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성이란 무엇인가?1
현대성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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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항해를 시작하며
우리 시대를 해독하려는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읽혀지지 않는 어려움은 어디에 기인하는 것인가? 정체성을 상실한 삶의 표현들이 난무하고, 그 동안 일구었던 지적 토양이 불모지로 변해버린 현재의 상황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가? 규율과 전통이 참담하게 무너진 사회는 어디를 향해 가는 것인가? 오늘날처럼 혼란스러운 인간 사회에 희망이란 존재하는 것인가? 지금까지 인류를 지탱해온 정신은 무엇인가? 그리고 오늘 그 정신은 나름대로 역할을 감당할 수 있는가? 오늘날 지속적으로 펼쳐지는 낯선 세계의 출현은 인류의 역사를 불안과 혼란 가운데로 끌고 가고있다. 이제 새로운 시대라는 말, 한 때 모던 또는 현대라고 쓰여진 단어조차도 오늘의 현상에 그 의미를 부과할 수 없어 "포스트모더니즘" 또는 "포스트모더니티"라는 신조어가 등장하였다. 인류의 역사는 이제 탈현대적/탈역사적(?) 상황에 처하면서 그 중심을 잃은 채 미로에 빠져들고, 낯설음이 낯익음으로, 혼동과 무질서가 삶의 여정을 인도하는 길잡이로, 인위적인 환경이 자연스러운 것으로, 권력과 매스미디어가 지식으로 등장하는 시대를 맞이하였다.
새 천년을 맞이하는 역사의 전환점에서, 무질서와 혼란의 현상에 처한 '오늘의 시대' 또는 '현대'라는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어려움에 직면하게 된다. 과연 탈현대적 상황에서 '현대'라는 말을 해석할 가치가 있는가 하는 의문도 생겨난다. 한 언어의 뜻을 찾는 작업은 타당성이 있으며 그 뜻이 찾아질 수 있는가? 그 뜻을 찾는다는 것은 사변적 이성의 확실성에 근거하는 것인가, 아니면 감성의 영역에서 직관과 사변의 일치를 추구하는 것인가, 아니면 무의식의 감성에게도 해석되어지고 찾아질 수 있는 구조와 경험이 있다는 것인가? 합리적 이성의 영역에서, 또는 비합리성이나 감성의 영역에서 그 의미를 발견한다고 하더라도 그 의미는 불변하는 것인가? 그리고 그 언어의 뜻을 밝힐 실체는 분명한 것인가? 아니면 하나의 추상적 개념으로 정의될 수는 있는 것인가? "현대"라는 말은 역사적 한 시점을 지칭하는 말인가? 현대를 논하면서 고전적 학문의 형태와 논증을 사용하는 유효성은 있는가? 현대를 연구하는 것이 과연 학(學)이 될 수 있는가? 현대성에 관한 현상학적 기술은 가능한 것인가? 현대성이라는 언어가 보편성을 획득하는 동시에 이 보편성이 인식 구조의 틀로서 이해를 억압하고 강요하는 '언어의 전제'로 작용하게 되지는 않을까? 소쉬르가 '언어학에서 이룰 수 있는 일의 엄청난 공허함'을 보았다는 고백이 오늘 필자의 가슴에 절실히 와 닿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시간 우리의 위치를 '근사치 정의(定義)'를 통해서나마 밝히지 않을 수 없는 것이 현실이고 보면 인간의 학문은 늘 말/사물, 개념/실재, 그리고 이데올로기/실천 사이의 거리감과 괴리감으로 인하여 괴로워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오늘 "현대성이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이 바로 이런 괴리를 끌어안을 수밖에 없는 현실 속에서 이루어진 작업임을 고백한다. 이러한 상황을 전제로 할 때, 필자의 노력이 무의미한 작업으로 전락할 수 있음을, 또는 언어 유희로 그칠 수 있음을 인식하면서 시작한다.
우선 현대성에 관한 흔적을 찾는 일부터 시작할 것이다. (1) 지금은 고전이라고 불리우지만 당시에 현대라는 인식을 초래했던 역사적 사건들로부터 출발하여 루터의 종교개혁을 가능케 한 프로테스탄트 정신과 그 후에 예술의 부분에서 나타나는 미학적 논쟁을 먼저 살펴볼 것이다. (2) 데카르트 이후 코기토에 근거한 사변이성과 변증법적 이해, 그리고 인식론적 접근을 통해 포스트모던에 이르기까지의 대략적 사상사를 살펴볼 것이다. (3) 언어를 통하여 매개되는 상황에서 언어가 지니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인식이 가능한가 그리고 얼마나 그것이 오늘 우리에게 유효한가를 살펴보고, 현대성의 공시적 이해는 또한 얼마나 지역적 특성과 문화적 차이를 극복할 수 있는가, 다시 말해 랑그의 전제로 나타나는 공시성과 개인적 혹은 지역적 생활세계의 체험으로 얻어지는 빠롤의 언어 사이에 거리감은 해소될 수 있는 것인지, 아니면 구조주의 언어를 통해서, 혹은 상징적 언어나 신화를 통해서, 그것도 아니면 끝없는 해체의 모험을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얻을 수 있을 것인지, 다양한 물음에 답을 찾기 위한 언어-인식론적 접근을 시도할 것이다. 마지막 결론에서 현대성을 가능하게 하는 본질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현대성은 무엇인가?"에서 "현대성은 어디에 기인하는가?"라는 주제의 변화를 시도할 것이다.
II. 역사의 흔적을 찾아서
현대 또는 근대로 해석되어지는 '모던'이라는 말은 수용미학자인 한스 로버트 야우스(Hans Robert Jauss)에 의하면 라틴어 'modo'로부터 파생된 modernus에서 시작되었다. 그것은 단지 '막' '오늘의' 또는 앞선 시간과 구별하여 '최근의'라는 의미를 지닌 부사이다. 이 단어의 기원은 5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주후 500년경에 로마가 기독교를 공식적으로 인정한 시점에서 카지오도루스(Cassiodorus)가 처음으로 modernitas/antiquitas라는 대립쌍을 통해 기독교적 현대와 이교도적 과거를 구분하기 위하여 사용되었다. 즉 새로운 것과 낡은 것이 교차하던 시기에 그 구분을 위해서 사용된 것이다. 과거와 현재는 동질적이라고 여겨지는 특정한 특성들을 통해서 과거와 다른 새로운 것이라는 자의식이 관철되기 시작한 것이 바로 이 시기이다.
그러나 모던이라는 말은 역사가들에 의해 일반적으로 15세기 말 이후 근본적 변화의 상황에 있었던 유럽의 역사를 지칭하고 있다. 중세로부터 모던으로의 이행은 급격하게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 급격한 변화를 이루는 획기적인 전환점은 르네상스, 종교개혁, 그리고 신대륙 발견으로 이해될 수 있다. 코셀렉은 오늘날 영어의 모던 타임스(modern times)와 프랑스어의 텅 모데른느(temps modernes)는 1800년경을 중심으로 이전의 3세기를 의미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새로운" 시대 또는 "모던 시대"라는 표현은 역사의 연대기적 의미를 상실하고 "새로운"이 강조되는 반대의미를 획득하고 나서야 비로소 형성될 수 있다고 말하며, 모던(현대)은 미래를 향해 살고 있고, 미래의 새로운 것에 개방되어 있는 시대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먼저 르네상스, 종교개혁, 그리고 신대륙의 발견이 어떻게 모던의 흔적을 남기게 되었는가 살펴보는 것이 바람직할 일일 것이다. 여기서 획일적인 역사적 의미를 일정한 맥락주의적 입장에서 관찰하기보다는 다양성과 상이성이 함께 공존하였던 르네상스 운동 가운데 필자가 이해하는 범주 안에서 다루게 될 것이다.
역사적으로 르네상스는 중세의 권위를 부정하고 인간 자신에게서 새로운 학문의 길을 열고자 하였다. 전통적 교회의 권위를 부정하고 기독교가 공인되기 이전 그리스-로마 문화가 꽃 피운 인문학(studia-humanitatis)을 부흥시키려는 노력이 곧 '고전으로 돌아가자'는 구호와 함께 시작되었다. '스투디아 후메니타티스'는 키케로나 겔리우스 등 고대 로마의 저자들에 의해 일반적 의미의 교양 혹은 문학 교육에 적용되었으며 14세기 말 이탈리아 학자들에 의해 회복되어 15세기에 '문법,' '수사학,' '역사학,' '시,' '도덕철학'을 의미하게 되었다. '스투디아 후메니타티스'는 중세 교육의 중요한 과목들인 수학, 천문학, 의학, 법학, 신학, 논리학, 자연철학, 형이상학을 제외하였다. 이러한 사실에 대하여 크리스텔러(P. O. Kristeller)는 당시의 르네상스 휴머니즘이 그 시대의 철학, 과학 혹은 전반적 학문과 동일시하려는 거듭된 시도에 대한 저항 또는 반증으로 보여진다고 주장하였다. 고전학에 대한 권위로 인하여 그들은 라틴 저자들의 글과 헬라 저자들의 글을 번역하다가 얼마 후 철학 연구가 스투디아 후메니타티스 운동에 포함되었고 계속해서 후메니타스(humanitas) 운동으로 발전되었다. 그것은 이제 고전의 번역과 더불어 인간, 인간의 존엄과 우주에서의 특권적 위치가 연구되고 강조되는 계기가 된 것이다.
이제 권위적 신적 통제를 벗어나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진 문화와 역사를 재현하려는 움직임이 시작된 것이다. 그 기반은 성경의 계시가 아니라 헬라의 형이상학적 기반이며 자율적 이성의 토대를 낳게 하였다. 스투디아 후메니타티스는 라틴어 연구에서 헬라어 연구로 그리고 문화영역에서 철학을 포함한 인간에 대한 집중적인 연구로 이어졌고, 동시에 진리를 찾으려는 노력이 함께 하였다. 우리가 진리를 알 수 있을까? 피코(Gianfrancesco Pico)는 '진리의 요소는 모든 시대, 장소, 종교의 사상가들에게서 발견된다'고 하는 신념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900개의 명제>에서 진리는 다수의 학자와 학파들에서 찾아진다고 주장하는 한편, "진리 그 자체가 전체적으로 이해되도록 진리를 제시한 사람은 과거에도 없었고 우리 뒤에도 없을 것이다. 인간의 능력으로 감당하기에 그것은 지나치게 거대하다"고 진술했다.
르네상스 운동 중에서 국지적이긴 하지만 자유공화국의 이상을 꿈꾸었던 15세기 초의 플로렌스 지역에서 "시민적 휴머니즘(civic humanism)"이란 용어가 사용되었다.
새로운 학문의 발달과 시민정신의 시작은 비교적 전통의 영역에 충실했던 예술 부분에도 점점 더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종교적 토대를 버리고 인간 이성에 근거한 미학의 토대를 세우려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이러한 정황은 17세기 미학에서 신구 논쟁을 불러일으키는가 하면, 칸트에 이르러 비판이성이 진리(순수 이성비판)와 덕(실천 이성비판)과 미(판단력 비판)로 구분되어 분화되기에 이르렀다. 이제 르네상스의 작업은 한편으로는 종교개혁의 영향과 연관되어 시민사회를 향하는 출발점이 되어 18세기 프랑스 혁명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운동은 신적 권위를 상징하던 루이 16세를 왕좌로부터 단두대로 보냄으로 시민사회를 이루게 되었던 것이다. 억압된 주체가 타력에 의해 지배되는 구조를 타파하고 자율적 사회를 성취하게 되었고, 집권적이고 통제적인 권위가 무너지면서 그 힘을 시민전체가 함께 공유하게 된 것이다.
루터의 종교개혁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는 억압된 자신의 소리를 듣고 있었다. 신앙과 의(義)가 통합적 권력의 틀에서 상품화되어 몇 푼의 화폐(免罪符)와 교환되는 상황에서 참된 하나님의 의를 추구하였다. 당시 상황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내부에서 끊임없이 반성을 촉구하는 주체는 루터로 하여금 절대권력에 항거하도록 촉구하였다. 종교개혁은 왜곡된 절대권력의 신화로부터 탈출을 의미하며 예레미야와 같이 고독한 투쟁을 알리는 것이었다. 그는 내부의 들끓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절망 중에 있었다. 그러나 그가 말씀을 읽을 때에 새로운 힘을 얻게 되었다. 말씀은 그의 정신에 힘을 불어 넣었다. 단순히 읽던 성경의 언어가 살아있는 역동적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해되면서 루터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전환점에 서게 되었다. 새로운 시대의 지평을 여는 루터의 비전은 세계의 비전이 되었고 그가 발견한 말씀은 역사를 창조하는 힘이 되었다. 즉 루터에게 나타난 말씀이 바로 창조가 된 것이다. 오늘 루터의 "신앙으로 말미암는 의"는 다시 고정된 언어의 기능만 남고 말씀의 위력은 사라진 채, 하나의 유물로서 개신 교회를 지탱하고 있다. 언제 그 유물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흘러내릴지 모른다는 기적을 바라보면서, 말씀의 힘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유물의 기적을 의존하는 신앙만이 전해지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주권을 자신의 것으로 취하는 교황을 대항하여 <95개조의 반박문>을 내걸고 투쟁한 것이다.
