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홍 목사의 성경적 상담 연구소 RBD COUNSELING INSTITUTE
멘탈리티의 핵심 키워드 : 신성한 내면아이, 구상화, 의미와 통일성, 도약~
목록
현대신학자료1

현대성이란 무엇인가?2

현대성이란 무엇인가?2  
http://cafe.naver.com/modernth/577  
 
 IV. 바다를 떠다니며
계몽기의 실패를 일찍 목도하였던 니체는 다윈의 진화론에서 새로운 길을 찾게 되었다. 그에게 지성이란 태초부터 본래 있었던 것이 아니라, 생존경쟁과 적자생존을 통하여 시간의 경과에 따라 형성된 것으로 투쟁과 경쟁에 있어서의 도구이며 기구가 되었다. 그리하여 엄청난 선천적 가치를 가진 지성을 소유한 자는 그 지성으로 인하여 생존할 수 있었다. 진화론과 칸트의 이론이 결합된 결과 우리로 하여금 생존할 수 있게끔 처신하게 하며 작용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진리요, 그렇지 못한 것은 진리가 안 된다는 실용주의적 진리관이 발전되어 나오게 된 것이다.
 유럽의 근대 지성사에서 지금까지 전개해온 사변적 이성이 선험적이라는 것은 신의 존재를 전제로 진행되고 있기에 그는 신의 죽음을 먼저 말해야 했다. 니체가 "진실된 현실에 도달하기 위해 스스로를 세계의 주인으로 고려해야만 하고, 명령하며 창조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은 이성의 노예상태로부터 인간이 해방되어야 함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사변적 이성의 합리적 추론을 따라가면 헤겔에게서 보여진 것과 같이 결국 인간은 신의 노리개에 불과한 것이며, 형이상학적 진리와 더불어 신의 역사를 인정하게 되면 인간은 결국 허구적 틀에 묶인 채 죽어가야만 하는 것이다. 그럼 인간은 무엇인가? 니체에게 있어서 인간은 육체이며 어떠한 동일성, 형식적 틀을 파괴시키고 드러나는 존재이다. 니체는 그의 글쓰기에서도 이러한 사상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형식적 체계를 중시하지 않았다. 그것은 체계적 틀이 사상을 인위적으로 고정시키고 축소시키는 위험이 내포되어있다고 보았다. 니체에게 있어서 철학의 주된 임무는 체계를 구축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체계적인 틀을 부수고 자신의 문제를 올바르게 사유하기를 노력하였던 니체는 "자신의 이전 견해에 대하여 언제든지 용감하게 스스로를 천명하여야 한다"고 단언하고 있다. 그는 초인이 되기 위하여 신의 죽음을 선포했고, 동시에 니힐니즘을 전개하였다. 신의 죽음은 존재자의 해석을 요구하게 된다. 그는 존재자 전체의 근본 성격을 '권력에의 의지'로서 해석한다. 권력의 본질은 무엇인가? 하이데거는 "권력은 그 때 그때마다 도달된 권력의 단계를 초월한 경우에만, 따라서 그때 그때마다 자기자신을 초월하고 자신을 고양할 경우에만--말하자면 자신을 보다 강력하게 할 경우에만--권력은 자신을 그 자체에 있어서, 즉 자신의 본질에 있어서 유지할 수 있다. 권력이 특정한 단계에 머무르자마자 권력은 무력하게 된다. ... 권력에의 의지는 권력이 보다 강력해지는 것을 통해서만 권력으로서의 자격을 갖는 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하였다.
 니체의 권력의 의지는 쇼펜하우어의 살려는 의지의 현상에 영향을 받아 발전시킨 개념이다. 니체는 두려움과 힘에의 의지를 인간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으로 보았고, 두려움이란 부정적인 것이며 힘에의 의지는 긍정적인 것으로 보았다. 그에게 힘이란 세상을 살아가는 힘이다. 그리고 한층 더 나아가 존재자는 보편적 상황을 초극함으로 진화하는 것이다. "나는 그대에게 초인을 가르친다. 사람이란 극복되어야 할 무엇이다" 사람은 자신을 극복해야 한다는 의미에서의 초인이 되는 것이다. 마치 다윈의 [종의 기원]에서 자신을 극복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는 진화할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개인이 참다운 자아를 실현해야 하는데 참다운 자아는 선천적인 것으로 개인 속에 깊숙이 심겨져 있는 것이 아니라 개인을 넘어서서 존재하는 것이다. 여기서 니체의 초인이 고대 그리스의 신이나 반신 또는 영웅을 의미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한 영웅적 사건으로 우리에게 나타난 초인들 중에 한 사람을 니체는 "괴테"라고 소개한다.
 니체는 윤회적 역사관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초인의 길인 참다운 기쁨이 영원성을 필연적으로 지녀야 한다고 보았다. 기독교나 관념론에서 말하는 목적론적 종말이란 니체에게 있어서 거부해야할 세계관이었다. 존재의 모래시계는 되풀이하여 회전한다. 나쁜 것이나 저속한 것들도 되풀이하여 일어나고 역사는 권태롭고 무의미하게 흘러가는 것이다. 그러나 초인은 반복을 참고 견디며 창조한다. 권태와 무의미로 가득찬 삶을 초월하여 초인은 하나의 위대한 긍정의 결단을 내린다. 즉 무의미한 삶, 그대로의 운명을 사랑하는 것이다. 운명을 사랑하는 것은 바로 살려는 의지의 현상에서 시작되어 그것을 초극하는 초인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초인은 영겁회귀한다. 사유의 세계에 두려움을 싣고 디오니소스가 다시 돌아오는 것처럼 초인은, 자연의 두려움을 벗어나기 위하여 아폴론의 빛 아래서 비극적 사유가 탄생한 이후에도, 계속 회귀하는 것이다. 신화는 사유로(계몽)로 사유(계몽)는 다시 신화로 회귀하는 것이다.
