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현대 신학 방법론에 관한 연구
후기-현대 신학 방법론에 관한 연구
http://cafe.naver.com/modernth/1061
김 성 원 (종교철학/조직신학, 나사렛대)
제 41차 복음주의 신학회 발표회
I. 서론
21세기 신학교육은 후기 현대(late modernity)와 포스트모던(postmodern)의 전환기의 이중적인 맥락에서 기독교 진리를 변증하고 해석하는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현대가 아직 끝나지 않은 상태이고, 많은 사람들이 현대적 사고와 세계관을 가지고 살고 있다. 포스트모던 세계관과 사고는 후기 현대의 한 부류로 있을 뿐이지, 아직 보편화되지 않은 상태에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기독교를 향한 현대 사상의 도전에 대한 변증으로 만 신학교육이 이루어져서는 안되며, 아직 보편화되지 않은 포스트모던 사상의 도전에 대한 변증만을 교육하는 것도 시대를 지나치게 앞서가는 오류를 범할 수 있다. 21세기의 신학교육은 후기현대와 포스트모던의 복합적 도전에 대한 변증과 복음에 대한 명료화 해석(articulative interpretation)을 시도하는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스텐리 그렌츠(Stanley Grenz)는 차세대를 포스트모던으로 보았고, 마틴 마티(Martin Marty)는 차세대를 후기 현대의 연속으로 보면서 포스트모던은 아직 후기 현대의 한 흐름의 유형으로 보았다. 로버트 네빌(Robert Neville)도 마티와 비슷하게 차세대를 후기 현대연속으로 보고 포스트모던도 후기현대의 한 흐름으로 보았다. 토마스 오덴 (Thomas Oden) 은 후기 현대보다는 포스트모던을 선호하고 있다. Thomas C. Oden, Agenda for Theology: Recovering Christian Roots (New York: Harper & Row, 1979), 49.
여기서는 한국적 상황을 고려해서 우리의 신학교육의 대상과 그들이 목회 할 세대를 고려할 때에, 시대 문화적 배경을 후기 현대와 포스트모던의 전환기로 보고, 기독교 복음에 대한 시대적 이해의 방법을 논하고자 한다.
신학이란 신앙에 대한 해석으로서 성서와 기독교 전통과 신앙적 혹은 영적 체험을 주어진 시대적 상황에서 효과적으로 이해하고 해석하며, 복음이 효과적으로 전파될 수 있도록 변증하고 명료화하는 것이다. 신학에 대한 정의는 김성원, 신학을 어떻게 할 것인가: 신학방법의 유형에 관한 개론적 고찰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1), 1장 참조.
시대적인 맥락에 따라서 시도되는 핵심적인 신학적 접근은 기독교 복음을 명료화하는 작업이다. 복음은 여러 시대를 거치면서 인간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능력을 발휘하였다. 후기 현대와 포스트모던의 기로에서 복음의 해석작업이 필요하고, 복음주의 맥락에서 적지 않은 변증적 시도가 나오고 있다. 본 글은 후기 현대 변증적 신학의 가능한 방법을 부가적으로 제시하는 것이 이 글의 요지이다.
글을 전개하는 방법은 초월성과 세속성의 관계를 변증법적(dialectical)으로 논하는 것이다. 기독교가 도전을 많이 받는 초월성과 현대주의의 핵심적인 내용인 이성중심주의와 인본주의적인 세속성과의 관계를 변증법적으로 전개한다는 말이다.
후기-현대와 포스트모던의 시대적 특징을 살피고, 복음이 어떻게 효과적으로 명료화 될 수 있는지에 대한 방법을 기독교의 진리에 대한 변증적인 차원에서 접근하고자 한다. 한상화 교수가 지난 3월에 발표한 “탈자유주의(post-liberal)와 탈보수주의 (post-conservative)애 관한 비평적 고찰”이라는 논문에서 이 두 가지 흐름에 대하여 비판적 입장을 취한 것과 맥락을 같이 한다. 성서 중심적인 신학을 한다는 차원, 기독교 유신론, 성서적 현실주의는 같은 입장이지만, 그러면서 여기서는 신복음주의(Neo-Evangelical) 입장을 취하는 면이 있는데, 특히 토대주의(foundationalism)를 넘어서는 것에 대해서는 신복음주의적 입장을 취한다. 기존의 고정된 교리적 토대를 넘어서 인간복제, 기술문명, 지구촌 갈등, 경제 질서 등의 새로운 시대적 문제에 대한 해석을 성서에서 지속적으로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변증(apologetic)이라는 말은 복음을 시대적으로 명료화하는 것과 복음의 타당성이 시대적으로 더욱 수용적일 수 있도록 해석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소고에서 제시하고자 하는 것은 방법론적으로 후기-현대의 변증적 신학 방법론으로서, 후기현대와 포스트모던 변증적 방법의 하나로서 신학적 미학 방법을 제안하고자 한다.
II. 후기현대의 도전과 변증의 필요성
후기현대 신학의 임무는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은 한국 인구의 1/4의 기독교문화와 후기현대의 매우 다른 시대문화 사이에서 이중적으로 살고 있기 때문에 후기 현대의 복음주의 신학은 새로운 방법으로 찾아야하기 때문이다. 이중성에 대한 적지 않은 격감 작업이 없이는 기독교는 후기현대 사회에 별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이다. 기독교가 이방 문화에서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진지하게 기독교 진리에 대한 변증(apologetics)을 시도하지 않으면, 현대 사회는 기독교를 결국 버리게 될 것이다. Neville, Religion in Late Modernity, 154.
후기-현대의 형인 현대주의(modernism) 여기서 현대주의는 modernism을 번역한 것인데, 일반적으로 근대주의로 번역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여기서는 후기현대라는 어휘를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서 현대주의라는 번역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포스트모던의 상대적인 개념으로서 근대주의보다는 현대주의가 더 이해에 도움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는 이성중심주의와 인간중심주의가 대표적으로 지배하는 아이디어 세트이다.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은 이성중심주의와 인간중심주의를 해체하고 현대주의의 대를 이어가는 사상적 흐름이다. 포스트모던과 기독교 사이에서 이 둘의 관계는 부정적인 것으로만 보기는 어렵다. 서로 도움이 되고 배울 수 있는 것이 있다. Paul Lakeland, Postmodernity: Christian Identity in a Fragmented Age (Minneapolis, MN: Fortress Press, 1997), 113. 기독교는 이성중심주의와 인간중심주의를 파괴하려하는 점에 대해서 포스트모던에 대하여 긍정적인 태도를 취할 수 있다.
이미 사상적으로 이러한 현상이 번져가고 있으며, 현대주의는 쇠잔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포스트모던은 반현대(contra-modernity)적이거나 극단적 현대(ultra-modernity)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현대를 초월하는 곳에 현대를 대신해서 나타난 곳이다. 인간적인 내용을 포함하면서 현대를 초월한 새롭고 복합적이고 전체적인 시대이다. Hans Kung, Global Responsibility: In Search of a New World Ethic (New York: The Continuum Publishing Company, 1993), 12-24. 한스 큉은 헤겔의 변증법을 이용해서 현대와 포스트모던의 관계를 설명하였다. Ibid., 24.
그러나 아직은 포스트모던이 보편화되었다고 보지는 않는다. 오늘날 현실적인 문화는 현대의 역사 문화적 현상이 주요 삶의 장이 되고 있으며, 현대가 진전된 모습으로서 후기 현대의 모습을 가지고 있고, 그 중에서 포스트모던 현상이 서서히 일어나고 있는 모습이다.