루터의 시편 강해와 로마서 강해를 통해서 자신 안에 역동적 정신의 실재를 발견하였다. 그것은 "의인인 동시에 죄인"이라는 삶의 역설적 상황이었다. 자기 자신의 의를 바라보는 자는 하나님 앞에서 여전히 죄인이요,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신앙이 하나님 앞에서 의로 인정을 받는다는 것이다. 자신의 실재적 상황에서 모습을 관찰해 볼 때 죄인일 수밖에 없는, 자신을 극복하고 신의 진리에 도달하려는 노력이 실패로 끝났음을 인식하는 자기 비판적 성찰은 늘 자신을 실패자로 바라보는 날카로운 정신의 자기 반성이었다. 하나님의 정의는 상황에 처한 인간의 활동이 충족시킬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말씀을 읽으면서 용서와 화해를 발견하였다. 그것은 단지 자신의 위안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감추어진 하나님, 즉 계시의 하나님을 발견한 것이다. 그것은 영광의 하나님이 아닌 십자가에서 고난 당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이었다. 감추어진 하나님, 고난과 고통 속에 십자가가 그 깊이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가 생각했던 영광의 하나님, 권능의 하나님, 사유의 하나님, 도덕의 하나님을 통해서 구원을 요청하였던 노력이 무너지고, 오히려 고난 가운데 감추어진 하나님의 사랑을 통하여 새 생명의 기쁨과 환희를 경험한 것이었다. 십자가는 감추어진 하나님을 드러내는 계시적 사건이 되었다. 그리고 이 계시는 신앙의 역동적 힘이 되었다. 자신의 부정을 통해서 긍정에 이르는 하나님의 역설적 은총, 그 안에 넘치는 사랑의 깊이를 발견한 것이다. 이제 그가 신앙하는 것은 하나님의 고난이 우리의 생명이라는 것을 믿는 것이다. 고난은 자기 부정을 통해 자기 초월적 긍정으로 변화되는 것이다. 새로운 피조물, 자기 변혁을 통해 이루어지는 전적인 변화를 지향하는 신앙은 부정과 초월의 역동적 관계를 지속하는 것이다. 끊임없는 자기비판을 통해 자기 극복을 지향하는 신앙의 성찰은 프로테스탄티즘을 가능하게 한 것이다. 이 프로테스탄티즘을 가능케 하는 정신, 끊임없이 죄인과 의인의 역동적 관계를 유지하는 정신은 다름 아닌 프로테스탄트 정신인 것이다. 루터의 프로테스탄트 정신은 역사적 프로테스탄티즘을 가능케 하였다.
루터는 역동적 신앙의 힘에 의지하여 종교 개혁을 일으켰다. 그가 싸워야 할 이데올로기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이성의 하나님으로서 그는 십자가의 하나님, 감추어진 하나님의 개념을 통하여 십자가의 신학을 이야기하였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이성의 사유를 통해서 알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 모세에게도 여호와는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자가 없음이니라"(출 33:)고 대답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빌립이 예수께 다시 물었을 때, "나를 보는 사람은 또한 나의 아버지를 보는 것이다"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광의 하나님이 아니라 고난의 하나님을 본다는 것이다. 플라톤의 철학적 형이상학적 신 개념은 하나님이 아니다. 이성의 사유를 통해서는 하나님에 도달할 수 없다고 단호하게 거절하는 것이었다. 루터의 프로테스탄티즘은 바로 이성의 사유가 만들어내는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이다. 이것은 칼빈에게도 나타나는데 이성을 우상 제조공장으로 표현한 것이다. 하나님은 객체적 대상으로서의 한 존재가 아니다.
루터는 중세 카톨릭 신학자들이 형이상학의 기반 위에 세운 우상과 실천적이며 성례전적 우상들을 대항하여 싸웠고, 다른 한편 당시에 유행하는 낙관적 개인주의자들, 즉 르네상스 휴머니스트 중의 한 사람인 에라스무스와 투쟁하였다. 인간 자신을 우상으로 만들려는 모든 노력들 또한 루터에게 있어서는 거부해야 할 대상이었던 것이다. 이 땅 위에서 인간은 하나님께 의인이라 일컬음을 받을지라도 자신이 자신을 바라볼 때에서 여전히 부족함을 느끼는 죄인인 것이다. 루터는 이와 같은 견지에서 인간의 "노예의지"에 관하여 에라스무스와 논쟁을 벌였다. 인간의 이성은 주권적이 아니라 노예적이라는 것이다.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가 지적한 것과 같이 인간의 이성은 목적합리성을 지니고 있어서 도구적 이성으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다. 종교 개혁은 사유가 진리자를 알 수 없다는 것과, 권력을 개인이 착용하는 악마성, 그리고 신앙의 역동성을 교리의 틀에 묶어 감금하는 것에 대하여 반박하며 투쟁한 것이다.
신대륙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전통적인 억압으로부터 탈출하여, 미지의 땅, 아직 인류문화에 의해 길들여지지 않은 자연을 간직한 땅으로 나타났다. 인위적인 세계를 탈출하여, 억압과 권력의 사회구조를 벗어나 새로운 땅에서 자신들이 원하는 자유를 누리며 살 수 있는 여지가 마련된 것이었다. 청교도들이 그들만의 자유를 찾아 떠난 땅, 두려움과 낯설음으로 가득하였지만, 자유를 추구하는 신앙의 정신은 두려움과 낯설음을 희망으로 받아들이며 출항을 하였고 동료와 가족이 죽는 고통 속에서도 남은 자들의 미래지평을 열게 될 것이라는 희망아래 있었다. 그들 가운데는 옛 신앙을 회복하고 보존하려는 노력이 있었다. 새로운 것을 향한 발전은 결국 현대의 위기, 변화되는 곳에서 옛 것의 향취를 찾아가는 순례자의 노력이 함께 하고 있었다.
15세기 이후 현대는 새로운 것의 출현을 의미하는 그러면서도 그것은 단지 새로운 것을 새롭게 하기보다는 옛것의 향취를 체내에 간직하려는 노력이 있었다. 찬란했던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려는 것이다. 역사의 원점을 향해 가려는 것이다. 탈출은 자유를 추구하면서, 그 자유는 신화의 영광을 재현하는 것이다. 자유 정신의 출항은 계속 항해를 거듭하며, 17세기 말의 신구학파 논쟁에 이른다. 미학적인 면에서 신구학파 논쟁 (the Querelle des Anciens et des Modernes)의 쟁점은 고대인이 현대인보다 지적으로나 예술적으로 더 우수한가 그렇지 아니한가에 관한 것이었다. 페로(Charles Perrault)와 퐁트넬(Fontenelle)이 과학에서의 진보개념을 문학과 예술에 적용시키는 것이 적합하다는 견해에서 출발하여 고대의 예술에 대해 자기 시대의 예술의 우월성을 선언하였다. 당시에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운동을 비롯하여 고전의 예술에 대한 동경심을 지니고 있던 고대 옹호론자들을 자극하면서 야기된 이 논쟁은, 비록 각 시대의 예술은 나름대로의 취향과 미개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똑같은 척도로 잴 수 없다는 합으로 끝났지만 진보에 대한 역사 모델을 제시함과 동시에 각 시대의 특수성이 인정되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즉 현대인들이 고대인들보다 더 멀리 본다는 것이 더 우세하다고는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논쟁은 고대에 대한 저항을 통한 차별성을 보여줌으로 모던에 대한 개념이 풍부해짐과 동시에 "현대적/고전적"이라는 용어 대립이 미학적 파벌 짓기를 위한 틀로 전환되었고, 기존 취미모델을 부정함으로 새로운 유형들이 창출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보들레르는 근대예술과 낭만주의의 동일시를 통하여 현대성의 이념과 혁신성의 가치에 새롭고 근본적인 강조점을 두었다. "무엇보다도 과거의 예술가들에게 알려져 있지 않았거나 멸시되어 온 자연의 측면들과 인간의 상황들을 아는 것이 필요하다. 낭만주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근대예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즉 예술이 이용할 수 있는 모든 수단들에 의해 표현되는 친밀감, 정신성, 색채, 그리고 무한성을 향한 열망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에게 낭만주의의 미는 가장 최근의, 가장 동시대적인 형식일 뿐 아니라, 과거에 행해졌던 모든 것과 실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보들레르의 시학은 혁신성, 새로움(novelty)의 탐구에 출발점이 되었다.
모더니티는 일시적인 것, 우발적인 것, 즉흥적인 것으로 예술의 반이며 나머지 반은 영원적인 것과 불변적인 것이다. 그렇게도 빈번히 모습을 바꾸는 이 일시적이고 무상한 요소에 대해서 당신은 그것을 비난하거나 무시할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것을 억압한다면 당신은 처음 죄를 범한 한 여성의 그것처럼 추상적이고 정의할 수 없는 미의 공허함 속으로 떨어지고 말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만일 하나의 특정한 모더니티가 고대성이 될 만한 가치가 있다면 그것으로부터 인간의 삶이 무심결에 그것에게 부여해 주는 신비스러운 미를 추출하는 것이 필요하다. 고대성으로부터 순수예술, 논리, 그리고 보편적 방법이 아닌 다른 어떤 것을 추구하는 이에게 화가 있으리라. 너무 깊숙이 과거에 잠겨 들어감으로써 그는 현재를 시야에서 놓치고 만다. 그는 환경에 의해 주어진 가치들과 특권들을 비난한다. 그러나 거의 모든 경우에 있어 우리의 독창성은 시대가 우리의 감정들을 각인해 주는 낙인으로부터 나온다.
보들레르의 모데르니테는 하나의 관념으로 현대성의 역사에서 질적인 전환점을 이룬다. 그에게 현대성이란 통상적이고 보편적인 기술적 기능을 상실한 것이다. 그러므로 "현대성"은 고대 또는 전통적인 것들과 현대의 새로운 것들의 체계적인 비교를 불가능하게 한다. 보들레르가 의미하는 현대성은 어떤 것의 "현재성" 속에서 현재하는 것, 그것의 순수하게 순간적인 성질 속에서 현재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그것의 가장 구체적인 직접성 속에서 즉 그것의 현재성 속에서 역사성에 대한 의식을 통해 역사의 흐름을 뛰어넘을 수 있는 역설적 가능성으로 정의될 수 있다. 예술의 가장 일반적인 법칙을 구성하는 "미의 영원한 반"은 단지 현대적 미의 경험을 통해서만 무상한 삶(또는 후대의 삶)으로 가져올 수 있다. "현대적 미"는 초역사적인 가치들의 영역 속에 포섭되지만 미래의 예술가들에게 모델이나 모범으로 봉사하게 됨으로 "고전" 또는 "고대성"이 된다. 여기서 주의 깊게 살펴 볼 수 있는 말, 즉 우리의 독창성은 시대가 우리들의 "감정들을 각인해 주는 낙인"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이다. 미학은 단지 이성의 그물에 갇히는 것이 아니라 감정들이 이성의 체계를 비집고 나와 각인해 주는 낙인들에 의존한다. 새로운 창조적 측면에서 예술 창조는 예술가의 상상력을 제외하고는 어떤 동맹자도 갖지 못한 모험이자 드라마가 됨으로 온갖 위험과 난항으로 가득 차게 된다. 그러므로 현대성을 지닌다는 것은 당대를 형성하는 구조적 힘에 저항하는 용기와 미래지평을 바라보는 믿음의 행위이다. 위험과 난항으로 가득 찬 모험을 이끌고 주도하는 주체의 힘은 어디에 기인하는가? 주체는 이미 주어졌고 이 세계에서 역사의 흔적을 발견하고 현재적 구조의 억압적 틀에 저항하고 미래를 확신하는 실천적 행위를 가능케 하는 이 원동력은 어디에서 오는가? 뒤의 결론에서 답할 것이다.
