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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신학사 2

현대신학사 2 -이병일(한신대학교 신학대학원)
http://cafe.naver.com/modernth/221

실존주의 신학  -- 20세기 기독교 실존주의는 신정통주의를 다루면서 거론되었던 많은 운동들 속에 그 출발점을 두고 있었다. 실존주의는 보편적 실존과 개인적 실존이 논리적으로 필요한 개념적 도구의 번주 안에서 합리적ㅇ로 이해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합리주의 개념에 대한 지속적인 저항이다. 따라서 실존은 인간의 본성이나 인간적 가능성을 규정하는 고정된 인간 본질에 대한 어떤 관념도 배제하는 근본적 우연성과 자유로 표상된다.
Rudolf Bultmann(1884-1976) : 바르트의 관심이 하느님의 전적인 타자성과 하느님이 자신을 계시하시기로 결정하지 않는 한인간이 하느님에 대하여 어떤 것도 인식하기란 전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데 집중하였고, 본회퍼는 오늘날의 인간에게 갖는 이 계시의 구체적인 함축적 의미들을 탐구하는 데 전념하였다. 불트만의 관심은 계시 그 자체에, 이 계시의 운반체인 성서에 집중되었다. 즉 성서의 메시지가 현대 세계에 이해되고 의미를 가지도록 성서를 해석하는 방식을 발전시키는 데 관심을 갖는다. 하느님의 계시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하여 사용된 ‘thought patterns’은 시대의 상황에 따라 바뀌어야 한다.
⑴역사비판적 자유주의 신학의 전통 : 19세기의 자유주의 신학의 역사비판적 정신 = 성서에 대한 학문적 비판적 작업과 그 지성적 솔직성, 지나간 신화적 초자연적 세계상과 대립하는 현대적, 자연과학적 세계상에 대한 문화 기독교주의적 긍정의 태도 ==> 자유주의 신학과의 결별 = “신학의 대상은 신이다.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비난은 신에 관해서가 아니라 인간에 관해서 취급했다는 것이다. ...그 대상이 신인 신학은 그러므로 십자가의 말씀만을 그 내용으로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사람들에 대해 거리끼는 것이다.”(G.& V.I, p.2)
⑵바르트의 변증법적 계시신학의 영향 : 케리그마의 신학. 변증법적 계시신학 = “신은 인간의 전적인 지양이며 인간의 부정, 인간에 대한 문제 설정, 인간에 대한 심판이다.”(GV I, p.118) “직접적으로 신과 그의 나라에 관계될 수 있는 어떤 행위도 없다. 인간적 공동체 삶의 모든 양식은 그것이 가장 이상적이든, 가장 나쁜 것이든지 간에 신의 심판 아래 동일한 방식으로 서 있다.”(VG I, p.15) 계시는 모든 인간적인 것, 문화, 종교, 사상의 심판이고, 따라서 계시는 모든 인간적인 안일과 안주함에 대한 위기이다. 계시에 근거한 변증버벅 사고는 신과 인간의 무한한 질적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요, 모든 인간적인 신 이해에 강한 부정을 가하고, 오직 신의 계시가 말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신은 항상 그의 계시를 통해 그의 계시자들(Offenbarer)에게 접근한다. ... 계시 밖에서는 신은 결코 있지 아니하다.”(VG I, p.142ff)
⑶루터의 개혁주의적 의인론 영향 : 계시사고는 모든 인간적 신인식을 무로 돌리고 싱의 계시 말씀에 대한 신앙행위와 이 신앙에 의한 인간의 칭의를 강조한다. / 실존적 신인식 = “우리는 신에 관해서 모르며, 우리 고유한 자신에 관해서도 모른다. 우리는 신과 우리 자신에 관한 인식을 오직 신의 은총에 대한 신앙 안에서 가진다.”(VG I, p.37)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에 관해서 말하기 위해서는 실존에 대해서 말해야 한다.”(VG I, p.36) 신앙은 “우리가 정립할 수 있는 하나의 관점이 아니라 항상 새로운 행위이며 새로운 순종이다.” 그러나 “죄를 용서하시는 신의 은혜, 즉 오직 신에 관해서만 말하고자 하는 나를 의롭다고 하시는 신의 은혜에 대한 신앙으로만” 신앙은 확실하다. 이 신앙은 우리에 대한 “신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고 “결단”이다. “알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라 모르기 때문에 믿는다.” 그러나 “신앙은 이해되어야 한다.” / 비신화론화(Entmythologisierung) = 신앙의 이해를 강조함으로써 현존재에 대한 철학적 분석사고를 요구하고, 계시 말씀의 이해를 강조함으로써 자연과학적 세계상 속에서 살고 있는 현대인의 성서 이해를 위해서 신약의 계시 말씀을 비신화화한다. 성서에 나타나는 신의 행위으 역사적 현상을 신화론적 세계상에 의해 각색된 것으로 간주하고 捨象해 버린다. “행위하는 신의 피안성과 은폐성”과 “신의 비가시성”은 신의 행위를 가시적으로 대상화하려는 모든 유혹을 거부한다. 신앙은 객관화하는 지식에 근거하는 어떠한 안주성도 가지지 않고, 오직 허공을 향해서 그의 실존의 “그럼에도 불구하고”(dendoch ; trotzdem)라는 결단을 통해서 돌입해야 한다. “비신화화론은 신앙의 의인론을 지식과 사고의 영역에서 극단하게 적용하는 것이다.” / 실존론적 의인론(existentiale Rechtfertigungslehre) = 이는 신에 관해서 어떠한 가시적 지식이나 객관화하는 역사적 근거나, 관찰 내지 탐구할 수 있는 근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믿는 실존적 결단이다. “오직 선포된 말씀의 빛 속에서만”신앙자에게 신은 나타난다. 그러므로 이는 케리그마 신학과 밀접한 관계 속에 있다. / 케리그마 신학(Kerygmatische Theologie) = 케리그마는 신의 구속사건에 대해서 “선포하는 부름”이며, 이 부름 속에서 계시는 인간에게 부딪친다. 이 부름을 받아들일 때 구속사건은 일어난다. 모든 신앙의 전제인 케리그마는 인간의 가능성에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계시에서 유래한다. / 실존론적 해석학 = 케리그마의 인간학적 접촉점은 배제되지만 그 해석과 이해는 인간적 실존을 전제한다. 철학적 해석학에서 변증법적 계시 사고에 자유주의적 비판적 유산이 수용된다.
⑷하이데거의 현존재 분석학의 영향 = “현상학적-실존론적 분석의 형식적 방법” 하이데거의 현존재 분석학(Sein und Zeit)은 불트만에게 케리그마를 이해하는 해석학적 착상을 주었다. 하이데거의 무신론적 입장은 불트만의 변증법적 신학의 신이해에 적합했다. 변증법적 착상에 의하면 인간에 의해서는 신은 결단코 인식될 수 없고 오직 신의 계시에 의해서만 인식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 계시는 인간이 경험하고 이해하는 한에 있어서 계시로 성립될 수 있다. 그러므로 계시 이해에는 학문적으로 가능한 해석학적 작업이 수행되어야 한다. / 현존재는 “시간성”을 가진고 “근심”에 의해 규정받는 “죽음에의 존재”로서 이는 “비본래적”이다. 그러나 다가오는 죽음에 대하여 선구적인 결단을 초래하는 “양심의 부름”에 의해서 “본래적 존재”로 나아간다. / “내가 나의 실존을 어떻게 이해하며, 비본래성에서 본래성으로 어떻게 결단하는 것인가”
 
폴 틸리히(1886-1966) : 신학의 중재적 과제에 대한 성찰
틸리히의 “중재의 신학” : 신학은 항상 하느님의 말씀 곧 하느님의 전승된 진리와 그 시대를 중재해야 하기 때문에 “중재의 신학”이었다. 특히 틸리히는 이를 위하여 “상관 관계의 방법”을 발전시켰다. 그는 현대 세계의 세속화를 받아들이며 인간의 자율성을 인정한다. 그는 자율성을 가진 인간에게 그의 존재 속에 숨어 있는 하느님과의 관계성을 제시하고 현대문화의 잘못된 방향 곧 종교에 대한 적대적인 방향을 시정하고자 한다. 그에 의하면 신학의 과제는 기독교의 영원한 메시지를 그 시대에 대하여 해석하고 그 시대에 대한 메시지의 타당성 내지 의미를 제시하는데 있다. 그러므로 참 신학은 “답변하는 신학”, “변증적 신학”이다. 변증적 신학은 “질문과 답변, 상황과 메시지, 인간의 실존과 하느님의 자기계시를 상호 관계시킨다.” 상황 속에 포괄되어 있는 문제는 궁극 이전의 문제가 아니라 궁극적 문제, 제약된 문제가 아니라 무제약의 문제 곧 절대적 문제이다. 즉 존재의 근거와 삶의 의미에 대한 “실존적 문제”이다. 그리고 하느님은 이 문제에 답변한다. “하느님의 답변의 인상(Eindruck) 속에서 인간은 그의 문제를 제기한다.”
