이 아니라. 시대를 향해 예언의 말씀을 선포하는 예언적 신학이 된다.
3. 변혁적 문화 신학의 정립.상황연관의 교의학
셋째. 개혁신학은 성경의 메시지와 현대 상황 사이의 대화를 통해서 상황 연관적인 교의학 곧 변혁적 문화 신학을 정립할 수 있어야 한다.
(1) 문화 개념
여기서 문화신학이란 결코 19세기의 문화기독교주의를 말하지 않는다. 19세기 문화기독교주의는 기독교계시를 평가절하하고. 기독교신학의 반성을 오로지 인간의 종교적 경건성. 문화적 활동에 집중시켰다. 그리하여 문화기독교주의는 기독교를 문화 현상과 일치시켜 버리는 오류에 빠졌다.
그러나 개혁신학이 정립하고자 하는 문화 신학이란 성경의 계시에 기초한 신율성 이념에 근거해 있다. 성경의 계시는 문화를 초월하면서도 동시에 문화에 내재한다. 성서적 계시―모세의 율법. 예언자들의 예언. 예수의 선포. 사도들의 선포―는 항상 위로부터 수직적으로 내려오는 하나님의 말씀이며 동시에 인간의 구체적인 문화적 상황을 조명하고. 문화의 변혁과 쇄신을 선포한다.
여기서 문화란 인간 삶의 총체성의 영역―자연. 사회질서. 정치. 경제. 문예. 예술. 의학. 기계기술. 법질서 등―이다. 기독교 신학은 이 인간 삶의 총체적 영역에 대해 신학의 반성을 수행하고. 이 인간적 삶의 총체적 영역 속에서 갖는 기독교신앙의 의미를 해명해야 한다.
하나님은 이 인간 삶의 총체적 영역 속에서 구속자로서 그 구속행위를 수행하신다. 교회는 그의 구속행위에 봉사하는 종말론적 공동체이다. 이 신의 구속행위는 총체적 영역 속에서 인간실존의 영역에서부터 문화의 모든 영역을 향해 전개된다.
이 문화의 모든 영역은 신의 일반은총에 의해서 지탱되는 영역이기는 하나 인간과 인간 집단의 원죄와 부패성으로 감염된 부조리한 구조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인간 문화는 무조건 찬양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비판적으로 조명 받아야 한다.
인간문화는 개인적으로 사회구조적으로 변혁되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개혁주의적 문화신학은 개혁주의적인 의인(義認)사상을 개인주의적 영역에만 제한 시키지 않고 나아가 사회 집단과 구조적인 영역에 적용시킨다. 이러한 문화신학은 포용적 소격화 과정과 변혁적 친숙화 과정을 두가지 해석학적 계기로서 내포하고 있다.
(2) 포용적 소격화
이러한 문화신학의 방법론은 기독교적 현상학적 방법이다. “기독교적”이란 신학적 반성이 성경의 계시 말씀 속에서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삼위일체의 자기 증시에서 출발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현상학적”이란 신학적 반성이 모든 인간의 문화적 영역속에서 자기를 증시하시는 하나님의 계시를 드러내고. 기술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그러므로 기독교적 현상학적 사고는 성경의 계시와 인간의 문화적 상황을 연결시키는 상관관계의 방법에 입각하고 있다. 기독교적 현상학적 방법이란. 다만 이 상관관계적인 방법을 좀더 엄밀한 방법론적 반성 속에서 수행하고자 한다.
기독교 현상학적 사고는 인간문화의 다양한 모습들. 곧 고유한 문화현상들을 기술한다. 그것은 문화의 현상이 다양한 것을 알기 때문에. 하나의 신학적 중심 착상을 인정하나. 하나의 신학적 원리를 인정하지 않는다.
문화신학의 착상은 바르트의 기독론적 계시 착상을 루터와 칼빈의 기독론적 의인신학 착상의 테두리 안에서 변혁적으로 수용한다. 이 착상은 불트만의 실존론적 착상을 루터의 실존 강조 사상의 테두리 안에서 변혁적으로 수용한다. 이 착상은 틸리히의 존재론적 착상을 종교철학적인 변증학적 개념의 테두리. 철학적 질문과 계시적 대답의 상관관계적인 사고의 테두리에서 변혁적으로 수용한다. 이 문화 신학의 착상은 판넨베르크의 보편사 신학의 착상을 쿨만의 구속사 신학 입장에서 변혁적으로 수용한다.
이 착상은 융겔의 십자가 신학의 착상을 루터적 십자가 신학의 테두리 안에서 변혁적으로 수용한다.
그러므로 문화신학의 착상은 현대신학의 강조하고 있는 다양한 측면들. 곧 기독론적인 측면. 실존론적인 측면. 존재론적인 측면. 역사적 측면. 신의 고난의 측면을 문화신학적 사고의 중요한 계기들로서 포괄한다.
문화신학의 착상이란 기독교교의학을 현대 상황과의 대화 속에서 해석하고 전개시키는 상황연관적인 교의학적 착상이다. 그러므로 문화신학은 교의학의 근거 위에 있어야 한다. 포용적 소격화란 문화 상황의 다양한 측면들을 그 차이점에 있어서 의식화하면서 수용하는 신학적 사고의 해석학적 계기이다.
(3) 변혁적 친숙화
그러나 이러한 포괄적 수용은 결단코 혼합내지 혼동의 시도는 아니다.
그것은 변혁적 친숙화 과정으로 나아가야 한다. 변혁적 친숙화란 다양한 상황의 측면들을 성서 메시지의 중심 사상에 준거하면서. 서로 연결시키고. 이 연결된 새 의미를 신학적으로 해석하는 계기이다.
개혁주의적 문화신학은 바르트의 착상이 예수 그리스도를 신학의 원리로 만든 것을 비판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역사적 성육신과 메시야적 사역과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의 사역 속에서 보편 구속론적이 아닌. 성서적 구속론적으로 해석한다. 개혁주의 문화신학은 불트만의 착상이 신약성서의 케리그마를 비 사실화 시키고. 케리그마의 사실성을 실존론적인 의미성으로 변형시킨 것을 비판하고. 케리그마의 역사적인 연계성. 즉 사실과 케리그마의 상호 연속성을 강조한다.
개혁주의 문화신학은 틸리히의 착상이 성경의 케리그마를 존재론화 시키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새존재의 복음으로 변형시킨 것으로 비판하고. 기독교적 삼위일체 신개념과 구속과 의인 등의 교의 개념은 모든 철학적 사변적 존재론의 실체가 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개혁주의 문화신학은 판넨베르크의 착상이 성서적 역사개념과 계시개념을 이성주의적 개념으로 변형시키고 있는 것을 비판하고. 계시는 역사 안에서 초월적으로 인류의 구속을 위해서 우연적으로 특수하게 주어진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개혁주의 문화 신학은 융겔의 착상이 성경의 십자가 사건을 사변적 철학적인 사건으로 변형시키고 있는 것을 비판하고. 십자가 사건은 인류의 대속을 위한 삼위일체 신의 구속행위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Ⅳ. 마무리
따라서 개혁신학은 현대신학의 마당 안에서 현대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배타적인 비판이라는 수세적인 자기 방어에만 머물지 않고. 현대신학 사상들이 현대의 정신적 상황과 대결하면서 제기하는 새로운 신학의 착상들을 비판적으로 수용하면서. 현대신학에 새로운 성서적 계시에 정위된 신학을 정립해야 한다. 여기에 개혁신학의 미래가 존재한다. 상황연관적인 교의학이 곧 문화신학이다. 교의학이 상황과 연관되면서 전개될때 그것은 문화신학이 된다. 문화신학이란 개혁 신학의 미래적 과제이다.