모더니티의 현상 가운데 칼리니스쿠가 지적한 대로 아방가르드, 데카당스, 키취 등을 들 수 있다. 아방가르드(Avant-garde)는 에티엔 파스키(Etienne Pasquier, 1529-1615)의 [프랑스 탐구(Recherched de la France)]라는 글에 처음 등장한다. 파스키가 "그 당시에는 무지에 대항하는 영광스러운 전쟁이 진행되었는데, 그 전쟁에서 세브(Sceve), 베즈(Beze), 그리고 폴레티에(Pelletier) 등이 아방가르드가 되었다고 말하고 싶다"는 글에서 보여주고 있는 것과 같이 아방가르드는 "무지와 싸우는 전쟁"의 용어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아방가르드" 개념은 신구논쟁을 거쳐 18세기로 넘어오면서 프랑스 혁명의 여파 속에서 "시민전쟁의 언어와 이론, 그리고 실천"과 관계를 맺게 되었다. 따라서 문학 예술적인 맥락에서 낭만적인 아방가르드 개념을 사용하는 것 그리고, 사회주의 혁명적인 정치학의 언어로부터 도출되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고 칼리니스쿠는 말한다. 이는 19세기 생시몽(Saint-simon)과 그의 제자 올린드 로드리그(Olinde Rodrigues)에 의해 현대적 기원을 갖게 된다. 생시몽은 "새로운 숙고를 통해 나는 예술가들이 선두에 서서 일들을 움직여 가고 그 다음으로 과학자가 뒤따르며 산업가는 이 두 계급의 뒤를 따라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는 편지를 [생시몽이 법관들에게 보내는 편지](1820)에 기록하고 있다. 생시몽에게 예술가는 '상상력의 인간'이며 미래를 창조할 수 있는 존재이다. 그렇다면 생시몽에게 상상력의 인간들, 예술가들이야말로 "과거로부터 황금시대를 가져와 미래의 세대들에게 선물로 전달해 줄 것"이라고 말한다. 생시몽의 상상력의 인간은 과거의 황금시대에서 그 피를 수혈 받는다. 과거의 황금시대, 즉 고전이 되는 과거의 흔적은 미래 지평을 여는 모범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곳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풍요의 그림을 제시함으로써" ... "문명의 축복을 찬미할 것이며" ... "그들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예술, 웅변, 시, 그림, 음악 등의 수단을 사용할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 생시몽이 언급하는 아방가르드 예술가는 사회적 번영을 향한 운동의 전선에 서게 됨과 동시에, 예술가는 자유로운 존재라기보다는 이상적 사회를 향하여 교육 프로그램을 수행하는 전투적 예술가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뒤를 이어서 아방가르드 메타포의 문화적 사용은 근대적인 정치사상과 미학 양자 모두에 있어서 급진주의로 향하게 된다. 19세기 유토피아적 개혁론자, 사회주의자, 그리고 무정부주의자들이 참여적이고 전투적이며 정치적인 책임을 지려는 예술을 요구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세기 아방가르드 운동은 진보적인 정신과 투쟁의 정신을 소유하고 있었고 비록 유토피아적이긴 하였지만 미래 지평을 열기 위한 정열로 가득 차 있었다.
이러한 아방가르드 운동은 1870년대의 선진적인 예술가들이 가졌던 새롭고 미적으로 혁명적 정신 상태를 보여주는 예술가들 사이에 등장한다. 아르투르 랭보(Arthur Rimbaud)는 사회주의적이며 무정부주의적 사고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시는 앞서 있을 것이다. ... 우선 시인들에게 새로운 것을 요구하자. 이념과 형식을" 즉 시인은 미래 지평을 바라보면서 앞날에 필요한 이념과 사상을 새로운 언어를 통해 현재의 상황에 투입시킴으로 새로운 길을 제시할 때 비로소 시는 자기 역할을 감당하고 전진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될 경우 시는 전진할 수 있을 것이다. 퇴로에서 늘 머뭇거림, 아니면 상황에 맞지 않는 조숙한 언어는 키취(Kitsch)로 전락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이 새로움을 추구하는 아방가르드 운동은 20세기에 들어서면서 "과거의 황금시대"를 거부하면서 새로움의 숭배에 의해 규정되는 모든 새로운 유파를 지칭하게 될 만큼 포괄적으로 변모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는 곧 아방가르드의 죽음을 선포하게 되었다. 레너드 마이어는 그의 책 [음악, 미술, 그리고 상](1967)에서 "아방가르드 개념은 목표 지향적 움직임을 함축한다... 만약 르네상스가 끝났다면 아방가르드도 끝났다"고 선언하였다. 이념, 사상, 사회주의나 무정부주의를 목적으로 투쟁하며 전진하였던 아방가르드 예술은 이제 포스트모던의 탈 역사적 상황에서 그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방가르드를 가능케 했던 호전적 투쟁정신은 모더니티의 지적 상대주의에 의해 대체됨으로 사회문화 전반에 흡수되었다. 아방가르드의 죽음은 이제 아방가르드가 하나의 유파로서는 생명을 다했지만 여전히 문화 전반에서 지적 토양으로 새로운 세계를 향한 저항정신으로 유효구조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간헐적으로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한 네오-아방가르디아, 아방가르드의 실험정신을 중심으로 한 실험적 아방가르드, 그리고 지적 아방가르드 운동으로 나타나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상황은 최근에 발표된 여러 글에서 "아방가르드"에 관한 글들이 "모더니즘"으로 읽혀지고 또한 동의어로 사용되어지는 것을 볼 때에 더욱 분명해 진다. 20세기 후반에 등장한 현시대적 정신은 아방가르드와 분리할 수 없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기 때문이다. 합목적성은 사라졌지만 나름대로 새로운 지평을 열기 위해 미래 지평을 현재에 투입하고 탈 현대화하려는 노력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III. 그물을 던지며
현대성의 담론을 시작하면서 우선적으로 데카르트(Rene Descartes, 1596-1650)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데카르트는 인식론에 있어서 생각하는 자아에 근원을 둔 확실성의 시대를 열어 놓음으로 역사적 모더니즘의 시조가 되었다. 헤겔이 그의 <역사철학>에서 데카르트를 근대정신의 여명기를 상징하는 영웅으로 묘사한 것은 데카르트가 순수사유의 해방자로 나타나면서 역사의 전환점을 마련하였기 때문이다. 그가 1637년에 "나는 내가 가장 확실한 것으로 인정하지 않는 어떤 것도 참이라고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규칙은 혁명적 사고의 가치를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 당시의 사람들은 교회의 권위와 스콜라 철학의 권위 아래서 살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스콜라 철학은 이미 초대 교회의 전통에서 떠나 아리스토텔레스로의 철학으로부터 유출되어 중세 교회에 의해 승인을 받은 공인된 철학이었다. 스콜라 철학은 토마스 아퀴나스에게서 보여지고 있듯이 우주론적 위계질서를 확립하고 목적론적 세계관에 중심을 두며 모든 사물의 보편성을 추구하는 철학이었다.
데카르트에 의해 모더니즘은 전통을 교회의 권위 밖에서 생각하고 글쓰기를 시작한 것이다. "Cogito"를 통하여 지식의 성찰은 자신의 반성이며, 신은 자신의 사유의 반영된 흔적이고 대상이 되었다. 사유의 주체(subject)로서 자아는 의식 속에서 그것의 존재 양식을 발견한다. 대상적 사물들을 주체인 자신과 함께 재구성함으로 표상성을 구현하고, 이 표상성을 통하여 현존재의 특질을 부여받는다. 사유가 정신의 일부가 아니라 사유가 존재를 논증하고 규명하게 됨에 따라 근대의 비극이 출현하게 된다. "나"라는 존재는 순수 사유에 지나지 않게 되고 육체의 감정이나 무의식의 세계는 사유로 인하여 버려지게 된다. <코기토>의 확실성은 지적 본능의 우월성을 제시하였고, 인간의 감정이나 육체 따위는 어둠에 감금되었다. 여기서 신은 지적 본능의 인증자가 된다. 사유의 세계는 형이상학의 원천으로서, 수학적 사고의 근원으로 신을 요청하게 된 것이다.
이제 현대성의 시작은 신이 인간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신의 현존재를 규명하게 된 것이다. 대상에 대한 자아의 우월성이 드러나고 신을 사유의 정점에 놓음으로 객체화시키고 대상화함으로 루터가 일으켰던 프로테스탄티즘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이제 사물은 자아를 통해서 재현되고 의미를 지니게 된다. 자아는 세계가 인식되고 통합되는 공간이 된다. 그러나 문제는 자아의식에 인식된 표상의 세계와 객관적인 실재의 세계가 일치한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하는가? 하는 것이다. 즉 감각적 이미지와 사물 자체 사이에 차이를 어떻게 극복하는가? 일치성을 추구하기 위하여 데카르트는 질적인 속성을 제거하고 양적인 속성을 남겨 두었다. 확실성을 위한 사유의 투쟁은 양, 크기와 수를 토대로 삼게 된다. 사유하는 존재는 수학적 공리나 논리적 이성의 틀에서만 확실성을 유지할 수 있게 됨으로 역동적 삶의 질을 제거하게 된 것이다.
영국의 경험론 철학이라 불리는 존 로크(John Locke, 1632-1704)나 데이빗 흄(David Hume, 1711-1776)이 테카르트의 인식론에 문제가 있음을 발견하였다. 즉 그들의 생각으로는 인간의 인식은 본질적으로 합리적이 아님을 직시한 것이다. 경험을 통해서 전달되는 인식과 대상이 완전히 일치하는 일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데카르트는 신 인식을 통해서 수학적 사고의 형이상학을 확증하였는데, 경험론자들은 경험하는 세계를 통하여 형이상학에 이를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여기서 실재하는 않는 모든 형이상학적인 것들에 대한 회의가 일어난다. 이러한 로크와 흄의 뒤를 이어 독일 관념론의 철학자 칸트(Immanuel Kant, 1724-1804)가 출현한다.
칸트는 영국 경험론이 제시한 회의적 입장에서 시작한다. 칸트의 경험으로서의 인식의 영역을 '현상계'라고 부르며, 인식은 이 영역 속에만 제한하면 인간이 선천적으로 갖고 있는 인식 능력의 공통성에 의해 그 나름대로 객관성을 끄집어 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칸트는 사물을 인식하는 방법은 동일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한편으로 그는 인간의 인식 능력으로는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이 절대적인 대상물로서의 본질을 '물(物)자체'라고 부르며, 두 영역을 분명하게 구분지었다. 따라서 칸트가 말하는 '현상'이란, 한 편에 세계의 객관적 진리로서의 물 자체의 세계가 있어 이것이 인간의 인식의 장면에 드러난 만큼의 모습이라는 부정적 뉘앙스를 지니게 되었다. 데카르트의 확실성은 무너졌지만, 사유하는 주체는 인식이 난제(aporia) 가운데에 처하면서도 여전히 주인으로 위치를 다지고 있었던 것이다. 칸트는 비록 사유하는 이성, 즉 오성이 비록 미성숙할지라도 용기를 가지고 사용하겠다는 것이 계몽이라고 단언한 것이다.
계몽이란 인간이 자기 스스로의 원인에 의한 미성년 상태 밖으로 이행하는 것이다. 미성년 상태란 타인의 지도 없이 자신의 오성을 사용하지 못하는 무능력이다. 이 미성년 상태가 자기 스스로의 원인에 의해서 초래된다는 것은, 이 미성년 상태의 원인이 오성의 결여에 있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지도 없이 자신의 오성을 사용해 보겠다는 결심과 용기의 결여에 있을 때를 말한다. 지혜 있게 되는 것을 주저하지 말라! 용기를 가지고 너 자신의 오성을 사용해 보라! 이것이 바로 계몽의 좌우명인 것이다.
칸트의 계몽은 자아의 고유한 판단을 대리하던 타인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는 것이다. 계몽은 타자(전통)의 선입견에서 벗어나는 것이고, 타자의 권력(지적 권력이든 아니면 사회적 구속이든)으로부터 자유를 선언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이 운동의 마지막 귀착점은 사회 또는 공동체의 해체로 끝나게 되는 것이다. 칸트 자신도 이런 위험의 결과를 알고 있었다. 그는 오성의 사용을 두 가지로 구분하여 말한다. 이분법에 따르면, 오성의 사용은 공적인 경우와 사적인 경우로 나뉜다. 사적 오성의 경우 칸트는 개인의 자유가 제한 받아야 한다고 본다. 공동체에서 불합리하고 불공정하다고 판단되는 일이 있더라도, 소크라테스가 '악법도 법'이기에 공적 질서를 위해 순응한 것과 같이, 일단 법에 따라야 한다. 그러나 공적 이성 사용은 절대적으로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 "내가 그러나 오성의 공공적 사용이라는 말을 가지고 의미하는 것은 각각의 개인이 학자로서 독자 세계의 사람들 전체 앞에서 오성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결국 칸트는 공동체의 질서를 위하여 실천이성 비판을 비롯하여 도덕철학에 몰두하게 된다. 실천이성비판은 양심을 통한 신의 확증이었다. 순수이성비판을 통하여 사유이성으로는 신을 알 수 없다는 판결을 내린 뒤, 신의 부재는 곧 사회해체를 의미한다는 것을 자각하고 도덕적 신을 요청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판단력 비판을 통하여 데카르트에게서 배제되었던 심미적 기능을 회복하기 위하여 판단력 비판을 발표하였다. 또한 선험적 순수이성으로 출발하지만 인식의 영역은 무한한 사유의 공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경험하는 세계의 현상에 제한함으로 나름대로 도덕이성을 통한 신앙의 영역을 확보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이런 일련의 작업을 통하여 칸트는 인식을 사유하는 이성의 제한적 기능(감정의 영역을 이성의 틀)에 종속시킴으로서 데카르트의 <코기토> 영역 가운데 머물렀던 것이다.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1831)은 칸트가 내놓은 비판적 이성의 분석적 힘은 모든 것을 조작 가능한 대상이나 객체로 변형시킨다는 것을 관찰하였다. 또한 전통과 대립에서 생겨난 비판적 이성이 아이러닉하게도 역사성을 결여하고 있으며, 합리성의 추구로 인하여 도구적 이성으로 전락하고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헤겔은 독일에서 계몽의 이성은 관념론에 머무는 반면, 프랑스혁명은 계몽의 이성이 현실을 변혁시키는 힘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을 그가 튀빙켄에서 공부하는 동안 목도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이성의 반성이 추구하는 이념들은 현실과 유리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프랑스혁명에서는 이성이 역사적 현실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헤겔이 칸트에게서 배운 것은 감성에 대한 이성의 우위(優位)와 비판적 힘이었다. 칸트의 관념론에 역사성을 주입하기 위하여 헤겔은 순수 이성이 아닌 역사이성으로서 주체성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 주체성은 "자유"와 "반성"을 지니고 있다. 주체성이 지니는 자유는 역사적 현실에 대한 반성의 계기를 매개(媒介)로 삼는다. 헤겔 철학 정신의 생명은 부정의 힘에 있었다. 칸트의 비판이성은 이제 부정의 힘으로 역사적 현실에 적용되었다. 이성은 현실에 대한 대립, 모순, 부정을 통해서 절대 정신을 지양하는 것이다. 헤겔의 주체성의 원리가 관철되도록 만든 역사적 핵심사건들은 종교개혁과 프랑스혁명이었다.
