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프로테스탄트사상사관련문제
19세기 프로테스탄트사상사관련문제
http://cafe.naver.com/modernth/1313
1. Schleiermacher는 그가 지은 책 종교론에서 종교에 대해서 어떤 견해를 펼쳤습니까?
슐라이에르마허의 종교론은 변증론에 입각해서 쓰여졌으며, 당시 정통주의 분위기 아래에서 생활습관화되어있는 종교에 대한 반기를 들고, 종교는 관습, 전통, 인습적인 것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에게서 종교는 출발한다고 주장을 하였다. 다시 말하면, 종교론에서 슐라이에르마허는 종교가 인간의 어떤 소질(Anlage)에서 일어나는지를 해명함으로써 종교를 멸시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종교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갖게 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는 당시 지식인들이 잘못된 종교관에 근거하여 종교를 멸시하였다고 보았고, 그들은 종교가 인간 외부로부터가 아니라 인간 내부로부터 발생하는 것임을 깨닫지 못하였다고 슐라이에르마허는 생각을 하였다. 역시 그는 종교라는 것이 형이상학이나 도덕이 아니며, 이 양자의 혼합도 아니라고 말한다. 또한 그에게 있어서 종교는 교의(Dogma)도 아니다. 교의는 형이상학이 종교에 혼합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슐라이에르마허는 종교의 본질을 이야기하기를 "종교의 본질은 사유와 행위가 아니라 직관과 감정이다. 종교는 우주를 직관하는 것이다." 이런 말을 함으로 슐라이에르마허는 종교란 형이상학과 도덕과 구별되는 그 자체의 독자적인 영역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것을 슐라이에르마허는 "감정"이라고 하며, 그는 종교를 형이상학 및 도덕과 나란히 하는 제3의 것, 즉 본질적인 대립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그의 종교론에서 주장하고 있는 종교의 본질을 슐라이에르마허 자신의 말을 빌려서 표현해 본다면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종교의 본질은 '하나님에 대한 절대의존의 감정'이다.
종교와 신학이 다른 점
슐라이에르마허는 종교를 '무한자에 대한 감각과 맛' 혹은 '우주에 대한 직관과 감정'으로 정의를 했으며, 한편으로, 신학의 토대로서 잡는 것은 신조, 교의 또는 성경본문이 아닌, 인간의 종교적 경험 또는 기독인의 자기의식을 신학의 토대로 간주한다. 여기에서 신학의 역할은 '기독교의 생활에서 발견되는 종교적인 감정을 기술하는 것'으로 그는 보고 있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당시의 신학의 의의는 "교회에서 도움이 되는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데에 있었고 교회에의 봉사가 판단의 시금석이 되었다. 그러므로 신학은 하나의 원리, 즉 교회지도라는 원리에서 출발을 하며, 그 성격은 실증적 학문이어야 했다. 이 실증적 학문으로서 신학은 실천적이어야하며, 기능적이어야 했던 것이다. 그리고 철저하게 신학의 목적과 실천은 "교회지도"라는 원리에서 출발을 해야만 했다. 그러므로, 신학은 일반학문속에서도 신학자체로서 다른 학문에 대한 봉사의 기능이 중요한 것이었다.
그리고 슐라이에르마허는 신학적 관심의 방향과 출발점을 자아에로 향했다고 했는데, 그는 신학의 토대를 신조, 교의 또는 성경본문이 아닌, 인간의 종교적 경험 혹은 기독교인 자기 의식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기독교인 생활에서 발견되는 종교적인 감정을 기술하는 것이 기독교 교의학의 과제이다." 이 같이 그는 신학의 가능성을 인간의 종교적인 경험에서 찾았던 것이다. 교리적 신조 배후에 있는 살아 있는 경험에로 돌아감으로써 신학의 새로운토대를 확립하려 했던 것이다. 따라서, 신학은 종교적인 의식에 대한 경험적인 기술이 되었다.
2.Tholuck의 신앙각성운동(Erweckung)에 대해서 설명하십시오.
톨룩은 19세기 중엽 약 반세기 동안 독일 신학자 및 저술가들 가운데 가장 저작을 많이 내고 영향력을 많이 끼친 사람 중 한 명으로서, 어떤 특정한 학파로 분류할 수 없는 신학자이다. 그는 경건주의, 모라비아주의, 쉴라이에르마허, 네안더, 심지어는 헤겔의 영향까지 받았다. 그의 신학은 과히 탄력적이라 할 만큼 늘 새로운 사상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던 자였다. 그는 독일신학을 부흥시킨 사람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신학의 방향을 합리주의로터 성서와 종교개혁 학문으로 이끌었던 신학자였다.