 니체의 이러한 사유는 기독교와 헤겔의 변증법을 두고 한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니체는 헤겔의 변증법에 반(反)하여 생(生)철학을 전개시켰다. 들뢰즈는 니체의 초인이 변증법에 반하는 가지변환(trans-valuation)을 목표에 둔 것이라고 보았다. 반(反)헤겔주의로서의 니체, 그는 현대성을 탈 현대성으로 전환시킨 것이다. 니체는 한 힘과 다른 힘이 갖는 본질적인 관계는 본질 속에 있는 부정적 요소로서 고려하지 않았다. 다른 것과의 관계 속에서 스스로 복종하게 되는 힘은 그 다른 것 또는 자신이 아닌 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차이를 긍정하며, 오히려 그 차이를 즐긴다. 의지는 차이를 즐긴다. "다른 것"과의 본질적인 관계 속에서 한 의지는 그것의 차이를 긍정의 대상으로 만든다. "스스로를 다르게(차이 있게) 아는 것의 기쁨", 차이의 즐김, 차이는 본질로부터 분리할 수 없는 실존을 구성하는 실천적 긍정의 대상이다. 니체의 "예"는 변증법적인 "아니오"에 대립한다. 긍정은 변증법적 부정에, 차이는 변증법적 모순에, 기쁨과 즐김은 노동에, 가벼움과 춤은 변증법적 책임에 대립한다. 초인은 차이를 긍정하고 권력 또는 힘의 의지를 통해 가치변환을 이룬다. 초인이 되는 것이다. 니체에 따르면, 힘이 없는 자는 차이를 긍정하지 못하고 부정하며, 그 부정을 그 자신의 본질과 실존원칙으로 만든다. 변증법은 노예 도덕의 창조적 행위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니체는 변증법을 평민의 사색으로 노예의 사고로 묘사하였다.
  니체에게 비극적인 것은 삶과 부정의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기쁨과 다수성에 관계, 적극성과 다수성, 긍정과 다수성의 본질적 관계 위에 근거한다. [비극의 탄생] 속에 있는 모순은 원초적 통일과 개별화 사이, 의지하는 것과 출현 사이, 삶과 괴로움 사이에 있다. 이 "기원적인" 모순은 삶에 맞서서 증거하고 삶을 고발한다. 삶은 정당화될 필요가 있다.
 기독교의 구원관이 죄로 인한 대립-화해의 구도는 헤겔의 변증법과 같다는 것이다. 괴로움은 실존의 부당함을 증명하는 방법으로 사용되었으며, 동시에 그것에 대한 더욱 고상하고 신적인 정당화를 발견하는 방법으로 사용되었다. 기독교인들은 실존을 잉여로 해석하고 평가했다는 것이다. 기독교에서 삶의 괴로움을 말하고 본질적으로 부당하다고 지적함으로, 괴로움에 의해 본질적인 부정을 지불한다는 것이다. 그 결과 삶은 정당화하여야 하고, 부정을 구제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여기서 니체는 기독교가 "양심의 가책" 또는 "고통의 내면화"를 통해서 고통을 해소하는 기쁨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십자가 위의 신"이라는 역설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극단적인 잔인성의 신비는 기독교적 광증이며 전적으로 변증법적인 광증이라고 주장하였다.
 니체는 여기서 디오니소스적 해결을 말한다. 디오니소스의 해결은 기독교나 헤겔의 변증법과는 다른 고통의 '해소'를 가져다 준다는 것이다. 삶은 더 이상 정당화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모진 괴로움조차 긍정하는 것이다. 삶이 자신을 내면화 함으로써 고통을 해소하지 못하고, 자신의 외재성의 요소 안에서 자신을 긍정한다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디오니소스적 고뇌는 다수적 긍정의 직접적 상징이 된다. 다수를 긍정하고 통일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가치변환 또는 가치 초월을 통하여 고통을 해소하고 기쁨을 누리는 것, 즉 초인이 되는 것이 디오니소스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니체의 이러한 해석에는 새로운 사고의 이미지가 있다. 그것은 사유자는 사유자로서의 진리를 원하고 사랑한다고 이야기된다. 그리고 진리밖에 있는 외부적인 힘들에 의해서만 진리에서 이탈된다. 잘못은 사고 그 자체 속에서 사고에 대립되는 외부적 힘들의 결과일 뿐이다. 그리고 진실되게 생각하기 위해서 필요로 하는 것은 하나의 방법에 달려 있다. 방법은 인위적 고안물이 된다. 그러나 인간은 그것을 통해서 사고의 본질로 되돌아가는 것이며, 그것을 통해서 본질에 달라붙고, 그것을 변경시키고 우리를 미혹하는 외부적 힘들의 영향을 막아낸다는 것이다. 여기서 니체가 말하는 진리는 비결정적이다. 그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의미와 가치에 의존하고 있다. 사고의 요소는 진리가 아니라 의미와 가치라는 것이다. 사고의 범주는 진리와 허위가 아니라 고상한 것과 비천한 것 그리고 높은 것과 낮은 것이라고 말한다. 진리의 개념은 복수적(pluralist)인 유형학에 기초하고 있기에 그렇다. 유형학은 이러한 오류들과 진리들이 무슨 지역에 속하는가 하는 지세(地勢)학에서 시작된다. 모든 진리는 요소와 시간과 장소의 진리이다. 사고는 홀로 생각하거나 스스로에 의해서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사고하는 힘들에 의존한다. 하나의 권력, 사고하는 것의 힘은 사고를 능동적이 되는 행위 속에 던져야 한다. 하나의 구속인 이러한 종류의 훈련을 니체는 "문화"라고 부른다. 문화는 사고를 긍정적이고 능동적인 어떤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사고를 붙잡는 힘들의 폭력을 표현한다. 그리고 문화의 폭력을 국가가 자신의 힘과 뒤 썩을 때에 "문화의 타락"이 된다고 니체는 말한다.