그것은 상관관계적인 방법적 사고에 의해서 현대 사상과 문화의 다양한 계기들을 포용하고. 동시에 성경의 계시 사상 근거 위해서 그것들을 변혁적으로 친숙화 하는 상황연관적인 교의학적 사고의 전개로서 가능하다. 상황연관적인 교의학이란 곧 해석학적인 교의학이다. 변혁주의적 문화신학이란 전통교의학의 기초 위에서 현대의 상황과 대화하며. 그 신학적 의미를 천명하는 해석학적 교의학이다.
주
1. K. Barth, Romerbrief, 1922, 1967, p. 266.
2. K. Barth, Kirchliche Dogmatik I/2, pp. 222ff.
3. K. Barth, 상게서 p. 262.
4. R. Bultmann, Theologie des Neuen Testamentes 761968, p. 159.
5. R. Bultmann, 상게서 p. 165.
6. P. Tillich, Systematic Theology Vol. III. Digswell place Great Britain 1968. P. 118.
7. 상게서 p. 119.
8. 상게서 p. 122.
9. 상게서 p. 122.
10. W. Paunenberg, Glaube und Wirklichkeit, 1975. P. 41.
11. W. Paunenberg, Glaube und Wirklichkeit, 1975. P. 34, p. 4
12. 상게서. P. 51.
13. W. Paunenberg, Offenbarung als Geschichte, Gottingen .41970. P. 20. P. 100.
14. 상게서 p. 100.
15. E. Jungel, Gott als Geheimnis der Welt p. 513.
16. 상동.
17. 상게서 p. 514.
18. 상게서 p. 522.
19. 상게서 p. 522.
20. 상게서 p. 524.
21. 상게서 p. 525.
22. 상게서 p. 531.
23. 상게서 p. 531.
24. 상게서 p. 533.
25. 상동.Ⅱ
1. E. Busch, Karl Barths Lebenslauf, Munchen 1978. 96-109.
K. Kupisch, Karl Barth in Selbstzeugnissen und Bilddokumenten, Stuttgart 1977, 37 ff.
2. K. Barth, Romenbrief 721922. P. 96.
3. 拙稿. '바르트의 義認論' 神學正論 1986. 11. Pp. 385.; 38388.
4. H. Zahrnt, die Sachemit Gott, 1972, p. 275.
5. P. Tillich, .kritisches und positives paradox. In Anfange der dialektischen Theologio, Munchen 1962. Pp. 166-169.
F. W. Kantzenbach, [Programme der Theologie] Munchen 2 1978. P. 25
6. P. Tillich, Ges. Werke XII. P. 31f. Ges. Werke VII P. 14.
7. 拙稿. .판넨베르크의 보편사 신학과 라이너 학파의 보편구속사 신학. 신학정론 1985. 5. P. 126
판넨베르크의 해석학으로서의 歷史神學 in : '現代神學의 展望' pp. 19-25.
8. G. W. F. Hegel, Vorlesungen uber die Philosophie der Roligion II/2. (hrsg. G. Lasson), Hamburg 1974. P. 16.
E. Jungel, Gott als Geheimnis der Welt p. 298
http://cafe.naver.com/modernth/1367 이재붕
Ⅰ. 성령론의 위기
1. 바르트의 성령관
[로마서]에서 바르트의 성령개념은 실존론적이고 변증법적 존재로 나타난다. 여기서 성령은 “신 (神)속에서 인간을 향해서 일어난. 그리고 인간 안에서 신을 향해서 일어난 영원한 결단” “실존론적인 의미 부여”이다. 성령은 “투쟁. 초능력. 하나님의 승리와 독재자이며 결코 동시에 휴식. 균형. 균등. 타당성이 아니다.” 성령은 “이것이냐. 저것이냐”이며 “이미 끝난 저것 (schon erledigtes Oder)에 대한 이미 성취된 이것 (ein schon vorweggenommes Entweder)"으로 묘사되고 있다. 바르트는 이 성령이 그리스도의 영이요. 진리의 영. 사랑의 영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은 그의 역설적인 변증법적 신학의 착상 속에서 역설적인 결단의 존재로서 나타나며. 인간으로 하여금 이것이냐 저것이냐에 대한 끊임없는 결단의 투쟁 속에 있게 하고. 안식과 평안과 휴식을 허용하지 않는 역동적인 존재이다. 이러한 변증법적 역설적 운동 속에서 진리와 사랑의 영으로서 성령은 결단의 존재. 곧 키엘케고르의 실존변증법에 의해 주도되는 역설적 존재로 변모하고 있다.
[교회교의학]에서 바르트의 성령개념은 극단적인 기독론적 계시신학의 테두리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 계시의 주관적 현실이 된다. 여기서 성령은 계시의 “주관적 현실”과 “주관적 가능성”으로 묘사된다. 주관적 현실 속의 성령은 구체적인 개개인의 현실이 아니라. 계시의 객관적 현실이 일어나는 인간들의 현실 속에서 역사한다. 바르트는 극단적인 기독론의 계시실증주의에 근거하여 성령을 이해함으로써 성령이 인간들의 실존 속에서 어떻게 역사하는가에 대한 질문은 스쳐 지나가고. 오로지 성령이라는 주관적 현실의 근거 위에서만 주관적 가능성에 관해서 말하려고 한다. 여기서 신자들의 주관은 “교회 현실의 주관적 측면”으로 묘사하여. 구체적인 개인의 실존에 역사하는 성령의 역사가 탈락되고 있다.
바르트는 “계시의 주관적 가능성”에 대하여 말할 때도 하나님 말씀의 선포와 성령의 부음이 일치화 내지 혼동하고 있다.
그의 성령 이해는 극단적인 계시 사건의 주관적 상응이기 때문에. 그의 성령론은 구체적인 개인의 마음 속에 역사하는 인격적인 성령의 역사를 객관주의적인 화해론 속으로 흡수하고 있다.
2. 불트만의 성령관
불트만은 성령을 비신화론화의 맥락에서 이해한다. 성령은 희랍적인 표상에서처럼 인간에게 신의 능력을 부여하며 그에게 지속적으로 귀속되며 그 속에 머무는 초자연적인 능력이 아니라. “지나가는 상태 또는 일회적인 행위를 유발시키면서. 각 상황과 매순간 인간을 붙잡거나 그에게 부여되는 능력”으로 파악된다.
불트만은 성령을 신자에게 부여되는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간주하는 표상이라는. 헬레니즘의 신인 (神人)사상에 영향받은 것으로 본다. 그는 성령을 기독자로 하여금 지나가는 세상으로부터 나오게 하여 다가오는 세계를 향해 결단하도록 하는 힘. 실존의 본래성을 찾도록 하는 능력으로 파악한다. 여기서 성령은 더 이상 신약성서가 증언하는 것처럼 부활이나 영원한 생명을 보장하는 인격적인 신이 아닐 뿐 아니라 신앙의 대상도 아니다 성령은 새로운 행동과 능력의 근원으로서 의지의 변화를 요구하고 전제하는 실존론적 힘이다. 불트만의 실존론적 성령론에서는 신약성서가 증언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과 영생을 믿는 초자연적인 신의 은사요. 삼위일체의 삼위인 인격적인 성령의 개념은 헬레니즘 신비주의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비신화론화 되어 버린다. 여기에 그의 성령론의 위기가 있다.