존재로서의 하느님 : 틸리히에게 있어서 하느님은 유한성의 범주들 특히 공간과 실체의 범주들에게 예속되어 있는 “존재”(Sein), 그러나 존재에 예속되어 있지 않는 “존재 자체”(Sein- Selbst), 현실의 궁극적 근거이며 모든 존재자들의 존재의 심연으로서 “존재의 근거”(Grund), “존재 구조의 근거”이다. 또한 하느님은 “비존재(Nichtsein)와 대립되는 것”이다. 비존재는 단순히 존재의 결함을 뜻할 뿐 아니라, 존재에 대한 위협으로 나타난다. 이에 대하여 존재는 “비존재로 말미암은 위협에 대항하는 무한한 존재의 힘이요 무한한 용기의 근거이다.” 존재의 근거로서의 하느님에게는 “내재성과 초월성”을 동시에 가진다. “존재의 힘으로서의 하느님은 모든 존재자와 모든 존재자의 전체 곧 세계를 초월한다. ... 양자 사이에는 절대적 단절, 무한한 ‘비약’(Sprung)이 있을 뿐이다.” 또한 “모든 유한한 것은 존재 자체와 그의 무한성에 참여한다.” “모든 사물은 단지 유한한 방법으로 존재의 힘에 참여하며 모든 존재는 그들의 창조적 근거를 통하여 무한히 초월된다.” 그러나 틸리히는 하느님을 많은 존재자들 중의 하나로 보는 것을 철저히 거부한다. 따라서 인격적 하느님이란 하느님이 인간과 같은 한 인격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격적인 것의 근거이며 자기 자신 안에 인격성의 존재론적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존재로서의 하느님과 유한한 존재자 : 모든 존재자들은 하느님에게 참여하고 있고 하느님은 그들의 존재의 힘으로서 그들 안에 내재한다. 이와 동시에 모든 존재자들은 비존재에 참여하고 있다. 따라서 모든 사물은 존재 자체에 참여하는 동시에 비존재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에 유한하다. “피조물이란 신적인 삶의 창조적 근원에 뿌리박고 자기 자신을 자유롭게 실현하는 것을 뜻하고, 창조는 피조물의 자기 실현에서 성취된다. 그러나 이 성취는 창조적 근원로으로부터의 분리를 통하여, 본질과 실존의 단절을 통하여 일어난다.” 실존한다는 것은 존재 자체 안에 근거되어 있으면서, 그의 본질로부터, 궁극적으로는 존재 자체로부터 분리되어 있음을 뜻한다. 실존한다는 것은 절대적 비존재로부터 나와 있으면서도 그 안에 머무는 것을 뜻하므로, 그것은 유한한 존재, 존재와 비존재의 통일성을 의미한다. 즉 인간은 하느님에 참여하는 동시에 비존재에 참여하고 있다.
존재론적 요소들의 긴장관계 안에 나타나는 불안 : “비존재를 통하여 제한된 존재가 곧 유한성이다. 비존재는 존재의 ‘아직 아님’(Noch nicht)으로서 그리고 ‘더 이상 아님’(Nicht nicht)으로서 나타난다. 그것ㅇ든 존재를 가진 것을 존재의 종식을 가지고 위협한다.” 불안은 존재론적 요소들의 “존재론적 긴장관계”들의 파괴와 이로 말미암은 “존재론적 구조”의 파괴에 대한 불안으로 나타난다. ①개체화-참여(Individualisation-Partizipation) : 모든 인간은 개체화로 말미암은 고독의 위협을 당하는 동시에 참여와 관계성으로 말미암은 개체성의 상실과 집단화의 위협을 당한다. “자기 관계성은 세계와 사귐이 그속에서 상실될 수 있는 고독의 위협을 초래한다. 그 반면에 세계 안에 존재함과 세계에의 참여는 완전한 집단화, 개체성과 주체성의 상실의 위협, 그리하여 자아가 그의 자기 관계성을 상실하고 포괄적인 전체의 단순한 한 부분으로 변형될 수 있는 위협을 초래한다.” ②역동성-형식(Dynamik-Form) : “역동성은 존재가 그 속에서 실젤로 있을 수 있고 비존재에 대항할 수 있는 힘을 가지는 형식을 추구한다. 이와 동시에 역동성은 경직된 형식들 속에서 상실될 수 있으므로 위협받는다.” 그러므로 인간은 “그의 생동력이 그 속에서 상실될 수 있는 궁극적 형식의 위협에 대한 불안 속에 있는 동시에, 생동력과 의도성이 그 속에서 상실될 수 있는 카오스적 무형식의 위협에 대한 불안 속에 있다.” ③자유-운명(Freiheit-Schicksal) : 인간은 자기의 운명에 대하여 자의적으로 저항함으로써 자기의 자유를 지키고자 하는 위험 속에 있는 동시에, 자기의 운명을 포기함으로써 자기의 운명을 구하려고 하는 위험 속에 있다. 결정론과 비결정론의 논쟁은 자유와 운명의 존재론적 긴장관계가 객관적으로 나타난 형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은 완전히 자유로운 존재, 우연한 행위들이 일어나는 무대에 불과하지도 않지만 운명의 기계에 불과하지도 않다. 그는 “자유와 운명의 동일체”이다.
인간은 존재하는 한 존재론적 긴장관계를 파괴하고 그를 비존재로 폐기시키려고 하는 비존재의 위협과 이로 말미암은 불안을 벗어날 수 없다. “유한성은 자신의 존재론적 구조를 상실하고 이리하여 자신의 자아를 상실할 수 있는 가능성이다. 유한하다는 것은 위협을 받는다는 것을 뜻한다.” 이 불안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존재하기 위하여 용기를 필요로 하고, 이 용기의 가능성에 대한 물음이 하느님에 대한 물음이다. “하느님은 존재 안에 포괄되어 있는 문제에 대한 답변이다.”
유한성의 범주에 나타나는 불안과 하느님에 대한 질문 : 말의 형식인 동시에 존재의 형식인 범주는 모든 사물들의 “존재”를 나타내는 동시에 그들이 예속되어 있는 “비존재”를 나타낸다. ①시간 : 시간의 긍정적인 요소는 새로움을 향한 창조적 과정이고, 부정적인 요소는 “모든 시간적인 것의 허무성”, 쉬지 않고 흐르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현재의 순간을 고정시킬 수 있는 불가능성”에 있다. 이난의 자아와의 관계에서 부정적인 요소는 불안으로 나타나고, 이 불안은 죽음에 대한 불안으로 나타나고 비존재가 내면으로부터 경험된다. 불안을 모든 순간마다 잠재적으로 현존하며, 인간의 존재 전체를 포괄하며 영과 육을 형성하고 정신적 삶을 규정한다. 또한 인간은 존재 자체에 관계되어 있기 때문에 존재의 용기를 얻는다. 이 존재론적 용기로 인하여 그는 불안을 이기고 현실을 인정한다. 현실을 인정하는 것이 인간에게 어려운 까닭은, 인간은 아직 그 자신의 것이 아닌 미래를 표상할 수 있는 동시에 더 이상 자신의 것이 아닌 과거를 회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소외되어 있는 무한한 과거와 무한한 미래에 대하여 자신의 현재를 방어하고 인정해야 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그의 존재론적 용기의 국극적 근거에 대한 질문을 제기할 수 밖에 없다.” ②공간 : 모든 존재는 자기를 위하여 공간을 얻으며 공간을 유지하고자 한다. 공간을 얻고자 하는 모든 존재의 노력은 “존재론적 필연성”이요 “유한한 존재의 공간적 성격의 결과이며 인간의 본질적인 자질이다.” 유한성이란 아무런 특별한 공간도 갖지 않음을 뜻한다. 그것은 모든 장소를 결국 상실하며 이리하여 그의 종재를 상실함을 뜻한다. 불안은 자기의 공간을 상실할 수 있으며 아무런 궁극적 공간도 갖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일어난다. “아무 특별한 공간도 갖지 않으며 아무런 궁극적인 공간도 갖지 않는다는 것은 최후의 불확실성을 뜻한다. 유한하다는 것은 불확실하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인간은 자기의 현재를 인정하고 자기의 현재와 함께 공간을 긍정하는 용기를 얻는다. 모든 사물은 “존재론적 불확실성”을 받아들이며 이 받아들임을 통하여 확실성을 얻는다. 그리고 “어떻게 한 존재가 공간의 일시적 상실이나 궁극적 상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를 발견할 수 있는가 ?” ③인과율 : 인과율은 어떤 사물이나 사건의 원천을 가리킬 수 있는 힘이다. “원인을 찾는다는 것은 어떤 사물의 존재의 힘을 찾는 것”이고, 또한 어떤 사물이 사건도 존재할 수 있는 그 자신의 힘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전제한다. 인간은 피조물이다. 그의 존재는 우연하므로 자기 자신으로 말미암은 아무런 필연성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기 존재의 필연성의 결핍에 대한 불안을 느낀다. 그러나 인간은 용기를 얻는다. 인간은 이 용기를 통하여 모든 유한한 것의 인과율적 의존성에 대한 불안을 극복한다.” 그러나 인과율의 고리와 우연성에 의존하고 있는 존재가 이 의존성을 받아들이는 동시에 이 의존성에 대립하는 필연성을 어떻게 자기 자신에게 인정할 수 있는가 ? ④실체 : 실체는 생성 소멸하는 “현상의 흐름 밑바닥에 놓여 있는 것, 어느 정도 정적이고 자기 자신 안에 근거되어 있는 것”을 가리킨다. 물론 모든 것은 변화의 과정 속에 있다. 그러나 “기능을 가지고 있는 것”, “과정 속에 서 있는 것” 곧 실체의 존재를 우리는 언제나 전제하지 않을 수 없다. 모든 유한한 것 속에는 실체가 있으나 이 실체는 변화로 인하여 상실될 수 있다. 모든 변화는 자기를 변화시키는 것의 비존재를 드러낸다. 변화될 수 있는 실재는 비존재에 대항하는 실체성과 존재의 힘과 저항을 결여하고 있다. 불안은 달리 말하여 “변화 속에 포괄되어 있는 비존재의 위협에 대한 불안”이다. 그러나 인간은 용기를 가지고 개체적 실체와 존재의 보편적 실체를 없애고자 하는 비존재의 위협과 불안을 받아들인다. // 이 범주들은 “모든 유한한 것 속에 있는 존재와 비존재의 통일성을 나타낸다.” 네 가지 범주들은 “비존재의 불안을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의 문제를 제기한다.” 하느님에 관한 문제는 이 용기의 가능성에 관한 문제이다.