 니체의 이러한 변증법적 사고와 기독교의 구원론에 대한 비판은 일면 유효성을 지니고 있는 듯 보인다. 그러나 니체의 분석에서 기독교와 헤겔의 변증법을 동일시하는 곳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사유의 변증법은 프로테스탄티즘이 지니고 있는 역동적 신앙과는 다른 것이었다. 몇몇 현대 철학을 신학에 도용한 자유주의 신학의 문제들을 지적하는 한 유효하다. 그러나 종교개혁에서의 프로테스탄트 정신은 사유적 하나님에 대한 비판이었다. "죄인인 동시에 의인"은 의인이라 할지라도 자기성찰, 자기반성을 통하여 꾸준히 죄인임을 직시하고 있다. 이것은 의인인 자기 기쁨과 죄인인 자기 성찰을 통하여 자신 안에서 반성적 비판의 계기와 발전의 욕구를 동시에 지니고 있는 것이다. 화해로써 결론에 달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반성과 성찰 그리고 신앙으로 인한 기쁨이 역동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무엇이 니체로 하여금 보다 고상한 영역, 창조의 영역으로 이끄는 매질(媒質)이 될 수 있는가? 그것은 문화이고 외형적 목표이다.
 그러나 초인(overman)의 영겁회귀가 의미하는 것은 초-초인(over-overman)으로 발전이 아니라 초인의 영겁회귀에 머무르고 있음은 니체의 한계를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헤겔의 변증법이 절대정신에 머무르는 것과도 유사하다. 단지 통합적 전체성이 아닌 다양성과 복수성 그리고 차이를 인정한다는 점에서 헤겔과 다른 것이다. 니체에게 있어서 대지의 축복, 그것은 육체의 기쁨을 의미하고 있는데 이것은 기독교의 신이 이미 창세기에서 대지의 축복을 노래하였음을, 그리고 인간은 대지의 축복을 스스로 왜곡함으로 고통에 빠져있음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땅의 축복은 소산의 즐거움이지 노동의 즐거움이 없이 일확천금이나 요행을 통한 물질적 축복을 의미하는 것과는 거리가 있는 것이다. 기독교는 가치 있는 즐거움과 축복을 추구하는 것이다. 계시와 신앙 그리고 개혁은 사유의 틀을 긍정하거나 부정하는 것에 머무르는 것이 아님을 프로테스탄트 정신은 이미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변혁의 힘이다. 다양성을 통일시키는 것이 아니라, 모든 다양성들이 진리 가운데 변혁을 통하여 왜곡되지 않고 바르게 자리매김 하도록 이끄는 것이다.  그것은 계시의 힘이고 성령의 역사로 경험되는 것이다.
 니체의 디오니소스적 초인은 자신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 없이 가능한 것일까? 긍정으로 자신을 받아들이고 차이를 인정하는 곳에 자기초월은 이미 부정되는 것이다. 사유는 쾌락으로 물화된 정신이 감성의 노예로 전환되면서, 니체가 데카당스 운동에 깊이 관여하게 된 것이다. 도덕성을 약자의 울타리로 간주하고 권력의 힘에 의지할 때에 더 큰 문화의 왜곡과 타락을 불러일으키는 요인이 되었음을 포스트모던 사회가 보여주고 있다. 사회는 결국 동일성의 파괴로 해체되고 인간은 사유하는 정신의 한 부분을 상실하게 되면서 자아상실에 직면하게 된다. 자아상실은 주체의 죽음으로 연결되고 인간은 초극되어야 할 무엇이 아니라 물화의 과정을 통해 진화가 아닌, 도구적 이성이 제공하는 향응을 받으며, 퇴화의 경로를 걷게 되는 것이다.
 이제 여기서 우리 시대에 프랑크푸르트의 마지막 사회비판이론가로 불리우는 하버마스(Jeurgen Habermas)의 [현대성]을 살펴보아야 하겠다. 그는 현대성과 합리성 사이의 내면적 관계가 무엇인지를 이해하고자 하면 헤겔에게로 되돌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헤겔이 구상하였고 뒤이어 마르크스, 막스 베버, 초기 루카치 그리고 프랑크푸르트 학파가 사회이론으로 발전시킨 현대성에 대한 고전적인 구상들에 주목하게 됩니다. 이런 지적 전통은 결국 도구적 이성을 이성 전체로 총체화하였으며, 그로 인해 그것이 수행한 비판은 이제 '상황속의' 이성이라는 개념에 의해서만 수행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버마스는 모더니티가 잘못된 이해와 문화를 부정하려는 부분적 시도들에 의해서 왜곡되었으며, 모더니즘 정신은 노쇠 되었다고 본다. 일상생활과 모더니즘 문화를 올바르게 접맥시키는 일은 계몽주의 이후 과학, 도덕, 예술 등 세 개 분야로 분리되어 공식화, 제도화 된 사회와 문화의 분열을 극복하는 것이다. 물화된 일상적 실천은 인지적 요소와 도덕적, 실천적 그리고 미학적, 표현적 요소들과 구속되지 않을 상호작용을 창조함으로써만 치유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모더니즘을 반대하는 청년파, 모더니즘 전의 상태로 돌아갈 것을 주장하는 노장파, 사회와 문화의 분열의 책임을 문화로 돌리고 후기모더니즘을 인정하려는 신보수주의자들에 대하여 하버마스는 모더니티의 계획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하버마스는 역사이성을 주창한 헤겔의 시도가 붕괴되기 시작한 것은 절대자라는 개념이 결과적으로 계속적인 착취와 억압을 승인하고 있다고 비난한 청년 헤겔학파에서 처음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실천으로 방향을 전환하고, 혁명을 위해 분기했던 헤겔 좌파의 비판은 이성의 불구화에 대항하고, 이성의 부르주아 세계에 대한 일방적인 합리화에 대항하여 역사적으로 축척된 (해방을 기다리는) 이성의 잠재력을 가동시키는 데 그 목적을 두었다. 헤겔 우파는 헤겔을 따라서, 불안을 자극했던 혁명 의식의 주관성이 현 상태의 합리성에 대한 객관적 통찰력에 굴복하게 됨과 동시에 곧바로 국가와 종교의 실체가 부르주아 사회의 불안감을 보상해 주리라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니체는 혁명에 대한 희망과 혁명에 대한 반동(헤겔 좌파와 우파) 모두가 무대에 등장하는 무대 각본에 따른 연출기법을 드러내고 싶어했다. 그는 주체에 집중하다 의도적 합리성으로 시들어 버린 이성 비판에서 변증법이라는 가시를 제거했다. 그리고 그는 청년 헤겔학파들이 이성의 승화를 말했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전체적으로 이성은 다음과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 이성은 권력말고는 아무것도 아니며, 권력을 향한 의지에 불과하면서도, 이성은 아주 훌륭히 권력을 향한 의지를 감추고 있다." 계몽기의 야누스적인 얼굴이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가 지적한 것과 같이 20세기 산업문명시대에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계몽기의 야누스적 얼굴이 드러나면서 세 가지 저항이 현대 지성사에서 발발하게 된다. 하버마스가 청년파라고 말하는 입장에 속하는 학자들은 조르지 바타이유(Georges Bataille), 미셀 푸코(Michel Foucault), 자끄 데리다(Jacques Derrida)를 말한다. 두 번째로 노장학파들은 보수주의자들을 뜻한다. 자신들이 문화적 모더니즘에 오염되는 허락하지 않는 노장 보수주의자들은 레오 스트라우스, 한스 요나스 로버트 스패만 등을 들 수 있다. 그들이 모더니즘 이전으로 돌아가기를 부르짖는 것은 모더니즘이 가져 온 과학으로 인한 생태학의 문제, 도덕의 타락, 예술의 미분화화가 보여준 합리성을 슬프게 지켜보면서 신(新)아리스토텔레스적 입장에서 우주론적 윤리의 확립을 요청한다. 하버마스가 지칭하는 신보수주의자들은 현대과학이 그것의 영역을 초월하여 기술적 발전, 자본주의의 성장 그리고 합리적 경영을 추진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한에 있어서 현대 과학의 발달을 환영한다.