이성-인간 중심주의의 현대주의가 낳은 역사 문화적 발전은 다양하다. 현대 이전에 이미 15세기의 자본주의의 등장의 시작에서, 서유럽에서 봉건제도와 군주정치에서 민주주의로 변화되는 운동, 18세기의 산업혁명, 20세기의 통신혁명과 같은 것이 현대를 묘사해 주는 것이다. Os Guinness, The American Hour (New York: Free Press, 1992), 26-27; Douglas Groothuis, Truth Decay: Defending Christianity Against the Challenges of Postmodernism (Downers Grove, Il: InterVarity Press, 2000), 52-52에서 재인용.
현대의 흐름은 오늘날 지속적으로 존재하고 있으며, 국제적 자본주의, 정보혁명, 국제여행, 이상으로서의 민주정부, 종교의 자유와 자유적 사고에 의한 다원주의와 같은 것이 현실적인 삶의 현상이다. 아직 포스트모던은 이러한 현상을 잠식시키지 않은 상태이다. Douglas Groothuis, Truth Decay, 53.
현대와 포스트모던의 전환기에 있다는 차원에서 이러한 현상은 후기-현대의 현상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리고 포스트모던(postmodernity)은 현대가 심화되고 확장되면서 형성되었다. 포스트모던의 대표적인 모습은 사회 종교적으로 서로 동의하고 있었던 공동의식이 깨어진 것이다. 자유분방한 다원주의가 사회의 응집력을 희석시키는 현상으로 나났다. Douglas Groothuis, Truth Decay, 53.
현대주의가 기독교에 도전한 것은 심각하다. 현대주의적 무신론을 극복하지 않고는 서유럽의 복음화와 그 영향을 받은 세계에서 종교의 번성은커녕 존립까지 요원할지도 모른다. 니체, 마르크스, 다아윈, 프로이드 등은 신을 살해하려고 했던 중범들로서 현대의 중심적 사상가들이다. 유럽의 기독교가 시들어가고 침체되는 것도 이들의 책임이 막중하다. 그런데 아직도 이들의 이론이 공교육의 현장에서 중심적 주제로 여과 없이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심히 염려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복음주의는 이들에 대한 보다 신랄한 비판을 시도해야 한다. 그리고 여기에 부가적으로 후기현대의 결정적인 오류는 세속화(secularization) 현상에 있다. 초월성을 등한시하고 유물론적, 가시적, 현세적 가치와 세계관이 그 본체이다. 인간중심으로 세상을 해석하고 이해하는 세속주의의 오류가 기독교의 초월적 진리에 대한 이해를 결정적으로 방해하는 현상으로 등장했다. 세속주의가 일어나면서 교회의 언어가 보편성을 잃게되고 신앙을 저버리는 현상이 일어나기도 한다. 이에 대한 후기 현대신학 방법은 전통적 신학 방법을 떠나서 독특하게 접근하는 방법을 시도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시대적 맥락에서 접근이 전통적인 것이나 신앙의 골수와 대치되는 현상으로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고 본다. 그러한 차원에서 신학은 일차적 질서 언어로 이루어져야 한다. 스텐리 그렌츠나 조지 린드백(George Lindbeck)은 이차적 질서의 언어로 이루어지는 것을 주장했다. (린드백은 탈자유주의 신학을 시도하였으며, 결국 전근대주의적(Premodern) 신학으로 갔다는 평도 있다. Torrence W. Tilley, Postmodern Theologies: The Challenge of Religious Diversity (New York: Orbis, 1995), 106-107.)그러나 교리신학 혹은 성서를 중심으로 한 신학은 일차적 질서의 언어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 이유는 교회와 신학의 연속의 문제가 서양에서 심각하게 제기되고, 한국에서도 비연속성의 문제에 대한 교회의 원성이 높기 때문이다. 복음주의 신학교에서조차 신학과 교회의 비연속성의 문제가 종종 제기되기도 한다. 신학은 일차적 질서 언어로 시도될 때에 교회와 신학교육의 연속성을 찾을 수 있다. 또한 신학적 언어는 성서를 중심으로 한 신앙적 언어이어야 한다. 린드백의 언어 문화적 방법으로 본다면 그 기독교의 문화 언어적 맥락에서 의미를 지니고 있고, 실증주의나 분석철학 혹은 이성중심의의 도전에 대한 변증이 가능하다. 왜냐하면, 내적 텍스트(intratextuality)는 그 맥락에서 의미를 갖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면서도 신학은 이차적 질서 언어를 배제해서는 안 된다. 신학 방법론이나 종교철학 등 신학 교육에 있어서 없어는 안 되는 분야에서는 일차적 질서 언어는 제한성을 지닌다. 후기현대의 언어와 성서적 언어의 차이를 극복하는 서술적 신학이 필요하다. 이러한 서술은 일차적 질서의 언어로는 어려운 것이고, 이차적 질서의 언어로 복음에 대한 변증과 명료화 작업을 시도해야 한다. 신복음주의의 흐름은 그렌츠를 비롯해서 여러 신학자들이 이차적 언어의 사용을 수용하고 있다. 그러나 이차적 언어 신학의 문제는 다원성과 애매성(plurality and ambiguity)으로서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는 상태로서 일차적 질서언어를 우선적으로 고려하고 이차적인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후기-현대적 변증적 신학은 일차적-질서의 명제(first-order proposition)의 성격을 유지해야 한다. 일차적-질서의 명제 구조작업은 계시의 핵심인 성서에서 유래해야 하며, 공동체나 경험에서 나오는 것은 신중을 기해야 한다. 공동체나 경험에서 나오는 신학적 명제는 그 내용이 다른 종교의 원리와도 유사한 면을 지니고 있을 때에, 다원주의적인 해석의 위험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린드백은 교리의 본질에서 교리는 이차적 질서의 명제로 보았고, 그 기능은 다양한 공동체에서 규율적 기능(regulative function)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주장했다. 그러나 신학을 이차적 질서의 명제로 보는 것은 다원주의적인 위험을 가지고 있으며, 신학과 성서의 관계가 멀어질 수 있는 결과를 초래하기 쉽다. 그랜츠(Stanley Grenz)는 린트백의 이차적 질서의 명제론을 따르면서 종교적 경험과 문화 공동체의 삶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보았다. Stanley Grenz, Revisioning Evangelical Theology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1993), 77-78. 후기-현대의 변증적 신학은 일차적-질서의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 핵심적인 작업이지만, 그렇다고 이차적-질서의 언어를 외면할 수 없다. 특히 부가적 설명이나 보완으로서 신학방법론이나 종교철학 혹은 해석학과 같은 분야에서는 불가피하게 이차적-질서의 언어 혹은 다른 가능한 언어도 필요한 경우 사용할 수밖에 없는 것이 시대적 복음이해의 현실이다.
V. 후기현대의 신학적 미학 방법론
미학은 성서적 방법이다. 성서에 있는 사건의 묘사와 표현은 미학적인 것이 많다. 이미지, 시, 찬미, 아름다운 나래티브, 등 심미적 특성을 가지고 있는 미학적 방법을 사용하였다. 그러한 영향을 받아서 신앙적 자세가 심미적 기준을 기반으로 해서 만들어진 예술적 표현에 의해서 예배 형식이 이루어지고 있다. 신앙적 공동체는 찬송하고, 춤을 추고, 시적인 표현을 하고 드라마적 연기를 하면서 기도를 한다. Louis Dupre, Symbols of the Sacred, 70. 그리고 미학적 이미지는 종교적 경험을 표현하는데 지속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Ibid., 73.