톨룩은 보수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으며, 신앙체험을 중시하였다. 그리고, 그는 신학사상에 있어서 교리적이나 아카데믹한 성향보다는 '주관주의 요소'를 많이 가지고 있었고, 죄에 대한 인식을 강조했으며, 회개, 중생같은 용어를 많이 사용하면서, 목회나 설교 분야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던 자이다. 톨룩의 부흥운동은 신학이라기보다는 설교, 교회의 정신, 교회 정치학, 교회활동에 영향을 주었다고 하겠다.
그는 베를린대학시절에 새로운 경건운동에 참여한 적이 있고, 젊은 신학자 시절은 슐라이에르마허보다 Marheineke의 영향을 받았으며, 그의 신학의 특징은 신학함이 '자기 자신과의 관계'라는 것이며 신학적 제시는 자기 제시라는 것이었다. 그의 부흥운동의 한 특징적 요소는 종교개혁의 이론적이며 학구적이고 역사적인 이해와 사건과 상황으로서 종교경험에 대한 이해가 공존한다는 것이다.
톨룩은 초대교회의 사도시대를 중요시한다. 그러나 4세기부터 시작된 교회의 신학적 작업을 부정적으로 보는데, 이는 참 생명의 말씀이 신학적 개념으로 바뀌어 버렸기 때문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Dogmatic한 신학, 즉 개념화된 신학을 죽음으로 보았고, 그러므로 부활의 시대가 와야 한다고 그는 생각한 것이다. 또한 톨룩은 신학체계가 사람을 거듭나게 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는 루터보다는 칼빈쪽으로 기울어 있었으며, 신앙은 학문에 의해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그는 신학을 이해하기를 단지 학문의 기능은 봉사하는 것, 신앙을 설명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므로 그에게 있어서 '기독교의 진리'는 '이해'되는 것이지, 결코 '증명'되는 것이 아니었다. 또한 성서, 그리스도는 Erklaren이 아니라 Verstehen해야 되는 것이었다.
각성운동이 일어날 당시의 독일의 상황은 낭만주의와 민족주의가 형성되었을 때였다. 이러한 배경에서 시작된 각성운동은 하나의 경건운동으로서 1차적 관심은 성서였고, 신학적으로 죄의식에 대한 예미한 감정을 가지고 있고, '은혜'와 '화해'를 강조하였으며, 고전적인 신앙(루터의 신앙)을 강조하였다.
이 운동의 초점은 카리스마나, 영적권위, 실천적인 면 즉 설교, 목회, 실천을 강조했고, 신앙인들 사이의 사랑과 선교를 중시했다. 이 부흥운동은 엄청난 종교적 성공을 이룩했고, 고위관직자들과 영향력있는 지지자들을 끌어들였다. 부흥운동은 교회를 자극하여 국내, 국외 선교를 하게 했으며, 설교에 새로운 강도와 무게를 주는 역할을 하였고, 또한 디아코니아를 강조했는데, 이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해가 커졌기 때문이었다.
마지막으로 톨룩을 정리한다면, 그는 "신앙적 모습"이 두드러졌던 자이며, "죄와 화해, 하나님의 사랑을 새롭게 인식함으로 자기 시대를 뛰어넘은 사람이었다.
3. '역사적 예수'를 밝혀낼 수 있는지에 대한 D. Strauss의 연구결과를 설명하고, 그리고 이 이후에 19세기 후반에 계속 이어진 역사적 예수에 관한 연구결과를 설명하십시오.
19세기 중반에 들어오면서 개신교 신학은 경험주의 신학이라는 자유주의 신학의 기본기조를 유지하면서도 19세기 초반의 신학과는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기독교와 신학은 현대세계에서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문제가 19세기초의 신학적 주제였다면, 19세기 중반에는 기독론이 신학적 관심의 초점이 되었다. 이러한 시대의 분기점이 되었던 신학자가 David Friedrich Strauss였으며, 그가 1835년에 출판한 "예수전"이 그 핵이라고 할 수 있다.
스트라우스는 복음서의 저자들이 전통적으로 생각되어왔던 저자들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었고, 그는 그 이상으로 예수의 나심과 부활의 이야기가, 예수 안에 있는 본질적인 요소로 신과 영원한 동일성을 가진다는 것을 나타내는 상징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려고 애썼던 것이다.
스트라우스는 예수전에서 복음서의 이야기들에 대해 철저한 역사비평적 연구를 시도했다. 그가 역사적 비평의 과제로 삼았던 것은 두가지였다. 첫째는 복음서 이야기에서 역사적이라기보다는 신화적이라고 판단될 수밖에 없는 요소들을 확인하는 것, 그리고 둘째는 이 신화적인 이야기들이 어떻게 성립되어 예수와 결속되어 있는지를 제시하는 것이었다. 스트라우스는 이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신화적인 해석' 방법을 사용했던 것이다. 이것은 종래의 초자연적인 방법과 합리적인 방법을 비판적으로 종합한 것이었다. 이 신화적 해석은 초자연적 해석을 명제로, 합리적인 해석을 반명제로하여 이들을 통합한 변증법적 방법이었다.