 이성은 주체로부터 본질적으로 소외되어 있고 외부적인 환경을 지배하려는 주체의 충동에 의해 형성되는 수단-목적 관계의 틀 속에서 구성됨으로 도구적 이성이 되었다고 보았다. 하버마스는 이런 주체철학으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의사소통론에 있다고 말한다. 이성의 의사 소통 가능성은 자본주의적 근대화 과정을 통해서 발전되는 동시에 왜곡되었다고 말한다. 니체와 그 추종자들이 진단했던 '합리성의 과잉'이 문제가 아니라 '합리성의 부족'이 문제라는 것이다.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것은 근대화가 가져온 체제와 생활세계의 분화에 기인한다. 체제의 통합이 사회의 통합과 분리되어야 한다는 것은 자본주의 발전의 필수 조건이다. 즉 시장과 국가는 서로 분리되어야 하는 것이다. 행위자들이 서로의 이해를 도모함에 있어서 공유하는 이해에 의존하기보다 경제적, 정치적인 하위 체제들의 비인격적인 작동에 의존하게 될 때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돈이나 권력과 같은 매체가 생활세계에 깊숙이 들어가 합법화되고 제도화되기 전에 생활세계가 독립적인 문화영역으로 분화되고, 형식을 갖춘 법률 체계의 발전이 선행되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현대 산업사회는 도구적 이성이 도덕적, 정치적, 그리고 미적이며 실천적 합리성을 희생시키는 대가로 주도권을 쥐게 되면서 계몽기의 기획은 왜곡되었다는 것이다.
 하버마스의 이성이 도구적 합리성의 왜곡에서 벗어나려면 타자와의 의사소통관계를 회복될 수 있다는 것은 정치적인 함의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시민사회를 향하는 방법론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여전히 이성중심의 낙관론에 젖어있다. 타자와의 의사소통은 자기 주체철학을 벗어나는가? 타자와의 담론을 통해 이루어진 공동이해는 주체철학의 화해지평으로 남는 것은 아닌가? 공동 이익의 구조적 담합이 제도권에서 이루어진다면 막을 수 있는가? 권력이 개입하지 않은 순수담화의 상황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인가? 칸트의 순수이성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지는 않은가? 캘리니코스는 "칸트와 하버마스의 차이는 하버마스의 합리성이 언어적 상호 주체성의 본성에서 발생한다면, 칸트는 합리성을 초월적인 주체에 내재하는 양상이라고 생각한다는 점"이라고 분석하였다.
  프레드릭 제임슨은 포스트모더니즘을 후기 자본주의 단계로 보면서, 자본주의 발전과정에서 시장자본주의, 독점 혹은 제국주의 단계 이후에 등장한 다국적 자본주의를 일컫는 말로, 문화사의 맥락에서 문화적 우세종으로 등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포스트모더니즘 문화의 특징으로 미학적 대중주의, 문화 생산물의 깊이 없음, 역사성의 빈곤, 의미의 해체, 행복감의 만연, 비판적 거리의 말소, 반영 혹은 재현 이데올로기의 약화 등을 꼽고 있다. 그러면 그동안 현대성을 지속해 온 "비판적 거리"의 사라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주체의 죽음에 동의하는 것인가? 그는 새로운 좌표가 설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역사성과 목적을 상실한 좌표는 어떻게 나타나는가? 실존적 경험과 과학적 지식 사이에 간극이 존재하고 있으며, 이 간극에 메울 수 있는 "인식적 지도 만들기의 미학"을 통해 돌파구를 마련함으로 문화 정치적 역할 수행을 할 수 있다고 본다.  인식적 지도 만들기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포스트모더니즘의 지배 하에 생산된 깊이가 없고 감정적 내용이 메마른 예술이나 문화에 브르통이 주장한 '인간의 감수성을 촉발시킬 수 있는 상징'을 회복하는 것이다. 문화 정치적 역할 수행이 의미하는 바는 자본주의에 대한 마르크스의 전망의 관점에서 본 것이다. 그는 헤겔적 마르크스주의로서 포스트모더니즘을 극복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포스트모던 사상가 중에 신보수주의자들 중에 한 사람, 다니엘 벨(Daniel Bell)은 "The Cultural Contradictions of Capitalism"에서 "모더니스트 문화는 일상생활의 가치관에 침투하게 되었으며, 삶의 세계는 모더니즘에 감염되었다. 모더니즘의 영향력 때문에, 무한한 자기실현의 원칙, 진정한 자기경험에 대한 요구 그리고 지나치게 자극된 감수성이라는 주관주의가 현저하게 나타난다. 이러한 기질이 사회 내에서 직업적인 생활의 규율과 조화를 이룰 수 없는 쾌락주의적 동기들을 풀어놓는다"고 지적한다. 모더니즘의 전위파들은 지배적이지만 생명이 없다. 신보수주의자들은 이러한 상황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한다. "즉 방탕을 통제하며 규율과 노동의 윤리를 재건할 사회 내의 규범들은 어떻게 생겨날 수 있을까?" 벨은 종교적 부흥이 유일한 해결책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전통에 대한 믿음과 결합되어 있는 종교적 신앙은 개인들에게 명백하게 정의된 주체의식과 존재상의 안전을 마련해 준다는 것이다. 그러나 규범, 윤리성의 종교가 해결책을 마련해 줄 것인가? 프로테스탄티즘은 믿음으로 세우는 율법, 즉 먼저 우리 안에 우리 주체성의 근심, 저항의 소리를 듣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는 것이다. 스스로 끊임없이 죄인임을 고백하는 신앙 안에서 우리는 율법을 말할 수 있고, 하나님을 신앙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역으로 이행하는 것은 칸트식의 도덕 종교 내지는 율법종교로의 퇴행을 의미한다.