영적인 내용을 담은 미학적 접근은 현대주의와 포스트모던의 도전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 중에 하나라고 본다. 현대주의의 이성적 도전에 대한 대안으로서 조화와 이미지 나래티브와 찬미 등은 논리와 객관성과 규칙성(regularity)의 원리를 다루는 과학적 접근 도전에 대한 놀라운 대안이다. 사실 이러한 도전은 현대 혹은 후기현대의 도전만이 아니라 기독교 역사를 두고 지속되어온 것이다. 그러나 신앙이 고수되고 기독교가 성장한 것은 방법론적인 차원에서 이러한 미학의 가능성의 공로가 크다고 할 수 있다. 후기 현대와 포스트모던의 기로에서 다시 한번 심도 있는 신앙적 미학의 접근이 요구된다.
후기-현대 신학은 미학적 이해를 도구로 사용해서 복음을 해석하고 보편 명료화해야 한다. 미학(aesthetics)이란 진리의 범주보다 큰 미의 세계에 대한 탐구이다. 미학이란 예술과 심미적 경험에 대한 일반적인 탐구를 의미한다. 예술이란 음악, 드라마, 미술, 시, 등 여러 가지 분야를 포함한다. 성서는 찬양과 시와 같은 미학적인 요소를 많이 담고 있다. 미학은 17세기의 바움가르텐(A. Baumgarten, 1714-62)에 의해서 철학의 한 분야로 다루어졌다. 현대 미학은 심미론, 예술 철학, 비평적 예술철학 등을 포함하고 있다. 여기서 주장하는 것은 신학은 철학의 도움을 받은 것과 같이 미학적 접근 방법을 활용해야 한다고 본다.
이러한 미학이 방법론으로 제기되는 이유는 우선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첫째는 성서적으로 하나님의 역사는 이성적 논리보다는 미학적 묘사가 우위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논리적 언어의 세계를 넘어서 미학적 묘사의 진수를 맞보는 작업이다. 신앙에 대한 미학적 진수는 이성중심적 혹은 논리적 이해의 범주를 넘어서는 깊은 이해의 영역이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고 보기에 좋았다고 하였다. 도덕적 행위를 할 수 있는 존재가 있기 전에 세상이 좋았다는 것은 심미적으로 좋았다(aesthetically good)는 것을 의미한다. 아름답고 순수하고 가능성이 넘치는 현상이다. Douglas Groothuis, Truth Decay: Defending Christian Against the Challenges of Postmodernism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2000), 249.
나이아가라 폭포의 웅장함과 그랜드캐년의 장엄함과 금강산의 기묘한 아름다움은 언어로 표현하는 데에 한계성이 있다. 언어의 벽을 넘는 창조의 아름다움의 세계이다. 하나님은 세상이 아름답게 창조된 것을 통해서 영광을 받는 사실은 믿을 있다. 객관적 아름다움은 하나님의 일반계시에 해당되는 것이다(시19:1-16; 행 14:17; 롬 1-2). 성서에서 언급되는 성전 건축은 그 당시의 최고의 아름다운 양식이었다. 값진 돌이 성전에 놓여졌다(역하 3:6). 이 돌들은 어떤 기능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아름다움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었다. Douglas Groothuis, Truth Decay, 251-252.
언어 이면에 담겨있는 영적인 아름다움의 세계를 이해하는 신학적 미학의 작업이 필요하다.
포스트모던 해체주의자들은 객관적인 미와 심미적 가치의 영속성을 무시한다. 그러나 성서적 이해는 문화에 내재해있는 예술적 선의 가치를 인식하고 있으며, 변화되고 순수해진 문화가 도래하는 세상이 존재하게 될 것을 기대하고 있다. 이러한 것은 해체주의자들이 예술은 단지 문화적이고 정치적이거나 언어적이고 심리학적인 것으로 해석하는 것을 뒤집어 업는 현상이 된다. Douglas Groothuis, Truth Decay, 252.
하나님의 선물은 자연적 아름다움과 인간 영혼의 구원을 뜻하고, 전 우주적 조화와 구원을 의미한다.
여호와를 거룩함의 아름다움으로 예배하라고 하였다(시 29:2). 히브리 전통에서 미적 이해는 독특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미는 존재론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역사적이거나 사건적인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최고의 아름다움은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사역이다. “이스라엘에서 미는 어떤 것이 존재한 것(that existed)이라기보다는 일어난 것(that happened)이었다.” Gerhard von Rad, Old Testament Theology, Vol. 1, trans. D.M.G. Stalker (New York: Harper and Row, 1962), 368.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창조의 정점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들었다. 예술적 표현은 하나님의 선한 창조의 자연적인 현상이다. 창조의 자연적 현상 속에서 미학적 이해와 묘사는 중요한 작업이다. 신학적 미학(theological aesthetics)은 현대의 이성중심주의 도전과 과학적 방법의 한계를 넘어서는 시도가 될 수 있다. 신학적 미학은 사실 역사적으로 오래된 학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는 반면에, 신학은 미학을 등한시했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폰 발타사르(von Balthasar)는 신학자들이 미학적 범주를 도입해서 하나님의 본성과 우주론과 하나님의 나라 그리고 기독교인의 삶에 대해서 묘사하는 일을 하는데 방법론적 타당성을 주장하였다. 그는 신학적 언어가 미학적 진실성과 진리의 명제를 나타내 보일 수 있으며, 명료함(claritas)을 제공할 수 있다. Hans Urs von Balthasar, The Glory of the Lord: A Theological Aesthetics, vol. 1, (San Francisco: Ignatius, 1982) 참조.
미학적 방법을 통한 복음의 이해와 해석 작업은 미학적 복음주의로 발전될 수 있다. 언어적 한계성 때문에 현대사상가들 중에서 분석철학자들과 실증주의자들의 도전을 받았다. 이들에 따르면 기독교의 명제는 의미의 실증원리에 맞지 않기 때문에 무의미하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상징론, 은유론, 언어개임, 등의 방법으로 극복될 수 있는 것이 되었다. 여기서 한가지 더 가능한 것은 미학적 묘사와 해석의 가능성이다. 상징은 여러 면에서 종교적일 수 있다. 그러나 성스러운 것을 직접 묘사하는 것은 언어이다. 특히 상징이 묘사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표현은 언어의 기능이다. Louis Dupre, Symbols of the Sacred, 46. 그리고 Joseph Bochenski, The Logic of Religion (New York: New York University Press, 1965), 94. 그러한 맥락에서 말씀 혹은 성서 언어 연구는 단순언어적 이해를 넘어서 영성 형성에 매우 중요한 면을 지니고 있다.
성서 말씀은 언어적 해석을 넘어서는 심오한 영적 의미를 담고 있다.
여기서는 후기 현대의 시대 문화적 흐름을 고려해서 신학적 미학의 가능성과 효율성을 후기 현대의 복음주의 신학에 있어서 하나의 방법론으로서 적지 않은 논란이 제기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제안하고자 하는 것이다.