스트라우스는 예수에 관한 복음서의 기록에서 역사적인 것으로부터 비역사적인 것을 구분하는 두 가지 기준을 제시했는데, 이는 소극적 기준(기적)과 적극적 기준(신화)를 제시하며, 신화는 다시 순수신화와 역사적 신화로 나뉘어서 해석을 했다. 스트라우스는 예수의 생애에 관한 모든 복음서 기록에서 신화적인 요소가 발견된다고 보았다. 따라서, 그는 신화의 개념을 이용해서 역사성이 모호한 이야기에 포함된 진리성을 찾아내려고 한 것이다. 그가 밝혀낸 연구결과는 다음과 같다.
1) 기독교의 교리적 진리는 본질상 철학적인 것이며 역사적 사건과 필연적으로 관련된 것은 아니다.
2) 나사렛 예수에 대한 복음서의 이야기를 탐구하는 것은 신학적인 작업이 아니라 역사적 작업이다.
3) 복음서 저자들은 그 당시의 신화적 세계관을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복음서 이야기들은 신화적 요소들로 가득차 있는 것이다.
그의 역사적 의의는 성서 해석에 단편적으로 사용되던 신화적 해석을 철저히 사용했다는 사실에 있는 것이다.
스트라우스가 기적을 부인하고 그것을 신화로 해석한 것, 신앙의 그리스도와 역사의 예수를 분리한 것, 요한복음서의 역사성을 부인한 것 등은 논란이 되어왔다. 그것은 1세기 이상 신약성서의 자료와 역사적 예수에 관한 많은 논재을 일으켰다. 스트라우스의 역사비평적 연구를 지지하는 입장과 성서의 영감과 계시를 믿는 전통적인 입장이 첨예하게 대립되었다. 예를 들어, 바이세(Christian Weisse)는 스트라우스에 동조하여 복음서에는 신화적인 요소가 많으며 요한복음도 역사적인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4. Ritschl의 영향을 받은 신학자들의 하나님 나라 이해에 대해서 설명하시오.
리츨의 신학활동은 현대정신의 요구에 부응하여 현대인이 이해할 수 있는 기독교에 대한 견해를 제시하고자 하는데 초점이 있었다. 리츨은 사변적이며 형이상학적인 것과 관계를 끊고 실천적이고 역사적인 것을 신학의 새로운 토대와 형식으로 수용함으로써 프로테스탄트주의를 재확립하려고 했던 신학자이다.
리츨은 기독교를 하나님의 나라를 창건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위에 세워진 윤리적인 종교라고 정의한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적 공동체에 근거하여 기독교의 이중성을 발견했다. 즉, 기독교는 종교적인 신앙과 윤리학이라는 이중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기독교는 두 개의 초점(중심)을 지닌 타원과 같은 것으로서, 하나는 예수이며, 다른 하나는 예수가 창건한 영적이며, 윤리적인 공동체인 것이다. 이것은 도덕적 중심이며 하나님 나라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 공동체는 곧 교회이며, 그 목표는 인간 사회 전체를 하나님 나라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리츨은 도덕적 법칙을 하나님의 명령으로 해석하는 것이 종교라고 정의한 칸트의 종교관에 근거하여 기독교의 의미를 해석했다. 기독교는 형이상학적 성격이 아니라, 도덕적이고 윤리적 성격을 지니는 것이라고 본 것이 리츨의 기독교 이해의 특징이었다.
리츨이 후대에 영향을 미친 것은 하나님 나라 개념이다. 그는 하나님 나라를 종말론적으로 이해하지 않고 윤리적인 것으로 이해한데 그 특징이 있다고 하겠다. 리츨에 있어서,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사랑에 감동된 행위를 통하여 이 세상에서 실현되는 윤리적인 인간 공동체였던 것이다.
리츨에게서 영향을 받은 자들은 헤르만, 쉬러, 쉬타테, 카프탄부쉬, 하르낙, 고트쉬트가 있었고, 이외에도 헤르만 슐츠, 브리거도 리츨에게 동조하였으며, 카프탄, 해링, 롭쉬타인, 벤트도 역시 리츨의 영향 아래에 있었다.