헤겔에 따르면, 루터의 종교개혁은 주체성의 원리를 사회적, 정치적인 제(諸)관계에 도입시키는데 성공한 최초의 시도이다. 그것은 행위의 유일한 책임을 자유로운 주체에 두고, 전통적인 조직에 도전한 것이다. 루터의 성례전이 보여준 것은 떡을 떼고 나눔에 있어서 그리스도는 떡의 매개(媒介)에 의해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매질(媒質)에 의해서 연합된다고 하는 것이었다. 헤겔이 해석한 루터 교회는 개인이 성령으로 충만해 있다는 것을 알 때, 일체의 외면성의 관계들은 바로 이 사실에 의해서 폐기된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성직자와 속인과의 사이에는 구별이 없어지고, 교회의 모든 정신적 및 물적인 재산과 더불어 진리의 실질까지도 독점하고 있는 계급은 벌써 사라진다는 것이다. 루터의 성경번역은 바로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가장 내적인 주체성은 진리를 소유할 수 있는 자, 또 소유하여야 할 자로 인정을 받게 되었고, 이 주체성은 모든 인류의 공유재산이다. 헤겔은 "이제 인간과 신과의 사이에 일어나는 매개를 통하여 자기가 자유임을 의식한 정신의 객관적인 과정이야말로 신의 본질 그 자체임을 확인하면서 세속적인 것을 더욱 더 발달시켜간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러한 발달의 과정에서 절대적인 정당한 것은 먼저 사상 안에서 발견되어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칸트가 했던 것처럼 이성의 영역을 제외한 모든 영역을 이성의 발아래 놓았다. 이성의 우월, 그것은 전인격적 회심과 신앙을 의미했던 루터의 신학을, 이성의 명료함을 넘어 활동하시는 감추어진 하나님(계시의 하나님)을 주장하였던 루터의 십자가 신학에 나타나는 하나님을 절대이성으로 객관화시킴으로 "신의 죽음을 향하는 철학자" 또는 철저히 "인간의 이성 안에 내재화된 신"을 말하는 범신론적 철학자가 된 것이다. 여기에서 프로테스탄티즘과 독일의 사변적 현대사상은 길을 달리하고 있었다.
여기서 루터의 주체성, 즉 신을 사변화하고 객체화함으로 우상을 만들려는 시도에 저항하고 성경을 가두고 자신들의 권력을 위하여 사용하는 교황에 대하여 투쟁하며, 성례전을 성직자가 가로채고 신자들을 소외시키는 교회의 부조리를 고발하며 종교개혁을 일으켰던 프로테스탄트 정신을 헤겔은 사변적 이성의 중심에서 절대정신으로 대체시킴으로 인간의 이성 이외의 모든 부분들을 소외시키고 만 것이다. 현실 세계의 모든 것이 이성의 현실, 인식을 자신의 목적 합리성의 영역으로 이끌어감으로 발전을 지향하는 헤겔의 철학은, 현실적으로 보이지 않는 사변적 이성이 실체적이고 구체적인 현상세계의 역사를 변혁시킨다는 관점에서 볼 때에 이것을 하나의 선천(先天)주의 지배로 규정하고 경험주의의 권위를 회복하려는 철학자들에 의해 반론에 부딪치게 되었다.
셸링은 1841-1842년 겨울, Engels, Kierkegarrd, Bakunin, Burckhardt 등이 참석한 베를린 학회에서 "Die Philosophie der Mythologie und der Offenbarung"이라는 제목의 강연에서 헤겔 철학을 있는 사물의 자연적 속성을 부정한다는 관점에서 부정 철학(negative philosophy)이라고 명하고 자신의 낭만적 자연주의 철학을 긍정철학(positive philosophy)라고 명명하였다. 이러한 부정철학에 대한 반격은 실증주의에서도 함께 일어났다. 실증철학은 부정의 철학을 선험적 이성에 종속시키는 시도에 거부하면서, 경험을 인식에 있어서 최고의 지위로 높이는 것이었다. 아퀴나스 콩트의 실증주의는 이제 독립된 경험과학의 영역에서 사회학으로 발전하였다. 여기서 헤겔이 주장하는 사변적 주체성에 근거하여, "비이성적인 현실은 이성에 합치될 때까지 변혁되어야 한다는 이성=진리=현실이라는 도식은 위기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20세기 과학문명이 사회를 주도하는 산업문명 앞에서 이성은 그 본질적인 부정의 힘, 비판의 힘을 상실했으며 그 이차원적 사유가 일차원적 사유로 변해버렸다고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마르쿠제는 마르크스의 전통에서 지적하고 있다.
마르크스는 헤겔의 좌파에 속하면서 헤겔의 부정철학에 대한 반기를 들고, 반성개념이 생산개념으로 이데올로기를 실천으로 이행시키면서, "자아의식"이 "노동"으로 치환시켰다. 마르크스는 헤겔 철학이 지니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로서 주체와 객체를 나누었을 때, 주체의 인식이 있는 그대로의 대상을 인식할 수 있는가를 확인하고 증명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었다. 역사는 철학적 설명보다 역사 전개의 운동양식으로부터 경험적으로 읽어낼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마르크스에게 있어서 "사유가 대상적인 진리를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는 결코 이론적인 문제가 아니라 실천적인 문제"였다. 철학의 목표는 영원한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 속에서 올바름을 파악하는 문제가 된다. 즉 영원한 진리는 사라지고 실천적 맥락 속에서만 진리가 존재할 따름이다. 그러므로 마르크스에게서 모든 비판적 활동, 모든 철학적 활동의 기초는 혁명적 실천이었다. 근대 철학이 추구하는 "영원한 진리"는 마르크스의 시각에서는 잘못된 시도였다. 그는 자기 사유의 진리성을 대상과 일치하는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현실성, 힘, 차안성을 실천 속에서 증명하는 문제로 보았다. 인간의 주체는 인간의 활동적 생활 과정, 즉 사회적 관계 속에서 파악된다. 그리고 그 주체는 사회적 실천을 통해 만들어지는 사회 관계 속의 구성물이다. 마르크스는 주체를 출발점으로 인간의 본질을 관념이나 정신에서 도출하는 관념론과 투쟁하는 과정에서 주체 개념을 물질적/사회적 관계로 환원했다.
유물론적 기초 위에 물화(物化)된 사유의 실천 개념은 더 이상 진전할 수 없었고, 난관에 빠지게 되었다. 오늘날 공산주의 국가가 몰락하는 원인이 된 것이다. 하버마스가 지적한 바와 같이 "창조적 자기실현이라는 의미의 자기활동이라는 모델과 사회적 노동의 동일화는 기껏해야 수공업적 활동의 전형을 낭만주의적으로 변형시킬 때에만 설득력을 가질 수 있는 것이었다." 마르크스 전통의 사회비판 이론가들조차도 사변적 이성의 비판적 힘을 다시 끌어들이지 않고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헤겔과 마르크스를 융합하여 사회비판이론을 수립하였던 것이다.
역사적 맥락에서 이성의 시대를 화려하게 장식하던 유럽의 한 복판에서 세계1, 2차 대전이 일어나고 문화에 대하여 낙관론적 사유에 젖어있던 세계의 지성은 아포리아(難關)에 처하게 되었다. 집권적이며 합목적성에 근거한 이성에 대한 비판이 더욱 거세게 일어났다. 세계2차 대전 중 독일의 프랑크푸르트 학파가 미국으로 대 이동을 하면서, 그곳에서 호르크하이머(Max Horkheimer)와 아도르노(Theodore Adorno)는 [Dialektik der Aufklarung] (계몽의 변증법)을 함께 엮어 출판하면서 계몽기가 가져온 이성의 몰락에 관하여 지적하였다.
그들은 [계몽의 변증법]에서 인간은 비판이성을 통해서 수행했던 계몽이 자신을 비판하는 일에 있어서는 무력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사유하는 이성이 도구적 이성으로 몰락하는 것을 방치할 수밖에 없는 계몽이성의 근저에는 [자기보존]이라는 정신의 본능 때문이다. 계몽은 처음부터 '자기보존'의 충동에 힘입고 있으며, 이 충동은 이성을 불구로 만든다. 헤겔의 절대이성 또한 처음부터 이성의 자기보존 본능 아래 있었기에 자기비판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이것은 이데올로기의 퇴보를 이미 예고했던 것이다. 자기보존의 충동은 이성을 목적합리성, 자연 지배적 합리주의와 본능지배의 형태로 나타난다. 이것이 곧 도구적 이성을 요청하기 때문이다. 도구적인 것으로서의 이성은 자기보존을 위해 권력에 동화하면서, 자기 비판의 힘을 포기하였다. 합리적 이성이 외적으로는 자신을 주체로 자연을 객체로 정립하여 발전시킨 사회, 내적으로는 이성을 주체로 인간의 다른 모든 부분을 비판적 이성의 대상으로 전락시키면서, 이제 현대사회는 자신을 주체로 타자를 객체로 만들며, 획일화된 지성의 틀에 가두어 버린다. [자기보존]의 본능아래 자연의 두려움에서 벗어나고자 자연을 파괴시킨 모든 시도는 자기파기로 이어지고 있다. 자연에 담긴 미지의 초월성을 제거함으로 인간은 자연의 공포로부터 면제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사물을 개념에 붙들어 맨다. 살아있는 사물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하나의 개념으로, 그리고 개념에서 기호로 전환시키고, 기호로서의 문자는 과학으로 나아간다. 기호로서의 언어는 종합예술로도 복원되지 않는다. 언어는 자연을 증식하기 위한 계산의 도구로 전락하게 되고, 과학문명을 통해 양적 대량생산을 추구한다. 근대가 시작되던 첫걸음에서 데카르트의 확실성이 수학에서 시작한 이래 계산될 수 없는 것은 믿을 수 없는 것, 확실하지 않은 것, 존재라고 말할 수 없는 것, 가상적인 것이 되었다. 숫자는 계몽의 경전이 되었고, 삶의 고유한 존재는 현존재와 실재라는 구별만 남고 나머지 모든 구별은 제거되었다. 자연은 단순한 객체가 되고, 인간의 객체화된 자연의 통일성을 요구하면서 교환가치로 환원시킨다. 산업혁명은 객체화된 사물들의 대량생산을 통한 잉여가치를 축척하면서, 문명은 이제 인간의 정신마저도 물화(物化)시킨다. 계산가능성과 유용성의 척도에 들어맞지 않는 것은 계몽에게는 의심스로운 것이었다. 인간은 새로운 야만에 빠져들게 되고, 사유가 지니고 있던 비판적 개념조차도 박탈당하게 된다. "정신의 속성은 물화에 대한 부정이지만, 정신이 문화상품으로 고정되고 소비를 위한 목적으로 팔아 넘겨지는 산업사회에서 정신을 소멸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여기서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프로테스탄트 교회를 향하여 "신앙의 절대적인 기초가 되는 진리의 초월적 원리를 선사시대처럼 직접 문자 자체에서 발견하고 그리고 이 문자에 상징적 힘을 다시 부여하려는 프로테스탄트 신앙운동의 시도는 성경말씀이 아닌 문자에 대한 맹종으로 끝났다"고 비판하고 있다. 프로테스탄트 정신이 추구했던 개혁은 이성의 사유에 종속하는 것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뒤이은 교회의 모습은 성경의 문자에 대한 맹종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그들이 말하는 문자와 말씀의 차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들은 계몽의 변증법, 즉 부정의 변증법을 통하여 기존의 모순을 드러내고, 자연과 화해하고 있는 해방된 사회를 암시적으로 환기시키려고 하였다. 이러한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의 전통은 하버마스가 승계하여 발전시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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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항해를 시작하며
우리 시대를 해독하려는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읽혀지지 않는 어려움은 어디에 기인하는 것인가? 정체성을 상실한 삶의 표현들이 난무하고, 그 동안 일구었던 지적 토양이 불모지로 변해버린 현재의 상황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가? 규율과 전통이 참담하게 무너진 사회는 어디를 향해 가는 것인가? 오늘날처럼 혼란스러운 인간 사회에 희망이란 존재하는 것인가? 지금까지 인류를 지탱해온 정신은 무엇인가? 그리고 오늘 그 정신은 나름대로 역할을 감당할 수 있는가? 오늘날 지속적으로 펼쳐지는 낯선 세계의 출현은 인류의 역사를 불안과 혼란 가운데로 끌고 가고있다. 이제 새로운 시대라는 말, 한 때 모던 또는 현대라고 쓰여진 단어조차도 오늘의 현상에 그 의미를 부과할 수 없어 "포스트모더니즘" 또는 "포스트모더니티"라는 신조어가 등장하였다. 인류의 역사는 이제 탈현대적/탈역사적(?) 상황에 처하면서 그 중심을 잃은 채 미로에 빠져들고, 낯설음이 낯익음으로, 혼동과 무질서가 삶의 여정을 인도하는 길잡이로, 인위적인 환경이 자연스러운 것으로, 권력과 매스미디어가 지식으로 등장하는 시대를 맞이하였다.