 
 V. 그물 망을 들여다보며

 근대의 인식론적 접근으로부터 포스트모던에 이르기까지의 역사적 흔적을 찾는 작업은 한마디로 언어를 매개로 하는 작업이었다. 사상이나 경험의 재현, 사고의 유추, 의사소통은 언어를 전제로 시작한다. 언어는 전달자로의 역할을 의심 없이 수행하고 있다는 전제 아래서만 이 모든 작업이 가능한 것이다. 별 의심 없이 생활 속에서 통화를 담당하는 언어를 다시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곳에 심상치 않은 기운이 감도는 것을 발견한다. 마치 과학자들이 오늘날 원자론에 있어서 빛의 파동설이 주장됨으로 겪게되는 놀라움과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소쉬르(Saussure)가 앙뜨완 밀레(Antoine Meillet)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는 언어학자에게 다음과 같은 것을 알려 주어야 할 너무나 엄청난 과제를 이제 차차 깨닫기 시작합니다. 다시 말해서 나는 그에게 그가 각 작용을 적절한 범주로 환원시킬 때 진정 무엇에 의존하는가를 그리고 그와 동시에 언어학이 결국 해낼 수 있다고 생각되는 그 모든 것이 얼마나 헛된 일인가를 보여주어야 합니다"라는 고백은 언어의 실체론적 사고방식에서 유동적이며 상대론적 사고방식으로의 변이에서 생겨나는 공허함으로 이해될 수 있다.
 소쉬르 언어에 두 가시 상(相)이 있음을 발견했다. 하나는 문화를 구성하는 기반이 되는 언어로 체계적이고 사회적인 면을 지니는 정태언어학, 혹은 랑그(langne)언어학이라고 했다. 또 다른 하나도 역시 문화를 구성하는 것인데 우연적이고 개인적인 것으로 종래의 문화를 파괴하고 새로운 의미를 생성하는 언어를 대상으로 하는 동태언어학, 혹은 파롤(parole)언어학이다. 전자는 문화를 타성화하고 제도화하는 언어 기호의 상을 분석하고, 후자는 우리의 생의 본질적인 측면, 의미 생성을 재촉하는 언어 기호의 상을 분석한다.
 소쉬르가 분석한 또 하나의 구분은 언어의 공시태와 통시태의 구분이다. 소쉬르는 언어의 부동성이란 없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하여 이러한 구분을 통하여, 언어 상태의 개념은 대략적 혹은 근사치일 수 밖에 없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언어 활동은 끊임없이 기존 체제와 동시에 진화를 내포한다. 언제나 이것은 현행 제도이자 과거의 산물이다. 언뜻 보기에는 이 체제와 그 역사, 언어 활동의 현 상태와 과거 상태를 구별하는 것이 아주 단순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이 두 사항을 결합하는 관계는 너무 긴밀해서 둘을 분리하기가 힘들다." 소쉬르의 정의를 보면, "공시 언어학은 논리적이고 심리적인 관계를 다룬다. 이들 관계는 공존하면서 체계를 이루는 사항들을 연결시켜 주는데, 이들 사항은 동일 집단의식이 인식하는 바로 그대로이다." "이와 반대로 통시 언어학은 계기적 사항들을 연결해 주는 관계를 연구한다. 이들 계기적 사항들은 동일 집단 의식에 의해 인식되지 않으며, 서로 대체는 되지만 그들 사이에 체계를 형성하지는 않는다."
 소쉬르는 언어에 의해 이름지어지기 전에 사물이나 관념은 인간의 내부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만약 이름을 붙이기 전에 사물이나 관념이 존재한다면 보편적인 언어가 있어도 불가사의하지 않고 번역이 좀더 쉬었을 것이다. 소쉬르는 언어 기호를 다른 기호와 구별지어 생각했다. 기호는 일반적으로 지시부와 그 대상 즉 시니피앙과 시니피에로 구성되었다고 보았다. 그리고 두 개의 항으로 구성되는 기호를 시뉴(sign/ singe)라고 부른다. 시뉴는 시니피앙과 시니피에가 불가분의 존재로서 있다.  언어 기호의 각 요소는 실체적으로 구조화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각 요소와 전체와의 관계, 각 요소간의 관계에 의해 구조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기호는 자의적 성질을 지니고 있다. 이것은 시니피에와 결부되는 시니피앙의 본래적 특성이 아니라 오직 관습에서, 즉 사회적 제약에서 기인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동의에 따라 한 단어가 다른 단어로 대체될 수 있다. 그러나 규약이 제정되면 관습이 존중되어야 한다.