리츨은 하나님 나라는 세상 도피나 명상을 통해서가 아니라 이웃의 목적을 성취함을 지향하는 세상 직업의 수행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보았는데, 리츨로부터 영향을 받은 자들은 소위 사회복음을 강조하며 하나님 나라를 이야기하게 되는데, 하나님 나라는 사회 갱신을 통해 이루어지며,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라는 것을 주장한다.
리츨의 영향을 받은 자들은 소위 사회복음을 강조하는 경향을 보인게 되었으며, 그 근거로 예수의 사랑이 사회를 변화시켰음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한마디로 리츨의 제자들의 하나님 나라의 개념을 말한다면, 그들은 기독교 교의학의 규제 원리로서 하나님 나라의 개념을 사용하였다. 그리고, 그의 제자 카프탄의 경우 오직 하나님 나라를 인류의 주요선으로 보는 기독교 관념만이 주요선은 참되고 합리적이며 절대적으로 타당한 관념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필수적 요구에 부응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역사상 그런 하나님 나라에 관한 특수 계시가 존재해왔다고 주장한다.
5. 신학자 로데에 대하여 설명하시오
로데(Richard Rothe)
특별히 관심을 기울였던 신학자는 중재의 신학(Vermittlungstheologie)을 했던 자로 알려져 있는 로데였다. 그는 특별히 조정과 화해를 위해서 노력했던 자였다. 그리고, 자유와 보수의 중간노선을 걸으면서, '기독교와 문화' 혹은 '신학과 철학'에 대한 상관성, 대화성, 연속성을 위해 노력했던 신학자였다. 로데 자신이 자신의 신학을 중재의 신학이라 했을 때, 중재의 의미는 신학을 하면서 현재 내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문화에 대한 태도를 어떻게 취할 것인가? 하는데 대한 문제의 제기였던 것이다. 로데의 고민은 "기독교와 문화, 신학과 철학 이 양자를 화해시켜서 뭔가 조정하는 기능의 신학을 할 수 없을까?"하는 것이었던 것이다.
그의 신학은 새로운 사회 상황아래에서 그 시대에 맞는 새로운 신학을 어떻게 이루어 갈 것인가? 하는 문제를 제기하는 신학이었다. 그의 포용성은 상당히 넓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구체적으로 어느 신학의 방향을 따르고 있다기 보다는 삶의 자리에 근거한 신학을 했기 때문이다. 로데안에는 신학과 철학이 함께 자리를 하고 있으면서, 전통적 가르침과 새로운 상황의 틈을 연결시켜보려는 시도를 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는 성서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를 학문적으로 해석을 해볼려고 시도했으며, 또한 경건한 신앙을 갖고 있으면서, 보수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하는 모습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보수적으로 나아갈 때는 각성운동의 톨룩의 경향을 보이기도 하지만, 자유주의적일 때는 범신론적으로 헤겔의 철학 경향으로 나아가기도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는 1860년대 이후에 바덴지역에서 중요한 임원역할을 하게 되는데, 이 바덴은 당시의 에큐메니칼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다. 그곳에서 Union을 지향하는 모습을 보이게 되는 것이다. 뢰슬러의 지적처럼 로데는 19세기의 개혁자로서, 기존의 목회자 중심의 교회를 회중중심의 교회로 변화시킬 것을 생각했던 것이다. 로데를 간단히 정리하자면, 그는 개방적인 사람이었고, 에큐메니칼을 지향한 사람이었다.
이상으로 로데에 대한 간략한 내용을 정리했는데, 사실 그의 신학성향은 현재 이 시대의 신학하는 이들에게 어떤 하나의 시사점을 제시해주고 있다고 생각이 든다. 급변하는 사회의 문화와 가치관속에서 어떻게 신앙을 사람들에게 매개해주며, 그들의 인식을 사로잡을 것인가하는 문제가 지금 교회와 신학하는 자들, 그리고 필자에게 던져진 문제인 것이다. 특별히 당시의 로데에게 있어서 '경건'이라고 하는 것이 세상속에 있는 경건이 아니며, 단지 "문화에 대해 마음을 여는 것"이었다는 점을 생각해 볼 때 필자에게 직면해오는 신학의 방향을 더 뚜렷해짐을 느낀다. 현대교회는 많은 고민에 빠져 있다. 이런 면에서 교회의 생동성을 위해 애썼던 로데란 한 신학자의 모습이 어떤 하나의 해결방안을 던져주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첫째, 그의 모습을 보면서 사회와 문화에 대한 대응책을 생각해 볼 수 있었으며, 둘째, 학문에의 모습을 보면서, 다양한 학문을 접하는 넓은 모습을 볼 수 있었고, 셋째, 이 시대에서 교회가 연합하는 에큐메니칼 차원에서 새로운 시도를 해봐야 한다는 점에서 필자에게 던져주는 시사점이 높았다. 앞으로 계속적인 관심과 연구를 해야 할 신학자임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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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Schleiermacher는 그가 지은 책 종교론에서 종교에 대해서 어떤 견해를 펼쳤습니까?