신학적 미학은 단순히 아름다움을 찾는 신학이 아니다. 보편적 미의 추구는 탈신학적 범주에서도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탈신학적 범주의 미학적 내용은 다원주의적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므로 폰 발타사르가 주장한 것처럼, 신학적 미학은 계시적 미학으로 초점이 맞추어져야 한다. 미학이 복음주의적 신학방법으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계시와 성서 안에서 신학적 미학이 시도되어야 한다. von Balthasar, The Glory of the Lord, 117.
신학적 미학의 가능성은 일차적으로 믿음과 계시의 관계에서 찾아야 한다. 왜냐하면, 믿음은 거룩과 신적인 것에서 비롯되는 것이고,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형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계시 속에 담겨 있는 진리와 선은 영적 심연의 세계에서 경험되고 나타난 것이기 때문이다. von Balthasar, The Glory of the Lord, 117-118.
성서적 시와 찬미는 미학적 형식을 가지고 진리와 선을 나타내고 있다. 복음서의 나래티브와 명제적 형식의 말씀도 미학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 언어의 형식과 질서는 미학적 특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계시의 세계에서 인식하고 이해할 수 있는 형식은 합리적 논리와 지성에 의한 것만이 아니라, 인간의 의식의 세계에서 직관과 감성 등의 다양한 요소에 의한 경험이 있다.
거룩을 경험함에 있어서 경외함과 놀라움을 경험하는 것은 합리적 지성 인식의 수단으로 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골돈 카프만은 지성적 신비주의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신비적 경험은 지성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영역이 있다는 주장이다. 신비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경험적인 것이 아니라 지성적인 것이라고 하였다. Gordon Kaufman, God-Mystery-Diversity: Christian Theology in a Pluralistic World (Minneapolis, MN: Fortress Press, 1996), 97.
초월적 영적 경험의 세계는 미학적 도움으로 가능하다. 시의 깊은 맛은 논리적 언어의 틀을 넘어서 인식하는 미학적 인식의 원리에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미학은 신학과의 밀접한 관계성을 고려할 수 있다. 미학적 개념과 신학적 개념은 서로 변화를 줄 수 있다. 미학적 인식은 사고의 세계를 열어주는 역할을 할 수 있고, 신학적 개념은 더욱 진전된 미학적 인식을 증진하는 역할을 한다.
미학은 상징이나 이미지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특히 기독교 신학에서 그러한 면을 발견할 수 있다. 인간은 하나님의 이미지(Imago Dei)를 가지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구속적 사건을 나타낼 때에 십자가를 상징적으로 사용한다. 상징과 이미지는 의사소통에 있어서 언어적 한계성을 넘어서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언어의 제한성을 초월할 수 있다는 차원에서 이성중심주의와 과학적 세계관의 도전에 대한 변증적 도구로 사용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상징과 이미지는 해석학적인 차원에서 다원적 이해의 모호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견제해야 하는 면이 있다. 신학적 미학의 제한성도 신학적 주제에 대한 미학의 다원적 해석에 있는 것이다. 이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서 배타적인 계시적 미학을 발타사르가 주장한 것이다.
예배는 상징과 이미지와 말씀이 미학적으로 조화를 이루면서 드려진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향한 구속의 핵심적 상징으로써 십자가를 예배의 중심에 두고 있다. 성시를 낭독하고, 말씀과 음악적 소리가 미학적으로 조화를 이룬 찬양을 한다. 수사학적으로 정리된 말씀을 나누고, 아름다운 사랑의 친교를 나눈다. 미학적 요소가 진리 자체이거나 예배의 핵심적 내용은 아니지만, 영적 체험을 위한 예배의 중요한 도구로서 사용되고 있다. 미학적 요소는 영적 초월성 경험에 도구적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이성중심주의가 예배를 비판하는 것은 가능할 수 있지만, 미학적으로 묘사되는 영성형성의 현상은 뒤집을 수 없다. 이러한 면에서 신학적 미학은 현대주의 도전을 넘어설 수 있는 가능성을 함축하고 있다. 포스트모던 미학적 변증은 후기현대의 변증신학의 방법론으로 가능한 것이다. 그렇다고 요즈음 유행하는 탈구조주의적 포스트모던 음악이나 변칙적 삶의 스타일을 옹호하는 입장은 결코 아니다. 계시적 범주 안에서 신학적 미학은 복음적 진리를 명료화 할 수고 영성형성에 도구적으로 이바지 할 수 있다. 신학적 미학은 하나님의 주관성을 접하는데 용이하게 한다. 하나님에 대한 대면은 단지 미학적인 아름다움을 통해서만 만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공포와 두려움으로 만난다. 그러나 공포와 두려움 속에서 역설적인 영적 체험을 하게 되고, 아름다운 경험으로 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다. 공포와 두려움의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의와 사랑의 존재를 원하는 것이고, 불의와 증오의 존재에서 의와 사랑의 존재로 변화되는 것은 아름다운 현상이다.
초대 교회에서는 다락방에서 예배를 드리고 지하동굴 카타쿰에서 교회가 이루어 졌다. 다락방과 카타쿰을 예술적인 미적 조건이 있는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모리아산, 호렙산, 시내산, 요단강, 감람산, 다락방과 로마 카타쿰 등은 하나님과 인간이 아름답게 만났던 성스러운 곳으로 이해할 수 있다. 영적인 아름다움의 현상이 나타나는 곳은 신학적 미학의 해석이 가능하다.
내적인 신앙적 현상에서도 미학적 요소를 발견할 수 있다. 경건과 예배를 통해서 성스러움을 경험할 때에 경외함과 놀라움과 경이로움이 어우러져서 심연의 영적 아름다움을 경험한다. 미적인 영적 세계에서 진리를 인식하고 신앙이 형성된다. 후기현대의 합리적 원리가 진리 인식의 도구로 사용되고, 다른 도구는 배타적이거나 무시하는 성향에서, 미학적 이해와 변증은 후기현대의 복음에 대한 명료화 작업과 변증의 중요한 도구로 사용될 수 있다고 본다.
VII. 결론
복음에 대한 후기현대의 횡포는 역사상 매우 훼방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성중심주의와 인간중심주의에 의한 후기현대의 세속주의는 유럽의 기독교를 넘어뜨렸다. 한국의 이성중심적 교육은 세속주의를 부축이고 있고, 젊은 세대들은 신앙의 세계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게 하고 있다. 이에 대한 변증으로서 합리적 복음주의, 과학적 복음주의, 포스트모던 복음주의가 나타나고 있고, 적지 않은 성과를 거두고 있다.