 그러나 기호가 자의성으로 인하여 관습을 따라야 함이 필수적이지만, "기호(signifie)와 기표(signifiant)의 관계를 순간마다 변화시키는 요인들에 맞서, 언어는 스스로를 방어하기에는 근본적으로 무력하다"고 소쉬르는 고백하였다. 그에게 시니피앙과 시니피에의 관계가 기본적으로 자의적인 것라고 하는 것은, 언어와 실재 세계의 관계는 더 더욱 자의적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실로 사물세계에서 언어로의 이행은 자의성에 의한 분절이 있다. 사물의 경험을 기호로 전환하면서 기호가 사물을 재현하는 방식에서 거리가 발생하는 것이다. 랑그의 전제와 자의성 그리고 분절, 랑그가 지닐 수 있는 엄청난 공허함이 끝없이 소쉬르를 괴롭혔다. 그리고 그 극복은 요원한 것이었다.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 1915-1980)도 소쉬르와 같은 문제를 자각하였다. 바르트는 기호학을 구축하면 할수록 랑그의 힘을 강대해진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기호가 갖는 공허함은 언어의 밖에서도 해결할 수 없는 것이었다. 언어는 외부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 각인되어 있다. 언어, 랑그의 전제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언어의 내부로부터 균열을 발견하고 언어자체를 흔들어야 한다. 이제 언어는 바르트에게 있어서 텍스트로 이해된다. 텍스트는 그것을 이루고 있는 시니피앙의 다각적이고도 물질적 감각적인 성격에 의해 무한한 의미생산이 가능한 열린 공간이다. 그러므로 기존의 언어학이 언표, 의사소통, 재현의 산물이라면, 텍스트는 언술행위, 상징화, 생산성의 영역이다. 바르트는 이러한 의미에서 저자의 죽음을 말한다. 텍스트는 스스로 의미를 생성하고 독자의 탄생을 예고하는 것이다. "저자를 계승한 필사자는 이제 더 이상 그의 마음속에 정념이나 기분 감정 인상을 가지고 있지 않고, 다만 하나의 거대한 사전을 가지고 있어, 거기서부터 결코 멈출 줄 모르는 글쓰기를 길어 올린다. 삶은 책을 모방할 뿐이며, 그리고 이 책 자체도 기호들의 짜임, 상실되고 무한히 지연된 모방일 뿐이다"라고 말한다.
 "이제 텍스트가 하나의 유일한 의미, 즉 신학적인 의미를 드러내는 단어들의 행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그 중 어느 것도 근원적이지 않은 여러 다양한 글쓰기들이 서로 결합하여 반박하는 다차원적인 공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바르트는 선언한다. 그는  이어서 "이제 저자가 텍스트로부터 멀어지면 텍스트를 해독한다는 주장은 전적으로 쓸모 없게 된다. ... 저자가 발견되면 텍스트는 설명되고, 비평은 승리한다. 저자의 통치는 역사적으로 곧 비평의 통치였으며, 그리고 이런 비평이 오늘날 저자와 더불어 붕괴되어 가고 있다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닐 것이다. ... 이른바 반신학적이라고 할 수 있는 활동을, 진정으로 혁명적인 그런 활동을 분출시킨다. 왜냐하면 의미를 고정시키는 것을 거부하는 것은, 결국 신과 그 삼위일체 위격인 이성, 과학, 법칙을 거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텍스트는 이제 즐거움이 된다. 그리고 그 즐거움은 "텍스트의 요구를 초과하고, 옹알이를 극복하며, 이데올로기와 상상계가 물밀 듯이 들이닥치는 언어의 문들인 형용사들의 사슬을 쳐부수고 넘쳐 흐르는 바로 거기에서" 활기가 넘친다고 말한다. 바르트는 소쉬르의 커뮤니케이션 언어학을 계승 발전 시켰다. 이제 사람들은 개인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공허한 말을 끊임없이 원하고 있으며, 현대의 매스컴은 신화의 공급장치로서 기능하고 있다. 여기서 언어의 사회성과 개인의 욕망의 타협의 구조가 드러난다. 언어는 신화 작용을 통해서 거짓된 자유를 개인에게 부여하는 것이다. 매스미디어에 있어서 언어는 하나의 힘, 즉 절대적으로 침식 불가능한 힘을 갖는 그것은 신화 작용이다. 바르트는 현대 사회가 신화로 가득 차 있다고 말했다. 현대의 신화라는 것은 언어 또는 기호의 힘, 즉 의미 작용의 힘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현대의 기호학은 이런 신화 작용의 메커니즘의 해명을 목표로 한 것이다. 이미지, 포스터, 영상은 기호로서 시니피앙이 된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이 지시하는 것이 시니피에가 된다. 상징적 시니피에는 신화가 되는 것이다.
  쥴리아 크리스테바(Julia Kristeva)는 소쉬르의 빠롤에서 시작한다. 제도로서 작용하는 랑그에서 얼마나 파롤의 자유를 되돌릴 수 있는가? 랑그에서 파롤이 생겨날 때 주체는 어떻게 관여하는가? 여기서 크리스테바는 랑그와 빠롤이라는 개념을 발전시킨 심볼리크, 세미오티크라는 용어를 제시한다. 심볼리크는 랑그에 대응하는 것으로 언어의 논리적 통사론적 작용과 그러한 체계를 포함한 문화적 모든 기호 체계의 기능을 나타낸다. 세미오티크는 라캉이 말하는 경상단계(거울을 통해 주체의 자기 동일성을 확립하는 단계)와 언어습득, 즉 심볼리크를 습득하기 이전에 존재한다고 가정된다. 욕망의 움직임, 즉 욕동(慾動)을 갖춘 신체 내에 배치되어 있는 정서 기구를 나타낸다. 동시에 리듬, 인터내이션, 시적 언어라는 상을 기초로 욕동이 심볼리크적 체계로 다시 나타나는 것을 세미오티크라고 부른다. 개인 내의 랑그가 심볼리크적인 기능으로서 구성되는 것은 세미오티크한 욕동을 억압하고 나서는 일이고, 그 후에도 세미오티크는 다양한 기회를 통해서 심볼리크한 체계 내로 진입해 자신을 표출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다양한 파롤이 생겨난다.