새 천년을 맞이하는 역사의 전환점에서, 무질서와 혼란의 현상에 처한 '오늘의 시대' 또는 '현대'라는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어려움에 직면하게 된다. 과연 탈현대적 상황에서 '현대'라는 말을 해석할 가치가 있는가 하는 의문도 생겨난다. 한 언어의 뜻을 찾는 작업은 타당성이 있으며 그 뜻이 찾아질 수 있는가? 그 뜻을 찾는다는 것은 사변적 이성의 확실성에 근거하는 것인가, 아니면 감성의 영역에서 직관과 사변의 일치를 추구하는 것인가, 아니면 무의식의 감성에게도 해석되어지고 찾아질 수 있는 구조와 경험이 있다는 것인가? 합리적 이성의 영역에서, 또는 비합리성이나 감성의 영역에서 그 의미를 발견한다고 하더라도 그 의미는 불변하는 것인가? 그리고 그 언어의 뜻을 밝힐 실체는 분명한 것인가? 아니면 하나의 추상적 개념으로 정의될 수는 있는 것인가? "현대"라는 말은 역사적 한 시점을 지칭하는 말인가? 현대를 논하면서 고전적 학문의 형태와 논증을 사용하는 유효성은 있는가? 현대를 연구하는 것이 과연 학(學)이 될 수 있는가? 현대성에 관한 현상학적 기술은 가능한 것인가? 현대성이라는 언어가 보편성을 획득하는 동시에 이 보편성이 인식 구조의 틀로서 이해를 억압하고 강요하는 '언어의 전제'로 작용하게 되지는 않을까? 소쉬르가 '언어학에서 이룰 수 있는 일의 엄청난 공허함'을 보았다는 고백이 오늘 필자의 가슴에 절실히 와 닿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시간 우리의 위치를 '근사치 정의(定義)'를 통해서나마 밝히지 않을 수 없는 것이 현실이고 보면 인간의 학문은 늘 말/사물, 개념/실재, 그리고 이데올로기/실천 사이의 거리감과 괴리감으로 인하여 괴로워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오늘 "현대성이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이 바로 이런 괴리를 끌어안을 수밖에 없는 현실 속에서 이루어진 작업임을 고백한다. 이러한 상황을 전제로 할 때, 필자의 노력이 무의미한 작업으로 전락할 수 있음을, 또는 언어 유희로 그칠 수 있음을 인식하면서 시작한다.
우선 현대성에 관한 흔적을 찾는 일부터 시작할 것이다. (1) 지금은 고전이라고 불리우지만 당시에 현대라는 인식을 초래했던 역사적 사건들로부터 출발하여 루터의 종교개혁을 가능케 한 프로테스탄트 정신과 그 후에 예술의 부분에서 나타나는 미학적 논쟁을 먼저 살펴볼 것이다. (2) 데카르트 이후 코기토에 근거한 사변이성과 변증법적 이해, 그리고 인식론적 접근을 통해 포스트모던에 이르기까지의 대략적 사상사를 살펴볼 것이다. (3) 언어를 통하여 매개되는 상황에서 언어가 지니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인식이 가능한가 그리고 얼마나 그것이 오늘 우리에게 유효한가를 살펴보고, 현대성의 공시적 이해는 또한 얼마나 지역적 특성과 문화적 차이를 극복할 수 있는가, 다시 말해 랑그의 전제로 나타나는 공시성과 개인적 혹은 지역적 생활세계의 체험으로 얻어지는 빠롤의 언어 사이에 거리감은 해소될 수 있는 것인지, 아니면 구조주의 언어를 통해서, 혹은 상징적 언어나 신화를 통해서, 그것도 아니면 끝없는 해체의 모험을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얻을 수 있을 것인지, 다양한 물음에 답을 찾기 위한 언어-인식론적 접근을 시도할 것이다. 마지막 결론에서 현대성을 가능하게 하는 본질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현대성은 무엇인가?"에서 "현대성은 어디에 기인하는가?"라는 주제의 변화를 시도할 것이다.
II. 역사의 흔적을 찾아서
현대 또는 근대로 해석되어지는 '모던'이라는 말은 수용미학자인 한스 로버트 야우스(Hans Robert Jauss)에 의하면 라틴어 'modo'로부터 파생된 modernus에서 시작되었다. 그것은 단지 '막' '오늘의' 또는 앞선 시간과 구별하여 '최근의'라는 의미를 지닌 부사이다. 이 단어의 기원은 5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주후 500년경에 로마가 기독교를 공식적으로 인정한 시점에서 카지오도루스(Cassiodorus)가 처음으로 modernitas/antiquitas라는 대립쌍을 통해 기독교적 현대와 이교도적 과거를 구분하기 위하여 사용되었다. 즉 새로운 것과 낡은 것이 교차하던 시기에 그 구분을 위해서 사용된 것이다. 과거와 현재는 동질적이라고 여겨지는 특정한 특성들을 통해서 과거와 다른 새로운 것이라는 자의식이 관철되기 시작한 것이 바로 이 시기이다.
그러나 모던이라는 말은 역사가들에 의해 일반적으로 15세기 말 이후 근본적 변화의 상황에 있었던 유럽의 역사를 지칭하고 있다. 중세로부터 모던으로의 이행은 급격하게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 급격한 변화를 이루는 획기적인 전환점은 르네상스, 종교개혁, 그리고 신대륙 발견으로 이해될 수 있다. 코셀렉은 오늘날 영어의 모던 타임스(modern times)와 프랑스어의 텅 모데른느(temps modernes)는 1800년경을 중심으로 이전의 3세기를 의미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새로운" 시대 또는 "모던 시대"라는 표현은 역사의 연대기적 의미를 상실하고 "새로운"이 강조되는 반대의미를 획득하고 나서야 비로소 형성될 수 있다고 말하며, 모던(현대)은 미래를 향해 살고 있고, 미래의 새로운 것에 개방되어 있는 시대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먼저 르네상스, 종교개혁, 그리고 신대륙의 발견이 어떻게 모던의 흔적을 남기게 되었는가 살펴보는 것이 바람직할 일일 것이다. 여기서 획일적인 역사적 의미를 일정한 맥락주의적 입장에서 관찰하기보다는 다양성과 상이성이 함께 공존하였던 르네상스 운동 가운데 필자가 이해하는 범주 안에서 다루게 될 것이다.
역사적으로 르네상스는 중세의 권위를 부정하고 인간 자신에게서 새로운 학문의 길을 열고자 하였다. 전통적 교회의 권위를 부정하고 기독교가 공인되기 이전 그리스-로마 문화가 꽃 피운 인문학(studia-humanitatis)을 부흥시키려는 노력이 곧 '고전으로 돌아가자'는 구호와 함께 시작되었다. '스투디아 후메니타티스'는 키케로나 겔리우스 등 고대 로마의 저자들에 의해 일반적 의미의 교양 혹은 문학 교육에 적용되었으며 14세기 말 이탈리아 학자들에 의해 회복되어 15세기에 '문법,' '수사학,' '역사학,' '시,' '도덕철학'을 의미하게 되었다. '스투디아 후메니타티스'는 중세 교육의 중요한 과목들인 수학, 천문학, 의학, 법학, 신학, 논리학, 자연철학, 형이상학을 제외하였다. 이러한 사실에 대하여 크리스텔러(P. O. Kristeller)는 당시의 르네상스 휴머니즘이 그 시대의 철학, 과학 혹은 전반적 학문과 동일시하려는 거듭된 시도에 대한 저항 또는 반증으로 보여진다고 주장하였다. 고전학에 대한 권위로 인하여 그들은 라틴 저자들의 글과 헬라 저자들의 글을 번역하다가 얼마 후 철학 연구가 스투디아 후메니타티스 운동에 포함되었고 계속해서 후메니타스(humanitas) 운동으로 발전되었다. 그것은 이제 고전의 번역과 더불어 인간, 인간의 존엄과 우주에서의 특권적 위치가 연구되고 강조되는 계기가 된 것이다.
이제 권위적 신적 통제를 벗어나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진 문화와 역사를 재현하려는 움직임이 시작된 것이다. 그 기반은 성경의 계시가 아니라 헬라의 형이상학적 기반이며 자율적 이성의 토대를 낳게 하였다. 스투디아 후메니타티스는 라틴어 연구에서 헬라어 연구로 그리고 문화영역에서 철학을 포함한 인간에 대한 집중적인 연구로 이어졌고, 동시에 진리를 찾으려는 노력이 함께 하였다. 우리가 진리를 알 수 있을까? 피코(Gianfrancesco Pico)는 '진리의 요소는 모든 시대, 장소, 종교의 사상가들에게서 발견된다'고 하는 신념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900개의 명제>에서 진리는 다수의 학자와 학파들에서 찾아진다고 주장하는 한편, "진리 그 자체가 전체적으로 이해되도록 진리를 제시한 사람은 과거에도 없었고 우리 뒤에도 없을 것이다. 인간의 능력으로 감당하기에 그것은 지나치게 거대하다"고 진술했다.
르네상스 운동 중에서 국지적이긴 하지만 자유공화국의 이상을 꿈꾸었던 15세기 초의 플로렌스 지역에서 "시민적 휴머니즘(civic humanism)"이란 용어가 사용되었다.
새로운 학문의 발달과 시민정신의 시작은 비교적 전통의 영역에 충실했던 예술 부분에도 점점 더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종교적 토대를 버리고 인간 이성에 근거한 미학의 토대를 세우려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이러한 정황은 17세기 미학에서 신구 논쟁을 불러일으키는가 하면, 칸트에 이르러 비판이성이 진리(순수 이성비판)와 덕(실천 이성비판)과 미(판단력 비판)로 구분되어 분화되기에 이르렀다. 이제 르네상스의 작업은 한편으로는 종교개혁의 영향과 연관되어 시민사회를 향하는 출발점이 되어 18세기 프랑스 혁명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운동은 신적 권위를 상징하던 루이 16세를 왕좌로부터 단두대로 보냄으로 시민사회를 이루게 되었던 것이다. 억압된 주체가 타력에 의해 지배되는 구조를 타파하고 자율적 사회를 성취하게 되었고, 집권적이고 통제적인 권위가 무너지면서 그 힘을 시민전체가 함께 공유하게 된 것이다.
루터의 종교개혁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는 억압된 자신의 소리를 듣고 있었다. 신앙과 의(義)가 통합적 권력의 틀에서 상품화되어 몇 푼의 화폐(免罪符)와 교환되는 상황에서 참된 하나님의 의를 추구하였다. 당시 상황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내부에서 끊임없이 반성을 촉구하는 주체는 루터로 하여금 절대권력에 항거하도록 촉구하였다. 종교개혁은 왜곡된 절대권력의 신화로부터 탈출을 의미하며 예레미야와 같이 고독한 투쟁을 알리는 것이었다. 그는 내부의 들끓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절망 중에 있었다. 그러나 그가 말씀을 읽을 때에 새로운 힘을 얻게 되었다. 말씀은 그의 정신에 힘을 불어 넣었다. 단순히 읽던 성경의 언어가 살아있는 역동적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해되면서 루터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전환점에 서게 되었다. 새로운 시대의 지평을 여는 루터의 비전은 세계의 비전이 되었고 그가 발견한 말씀은 역사를 창조하는 힘이 되었다. 즉 루터에게 나타난 말씀이 바로 창조가 된 것이다. 오늘 루터의 "신앙으로 말미암는 의"는 다시 고정된 언어의 기능만 남고 말씀의 위력은 사라진 채, 하나의 유물로서 개신 교회를 지탱하고 있다. 언제 그 유물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흘러내릴지 모른다는 기적을 바라보면서, 말씀의 힘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유물의 기적을 의존하는 신앙만이 전해지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주권을 자신의 것으로 취하는 교황을 대항하여 <95개조의 반박문>을 내걸고 투쟁한 것이다.