3. 틸리히의 성령관
틸리히의 존재신학은 성령을 통일 속에서 존재의 힘과 존재의 의미를 실현하는 존재의 현현 (顯現)으로 파악한다
신의 영은 삶의 차원 (dimension of life)로 인간의 정신 속에 거하시고 역사한다. 틸리히는 인간정신과 신 정신의 상관관계를 말한다. 즉 신의 정신은 인간정신 속에 거함으로써 인간정신은 자기자신으로부터 나온다. “신의 영의 내재는 인간정신을 위해서 초월이다 (The in of the divine spirit is an out for the human spirit)". 인간정신은 자기초월로 나아가며 궁극적이고 무제약적인 것에 의해서 붙잡힌다. 여기서 인간정신은 여전히 유한성에 있으나 동시에 자기자신으로 나와서 신적 정신의 충격 속에 들어간다. 틸리히는 이 영의 현재에 붙잡힌 상태를 “황홀”이라는 말로 표현했다. 이 황홀의 경험이 신앙의 행위이다. “황홀로서 영의 사역은 피조적인 구조를 훼파한다.”
영 현재(靈現在)의 현현 (顯現)은 기적적인 성격을 갖는다. 영은 “한 인격을 한 처소에서 다른 처소로 전이 (轉移) 신체 속에 새생명 산출. 딱딱한 신체의 침투”등의 “신체적 영향”과 “방언지식. 다른 사람의 인격의 내적 생각에의 침투. 원격 치유”등의 심리적 영향을 행사한다.
틸리히는 영의 현재의 두가지 중요한 성격을 지적한다. 그것은 보편적 성격과 특별한 성격이다.
영의 현재는 삶의 모든 영역에 대해 보편적인 충격을 주고 있으며. 초자연적인 방식으로 활동하고 있다
불트만이 영을 단지 실존론적인 힘으로 비신화론화시키는데 반해서. 틸리히는 영을 인간정신과 구분된 기적을 일으키는 초자연적인 존재로 파악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은 성서적인 삼위일체적인 삼위의 인격에서 탈락되고 모든 삶에 활력을 주는 존재의 힘으로 이해되어진다. 그러므로 신앙개념도 성서가 증언하는 인격으로 모시는 삼위일체적인 성령에 대한 인격적인 신뢰 행위에서 변질되어. 삶에 활력을 주는 존재의 힘에 참여. 곧 “황홀적인 행위 (ekstatische Akte)로 파악된다.
틸리히의 성령론은 성서의 특수한 삼위일체 구속적인 성령의 사역과 창조의 구조에 일반적으로 삶의 원천으로 역사하는 성령의 사역을 혼동하고 있다.
틸리히는 영에 의한 인간정신의 자기 초월 (Selbsttranszendenz)을 말함에도 불구하고. 이 자기초월은 반드시 성서적 전통에서 말하는 인격신 하나님에 의한 자기 초월 뿐아니라. 다른 종교의 신들에 의한 인간정신의 자기 초월을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의 성령론은 보편주의적 경향을 지니고 있다. 여기서 기독교 신학의 성령론은 일반 종교철학적 성령론 속에 흡수되고 있다. 여기에 그의 성령론의 위기가 있다.
4. 판넨베르크의 성령관
판넨베르크의 보편사신학은 성령을 “모든 생명의 창조적 원천 (schopferischer Ursprung alles Lebens)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는 구약성서적 유대교적 전통을 수납하면서 성령이란 모든 유기체가 출발하는 창조적 원천이라고 이해한다. 그리고 그는 현대생물학의 견해 “생명은 본질적으로 환경과 유기적인 관계속에 있고. 자기초월적이다”라는 삶의 생태학적 자기 초월 사상을 수용한다.
판넨베르크는 틸리히의 황홀경 개념을 비판적으로 수용한다. 틸리히는 황홀경 체험. 곧 영의 현재를 생명과정의 일반현상으로부터 분리시키면서 생의 자기초월을 “생명체 자신의 활동성 (Aktivitat des Lebens selbst)"으로 표상한다 그러나 판넨베르크는 “생명의 자기 초월을 동시에 생명체의 활동성”으로 설명하며 그리고 생명체를 자기한계 너머로 정립하는 “힘의 작용”으로 설명하고 있다. 생명체의 자기보존과 자기통합 기능은 그것의 자기초월 기능에 의존하고 있다. 여기서 판넨베르크는 성령의 우주론적인 차원을 현대 생물학과 대화하면서 재발견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성령의 우주론적 기능만을 강조하고. 구속론적인 기능을 간과하고 있다. 판넨베르크는 하나님 계시사건과 계시말씀을 조명하고. 우리에게 신앙을 일으키는 하나님의 영리역사를 거부하고. 이러한 정통주의적 해석은 영리주의적인 계시 이해라고 비난한다.
그는 성령의 역사 대신에 계시사건에 대한 “규제되지 않는 지각 (unbefangene Wahrnchmung)"을 강조한다. 자연인은 역사적 이성을 통해서 하나님 계시를 “전제없이 볼 수 있는 능력 (das vorausetzungs freie Hinsehen Konnen)"을 소유하고 있다고 말한다 여기서 판넨베르크는 세계 속에 있는 존재적 로고스와 인식능력에 작용하는 인식적인 로고스 사이의 유비 (특히 스토아 학파적인 유비)를 강조하고 있으며. 모든 세계형상은 유한한 의식속에 작용하는 동일한 세계정신의 형식이라는 헤겔의 관념론적 개념을 수용하고 있다.
여기서 성령론은 보편주의적 우주론적인 성령론이 되고. 성서가 증언하는 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 대속의 역사를 조명해 주고. 적용시키는 성서적 성령론에서 이탈하고 있다. 여기에 성령론의 위기가 있다.
5. 융겔의 성령관
융겔의 사변적 십자가 신학은 성령을 “삼위신의 관계” 다시말하면 “아버지와 아들 관계들 사이의 관계 (die Relation zwisc.hen den Relationen des Vaters und des Sohnes)"로서 파악한다
성령은 “신에 대한 신의 영원한 새로운 관계”이다. 이 관계는 기독론적으로는 “죽은 자로부터의 부활이요”. 존재론적으로는 “사랑자체의 존재”이다. “신은 자기를 헌신하시는 아버지와 헌신되시는 아들의 통일성 속에서 비로소 자기헌신의 사건 (das Ereignis der Dahingabe)이다. ”
자기 헌신의 사건으로서 성령은 신의 자기헌신을 자기소유에 사로잡힌 인간에게 적용한다. 성령의 영원한 새로운 관계를 통해서 인간은 “아버지와 아들의 마주 섬 (das Gegenuker von Vater und Sohn) 속으로 들어온다.
융겔은 삼위일체 신의 비밀에 관해서 말한다. “신은 자기자신으로 가면서. 존재한다. 곧 신은 신으로부터 신에게로 신으로서 (von Gott zu Gott als Gott) 간다.”
1) 자기자신으로부터 나오는 신은 “자기자신의 근원 (Ursprung se.iner Selbst)"이요 성부 신이다. 이 신은 존재와 비존재 이전의 근원적 존재이다. 그러나 융겔은 삼위일체 개념을 사변적으로 해석한다.
“신의 순수한 근원성이 존재를 구성함으로써. 그것은 동시에 무 (das Nichts)도 구성한다. 신이 자기자신으로부터 오기 때문에 그리고 오는 한에 있어서. 존재와 무는 있다.” 신은 무를 자기의 존재계기로서 가지고 있다.
2)“신은 신에게로 간다.” 신은 자기자신으로부터 나와서 신에게로 가고 또한 인간에게로 간다. 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속에서 인간에게로 오셨다. 신은 예수의 죽음 속에서 낯선 것 (Fremde)속으로 가신다. “그러나 그는 죽음속에서 가시며―무로 나아가나―무 속에서 침몰되지 않으신다. 그는 죽음의 낯선 것 속에서도 자기자신으로 간다. 그런 한 그는 죽음에의 승리자이다.” “그래서 그는 그의 종말론적인 목적인 인간에게로 간다.” 여기서 무는 신이 자기자신에게로 나아가는 계기로 표상되고 있으며. 인간의 구속을 위한 신의 대속적죽음의 의미가 사변적으로 해석되고 있다.