특히 신학적 주제로서는 초월성의 문제와 인간론의 문제가 후기 현대에 도전 받는 가장 핵심적인 것이라고 본다. 후기현대의 도전에 대한 복합적 대안으로서 미학적 복음주의를 제시하려고 하였다. 초월성과 세속성의 변증법적 관계에서 초월성 인식의 가능성에 대한 해석학적 변증 방법으로서 신학적 미학의 가능성을 제안하였다. 신학적 미학은 초월성에 대한 미학적 묘사를 통해서 이해와 해석이 가능하다고 보며, 인간의 영적인 면도 미학적 접근을 통해서 인식의 타당성을 높일 수 있다고 본다. 하나님의 은총과 성령의 역사는 언어적 이해, 신비적 경험, 초자연적 현상을 통해서 나타나지만, 미학적 도구를 통해서 많이 나타내 보이기 때문에, 복음에 대한 미학적 명료화 작업이 가능하고 시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본다.
http://cafe.naver.com/modernth/1061
김 성 원 (종교철학/조직신학, 나사렛대)
제 41차 복음주의 신학회 발표회
I. 서론
21세기 신학교육은 후기 현대(late modernity)와 포스트모던(postmodern)의 전환기의 이중적인 맥락에서 기독교 진리를 변증하고 해석하는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현대가 아직 끝나지 않은 상태이고, 많은 사람들이 현대적 사고와 세계관을 가지고 살고 있다. 포스트모던 세계관과 사고는 후기 현대의 한 부류로 있을 뿐이지, 아직 보편화되지 않은 상태에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기독교를 향한 현대 사상의 도전에 대한 변증으로 만 신학교육이 이루어져서는 안되며, 아직 보편화되지 않은 포스트모던 사상의 도전에 대한 변증만을 교육하는 것도 시대를 지나치게 앞서가는 오류를 범할 수 있다. 21세기의 신학교육은 후기현대와 포스트모던의 복합적 도전에 대한 변증과 복음에 대한 명료화 해석(articulative interpretation)을 시도하는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스텐리 그렌츠(Stanley Grenz)는 차세대를 포스트모던으로 보았고, 마틴 마티(Martin Marty)는 차세대를 후기 현대의 연속으로 보면서 포스트모던은 아직 후기 현대의 한 흐름의 유형으로 보았다. 로버트 네빌(Robert Neville)도 마티와 비슷하게 차세대를 후기 현대연속으로 보고 포스트모던도 후기현대의 한 흐름으로 보았다. 토마스 오덴 (Thomas Oden) 은 후기 현대보다는 포스트모던을 선호하고 있다. Thomas C. Oden, Agenda for Theology: Recovering Christian Roots (New York: Harper & Row, 1979), 49.
여기서는 한국적 상황을 고려해서 우리의 신학교육의 대상과 그들이 목회 할 세대를 고려할 때에, 시대 문화적 배경을 후기 현대와 포스트모던의 전환기로 보고, 기독교 복음에 대한 시대적 이해의 방법을 논하고자 한다.
신학이란 신앙에 대한 해석으로서 성서와 기독교 전통과 신앙적 혹은 영적 체험을 주어진 시대적 상황에서 효과적으로 이해하고 해석하며, 복음이 효과적으로 전파될 수 있도록 변증하고 명료화하는 것이다. 신학에 대한 정의는 김성원, 신학을 어떻게 할 것인가: 신학방법의 유형에 관한 개론적 고찰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1), 1장 참조.
시대적인 맥락에 따라서 시도되는 핵심적인 신학적 접근은 기독교 복음을 명료화하는 작업이다. 복음은 여러 시대를 거치면서 인간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능력을 발휘하였다. 후기 현대와 포스트모던의 기로에서 복음의 해석작업이 필요하고, 복음주의 맥락에서 적지 않은 변증적 시도가 나오고 있다. 본 글은 후기 현대 변증적 신학의 가능한 방법을 부가적으로 제시하는 것이 이 글의 요지이다.
글을 전개하는 방법은 초월성과 세속성의 관계를 변증법적(dialectical)으로 논하는 것이다. 기독교가 도전을 많이 받는 초월성과 현대주의의 핵심적인 내용인 이성중심주의와 인본주의적인 세속성과의 관계를 변증법적으로 전개한다는 말이다.
후기-현대와 포스트모던의 시대적 특징을 살피고, 복음이 어떻게 효과적으로 명료화 될 수 있는지에 대한 방법을 기독교의 진리에 대한 변증적인 차원에서 접근하고자 한다. 한상화 교수가 지난 3월에 발표한 “탈자유주의(post-liberal)와 탈보수주의 (post-conservative)애 관한 비평적 고찰”이라는 논문에서 이 두 가지 흐름에 대하여 비판적 입장을 취한 것과 맥락을 같이 한다. 성서 중심적인 신학을 한다는 차원, 기독교 유신론, 성서적 현실주의는 같은 입장이지만, 그러면서 여기서는 신복음주의(Neo-Evangelical) 입장을 취하는 면이 있는데, 특히 토대주의(foundationalism)를 넘어서는 것에 대해서는 신복음주의적 입장을 취한다. 기존의 고정된 교리적 토대를 넘어서 인간복제, 기술문명, 지구촌 갈등, 경제 질서 등의 새로운 시대적 문제에 대한 해석을 성서에서 지속적으로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변증(apologetic)이라는 말은 복음을 시대적으로 명료화하는 것과 복음의 타당성이 시대적으로 더욱 수용적일 수 있도록 해석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소고에서 제시하고자 하는 것은 방법론적으로 후기-현대의 변증적 신학 방법론으로서, 후기현대와 포스트모던 변증적 방법의 하나로서 신학적 미학 방법을 제안하고자 한다.
II. 후기현대의 도전과 변증의 필요성
후기현대 신학의 임무는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은 한국 인구의 1/4의 기독교문화와 후기현대의 매우 다른 시대문화 사이에서 이중적으로 살고 있기 때문에 후기 현대의 복음주의 신학은 새로운 방법으로 찾아야하기 때문이다. 이중성에 대한 적지 않은 격감 작업이 없이는 기독교는 후기현대 사회에 별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이다. 기독교가 이방 문화에서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진지하게 기독교 진리에 대한 변증(apologetics)을 시도하지 않으면, 현대 사회는 기독교를 결국 버리게 될 것이다. Neville, Religion in Late Modernity, 154.
후기-현대의 형인 현대주의(modernism) 여기서 현대주의는 modernism을 번역한 것인데, 일반적으로 근대주의로 번역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여기서는 후기현대라는 어휘를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서 현대주의라는 번역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포스트모던의 상대적인 개념으로서 근대주의보다는 현대주의가 더 이해에 도움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는 이성중심주의와 인간중심주의가 대표적으로 지배하는 아이디어 세트이다.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은 이성중심주의와 인간중심주의를 해체하고 현대주의의 대를 이어가는 사상적 흐름이다. 포스트모던과 기독교 사이에서 이 둘의 관계는 부정적인 것으로만 보기는 어렵다. 서로 도움이 되고 배울 수 있는 것이 있다. Paul Lakeland, Postmodernity: Christian Identity in a Fragmented Age (Minneapolis, MN: Fortress Press, 1997), 113. 기독교는 이성중심주의와 인간중심주의를 파괴하려하는 점에 대해서 포스트모던에 대하여 긍정적인 태도를 취할 수 있다.
이미 사상적으로 이러한 현상이 번져가고 있으며, 현대주의는 쇠잔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포스트모던은 반현대(contra-modernity)적이거나 극단적 현대(ultra-modernity)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현대를 초월하는 곳에 현대를 대신해서 나타난 곳이다. 인간적인 내용을 포함하면서 현대를 초월한 새롭고 복합적이고 전체적인 시대이다. Hans Kung, Global Responsibility: In Search of a New World Ethic (New York: The Continuum Publishing Company, 1993), 12-24. 한스 큉은 헤겔의 변증법을 이용해서 현대와 포스트모던의 관계를 설명하였다. Ibid., 24.
그러나 아직은 포스트모던이 보편화되었다고 보지는 않는다. 오늘날 현실적인 문화는 현대의 역사 문화적 현상이 주요 삶의 장이 되고 있으며, 현대가 진전된 모습으로서 후기 현대의 모습을 가지고 있고, 그 중에서 포스트모던 현상이 서서히 일어나고 있는 모습이다.