루터의 시편 강해와 로마서 강해를 통해서 자신 안에 역동적 정신의 실재를 발견하였다. 그것은 "의인인 동시에 죄인"이라는 삶의 역설적 상황이었다. 자기 자신의 의를 바라보는 자는 하나님 앞에서 여전히 죄인이요,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신앙이 하나님 앞에서 의로 인정을 받는다는 것이다. 자신의 실재적 상황에서 모습을 관찰해 볼 때 죄인일 수밖에 없는, 자신을 극복하고 신의 진리에 도달하려는 노력이 실패로 끝났음을 인식하는 자기 비판적 성찰은 늘 자신을 실패자로 바라보는 날카로운 정신의 자기 반성이었다. 하나님의 정의는 상황에 처한 인간의 활동이 충족시킬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말씀을 읽으면서 용서와 화해를 발견하였다. 그것은 단지 자신의 위안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감추어진 하나님, 즉 계시의 하나님을 발견한 것이다. 그것은 영광의 하나님이 아닌 십자가에서 고난 당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이었다. 감추어진 하나님, 고난과 고통 속에 십자가가 그 깊이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가 생각했던 영광의 하나님, 권능의 하나님, 사유의 하나님, 도덕의 하나님을 통해서 구원을 요청하였던 노력이 무너지고, 오히려 고난 가운데 감추어진 하나님의 사랑을 통하여 새 생명의 기쁨과 환희를 경험한 것이었다. 십자가는 감추어진 하나님을 드러내는 계시적 사건이 되었다. 그리고 이 계시는 신앙의 역동적 힘이 되었다. 자신의 부정을 통해서 긍정에 이르는 하나님의 역설적 은총, 그 안에 넘치는 사랑의 깊이를 발견한 것이다. 이제 그가 신앙하는 것은 하나님의 고난이 우리의 생명이라는 것을 믿는 것이다. 고난은 자기 부정을 통해 자기 초월적 긍정으로 변화되는 것이다. 새로운 피조물, 자기 변혁을 통해 이루어지는 전적인 변화를 지향하는 신앙은 부정과 초월의 역동적 관계를 지속하는 것이다. 끊임없는 자기비판을 통해 자기 극복을 지향하는 신앙의 성찰은 프로테스탄티즘을 가능하게 한 것이다. 이 프로테스탄티즘을 가능케 하는 정신, 끊임없이 죄인과 의인의 역동적 관계를 유지하는 정신은 다름 아닌 프로테스탄트 정신인 것이다. 루터의 프로테스탄트 정신은 역사적 프로테스탄티즘을 가능케 하였다.
루터는 역동적 신앙의 힘에 의지하여 종교 개혁을 일으켰다. 그가 싸워야 할 이데올로기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이성의 하나님으로서 그는 십자가의 하나님, 감추어진 하나님의 개념을 통하여 십자가의 신학을 이야기하였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이성의 사유를 통해서 알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 모세에게도 여호와는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자가 없음이니라"(출 33:)고 대답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빌립이 예수께 다시 물었을 때, "나를 보는 사람은 또한 나의 아버지를 보는 것이다"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광의 하나님이 아니라 고난의 하나님을 본다는 것이다. 플라톤의 철학적 형이상학적 신 개념은 하나님이 아니다. 이성의 사유를 통해서는 하나님에 도달할 수 없다고 단호하게 거절하는 것이었다. 루터의 프로테스탄티즘은 바로 이성의 사유가 만들어내는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이다. 이것은 칼빈에게도 나타나는데 이성을 우상 제조공장으로 표현한 것이다. 하나님은 객체적 대상으로서의 한 존재가 아니다.
루터는 중세 카톨릭 신학자들이 형이상학의 기반 위에 세운 우상과 실천적이며 성례전적 우상들을 대항하여 싸웠고, 다른 한편 당시에 유행하는 낙관적 개인주의자들, 즉 르네상스 휴머니스트 중의 한 사람인 에라스무스와 투쟁하였다. 인간 자신을 우상으로 만들려는 모든 노력들 또한 루터에게 있어서는 거부해야 할 대상이었던 것이다. 이 땅 위에서 인간은 하나님께 의인이라 일컬음을 받을지라도 자신이 자신을 바라볼 때에서 여전히 부족함을 느끼는 죄인인 것이다. 루터는 이와 같은 견지에서 인간의 "노예의지"에 관하여 에라스무스와 논쟁을 벌였다. 인간의 이성은 주권적이 아니라 노예적이라는 것이다.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가 지적한 것과 같이 인간의 이성은 목적합리성을 지니고 있어서 도구적 이성으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다. 종교 개혁은 사유가 진리자를 알 수 없다는 것과, 권력을 개인이 착용하는 악마성, 그리고 신앙의 역동성을 교리의 틀에 묶어 감금하는 것에 대하여 반박하며 투쟁한 것이다.
신대륙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전통적인 억압으로부터 탈출하여, 미지의 땅, 아직 인류문화에 의해 길들여지지 않은 자연을 간직한 땅으로 나타났다. 인위적인 세계를 탈출하여, 억압과 권력의 사회구조를 벗어나 새로운 땅에서 자신들이 원하는 자유를 누리며 살 수 있는 여지가 마련된 것이었다. 청교도들이 그들만의 자유를 찾아 떠난 땅, 두려움과 낯설음으로 가득하였지만, 자유를 추구하는 신앙의 정신은 두려움과 낯설음을 희망으로 받아들이며 출항을 하였고 동료와 가족이 죽는 고통 속에서도 남은 자들의 미래지평을 열게 될 것이라는 희망아래 있었다. 그들 가운데는 옛 신앙을 회복하고 보존하려는 노력이 있었다. 새로운 것을 향한 발전은 결국 현대의 위기, 변화되는 곳에서 옛 것의 향취를 찾아가는 순례자의 노력이 함께 하고 있었다.
15세기 이후 현대는 새로운 것의 출현을 의미하는 그러면서도 그것은 단지 새로운 것을 새롭게 하기보다는 옛것의 향취를 체내에 간직하려는 노력이 있었다. 찬란했던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려는 것이다. 역사의 원점을 향해 가려는 것이다. 탈출은 자유를 추구하면서, 그 자유는 신화의 영광을 재현하는 것이다. 자유 정신의 출항은 계속 항해를 거듭하며, 17세기 말의 신구학파 논쟁에 이른다. 미학적인 면에서 신구학파 논쟁 (the Querelle des Anciens et des Modernes)의 쟁점은 고대인이 현대인보다 지적으로나 예술적으로 더 우수한가 그렇지 아니한가에 관한 것이었다. 페로(Charles Perrault)와 퐁트넬(Fontenelle)이 과학에서의 진보개념을 문학과 예술에 적용시키는 것이 적합하다는 견해에서 출발하여 고대의 예술에 대해 자기 시대의 예술의 우월성을 선언하였다. 당시에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운동을 비롯하여 고전의 예술에 대한 동경심을 지니고 있던 고대 옹호론자들을 자극하면서 야기된 이 논쟁은, 비록 각 시대의 예술은 나름대로의 취향과 미개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똑같은 척도로 잴 수 없다는 합으로 끝났지만 진보에 대한 역사 모델을 제시함과 동시에 각 시대의 특수성이 인정되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즉 현대인들이 고대인들보다 더 멀리 본다는 것이 더 우세하다고는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논쟁은 고대에 대한 저항을 통한 차별성을 보여줌으로 모던에 대한 개념이 풍부해짐과 동시에 "현대적/고전적"이라는 용어 대립이 미학적 파벌 짓기를 위한 틀로 전환되었고, 기존 취미모델을 부정함으로 새로운 유형들이 창출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보들레르는 근대예술과 낭만주의의 동일시를 통하여 현대성의 이념과 혁신성의 가치에 새롭고 근본적인 강조점을 두었다. "무엇보다도 과거의 예술가들에게 알려져 있지 않았거나 멸시되어 온 자연의 측면들과 인간의 상황들을 아는 것이 필요하다. 낭만주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근대예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즉 예술이 이용할 수 있는 모든 수단들에 의해 표현되는 친밀감, 정신성, 색채, 그리고 무한성을 향한 열망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에게 낭만주의의 미는 가장 최근의, 가장 동시대적인 형식일 뿐 아니라, 과거에 행해졌던 모든 것과 실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보들레르의 시학은 혁신성, 새로움(novelty)의 탐구에 출발점이 되었다.
모더니티는 일시적인 것, 우발적인 것, 즉흥적인 것으로 예술의 반이며 나머지 반은 영원적인 것과 불변적인 것이다. 그렇게도 빈번히 모습을 바꾸는 이 일시적이고 무상한 요소에 대해서 당신은 그것을 비난하거나 무시할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것을 억압한다면 당신은 처음 죄를 범한 한 여성의 그것처럼 추상적이고 정의할 수 없는 미의 공허함 속으로 떨어지고 말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만일 하나의 특정한 모더니티가 고대성이 될 만한 가치가 있다면 그것으로부터 인간의 삶이 무심결에 그것에게 부여해 주는 신비스러운 미를 추출하는 것이 필요하다. 고대성으로부터 순수예술, 논리, 그리고 보편적 방법이 아닌 다른 어떤 것을 추구하는 이에게 화가 있으리라. 너무 깊숙이 과거에 잠겨 들어감으로써 그는 현재를 시야에서 놓치고 만다. 그는 환경에 의해 주어진 가치들과 특권들을 비난한다. 그러나 거의 모든 경우에 있어 우리의 독창성은 시대가 우리의 감정들을 각인해 주는 낙인으로부터 나온다.
보들레르의 모데르니테는 하나의 관념으로 현대성의 역사에서 질적인 전환점을 이룬다. 그에게 현대성이란 통상적이고 보편적인 기술적 기능을 상실한 것이다. 그러므로 "현대성"은 고대 또는 전통적인 것들과 현대의 새로운 것들의 체계적인 비교를 불가능하게 한다. 보들레르가 의미하는 현대성은 어떤 것의 "현재성" 속에서 현재하는 것, 그것의 순수하게 순간적인 성질 속에서 현재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그것의 가장 구체적인 직접성 속에서 즉 그것의 현재성 속에서 역사성에 대한 의식을 통해 역사의 흐름을 뛰어넘을 수 있는 역설적 가능성으로 정의될 수 있다. 예술의 가장 일반적인 법칙을 구성하는 "미의 영원한 반"은 단지 현대적 미의 경험을 통해서만 무상한 삶(또는 후대의 삶)으로 가져올 수 있다. "현대적 미"는 초역사적인 가치들의 영역 속에 포섭되지만 미래의 예술가들에게 모델이나 모범으로 봉사하게 됨으로 "고전" 또는 "고대성"이 된다. 여기서 주의 깊게 살펴 볼 수 있는 말, 즉 우리의 독창성은 시대가 우리들의 "감정들을 각인해 주는 낙인"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이다. 미학은 단지 이성의 그물에 갇히는 것이 아니라 감정들이 이성의 체계를 비집고 나와 각인해 주는 낙인들에 의존한다. 새로운 창조적 측면에서 예술 창조는 예술가의 상상력을 제외하고는 어떤 동맹자도 갖지 못한 모험이자 드라마가 됨으로 온갖 위험과 난항으로 가득 차게 된다. 그러므로 현대성을 지닌다는 것은 당대를 형성하는 구조적 힘에 저항하는 용기와 미래지평을 바라보는 믿음의 행위이다. 위험과 난항으로 가득 찬 모험을 이끌고 주도하는 주체의 힘은 어디에 기인하는가? 주체는 이미 주어졌고 이 세계에서 역사의 흔적을 발견하고 현재적 구조의 억압적 틀에 저항하고 미래를 확신하는 실천적 행위를 가능케 하는 이 원동력은 어디에서 오는가? 뒤의 결론에서 답할 것이다.