3) “신은 신으로서 온다 (Gott kommt als Gott)” “신은 소멸 (Vergehen)속에서도 소외되지 않는다.” “신은 오히려 반대로 죽음과 소멸을 소외시킨다.” 신은 그의 옴 속에서 (im Kommen)근원과 동시에 목적이 되시며. 스스로 이 근원과 목적을 매개한다. 성령은 신의 셋째 존재 방식으로서 “매개 (Vermittlung)"이다. 성령은 “사랑의 띠 (Vinculum Caritatis)"이다. 융겔은 틸리히. 판넨베르크. 불트만과는 달리 성령이 부여하는 신앙의 역할을 강조한다. 융겔은 “성령 속에서만 '예수는 주이다'는 문장이 믿어질 수 있다”고 말한다. 성령없이는 “예수와 신의 동일성”은 “과거로 머물며”. 우리는 예수를 주요 영원한 아들로서 신앙할 수 없다.”
여기서 성령은 “신의 고유한 생명에의 참여”이다. 이것은 “인격적인 힘”이요 “미래를 여는 힘”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융겔의 성령론은 전통적인 성령론을 그대로 수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신론과 기독론이 사변적 십자가 신학에 의해서 구조되어 있는 측면을 고려할 때. 그의 성령상(像)은 신으로 부터 신에게로 가는 신의 존재―존재와 무를 그의 존재방식으로 내포하고 있는 신―의 사변적 운동의 매개요. “생명을 위해서 생명과 죽음의 통일성”인 신의 존재가 지니고 있는 낭만주의적인 사랑의 띠로서 표상되어진다.
여기서 그의 성령론은 구체적인 구속의 적용.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보혈의 적용이라는 구체적인 구속행위에 관해서 침묵하고. 단지 신의 사랑을 인간에게 매개하는 인격적인 힘이요. 미래를 여는 힘만을 언급하고 있다.
Ⅱ. 신학 방법론의 위기
이처럼 현대신학에 있어서 신론. 기독론과 성령론의 위기는 신학 방법론 위기에 의해서 초래되고 있다. 초기 바르트 신학은 변증법에. 후기 바르트 신학은 극단적인 기독론의 사고에. 불트만의 신학은 역사적 비판학과 실존론적 사고에. 틸리히는 상관관계의 방법과 존재론적 사고에. 판넨베르크의 신학은 보편사적 사고에. 융겔의 신학은 사변적이고 낭만주의적 사고에 지배되고 있다.
1. 바르트의 신학 방법론
초기 바르트의 계시 사상은 변증법적 사고에 지배되고 있다. 로마서 1판은 헤르만의 종교적 개인주의와 경건주의와 결별하고 하나님 나라의 객관적 승리를 선포한다. 여기서 인간은 역사적으로 성장하는 신왕국의 동역자요. “보편적 신 능력의 부분”이다. 신의 역사 (歷史)는 변증법적 종합. 곧 세계에 대한 긍정과 부정의 종합 속에서 성장한다. “우리 속에 있는 신적(神的)로 것 (das Gottliche in uns)"은 윤리적 인간이 갖는 신에 대한 직접적 관계가 아니라. 신의 새창조 능력에 의해서 인간의 자연적 본성이 부정되고 새롭게 긍정되는 변증법적 관계이다.
이 하나님나라 개념은 블룸하르트 (Blumhardt) 부자에 의해 제시된 신본주의 사상―세계쇄신이란 오로지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 실현되며 인간의 도덕성에 의한 것이 아니다―의 영향을 받고 있다 신의 나라는 세계사 속에서 어떤 목표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것은 “하늘로부터 수직적으로” 내려온다. 여기서 바르트사상은 계시 초절(招絶)사상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 이러한 초절사상은 [로마서] 2판에서는 키에르케고르의 변증법사상 영향으로 더욱더 심화되고 있다.
로마서. 2판의 바르트 사상에서는 신과 인간의 무한한 질적 차이가 강조되고. 신과 인간 사이의 어떤 직접적 관계도 부정되며. 신은 "신적 타자 (神的 他者)"로서 파악된다. 신 존재에 대한 신학적 진술은 직접적으로는 불가능하다. 신의 존재는 키에르케고르의 “순간”. “동시성” 개념을 통해서 변증법적으로만 진술된다.
신은 순간 속에서 이 세계에 알려지나 동시에 은폐된다. 세계 속에서의 신 인식은 “불가능한 가능성”이다. 신은 영원 속에 계시고. 세계나 역사 속에 계시지 않는다. 변증법적 사고에 의해 비로소 인식되는 신의 존재는 알려지는 동시에 은폐되는 초절적 존재 (招絶的 存在) 이므로, 신인식은 역설적으로만 가능하다. 바르트의 .로마서.는 이처럼 변증법적 사고에 의해서 지배되고 있다 변증법적 사고는 바르트 .로마서. 주석의 방법론적 사고가 되어 버리고 있다. 그것은 초월적인 신을 드러내는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을지언정 성서적 신을 드러내는 유일한 방법이 될 수는 없다. 이 변증법적 사고는 [로마서] 2판의 신개념을 초절적 존재로 변형시키고 있다.
바르트의 [교회 교의학] 사상은 [로마서] 사상의 변증법적 사고에 극단적으로 대립되는 범기독론적 사고에 지배되고 있다. 교회 교의학 사고의 주춧돌은 예정론이다. 예정론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선택 안에서 신의 원결정(原決定)이다. 여기서 바르트는 기독론적인 집중으로 로마서의 변증법적 사고를 극복한다. 그러나 바르트의 사고는 기독론 중심의 사고를 넘어서서 기독론을 그의 신학적 사고의 원리로 파악하게 됨으로써. 범기독론적 사고로 나아간다. 이러한 극단적인 기독론적 사고는 바르트의 교의학적 사고를 보편구원론적인 체계로 변형시키고 있다.
그의 보편구원론적 체계는 그의 예정론에서 기초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선택하시는 신이요. 선택되는 인간이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선택 안에서 인간에게 첫째의 것. 선택. 행복과 생명을 자기자신에게 두번째의 것. 유기. 저주와 죽음을 생각하셨다”그러므로 유일하게 선택된 자는 인간이요. 유일하게 유기된 자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이 은총의 선택론은 보편 기독론적으로 기초되어 있으며. 보편구원론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바르트의 보편기독론적인 체계속에서 어거스틴. 루터와 칼빈에 의해 견지되어 왔던 이중예정론 (二重豫定論)은 기독론적인 일원 (一元) 예정론으로 변형되고 있다 이러한 보편구원론으로 구조된 예정론은 바르트 신학체계를 로마서의 위기사상과 변증법적 사고체계에서 벗어나. 극단적인 화해와 낙관주의에 지배되도록 하고 있다.
개혁주의적 교의학 계열인 창조와 구속. 율법과 복음의 순서는 이러한 극단적인 기독론의 사고에 의해서 구속과 창조. 복음과 율법의 순서로 변형되고 있다. 기독론적 사고는 어거스틴. 루터와 칼빈에서 보는 것처럼. 신학의 중심에는 틀림없으나. 이것이 바르트처럼 극단화 될 때. 그리스도는 더이상 인격이기 보다는. 신학적 원리가 되어 버린다. 그래서 개혁신학사상이 강조하는 종말론적인 심판의 지평. 복음이 우리를 향해 부과하는 인간의 순종과 결단의 책임성이 탈락되고. 만유의 회복이라는 사변적인 낙관주의가 교의학적 사고를 지배하게 된다. 여기에 방법론의 위기가 있다.