존재론적 상관 관계 속에 있는 하느님과 인간 : “인간 실존의 상황은 소외의 상황이다.”그는 자기의 본질로부터, 하느님으로부터 소외되어 있으면서 또한 하느님에게 참여되어 있다. 하느님은 존재 자체이고 인간은 존재하는 한 존재 자체와 관련되어 있을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느님과 인간의 상관관계는 존재론적인 것이다. 그러나 이 관계는 언제나 위협을 당한다. 비존재로 돌아갈 수 있다는 불안은 실존의 기본정조이다. 그러나 하느님은 존재의 용기를 주는 “존재의 힘”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문제되는 것” 혹은 궁극적 관심이다. 존재의 힘이 인격화된 존재가 JX 안에 나타난 “새 존재”이다. 그리스도이신 예수의 인격적 삶 속에서 “존재의 힘”이 실현되어 있다.
틸리히의 문제점과 신학의 중재적 과제 : 하느님과 인간, 하느님과 세계의 모든 피조물을 존재론적 상관관계에서 보려고 한 틸리히는 자신이 살던 그 시대와 하느님의 메시지를 중재하고 이 메시지의 시대적 상황에 대한 연관성 내지 타당성을 제시하고자 한 위대한 시도였다. 그러나 그에게도 많은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다. ①인간의 존재 자체는 곧 하느님에 관한 질문이다. 하느님은 모든 인간에게 있어서 “절대적으로 문제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이 하느님에 관하여 질문하는 것은 하느님이 인간을 찾아 오심으로써 일어나지 않는가 ? ②하느님 곧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문제시되고 있는 것”이 신학의 대상이다. 그러나 그의 중재적 신학의 한계는 하느님과 이 세계의 구체적인 문제를 연결하지 못하는 데에 있다. ③유한성의 존재론적 구조에 대한 틸리히의 분석도 추상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에서 나타나고 있는 불안의 문제는 구체적이고 현실적이다. ④유한한 존재의 자기초월은 그의 존재론적 특성으로 말미암은 것이지 하느님의 존재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다. 하느님의 존재는 유한한 존재에게 유한성을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를 제공할 뿐이다. 존재의 위협과 불안을 야기하는 원인을 찾고 이 원인을 제거함으로써 그것을 현실적으로 극복하게 하는 하느님의 기능에 대하여 틸리히는 침묵하고 있다. 하느님과 인간의 상관관계는 인간으로 하여금 하느님의 미래를 향하여 새로운을 일으키게 하는 역동성의 근원이라기 보다 주어진 현실 속에서 불안읅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의 근원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JX는 인간 세계의 고난 속으로 오셨고 고난당하는 인간과 그의 세계를 구원하기 위하여 오셨다. 하느님의 영원한 메시지와 시대 상황의 참된 중재는 틸리히가 말하는 비존재의 위협과 불안을 극복할 수 있는 “존재의 문제”에 대한 “답변”에 있다기 보다는 불의와 대립과 갈등과 억압으로 가득한 이 땅 위에 하느님의 정의와 평화가 다스리는 하느님의 나라를 세우는 데에 있다.
 
세속화 신학 -- 세속화 신학은 타계적 경건주의와 내성적 기독교에 대한 반동으로서, 신의 내재성을 초월성보다 강조한다.
본회퍼(1906-1945) : “X께서 한 인간을 부르실 때는 그에게 따라와 죽으라고 명하신다”라고 말한 것처럼, 본회퍼는 순교의 삶을 살았다.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즉 기독교가 삶의 의미에 대해 기여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고뇌 속에서 그는 교회인과 ‘the men of the world’에게 이야기한다. 교회인들에게는 교회를 교회답게 만들라, 즉 교회를 교회가 뜻하는 바 “X-existing-as-community”로 만들라고 하며, 세속인들에게는 성숙해질 것을, 인간의 모든 잠재능력들을 충분히 발전시킨, 특히 인간의 자유의 잠재능력을 충분히 발휘시킨 삶을 살 것을 요구한다. 진리의 삶을 살도록 도전하고 성숙한 삶을 요구하는 그의 궁극적인 목적은 교회와 세상으로 하여금 각기 그 현재적 과제를 성취하려면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하려는데 있다. Eberhard Bethge는 그의 중심사상을 ‘a continually growing awareness of the concretness of revelation’으로 이해한다. 그의 사상의 편력은 그의 인생의 편력과 병행하며, 이들은 계시가 삶 그 자체와 구체적으로 어떻게 관계되는가 하는 데에 중심한다.
계시의 본질 - Sanctorum Communio, Act and Being : 하느님이 인간에게 자신을 계시하시기로 선택하셨다라는 말은, “하느님이 인간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인간을 위하여 존재하심을...자신을 역사적 인간에게 얽매이도록 선택하셨음을...자신을 인간의 처분받을 자리에 두셨음을...영원한 비객관성에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교회 안의 그의 말씀 가운데서 ‘가질 수 있고’ 파악될 수 있게 존재하신다”는 것을 뜻한다. 하느니은 자신을 계시하시며 이로 인해서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자신을 인간에게 유용하게 만드신다. 하느님의 유용성 인간을 위한 그의 존재방식은 인간의 필요를 충족시키려는 데 그 목적이 있다. 따라서 인간은 고독하게 살아서는 안되고 공동체 속에서, 하느님과 인간의 교제 쇽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 인간의 본성에 반영되어 있는 신의 계획이다. 그러나 “죄의 현실은...개인을 극단적인 고독 가운데, 하느님과 인간으로부터 근본적으로 분리된 상태 속에 가져다 놓는다.” 이와 같은 상태로부터의 구원은 공동적이다. 그리스도의 구원행위는 구속받은 자들의 공동체의 창조이다. 구속받은 자들의 공동체는 하느님과 인간을 사랑하면서 사는 까닭에 이기적 존재의 굴레로부터 해방받은 성도의 공동체이다. “공동체로 존재하는 그리스도”인 교회는 ‘the locus of humanity's restored community, the iocus of redemption’이므로, 모든 인간의 궁극적인 운명, 곧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된 하느님과 인간과의 교제의 산 표현이고, 그리스도의 사업의 열매가 다른 사람에게로 흘러가는 원천이다. 교회의 전체 기능은 세계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존재로서 말씀이 완전히 성육화되는 것을, “Christ revealed as community”가 되는 것을 의도한다.
“being of God in revelation”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계시는 어떻게 알려지는가, 행동으로서의 신앙과 존재로서의 계시의 상호관계는 어떤 것인가, 그리고 계시는 한 행동의 수행 속에서만 인간에게 주어지는가 아니면 계시에서는 인간을 위한 존재가 있는가 ? 계시를 행동의 측면에서 묘사할 때, 하느님은 일련의 행동에 의하여 특수한 역사적 사건들 속에서 인간에게 자신을 계시한다라고 이해한다(Barth's act theology). 계시를 존재의 측면에서 묘사할 때, 계시의연속성이 강조되어 인간은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일련의 계시의 수용자가 아니고, 하느님과 인간의 존재 자체가 계시 안의 존재라고 이해한다(Tillich's being theology). 전자는 인간으로부터의 하느님의 자유를 보존하고, 후자는 인간과의 관계 안에서의 하느님의 존재를 보다 정확하게 반영하는 것으로 이해하며, 본회퍼는 후자의 접근방법을 선호한다. 교회 안에서 계시에 관한 “행동적”사고와 “존재적”사고의 가치는 살아있는 통일성 속에서 서로 묶여있다. 교회는 그 존재성을 교회 안의 신앙 헹위와 신자의 계시 소유에 의존한다. ‘the Christian communion’가 하느님의 최종적 계시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에 의하여 창조되고 그리스도를 기초로 하여 세워진 공동체, 그 속에서 그리스도가 자신을 “...새로운 인간 - 아니 그보다는 새로운 인간성 그 자체”로 계시한 공동체이다. 따라서 교회는 계시의 연속적인 존재이면서 동시에 계시가 행동 속에서 드러나는 장소이다. 교회 속에서 계시는 스스로 존재와 행동임을 계시한다.
계시의 구체성 - Nachfolge(The Cost of Discipleship) : 본회퍼는 이 책에서 ‘an existential embodiment of thought in action’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아직도 ‘radical religionlessness’에는 도달하지 못하였다. 은총의 소유자는 기독교인의 생활에서 어떤 다른 면모를 보여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Luther의 ‘sola fidei’의 원리가 자기만족적인 진부한 생활을 정당화시켜주는 것으로 타락하여, 은총은 하나의 교리․원리․체계로서, 죄인이 의롭게 인정받는 것을 동반하지 않는 죄의 정당화를 뜻하는 “값싼 은총”으로 전락한 것에 대한 비난이다. 반대로 “값비싼 은총은 다시금 다시금 추구되어야 할 복음이요, 요구를 지닌 선물이요, 인간이 두드려야 하는 문이다...그것이 은총인 까닭은 그것은 우리에게 JX를 따를 것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에게 생명을 요구하기 때문에 값비싼 것이고, 그것이 인간에게 진정한 생명을 주는 까닭에 은총이다. 그것은 죄를 단죄하기 때문에 값비싼 것이고 그것이 죄인을 의롭게 해 주기 때문에 은총이다.”