모더니티의 현상 가운데 칼리니스쿠가 지적한 대로 아방가르드, 데카당스, 키취 등을 들 수 있다. 아방가르드(Avant-garde)는 에티엔 파스키(Etienne Pasquier, 1529-1615)의 [프랑스 탐구(Recherched de la France)]라는 글에 처음 등장한다. 파스키가 "그 당시에는 무지에 대항하는 영광스러운 전쟁이 진행되었는데, 그 전쟁에서 세브(Sceve), 베즈(Beze), 그리고 폴레티에(Pelletier) 등이 아방가르드가 되었다고 말하고 싶다"는 글에서 보여주고 있는 것과 같이 아방가르드는 "무지와 싸우는 전쟁"의 용어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아방가르드" 개념은 신구논쟁을 거쳐 18세기로 넘어오면서 프랑스 혁명의 여파 속에서 "시민전쟁의 언어와 이론, 그리고 실천"과 관계를 맺게 되었다. 따라서 문학 예술적인 맥락에서 낭만적인 아방가르드 개념을 사용하는 것 그리고, 사회주의 혁명적인 정치학의 언어로부터 도출되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고 칼리니스쿠는 말한다. 이는 19세기 생시몽(Saint-simon)과 그의 제자 올린드 로드리그(Olinde Rodrigues)에 의해 현대적 기원을 갖게 된다. 생시몽은 "새로운 숙고를 통해 나는 예술가들이 선두에 서서 일들을 움직여 가고 그 다음으로 과학자가 뒤따르며 산업가는 이 두 계급의 뒤를 따라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는 편지를 [생시몽이 법관들에게 보내는 편지](1820)에 기록하고 있다. 생시몽에게 예술가는 '상상력의 인간'이며 미래를 창조할 수 있는 존재이다. 그렇다면 생시몽에게 상상력의 인간들, 예술가들이야말로 "과거로부터 황금시대를 가져와 미래의 세대들에게 선물로 전달해 줄 것"이라고 말한다. 생시몽의 상상력의 인간은 과거의 황금시대에서 그 피를 수혈 받는다. 과거의 황금시대, 즉 고전이 되는 과거의 흔적은 미래 지평을 여는 모범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곳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풍요의 그림을 제시함으로써" ... "문명의 축복을 찬미할 것이며" ... "그들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예술, 웅변, 시, 그림, 음악 등의 수단을 사용할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 생시몽이 언급하는 아방가르드 예술가는 사회적 번영을 향한 운동의 전선에 서게 됨과 동시에, 예술가는 자유로운 존재라기보다는 이상적 사회를 향하여 교육 프로그램을 수행하는 전투적 예술가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뒤를 이어서 아방가르드 메타포의 문화적 사용은 근대적인 정치사상과 미학 양자 모두에 있어서 급진주의로 향하게 된다. 19세기 유토피아적 개혁론자, 사회주의자, 그리고 무정부주의자들이 참여적이고 전투적이며 정치적인 책임을 지려는 예술을 요구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세기 아방가르드 운동은 진보적인 정신과 투쟁의 정신을 소유하고 있었고 비록 유토피아적이긴 하였지만 미래 지평을 열기 위한 정열로 가득 차 있었다.
이러한 아방가르드 운동은 1870년대의 선진적인 예술가들이 가졌던 새롭고 미적으로 혁명적 정신 상태를 보여주는 예술가들 사이에 등장한다. 아르투르 랭보(Arthur Rimbaud)는 사회주의적이며 무정부주의적 사고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시는 앞서 있을 것이다. ... 우선 시인들에게 새로운 것을 요구하자. 이념과 형식을" 즉 시인은 미래 지평을 바라보면서 앞날에 필요한 이념과 사상을 새로운 언어를 통해 현재의 상황에 투입시킴으로 새로운 길을 제시할 때 비로소 시는 자기 역할을 감당하고 전진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될 경우 시는 전진할 수 있을 것이다. 퇴로에서 늘 머뭇거림, 아니면 상황에 맞지 않는 조숙한 언어는 키취(Kitsch)로 전락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이 새로움을 추구하는 아방가르드 운동은 20세기에 들어서면서 "과거의 황금시대"를 거부하면서 새로움의 숭배에 의해 규정되는 모든 새로운 유파를 지칭하게 될 만큼 포괄적으로 변모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는 곧 아방가르드의 죽음을 선포하게 되었다. 레너드 마이어는 그의 책 [음악, 미술, 그리고 상](1967)에서 "아방가르드 개념은 목표 지향적 움직임을 함축한다... 만약 르네상스가 끝났다면 아방가르드도 끝났다"고 선언하였다. 이념, 사상, 사회주의나 무정부주의를 목적으로 투쟁하며 전진하였던 아방가르드 예술은 이제 포스트모던의 탈 역사적 상황에서 그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방가르드를 가능케 했던 호전적 투쟁정신은 모더니티의 지적 상대주의에 의해 대체됨으로 사회문화 전반에 흡수되었다. 아방가르드의 죽음은 이제 아방가르드가 하나의 유파로서는 생명을 다했지만 여전히 문화 전반에서 지적 토양으로 새로운 세계를 향한 저항정신으로 유효구조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간헐적으로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한 네오-아방가르디아, 아방가르드의 실험정신을 중심으로 한 실험적 아방가르드, 그리고 지적 아방가르드 운동으로 나타나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상황은 최근에 발표된 여러 글에서 "아방가르드"에 관한 글들이 "모더니즘"으로 읽혀지고 또한 동의어로 사용되어지는 것을 볼 때에 더욱 분명해 진다. 20세기 후반에 등장한 현시대적 정신은 아방가르드와 분리할 수 없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기 때문이다. 합목적성은 사라졌지만 나름대로 새로운 지평을 열기 위해 미래 지평을 현재에 투입하고 탈 현대화하려는 노력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III. 그물을 던지며
현대성의 담론을 시작하면서 우선적으로 데카르트(Rene Descartes, 1596-1650)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데카르트는 인식론에 있어서 생각하는 자아에 근원을 둔 확실성의 시대를 열어 놓음으로 역사적 모더니즘의 시조가 되었다. 헤겔이 그의 <역사철학>에서 데카르트를 근대정신의 여명기를 상징하는 영웅으로 묘사한 것은 데카르트가 순수사유의 해방자로 나타나면서 역사의 전환점을 마련하였기 때문이다. 그가 1637년에 "나는 내가 가장 확실한 것으로 인정하지 않는 어떤 것도 참이라고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규칙은 혁명적 사고의 가치를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 당시의 사람들은 교회의 권위와 스콜라 철학의 권위 아래서 살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스콜라 철학은 이미 초대 교회의 전통에서 떠나 아리스토텔레스로의 철학으로부터 유출되어 중세 교회에 의해 승인을 받은 공인된 철학이었다. 스콜라 철학은 토마스 아퀴나스에게서 보여지고 있듯이 우주론적 위계질서를 확립하고 목적론적 세계관에 중심을 두며 모든 사물의 보편성을 추구하는 철학이었다.
데카르트에 의해 모더니즘은 전통을 교회의 권위 밖에서 생각하고 글쓰기를 시작한 것이다. "Cogito"를 통하여 지식의 성찰은 자신의 반성이며, 신은 자신의 사유의 반영된 흔적이고 대상이 되었다. 사유의 주체(subject)로서 자아는 의식 속에서 그것의 존재 양식을 발견한다. 대상적 사물들을 주체인 자신과 함께 재구성함으로 표상성을 구현하고, 이 표상성을 통하여 현존재의 특질을 부여받는다. 사유가 정신의 일부가 아니라 사유가 존재를 논증하고 규명하게 됨에 따라 근대의 비극이 출현하게 된다. "나"라는 존재는 순수 사유에 지나지 않게 되고 육체의 감정이나 무의식의 세계는 사유로 인하여 버려지게 된다. <코기토>의 확실성은 지적 본능의 우월성을 제시하였고, 인간의 감정이나 육체 따위는 어둠에 감금되었다. 여기서 신은 지적 본능의 인증자가 된다. 사유의 세계는 형이상학의 원천으로서, 수학적 사고의 근원으로 신을 요청하게 된 것이다.
이제 현대성의 시작은 신이 인간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신의 현존재를 규명하게 된 것이다. 대상에 대한 자아의 우월성이 드러나고 신을 사유의 정점에 놓음으로 객체화시키고 대상화함으로 루터가 일으켰던 프로테스탄티즘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이제 사물은 자아를 통해서 재현되고 의미를 지니게 된다. 자아는 세계가 인식되고 통합되는 공간이 된다. 그러나 문제는 자아의식에 인식된 표상의 세계와 객관적인 실재의 세계가 일치한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하는가? 하는 것이다. 즉 감각적 이미지와 사물 자체 사이에 차이를 어떻게 극복하는가? 일치성을 추구하기 위하여 데카르트는 질적인 속성을 제거하고 양적인 속성을 남겨 두었다. 확실성을 위한 사유의 투쟁은 양, 크기와 수를 토대로 삼게 된다. 사유하는 존재는 수학적 공리나 논리적 이성의 틀에서만 확실성을 유지할 수 있게 됨으로 역동적 삶의 질을 제거하게 된 것이다.
영국의 경험론 철학이라 불리는 존 로크(John Locke, 1632-1704)나 데이빗 흄(David Hume, 1711-1776)이 테카르트의 인식론에 문제가 있음을 발견하였다. 즉 그들의 생각으로는 인간의 인식은 본질적으로 합리적이 아님을 직시한 것이다. 경험을 통해서 전달되는 인식과 대상이 완전히 일치하는 일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데카르트는 신 인식을 통해서 수학적 사고의 형이상학을 확증하였는데, 경험론자들은 경험하는 세계를 통하여 형이상학에 이를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여기서 실재하는 않는 모든 형이상학적인 것들에 대한 회의가 일어난다. 이러한 로크와 흄의 뒤를 이어 독일 관념론의 철학자 칸트(Immanuel Kant, 1724-1804)가 출현한다.
칸트는 영국 경험론이 제시한 회의적 입장에서 시작한다. 칸트의 경험으로서의 인식의 영역을 '현상계'라고 부르며, 인식은 이 영역 속에만 제한하면 인간이 선천적으로 갖고 있는 인식 능력의 공통성에 의해 그 나름대로 객관성을 끄집어 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칸트는 사물을 인식하는 방법은 동일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한편으로 그는 인간의 인식 능력으로는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이 절대적인 대상물로서의 본질을 '물(物)자체'라고 부르며, 두 영역을 분명하게 구분지었다. 따라서 칸트가 말하는 '현상'이란, 한 편에 세계의 객관적 진리로서의 물 자체의 세계가 있어 이것이 인간의 인식의 장면에 드러난 만큼의 모습이라는 부정적 뉘앙스를 지니게 되었다. 데카르트의 확실성은 무너졌지만, 사유하는 주체는 인식이 난제(aporia) 가운데에 처하면서도 여전히 주인으로 위치를 다지고 있었던 것이다. 칸트는 비록 사유하는 이성, 즉 오성이 비록 미성숙할지라도 용기를 가지고 사용하겠다는 것이 계몽이라고 단언한 것이다.
계몽이란 인간이 자기 스스로의 원인에 의한 미성년 상태 밖으로 이행하는 것이다. 미성년 상태란 타인의 지도 없이 자신의 오성을 사용하지 못하는 무능력이다. 이 미성년 상태가 자기 스스로의 원인에 의해서 초래된다는 것은, 이 미성년 상태의 원인이 오성의 결여에 있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지도 없이 자신의 오성을 사용해 보겠다는 결심과 용기의 결여에 있을 때를 말한다. 지혜 있게 되는 것을 주저하지 말라! 용기를 가지고 너 자신의 오성을 사용해 보라! 이것이 바로 계몽의 좌우명인 것이다.
칸트의 계몽은 자아의 고유한 판단을 대리하던 타인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는 것이다. 계몽은 타자(전통)의 선입견에서 벗어나는 것이고, 타자의 권력(지적 권력이든 아니면 사회적 구속이든)으로부터 자유를 선언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이 운동의 마지막 귀착점은 사회 또는 공동체의 해체로 끝나게 되는 것이다. 칸트 자신도 이런 위험의 결과를 알고 있었다. 그는 오성의 사용을 두 가지로 구분하여 말한다. 이분법에 따르면, 오성의 사용은 공적인 경우와 사적인 경우로 나뉜다. 사적 오성의 경우 칸트는 개인의 자유가 제한 받아야 한다고 본다. 공동체에서 불합리하고 불공정하다고 판단되는 일이 있더라도, 소크라테스가 '악법도 법'이기에 공적 질서를 위해 순응한 것과 같이, 일단 법에 따라야 한다. 그러나 공적 이성 사용은 절대적으로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 "내가 그러나 오성의 공공적 사용이라는 말을 가지고 의미하는 것은 각각의 개인이 학자로서 독자 세계의 사람들 전체 앞에서 오성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결국 칸트는 공동체의 질서를 위하여 실천이성 비판을 비롯하여 도덕철학에 몰두하게 된다. 실천이성비판은 양심을 통한 신의 확증이었다. 순수이성비판을 통하여 사유이성으로는 신을 알 수 없다는 판결을 내린 뒤, 신의 부재는 곧 사회해체를 의미한다는 것을 자각하고 도덕적 신을 요청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판단력 비판을 통하여 데카르트에게서 배제되었던 심미적 기능을 회복하기 위하여 판단력 비판을 발표하였다. 또한 선험적 순수이성으로 출발하지만 인식의 영역은 무한한 사유의 공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경험하는 세계의 현상에 제한함으로 나름대로 도덕이성을 통한 신앙의 영역을 확보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이런 일련의 작업을 통하여 칸트는 인식을 사유하는 이성의 제한적 기능(감정의 영역을 이성의 틀)에 종속시킴으로서 데카르트의 <코기토> 영역 가운데 머물렀던 것이다.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1831)은 칸트가 내놓은 비판적 이성의 분석적 힘은 모든 것을 조작 가능한 대상이나 객체로 변형시킨다는 것을 관찰하였다. 또한 전통과 대립에서 생겨난 비판적 이성이 아이러닉하게도 역사성을 결여하고 있으며, 합리성의 추구로 인하여 도구적 이성으로 전락하고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헤겔은 독일에서 계몽의 이성은 관념론에 머무는 반면, 프랑스혁명은 계몽의 이성이 현실을 변혁시키는 힘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을 그가 튀빙켄에서 공부하는 동안 목도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이성의 반성이 추구하는 이념들은 현실과 유리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프랑스혁명에서는 이성이 역사적 현실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헤겔이 칸트에게서 배운 것은 감성에 대한 이성의 우위(優位)와 비판적 힘이었다. 칸트의 관념론에 역사성을 주입하기 위하여 헤겔은 순수 이성이 아닌 역사이성으로서 주체성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 주체성은 "자유"와 "반성"을 지니고 있다. 주체성이 지니는 자유는 역사적 현실에 대한 반성의 계기를 매개(媒介)로 삼는다. 헤겔 철학 정신의 생명은 부정의 힘에 있었다. 칸트의 비판이성은 이제 부정의 힘으로 역사적 현실에 적용되었다. 이성은 현실에 대한 대립, 모순, 부정을 통해서 절대 정신을 지양하는 것이다. 헤겔의 주체성의 원리가 관철되도록 만든 역사적 핵심사건들은 종교개혁과 프랑스혁명이었다.