슐라이에르마허의 종교론은 변증론에 입각해서 쓰여졌으며, 당시 정통주의 분위기 아래에서 생활습관화되어있는 종교에 대한 반기를 들고, 종교는 관습, 전통, 인습적인 것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에게서 종교는 출발한다고 주장을 하였다. 다시 말하면, 종교론에서 슐라이에르마허는 종교가 인간의 어떤 소질(Anlage)에서 일어나는지를 해명함으로써 종교를 멸시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종교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갖게 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는 당시 지식인들이 잘못된 종교관에 근거하여 종교를 멸시하였다고 보았고, 그들은 종교가 인간 외부로부터가 아니라 인간 내부로부터 발생하는 것임을 깨닫지 못하였다고 슐라이에르마허는 생각을 하였다. 역시 그는 종교라는 것이 형이상학이나 도덕이 아니며, 이 양자의 혼합도 아니라고 말한다. 또한 그에게 있어서 종교는 교의(Dogma)도 아니다. 교의는 형이상학이 종교에 혼합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슐라이에르마허는 종교의 본질을 이야기하기를 "종교의 본질은 사유와 행위가 아니라 직관과 감정이다. 종교는 우주를 직관하는 것이다." 이런 말을 함으로 슐라이에르마허는 종교란 형이상학과 도덕과 구별되는 그 자체의 독자적인 영역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것을 슐라이에르마허는 "감정"이라고 하며, 그는 종교를 형이상학 및 도덕과 나란히 하는 제3의 것, 즉 본질적인 대립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그의 종교론에서 주장하고 있는 종교의 본질을 슐라이에르마허 자신의 말을 빌려서 표현해 본다면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종교의 본질은 '하나님에 대한 절대의존의 감정'이다.
종교와 신학이 다른 점
슐라이에르마허는 종교를 '무한자에 대한 감각과 맛' 혹은 '우주에 대한 직관과 감정'으로 정의를 했으며, 한편으로, 신학의 토대로서 잡는 것은 신조, 교의 또는 성경본문이 아닌, 인간의 종교적 경험 또는 기독인의 자기의식을 신학의 토대로 간주한다. 여기에서 신학의 역할은 '기독교의 생활에서 발견되는 종교적인 감정을 기술하는 것'으로 그는 보고 있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당시의 신학의 의의는 "교회에서 도움이 되는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데에 있었고 교회에의 봉사가 판단의 시금석이 되었다. 그러므로 신학은 하나의 원리, 즉 교회지도라는 원리에서 출발을 하며, 그 성격은 실증적 학문이어야 했다. 이 실증적 학문으로서 신학은 실천적이어야하며, 기능적이어야 했던 것이다. 그리고 철저하게 신학의 목적과 실천은 "교회지도"라는 원리에서 출발을 해야만 했다. 그러므로, 신학은 일반학문속에서도 신학자체로서 다른 학문에 대한 봉사의 기능이 중요한 것이었다.
그리고 슐라이에르마허는 신학적 관심의 방향과 출발점을 자아에로 향했다고 했는데, 그는 신학의 토대를 신조, 교의 또는 성경본문이 아닌, 인간의 종교적 경험 혹은 기독교인 자기 의식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기독교인 생활에서 발견되는 종교적인 감정을 기술하는 것이 기독교 교의학의 과제이다." 이 같이 그는 신학의 가능성을 인간의 종교적인 경험에서 찾았던 것이다. 교리적 신조 배후에 있는 살아 있는 경험에로 돌아감으로써 신학의 새로운토대를 확립하려 했던 것이다. 따라서, 신학은 종교적인 의식에 대한 경험적인 기술이 되었다.
2.Tholuck의 신앙각성운동(Erweckung)에 대해서 설명하십시오.
톨룩은 19세기 중엽 약 반세기 동안 독일 신학자 및 저술가들 가운데 가장 저작을 많이 내고 영향력을 많이 끼친 사람 중 한 명으로서, 어떤 특정한 학파로 분류할 수 없는 신학자이다. 그는 경건주의, 모라비아주의, 쉴라이에르마허, 네안더, 심지어는 헤겔의 영향까지 받았다. 그의 신학은 과히 탄력적이라 할 만큼 늘 새로운 사상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던 자였다. 그는 독일신학을 부흥시킨 사람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신학의 방향을 합리주의로터 성서와 종교개혁 학문으로 이끌었던 신학자였다.