은총과 제자직은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예수를 따르는 유일한 길은 세상가운데 사는 길이다.” 순종하는 신앙인은 “믿는 자만이 순종한다”와 “순종하는 자만이 믿는다”라는 역설적 성격을 함께 공유하고 생활화한다. 예수를 따르는 길은 제자직의 십자가를 받아들이고, “오직 그리스도만 알고 자신은 알지 않을 것과 오직 앞서 가시는 그분만을 보고 우리에게 주어진 너무나 어려운 길은 보지 않을 것”을 말한다. 또한 이 길은 새로운 교제의 시작이고, 나의 이웃과 나 자신이 예수 안에서 하나되게 한다. 기독교 제자직의 비범성은 “세상에 살면서도” 예수처럼 사는 것(‘a life of suffering love’)을 뜻한다. 그러나 기독교인의 사랑의 실천은 언제나 은폐된 것, 특히 자기 자신으로부터 감추어지고, 십자가의 삶에로 자신을 신앙 가운데서 내어주어야 한다. 제자는 그리스도를 따르고 그의 말씀을 듣는데서 그가 영위하는 삶으로 그의 동료들과 차이를 나타내지만, “무조건적으로 베풀어주는 우정으로, 예수의 사랑의 한결같은 마음으로 이들에게로” 다가간다.
은총과 제자직이 한 인간에게 요구하는 것은 자아에 대한 죽음이요, 예수 안에서 남을 위해 사는 삶이다. 성육하신 하느님의 아들은 그 자신으로서 존재하는 동시에 인간성으로 존재하였다. 하느님이 인간이 되었다는 것은 그가 그 모든 연약함과 죄와 부패와 더불어 배신적인 인간 본성 전체를 취하셨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그 안에서 전체 인류와 더불어 수용되는 JX의 몸은 이제 우리의 구원의 터전이 되었고, 그 몸(공동체로 존재하는 그리스도로서의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와 우리가 갖는 연대성이 기본적인 인간적인 문제, 연대성 속에서만 존재하는 문제에 대한 신적인 대답이다. 인간이 되신 하느님에의하여 하느님의 새로운 형상을 입은 인간이 그리스도와 연합는 것은 먼저 “그의 수치스러운 형상”을 따르는 것이다. “성육하신 그리스도의 분신이 됨으로써 우리는 그가 지녔던 전체 인간성을 나누어 가지게 되기” 때문에 우리는 “죄의 결과인 개인주의로부터...전 인류와의 연대”로 회복 된다.
타자를 위한 실존적인 존재 - Ethics : 책임적이고 자유로운 기독교인의 삶이란 무엇을 뜻하는가 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는 ꡔ윤리학ꡕ에서 그가 제안하는 인간형은 지혜와 단순성을 겸비한 인간이다. 단수난 인간은 그의 시선을 하느님에게만 고정시키면서, 날마다 하느님의 계명과 심판과 자비를 듣는다. 그는 자신이 “원칙의 사슬에 묶여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으로 묶여 있음”을 알고 있다. 또한 이와 같은 단순한 사랑은 지혜로운데, 그는 “하느님 안에서 현실을 이해한다.” 지혜롭고 단순한 인간은 하느님과 그의 세계가 조화로운 일치 가운데 함께하는 자리, 즉 JX의 인격 안에서 자신의 도덕적 자아를 형성하는 길을 찾는다. 이 도덕적 형성(moral formation)의 세가지 구성요소는 성육하고 십자가에 달리고 부활한 그리스도를 닮는 것(conformation)이다. 교회는 인간을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형성시키는 데 필수적인 역할을 담당한다. “교회는 인간들 가운데서 형상을 취하신 그리스도 자신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교회에서 중요한 것은 종교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형상이며, 인간의 무리들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취하는 일이다.”  기독교인은 그리스도의 형상이 자신 안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나고, “...추상적․결의론적(casuistic)․강령적(programmatic)․순수사변적이지도 안은 방식으로” 자기자신의 삶을 영위하도록 하여야 한다. 진정한 기독교인에게 진정한 윤리적 문제란 하느님의 뜻을 확인하는 문제이고, 이는 ‘Christ without the world’나 ‘the world without Christ’이 아니고 “그 자체 내에 세상의 현실을 포함하는 그리스도의 현실”에서 하느님의 현실을 발견하는 것이다.
하느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구원해 주는 義認인 궁극적인 사항만을 강조하는 것은 극단주의로써 인간의 모든 일을 전면적으로 거부하고 오직 하느님만을 강조한다. 또한 타협의 입장은 “이 세상에 속한 일들”은 그 자체의 권리를 보유하고, 궁극적인 것인 의인은 일상생활에서 물러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양자의 입장보다 기독교인은 오히려 “성육신의 효험을 통하여 인간이 되고, 십자가의 효험을 통하여 선고를 받고 용서를 받으며, 부활의 효험을 통하여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준궁극적인 일은 인간이 되는 일과 선하게 되는 것이다. 준궁극적인 일은 궁극적인 일과의 관계에서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는 대리직과 책임이라는 성격을 가지며, 이는 자신의 이웃과의 관계의 모든 구체적인 관계에서 그리스도 처럼 행하는 “책임적인 역사적 행동”이다. 책임은 창조․속죄․구속이라는 긍정과 정죄․죽음이라는 부정의 삶을 사는 것이다. 따라서 책임적 인간의 행동은 그것만이 자유를 주는, 전적인 자유를 주는 책무, 곧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와 만나는 우리의 이웃에 대한 책무 가운데서 수행되어진다. 기독교인의 모든 선택에는 자유와 순종이 혼합되어 있다. “자유없는 순종은 예속이요 순종 없는 자유는 자의적인 자기 뜻”이기 때문이다. 기독교인의 도덕 생활의 열쇠는 예수요 예수의 형상을 기독교인이 본받는 것이다.
기독교의 비종교화 - Letters and Papers From Prison : 인간과 하느님의 관계는 절대권력과 절대선의 지고한 존재, 인간의 모든 문제에 대한 해결사로서의 하느님에 대한 의심은 “인간 실존의 경계들”에 대해서도 의심을 하게 한다. 성인이 된 현대에 있어서 삶의 한계 상황들에다 하느님의 자리를 확보하려는 것은 오류이다. 오히려 하느님은 삶의 중심에 놓여져야 하고, 그리고 구원은 인간 역사의 사건들을 통해서 이 세상에서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에, 하느님은 “우리들 한가운데 계시는 초월자”가 된다. 이 하느님은 이웃의 고통을 함께하는 고난받는 하느님이다.  따라서 교회는 인간을 위해서 존재할 때만이 진정한 교회가 된다. 이는 비종교적인 기독교라고 할 수 있는데, 여기에서는 남을 위한 인간으로서의 JX가 그 초점이되고, 그 교회는 구체적인 본보기로서 예수를 따라야 한다.
 
역사신학 -- 실존주의 신학과 구원사학파의 이원론을 비판하고, 일원적 구원사를 주장하면서, 구약과 신약을 하나의 구원사로 보고, 우주적 그리스도론을 주장하였다. 따라서 하나님은 역사를 통해서 자신을 계시한다.
판넨베르그의 신학적 轉機 : 판넨베르그는 당시의 신학사조를 종합하고 체계화하여 하나의 새로운 신학적 전기를 형성하였다. 그는 헤겔의 사고를 폰 라트의 구약성서신학과 결부시켰다. 그의 신학은 역사를 중요한 관심의 대상으로 삼고 있으며 모든 내용을 역사와의 관련 하에서, 역사의 지평 속에서 이해하고자 한다. 그 관심은 20세기 전반기를 지배한 실존신학과 구원사 신학에 대한 비판과 도전으로 볼 수 있다. 실존신학은 객관적인 역사의 과정을 떠나서 개인의 역사성 속에서 이루어지는 역사의 의미로 도피하여 역사를 “실존의 엿사성으로” 폐기하였고, 구속사 신학은 역사적-비판적으로 증명될 수 없는 “초역사” 혹은 “원역사”에로 도피하였다. 또한 그는 “변증법적 신학”을 “케류그마 신학”이라 하면서 그 문제성을 비판하는데, 케류그마 신학은 역사적 예수 자체와 그것을 증거하고 있는 사실 자체를 거부함으로써 “역사의 상실”에 이르렀다. 이러한 비판을 통하여 판넨베르그는 형성된 “역사신학”으로써, 기독교 신학의 역사적 지평을 회복하며 역사에 대한 기독교진리의 보편타당성을 회복하고자 하는 시도라고 볼 수 있다.