이성-인간 중심주의의 현대주의가 낳은 역사 문화적 발전은 다양하다. 현대 이전에 이미 15세기의 자본주의의 등장의 시작에서, 서유럽에서 봉건제도와 군주정치에서 민주주의로 변화되는 운동, 18세기의 산업혁명, 20세기의 통신혁명과 같은 것이 현대를 묘사해 주는 것이다. Os Guinness, The American Hour (New York: Free Press, 1992), 26-27; Douglas Groothuis, Truth Decay: Defending Christianity Against the Challenges of Postmodernism (Downers Grove, Il: InterVarity Press, 2000), 52-52에서 재인용.
현대의 흐름은 오늘날 지속적으로 존재하고 있으며, 국제적 자본주의, 정보혁명, 국제여행, 이상으로서의 민주정부, 종교의 자유와 자유적 사고에 의한 다원주의와 같은 것이 현실적인 삶의 현상이다. 아직 포스트모던은 이러한 현상을 잠식시키지 않은 상태이다. Douglas Groothuis, Truth Decay, 53.
현대와 포스트모던의 전환기에 있다는 차원에서 이러한 현상은 후기-현대의 현상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리고 포스트모던(postmodernity)은 현대가 심화되고 확장되면서 형성되었다. 포스트모던의 대표적인 모습은 사회 종교적으로 서로 동의하고 있었던 공동의식이 깨어진 것이다. 자유분방한 다원주의가 사회의 응집력을 희석시키는 현상으로 나났다. Douglas Groothuis, Truth Decay, 53.
현대주의가 기독교에 도전한 것은 심각하다. 현대주의적 무신론을 극복하지 않고는 서유럽의 복음화와 그 영향을 받은 세계에서 종교의 번성은커녕 존립까지 요원할지도 모른다. 니체, 마르크스, 다아윈, 프로이드 등은 신을 살해하려고 했던 중범들로서 현대의 중심적 사상가들이다. 유럽의 기독교가 시들어가고 침체되는 것도 이들의 책임이 막중하다. 그런데 아직도 이들의 이론이 공교육의 현장에서 중심적 주제로 여과 없이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심히 염려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복음주의는 이들에 대한 보다 신랄한 비판을 시도해야 한다. 그리고 여기에 부가적으로 후기현대의 결정적인 오류는 세속화(secularization) 현상에 있다. 초월성을 등한시하고 유물론적, 가시적, 현세적 가치와 세계관이 그 본체이다. 인간중심으로 세상을 해석하고 이해하는 세속주의의 오류가 기독교의 초월적 진리에 대한 이해를 결정적으로 방해하는 현상으로 등장했다. 세속주의가 일어나면서 교회의 언어가 보편성을 잃게되고 신앙을 저버리는 현상이 일어나기도 한다. 이에 대한 후기 현대신학 방법은 전통적 신학 방법을 떠나서 독특하게 접근하는 방법을 시도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시대적 맥락에서 접근이 전통적인 것이나 신앙의 골수와 대치되는 현상으로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고 본다. 그러한 차원에서 신학은 일차적 질서 언어로 이루어져야 한다. 스텐리 그렌츠나 조지 린드백(George Lindbeck)은 이차적 질서의 언어로 이루어지는 것을 주장했다. (린드백은 탈자유주의 신학을 시도하였으며, 결국 전근대주의적(Premodern) 신학으로 갔다는 평도 있다. Torrence W. Tilley, Postmodern Theologies: The Challenge of Religious Diversity (New York: Orbis, 1995), 106-107.)그러나 교리신학 혹은 성서를 중심으로 한 신학은 일차적 질서의 언어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 이유는 교회와 신학의 연속의 문제가 서양에서 심각하게 제기되고, 한국에서도 비연속성의 문제에 대한 교회의 원성이 높기 때문이다. 복음주의 신학교에서조차 신학과 교회의 비연속성의 문제가 종종 제기되기도 한다. 신학은 일차적 질서 언어로 시도될 때에 교회와 신학교육의 연속성을 찾을 수 있다. 또한 신학적 언어는 성서를 중심으로 한 신앙적 언어이어야 한다. 린드백의 언어 문화적 방법으로 본다면 그 기독교의 문화 언어적 맥락에서 의미를 지니고 있고, 실증주의나 분석철학 혹은 이성중심의의 도전에 대한 변증이 가능하다. 왜냐하면, 내적 텍스트(intratextuality)는 그 맥락에서 의미를 갖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면서도 신학은 이차적 질서 언어를 배제해서는 안 된다. 신학 방법론이나 종교철학 등 신학 교육에 있어서 없어는 안 되는 분야에서는 일차적 질서 언어는 제한성을 지닌다. 후기현대의 언어와 성서적 언어의 차이를 극복하는 서술적 신학이 필요하다. 이러한 서술은 일차적 질서의 언어로는 어려운 것이고, 이차적 질서의 언어로 복음에 대한 변증과 명료화 작업을 시도해야 한다. 신복음주의의 흐름은 그렌츠를 비롯해서 여러 신학자들이 이차적 언어의 사용을 수용하고 있다. 그러나 이차적 언어 신학의 문제는 다원성과 애매성(plurality and ambiguity)으로서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는 상태로서 일차적 질서언어를 우선적으로 고려하고 이차적인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후기-현대적 변증적 신학은 일차적-질서의 명제(first-order proposition)의 성격을 유지해야 한다. 일차적-질서의 명제 구조작업은 계시의 핵심인 성서에서 유래해야 하며, 공동체나 경험에서 나오는 것은 신중을 기해야 한다. 공동체나 경험에서 나오는 신학적 명제는 그 내용이 다른 종교의 원리와도 유사한 면을 지니고 있을 때에, 다원주의적인 해석의 위험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린드백은 교리의 본질에서 교리는 이차적 질서의 명제로 보았고, 그 기능은 다양한 공동체에서 규율적 기능(regulative function)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주장했다. 그러나 신학을 이차적 질서의 명제로 보는 것은 다원주의적인 위험을 가지고 있으며, 신학과 성서의 관계가 멀어질 수 있는 결과를 초래하기 쉽다. 그랜츠(Stanley Grenz)는 린트백의 이차적 질서의 명제론을 따르면서 종교적 경험과 문화 공동체의 삶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보았다. Stanley Grenz, Revisioning Evangelical Theology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1993), 77-78. 후기-현대의 변증적 신학은 일차적-질서의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 핵심적인 작업이지만, 그렇다고 이차적-질서의 언어를 외면할 수 없다. 특히 부가적 설명이나 보완으로서 신학방법론이나 종교철학 혹은 해석학과 같은 분야에서는 불가피하게 이차적-질서의 언어 혹은 다른 가능한 언어도 필요한 경우 사용할 수밖에 없는 것이 시대적 복음이해의 현실이다.
V. 후기현대의 신학적 미학 방법론
미학은 성서적 방법이다. 성서에 있는 사건의 묘사와 표현은 미학적인 것이 많다. 이미지, 시, 찬미, 아름다운 나래티브, 등 심미적 특성을 가지고 있는 미학적 방법을 사용하였다. 그러한 영향을 받아서 신앙적 자세가 심미적 기준을 기반으로 해서 만들어진 예술적 표현에 의해서 예배 형식이 이루어지고 있다. 신앙적 공동체는 찬송하고, 춤을 추고, 시적인 표현을 하고 드라마적 연기를 하면서 기도를 한다. Louis Dupre, Symbols of the Sacred, 70. 그리고 미학적 이미지는 종교적 경험을 표현하는데 지속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Ibid., 73.