2. 불트만의 신학 방법론
불트만의 신학사고는 한편으로는 역사적 비판학과 다른 한편으로는 실존론적 사고에 지배를 받고 있다.
현대 자유주의 신학의 역사 비판학 방법에 영향을 받아 불트만은 현대의 자연과학적 세계상의 관점에서 신약성서를 이해한다. 현대 역사 비판학의 방법은 상관관계. 유비. 비판이라는 내재적 인과율에 의한 역사적 사건의 확증이다. 이러한 내재적 인과율에 비추어서 성서의 세계상은 신화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신약성서가 증언하고 있는 예수의 생애와 복음행적은 결단코 역사적인 예수의 역사적 실제 모습이 아니라. 초대교회의 신앙고백이 되어 버린다.
이러한 내재적 인과율에 입각한 역사적 비판에 의해서 불트만은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구속사건이 일어났다는 순수사실(das bloe Da)을 제외하고는. 신약성서에 증언된 모든 예수의 말씀. 동정녀 탄생. 기적 행하심. 십자가 죽음과 부활과 승천 사실. 재림 예언 등은 신화론적인 진술이라고 단정한다.
이처럼 자유주의적 역사 비판학적 방법은 불트만의 신학사상으로 하여금. 역사적 사실을 부정하고. 오로지 케리그마 (kerygma)의 의미성만을 인정하도록 했다. 역사적 비판학적 방법은 신약성서에 나타난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구속사건을 부정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불트만의 실존론적 해석학적 사고는 이러한 신화론적 표상으로 증언되어 있는 케리그마의 의미성 (Bedeutsamkeit)을 실존론적으로 드러낸다. 그는 하이덱거의 실존분석의 착상을 성서 이해에 도입해서 신약성서의 케리그마가 지니고 있는 실존이해를 드러내려고 한다. 이러한 신화해명의 시도가 그의 비신화론화의 프로그램이다.
이러한 실존론적 해석은 예수의 동정녀 탄생. 메시야적 사역. 십자가 대속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이라는 성서적 케리그마의 사건성을 신화론적인 표상으로 간주하여 제거해 버리고. 이 케리그마의 실존론적 의미성만을 인정하기에 이른다.
여기서 불트만의 방법론에서는 케리그마와 역사 사이의 연속성이 부정되는 방법적 이원론이 야기된다
역사비판적 사고와 실론론적 사고는 성서의 계시사실을 드러낼 수 있도록 제한적으로 사용되어야 한다. 그러나 불트만은 양자를 극단적으로 사용함으로써 극단적인 역사 비판적 사고를 통해서 신약성서가 증언하는 초자연적 구속사건을 부정하기에 이르고. 극단적인 실존론적 사고를 통해서 신약성서 케리그마를 비신화론화하고. 그 구속론적 의미를 인간학적 실존론적 의미성으로 변형시키기에 이른다. 여기에 방법론의 위기가 있다.
3. 틸리히의 신학 방법론
틸리히의 새존재 신학은 상관관계의 방법과 후기 쉘링에 영향받은 신비―존재론적 사변적 방법에 지배되고 있다.
틸리히의 상관관계의 방법―철학은 질문을 제시하고 계시는 해답을 준다―은 성서 메시지와 인간 실존의 상황 사이의 관계를 매개하는 점에 있어서 문화신학의 방법으로서 유용한 측면을 제시해 주고 있다.
상관관계적인 착상을 가지고 틸리히는 변증법적 사고에 있어서 야기되는 신―인간 사이의 접촉점 상실을 극복하고. 자유주의 사고에 있어서 야기되는 양자사이의 경계 혼동내지 상실을 극복한다 그는 철학과 신학. 이성과 계시. 문화와 종교. 세속과 거룩. 제약적인 것과 무제약적인 것. 사고와 신앙의 경계에서 사고하면서. 양자의 분리보다는 연결을 시도한다. 그런 점에 있어서 그의 상관관계적 사고는 문화신학적 착상으로 유용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틸리히는 이 상관관계의 방법론적 사고에 있어서. 메시지와 상황 사이의 균형을 취하지 않고. 상황에 의존해서 메시지를 변형시키고 있다. 상황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사고란 그가 성서 메시지를 하나님의 아들. 삼위일체의 제2위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부터 후기 쉘링의 사상에서 영향받은 새존재의 복음으로 변형시키는데 있다.
그는 현대의 무종교적 상황을 지나치게 의식하여. 기독교적인 개념을 철학적 개념내지 심층심리학적 개념으로 대체한다.
그래서 삼위일체적인 인격신은 “존재 자체”. “무제약적인 것” “존재의 힘”. “모든 존재의 근거와 의미”로 변모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삼위일체의 제2위 되신 구속자가 아니라. “새 존재의 담지자”가 되고. 성령은 인격적인 위로자요 삼위일체 신의 구속에 대한 증언자가 아니라 “통일속에서 존재의 힘과 존재의 의미를 실현하는 존재의 현현(顯現)"으로 변모된다. 신앙은 삼위일체 신에 대한 인격적인 신뢰가 아니라. 유한한 현실의 초월적 근거와 의미로서 모든 유한한 현실 속에 실재하는 신적인 것. 궁극적인 것에 대한 관심이다.
이러한 신비존재론적인 사변적 사고 속에서 인격적인 신. 그리스도. 성령 개념은 중성적인 개념으로 변질되고. 범신론적인 혼동이 야기되고 있다.
그리하여 그의 새존재에 대한 사변적 사고는 개혁주의적 의인론을 보편주의적으로 해석해 버린다. 그는 의인을 보편적 로고스적 기독론에 의해서 신앙자 뿐아니라. 불신자. 회의자. 무신론자에게도 적용시키고 있다 그럼으로써 그의 새존재 신학은 이 신비적 존재론적 사변에 의해서 만인구원론 사상으로 나아가고 있다. 여기에 신학 방법론의 위기가 있다.
4. 판넨베르크의 신학 방법론
판넨베르크의 역사신학은 보편사적 사고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 바르트의 극단적인 기독론적 사고가 지니는 방법론적 협착성이 계시를 원역사의 항구 속에 정박시키고. 불트만의 실존론적 사고가 지니는 방법론적 협착성이 계시를 실존의 역사성 속에 제한시키는 데 대한 반작용으로서. 판넨베르크는 보편사를 신의 계시 영역으로 제시한다. 그의 보편사적 사고는 바르트나 불트만의 신학 방법론이 기독교 계시를 특수한 영역에 제한시키려는 시도에 대항하여. 기독교 계시를 역사의 모든 영역으로 파악한다. 그래서 판넨베르크는 그의 계시신학을 보편사신학으로 정립해서. 희랍적인 철학적 신 질문과 역사학적 신 질문에 대해서도 탁월한 기독교적 해답을 제시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의 보편사적 사고는 한편으로는 유대교 묵시록의 역사 이해에 근거하고 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헤겔의 이성주의 역사 이해에 근거하고 있다. 진정한 성서적 사고는 유대교 묵시록이 제시하고 있는 은폐성 속에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역사계시이다. 그러나 판넨베르크의 사고는 헤겔의 이성주의적 역사 이해에 지배된다. 묵시록의 역사 이해는 역사 전체를 개관하고 있다. 묵시록적 표상에 의하면 역사 속에서 드러내시는 신은 역사 도중에는 은폐되어 있다. 그러나 헤겔의 역사 이해는 역사 전체를 개관할 뿐아니라. 역사 속에서 신이 역사 행위 속에서 사건의 연관을 통해서 자명하게 스스로를 드러낸다고 본다. 여기서 판넨베르크의 계시이해는 유대교 묵시록적인 이해에 의해 주도되지 않고. 헤겔의 이성주의 계시 이해에 의해서 주도되고 있다.