하느님의 간접적 자기계시로서의 역사 : 세계사의 사건들과 하느님의 계시가 전혀 다른 차원에서 일어난다고 하는 것은 하느님의 계시는 역사의 지평을 상실하게 된다. 그러므로 계시와 역사의 이러한 대립은 수정되어야 한다. 하느님이 자기를 계시한다는 것은 하느님이 이 세계 속에 있다는 것을 뜻하며, 그가 이 세계 속에서 자기를 증명한다는 것은 바로 역사이다. “성서의 증언에 의하면 하느님의 자기 계시는 신의 현현의 방법에 있어서와 같이 직접적으로 일어나지 않고 간접적으로, 하느님의 역사의 행위를 통하여 일어났다.” 구약성서에서 야웨는 역사의 행위를 통하여 자기를 증명하였고 따라서 하느님에 대한 인식은 그의 역사적 행위를 통하여 가능하였다(출애급과 가나안 점령, 예언서와 묵시사상). 신약성서에서 저자의 강조점은 약간씩 다르지만, 공통된 사실은 과거에 일어난 예수의 사건이 단순히 “Daß”가 아니라 “Was”로서 확보되고 있으면서 한계를 그리스도의 사건과 구원의 미래로부터 종말론적으로 규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세계의 과거, 현재, 미래를 하느님의 간접적 자기계시, 그의 영광의 나타남을 뜻하는 것이다.
판넨베르그에 의하면 하느님의 계시는 “계시하는 역사의 처음에 발생하지 않고 종말에 궁극적으로 발생한다.” “왜냐하면 성서의 하느님은 모든 사건의 전체를 통하여서만이 그의 신성을-모든 것에 대하여 주가 되심을-증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궁극적 계시가 일어날 “모든 역사의 종말이 예수의 운명 속에서 先取로서 일어났다.” 그리하여 하느님은 그의 운명 속에서, 그의 부활과 함께 궁극적으로 그리고 완전하게 계시된다. “모든 사건과 모든 인간의 삶의 전체와 본질이 예수로부터 결정되어 있다.” 그러므로 JX의 계시는 궁극적 계시이며, 모든 역사의 사건을 하느님의 계시로 밝혀주는 근원이다. 모든 사건은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JX의 계시로부터 계시의 성격을 가지게 된다.
약속과 성취의 역사 구조 - 보편사로서의 역사 - : 약속과 성취의 구조가 역사를 구성한다(신 7:8)는 것은, 역사는 하느님의 약속으로부터 출발하여 이 약속의 성취를 지향한다는 것이다. 약속과 성취의 구조에 의하여 파악되는 역사의 폭은 구약성서의 역사기록에 있어서 점점 더 넓어지고 있다. 묵시사상에 있어서 역사의 폭이 세계의 종말에 이르는 역사의 과정 전체에로 확대되는 것은 다음을 전제로 한다. 약속의 성취는 역사 내에서 이루어질 목표로서 기대되는 것이 아니라 세계사 전체의 종말로서 기대되고 있다는 것과, 신명기 사가에 있어서와 같이 약속은 율법과 결부되어 있다는 것이다. 묵시사상가들은 역사를 구원의 역사로 이해하였고, 이 구원의 역사를 보편사로 확대하였다. 이 보편사의 개념은 “이스라엘의 하느님의 보편성”에 근거하고 있다.
판넨베르그에 의하면 JX는 약속의 종말론적 성취를 뜻한다. “예수의 운명 속에서” 이스라엘의 하느님은 그의 신성을 궁극적으로 증명하였고, “십자가에 달린 그 분의 부활”은 “하느님의 종말론적 자기증명”을 뜻한다. 또한 JX 안에 선취된 성취, 역사의 완성은 “단지 잠정적인 성격을 가지며” 새로운 약속을 뜻한다. 또한 JX 안에서 일어난 하느님의 자기증명 속에 “구체적으로 무엇이 포함되어 있는지 아무도 조감하거나 구명할 수 없다. 이것에 대하여 여러 가지를 구체적으로 말할 수 있지만 이와 동시에 그 당시 거기에서 예수 안에 일어난 것은 우리에게 대하여 구명될 수 없는 미래이다.” 그러므로 “JX의 사건, 특히 죽은 자들로부터 예수의 부활, 옛 계약의 약속의 성취는 우리에게 다시금 예수의 부활에 나타난 삶에 우리 자신이 참여하리라는 약속이 되었다.” 하느님은 JX의 운명 속에서 자기를 궁극적으로 계시하면서도 우리에게 완전히 파악되지 않는다. “미래는 아직도 개방되어 있고 가능성으로 충만하다.” 그러므로 역사 속에는 여전히 새로움이 있다는 것이다.
역사의 우연성과 통일성, 새로움과 연속성의 문제 : 역사는 질적인 새로움과 새로운 미래가 인정될 때만이 가능하다. 즉 역사에 있어서 새로움이 인정될 경우 우리는 예기치 못한 것, 새로운 것, 우연적인 것의 발생을 인정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역사에 있어서 새로움이 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며 역사는 부인될 것이다. 우연적인 것이 일어난다고 인정할 경우, 우리는 모든 우연적인 것들의 내적 통일성 내지 연관성이 무엇인가를 말할 수 없게 된다. 여기에서의 딜레마는 역사의 전체적 통일성을 지키고자 할 때 역사의 우연성과 개방성을 포기할 수 밖에 없고(딜타이, 슈펭글러, 토인비, 헤겔), 역사의 우연성과 개방성을 지키고자 할 경우 역사의 전체적 통일성을 포기할 수 밖에 없다(케엘케고르, 고가르텐, 야스퍼스)는 것이다. 판넨베르그에서 이 딜레마의 해결은 하느님의 개념에 있다. 즉 하느님의 개념은 역사의 우연성과 개방성, 역사적 사건의 개체성을 보장하면서 역사의 통일성과 연속성을 가능케 한다. “그의 자유의 초월을 통하여 세계 속에 있는 우연적인 것의 근원이신 하느님은 우연한 것의 통일성을 역사로서 확립한다.  그리하여 그 속에 있는 사건들의 우연성이 배제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역사의 통일성 내지 연관성은 모든 우연한 것의 근원이신 하느님에게 있다. 즉 “그들의 초월적 근원에” 있다. 그러나 역사의 통일성과 연속성은 과거로부터 미래에 이르는 “발전의 방법으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세롭고 우연적인 것이 이미 있는 것에 결합됨으로써, 즉 “소급적 결합”을 통하여 “언제나 새롭게 형성된다.” 그러나 “하느님이 어떻게 활동하며 역사의 연속성을 어떻게 그때 그때마다 형성하는 가는 역사 자체만이 가르쳐 줄 수 있다.” 근대의 역사철학들은 하느님 대신에 인간이 역사의 주체가 되게하였고, 역사의 통일성은 세계에 대한 하느님의 섭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계속하여 발전하는 인류의 통일성에 있다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판넨베르그에 의하면 하느님 대신 인간이 역사의 주체가 될 때 역사는 그의 통일성을 상실하고 만다. 현실을 역사로 이해하는 것은 성서적인 하느님 개념의 영역에서만 가능하다. “성서의 역사이해, 성서의 약속의 신앙에서만이 현실의 역사적 경헙이 보존된다. 오늘날 이 근원이 상실됨으로 인하여 역사로서의 현실의 경험이 인간에게서 다시 사라질 위험이 나타난다.” 인간의 역사성으로부터 역사를 근절시키려는 딜타이, 하이데거, 불트만의 시도는 하느님 대신 인간을 역사의 주체로 삼는 근대사조를 반영하고 있으며, 역사의 연속성을 위태롭게 함으로써 보편사를 불가능하게 할 위험을 보여주고 있다.
미래지향적 역사 이해 : 역사는 동일한 것의 영원한 회귀 혹은 반복 과정이 아니라 언제나 새로운 것이 일어나는 과정, 그리하여 우리가 아직 경험해 보지못한 새로운 미래를 향하여 개방되어 있고 이 미래를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하느님은 단순히 이 세계의 근원에 불과한 존재가 아니라 이 세계에 대하여 자유로운 창조자로서 예기하지 못한 방법으로 그의 창조 세계 속에 개입하여 새로운 것을 일으킬 수 있는 존재였다. 살아계신 하느님이라는 신관으로 이스라엘은 현실을 하나의 목적을 지향하고 있는 선적인 과정, 곧 미래를 향하여 개방되어 있고 미래를 지향하고 있는 역사로 이해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이 세계의 영원한 질서나 구조를 찾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예기치 못한 새로움과 함께 불러 일으키는 미래를 지향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역사 이해는 고대근동의 순환적인 시간이해와 희랍의 주기적인 원형운동으로서의 역사이해와는 다르다. 이스라엘은 현상 세계의 배후에 있는 신적인 질서나 구조를 알지 못하였다. 이스라엘의 관심은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것의 성취에 있었다.