영적인 내용을 담은 미학적 접근은 현대주의와 포스트모던의 도전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 중에 하나라고 본다. 현대주의의 이성적 도전에 대한 대안으로서 조화와 이미지 나래티브와 찬미 등은 논리와 객관성과 규칙성(regularity)의 원리를 다루는 과학적 접근 도전에 대한 놀라운 대안이다. 사실 이러한 도전은 현대 혹은 후기현대의 도전만이 아니라 기독교 역사를 두고 지속되어온 것이다. 그러나 신앙이 고수되고 기독교가 성장한 것은 방법론적인 차원에서 이러한 미학의 가능성의 공로가 크다고 할 수 있다. 후기 현대와 포스트모던의 기로에서 다시 한번 심도 있는 신앙적 미학의 접근이 요구된다.
후기-현대 신학은 미학적 이해를 도구로 사용해서 복음을 해석하고 보편 명료화해야 한다. 미학(aesthetics)이란 진리의 범주보다 큰 미의 세계에 대한 탐구이다. 미학이란 예술과 심미적 경험에 대한 일반적인 탐구를 의미한다. 예술이란 음악, 드라마, 미술, 시, 등 여러 가지 분야를 포함한다. 성서는 찬양과 시와 같은 미학적인 요소를 많이 담고 있다. 미학은 17세기의 바움가르텐(A. Baumgarten, 1714-62)에 의해서 철학의 한 분야로 다루어졌다. 현대 미학은 심미론, 예술 철학, 비평적 예술철학 등을 포함하고 있다. 여기서 주장하는 것은 신학은 철학의 도움을 받은 것과 같이 미학적 접근 방법을 활용해야 한다고 본다.
이러한 미학이 방법론으로 제기되는 이유는 우선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첫째는 성서적으로 하나님의 역사는 이성적 논리보다는 미학적 묘사가 우위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논리적 언어의 세계를 넘어서 미학적 묘사의 진수를 맞보는 작업이다. 신앙에 대한 미학적 진수는 이성중심적 혹은 논리적 이해의 범주를 넘어서는 깊은 이해의 영역이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고 보기에 좋았다고 하였다. 도덕적 행위를 할 수 있는 존재가 있기 전에 세상이 좋았다는 것은 심미적으로 좋았다(aesthetically good)는 것을 의미한다. 아름답고 순수하고 가능성이 넘치는 현상이다. Douglas Groothuis, Truth Decay: Defending Christian Against the Challenges of Postmodernism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2000), 249.
나이아가라 폭포의 웅장함과 그랜드캐년의 장엄함과 금강산의 기묘한 아름다움은 언어로 표현하는 데에 한계성이 있다. 언어의 벽을 넘는 창조의 아름다움의 세계이다. 하나님은 세상이 아름답게 창조된 것을 통해서 영광을 받는 사실은 믿을 있다. 객관적 아름다움은 하나님의 일반계시에 해당되는 것이다(시19:1-16; 행 14:17; 롬 1-2). 성서에서 언급되는 성전 건축은 그 당시의 최고의 아름다운 양식이었다. 값진 돌이 성전에 놓여졌다(역하 3:6). 이 돌들은 어떤 기능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아름다움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었다. Douglas Groothuis, Truth Decay, 251-252.
언어 이면에 담겨있는 영적인 아름다움의 세계를 이해하는 신학적 미학의 작업이 필요하다.
포스트모던 해체주의자들은 객관적인 미와 심미적 가치의 영속성을 무시한다. 그러나 성서적 이해는 문화에 내재해있는 예술적 선의 가치를 인식하고 있으며, 변화되고 순수해진 문화가 도래하는 세상이 존재하게 될 것을 기대하고 있다. 이러한 것은 해체주의자들이 예술은 단지 문화적이고 정치적이거나 언어적이고 심리학적인 것으로 해석하는 것을 뒤집어 업는 현상이 된다. Douglas Groothuis, Truth Decay, 252.
하나님의 선물은 자연적 아름다움과 인간 영혼의 구원을 뜻하고, 전 우주적 조화와 구원을 의미한다.
여호와를 거룩함의 아름다움으로 예배하라고 하였다(시 29:2). 히브리 전통에서 미적 이해는 독특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미는 존재론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역사적이거나 사건적인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최고의 아름다움은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사역이다. “이스라엘에서 미는 어떤 것이 존재한 것(that existed)이라기보다는 일어난 것(that happened)이었다.” Gerhard von Rad, Old Testament Theology, Vol. 1, trans. D.M.G. Stalker (New York: Harper and Row, 1962), 368.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창조의 정점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들었다. 예술적 표현은 하나님의 선한 창조의 자연적인 현상이다. 창조의 자연적 현상 속에서 미학적 이해와 묘사는 중요한 작업이다. 신학적 미학(theological aesthetics)은 현대의 이성중심주의 도전과 과학적 방법의 한계를 넘어서는 시도가 될 수 있다. 신학적 미학은 사실 역사적으로 오래된 학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는 반면에, 신학은 미학을 등한시했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폰 발타사르(von Balthasar)는 신학자들이 미학적 범주를 도입해서 하나님의 본성과 우주론과 하나님의 나라 그리고 기독교인의 삶에 대해서 묘사하는 일을 하는데 방법론적 타당성을 주장하였다. 그는 신학적 언어가 미학적 진실성과 진리의 명제를 나타내 보일 수 있으며, 명료함(claritas)을 제공할 수 있다. Hans Urs von Balthasar, The Glory of the Lord: A Theological Aesthetics, vol. 1, (San Francisco: Ignatius, 1982) 참조.
미학적 방법을 통한 복음의 이해와 해석 작업은 미학적 복음주의로 발전될 수 있다. 언어적 한계성 때문에 현대사상가들 중에서 분석철학자들과 실증주의자들의 도전을 받았다. 이들에 따르면 기독교의 명제는 의미의 실증원리에 맞지 않기 때문에 무의미하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상징론, 은유론, 언어개임, 등의 방법으로 극복될 수 있는 것이 되었다. 여기서 한가지 더 가능한 것은 미학적 묘사와 해석의 가능성이다. 상징은 여러 면에서 종교적일 수 있다. 그러나 성스러운 것을 직접 묘사하는 것은 언어이다. 특히 상징이 묘사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표현은 언어의 기능이다. Louis Dupre, Symbols of the Sacred, 46. 그리고 Joseph Bochenski, The Logic of Religion (New York: New York University Press, 1965), 94. 그러한 맥락에서 말씀 혹은 성서 언어 연구는 단순언어적 이해를 넘어서 영성 형성에 매우 중요한 면을 지니고 있다.
성서 말씀은 언어적 해석을 넘어서는 심오한 영적 의미를 담고 있다.
여기서는 후기 현대의 시대 문화적 흐름을 고려해서 신학적 미학의 가능성과 효율성을 후기 현대의 복음주의 신학에 있어서 하나의 방법론으로서 적지 않은 논란이 제기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제안하고자 하는 것이다.