이러한 보편사적 사고는 계시사건을 역사사건과 동일시 하고 있기 때문에 계시사건이 지니는 구속론적 은폐성을 탈락시키고. 역사 종국의 의미를 오로지 신성의 보편적 증거로서 파악하기에 이른다. 성서적 증언에 의하면 역사 종국의 의미란 역사의 구속이다. 역사 구속을 위해서 임하는 신은 이제 불신자들에게도 참신으로 드러난다.
판넨베르크의 보편사 사고는 헤겔의 역사 철학의 계시이해에 의해 영향 받고 있기 때문에 역사 일반 과정과 역사 구속의 과정을 혼동하기에 이른다
판넨베르크의 보편사적 사고는 역사만을 계시의 유일한 범주로 봄으로써 성서적 계시의 다른 범주. 율법 부여. 예언의 말씀. 지혜의 말씀을 도외시 하기에 이르고 있다.
그의 기독론적 착상도 보편사적 사고에 의해 주도되어. 구속론적 착상을 도외시하고 예수의 역사적 모습 속에서 기독론적 의미성을 드러내려고 한다. 여기서 그의 기독론은 구속론적 관심에서 추상화된 순수 역사적 관심에 의해 주도되며. 구약성서에 있는 고난의 종의 사상. 메시아의 도래 사상 등을 도외시하고. 단지 유대교 묵시록의 죽은 자의 부활 사상의 지평에서 전개되고 있다. 여기에 그의 보편사적 신학적 사고의 일면성과 제한성이 있다. 역사는 성서계시의 하나의 범주이지 유일한 범주가 아니다. 그런데 판넨베르크는 성서의 계시를 오로지 역사 범주로서만 이해하고자 한다.
5. 융겔의 신학 방법론
융겔의 사변적 십자가 신학은 바르트의 계시 신학적 사고와 헤겔의 사변적 종교철학에 지배되고 있다.
융겔은 바르트의 계시 신학적 사고의 영향아래서 판넨베르크의 역사적 자연신학적 사고를 거부하고. 신 인식이란 이성적 통찰이 아니라 신앙사건이라고 말한다. 계시적 사고 안에서 그는 판넨베르크에 의한 신 사고의 보편성 요구를 수용한다. 신 경험은 우리의 세계 개념과 모순 속에 있다 할지라도. 이 모순 기능 속에서 “인간의 세계 경험과 자기 경험을 견디어 내는 경험으로 증명될 수 있어야 한다.” 신의 보편성은 “신의 계시 근거 위에서” 세계 경험과 자기 경험 속에서 이성적으로 증명될 수 있다.
융겔은 여기서 그가 한편으로 거부한 자연신학의 사고를 계시신학적 사고 안에서 받아들이려고 한다.
이러한 계시신학 안의 자연신학적 사고 착상은 무신론 사상에 의해 대표된 현대사상에 직면하면서 기독교 신학을 변증해 보고자 하는 그의 시도이다.
그는 현대의 무신론적 사상에 직면해서 십자가 신학의 사상을 전개한다. 융겔은 신의 존재를 .죽음으로부터의 삶.으로 이해한다. 신은 그의 존재 안에서 무(無)의 무화 (無化)시키는 능력을 견디어 내고. 고난받으면서 무화되지 아니하신다. 그러므로 융겔은 십자가 신학을 무신론이 정당성을 갖는 근거로 제시한다. 그는 십자가 신학의 착상 속에서 유신론과 무신론의 양자택일을 극복하고 고난받으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신의 존재 속에서 이 양자의 대립을 극복하고자 한다. 이러한 그의 십자가 신학적 사고는 헤겔의 '신죽음 사상'과 '죽음의 죽음'이라는 정신의 변증법 사고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
헤겔의 정신 현상의 변증법적 사고는 신의 존재가 죽음으로부터 죽음의 죽음이라는 형성으로서의 생명이 되고 있는 과정을 변증법적으로 말하고 있다.
융겔의 십자가 신학적 사고가 헤겔이 종교철학에서 행한 십자가 사건에 대한 사변적 변증법적 해석에 의해 지배되고 있는 결정적인 사실을 융겔이 신 존재가 죽음을 그의 존재의 필연적인 계기로서 수용하는 헤겔의 사상을 받아들이는데 있다. 여기서 융겔의 십자가 신학은 십자가 사건을 더 이상 성서적 의미. 곧 인류의 죄를 위한 대속적이고. 우연적이며. 역사적인 사건이 아니라. 영원한 신이 자기로부터. 자기에게로. 자기로서 실현하는 필연적인 과정의 한 계기로 이해하고 있다. 이 절대적인 정신의 변증법적 자기 전개속에서 성서적인 죄의 타락은 꿈꾸는 무죄상태로부터 변증법적 소외과정으로 들어감. 십자가 사건은 부정의 수납. 부활 사건은 부정의 부정이라는 필연적인 신존재 과정의 한 계기로서 변형되어진다.
여기에 신학적 방법론의 위험성. 곧 종교철학적 사고에 이해 지배되는 교의학적 사고의 위험성이 있다.
Ⅲ. 개혁신학의 진로모색
이러한 현대신학의 위기 속에서 개혁신학은 중대한 사명에 직면해 있다. 필자는 현대신학에 있어서 개혁신학의 과제를 다음 세 가지로 제시해 보고자 한다.
1. '오로지 성경(Sola Scriptura)' 사상의 재발견
첫째. 개혁신학은 모든 신학의 근본 원리인 '오로지 성경 (Sola Scriptura)' 사상을 재발견해야 한다. 현대신학 속에서 개혁신학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모든 신학사상으로 하여금. 신학적 반성의 성서적 합성 (Schriftangemessenheit der theologischen Reflexion) 이념을 일깨워 주는 것이다. 하나님 말씀인 성경은 모든 신학의 반성의 등대요 기준이다.
신학의 반성은 인간의 신 경험과 신앙체험에 대한 추후적인 반성이다. 이 신학의 반성은 인간 이성에 의한 반성이다. 인간 이성은 신이 우리 인간에게 부여해 주신 창조의 일반은사이다. 그러나 인간 이성이 하나님의 뜻에 순응치 않고. 자율적인 지식의 권리를 요구하게 될 때. 그것은 신의 뜻을 스스로 알려고 하는 자아신격화(自我神格化:Selbstvergottlichung)에 이르게 된다. 이것은 첫 인간이 범한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하신 지식의 선악과를 따먹는 교만 (Hybris)의 범죄이다.
인간 이성은 계시의 빛 아래 조명될 때에만 비로소 그 온전한 신 이해의 반성을 수행할 수 있다. 이 계시란 곧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다. 이 성경의 제자가 되기를 배울 때에만 신학의 반성은 비로서 자율성 차원에서 벗어나. 진정한 의미에서 신율성 차원으로 들어갈 수 있다. 신학의 반성이 성경의 계시 말씀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인격적인 신의 로고스를 향해 인간의 지성이 열리는 것을 말한다.
틸리히는 계시를 향해 열리는 신율적 사고를 제시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이해한 복음이 성서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기보다는 형이상학적 새 존재의 복음으로 변질한 이유는 그가 성서적 계시를 그의 신학적 사고의 표준으로 두지 않고. 후기 쉘링적인 계시의 철학에 정위되었기 때문이다. 바르트가 그처럼 하나님 말씀과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외치고. 성경을 신학의 표준으로 삼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신학은 만인구원론의 신학을 향해 열리고 있다.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속자 보다는 오히려 만세 전에 선택된 신학의 원리로 파악함으로써. 성서의 계시가 텍스트의 고유한 사실에 입각해서 증언하는 계시 말씀에 충실하지 못했다.