또한 예수의 운명 속에 선취된 역사의 미래는 완전히 실혐되어 없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의 세계가 지향해야 할 목표로 존속한다. 그러나 불트만은 예수의 사건이 지니고 있는 미래의 차원을 인간의 본래성으로 돌아오기 위한 개인의 신앙적 결단으로 폐기시킨다. 불트만은 묵시문학의 종말론을 구약성서에 있어서 이질적인 요소로 보기 때문에 종말론의 미래적 차원을 신앙적 결단의 현재에로 폐기시켜 버린다. 그러나 판넨베르그에 의하면 묵시문학의 종말론과 신약성서의 종말론은 구약성서의 역사의식과 모순되지 않는다. 예수의 인격에 대한 결단을 통해 종말의 결단이 선취된다고 하여 종말론의 미래성, 역사의 미래적 차원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계시로서의 역사와 역사적-비판적 연구 : 판넨베르그에 있어서 역사는 ⑴나사렛 예수의 운명 속에 미리 앞당겨 완성된 하느님의 간접적 자기계시를 뜻하며, ⑵약속과 성취의 구조 하에서 이루어지고 있으며, ⑶우연성과 개방성을 보유하는 동시에 전체적 통일성과 연속성을 가진 보편사로 이해되고 있으며, ⑷나사렛 예수의 운명 속에 선취된 미래를 지향하고 있는 과정으로 이해되고 있다. 즉 “신성의 특별한 현현과는 달리 역사의 계시는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모든 사람에게 개방되어 있다. 그것은 보편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역사의 사건들은 그 자체 속에 하느님을 계시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고, 그 자신의 언어를 통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하느님의 계시를 깨닫도록 한다. 그러므로 역사의 사건들은 자연적인 눈, 곧 이성을 가진 사람에게는 누구든지 하느님의 자기계시로 인식될 수 있다. 즉 역사 속에서 하느님의 계시를 발견하기 위해 신앙이라고 하는 특별한 눈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역사를 신앙이라고 하는 전제 없이 자유롭게 인식할 때 우리는 그 속에서 하느님의 계시를 발견하고 신앙을 얻게 된다. 왜냐하면 사건은 계시의 인식으로 “이끌어 가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간접적 자기계시로서의 역사는 역사적-비판적 연구 대상이 될 수 있으며 이 연구를 통하여 그가 지닌 계시의 성격이 검증될 수 있다.
계시로서의 역사가 역사적-비판적 연구를 통하여 그의 계시적 성격을 검증받을 수 있다고 말하는 동기는 다음과 같다. ⑴이 동기는 계시와 기독교 진리의 보편타당성을 회득하자는 데에 있다. 현실의 역사는 역사적-비판적 연구 대상이 될 수 있으나 계시는 이러한 연구 대상이 될 수 없다고 하는 것은, 계시와 그 계시에 근거한 기독교 신앙의 진리도 보편타당성을 상실하게 한다. 그러나 계시, 곧 신앙의 근거가 역사적-비판적 연구 대상이 될 수 있고 그의 계시적 성격을 검증받을 수 있다고 할 때, 계시와 이 계기에 근거한 신앙의 진리는 보편타당성을 얻게 된다. ⑵이 동기는 신앙의 근거가 그 자체 속에 있지 않고 역사적-비판적 연구에 의하여 확실한 것으로 검증될 수 있는 역사적 사건에 있는 것임을 주장하고, 그리하여 신앙의 확실성을 확보하며 나아가서 신앙과 인식, 신앙과 이성의 대립을 극복하자는 데에 있다. 기독교 신앙은 역사적 사건에 대한 지식을 전제로 하고 있으며, “이 지식은 이성의 일이다.” 이 전제의 확실성은 “신앙의 결단”을 통하여 획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성의 판단”을 통하여 획득할 수 있다. 예수의 부활은 분명히 “역사적 사실”이며 초대 공동체의 케류그마는 이 역사적 사건으로부터 생성되었다. 그러므로 부활의 사건에 근거하고 있는 기독교 신앙은 이성과 대립되지 않는다. 신앙을 위하여 이성이 희생될 필요가 없다. 사실에 대한 이성의 인식이 “신앙으로 대체되어서는 아된다.” 오히려 그것은 신앙의 전제이다.
판넨베르그에 의하면 계시의 성격은 신앙을 통하여 비로소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계시의 사건 그 자체에 있으며 그것은 “원칙상” 역사적-비판적 사건으로 검증될 수 있다. 그러나 나사렛 예수의 사건 속에 “사실상” 계시의 사건을 발견하는가, 발견하지 못하는가는 별개의 문제이다.
판넨베르그의 역사 이해의 문제점 : ⑴역사로서 나타나는 계시에 대한 인식에 있어서 판넨베르그는 신앙이란 전제를 배제한다. 역사에서 하느님의 자기계시를 이성에 의하여 얻는 다고하나, 어떤 역사적 사건이 하느님의 약속의 성취라는 것은 이미 하나의 신앙이다. 신앙의 확실성은 신앙이 근거하고 있는 사건 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그러나 부활의 사건의 사실성은 역사적-비판적 연구를 통하여 검증될 수 없다. 그러므로 그의 역사이해는 이미 기독교 신앙을 전제로 하고 있다. ⑵이스라엘의 역사와 나사렛 예수의 역사, 나아가서 세계의 역사가 역사적-비판적 연구를 통하여 하느님의 간접적 자기계시로 검증될 수 있다면 우리는 더 이상 신앙을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 이성의 역사적 검증이란 이성 자신의 법칙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며 만일 역사가 가진 계시의 성격이 이성의 역사적-비판적 연구에 의하여 검증된다면 계시로서의 역사는 결국 이성의 지배 하래 있게 될 것이고 더 이상 구원의 사건을 뜻하지 않게 될 것이다. 물론 신앙이 “나의 밖애 있는” 진리에 근거되어야 한다. 그러나 신앙이 신앙 이전에 주어진 지식을 통하여 근거되어야 한다는 그의 견해는 인정될 수 없다. “신앙만이 하느님의 권리를 인정할 수 있으며, 신앙만이 하느님을 하느님 되게 하며,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인식하기 때문에 하느님은 신앙을 일으킨다.”(윙엘)  물론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이성과 능력 없이는 신앙할 수 없다. 그러나 신앙 없이 우리 자신의 이성과 능력으로 이 신앙의 근거를 인식할 수 없다. 이 인식은 신앙의 내용으로부터만 근거될 수 있고, 그럼에도 신앙의 내용은 신앙을 근거시키는 나의 밖에 있는 진리이기 때문에, 신앙은 그의 ‘내용’ 또는 ‘대상’의 인식에 있어서 중단될 수 없다. ⑶판넨베르그 자신이 말하듯이 역사적-비판적 연구는 역사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물의 유사성 내지 동일성을 전제하고 있으며 이것을 그의 원리로 삼고 있다. 즉 이스라엘의 역사, JX의 역사와 일반 세계사는 상호 동질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느님은 JX 안에만 계시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으며, “하느님이 누군지는 그리스도의 사건으로부터 비로소 말해질 수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 하느님의 본질은 오히려 JX 없이도 생각될 수 있지 않은다 ? ⑷판넨베르그의 이론 전개에 있어서 우리는 하나의 논리적 모순을 발견한다. 그는 역사가 지닌 계시의 성격은 역사적-비판적 연구를 통하여 인식될 수 있다고 말하면서 또한 인식될 수 없다고 말한다. JX의 사건이 절대적 계시라는 확실성을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다고 말하면서 또한 신앙하는 자의 “신뢰”에 근거한다고 말한다. 모든 인식은 보편타당성을 얻기 위하여 역사적-비판적 연구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또한 인간이 자기의 이성과 능력을 가지고 얻을 수 없는 인식이 있다고, 즉 하느님 인식이 있다고 말한다. “진리”는 “자명하며” “자명한 것으로 기술될 수도 있다”고 말하면서 “과거의 사건에 대한 우리의 지식의 개연성”을 말한다. ⑸그에 의하면 역사의 모든 사건은 “하느님의 역사적 행위”이며 하느님의 간접적 자기계시이다. 그렇다면 악도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인가 ? 그리고 역사의 모든 것이 하느님의 역사적 행위요, 간접적 자기계시라고 말할 경우 역사의 모든 것은 신적인 것으로 정당화될 수 있다. ⑹그의 역사이해에 있어서 역사의 새로운과 미래성 그리고 역사의 참된 개방성이 읹정되고 있는지 분명하지 않다.(몰트만) 역사 전체의 완성이 예수의 운명 속에 미리 앞당겨 일어났다면, 그리고 JX의 계시가 역사 전체가 지닌 계시의성격의 선취를 뜻한다면, 역사는 예수의 “운명” 속에 미리 앞당겨 일어난 것의 반복에 불과할 것이다. 따라서 역사는 근본적으로 새로운과 미래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개방된 것이 아니라 반복되고 폐쇄된 것을 의미할 것이다. 사실 판넨베르그가 말하는 미래는 현존하는 세계에 대하여 새로운 미래가 아니라 현실 속에 내재하고 있는 미래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미래에 대한 하느님의 약속은 종말론적인 새로움에 대한 약속이 아니라 동일한 것의 반복을 약속할 뿐이다. 따라서 약속을 뜻하는 하느님의 계시는 바로 이 세계의 역사 자체를 뜻하며 이 역사 자체를 정당화 내지 신격화시켜 주는 것에 불과할 것이다.
이러한 문제점을 가진 그의 역사이해는 이 세계에 대한 하나의 새로운 해석에 불과하며 JX의 계시로부터 이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지기 어렵다. 그의 역사신학은 희랍철학의 우주론적 사고방식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몰트만) 판넨베르그에 있어서 엄밀한 의미에서 새로운 미래에 대한 하느님의 약속은 부인되기 때문이다. 결국 그가 말하는 그리스도의 계시는 인간과 세계의 현실을 희랍철학의 로고스적인 구조로 해명하는 것에 불과하며 근본적으로 약속의 성격과 종말론적인 성격을 가지고있지 않다.
 
희망의 신학 -- 불트만의 실존주의 신학을 거부하고, 역사와 사회에 관심을 둔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근거하여 미래와 희망에 초점을 두는데, 미래의 약속에 대한 희망이 신학의 토대와 출발점이다.