톨룩은 보수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으며, 신앙체험을 중시하였다. 그리고, 그는 신학사상에 있어서 교리적이나 아카데믹한 성향보다는 '주관주의 요소'를 많이 가지고 있었고, 죄에 대한 인식을 강조했으며, 회개, 중생같은 용어를 많이 사용하면서, 목회나 설교 분야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던 자이다. 톨룩의 부흥운동은 신학이라기보다는 설교, 교회의 정신, 교회 정치학, 교회활동에 영향을 주었다고 하겠다.
그는 베를린대학시절에 새로운 경건운동에 참여한 적이 있고, 젊은 신학자 시절은 슐라이에르마허보다 Marheineke의 영향을 받았으며, 그의 신학의 특징은 신학함이 '자기 자신과의 관계'라는 것이며 신학적 제시는 자기 제시라는 것이었다. 그의 부흥운동의 한 특징적 요소는 종교개혁의 이론적이며 학구적이고 역사적인 이해와 사건과 상황으로서 종교경험에 대한 이해가 공존한다는 것이다.
톨룩은 초대교회의 사도시대를 중요시한다. 그러나 4세기부터 시작된 교회의 신학적 작업을 부정적으로 보는데, 이는 참 생명의 말씀이 신학적 개념으로 바뀌어 버렸기 때문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Dogmatic한 신학, 즉 개념화된 신학을 죽음으로 보았고, 그러므로 부활의 시대가 와야 한다고 그는 생각한 것이다. 또한 톨룩은 신학체계가 사람을 거듭나게 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는 루터보다는 칼빈쪽으로 기울어 있었으며, 신앙은 학문에 의해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그는 신학을 이해하기를 단지 학문의 기능은 봉사하는 것, 신앙을 설명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므로 그에게 있어서 '기독교의 진리'는 '이해'되는 것이지, 결코 '증명'되는 것이 아니었다. 또한 성서, 그리스도는 Erklaren이 아니라 Verstehen해야 되는 것이었다.
각성운동이 일어날 당시의 독일의 상황은 낭만주의와 민족주의가 형성되었을 때였다. 이러한 배경에서 시작된 각성운동은 하나의 경건운동으로서 1차적 관심은 성서였고, 신학적으로 죄의식에 대한 예미한 감정을 가지고 있고, '은혜'와 '화해'를 강조하였으며, 고전적인 신앙(루터의 신앙)을 강조하였다.
이 운동의 초점은 카리스마나, 영적권위, 실천적인 면 즉 설교, 목회, 실천을 강조했고, 신앙인들 사이의 사랑과 선교를 중시했다. 이 부흥운동은 엄청난 종교적 성공을 이룩했고, 고위관직자들과 영향력있는 지지자들을 끌어들였다. 부흥운동은 교회를 자극하여 국내, 국외 선교를 하게 했으며, 설교에 새로운 강도와 무게를 주는 역할을 하였고, 또한 디아코니아를 강조했는데, 이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해가 커졌기 때문이었다.
마지막으로 톨룩을 정리한다면, 그는 "신앙적 모습"이 두드러졌던 자이며, "죄와 화해, 하나님의 사랑을 새롭게 인식함으로 자기 시대를 뛰어넘은 사람이었다.
3. '역사적 예수'를 밝혀낼 수 있는지에 대한 D. Strauss의 연구결과를 설명하고, 그리고 이 이후에 19세기 후반에 계속 이어진 역사적 예수에 관한 연구결과를 설명하십시오.
19세기 중반에 들어오면서 개신교 신학은 경험주의 신학이라는 자유주의 신학의 기본기조를 유지하면서도 19세기 초반의 신학과는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기독교와 신학은 현대세계에서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문제가 19세기초의 신학적 주제였다면, 19세기 중반에는 기독론이 신학적 관심의 초점이 되었다. 이러한 시대의 분기점이 되었던 신학자가 David Friedrich Strauss였으며, 그가 1835년에 출판한 "예수전"이 그 핵이라고 할 수 있다.
스트라우스는 복음서의 저자들이 전통적으로 생각되어왔던 저자들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었고, 그는 그 이상으로 예수의 나심과 부활의 이야기가, 예수 안에 있는 본질적인 요소로 신과 영원한 동일성을 가진다는 것을 나타내는 상징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려고 애썼던 것이다.
스트라우스는 예수전에서 복음서의 이야기들에 대해 철저한 역사비평적 연구를 시도했다. 그가 역사적 비평의 과제로 삼았던 것은 두가지였다. 첫째는 복음서 이야기에서 역사적이라기보다는 신화적이라고 판단될 수밖에 없는 요소들을 확인하는 것, 그리고 둘째는 이 신화적인 이야기들이 어떻게 성립되어 예수와 결속되어 있는지를 제시하는 것이었다. 스트라우스는 이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신화적인 해석' 방법을 사용했던 것이다. 이것은 종래의 초자연적인 방법과 합리적인 방법을 비판적으로 종합한 것이었다. 이 신화적 해석은 초자연적 해석을 명제로, 합리적인 해석을 반명제로하여 이들을 통합한 변증법적 방법이었다.