 언어의 모든 이론에 관한 연구의 역사를 "스스로 구성하는 미지의 것에 맞서 나가는 사고의 역사"라고 규정하고 그 탐사의 영역을 "텍스트에 있어서의 의미 산출 및 그 모든 타입을 연구하는 것이라고 하면, 시니피앙을 주체 그리고 시뉴와 함께 뚫고 나가는 것 뿐만이 아니라... 언어의 존재 속에서 의미를 생성해 나가는 조짐이 모여드는 지대에까지 도달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의미를 생성해 내는 조짐이 모여드는 지대가 파롤 언어학이 존재하는 지대일 것이다. 바벨탑 사건은 언어가 다양성과 복수층을 갖는 전거적 사건이고 언어의 놀이터, 즐김의 무대가 되는 것이다.  쥴리아 크리스테바는 롤랑 바르트와 자크 라캉의 무의식의 이론을 받아들인다. 전자는 텍스트 내부의 다층성을 확실히 하는 것으로 텍스트의 의미론에 대해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준 것이고 후자는 정신병자에게서 발견하는 무의식적인 언어 활동의 발견이다. 이것들은 랑그의 전제를 벗어난 파롤의 중층성, 파롤의 자유로운 운동의 존재를 밝히는 실마리가 된다고 생각했다. 파롤의 자유로운 운동은 무엇인가? "기호론적 탐구는 탐구한 끝에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한 채 그저 자기 자신의 이데올로기적 몸짓을 확인하고, 이것을 부정하며 새롭게 출발하는 그런 탐구를 계속하고 있다."
 계몽기적 사유의 퇴락을 바라보면서 춤과 유희에 빠져, 삶의 고통을 긍정으로 변환시키고 대지의 풍요로운 삶을 추구했던 니체와 마찬가지로 롤랑 바르트와 줄리아 크리스테바는 랑그가 지닌 허구성을 탐닉하면서 의미의 생산성, 저자의 죽음을 선언하게 된다. 언어는 텍스트가 되고, 텍스트는 독자의 무대가 되고 감각적이며 성적 유희가 되고, 퇴폐적 광란의 즐김이 된다. 칸트이래, 도덕의 율법적 이해와 더불어 도구적 이성의 통제아래 있는 것으로 여겨지면서, 사유의 몰락은 도덕의 타락을 전제로 하는 것이었다. 니체가 사유를 노리개로 삼았다면, 바르트와 크리스테바는 언어를 노리개로 삼고 있는 것이다.
 사유는 언어와 밀접하게 연관되고 친족관계에 있다. 이미 니체는 사유를 부정하기 위하여 언어를 사용함으로 사유의 활동에 더욱 깊이, 더욱 세밀하고 자세하게 그리고, 더 큰 즐거움에 참여할 것이며, 바르트 또한 랑그의 틀을 부수기 위해서 글쓰기를 시작했다는 것은 사유의 활동에 참여하고, 언어의 기능을 보다 폭넓게 이해하게 된 것이다. 랑그의 전제를 해체하는 즐거움을 가지려면 보다 날카로운 사유의 칼끝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사유의 틀을 깨기 위해서는 보다 분명하고 정확한 언어를 사용해야만 하는 것이다. 랑그의 전제에 들어있는 공허함을 인식하는 것은 사유의 보다 깊은 차원에서 가능하다. 사유를 해체하는 전략은 언어의 놀이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사유는 언어이고 언어는 사유라는 기의와 기표의 관계에 더 밀접해지는 것이다. 사유는 재현을 넘어서 상상과 재생산의 기능을 포함하면서도 여전히 재현의 상징 안에 있다. 말씀을 인간의 사변적 언어로 바꾸고,  이성을 논리적이고 합리적 도구로서 제한하려는 음모는 바르트 자신의 선언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저자를 제거하려는 기획에서 시행된 것이다. 저자는 결국 제거될 수 있는가? 모든 텍스트가 저자의 의도와 상관이 없다면 저자가 기획한 글쓰기의 전략은 무를 돌릴 수 있는가? 텍스트의 차이는 어디에 의존할 수 있는가? 결국 글쓰기 자체를 폐기하는 결과로 가는 것은 아닌가?
 말씀은 사변적 해석의 틀에 가둘 수 없다. 그곳에는 계시가 함께 하고 있기 때문이다. 말씀 안에서 감추어진 하나님을 발견하였을 때, 성령의 교제는 그의 영을 새롭게 하였다. 그리고 그는 이제 신앙과 확신을 가득 차게 되었고, 말씀은 이성의 틀을 넘어서는 그의 능력이 된 것이다. 개혁은 사변의 논리적 틀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바로 프로테스탄트 정신에 의해서 가능한 것이다. 계시를 통한 미래지평이 함께 하게 된 것이다.
 
 VI. 닻을 내리며

 본 작업이 처음에 계획했던 것의 절반 정도에서 그치게 된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한편으로는 끝없는 사고의 역류가 일어나고, 다른 한편 기계문명에 의존한 필자의 원고가 순식간에 사라지는 허무한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닻을 내리기 위한 노력이 쉽지 않음을 절감한다. 항해를 시작하며 계획한 것은 역사적 흔적을 찾고, 인식의 주체를 찾으며, 현상을 파악하며, 언어의 의미를 그리고, 포스트모던의 현상을 여러 각도에서 살피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후설의 엄밀학으로서의 현상학으로부터 메를리-퐁티에 이르는 현상학적 이해에 대한 접근과, 소쉬르의 랑그와 빠롤 그리고 공시성과 통시성의 구분을 통해서 시작된 언어연구가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 언어학을 거쳐 포스트구조주의의 미셀 푸코와 해체주의의 자크 데리다에게서 나타나는 역동적이며 동태적인 언어의 연구는 중간에서 그쳐야 했다. 그러나 본 연구에서 목적하는 성과를 다 이루지는 못하였고, 결론으로 이끌기에 부족하지만 어느 정도 자료는 준비되었다고 위로를 하면서 닻을 내린다.