몰트만(1926-) : 오늘의 과학 기술 문명의 내적 동인인 진보신앙과 미래에 대한 낙관주의는 세계대전, 산업을 통하여 착취되었고 파괴된 자연의 생태학적 위기로 말미암아 회의의 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신학이 하나님의 메시지를 인간의 내면적 자기 경험의 문제, 인간의 주체성의 문제에만 관련시키는 것은 무의미하다. 이러한 신학적 성찰에서 몰트만의 희망의 신학과 정치신학이 형성되었다.
종말론 : 신약성서(막 1:15; 눅 11:20)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이 세계의 종말은 이미 왔다. 예수는 임박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였고, 이것을 선포한 예수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태동되어 있음을 사람들은 보았다. 그리하여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던 분이 선포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재림의 지연으로 종말론은 가시 세계의 마지막에 일어날 초자연적인 신비한 일들을 다루는 이론으로 생각되었다. 이에 반하여 몰트만은 기독교 신학과 신앙은 철저히 종말론적인 것이라고 하면서 종말론을 신학의 중심으로 삼는다. 그것은 이미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새로운 세계에 대한 희망과 기다림을 그 주요 성격으로 가지고 있다. 따라서 신앙은 하나님의 새로운 세계에 대한 희망과 기다림을 뜻하는 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게계 전체 속에서 실현되기 시작한다.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시작된 종말은 자기의 주어진 상태 속에서 자기를 절대화시키려는 본성을 가진 인간과 그의 세계를 역사화시키는 추진력이며, 이러한 의미에서 종말론은 인간의 세계에 대하여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모든 기독교적인 선포와 모든 기독교적인 실존과 모든 교회의 서역은 종말론적인 것이다.” 기독교 신학의 가장 현실적인 문제는 “미래의 문제”인데, 이미 주어진 세계로부터 우리들이 상상할 수 없는 것, 즉 성서에 나타나는 “다른 것”은 “새로운 것”의 약속으로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희망의 신학 : “약속의 선취자” 내지 “약속의 선행”을 뜻하는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세계 속에 하나님을 대신하여 오신 하나님의 “대리자”이다. 그의 삶과 부활은 하나님께서 이 세계의 주가 되셔서 이 세계의 모든 것을 다스리는, 그리하여 더 이산 “죽음이 없고 슬픔도 부르짖음도 고통ㄱ도 없을” 하나님의 미래가 앞당겨져 시작되었음을 뜻한다. 그러나 이 미래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여전히 그것은 미래에 완성될 약속으로서 세계사의 목표가 된다. 이 하나님의 나라(현실)을 희망하는 것이 기독교 신앙이다. 예수의 부활에 있어서 기독교 신앙은 “하늘의 영원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의 십자가가 서 있는 땅의 미래를 인식한다. 그분 안에 인간은 바로 그것을 위하여 자기의 생명을 바친 그 인간성의 미래를 인식한다. 그러므로 십자가가 그에게는 이 땅의 희망이다.” 따라서 기독교 신앙과 교회는 인간과 그의 세계로 하여금 주어진 현재 상태에 정지하지 않고, 하나님의 세계를 지향하여 그 자신을 언제나 새롭게 변화시키고 개혁시켜 나가도록 하는 내적인 힘이다. 즉 하나님의 미래를 향한 역사의 추진력이요 원동기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역사의 의미가 성취되는 도상에 있으며 성령의 역사 가운데에서 이루어지는 “새로운 창조의 미래의 시작이요, 도래”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교회의 선포는 “말씀가운데에서 하나님의 미래가 이미 도래함”을 뜻하며,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은 “이미 희망의 표징”이다. 새로운 공동체로서의 교회는 “성령과 새로운 창조의 계시”이다.
정치신학 : 전통적으로 신학이나 철학은 이 세계가 무엇인가를 단지 해석하기만 하였다. 이에 반하여 몰트만은 기독교 신학은 현재 우리에게 주어진 세계가 그의 현 상태에서 정지하거나 절대화 되지 않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하나님의 세계로, 하나님의 현실로 변화되고 전진하는 세계가 되도록 해야한다는 것이다. 성서에서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보여주시고 약속하신 그 세계,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한 자녀로서 자유롭고 평등하게, 한 마디로 말하여 인간답게 살 수 있으며,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루어져가는 세계가 되도록하는 것이 정치신학의 근본 취지이다. 여기에서는 세계의 모든 현실에 대한 비판적인 자세가 필요하다. 이 비판은 인간을 비인간화시키는 모든 요소를 그 세계의 모든 영역에서 제거함으로써 보다 더 인간적인 세계, 하나님의 현실에 가까운 세계로 변화시키기 위하여 필요한 비인간적인 요소에 대한 부정적인 자세를 뜻한다. 기독교는 그 세계에 적응하고 동화되어 자기의 동일성을 상실하기보다, 오히려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로서 그 자신을 언제나 구분하고, 인간의 세계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세계를 향한 “참된” 발전을 가능케 하고자 한다. 이 세계 속에 있는 모든 것은 상대적인 것이므로 어떤 질서에 대한 우상숭배도 배격하며, 모든 질서에 있어서 인간의 건전한 자유와 의와 인간성이 실현되어야 한다. 이는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인간의 해방을 요구하므로, 몰트만의 정치신학은 “해방의 신학”이다. 여기에서 해방은 경제적 차원, 정치적 차원, 인종적 문화적 소외의 악순환으로부터의 해방, 자연세계의 해방, 삶의 무의미성과 하나님의 버림받은 상태의 악순환으로부터의 해방을 말한다. 그의 정치신학은 서구의 교회로부터 추방되어 무신론적 인본주의자들에게 넘어간 기독교 본래의 유토피아니즘을 회복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가 다스리는 밝은 세계를 이 땅 위에 실현하자는 기독교의 사회적인 의식의 발현이다. 이때에 기독교는 “민중의 아편”이 아니라 민중의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하여 노력하는 “민중의 기쁜 소식”이다.

맑스의 종교이론
1. Marx 종교이론의 이해와 비판을 위한 전제 : ① 상황의 이해 : Marx - Marxism - USSR  ==> Jesus - X-ity - Church  ② Marx의 관심 : 사회경제적 변혁,종교의 역할과 기능,종교의 본질,생성,미래  ③ Marx의 종교비판의 의미 : “선행조건”, “이론 투쟁의 장”, 모든 비판(지상의 권리,신학,정치)의 전제 -- 종교를 철학적으로 비판, 종교와 철학을 정치적으로 비판, 종교․철학․정치․이데올로기를 경제적으로 비판(K. Löwith)
2. 종교의 본질  : ① “신은 인간의 영상이고 투사이며, 종교는 인간의 생산품이고 인간의 소외이다.”, “종교가 발생되는 방법과 발생의 조건을 구분할 수 있는 한, 사회 발전의 특정 단계에서 종교적 신념의 내용은 소외된 인간의 자아 의식과 상상력의 자발적인 행위에 의해 투사된다고 말할 수 있다.”  ② 투사된 종교적 신념의 성격 -- 물적 생활 과정의 승화물, 형이상학․윤리․법과 마찬가지로 이데올로기의 한 요소, 의식의 영역에 한정된 소외의 파생적 원천, 사회 형태에 의해서 결정되는 반영물 또는 일련의 반영물들, 불합리, 물적 생산 단계에 기반을 둔 긴요하지 않은 것
3. 종교와 사회적 소외(발생) : ① 노동의 분화가 이루어져 있는 실제적인 물적 행위는 사회경제적 모순과 소외 상태를 야기시키며, 이 양자는 ‘전도된 세계 의식인 종교’가 발생하고 유지되는 조건이 된다. 그러나 이 조건은 충분 조건이지 필요 조건이 아니다. -- “종교는 억압받는 피조물의 한숨이고 냉혹한 세계의 감정이며, 영혼이 없는 조건들의 영혼이다.” ② 자연 종교는 자연의 위력에 대한 동물적인 반응이며, 사회적 종교(신학)은 사회 경제적 삶의 모순에 대한 의식의 반영이다. ③ 종교와 경제 비판 : 신과 화폐의 형이상학적 공통성
순수하게 개념으로만 존재한다. 인간의 노동과 삶의 소외된 본질으로서 인간을 지배하고 인간은 이를 숭배한다. 종교와 부는 “인간 객체화의 소외된 세계”에 불과하다. “금속화폐의 물신적 숭배자들”은 인간의 노예 상태의 절정이다.  개념에 한정되어 있고, 소외의 상태에서 투사된 이러한 힘들이 신앙에 의해서 실체화되어 인간의 지위를 하락시키고 인간을 노예화시키는 것이 바로 신이다.  ④ 종교의 소멸 : 종교․법률사회․질서․정치에 대한 비판 ==> 혁명적 실천.  “종교에 대한 비판은 인간이 인간을 위한 최고의 존재라는 가르침으로 끝을 맺고 따라서 인간을 격하하고, 예속시키며, 고립하고, 비열한 존재로 만드는 모든 관계를 전복하라는 절대적 명령으로 끝을 맺는 것이다.” 분업과 사유 재산을 폐지하는 혁명으로 정치․경제․사회적 해방과 인간적 해방을 이루면 지배 계급의 억압 수단이던 국가와 인간의 소망의 투사인 종교는 사라질 것이다.