불트만도 신약성서를 현대인들에게 적합하도록 해석하려고 했으나. 그의 실존론적 사고를 지배한것은 신약성서의 계시가 아니라. 하이데거의 실존철학이었다.
판넨베르크도 보편사를 성서적 계시의 범주로 파악했으나. 그는 성서의 계시가 제기하고 있는 역사개념보다는 헤겔이 이해한 역사철학적인 이성주의적 계시 이해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
융겔도 현대의 무신론적인 상황에 대해서 계시 신학적인 측면에서 해답을 제시하려고 했으나. 그가 해답으로서 제시하고 있는 십자가 신학의 착상은 성서적 계시에 근거한 구속론적인 이해에 의해 전개되지 않고. 헤겔의 사변적 철학에 영향받고 있다.
개혁신학은 현대신학의 한 흐름이다. 그러나 개혁신학은 그 풍요한 전통의 보고로부터 창의적으로 사고하고. 현재주의 신학과 토론해야 한다. 그래서 개혁신학은 현재주의 신학이 망각하고 있는 이 성서적 합동에서의 이탈을 지적해 주고. 신학적 반성은 성경 말씀에 일치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예언적 사명을 다 해야 한다.
2. 상관관계의 방법론 의식의 활성화
둘째. 개혁신학은 현대신학의 신학사적인 공헌인 메시지와 상황과의 연결이라는 상관관계의 방법론 의식을 활성화시켜야 한다.
개혁신학은 단순히 전통신학일 수만 없다. 전통신학이란 전통적으로 주어진 교부들과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사상들을 그대로 지키려고만 한다. 따라서 여기에는 신학의 새로운 발전은 없다. 개혁신학은 창의적 사고를 지닌 보수 신학이어야 한다. 개혁신학은 사도들과 종교개혁자들이 전해준 신학의 전통을 오늘날의 시대상황에 적합하게 창조적으로 계승한다.
이러한 기독교전통의 창조적 계승을 수행하기 위해서 개혁신학은 “상관관계의 방법 (Methode der Korrelation)"을 수용한다. 개혁신학은 현대 인간의 문화적 상황이 제기하고 있는 질문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성서적 계시에서부터 제기하고자 한다.
개혁신학의 과제란 성서적계시와 현대의 문화적 상황 사이에 대화의 수행이다. 이 대화에는 해석학적 과제가 요구된다. 왜냐하면 성경의 계시는 2천년이라는 역사의 이해지평을 지니고 있고. 현대의 문화적 상황은 현대적인 이해지평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 둘 사이에 시간적 간격과 더불어 문화적 간격이 존재하고 있다. 이 간격을 좁히고. 성경적 계시가 현대의 문화 상황을 향해 선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 상관관계의 방법을 성경적 계시와 현대의 문화적 상황과 역동적인 대화 속에서 수행되어야 한다. 현대신학자들처럼 현대적 사상의 선입견이 성경의 계시내용을 변질시키서는 안된다.
불트만의 실존론적 사고는 신약성서를 현대의 실존철학과 자연과학적 사고에 입각해서 해석함으로써. 성서적 계시를 실존론적 의미성으로 변질시키고 있다. 틸리히의 존재론적 사고도 성서적 계시개념을 현대의 심층심리학과 철학적 존재론의 범주로 해석함으로써. 성서적 계시 내용을 새 존재적인 의미성으로 변질시켰다. 판넨베르크의 보편사적 사고도 성서적 계시를 현대의 인간학과 이성주의적 역사 범주로써 해석함으로써. 성경의 계시 내용을 보편사적인 연관의 의미성으로 변형시키고 있다. 융겔의 사변적 십자가 신학적 사고도 성경의 계시를 헤겔의 사변 철학적인 존재론 도식으로 해석함으로써. 성경의 계시 내용을 사변철학적인 존재론의 내용으로 변형시키고 있다.
초기 바르트는 현대적인 상황이 제시하는 위기. 불안. 혼돈. 좌절. 간격의 질문에 치중해서 로마서를 해석함으로써. 로마서의 의인사상을 초절주의 사상으로 변형시키고 있다.
후기 바르트는 성경의 계시가 지니고 있는 화해와 은총의 복음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성경의 계시를 보편 기독론과 보편 화해론의 복음으로 변형시키고 있다.
성경의 계시와 현대 상황과의 대화에 있어서 질문과 해답의 운동은 균형잡혀야 한다. 성경의 계시의 메시지 내용은 결단코 현대 상황의 질문과 대화에 있어서 변질되어서는 안된다. 그럴 때 신학은 텍스트 없는 신학. 곧 상대주의적 신학이 되어버린다.
성경의 계시는 현대 상황이 제기하는 질문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럼으로써 시대착오적인 신학이 아니라. 시대를 향해 예언의 말씀을 선포하는 예언적 신학이 된다.
3. 변혁적 문화 신학의 정립.상황연관의 교의학
셋째. 개혁신학은 성경의 메시지와 현대 상황 사이의 대화를 통해서 상황 연관적인 교의학 곧 변혁적 문화 신학을 정립할 수 있어야 한다.
(1) 문화 개념
여기서 문화신학이란 결코 19세기의 문화기독교주의를 말하지 않는다. 19세기 문화기독교주의는 기독교계시를 평가절하하고. 기독교신학의 반성을 오로지 인간의 종교적 경건성. 문화적 활동에 집중시켰다. 그리하여 문화기독교주의는 기독교를 문화 현상과 일치시켜 버리는 오류에 빠졌다.
그러나 개혁신학이 정립하고자 하는 문화 신학이란 성경의 계시에 기초한 신율성 이념에 근거해 있다. 성경의 계시는 문화를 초월하면서도 동시에 문화에 내재한다. 성서적 계시―모세의 율법. 예언자들의 예언. 예수의 선포. 사도들의 선포―는 항상 위로부터 수직적으로 내려오는 하나님의 말씀이며 동시에 인간의 구체적인 문화적 상황을 조명하고. 문화의 변혁과 쇄신을 선포한다.
여기서 문화란 인간 삶의 총체성의 영역―자연. 사회질서. 정치. 경제. 문예. 예술. 의학. 기계기술. 법질서 등―이다. 기독교 신학은 이 인간 삶의 총체적 영역에 대해 신학의 반성을 수행하고. 이 인간적 삶의 총체적 영역 속에서 갖는 기독교신앙의 의미를 해명해야 한다.
하나님은 이 인간 삶의 총체적 영역 속에서 구속자로서 그 구속행위를 수행하신다. 교회는 그의 구속행위에 봉사하는 종말론적 공동체이다. 이 신의 구속행위는 총체적 영역 속에서 인간실존의 영역에서부터 문화의 모든 영역을 향해 전개된다.
이 문화의 모든 영역은 신의 일반은총에 의해서 지탱되는 영역이기는 하나 인간과 인간 집단의 원죄와 부패성으로 감염된 부조리한 구조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인간 문화는 무조건 찬양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비판적으로 조명 받아야 한다.
인간문화는 개인적으로 사회구조적으로 변혁되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개혁주의적 문화신학은 개혁주의적인 의인(義認)사상을 개인주의적 영역에만 제한 시키지 않고 나아가 사회 집단과 구조적인 영역에 적용시킨다. 이러한 문화신학은 포용적 소격화 과정과 변혁적 친숙화 과정을 두가지 해석학적 계기로서 내포하고 있다.
(2) 포용적 소격화
이러한 문화신학의 방법론은 기독교적 현상학적 방법이다. “기독교적”이란 신학적 반성이 성경의 계시 말씀 속에서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삼위일체의 자기 증시에서 출발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현상학적”이란 신학적 반성이 모든 인간의 문화적 영역속에서 자기를 증시하시는 하나님의 계시를 드러내고. 기술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그러므로 기독교적 현상학적 사고는 성경의 계시와 인간의 문화적 상황을 연결시키는 상관관계의 방법에 입각하고 있다. 기독교적 현상학적 방법이란. 다만 이 상관관계적인 방법을 좀더 엄밀한 방법론적 반성 속에서 수행하고자 한다.