스트라우스는 예수에 관한 복음서의 기록에서 역사적인 것으로부터 비역사적인 것을 구분하는 두 가지 기준을 제시했는데, 이는 소극적 기준(기적)과 적극적 기준(신화)를 제시하며, 신화는 다시 순수신화와 역사적 신화로 나뉘어서 해석을 했다. 스트라우스는 예수의 생애에 관한 모든 복음서 기록에서 신화적인 요소가 발견된다고 보았다. 따라서, 그는 신화의 개념을 이용해서 역사성이 모호한 이야기에 포함된 진리성을 찾아내려고 한 것이다. 그가 밝혀낸 연구결과는 다음과 같다.
1) 기독교의 교리적 진리는 본질상 철학적인 것이며 역사적 사건과 필연적으로 관련된 것은 아니다.
2) 나사렛 예수에 대한 복음서의 이야기를 탐구하는 것은 신학적인 작업이 아니라 역사적 작업이다.
3) 복음서 저자들은 그 당시의 신화적 세계관을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복음서 이야기들은 신화적 요소들로 가득차 있는 것이다.
그의 역사적 의의는 성서 해석에 단편적으로 사용되던 신화적 해석을 철저히 사용했다는 사실에 있는 것이다.
스트라우스가 기적을 부인하고 그것을 신화로 해석한 것, 신앙의 그리스도와 역사의 예수를 분리한 것, 요한복음서의 역사성을 부인한 것 등은 논란이 되어왔다. 그것은 1세기 이상 신약성서의 자료와 역사적 예수에 관한 많은 논재을 일으켰다. 스트라우스의 역사비평적 연구를 지지하는 입장과 성서의 영감과 계시를 믿는 전통적인 입장이 첨예하게 대립되었다. 예를 들어, 바이세(Christian Weisse)는 스트라우스에 동조하여 복음서에는 신화적인 요소가 많으며 요한복음도 역사적인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4. Ritschl의 영향을 받은 신학자들의 하나님 나라 이해에 대해서 설명하시오.
리츨의 신학활동은 현대정신의 요구에 부응하여 현대인이 이해할 수 있는 기독교에 대한 견해를 제시하고자 하는데 초점이 있었다. 리츨은 사변적이며 형이상학적인 것과 관계를 끊고 실천적이고 역사적인 것을 신학의 새로운 토대와 형식으로 수용함으로써 프로테스탄트주의를 재확립하려고 했던 신학자이다.
리츨은 기독교를 하나님의 나라를 창건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위에 세워진 윤리적인 종교라고 정의한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적 공동체에 근거하여 기독교의 이중성을 발견했다. 즉, 기독교는 종교적인 신앙과 윤리학이라는 이중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기독교는 두 개의 초점(중심)을 지닌 타원과 같은 것으로서, 하나는 예수이며, 다른 하나는 예수가 창건한 영적이며, 윤리적인 공동체인 것이다. 이것은 도덕적 중심이며 하나님 나라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 공동체는 곧 교회이며, 그 목표는 인간 사회 전체를 하나님 나라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리츨은 도덕적 법칙을 하나님의 명령으로 해석하는 것이 종교라고 정의한 칸트의 종교관에 근거하여 기독교의 의미를 해석했다. 기독교는 형이상학적 성격이 아니라, 도덕적이고 윤리적 성격을 지니는 것이라고 본 것이 리츨의 기독교 이해의 특징이었다.
리츨이 후대에 영향을 미친 것은 하나님 나라 개념이다. 그는 하나님 나라를 종말론적으로 이해하지 않고 윤리적인 것으로 이해한데 그 특징이 있다고 하겠다. 리츨에 있어서,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사랑에 감동된 행위를 통하여 이 세상에서 실현되는 윤리적인 인간 공동체였던 것이다.
리츨에게서 영향을 받은 자들은 헤르만, 쉬러, 쉬타테, 카프탄부쉬, 하르낙, 고트쉬트가 있었고, 이외에도 헤르만 슐츠, 브리거도 리츨에게 동조하였으며, 카프탄, 해링, 롭쉬타인, 벤트도 역시 리츨의 영향 아래에 있었다.
리츨은 하나님 나라는 세상 도피나 명상을 통해서가 아니라 이웃의 목적을 성취함을 지향하는 세상 직업의 수행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보았는데, 리츨로부터 영향을 받은 자들은 소위 사회복음을 강조하며 하나님 나라를 이야기하게 되는데, 하나님 나라는 사회 갱신을 통해 이루어지며,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라는 것을 주장한다.