신학적 미학은 단순히 아름다움을 찾는 신학이 아니다. 보편적 미의 추구는 탈신학적 범주에서도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탈신학적 범주의 미학적 내용은 다원주의적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므로 폰 발타사르가 주장한 것처럼, 신학적 미학은 계시적 미학으로 초점이 맞추어져야 한다. 미학이 복음주의적 신학방법으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계시와 성서 안에서 신학적 미학이 시도되어야 한다. von Balthasar, The Glory of the Lord, 117.
신학적 미학의 가능성은 일차적으로 믿음과 계시의 관계에서 찾아야 한다. 왜냐하면, 믿음은 거룩과 신적인 것에서 비롯되는 것이고,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형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계시 속에 담겨 있는 진리와 선은 영적 심연의 세계에서 경험되고 나타난 것이기 때문이다. von Balthasar, The Glory of the Lord, 117-118.
성서적 시와 찬미는 미학적 형식을 가지고 진리와 선을 나타내고 있다. 복음서의 나래티브와 명제적 형식의 말씀도 미학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 언어의 형식과 질서는 미학적 특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계시의 세계에서 인식하고 이해할 수 있는 형식은 합리적 논리와 지성에 의한 것만이 아니라, 인간의 의식의 세계에서 직관과 감성 등의 다양한 요소에 의한 경험이 있다.
거룩을 경험함에 있어서 경외함과 놀라움을 경험하는 것은 합리적 지성 인식의 수단으로 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골돈 카프만은 지성적 신비주의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신비적 경험은 지성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영역이 있다는 주장이다. 신비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경험적인 것이 아니라 지성적인 것이라고 하였다. Gordon Kaufman, God-Mystery-Diversity: Christian Theology in a Pluralistic World (Minneapolis, MN: Fortress Press, 1996), 97.
초월적 영적 경험의 세계는 미학적 도움으로 가능하다. 시의 깊은 맛은 논리적 언어의 틀을 넘어서 인식하는 미학적 인식의 원리에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미학은 신학과의 밀접한 관계성을 고려할 수 있다. 미학적 개념과 신학적 개념은 서로 변화를 줄 수 있다. 미학적 인식은 사고의 세계를 열어주는 역할을 할 수 있고, 신학적 개념은 더욱 진전된 미학적 인식을 증진하는 역할을 한다.
미학은 상징이나 이미지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특히 기독교 신학에서 그러한 면을 발견할 수 있다. 인간은 하나님의 이미지(Imago Dei)를 가지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구속적 사건을 나타낼 때에 십자가를 상징적으로 사용한다. 상징과 이미지는 의사소통에 있어서 언어적 한계성을 넘어서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언어의 제한성을 초월할 수 있다는 차원에서 이성중심주의와 과학적 세계관의 도전에 대한 변증적 도구로 사용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상징과 이미지는 해석학적인 차원에서 다원적 이해의 모호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견제해야 하는 면이 있다. 신학적 미학의 제한성도 신학적 주제에 대한 미학의 다원적 해석에 있는 것이다. 이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서 배타적인 계시적 미학을 발타사르가 주장한 것이다.
예배는 상징과 이미지와 말씀이 미학적으로 조화를 이루면서 드려진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향한 구속의 핵심적 상징으로써 십자가를 예배의 중심에 두고 있다. 성시를 낭독하고, 말씀과 음악적 소리가 미학적으로 조화를 이룬 찬양을 한다. 수사학적으로 정리된 말씀을 나누고, 아름다운 사랑의 친교를 나눈다. 미학적 요소가 진리 자체이거나 예배의 핵심적 내용은 아니지만, 영적 체험을 위한 예배의 중요한 도구로서 사용되고 있다. 미학적 요소는 영적 초월성 경험에 도구적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이성중심주의가 예배를 비판하는 것은 가능할 수 있지만, 미학적으로 묘사되는 영성형성의 현상은 뒤집을 수 없다. 이러한 면에서 신학적 미학은 현대주의 도전을 넘어설 수 있는 가능성을 함축하고 있다. 포스트모던 미학적 변증은 후기현대의 변증신학의 방법론으로 가능한 것이다. 그렇다고 요즈음 유행하는 탈구조주의적 포스트모던 음악이나 변칙적 삶의 스타일을 옹호하는 입장은 결코 아니다. 계시적 범주 안에서 신학적 미학은 복음적 진리를 명료화 할 수고 영성형성에 도구적으로 이바지 할 수 있다. 신학적 미학은 하나님의 주관성을 접하는데 용이하게 한다. 하나님에 대한 대면은 단지 미학적인 아름다움을 통해서만 만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공포와 두려움으로 만난다. 그러나 공포와 두려움 속에서 역설적인 영적 체험을 하게 되고, 아름다운 경험으로 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다. 공포와 두려움의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의와 사랑의 존재를 원하는 것이고, 불의와 증오의 존재에서 의와 사랑의 존재로 변화되는 것은 아름다운 현상이다.
초대 교회에서는 다락방에서 예배를 드리고 지하동굴 카타쿰에서 교회가 이루어 졌다. 다락방과 카타쿰을 예술적인 미적 조건이 있는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모리아산, 호렙산, 시내산, 요단강, 감람산, 다락방과 로마 카타쿰 등은 하나님과 인간이 아름답게 만났던 성스러운 곳으로 이해할 수 있다. 영적인 아름다움의 현상이 나타나는 곳은 신학적 미학의 해석이 가능하다.
내적인 신앙적 현상에서도 미학적 요소를 발견할 수 있다. 경건과 예배를 통해서 성스러움을 경험할 때에 경외함과 놀라움과 경이로움이 어우러져서 심연의 영적 아름다움을 경험한다. 미적인 영적 세계에서 진리를 인식하고 신앙이 형성된다. 후기현대의 합리적 원리가 진리 인식의 도구로 사용되고, 다른 도구는 배타적이거나 무시하는 성향에서, 미학적 이해와 변증은 후기현대의 복음에 대한 명료화 작업과 변증의 중요한 도구로 사용될 수 있다고 본다.
VII. 결론
복음에 대한 후기현대의 횡포는 역사상 매우 훼방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성중심주의와 인간중심주의에 의한 후기현대의 세속주의는 유럽의 기독교를 넘어뜨렸다. 한국의 이성중심적 교육은 세속주의를 부축이고 있고, 젊은 세대들은 신앙의 세계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게 하고 있다. 이에 대한 변증으로서 합리적 복음주의, 과학적 복음주의, 포스트모던 복음주의가 나타나고 있고, 적지 않은 성과를 거두고 있다.
특히 신학적 주제로서는 초월성의 문제와 인간론의 문제가 후기 현대에 도전 받는 가장 핵심적인 것이라고 본다. 후기현대의 도전에 대한 복합적 대안으로서 미학적 복음주의를 제시하려고 하였다. 초월성과 세속성의 변증법적 관계에서 초월성 인식의 가능성에 대한 해석학적 변증 방법으로서 신학적 미학의 가능성을 제안하였다. 신학적 미학은 초월성에 대한 미학적 묘사를 통해서 이해와 해석이 가능하다고 보며, 인간의 영적인 면도 미학적 접근을 통해서 인식의 타당성을 높일 수 있다고 본다. 하나님의 은총과 성령의 역사는 언어적 이해, 신비적 경험, 초자연적 현상을 통해서 나타나지만, 미학적 도구를 통해서 많이 나타내 보이기 때문에, 복음에 대한 미학적 명료화 작업이 가능하고 시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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