헤겔에 따르면, 루터의 종교개혁은 주체성의 원리를 사회적, 정치적인 제(諸)관계에 도입시키는데 성공한 최초의 시도이다. 그것은 행위의 유일한 책임을 자유로운 주체에 두고, 전통적인 조직에 도전한 것이다. 루터의 성례전이 보여준 것은 떡을 떼고 나눔에 있어서 그리스도는 떡의 매개(媒介)에 의해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매질(媒質)에 의해서 연합된다고 하는 것이었다. 헤겔이 해석한 루터 교회는 개인이 성령으로 충만해 있다는 것을 알 때, 일체의 외면성의 관계들은 바로 이 사실에 의해서 폐기된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성직자와 속인과의 사이에는 구별이 없어지고, 교회의 모든 정신적 및 물적인 재산과 더불어 진리의 실질까지도 독점하고 있는 계급은 벌써 사라진다는 것이다. 루터의 성경번역은 바로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가장 내적인 주체성은 진리를 소유할 수 있는 자, 또 소유하여야 할 자로 인정을 받게 되었고, 이 주체성은 모든 인류의 공유재산이다. 헤겔은 "이제 인간과 신과의 사이에 일어나는 매개를 통하여 자기가 자유임을 의식한 정신의 객관적인 과정이야말로 신의 본질 그 자체임을 확인하면서 세속적인 것을 더욱 더 발달시켜간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러한 발달의 과정에서 절대적인 정당한 것은 먼저 사상 안에서 발견되어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칸트가 했던 것처럼 이성의 영역을 제외한 모든 영역을 이성의 발아래 놓았다. 이성의 우월, 그것은 전인격적 회심과 신앙을 의미했던 루터의 신학을, 이성의 명료함을 넘어 활동하시는 감추어진 하나님(계시의 하나님)을 주장하였던 루터의 십자가 신학에 나타나는 하나님을 절대이성으로 객관화시킴으로 "신의 죽음을 향하는 철학자" 또는 철저히 "인간의 이성 안에 내재화된 신"을 말하는 범신론적 철학자가 된 것이다. 여기에서 프로테스탄티즘과 독일의 사변적 현대사상은 길을 달리하고 있었다.
여기서 루터의 주체성, 즉 신을 사변화하고 객체화함으로 우상을 만들려는 시도에 저항하고 성경을 가두고 자신들의 권력을 위하여 사용하는 교황에 대하여 투쟁하며, 성례전을 성직자가 가로채고 신자들을 소외시키는 교회의 부조리를 고발하며 종교개혁을 일으켰던 프로테스탄트 정신을 헤겔은 사변적 이성의 중심에서 절대정신으로 대체시킴으로 인간의 이성 이외의 모든 부분들을 소외시키고 만 것이다. 현실 세계의 모든 것이 이성의 현실, 인식을 자신의 목적 합리성의 영역으로 이끌어감으로 발전을 지향하는 헤겔의 철학은, 현실적으로 보이지 않는 사변적 이성이 실체적이고 구체적인 현상세계의 역사를 변혁시킨다는 관점에서 볼 때에 이것을 하나의 선천(先天)주의 지배로 규정하고 경험주의의 권위를 회복하려는 철학자들에 의해 반론에 부딪치게 되었다.
셸링은 1841-1842년 겨울, Engels, Kierkegarrd, Bakunin, Burckhardt 등이 참석한 베를린 학회에서 "Die Philosophie der Mythologie und der Offenbarung"이라는 제목의 강연에서 헤겔 철학을 있는 사물의 자연적 속성을 부정한다는 관점에서 부정 철학(negative philosophy)이라고 명하고 자신의 낭만적 자연주의 철학을 긍정철학(positive philosophy)라고 명명하였다. 이러한 부정철학에 대한 반격은 실증주의에서도 함께 일어났다. 실증철학은 부정의 철학을 선험적 이성에 종속시키는 시도에 거부하면서, 경험을 인식에 있어서 최고의 지위로 높이는 것이었다. 아퀴나스 콩트의 실증주의는 이제 독립된 경험과학의 영역에서 사회학으로 발전하였다. 여기서 헤겔이 주장하는 사변적 주체성에 근거하여, "비이성적인 현실은 이성에 합치될 때까지 변혁되어야 한다는 이성=진리=현실이라는 도식은 위기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20세기 과학문명이 사회를 주도하는 산업문명 앞에서 이성은 그 본질적인 부정의 힘, 비판의 힘을 상실했으며 그 이차원적 사유가 일차원적 사유로 변해버렸다고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마르쿠제는 마르크스의 전통에서 지적하고 있다.
마르크스는 헤겔의 좌파에 속하면서 헤겔의 부정철학에 대한 반기를 들고, 반성개념이 생산개념으로 이데올로기를 실천으로 이행시키면서, "자아의식"이 "노동"으로 치환시켰다. 마르크스는 헤겔 철학이 지니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로서 주체와 객체를 나누었을 때, 주체의 인식이 있는 그대로의 대상을 인식할 수 있는가를 확인하고 증명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었다. 역사는 철학적 설명보다 역사 전개의 운동양식으로부터 경험적으로 읽어낼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마르크스에게 있어서 "사유가 대상적인 진리를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는 결코 이론적인 문제가 아니라 실천적인 문제"였다. 철학의 목표는 영원한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 속에서 올바름을 파악하는 문제가 된다. 즉 영원한 진리는 사라지고 실천적 맥락 속에서만 진리가 존재할 따름이다. 그러므로 마르크스에게서 모든 비판적 활동, 모든 철학적 활동의 기초는 혁명적 실천이었다. 근대 철학이 추구하는 "영원한 진리"는 마르크스의 시각에서는 잘못된 시도였다. 그는 자기 사유의 진리성을 대상과 일치하는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현실성, 힘, 차안성을 실천 속에서 증명하는 문제로 보았다. 인간의 주체는 인간의 활동적 생활 과정, 즉 사회적 관계 속에서 파악된다. 그리고 그 주체는 사회적 실천을 통해 만들어지는 사회 관계 속의 구성물이다. 마르크스는 주체를 출발점으로 인간의 본질을 관념이나 정신에서 도출하는 관념론과 투쟁하는 과정에서 주체 개념을 물질적/사회적 관계로 환원했다.
유물론적 기초 위에 물화(物化)된 사유의 실천 개념은 더 이상 진전할 수 없었고, 난관에 빠지게 되었다. 오늘날 공산주의 국가가 몰락하는 원인이 된 것이다. 하버마스가 지적한 바와 같이 "창조적 자기실현이라는 의미의 자기활동이라는 모델과 사회적 노동의 동일화는 기껏해야 수공업적 활동의 전형을 낭만주의적으로 변형시킬 때에만 설득력을 가질 수 있는 것이었다." 마르크스 전통의 사회비판 이론가들조차도 사변적 이성의 비판적 힘을 다시 끌어들이지 않고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헤겔과 마르크스를 융합하여 사회비판이론을 수립하였던 것이다.
역사적 맥락에서 이성의 시대를 화려하게 장식하던 유럽의 한 복판에서 세계1, 2차 대전이 일어나고 문화에 대하여 낙관론적 사유에 젖어있던 세계의 지성은 아포리아(難關)에 처하게 되었다. 집권적이며 합목적성에 근거한 이성에 대한 비판이 더욱 거세게 일어났다. 세계2차 대전 중 독일의 프랑크푸르트 학파가 미국으로 대 이동을 하면서, 그곳에서 호르크하이머(Max Horkheimer)와 아도르노(Theodore Adorno)는 [Dialektik der Aufklarung] (계몽의 변증법)을 함께 엮어 출판하면서 계몽기가 가져온 이성의 몰락에 관하여 지적하였다.
그들은 [계몽의 변증법]에서 인간은 비판이성을 통해서 수행했던 계몽이 자신을 비판하는 일에 있어서는 무력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사유하는 이성이 도구적 이성으로 몰락하는 것을 방치할 수밖에 없는 계몽이성의 근저에는 [자기보존]이라는 정신의 본능 때문이다. 계몽은 처음부터 '자기보존'의 충동에 힘입고 있으며, 이 충동은 이성을 불구로 만든다. 헤겔의 절대이성 또한 처음부터 이성의 자기보존 본능 아래 있었기에 자기비판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이것은 이데올로기의 퇴보를 이미 예고했던 것이다. 자기보존의 충동은 이성을 목적합리성, 자연 지배적 합리주의와 본능지배의 형태로 나타난다. 이것이 곧 도구적 이성을 요청하기 때문이다. 도구적인 것으로서의 이성은 자기보존을 위해 권력에 동화하면서, 자기 비판의 힘을 포기하였다. 합리적 이성이 외적으로는 자신을 주체로 자연을 객체로 정립하여 발전시킨 사회, 내적으로는 이성을 주체로 인간의 다른 모든 부분을 비판적 이성의 대상으로 전락시키면서, 이제 현대사회는 자신을 주체로 타자를 객체로 만들며, 획일화된 지성의 틀에 가두어 버린다. [자기보존]의 본능아래 자연의 두려움에서 벗어나고자 자연을 파괴시킨 모든 시도는 자기파기로 이어지고 있다. 자연에 담긴 미지의 초월성을 제거함으로 인간은 자연의 공포로부터 면제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사물을 개념에 붙들어 맨다. 살아있는 사물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하나의 개념으로, 그리고 개념에서 기호로 전환시키고, 기호로서의 문자는 과학으로 나아간다. 기호로서의 언어는 종합예술로도 복원되지 않는다. 언어는 자연을 증식하기 위한 계산의 도구로 전락하게 되고, 과학문명을 통해 양적 대량생산을 추구한다. 근대가 시작되던 첫걸음에서 데카르트의 확실성이 수학에서 시작한 이래 계산될 수 없는 것은 믿을 수 없는 것, 확실하지 않은 것, 존재라고 말할 수 없는 것, 가상적인 것이 되었다. 숫자는 계몽의 경전이 되었고, 삶의 고유한 존재는 현존재와 실재라는 구별만 남고 나머지 모든 구별은 제거되었다. 자연은 단순한 객체가 되고, 인간의 객체화된 자연의 통일성을 요구하면서 교환가치로 환원시킨다. 산업혁명은 객체화된 사물들의 대량생산을 통한 잉여가치를 축척하면서, 문명은 이제 인간의 정신마저도 물화(物化)시킨다. 계산가능성과 유용성의 척도에 들어맞지 않는 것은 계몽에게는 의심스로운 것이었다. 인간은 새로운 야만에 빠져들게 되고, 사유가 지니고 있던 비판적 개념조차도 박탈당하게 된다. "정신의 속성은 물화에 대한 부정이지만, 정신이 문화상품으로 고정되고 소비를 위한 목적으로 팔아 넘겨지는 산업사회에서 정신을 소멸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여기서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프로테스탄트 교회를 향하여 "신앙의 절대적인 기초가 되는 진리의 초월적 원리를 선사시대처럼 직접 문자 자체에서 발견하고 그리고 이 문자에 상징적 힘을 다시 부여하려는 프로테스탄트 신앙운동의 시도는 성경말씀이 아닌 문자에 대한 맹종으로 끝났다"고 비판하고 있다. 프로테스탄트 정신이 추구했던 개혁은 이성의 사유에 종속하는 것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뒤이은 교회의 모습은 성경의 문자에 대한 맹종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그들이 말하는 문자와 말씀의 차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들은 계몽의 변증법, 즉 부정의 변증법을 통하여 기존의 모순을 드러내고, 자연과 화해하고 있는 해방된 사회를 암시적으로 환기시키려고 하였다. 이러한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의 전통은 하버마스가 승계하여 발전시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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