리츨의 영향을 받은 자들은 소위 사회복음을 강조하는 경향을 보인게 되었으며, 그 근거로 예수의 사랑이 사회를 변화시켰음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한마디로 리츨의 제자들의 하나님 나라의 개념을 말한다면, 그들은 기독교 교의학의 규제 원리로서 하나님 나라의 개념을 사용하였다. 그리고, 그의 제자 카프탄의 경우 오직 하나님 나라를 인류의 주요선으로 보는 기독교 관념만이 주요선은 참되고 합리적이며 절대적으로 타당한 관념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필수적 요구에 부응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역사상 그런 하나님 나라에 관한 특수 계시가 존재해왔다고 주장한다.
5. 신학자 로데에 대하여 설명하시오
로데(Richard Rothe)
특별히 관심을 기울였던 신학자는 중재의 신학(Vermittlungstheologie)을 했던 자로 알려져 있는 로데였다. 그는 특별히 조정과 화해를 위해서 노력했던 자였다. 그리고, 자유와 보수의 중간노선을 걸으면서, '기독교와 문화' 혹은 '신학과 철학'에 대한 상관성, 대화성, 연속성을 위해 노력했던 신학자였다. 로데 자신이 자신의 신학을 중재의 신학이라 했을 때, 중재의 의미는 신학을 하면서 현재 내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문화에 대한 태도를 어떻게 취할 것인가? 하는데 대한 문제의 제기였던 것이다. 로데의 고민은 "기독교와 문화, 신학과 철학 이 양자를 화해시켜서 뭔가 조정하는 기능의 신학을 할 수 없을까?"하는 것이었던 것이다.
그의 신학은 새로운 사회 상황아래에서 그 시대에 맞는 새로운 신학을 어떻게 이루어 갈 것인가? 하는 문제를 제기하는 신학이었다. 그의 포용성은 상당히 넓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구체적으로 어느 신학의 방향을 따르고 있다기 보다는 삶의 자리에 근거한 신학을 했기 때문이다. 로데안에는 신학과 철학이 함께 자리를 하고 있으면서, 전통적 가르침과 새로운 상황의 틈을 연결시켜보려는 시도를 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는 성서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를 학문적으로 해석을 해볼려고 시도했으며, 또한 경건한 신앙을 갖고 있으면서, 보수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하는 모습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보수적으로 나아갈 때는 각성운동의 톨룩의 경향을 보이기도 하지만, 자유주의적일 때는 범신론적으로 헤겔의 철학 경향으로 나아가기도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는 1860년대 이후에 바덴지역에서 중요한 임원역할을 하게 되는데, 이 바덴은 당시의 에큐메니칼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다. 그곳에서 Union을 지향하는 모습을 보이게 되는 것이다. 뢰슬러의 지적처럼 로데는 19세기의 개혁자로서, 기존의 목회자 중심의 교회를 회중중심의 교회로 변화시킬 것을 생각했던 것이다. 로데를 간단히 정리하자면, 그는 개방적인 사람이었고, 에큐메니칼을 지향한 사람이었다.
이상으로 로데에 대한 간략한 내용을 정리했는데, 사실 그의 신학성향은 현재 이 시대의 신학하는 이들에게 어떤 하나의 시사점을 제시해주고 있다고 생각이 든다. 급변하는 사회의 문화와 가치관속에서 어떻게 신앙을 사람들에게 매개해주며, 그들의 인식을 사로잡을 것인가하는 문제가 지금 교회와 신학하는 자들, 그리고 필자에게 던져진 문제인 것이다. 특별히 당시의 로데에게 있어서 '경건'이라고 하는 것이 세상속에 있는 경건이 아니며, 단지 "문화에 대해 마음을 여는 것"이었다는 점을 생각해 볼 때 필자에게 직면해오는 신학의 방향을 더 뚜렷해짐을 느낀다. 현대교회는 많은 고민에 빠져 있다. 이런 면에서 교회의 생동성을 위해 애썼던 로데란 한 신학자의 모습이 어떤 하나의 해결방안을 던져주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첫째, 그의 모습을 보면서 사회와 문화에 대한 대응책을 생각해 볼 수 있었으며, 둘째, 학문에의 모습을 보면서, 다양한 학문을 접하는 넓은 모습을 볼 수 있었고, 셋째, 이 시대에서 교회가 연합하는 에큐메니칼 차원에서 새로운 시도를 해봐야 한다는 점에서 필자에게 던져주는 시사점이 높았다. 앞으로 계속적인 관심과 연구를 해야 할 신학자임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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