기독교 현상학적 사고는 인간문화의 다양한 모습들. 곧 고유한 문화현상들을 기술한다. 그것은 문화의 현상이 다양한 것을 알기 때문에. 하나의 신학적 중심 착상을 인정하나. 하나의 신학적 원리를 인정하지 않는다.
문화신학의 착상은 바르트의 기독론적 계시 착상을 루터와 칼빈의 기독론적 의인신학 착상의 테두리 안에서 변혁적으로 수용한다. 이 착상은 불트만의 실존론적 착상을 루터의 실존 강조 사상의 테두리 안에서 변혁적으로 수용한다. 이 착상은 틸리히의 존재론적 착상을 종교철학적인 변증학적 개념의 테두리. 철학적 질문과 계시적 대답의 상관관계적인 사고의 테두리에서 변혁적으로 수용한다. 이 문화 신학의 착상은 판넨베르크의 보편사 신학의 착상을 쿨만의 구속사 신학 입장에서 변혁적으로 수용한다.
이 착상은 융겔의 십자가 신학의 착상을 루터적 십자가 신학의 테두리 안에서 변혁적으로 수용한다.
그러므로 문화신학의 착상은 현대신학의 강조하고 있는 다양한 측면들. 곧 기독론적인 측면. 실존론적인 측면. 존재론적인 측면. 역사적 측면. 신의 고난의 측면을 문화신학적 사고의 중요한 계기들로서 포괄한다.
문화신학의 착상이란 기독교교의학을 현대 상황과의 대화 속에서 해석하고 전개시키는 상황연관적인 교의학적 착상이다. 그러므로 문화신학은 교의학의 근거 위에 있어야 한다. 포용적 소격화란 문화 상황의 다양한 측면들을 그 차이점에 있어서 의식화하면서 수용하는 신학적 사고의 해석학적 계기이다.
(3) 변혁적 친숙화
그러나 이러한 포괄적 수용은 결단코 혼합내지 혼동의 시도는 아니다.
그것은 변혁적 친숙화 과정으로 나아가야 한다. 변혁적 친숙화란 다양한 상황의 측면들을 성서 메시지의 중심 사상에 준거하면서. 서로 연결시키고. 이 연결된 새 의미를 신학적으로 해석하는 계기이다.
개혁주의적 문화신학은 바르트의 착상이 예수 그리스도를 신학의 원리로 만든 것을 비판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역사적 성육신과 메시야적 사역과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의 사역 속에서 보편 구속론적이 아닌. 성서적 구속론적으로 해석한다. 개혁주의 문화신학은 불트만의 착상이 신약성서의 케리그마를 비 사실화 시키고. 케리그마의 사실성을 실존론적인 의미성으로 변형시킨 것을 비판하고. 케리그마의 역사적인 연계성. 즉 사실과 케리그마의 상호 연속성을 강조한다.
개혁주의 문화신학은 틸리히의 착상이 성경의 케리그마를 존재론화 시키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새존재의 복음으로 변형시킨 것으로 비판하고. 기독교적 삼위일체 신개념과 구속과 의인 등의 교의 개념은 모든 철학적 사변적 존재론의 실체가 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개혁주의 문화신학은 판넨베르크의 착상이 성서적 역사개념과 계시개념을 이성주의적 개념으로 변형시키고 있는 것을 비판하고. 계시는 역사 안에서 초월적으로 인류의 구속을 위해서 우연적으로 특수하게 주어진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개혁주의 문화 신학은 융겔의 착상이 성경의 십자가 사건을 사변적 철학적인 사건으로 변형시키고 있는 것을 비판하고. 십자가 사건은 인류의 대속을 위한 삼위일체 신의 구속행위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Ⅳ. 마무리
따라서 개혁신학은 현대신학의 마당 안에서 현대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배타적인 비판이라는 수세적인 자기 방어에만 머물지 않고. 현대신학 사상들이 현대의 정신적 상황과 대결하면서 제기하는 새로운 신학의 착상들을 비판적으로 수용하면서. 현대신학에 새로운 성서적 계시에 정위된 신학을 정립해야 한다. 여기에 개혁신학의 미래가 존재한다. 상황연관적인 교의학이 곧 문화신학이다. 교의학이 상황과 연관되면서 전개될때 그것은 문화신학이 된다. 문화신학이란 개혁 신학의 미래적 과제이다.
그것은 상관관계적인 방법적 사고에 의해서 현대 사상과 문화의 다양한 계기들을 포용하고. 동시에 성경의 계시 사상 근거 위해서 그것들을 변혁적으로 친숙화 하는 상황연관적인 교의학적 사고의 전개로서 가능하다. 상황연관적인 교의학이란 곧 해석학적인 교의학이다. 변혁주의적 문화신학이란 전통교의학의 기초 위에서 현대의 상황과 대화하며. 그 신학적 의미를 천명하는 해석학적 교의학이다.
주
1. K. Barth, Romerbrief, 1922, 1967, p. 266.
2. K. Barth, Kirchliche Dogmatik I/2, pp. 222ff.
3. K. Barth, 상게서 p. 262.
4. R. Bultmann, Theologie des Neuen Testamentes 761968, p. 159.
5. R. Bultmann, 상게서 p. 165.
6. P. Tillich, Systematic Theology Vol. III. Digswell place Great Britain 1968. P. 118.
7. 상게서 p. 119.
8. 상게서 p. 122.
9. 상게서 p. 122.
10. W. Paunenberg, Glaube und Wirklichkeit, 1975. P. 41.
11. W. Paunenberg, Glaube und Wirklichkeit, 1975. P. 34, p. 4
12. 상게서. P. 51.
13. W. Paunenberg, Offenbarung als Geschichte, Gottingen .41970. P. 20. P. 100.
14. 상게서 p. 100.
15. E. Jungel, Gott als Geheimnis der Welt p. 513.
16. 상동.
17. 상게서 p. 514.
18. 상게서 p. 522.
19. 상게서 p. 522.
20. 상게서 p. 524.
21. 상게서 p. 525.
22. 상게서 p. 531.
23. 상게서 p. 531.
24. 상게서 p. 533.
25. 상동.Ⅱ
1. E. Busch, Karl Barths Lebenslauf, Munchen 1978. 96-109.
K. Kupisch, Karl Barth in Selbstzeugnissen und Bilddokumenten, Stuttgart 1977, 37 ff.
2. K. Barth, Romenbrief 721922. P. 96.
3. 拙稿. '바르트의 義認論' 神學正論 1986. 11. Pp. 385.; 38388.
4. H. Zahrnt, die Sachemit Gott, 1972, p. 275.
5. P. Tillich, .kritisches und positives paradox. In Anfange der dialektischen Theologio, Munchen 1962. Pp. 166-169.
F. W. Kantzenbach, [Programme der Theologie] Munchen 2 1978. P. 25
6. P. Tillich, Ges. Werke XII. P. 31f. Ges. Werke VII P. 14.
7. 拙稿. .판넨베르크의 보편사 신학과 라이너 학파의 보편구속사 신학. 신학정론 1985. 5. P. 126
판넨베르크의 해석학으로서의 歷史神學 in : '現代神學의 展望' pp. 19-25.
8. G. W. F. Hegel, Vorlesungen uber die Philosophie der Roligion II/2. (hrsg. G. Lasson), Hamburg 1974. P. 16.
E. Jungel, Gott als Geheimnis der Welt p. 2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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