5. 종교의 사회적 기능 -- Marx의 종교에 대한 비판과 증오의 근원 : ① 자발적 기능 : 피착취적 욕구에 부합한다. 고통을 완화시켜 주는 위안적 기능(민중의 아편, 종교의 자기기만)  ② 조작적 기능 : 사회 도덕과 가치를 정당화하는 裁可的 기능(계급 사회에서 위선적이고 보수적 기능) -- 가장 근본적이고 “정적인” 단계의 도덕은 인간의 의식이나 사고의 산물이 아니고, 단지 해당 인간 사회가 전통적으로 인정한 관습이나 습속의 총체에 불과하다. 제도화된 종교의 위선,착취,사기적인 성격  ③ 반영적 기능 : 사회의 하부 구조가 이데올로기에 반영되는 과정을 드러내 주는 기능 - 지배계급의 이익이 허구적 개념으로 둔갑하고 경제적인 갈등이 이데올로기적 투쟁으로 다시 나타난다.  ④ 소외시키는 기능- 종교가 실제적인 고통의 표현이면서 동시에 “실제적인 고통에 대한 저항”이라는 점. 지적 기능- 종교가 “이 세계의 일반화된 이론, 그것의 전반적인 개요”, 그리고 “그것의 신성한 보완물”이라는 점.
 
기독교와 맑시즘과의 관계
연구방법 서설 : 과거에 대한 우리의 관점은 우리 자신이 현재 어떻게 존재하는가에 따라 결정되 듯이, 맑스의 사유는 발전하고 변화하는 사유이며 모순없는 세계를 염두에 둔 사유가 아니라 역동적으로 현실의 모순을 반영하고 있는 사유이다. 따라서 맑스의 원전을 떠날때는 그의 사상의 주조음을 놓치지 않토록 주의해야 한다.
실천적 의도에서 제시된 철학으로서의 맑스주의 : 맑스에게 있어서 유물론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인간에 의해 형성되는 현실적 실재를 강조하는 것, 따라서 자연을 강조하고 인간의 노동과 인간의 노동조직을 통해 표현되는 인간의 생명활동을 강조하는 것을 뜻한다. 철학의 체계 곧 체계로 귀착되는 철학은 이러한 유물론에 의해 폭파되므로 사유와 이론은 단절을 겪으면서 경험과 감각적 직관과 실천적 행위를 통해 끊임없이 수정되어야 한다. 비판적 유물론의 사상적 구조는 유한한 인간의 사상적 구조이며, 이러한 사상적 구조는 사회의 역사적 과제들로부터 생장한다. 비판적 유물론은 불투명한 경제적 결정론의 빈틈없는 창살로부터 인간을 탈출시키고자 한다.
맑스는 포이에르바하와 헤겔의 비역사적이고 관념적인 자연과 인간 이해를 비판하면서, 활동적이고 스스로 움직이고 변화시키는 존재로서의 인간과, 인간에 의해 끊임없이 형성되는 외적인 자연과 실천을 통해 표현되는 인간의 자연을 말한다. 인간과 인간의 노동,자연과 그 질료를 철학의 주제로 삼고, 역사는 인간의 실처과 결합되어 있고 인간은 실천을 통해 의미 자체를 산출하고 인간 자신이 역사를 의도적으로 형성한 정도에 따라 의미를 인식한다고 한다.
맑스의 ‘비동일성의 이론’이라는 철저히 상황적인 철학과 마찬가지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의 고난에 나타난 ‘비동일성의 종교’에서는 궁극적이고 먼 미래를 위한 활동이 아니라 일상적인 염려나 문제라는 장에서 대화와 행위를 통한 활동을 볼 수 있다. 즉 예수와 맑스의 활동은 모두 사회경제적 현실에 깊이 뿌리박고 있다. 그러나 과학적 접근을 통해 현실을 지배하려는 맑스의 시도는 현실 속에서 방황하는 하느님의 피조물을 다루는 예수의 태도보다 훨씬 엄격하고 오만하다.
과학적 사회주의 : 사회주의는 과학적 사회분석의 결론이며, 공산주의는 기존의 상황에서 운동의 계기를확보하면서 기존의 상황을 지양하는 현실적 운동일 뿐이다라고 하면서, 공상적 유토피아의 지향을 비판하고 현실과 과학을 강조한다. 에른스트 블로호가 맑스주의 속에 흐르는 한류라고 말한 ‘과학적 사회주의’는 혁명적 관점에서 현실의 조건들을 매우 엄밀하게 파악하고 현실의 원리를 엄격하게 가르치는 태도를 의미한다. 한류는 도덕적 충동이나 양심적 동정인 난류와 서로 합쳐짐으로써 비로소 맑스주의의 분위기를 조성한다. 혁명을 의도하는 정밀한 환상과 과학적 현실 분석이 바로 이러한 분위기를 이루고 있다.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에제”의 핵심개념은 “실천”이다. 의식이 삶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삶이 의식을 규정한다. 이념 자체는 사회적인 산물이고, 인간의 실천적인 감각적 활동에서 비롯되었다. 관습과 자연과 타인에 의해 제약된 개인의 실천이 역사의 과정으로 나아가려면 개인적 실천이 매개되고 변화되어야 한다. 역사성과 변혁가능성을 드러내는 실천은 모든 행위의 주체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밝힌다. 사회적 실천과 그 결과가 진리의 규준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현실 속에서 진리를 실현할 수 있는 여지가 없는 경우에도 진리의 이념을 강조해야 할 의무와 권리가 우리에게 없는 것일까 ?  인간은 역사의 창조자로서 하느님으 동역자가 된다. 그러나 인간은 하느님을 향해 부르짖음으로써 죄(정치적으로 사회심리학적으로 해석되어야 할)와 죄의 노예상태를 깨닫는다.
경제의 우위성 : 인간의 자기소외 일반 - 인간의 정치적 자기소외 - 경제적 자기소외 : 사회의 경제적 구조를 형성하는 생산력과 생산관계가 토대이며,국가제도와 법체계와 이데올로기의 영역은 상부구조로서 이 토대에 속한다. 즉 사회적인 의식형태들은 이 토대에 조응하고, 물질적인 생산양식은 사회적 삶의 사회적,정치적,정신적 과정을 제약한다. “경제”는 물질적 재화의 생산뿐만 아니라 이러한 생산이 일어나는 사회적 관계들의 창조를 의미하기도 한다. 따라서 경제적 요인 의 전면적 지배로부터의 인간 해방은 이미 주어져 있는 여러가지 조건들을 전제하고 있는 공산주의적 경제를 토대로 할 때 비로소 실현될 것이다.
이러한 경제의 우위성은 경제적 결핍의 상황에 근거를 두고, 인간이 자기의 노동을 새롭게 지배하고 생산과 분배를 공동으로 계획할 때 비로소 사라진다. 초대 교회의 분배공산주의와 바닥공동체의 정치의식에서 분명히 드러나는 것은 그리스도교의 영성이 경제적 우위성을 부정하지 않고 오히려 그 위에 세워져 있다는 사실이다. 이간의 빈곤 곧 인간의 구체적 삶의상황은 예수와 초대 공동체에 있어서는 항상 말과 행동의 출발점이자 연결점이었다.
노동의 개념 : 성서에서 노동은 낙원에 속하는 것, 인간이 살아가는 동산을 경작하고 보존하는 것이며 동시에 저주이기도 하다. 철학적으로는 인간의 주체적 자기 표현으로서의 노동, 사회적 관계로서의 노동, 자연과의 대결로서의 노동을 말할 수 있다. 노동은 창조적이고 사회적인 존재인 인간의 특징이지만, 노예노동,농노노동,임금노동으로서의 노동은 노동자의 인격을 떨어뜨리고 인간 노동을 왜곡해 왔다. 자본가는 노동수단과 그가 구입한 노동력을 결합시킴으로써 노동을 착취하고 잉여가치를 창출한다. 따라서 노동자는 계약체결을 위한 자유와 자신의 생존보존을 위한 수단들로부터의 자유를 빼긴다. 노동은 자본을 창조하고 자본의 자기실현을 가능하게 하는 동시에 기 자신을 임금노동의 형태로 창조하게 된다.       
해방의 프로젝트 : 역사적으로 실존하는 모순들을 가진 자본주의가 폭력에 의해 성립되었던 것처럼, 자본관계도 폭력에 굴복할 수밖에 없을 것이며 폭력에 의해 공중으로 산산히 부서질 것이다. 사회경제적 위기들은 혁명적 폭력의 출발점이요,그 지렛대이다. 개혁을 위한 투쟁의 종국적 목표는 철저한 변혁 곧 혁명일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를 옹호하는 부르조아적 독재에 대신하여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일시적으로 지배한다. 그러나 현재는 인민에 의해 쟁취된 “혁명들”은 쉽사리 인밍에 대한 관료적 독재로 변질되었다. 소위 사회주의 국가에서 맑스주의는 억압적인 체제의 교조적 상부구조로 간주되고 있으며, 사회주의적 이념들은 신뢰성을 완전히 상실하였다.
맑스의 종교비판에 대하여 : 포이에르바하에게서 신으로서의 신은 인간적 완전성의 총괄개념이다. 따라서 인간이 신에게 소비한 모든 것은 인간에 대한 경의와 사랑을 통해 마땅히 돌려져야 한다. 맑스는 종교의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기능을 설명하고자 했다. 이 세계의 현실적 변혁을 통해서만 가난한 자들에게 종교가 불필요해질 수 있을 뿐이고 종교를 단순히 관념적으로 지적으로 파괴하기만 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강조한다. 사회주의 혁명의 해방적 활동을 통해 인간이 더이상 소박하게 생각하지 않고(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타율적 지배 = 신에 의존하지 않고) 공동체적으로 사유하고 계획할 때, 비로소 종교를 통해 반영되는 타율적 권력은 소멸될 것이며, 이와 더불어 종교적 반영물 자체도 소멸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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