 역사적 흔적을 통하여 살펴본 바와 같이 현대성의 시작은 이성의 사유를 통하여 시작되었고, 반(反)변증적 사고의 흐름에 이르렀다. 필자는 프로테스탄트 정신과 현대성의 흔적을 살펴보고 "현대성은 무엇인가?"라는 명제의 부조리와 함께 "현대성은 어디에 기인하는가?"라는 근원적인 물음을 던지려고 한다.
 현대성은 프로테스탄트 정신, 새로운 공간, 자율적 이성(사유)이라는 세 가지 상징으로 환원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 프로테스탄트 정신은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교리로 남아있고, 새로운 공간은 가상공간(Cyber-Space)을 맞이하게 되었고, 사유는 산업사회의 기계문명의 권력과 더불어 도구적 이성으로 전환되었다. 현대성의 흔적을 논하면서, 포스트모던 사회가 비판한 기독교의 교리와 현대성의 도구적 이성은 결국 사상이나 교리가 이념의 틀에서 절대화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이 진정 사유나 교리의 틀을 변혁시킬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된다. 그리고 이런 것들이 현대성을 하나의 의미로 이해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 현대성은 다양하고 복합적인 역사를 지니고 있다. 역사 또한 푸코가 지적한 대로 맥락적인 것이 아니라 중첩적이기도 하고 단절적이기도 하다. 현대성이란 어떤 확실한 의미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실체를 지니고 있는 것도 아니기에 그 의미 규정은 공허한 것이다. 단지 현대성의 흔적들을 들추면서, 시대적으로 사상적으로 현대가 지니는 특징들을 살펴볼 수 있을 뿐이다. 가치있는 새로운 것들이 출현되는 현대의 의미는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힘에 의존하는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힘으로서 출발한 사유는 결국 "자기보존"을 위하여 이성을 사유화 내지는 도구화함으로서 몰락하게 된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변증을 통하여 지속적인 자기 성찰을 추구할 것 같았던 역사이성 또한 절대이성을 전제로 시작함으로 모든 다양성을 동질성으로 바꾸게 된다는 난관에 부딪친다.
 현대성의 비극을 극복하려는 노력은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보여지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시원적 사상가인 니체는 기독교조차도 헤겔의 변증법적 틀과 함께 내연의 관계를 맺고 있다고 관찰함으로 디오니소스적 초인을 통하여 다양성과 복수성을 전제로하는 차이를 인정하고 가치변환, 가치초월을 통하여 삶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새로운 사상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자신의 내부에는 긍정만이 있을 뿐 부정이 결여됨으로 인하여 기쁨, 춤으로 고통과 노동이 대체될 수 있다고 하지만 살려는 의지의 현상이 초인으로 향하는 힘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그것이 가능성은 없다. 그것은 니힐니즘을 의미하게 되며 결국 자기긍정이 자기파멸로 이어지게 된다. 가치변환은 보다 높은 삶의 고양이 아니라 퇴락적이고 육욕적인 대지로 이끌어갔다. 이러한 사실은 그를 따르는 추종자들의 언어 속에 밝히 드러나는 것이었다.
 하버마스는 주체철학이 지니는 한계를 인식하면서, 의사소통 즉 타자와의 담론을 통해 공동의 장에 이르는 시민사회를 주창함으로 계몽의 사유의 완성을 지향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자기 주체성을 벗어날 수 없고 칸트의 순수사유와 순수 담론의 장은 같은 맥락에서 언어를 포함한 현실적 상황의 난제들을 제거한 뒤에야 가능한 일이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현실적인 문제가 남게 되는데 이는 아도르노가 지적한대로 과학문명의 발달은 고삐 풀린 상황이며, 또는 크리쉬나의 속도를 늦출 수 없는 마차와 같아서 인간의 정신을 앞서 질주하고 있다. . 정신적으로 가치를 형성하기 위한 노력은 물질문명이 제공하는 유용성과 편리성 그리고 잉여가치를 통한 유혹에 의해 매도되고 있는 실정이다. 또 한편으로는 하버마스의 지적대로 구조적 틀이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정치적 상황의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은 여전히 유효한 것이다. 체제의 힘을 소유한 기득권은 권력이 제공하는 뇌물에 현혹되어 새로운 창조성의 모험을 포기함으로 의식은 있으나 혼수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프로테스탄트 정신은 다시 물화된 정신을 일깨우고 새로운 신화로 권력을 통합한 도구적 이성을 대항하여 싸우는 힘이 되어야 한다. 또한 정치체제가 창조적 삶을 위한 변혁을 주도하지 못하고 자기보존과 잉여가치를 탐하기 위하여 왜곡된 모습을 드러낼 때 프로테스탄트 정신은 투쟁하는 힘이 되어야만 한다.
 모든 신적인 힘을 취하려는 경제적 수단이나, 정치적 수단, 또는 문화적 도구를 저항하는 힘은 참다운 것이 무엇인가를 깨닫는 계시를 수여 받은 프로테스탄트 정신으로만 가능한 것이다. 현대성, 즉 새로운 창조를 가능케 하는 변혁의 힘의 근원은 바로 프로테스탄트 정신이며, 이 정신만이 오늘 우리 사회의 부조리를 치유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프로테스탄트 정신은 자기부정과 비판을 통해 늘 변혁된 사회의 부조리를 다시 바라보고 끊임없이 개혁을 추진하는 내적 변증과 외적 변증적 태도를 지니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유한한 어떤 창조적 결과도 절대적일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모든 창조물은 창조주의 인식 아래서만 가능하며, 이 세상의 시간과 공간의 상황에서 이루어진 어떤 변혁적 창조도 절대적일 수 없으며, 상황에 따른 객관적 타당성은 인정 될 수 있어도 시공을 초월하여 진리가 될 수 없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우리는 오늘 끊임없는 자기반성과 자기초월의 근원적인 힘으로서 프로테스탄트 정신이 다시 요구되는 시점에 있는 것이다.

이 글 공유하기

독자 의견

댓글이 없습니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